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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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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
2003년 이가와 케이 ( 한신 타이거스) 사이토 카즈미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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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카와카미 켄신 ( 주니치 드래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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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스기우치 토시야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1998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신인 | ||||
사와자키 토시카즈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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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켄신 ( 주니치 드래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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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하라 코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2004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선수 (MVP) | ||||
이가와 케이 ( 한신 타이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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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켄신 ( 주니치 드래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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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모토 토모아키 ( 한신 타이거스) |
2004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투수 | ||||
이가와 케이 ( 한신 타이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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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켄신 ( 주니치 드래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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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다 히로키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2006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투수 | ||||
쿠로다 히로키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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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켄신 ( 주니치 드래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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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하시 히사노리 ( 요미우리 자이언츠) |
2004년 센트럴 리그 최다 승리 | ||||
이가와 케이 ( 한신 타이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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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켄신 ( 주니치 드래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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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다 히로키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모야나기 츠요시 ( 한신 타이거스) |
2006년 센트럴 리그 최다 승리 | ||||
쿠로다 히로키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모야나기 츠요시 ( 한신 타이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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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켄신 ( 주니치 드래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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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008 세스 그레이싱어 ( 야쿠르트 / 요미우리) |
2006년 센트럴 리그 최고 승률 | ||||
안도 유야 ( 한신 타이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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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켄신 ( 주니치 드래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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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하시 히사노리 ( 요미우리 자이언츠) |
2006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 | ||||
카도쿠라 켄 /
미우라 다이스케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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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켄신 ( 주니치 드래곤즈) 이가와 케이 ( 한신 타이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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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츠미 테츠야 ( 요미우리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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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타 히로시 (1994~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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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켄신 (1998~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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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토시야 (2010~2012) |
{{{#fff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번호 11번}}} | ||||
마크 캇세이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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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켄신 (2009~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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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 존슨 (2012) |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11번}}} | ||||
오카다 토시야 (2010-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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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켄신 (2012~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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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사와라 신노스케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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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켄신 川上憲伸 | Kenshin Kawakam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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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75년 6월 22일 ([age(1975-06-22)]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신체 | 179cm / 90kg |
프로입단 | 1997년 드래프트 1위(역지명) |
소속팀 |
주니치 드래곤즈 (1998~2008)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2009~2010) 주니치 드래곤즈 (2012~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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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일본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우완 투수.데뷔 시즌부터 야마모토 마사 등과 함께 주니치 선발진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호시노 센이치 감독,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 한국인 3총사와 함께한 1999년 리그 우승과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 지휘 하의 3번의 리그 우승, 2007년 일본시리즈 우승 당시의 핵심 멤버였고 메이저리그에서도 성공적으로 안착하는듯 했으나 부상 이후 급격히 폼이 하락해 재기하지 못했다.
2. 선수 생활
2.1. 고교 및 대학 시절
도쿠시마 상업고등학교 재학 때, 팀을 여름 고시엔 4강까지 이끌었다. 메이지대학으로 진학해 3학년이던 1996년 도쿄6대학 야구 추계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당시 게이오기주쿠대학의 스타 다카하시 요시노부와 라이벌로 좋은 승부를 펼쳤다.1997 년 드래프트에서 대학 선배인 호시노 센이치가 감독으로 재직하던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단독 1위로 교섭권을 획득해 입단했다.
2.2. 주니치 시절
데뷔 첫 해인 1998년에 선발진의 한 자리를 차지하며 14승 6패를 기록, 대학 시절부터의 라이벌이던 다카하시 요시노부 등과 치열한 신인왕 레이스를 펼친 끝에[1] 센트럴리그 신인왕으로 선출되었다.1999년 개막전 선발 투수로 기용되었으고, 팀이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했다.( 일본시리즈에서는 다이에 호크스에게 패배).
2000년에는 2승 3패로 부진했으며, 2001년에는 6승 10패를 기록하며 프로 데뷔 첫 두 자릿수 패배를 기록하는 등 2년간 고전했다. 여담으로 2000년 당시 부진의 원인은 어깨나 팔꿈치가 아닌 난청으로 특이하다면 특이한 부상이력.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프로야구 경기장이 응원가나 나팔 소리로 워낙 시끄러운지라(100데시벨을 가볍게 넘는다) 이런 환경에 매일 출근해야 하니 선천적으로 귀가 약한 선수는 가끔 앓는 경우가 있다.
2002년은 12승 6패로 부활에 성공했고 노히트 노런도 한 차례 기록했다.
그러나 2003년에는 어깨 부상으로 시즌을 날리다시피 했으며 2004년에 개막전 투수로 유력시 되던 가운데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이 개막전 투수로 가와사키 겐지로를 깜짝 기용하기도 했다.
같은 해 팀은 센트럴리그 우승과 함께 일본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세이부 라이온즈에 왕좌를 내주고 만다. 17승 7패를 기록하며 리그 MVP와 사와무라상 등 총 9개의 타이틀을 획득했다.
2005년은 2년만의 개막전 투수를 맡았다. 5월 20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교류전 원정경기에서 8회까지 퍼펙트 행진을 이어갔으나 이승엽에게 홈런을 맞고 퍼펙트 게임이 무산되었다.
그 경기에서는 무사사구 완투승에 그쳤다.
2006년에도 롯데와의 교류전에서 퍼펙트 게임과 노히트 노런 찬스를 연달아 날리며 1안타 2볼넷 완봉승을 거두었다. 같은 해 NPB 역사 상 120번째 1 군 공식 경기 통산 1,000 탈삼진의 금자탑을 쌓았다. 시즌동안 17승을 거두며 자신의 두 번째 최다승 타이틀 그리고 자신의 첫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차지했다. 팀은 2006년 일본시리즈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맞붙어 1승 4패로 우승을 내주었다.
2007년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서 NPB 역사상 124 번째(팀 사상 9 번째)의 1군 공식전 통산 100 승에 도달했다. 2006년과 같은 매치업으로 2007년 일본시리즈에서 리벤지 매치가 성사되었고, 작년과 같이 4승 1패를 거두며 팀은 53년만에 일본시리즈 정상에 오르는 감격을 누렸다.[2][3]
시즌 후에는 (올림픽 지역예선을 겸해서 열린)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해서 일본의 올림픽티켓 획득에 기여하기도 한다.[4][5]
2008년에는 부진하며 잠시 중간계투 요원으로 전환하기도 했으나 이내 선발로 복귀했고 베이징 올림픽에 일본대표팀으로 출전했으나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6] 시즌 종료 후에는 에이전트 계약을 체결하고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했다.
데뷔 후 10년간 신인왕, 최우수 투수 2회, 사와무라상 1회, MVP 1회, 다승왕 2회, 탈삼진왕 1회, 올스타 6회 출장 및 올스타 MVP 1회, 베스트나인 2회, 국가대표 1회(08베이징), 일본시리즈 감투상 1회 등 각종 상을 휩쓸며 통산 100승, 1000탈삼진, 1500이닝, 1회의 노히터, 리그 우승 3회와 팀 기록으로는 일본시리즈 우승반지까지 하나 차지하며 그야말로 투수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은 다 누리고 10년간 주니치의 에이스로서 팀의 든든한 기둥으로 활약했다.
2.3.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시절
2009년 1월에 3년 계약을 맺고 입단 발표가 이루어졌다. 첫 해에는 시즌 초 리그에 적응이 덜 되었는지 방어율이 7점 이상으로 치솟기도 했으나 곧 안정세를 찾아 안정적인 활약을 펼쳤다. 특히 당대의 에이스였던 로이 할러데이와 요한 산타나와의 선발 대결에서 연거푸 승리하면서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뭔가 오그라들지만 멋진 별명을 얻기도 했다. 선발로는 7승을 하고 후반기에는 불펜으로 돌아서 더욱 좋은 활약을 보이며 홀드와 세이브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 156.1 이닝, 3.86, BWAR 2.0 으로 시즌의 절반을 불펜으로 뛰었는데도 호성적을 기록했다.그러나 시즌 후 오른쪽 어깨가 이상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그후 2010년에는 어깨 부상으로 인해 성적이 급 추락하여 마이너리그 강등도 경험했다. 40인 로스터에서 제외되어 더블A까지 강등되었다. 2011년에는 메이저리그 승격에 실패하고 팀과의 계약이 종료되며 FA가 되었다.
2.4. 주니치 복귀
2012년 1월 입단 계약을 체결했고, 등번호 11번을 후배로부터 돌려받았다. 그러나 복귀 후에도 인상적인 피칭을 보여주지 못해 2013년 말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고, 은퇴 회견 개최, 감독 취임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구단은 방침을 바꿔 선수 계약을 다시 체결했다. 이 배경에는 과거 1군 감독을 맡은 오치아이 히로미쓰 본부장 과 시즌 종료 후 포수 겸 1군 감독으로 취임한 타니시게 모토노부의 의향이 있었다고 한다. 2014년에는 구단 사상 최다(7회) 개막전 선발투수로 발탁되었다. 2014년과 2015년에는 부상으로 계속 부진해 결국 팀을 떠나는 것을 발표했다.2.5. 주니치 탈퇴 후
일본프로야구 복귀를 목표로 재활 훈련을 계속했으나 현역 복귀를 이루지는 못했고 2017년 3월에 현역 은퇴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3.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해설, 평론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직 현장 복귀는 소식이 없으나, 주니치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만큼 언젠가는 복귀할 것으로 누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주니치가 아니라 유튜브로 복귀를 했다. 채널명은 가와카미 켄신 커트볼 채널.다르빗슈가 구독자 50만 유튜버로 대성공해 웬만한 현역들 연봉만큼 벌어들이고 있어서, 일본 야구선수들 사이에서 유튜브 붐이 일고 있는지라 거기에 발맞춘 행보. 아직 채널 만든지 얼마 안 됐던 2020년 8월 기준 구독자 수는 5만명이 안 되는 하꼬였지만 2021년 1월 기준 17만명이 넘어가는 꽤 규모있는 채널이 됐다. 조회수 100만 영상도 뽑고 순조롭게 커가고 있는 중. 여튼 유튜브 하신다고 팔자에도 없는 겜도 열심히 하고 나이 40넘어서 은퇴한지 5년만에 불펜피칭도 해보고 은퇴 후에도 열심히 살고 있다.
4. 플레이 스타일
일본에서 커터의 대명사로 불리는 투수.우완 스리쿼터로 구속은 평균 144km, 최고 149km 정도로 느리지는 않지만 딱히 빠르지도 않은 평범한 구속을 지니고 있었다. 변화구로는 슬라이더, 커브, 포크볼와 커터를 던졌는데 결정구는 주로 커터였다. 이 커터는 좌타자 공략에 고전하던 프로 초창기 시절, 월드시리즈 중계를 보다 마리아노 리베라가 던지는 것을 보고 연구했다고 한다. 때마침 이 시기에 커터를 일본에 최초로 전파한 타케다 카즈히로도 같은 팀에서 뛰고 있었기에 타케다로부터 커터의 대한 조언도 들을 수 있었고 카와카미의 커터 연구는 더욱 탄력을 받았다. 당시 일본에서 커터는 생소한 구종이었고[7] 이 커터를 앞세워 빠르지 않은 속구에도 불구하고 일본 최고의 투수가 될 수 있었다. MLB에서도 커터는 2000년대 중후반쯤에야 유행을 탔다는 것을 생각하면 시대를 앞서간 투수. 다만 생소함만으로 승부를 한 것은 아니었고, 커터 자체의 완성도도 상당히 높아서 용병타자들이나 메이저리거들에게 일본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커터를 던지는 투수라는 평까지 들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미국에서도 이 커터가 잘 통했을 정도로 커터 장인이었다. 이 커터를 주무기로 우투수면서도 좌타자에게 굉장히 강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에 연착륙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려던 2년차에 어깨 부상을 당했고 이후로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은퇴에 이르게 된다. 부상 때문에 내리막이 좀 빨리 온 것이 아쉬운 선수.
여담으로 타격실력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홈런을 통산 8개를 쳤는데 대략 전성기인 주니치 1기시절 풀타임이 9년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1년에 1개는 친 꼴로 투수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타격실력도 갖추고 있었다. 2004년에는 2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2개 모두 나고야돔[8]에서 기록했고 그중 1개는 밀어쳐서 넘긴 홈런이다.
5. 이승엽 빈볼 논란?
5.1. 사건
사건의 발단인 2005년 5월 20일. 치바 롯데 마린즈전에 선발등판한 카와카미는 8회 2아웃까지 무려 퍼펙트 게임을 이어나가는 호투 중이었다. 하지만 8회 2아웃에서 만난 당시 치바 롯데 소속이었던 이승엽을 상대로 3볼 1스트라이크까지 몰렸고, 이미 2002년에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적 있던 카와카미는 퍼펙트 게임을 노리기 위해 가운데로 떨어지는 밋밋한 슬라이더를 던졌다. 이게 실투가 되면서 이승엽에게 중월 솔로홈런을 얻어맞았고 퍼펙트는 물론, 노히트 노런과 완봉승까지 날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 당시영상 결국 카와카미는 당일 완투승으로 만족해야 했다.[9]그 후로부터 2년뒤인 2007년 5월 18일. 카와카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로 팀을 옮긴 이승엽을 다시 상대하게 되었고 이날 이승엽의 세번째 타석, 2구째에 이승엽 머리쪽으로 위협구가 날라오면서, 현재까지 보복성 빈볼이 아니냐는 논란에 불을 지피게 되었다. 이후 이승엽이 4구째 승부에서 바로 우월 투런홈런을 때려내었고, 홈런맞기 전 머리쪽 위협구가 함께 조명되어 국내 야구팬 사이에서는 이승엽의 정의구현 일화로 남게 된다. 당시영상
5.2. 정말 보복성 빈볼인가?
그러나 중요한건 역시 보복으로 고의성의 빈볼을 던졌냐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영상을 보면 알수 있듯, 카와카미가 위협구를 던진건 4회 무사 2루의 상황. 즉 이승엽의 세번째 타석이었고, 그것도 4회 세번째 상대 당시 주니치는 3-0으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승엽이 세번째 타석에서 위협구를 맞이하기 전 첫타석에서는 중견수 플라이, 두번째 타석에서는 볼넷이었으며 그 과정속에서도 전혀 머리쪽으로 날라오는 빈볼은 없었다. 물론 빈볼을 던지려고 마음먹은 투수가 선발투수라면 몇회에 빈볼을 날리는건 중요하지 않을수 있다. 하지만 세번째 타석에서도 2B 1S의 볼카운트에서 알수 있듯, 머리쪽 위협구를 제외하면 홈런을 맞기까지의 평범한 승부였고, 단지 그 머리쪽으로 날라오는 위협성 볼 하나로 빈볼이라 단정하긴 어렵다는 반론의 주장이다. 심지어 머리쪽으로 날라오는 2구는 139km의 컷패스트볼 이었는데, 146km의 패스트볼을 가지고 있는 전성기 시절의 카와카미가 굳이 커트볼을 보복구로 정했다는 것도 반론의 주장을 뒷받침 해준다. 좌타자 상대로 몸쪽 높은 커터를 던지는 것은 마리아노 리베라도 애용한 정석적인 커터의 사용법 중 하나이다. 그렇게 던지려다 제구가 안 됐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6. 여담
일본 야구 커뮤니티 밈으로 거인 우에하라와 주니치 카와카미, 왜 차이가 벌어졌는가…자만심, 환경의 차이 가 있다. 한국의 타이거즈는 어떻게 다시 강팀이 되었나 비스무리한 것으로 75년생 동갑내기이던[10] 우에하라 코지와 가와카미 겐신을 비교한 기사였는데, 둘은 동갑내기에 둘다 신인왕을 수상한 유망한 투수였는데, 당시 우에하라는 데뷔 초년병부터 일찍 터졌지만 기사가 쓰였을 땐 팀의 혼란기와 겹쳐 부진하고 있었고[11], 가와카미는 신인상 수상 후 난청과 어깨부상 등으로 3~4년간 헤멨지만 이후 04, 06년 다승왕을 차지할 정도로 조금 늦게 터져 잘 나가고 있었는데, 기사는 대충 우에하라가 일찍 성공한 자만심과 타성에 젖어 성적이 추락했으며 당시 잘나가던 켄신을 보고 배워야 한다 류의 흔한 찌라시성 기사였다.이후 우에하라는 부활에 성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 메이저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이고 이후 일본으로 금의환향해 2019년까지 롱런했고, 켄신은 메이저리그에서 망해서 2년 뛰고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부활하지 못해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2015년에 은퇴하면서 둘의 처지는 다시 역전, 이 때쯤 재발굴되어 비웃음거리가 된 것. 사람 인생 모르는 법이다.
물론 가와카미가 한 말이 아니라 가와카미 입장에서는 많이 억울하겠지만.
암튼 둘은 야구로서는 평생의 라이벌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사석에서는 엄청 친하다. 서로가 있었기에 열심히 노력하여 둘 다 일류 야구선수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7. 둘러보기
199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신인왕 | ||||
사와자키 도시카즈 ( 히로시마 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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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겐신 ( 주니치 드래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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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하라 고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2004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 ||||
이가와 게이 ( 한신 타이거스) 사이토 가즈미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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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우치 토시야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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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와 게이 ( 한신 타이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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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모토 도모아키 ( 한신 타이거스) |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
2007 |
[1]
신인왕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300 19홈런 75타점을 기록한
다카하시 요시노부,
한신 타이거즈의 츠보이 토모치카(.327 2홈런 21타점),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코바야시 칸에이(9승 6패 18세이브 2.87)등 그 해 좋은 활약을 펼친 신인들이 많아 이 선수들은 특별 표창을 받았다.
[2]
당시
이병규가 팀 동료로 활약했다.
[3]
다만 본인은 전해
다르빗슈처럼 혼자 패전투수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전해 주니치의 유일한 승리투수가 카와카미이고 닛폰햄의 유일한 패전투수가
다르빗슈였는데, 1년후에는 주니치의 유일한 패전투수 카와카미에 닛폰햄의 유일한 승리투수 다르빗슈라는 완전히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4]
한국전에 불펜으로 등판해서 팀 승리에 숨은 공신이 된다.
[5]
본 대회에 걸린 올림픽티켓은 단 1장이었고, 결국 한국과 대만은 2008년 3월 대륙별 최종예선으로 밀려난다.
[6]
특히 미국과의 동메달결정전에 불펜으로 등판했으나 부진한 투구를 보였다.
[7]
켄신 본인도 자서전에서 마리아노 리베라가 생전 처음 보는 변화구를 던지고 있어서 그걸 계기로 커터에 입문했다.
[8]
나고야돔은 알 사람은 다 아는 대표적인 투수친화구장이다.
[9]
완투승에 그쳤지만, 당일 롯데 선발타자 전원에게 탈삼진을 잡아내는 진기록을 남긴다.
[10]
둘 다 대학을 거쳐 프로에 왔지만 우에하라는 대학을 1년 재수했기에 프로 데뷔는 카와카미가 1년 더 빨랐다. 위의 수상 항목에서 볼 수 있듯 둘 모두 신인왕을 탔다.
[11]
사실 당시 우에하라의 성적을 지금 기준으로 보면 승수만 모자랄 뿐 부진한 건 아니었는데, 그때는 기준이 지금과는 달리 그저
투승타타였던 시절이라 2년 연속으로 10승을 거두지 못한 우에하라는 20승, 17승도 거두던 과거에 비해 부진한 투수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