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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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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베트남 전쟁
Chiến tranh biên giới Việt Nam – Campuchia
សង្គ្រាមកម្ពុជា-វៀតណាម
Cambodian–Vietnam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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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에 입성한 베트남군
날짜 <colbgcolor=#fff,#191919> 1978년 12월 21일 ~ 1989년 9월 26일[1]
장소 캄보디아, 베트남 남부, 태국 동부
결과 베트남의 군사적 승리
영향 민주 캄푸치아의 멸망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수립
캄보디아국 수립
킬링 필드의 종식
중월전쟁
1989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점령
교전 국가 및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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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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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깃발|]][[틀:깃발|]][[캄푸치아 인민공화국|]] 불명
피해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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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깃발|]][[틀:깃발|]][[민주 캄푸치아|]] 전사 5만 ~ 10만 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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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깃발|]][[틀:깃발|]][[베트남군|]]
전사 2만~2만 5,300명[3]
부상 3만명[4]~3만 5,500명[5]
\ [[틀:깃발|]][[틀:깃발|]][[캄푸치아 인민공화국|]] 불명
1. 개요2. 배경3. 경과
3.1. 군사 측면3.2. 외교 측면
4. 결과5. 영향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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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8년부터 1989년까지 베트남 민주 캄푸치아 사이에서 진행된 전쟁. 넓게 보면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일부로 간주된다.

2. 배경

1975년 이전까지 북베트남 크메르 루주는 우호적이었는데 같은 공산주의 성향으로서 둘 다 친미 정권인 베트남 공화국 크메르 공화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내전 당시 크메르 루주를 원조하고 캄보디아 동부에 호치민 루트를 설치하여 남베트남의 베트콩을 지원했지만 겉으로는 우호적일지 몰라도 속으로는 서로를 불신하고 있었다.

중국은 소련과는 달리 독자노선을 걸으며 마오쩌둥 지도 아래 인근 약소국들의 영토를 호시탐탐 노렸고 북베트남은 중국의 지원은 받았지만 지도자인 호찌민과 북베트남 상층부는 중국을 경계하면서 북베트남의 관계가 시간이 갈수록 경색되었다. 그렇게 친중적인 크메르 루주와 북베트남의 관계도 자연히 악화되었고 크메르 루주도 베트남을 증오할 이유가 넘쳐났다. 과거에 베트남이 캄보디아 동남부의 코친차이나를 병합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캄보디아 대부분을 통치하여 캄보디아의 민족성을 말살하려 시도한 적이 있었기 때문애 그러므로 크메르 루주는 코친차이나를 캄보디아의 고토로 여기고 필히 수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베트남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통합하여 거대한 인도차이나 연방 건설을 시도한다고 경계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과 캄보디아 내전이 모두 끝났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점령하여 흡수 통일했고 크메르 루주는 론 놀의 크메르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캄보디아 전역을 장악했다. 크메르 루주는 정권을 장악한 그 순간부터 베트남과 국경분쟁을 벌였고 그 격렬함은 전면전에 준하는 지경이었다. 베트남 연구자에 의하면[6] 1977년부터 1978년 12월 전면침공 직전까지 베트남군은 총 3,000명이 전사하고 5,500명이 부상당했으며 1977년 6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캄보디아군도 3만 8,563명의 사상자와 5,800명의 포로를 냈다. 베트남측 소스이므로 자기 피해는 축소하고 상대 피해는 과장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건 간에 베트남도 최소 8,500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게다가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군은 수시로 베트남 영토를 침입하였고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으로 정비 및 내부 숙청하느라 바빴으며 크메르 루주 뒷배로 중국이 있었기에 자칫하면 중국 참전이라는 우려가 있었기에 수비적이면서 최대한 무시했으나 크메르 루주가 양민 3만명을 학살하는 미친 짓을 벌이자 결국 분노가 폭발한 베트남은 중국과 적대관계가 되도 상관없으니까 캄보디아를 쳐서 크메르 루주를 무너뜨리고 캄보디아에 새로운 신정부를 수립하자는 결정을 베트남 공산당의 상부에서 내렸고 결국 크메르 루주 축출 및 친월 정권 수립을 목표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3. 경과

3.1. 군사 측면

1978년 12월 25일, 중포병과 공군의 지원 하에 13개 사단으로 구성된 베트남군 15만 명과 반 크메르루주 세력들로 구성된 친베트남 공산주의 반군 조직인 캄푸치아 국가민족연합 전선(FUNSK)이 캄보디아를 전면 침공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전쟁에 대한 이해도와 숙련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버리고 간 무기[7] 등으로 무장까지 한 베트남군에게, 크메르 루주는 2주만에 병력의 절반을 잃는 참패를 당했으며 이에 베트남군은 크메르 루주 정권의 거점지인 프놈펜으로 진격하였다. 한편 이에 놀란 크메르 루주 지도부는 급하게 수도를 탈출하여 캄보디아 서부 지역으로 도주했고 이듬해 1월 7일 베트남군은 무주공산이 된 프놈펜을 점령했다. 그리고 다음날 베트남의 괴뢰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베트남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여 17일에는 태국 국경과 맞닿은 캄보디아 남서쪽 코콩(ក្រុងខេមរភូមិន្ទ Koh Kong)을 함락하여 캄보디아 전역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이것은 베트남의 베트남 전쟁으로 가는 첫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에서 신속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얼마 안 가 캄보디아와 국제사회의 반발에 부딪혀야 했다. 정글로 쫓겨난 크메르 루주는 물론이고 전 국왕 시아누크가 조직한 중립성향 반월 조직 '민족통일전선(FUNCINPEC)', 전 수상 손 산이 조직한 반공 성향 반월 조직 '크메르인민민족해방전선(KPNLF)'이 괴뢰정부와 베트남에 맞섰는데 그들 중 숫적으로 가장 거대한 조직은 역시 크메르 루주로 1984년 당시 3만~5만의 병력을 자랑했으며 그 뒤를 KPNLF(1만 2천~1만 5천)와 FUNCINPEC(5천)이 차례로 이었다. 베트남은 1981년 말부터 태국-캄보디아 국경지대에서 반월 빨치산의 게릴라전에 시달리게 되었다. 캄보디아의 날씨는 크게 5월~10월 사이의 우기, 그리고 11월~4월 사이의 건기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베트남군은 건기에 공세를 수행했고 크메르 루주는 우기에 주도권을 잡았다.

1982년 베트남군은 캄보디아 북서쪽의 프놈말라이(Phnom Malai)와 남서쪽의 카르다몸 산맥(ជួរភ្នំក្រវាញ Cardamom Mountains)의 크메르 루주 기지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이렇게 서쪽 국경지대가 전쟁에 빠져들자 자연히 이 지역에서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통치력도 약화되었다. 이에 베트남은 1984년부터 대대적인 반월조직 토벌에 착수했다. 7월 19일 베트남은 국경지대 게릴라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해 K5계획(K5 Plan)을 실행하였다. 이 계획은 게릴라를 은폐하는 열대림을 대거 벌채한 다음 그 자리에 철조망과 참호를 설치하고 대전차 지뢰와 대인 지뢰를 살포하는 것이었다.[8] 11월에는 6만명의 병력이 동원된 대규모 작전을 벌여 크메르 루주와 KPNLF의 박멸을 시도했다. 이듬해 3월 베트남군은 양대 조직의 주요 기지를 모두 점령하고 병력의 1/3을 격멸했음에도 불구하고 게릴라전은 이어졌고 심지어 1987년에는 베트남과 가까운 중부 지역에서도 게릴라들이 활동했으며 베트남군이 국경지대의 크메르 루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인근의 태국군과 끊임없이 교전이 벌어졌다.[9]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괴뢰정권을 수립하고 캄보디아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확대 및 군사적 우위를 누리려고 했지만 그 댓가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캄보디아 주둔군을 철수했다간 자칫 자신이 세운 괴뢰정권이 무너지고 크메르 루주의 재집권으로 이어질 염려도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철군할 수도 없었다. 전면전은 1979년 1월에 사실상 끝났지만 주둔군은 오히려 20만까지 늘어났고 1982년 일방적인 철수를 발표한 후에도 1984년 18만 명, 1988년 10만 명이 주둔했다. 게다가 중국 국경지대와 라오스에도 각각 25만 명, 4만 5천 명을 배치했다. 당연히 감군은 언감생심이었고 1987년에도 총 126만(육군 110만, 해군 4만, 공군 12만)에 달하는 대군을 유지했다. 베트남 경제는 캄보디아 전역 및 중국과의 국경분쟁과 그에 따른 막대한 군비지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실패와 국제적 고립으로 80년대 내내 정체되었다.

3.2. 외교 측면

국제사회는 소련 동구권, 인도, 라오스 등을 제외하면 베트남이 세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기존의 크메르 루주 정권은 중국의 강력한 지원 하에 정통 정부로 인정받아 외교활동에 나섰으며 베트남 전쟁의 적국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 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이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비난했다. 이미 베트남에 제재를 가하던 미국은 베트남을 가리켜 동양의 프로이센(The Prussia of the East)이라고 부르면서 깡패국가로 간주했고 UN의 다른 회원국들을 설득하여 베트남의 아시아개발은행 국제통화기금 가입을 저지했다. 이로써 베트남은 경제 복구 및 발전에 절실히 필요한 해외 자본에 대한 접근을 완전히 거부당했다. 중국은 중국대로 1979년 2월 17일 중국-베트남 전쟁을 일으켜 베트남을 위협했고 이 전쟁에서 군사적 패배를 겪은 후에도 지속적으로 도발을 일으켜 베트남에 큰 압박을 가했으며 미국, 태국과 함께 크메르 루주 세력을 지원하여 베트남의 서진을 경계했다.[10]

이렇게 주요 강대국과 주변국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다 보니 강대국 중 유일한 우호국인 소련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의존이 극심해졌다. 예를 들어 1984년 수출의 54.3%, 수입의 66.3%가 소련을 상대로 이루어지는 등 경제분야의 대소 종속화가 현저했지만 80년대부터 극심한 경제난을 겪던 소련은 막대한 대월 원조금 지출[11]에 진저리를 쳤고 급기야 1986년 우호국에 대한 원조 삭감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국내외적 위기가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캄보디아 전역마저 뜻대로 풀리지 않자[12] 현타가 온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한편 그해 12월 도이머이를 선언하여 개방에 나섰다. 1989년에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자치 능력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남은 주둔군마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26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4. 결과

베트남은 1989년 완전히 철군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붕괴했다. 캄보디아에는 노로돔 시아누크 훈센을 주축으로 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었고 1993년 군주제로 복귀했다. 실각한 크메르 루주 세력은 베트남이 철군하고도 10년 더 캄보디아 왕국 정부군과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집권 시기이던 1970년대 말 캄보디아에서 저지른 학살과 학정의 악명으로 인해 세를 잃었다. 그리고 1998년 크메르 루주의 최고 지도자였던 폴포트가 사망하면서 지도자였던 폴포트의 죽음으로 조직은 사실상 붕괴되어 이듬해인 1999년에 따목과 남은 지도부 인사들이 캄보디아 정부군에게 항복함으로서 몰락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베트남은 국력을 고려할 때 굉장히 비싼 대가를 치른 승리를 거두었다. 1978년 12월 이후 베트남은 최소 2만의 전사자와 3만의 부상자를 냈고 정부 예산의 1/3을 군비로 지출했다. 때문에 소련으로부터 최소 54억 달러에 이르는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의 피해 복구는 더뎠고 경제 성장은 80년대 내내 정체되었다.[13] 1986년 도이머이 정책을 도입하고 1989년에 철군한 후에야 베트남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누구보다도 캄보디아 국민이었지만 캄보디아 국민들은 경제는 물론 기반시설까지 반달리즘하며 폭정을 저지르던 크메르 루주를 싫어했으며 베트남군이 다가오자 쌍수들고 환영했다. 캄보디아는 이미 캄보디아 내전 킬링필드로 인해 보수적으로 잡아도 최소 200만의 사망자와 수십만의 난민이 발생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전쟁으로 피살된 캄보디아 양민은 아사자를 제하고도 20만에 달했고 난민이 된 사람은 75만에 달했다.

5. 영향

민주 캄푸치아는 중국의 우호국이었으므로, 베트남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세우자 중국은 격분하여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중국-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두 번의 전쟁을 겪어본 베테랑들이 많았던 베트남 예비군이 중국 정규군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히자, 하지만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내부도 힘든 중국은 허세만 잔뜩 부리며 후퇴하고 만다.

캄보디아를 장악한 베트남 군은 저항을 이어가던 캄보디아 군이 태국으로 도망가자 태국 국경을 침입하고 포격까지 퍼부었다. 이로 인해 태국도 베트남과 전쟁에 들어갔다. 북한은 베트남·캄보디아 둘 다 공산국가였기 때문에 어떻게 할까 고민…끝에 캄보디아를 지지했는데, 이에 대한 답변으로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전쟁 끝날 때 잡아뒀던 (주 남베트남) 대한민국 외교관 일행을 풀어주어 대한민국으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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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 자체는 1978년 12월 21일 베트남의 캄보디아 전면 침공으로 시작되었지만 실제로는 1975년에 민주 캄푸치아가 수립되자마자 국경분쟁이 일어났다. 하단의 사상자 정보에서 숫자가 들쑥날쑥한 이유는 양측의 정보공개가 불투명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전쟁 기간으로 잡는 시기가 추산자마다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2] Nicholas Khoo의 Collateral Damage: Sino-Soviet Rivalry and the Termination of the Sino-Vietnamese Alliance(2011)에 따르면 1975-1979년 사이 1만 5천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SIPRI 연감에 따르면 최소 5만명이 전사했다. 베트남의 추산에 의하면 1977년부터 1989년까지 최소 10만명이 전사했다. [3] Khoo(2011)에 따르면 1975-1979년 사이 1만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Thayer의 The Vietnam People's Army under Doi Moi(1994)에 따르면 1979년부터 1989년까지 1만명이 전사했다. SIPRI 연감에 따르면 전쟁에서 2만 5,300명이 전사했다. 베트남 국영 언론 베트남의 소리(VOV)에 따르면 캄보디아에서만 2만명이 전사했다. # Nguyễn(2004)이 추산한 1977년부터 1978년 12월까지 발생한 베트남군 전사자는 3,000명이다. [4] Thayer(1994)의 추산. 그러나 1979-89년 사이의 점령 기간만 포함하므로 이전에 발생한 부상자는 누락됨. [5] Nguyễn(2004)이 추산한 1977년부터 1978년 12월까지 발생한 베트남군 부상자 5,500명을 합산한 수치. [6] 베트남군 대령 응우옌반홍(Nguyễn Văn Hồng)의 Cuộc Chiến Tranh Bắt Buộc(2004) [7] 사실은 패망한 남베트남군의 것이다. [8] 하지만 지역 특성상 나무를 베어내도 어차피 1년만 지나면 다시 사람 키만큼 나무가 자라기 때문에 별 효과는 없었다고 하며 이때 대량으로 살포한 지뢰는 오늘날까지도 캄보디아인들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고 있다. [9] 교전 자체는 1979년부터 간헐적으로 벌어졌지만 1985년에 특히 빈번하게 벌어졌다. [10] 태국은 베트남의 목적이 최종적으로 캄보디아 뿐만 아니라 자국을 병탄하는 것이라고 보고 침공에 경기를 일으켰고 심지어 중국마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태국과 중국은 이념이 상극인데도 불구하고 이 캄보디아 문제 때문에 상호협력했다. 예를 들어 중국은 태국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게릴라에 대한 지원을 끊어 버리면서 태국에서는 우파 군부 세력들의 권력이 더욱 공고해졌다. [11] 그냥 군사원조 좀 보낸 정도가 아니다. 베트남은 소련의 원조 없이는 전쟁 수행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총 54억 달러가 베트남에 보내졌는데 1986년 베트남 GDP가 124억 달러였으니 사실상 소련 돈으로 전쟁한 셈이다. [12] 베트남은 크메르 루주 박멸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80년대 크메르 루주의 병력은 4만에서 5만에 달했다. 이 병력은 중국의 지원을 받았고 캄보디아의 농촌과 산촌에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아무리 베트남군과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군이 크메르 루주를 죽이고 죽여도 크메르 루주는 태국-캄보디아 국경지대의 난민촌에서 신병을 충원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말 크메르 루주 정권 시기의 잔혹한 학정을 경험했던 당시 캄보디아의 국민들과 베트남의 지원으로 정권을 잡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의 지도부 및 정부군의 인사들은 '나라가 멸망해도 우리 국민들 수천만명을 대량학살한 크메르 루주가 재집권하는 꼴은 죽어도 못보겠다, 전쟁 끝이 안나도 항쟁하자'라는 공감대 아래에 여러모로 한계가 부치는 상황에서도 크메르 루주와 싸웠다. [13] 1980년대 베트남의 1인당 GDP는 200~300달러에 불과했다. 물론 친베트남 정권 말기이던 1987년에 18달러였던 캄보디아에 비하면 높은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