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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축구인 최진철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2. 클럽 경력
2.1. 전북 현대 모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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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현대 모터스 시절 |
군 전역 후 1996 K리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전북에 지명되며 프로 선수가 됐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공격수였고 숭실대학교 축구단 입학 후 수비수로 전향했지만 1997 시즌 종료 후 당시 전북의 간판 공격수였던 김도훈이 J리그로 이적하자 다시 공격수로 변신했다. 187cm의 장신을 이용해서 포스트 플레이를 잘했고 해트트릭도 1회 기록했다. 문제는 이 시절에 황선홍, 최용수, 김도훈, 박건하, 노상래 등 기라성 같은 중견 공격진에 이동국, 안정환, 박성배, 김은중 등의 신예가 바글바글했기에 공격수로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는 거다.[2] 김도훈이 복귀한 2000년부터 다시 수비수로 컴백했고, 쓸 만한 수비수를 찾던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어 늦은 나이에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1996년 전북 현대 모터스에 입단, 2007년 은퇴할 때까지 12년 동안 오로지 한 팀만을 위해 헌신했다. 전북의 2006년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도 기여했고, 2007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전북에서 K리그 312경기 28득점 11도움, FA컵 23경기 1득점을 기록했다.
3. 국가대표 경력
3.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97년 8월 10일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에서 후반 막판 교체 출전으로 A대표팀에 데뷔했다. 당시 팀은 1:2로 패했다. 이후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최종 예선 대표로 합류했으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파죽의 4연승으로 일찌감치 본선 직행을 확정지었음에도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는 굴욕을 겪은 뒤[3] 거스 히딩크가 부임할 때까지 A대표팀에서 자취를 감췄다.3.2. 히딩크호 시절
2001년 9월 16일 나이지리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오랜만에 A대표로 뛰게 되었다. 당시 팀은 2:1로 승리했다. 이후 세네갈, 크로아티아, 미국과의 친선 경기에 출전했고 다음 해에는 CONCACAF 골드컵 출전 명단에도 이름을 올려서 경기에 뛰었다.3.2.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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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 박항서 스태프
핌 베어벡 ·
정해성 ·
김현태 ·
압신 고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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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수비 전술은 단순하기 그지없어 선수의 개인 기량과 체격에 의존했던 경향이 컸는데, 거스 히딩크식 조합과 단련으로 역대 최강의 3백이 되었다. 거기에 대회가 진행될수록 몸싸움과 공중볼 경합에 일취월장하여, 크리스티안 비에리 같은 싸움닭형 공격수들을 상대로도 세트피스 상황에서 1골을 내주는 선에서 막아내기도 했다.[4]
특히 그는 4강 독일전에서 미로슬라프 클로제를 막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5] 그러나 후반전에 안타깝게도 부상을 당하며 이민성과 교체 아웃되었고 그가 교체되고 얼마 안 있어 대한민국은 미하엘 발락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얻어맞아 0:1로 석패했다.
3위·4위전 터키전에도 부상 여파로 출전하지 못했고 대한민국은 2:3으로 패했다.
3.3. 코엘류호, 본프레레호 시절
2003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최우수 수비상을 받으며 우승을 경험했지만 오만 쇼크와 몰디브 참사를 현장에서 경험했고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16개국 본선에도 출전했다.2006년 독일 월드컵 2차 예선에도 출전했고 레바논전에서는 선제골을 기록했으나 경기는 1:1로 비겼다.
2004년 12월, 후배 선수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김태영과 함께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3.4. 아드보카트호 시절
3.4.1. 2006 FIFA 월드컵 독일
1
이운재 C · 2
김영철 · 3
김동진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김진규 · 7
박지성 · 8
김두현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설기현 · 12 이영표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백지훈 · 16 정경호 17 이호 · 18 김상식 · 19 조재진 · 20 김용대 · 21 김영광 · 22 송종국 · 23 조원희 |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스태프
압신 고트비 ·
홍명보 ·
정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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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별 리그 3차전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스위스의 수비수 필리페 센데로스의 선제 헤더골 당시 머리끼리 충돌하여 안면에 부상을 당했음에도[7] 붕대를 매고 계속 뛰는 투혼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0:2로 패배하여 월드컵 최종 17위로, 16강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고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면서 스위스전은 그의 마지막 A매치가 되고 말았다.
4. 플레이 스타일
지금이야 아시아권에서도 187cm의 수비수는 흔한 편이지만 당시 동아시아 선수 중에서는 손에 꼽을 장신에 속했다.[8] 이 장신을 기반으로 제공권과 체격에 강점을 가진 수비수였다. 심지어 포스트 플레이 능력은 K리그 정상급 공격수들보다도 우수했고 제공권 장악력은 리그 최고급이었기에 김도훈의 이적 후 최전방에 공백이 생겼을 때 중앙 공격수로 포지션을 전환하여 해트트릭을 기록한 적도 있다. 장신에 어울리지 않게 슬라이딩 태클도 수준급이었다. 스피드는 느렸지만[9] 뛰어난 위치 선정과 나쁘지 않은 점프력으로 극복했다.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전에서는 이러한 장점을 기반으로 조별 리그에서 같은 아시아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게 헤더로만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국내 언론에서 고공 폭격기라고 부르던 미로슬라프 클로제를 꽁꽁 묶었다. 16강전과 8강전에서도 당대 최상위권 공격수인 크리스티안 비에리,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와도 힘겹지만 잘 막아내며 클래스를 증명해 보였다.
2002년 말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 때 호나우지뉴의 돌파를 태클로 막아냈던 장면과 2002 월드컵 폴란드전 전반 초반에 올리사데베가 홍명보를 뚫고 돌파하던 것을 몸을 던지는 슬라이딩 태클로 백업해 주던 장면은 팬들이 꼽는 커리어 최고의 장면들.
5. 기록
5.1. 대회 기록
- 전북 현대 모터스 (1996~2007)
- FA컵: 2000, 2003, 2005
- 슈퍼컵: 2004
- AFC 챔피언스 리그: 2006
- 아시안 컵위너스컵 준우승: 2002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97~2006)
- FIFA 월드컵 4위: 2002
-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2003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B팀
- 동아시아 경기 대회: 1993
5.2. 개인 수상
-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최우수 수비수: 2003
- AFC 챔피언스 리그 MVP: 2006
- K리그 베스트 XI: 2002, 2003, 2006
- K리그 대상 공로상: 2007
-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2002
- 스포츠서울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공로상: 2007
5.3. 수훈
- 체육훈장 맹호장: 2002
5.4. 통산 성적
5.4.1. 국가대표
2024년 4월 8일 기준이다.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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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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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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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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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 U-17 | 0 | 0 |
U-20 | 0 | 0 | |
U-23 | 1 | 0 | |
A대표 | 65 | 4 | |
통산 | 66 | 4 |
[1]
그래도
상무 축구단에 들어갔기 때문에 군대에서 프로 데뷔를 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당시 상무는 아마추어 리그 소속이었기 때문에 프로 데뷔를 했다는 것은 잘못된 내용이다. 이렇게 병역을 미리 해결하는 경우로는
마해영,
양준혁,
박상오가 있다. 단, 박상오는 상무가 아닌 현역 일반병으로 입대를 했다.
[2]
당시 K리그에서 득점왕까지 차지했던
김현석조차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못 올릴 정도였으니 '공격수 최진철'의 자리는 더욱 없을 수 밖에. 게다가 지금의 강호 전북과 달리 이때는 팀이 간신히 유지만 하던 시기로, 천안 일화와 함께 조명도 없는 경기장에 손에 꼽을 관중 모아 놓고 경기하는 비인기 구단으로 통했던 때다. 박성배도 1998 시즌 신인 라이벌로 묶이고 유상철과 득점왕 경쟁까지 했음에도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3]
참고로 엔트리에 포함된 선수 중 유일하게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다. 당시
차범근 전 감독 신격화에 한창이었던 주요 언론조차도 최진철 홀대(?)는
옥에 티라고 비판했고 최진철 본인은 당시 나는 국가대표와 인연이 없는 운명이구나라 생각했다고.
[4]
실제로 김태영, 최진철 둘 다 비에리가 힘이 장사더라고 술회할 정도로 버거웠던 상대인지라 비에리가 우격다짐으로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가자 결국 헤딩으로 선제골을 내주기는 했다. 또한 악랄한 팔꿈치 공격까지 감행하는지라 김태영이 코뼈가 내려앉는 중상을 입을 정도였다 보니 이런 위협에 눌려서 추가로 골을 두들겨맞지 않은 것이 다행인 수준, 하지만 풀타임으로 비에리의 엄청난 떡대를 막아낸 최진철은 경기 종료 후 완전히 탈진하여 링거를 맞아야 했다. 체력적으로 엄청나게 힘이 부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비에리를 막았던 것이다.
[5]
지금은 월드컵 통산 최다 득점 및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한 레전드 공격수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클로제는 신인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이미 조별 리그에서만 헤딩으로 무려 5골을 넣을 만큼 엄청난 성장의 조짐을 보였고 최진철은 이에 맞서 밀리지 않는 체격을 바탕으로 클로제와 헤딩 경합을 다퉜으며 이를 넘지 못한 클로제는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
[6]
경기 이후 인터뷰에서 아데바요르는 실제로 붙어보니 생각보다 별로였다고 평가하며, 오히려 선제골을 넣었던 쿠바자가 훨씬 위협적이었다고 했다.
[7]
필리페 센데로스 역시 골을 넣었지만 부상을 입었다. 양쪽 모두 피를 흘렸지만 한쪽은 환호하고 다른 한쪽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8]
이해를 돕자면, 평균 신장이 지금과 3cm~4cm 가량 차이가 나던 시대의 187cm는 지금으로 따지면 190cm 초반에 해당한다. 20년 후
벤투호의 월드컵 대표팀 명단 중 필드 플레이어 최장신이 190cm의
김민재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당시로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신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9]
단, 순간 속도가 느릴 뿐 좋은 운동 능력으로 초등부 육상 수상 경력이 다수 있을 정도로 평균 속도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30대였던
히딩크호 당시 측정한 바에 따르면
유상철과 함께 100m를 12초 초반(평균 속도로 따지면 약 30km/h)에 끊었다고.
윙백으로 데뷔한 선수와 대등한 속도면 세계 기준으로도 평범하면 평범했지 절대 느린 편이 아니다.
[10]
일례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상대한
크리스티안 비에리는 체격으로는 세계 최강급에 속하던 선수였다. 유럽에서도 작정하고 힘대힘으로 붙어서 그를 이길 수비수가 많지 않았다. 최진철도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전 당시 크리스티안 비에리를 막느라 탈진해서 경기 후 링거를 맞아야 했을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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