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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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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차이석.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서입환(徐立煥)
동암(東岩)
본관 연안 차씨
출생 1881년 7월 26일
평안도 영원군
(現 평안남도 영원군)
사망 1945년 9월 9일
중화민국 충칭 관인병원
묘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2가 효창공원 임정요인 묘역
가족 아버지 차시헌, 어머니 서시은
여동생 차보석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언론 활동 및 교육활동2.3. 신민회2.4. 기성볼단2.5. 상하이2.6. 흥사단 원동위원부2.7. 한국독립당과 한국국민당2.8. 임시정부 지도체제 확립2.9. 사망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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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독립운동가, 장로회 신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81년 7월 26일 평안도 영원군(現 평안남도 영원군)에서 아버지 차시헌(車始軒)과 어머니 서시은(徐始恩) 사이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2.1. 초년기

8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한학을 익혔고 16살 때 신학제의 소학교 과정에 입학했다. 이후 그는 1897년 '사랑방학급'에 입학했다. 사랑방학급은 윌리엄 M. 베어드 선교사가 1897년 10월 자신의 사랑방에서 세운 중등교육반으로, 1898년 18명의 학생을 선발해 성경, 음악, 산수, 만국역사, 지리,한문 등을 가르쳤다. 이후 1900년 사랑방학급이 '평양학교로서 정식 학교로 개교하면서, 차이석은 정규 중등과정 5년제 첫 입학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평양학교는 학년을 표시하는 말로 무등, 1등, 2등, 3등, 4등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무등은 예과에 해당하는 학년으로, 당시는 소학교 졸업생의 실력이 고르지 못해 무등과정에서 중학교 정규교육을 받을 수 있는 준비 교육을 시켜 본과 수업의 진행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차이석의 경우엔 이미 사랑방학급을 마친 터라 무등이 아닌 1등 학년으로 들어갔다.

1901년, 미국으로 돌아간 베어드 선교사를 대신해 평양 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S. L. 스왈른 선교사가 부친의 유산 1,800원을 기부하여 학교 재정을 충실히 다지고 교사 건물을 세워 베어드 교장의 사랑방으로부터 새 교사로 이전했다. 이후 평양학교는 교명을 '숭실학당'으로 변경하고 교과과목을 성경, 한국어문법, 한문, 수학, 과학, 역사, 음악, 미술, 체육 등으로 정했다. 성경 시간에는 신약과 구약성서의 주요 부분, 천로역정 등의 기독교 문학 작품을 가르쳤고, 어문학에서는 한국어 문법을 비롯해 사서를 중심으로 한 한문교육이 이뤄졌으며, 음빙실문집 등과 핱은 중국근대학과 글씨 쓰기, 작문 등도 가르쳤다. 그리고 산수에서는 산수와 대수, 평면 기하 등을 가르쳤고, 과학 분야에서는 자연과학을 비롯하여 기초물리, 화학, 동물학과 식물학, 생리학과 위성학, 자연지리와 인문지리, 지도 그리기, 천문학 등 다양한 과목을 개설했다. 역사는 동서양사를 두루 포함했으며, 특수사도 가르쳤고, 미술은 회화가 중심을 이뤘으며, 체육은 체조를 가르쳤다.

세계역사와 지리에 관심이 많았다. <금산>에 따르면, 그는 사촌동생 차의석에게 미국인 선교사 H.B. 헐버트가 육영교사로 있으면서 1889년에 지은 세계지리서 <사민필지(四民必知)>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 책은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 등 각 대륙의 역사지리를 망라한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리 교과서였다. 차이석은 이 책을 끼고 살면서 동생들에게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또한 그는 수업을 받는 한편 외국인 교사들의 조교로서 하급학년의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글씨를 가장 잘 썼다고 한다. 이윽고 1904년 5월 15일, 차이석은 숭실학당의 제1회 졸업생으로서 학업을 마쳤다. 이후 그는 숭실학당의 교사로서 일하는 한편 언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2.2. 언론 활동 및 교육활동

차이석은 1905년 11월 하순에 미주 공립협회에서 창간한 <공립신보>를 초창기부터 열람했다. 그는 신문에 대해 "국가를 바로잡는 기관이자 인민의 지식을 발달하는 열쇠며, 세상의 공론을 지시하는 지남침"이라고 높게 평가하며 민족과 국가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신문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신문 열람에만 그치지 않고 <공립신보>의 국내보급에도 앞장섰으며, 1906년 3월에 논설을 기고했다.
나는 본시 우둔해 저절로 해가 나면 낮이오, 지면 겨울인줄 알아 동서를 알지 못한 채, 다만 신문이나 사랑하기를 주린 자가 음식을 기다림과 목마른 자 물을 사모하듯하야 네다섯 신문으로 좋은 친구로 삼아 세월을 지냈소. 월 전부터 하와이에 나아가 사는 형제들이 '신조신문'이라 하는 신문 하나를 발간해, 맥시코 친구 하나한테 얻은 듯 마음이 흡족하였더니 근일에 한 이웃집에 갔다가 탁자 위에 신문 한 장이 놓인 것을 보니 그 제목에 '공립신보' 네 글자가 있는지라, 미처 속을 들쳐 보기전에 그 어디로부터 온 것을 물은 즉 주인의 대답이 이는 미국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 형제들이 발간하는 신문이라 하거늘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속을 들쳐 한 번 보니 마음이 곳 그립고 두 번 보니 마음이 크게 기뿐지라.

첫째 부끄럽다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기관신문이라 하는 것이 다만 황성, 제국 양 신문뿐인데 황성신문은 그 군줄한 재정으로 간신히 지내다가 거연히 지난 달에 봉쇄를 당하였거니와, 제국신문 네 글자도 능히 보전치 못하여 거의 없어질 모양이니, 본국에서는 이천만 인구가 오히려 이맛한 두 신문을 부지하지 못하거늘 저 외국에 나그네로 나가 노력하는 몇십 형제가 이제 신문 하나를 능히 창간하여 내닌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며, 둘째 마음이 기뻐 적이 래두에 희망이 있는 것은 국가의 성쇠와 인간의 지위가 신문 발달됨에 달렸으니, 이제 대한 사람의 손으로 나오는 신문이 하와외와 미국에서 일시에 어울려 일어나리. 이를바와 같이 우리 한국의 중흥할 것을 점칠지라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오.

대저 신문이라 하는 것은 국가를 바로 잡는 기관이오 인민의 지식을 발달하는 열쇠며 세상의 공론을 지시하는 지남침이라. 그 관계가 가장 중하고 사회에 극히 필요하여 가이 폐지못하기가 물과 불이 하루도 없이 못할 것과 같은 지라. 그런 고로 나라에 문명을 신문의 사소로 분간할지니 슬프다. 우리나라 인민 중에 신문이 이렇듯 중한 줄을 깨닫는 자 몇인가. 생각건대 이 신문의 '공립'이란 두 글자는 일월과 같이 동서양에 이미 빛났으나, 다만 그 세력인 즉 아직 장구히 확장되지 못한 줄은 묻지 않고도 가히 알지라.

오직 첫째로 하느님께 간구할 것은 하느님께서 저 신문사원의 고심 혈성을 돌아보시고 그 복족함을 도우사 그 신문의 사업이 날로 발달됨으로 나라의 문명 기초가 이에 공고케 하옵사고, 둘째로 사원께 공들여 부탁할 것은 아직 한미 사세만 생각지 마시고 장래에 희망을 굳게 세워 극력 유지하여 인민의 대표를 확실히 담임케 하오며, 셋째로 동포에게 권고할 것은 신문이라 하면 어디까지라도 찾아보아 기어이 차회에 상등 인물도 참여하여 각각 자기의 의무를 일단 충심으로 힘써 행하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공립신보>는 해외에서 발행된 신문이라 일제의 검열을 피해 나갈 수 있는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공립신보는 이 점을 활용해 강한 어조로 일제 침략을 규탄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하지만 공립신보는 유가 판매보다 무료 배포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적자를 면치 못하고 만성적 재정난에 허덕여야 했다. 이에 평양에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일제는 공립신보가 배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에 분개해 대한제국을 압박했고, 결국 대한제국은 1908년 4월 이후의 공립신보를 대부분 가압수했다.

또한 차이석은 구국교육을 위한 학회활동에도 참가해 1907년 초 서우학회에 가입했다. 서우학회는 1906년 10월 대한자강회, 기독교 청년회, 국민교육회 등에서 활동하던 평안도, 황해도 출신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계몽교육단체로, 겉으로는 정치활동을 내세우지 않고 교육진흥운동만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민력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과 인권 신장이었다. 회원은 전국적으로 1천여 명이었는데 대부분이 신지식층이었다. 이후 서우학회는 1908년 1월 한북흥학회와 통합하여 서북학회로 개명되었고, 차이석은 서북학회 회원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그가 서우학회와 서북학회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2.3. 신민회

1907년 3월, 안창호는 미국에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3월 11일 서우학회와 평양 군민이 설립한 사범강습소의 개교식에 참석하여 최강옥과 함께 경축강연을 했다. 이후 그는 평양에 약 1개월 가까이 체류하면서 평안도 지방에서 그의 동지가 될 수 있는 인사들을 물색했다. 1907년 45월 서울로 올라온 안창호는 신민회 창건 사업을 구체화시켰다. 이때 차이석과 안태국이 서울에서 그를 도우며 신민회 창건 사업에 힘을 쏟았다. 두 사람은 안창호가 머무는 김형제상회 2층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았고 안창호가 자리를 비울 때면 그를 대신해 손님을 맞이했다.

1907년 하반기, 고종이 폐위된 뒤 일본 도쿄로 끌려갈 거라는 소문이 서울에 확산되었다. 이에 안창호는 전국 각처의 대표들을 아울러 고종 황제의 '어가동도'를 저지하는 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안창호는 자신의 사무실로 집결한 대표들을 둘러보고는 사단 병력의 일본군 수비대와 무력으로 결투해야 하나 중과부적으로 도저히 승산이 없으므로 그 계획을 실행하기 어렵다고 보고 해소시켰다. 이때 차이석은 안창호의 어가동도 저지 계획의 실무를 맡아 처리했다고 한다. 이후 1907년 8월 1일 강제 해산에 반발한 대한제국군이 집단 봉기하여 남대문 전투가 발발하자, 차이석은 안창호와 함께 부상당한 한국 군인들을 세브란스병원에 옮겨 치료에 힘을 보탰다.

1908년 신민회에 정식으로 가입한 차이석은 신성중학교 교사인 길진형 등에게 입회를 권유하여 신민회 회원으로 가입케 하는 등 회원 확보에 힘을 쏟았다. 또한 안창호가 대성학교를 설립할 때 이에 적극 참여했고 1908년 9월 대성학교가 개교하자 교사로 부임해 후학 양성에 힘썼다. 대성학교는 국권회복의 간부 및 국민교육의 사부 양성을 목적으로 삼았고, 이를 위해 강조한 것이 애국주의와 건전한 인격 양성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교과목과 강의에는 애국이 강조되었으며, 매일 아침 조회 때문 애국가를 제창하고 애국에 관한 훈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성실에 바탕한 생활 규범으로서 정도(正道), 시간 엄수, 약속 이행, 무실역행 등을 교육했다.

대성학교의 1학년 과정에 국가학과 임업학을 비롯하여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2학년 과정에 법학통론, 수산학, 3학년 과정에 천문학, 측량, 광물학, 경제학, 농정학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작문은 전통 교육기관인 서원에서의 교수 과목과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당시 학생들은 20세, 30세 청년이 많았으며 대부분 서당에서 오랫동안 공부해 상당한 수준의 한학을 습득하고 있었다. 또한 대성학교는 예비과, 초등과, 1,2,3학년 전학생에게 군사훈련인 병식을 가르쳤고 체육 교사들은 대한제국군 사관 출신이었다.

운동부에서는 서울, 평양의 축구대회를 처음 개최했고, 최초로 야구 경기를 열기도 했다. 봄, 가을로 개최하는 대운동회는 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의 관심 또한 대단했고, 경기 종목 만도 40여 개가 넘었으며, 운동대회를 알리기 위해 최남선, 문일평 등이 주필을 맡아 '임시운동시보사'의 소식지를 작성해 배포했다. 대운동회에서는 대성학교의 군악대가 동원되었으며, 4,5천명의 시민이 참관하는 등 열기가 대단했다. 또한 대성학교는 학생들에게 매주 성경공부를 시켰고, 교회 출석을 권장했다. 안창호는 청년들에게 기독교의 희생적 정신을 함양시키기 위해 대성학교 안에 성경연구회를 두었고,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한국 목사 및 외국인 선교사들을 초청해 기독교 정신을 고취시켰다. 차이석은 이러한 대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주로 지리 과목을 맡았고, 일본어 독본을 담당하기도 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자, 일제 통감부는 배후를 조사한다는 구실로 안창호, 이종호, 이갑 등 서북지방의 유력인사들을 체포했다. 이에 차이석은 안창호를 석방시키기 위해 평양에서 서울로 와서 윤치호와 학생 정영도의 보증서를 받아 안창호 석방에 온 힘을 기울였고, 안창호는 4개월 후인 1910년 2월 22일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이후 일제의 감시가 날로 심해지자, 안창호는 중국 산동반도의 위해위로 망명했다. 이후 대성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운영이 위태로워지다가 1913년 폐쇄되었다.

한편, 차이석은 대성학교 교사로 일하는 동시에 조신성이 운영하던 진명여학교에도 출강했다. 진명여학교는 대성학교와 자매관계의 여학교로, 안창호가 1907년 여름 평양의 명륜당 집회에서 "여사교육이 왜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진명여학교 설립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1911년 9월 105인 사건에 연루된 그는 9개월 동안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1912년 6월에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옥관빈, 장응진 등 20명과 함께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1913년 3월 20일항소심에서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비로소 석방되었다.

2.4. 기성볼단

차이석은 출옥 후 1914년 5월 대성학교 출신 김영운이 세운 기성볼단의 고문을 맡았다. 기성볼단은 평양의 다른 이름인 '기성'에서 축구를 하는 모임으로 가장하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모색한 비밀결사였다. 기성볼단에는 대성학교 출신과 평양지역 청년 약 25명이 활동했는데, 이들의 연령은 대부분 20~25세였다. 차이석은 기성볼단의 고문을 맡고 단원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또한 독립군가, 애국가 등을 모아 창가집을 만들었고, 대일항쟁에서 큰 승리르 거둔 박제상, 이순신 등을 영웅의 모범으로 칭송했으며, 애국지사인 최익현, 안중근 등을 독립국의 영웅으로 찬미하면서 그 정신을 계승할 것을 맹세하게 했다.

기성볼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총무 김영윤은 단원 강원섭, 장병훈, 김봉기 등과 함께 1914년 9월 서간도 통화현에 있던 신흥강습소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으며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이들은 중일전쟁 내지 미일전쟁이 터질 것을 예상했고, 이를 이용해 일제를 물리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신흥학교에서 무관교육을 받으려 했다. 한편 차이석은 신민회 동지인 임치정, 안세환 등과 함께 광산을 경영하며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펼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1915년 3월 단원 서경순이 일제에 밀고하면서 기성볼단이 발각되고 말았고, 차이석은 다시 체포되어 고초를 치러야 했다.

2.5. 상하이

1919년 3월 3.1 운동이 발발했다. 이때 차이석과 함께 광산을 경영했던 임치정, 안세환이 평양에서의 만세운동을 주도했지만, 차이석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이름을 '필성(必成)'이라 개명하고 1919년 8월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프랑스 조계 납도로(拉都路) 흥순남리(興順南里)[2]에 거주하였다. # 그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로서 주 3회 발행되던 <독립신문>의 기자를 맡았다. 그는 조동호 등과 함께 만주독립군의 활동상, 임시정부의 활동상, 미주·노령 등지의 적극적인 지원 등을 취재 보도하여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들을 연계하고 항일과 독립에의 열망을 북돋우는데 진력했다.

1921년 6월, 차이석은 독립신문사의 편집국장으로서 사장 김승학, 주필 박은식 등과 함께 언론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0년 국내 연통제 조직이 와해되고 임시정부의 외교 노선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0년 9월부터 임시정부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졌다. 이때 차이석은 이동녕, 김구, 이시영, 조소앙, 이동휘, 조완구, 김철 등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임시정부를 수호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독립신문을 통해 "임시정부의 내일은 곧 군주제의 청산이며, 민주화의 새 출발을 기약함에 있습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전진하고 대동 단결합시다."라고 밝히며 파벌 싸움을 그만두고 함께 힘을 합쳐 독립운동을 지속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1922년 2월, 차이석은 독립신문사를 떠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의원으로 재직하면서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통한 임시정부 재건에 착수했다. 그리고 안창호가 주도하는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미래를 이끌어갈 청년 인재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원동위원부 이사로 재직하며 1945년 사망 때까지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차이석은 1921년 5월부터 안창호가 제창한 국민대표회의기성회에 적극 참가해 국민대표회의를 열어야 필요성을 역설했고, 상해교민단의 대표로서 참가하려 했지만 여운형이 그 대신 대표로 뽑히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국민대표회의 결성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 자체를 거부하고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길 원하는 이들의 반발로 일이 잘 진행되지 않자, 그는 상해거류민 102명의 연서로 제출된 인민청원안을 상정해 의정원에서 국민대표회의 추진운동을 지원하라는 압박을 넣었다. 의정원 회의는 이 일로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1922년 4월 14일 임시정부 옹호파들이 퇴장한 상황에서 인민청원안의 요구를 표결에 부쳐 찬성 10, 반대 3으로 가결시켰다. 차이석은 임민청원안에 찬성한 이들의 입장을 대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반대측의 말은 다 일일이 반박할 수 있으나 이 문제를 가지고 이미 많은 토론을 행하였으므로 이제 다시 가부를 말할 필요가 없고 다만 한가지 연상되는 것만을 말아겠소. 십여년 전 적이 우리 국권을 빼앗아 갈 때에 주권자는 최후 인민에게 물어본 후에 결정하자고 하되 적의 협박으로 인하여 효력이 없이 종시 빼앗긴 것을 우리가 통한이 여긴 터인 즉 지금 잃었던 국가를 다시 회복하려 하는 이 때에 우리가 여한 없이 다수 국민의 의사를 들어 힘있게 운동하여야 되겠소.

그러나 임시정부 옹호파들은 인민청원안의 가결에 승복하지 않고 국민대표회의 소집 대신 광복운동자회의 소집을 요구했다.[3] 이렇게 되자 임시의정원 내에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차이석은 6월 9일 오영선, 안정근, 조상섭, 양기하 등과 함께 이승만 임시대통령 및 국무위원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며 옹호파들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그는 불신임 상정의 이유로 '인민과 신만 결여와 정국 수습 능력 부족으로 독립운동의 정체를 초래',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회의의 외교 실패', '후계 내각을 조직하지 못하고 무정부 상태 초래' 등을 제시했다. 결국 6월 17일, 이승만 임시대통령 및 국무위원에 대한 불신임안은 전격 통과되었다.

그러나 민충식, 이병주 등은 상해 거주 동포 113명의 서명을 받아 '국민대표회의 찬성한 취소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해 국민대표회의 소집 요구가 독립운동을 혼란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청원안은 수리 자체가 거부되었지만, 국민대표회의 지지파들이 의정원 의원직을 사퇴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면서 임시의정원이 양분되고 말았다. 차이석은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동녕, 김구, 안창호, 여운형 등 3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했다. 시사책진회는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회 간의 이견을 조정하고 각 방면의 의견을 충분히 검토하여 최선의 방책을 모색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그러나 이 모임은 정파 간의 이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달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이윽고 국민대표회의주비회 총회를 중심으로 대회 개최를 위한 준비가 추진되었고, 1922년 8월 국민대표회의 개최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이후 자금 문제, 성원 부족 등으로 회의 개최가 차일파일 미뤄졌다가 1923년 1월 3일에 비로소 개최되었다. 차이석은 국민대표회의가 열리는 동안 개원한 제11회 의정원 회의에서 평안도 지역 의원으로 보선되어 다시 의정원에 참가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해산되자, 그는 의원 직을 사임하고 임시의정원을 떠났다.

2.6. 흥사단 원동위원부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 차이석은 임시정부를 떠나 안창호의 이상촌 건설 사업에 가담했다. 그는 1924년 2월 초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이동하고 흥사단소를 난징 관가교 태평항 6호에 마련했다. 그해 2월 7일과 8일 양일에 걸쳐 난징에서 개최된 제10회 흥사단 원동대회에서, 차이석은 강론회를 주도하며 안창호를 대신해 모든 흥사단 사업을 주관했다. 이후 그는 1924년 2월 15일 위원장에 취임해 흥사단원의 정신 강화와 조직 정비에 힘을 쏟았으며, 단원의 사상 통일과 정신 향상, 학식 계발을 위해 주일마다 강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했다.

그는 조직의 규약을 위배하는 자는 어느 누구도 처벌을 회피할 수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4년 5월, 차이석은 도박의 유혹에 못 이겨 도박장을 찾아 마작을 즐겼다가 나중에 이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본단의 주의를 망각한 죄를 스스로에게 적용해 2개월간 정직되었다. 주요한과 손정도가 그를 대신해 위원장 업무를 수행했고, 차이석은 2개월 후인 7월 26일에 위원장으로 복권되었다. 안창호 또한 단우의 의무인 통상보고를 하지 못하자 스스로 자청해 2개월간 정직되기도 했다.

1924년 7월 안창호가 위기에 빠진 미주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를 재정비하고 독립운동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차이석은 원동흥사단위원부의 단무를 총괄하면서 동명학원을 설립했다. 동명학원의 교육과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3개년 중등과정의 영어과 및 중어과, 1개년 과정의 고등중학과, 그리고 방학 중 개설하는 하기 강습회가 그것이다. 고등중학과는 국어, 영어, 본국 및 세계지리 역사, 산술, 혼합수학, 대수, 기하, 삼각, 격치통론, 과학개론, 생리위생학,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물리, 화학, 심리학, 윤리학, 공민학, 정치원론, 경제원론, 가정학, 체육 등의 과목이 개설되었다. 또한 1924년 7월 7일부터 1개월간 열린 하기 강습회에는 영어, 중국어, 국어, 역사 등을 강습했다. 동명학원은 학생들에게 중국 상하이, 난징, 광동, 사천성 등지의 군관학교, 법정전문학교, 농업전문학교 등에 입학할 길을 열어줬고, 구미 유학의 길도 알선해줬다.

그러나 1926년 9월 동명학원은 불의의 화재로 학교 건물이 전소되는 재난을 당했다. 미주 흥사단 본부가 긴급 지원해 1927년 4월 신학기 때 다시 개교되었지만, 끝내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곧 폐쇄되고 말았다. 이후 차이석은 중국으로 돌아온 안창호가 1927년 3월에 21일에 결성한 한국독립유일당 상해촉성회에 가담했다. 그는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단소를 난징에서 상하이로 다시 옮기고 민족유일당운동을 이끌기 위해 분주하던 안창호를 후원했다. 그러나 흥사단이 독립운동에 매진하지 않고 개량적 민족운동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안창호와 차이석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김구, 송병조 등과 연합하여 민족통합전선을 통합하기로 결심한다.

2.7. 한국독립당과 한국국민당

1930년 초, 차이석은 이동녕, 안창호, 이시영, 김구 등이 조직한 한국독립당에 참여했다. 한국독립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본이념으로 삼아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모든 인물과 농(農), 공(工), 상(商), 학계(學界)의 남녀노소를 총망라하여 국민적 기반 위에 조직할 것을 표방하고 임시정부의 기초정당으로서 임시정부를 유지·발전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창당되었다. 이 당은 기관지로 <상해한문(上海韓聞)>과 <진광(震光)> 등을 발간했는데, 차이석은 상해한문의 편집 겸 인쇄를 맡아 당의 기본 강령 실천에 진력했다. 또한 그는 한국독립당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했으며 1930년에 개최된 의정원 회의에서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임시정부에 대한 추적이 거세지자, 임시정부는 1932년 5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이동했다. 차이석은 1932년 11월 28일 항저우의 의정원 회의에 참석해 김구, 이동녕, 조성환, 신익희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1933년 3월의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임시정부의 내무장 겸 비서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내부 정비를 도맡아 했다. 그러나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결성된 후 대다수 국무위원들이 임시정부를 이탈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담하자,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에 빠져 버렸다. 이에 차이석은 송병조와 함께 광동, 항저우, 가흥 등지에 거주하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을 찾아다니며 임시정부의 재건과 구심점으로서의 임무를 강조해 다시 합류하게 하는 등 임시정부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5년 11월 13일, 임시정부는 다시 정부 요인을 구성하여 주석에 이동녕, 내무장에 조완구, 외무장에 김구, 재무장에 송병조, 군무장에 조성환, 법무장에 이시영을 선임했으며, 차이석은 비서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이들은 한국독립당이 요인들의 대거 이탈로 인해 무색해졌으므로 새로운 여당으로 한국국민당을 창립하기로 했다. 한국국민당은 삼균주의에 입각한 민주공확구의 건설을 당의 근본이념으로 삼고 임시정부 절대 사수를 외쳤다. 한국국민당은 한국국민당청년단(韓國國民黨靑年團), 한국청년전위단(韓國靑年前衛團) 등의 외곽단체를 거느리며, <한민(韓民)>, <한청(韓靑)>, <전선(前線)> 등의 기관지와 각종의 선전 유인물을 간행했다. 또한 1937년 7월 영호(金英浩) 등 6명을 중국 화북지방에 파견하여 일제의 군사 및 일반 정보수집에 노력하고 이들에 의해 청년대원 일부를 국내에 침투케 하여 주요도시에서의 무장봉기, 일제의 요인 제거 등을 수행할 것을 계획했다.

이어 10월에는 조사원을 파견, 일제의 포진·병기, 탄약, 비행기, 대포 등의 배치상황에 관한 정보를 수집, 중국 국민당 정부에 제공함으로써 중국 정부의 야간 폭격으로 일제에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12월 중순에는 담당지역 내의 주요 관공서 시설파괴, 요인 처단 등을 임무로 하는 결사대 3대(隊)를 조직하여 제1분대는 만주, 제2분대는 국내, 제3분대는 일본에 파견했다. 차이석은 이렇듯 여러 활동을 벌인 한국국민당의 조직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1939년 5월에 조선혁명당, 재건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의 3당이 서로 통해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을 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2.8. 임시정부 지도체제 확립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그해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대일항전의 무력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광복군은 중국의 지원을 받는 처지여서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통할 지휘를 받게끔 제약되었다. 이에 차이석은 광복군을 임시정부의 군대로 명확히 정할 필요를 느끼고 한국광복군 '공약'과 '서약문을 작성하면서 광복군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유지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또한 1942년 민혁당계와 조선민족해방동맹계의 인사들이 국미위원에 참가하여 거국 내각이 형성되었을 때 그는 비서장의 자리를 맡았다.

1942년 10월 34회 정기의회는 약헌을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차이석은 조소앙, 조완구, 최석순, 박건웅, 김영주, 신영삼, 안훈, 유자명 등과 함께 약헌개정 9인 기초위원 중 1인으로 선출되었다. 이들 기초위원들은 1944년 4월 20일 제36회 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통과될 때까지 1년 반에 걸쳐 개헌 작업에 힘을 쏟았다. 이 시기 차의석은 의회와 정부의 권한 범위를 구분할 것을 주장했다. 요컨대 의회에서 정할 법과 정부에서 정할 법을 구분하자는 것이었다. 아울러 책임제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의회에서 국무원을 선거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주석의 권한을 대폭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법령은 대소를 막론하고 의회에서 통과시킬 것 등을 주장했다.

한편 국체와 정체 문제에서는 조소앙이 "대한민국은 균치공화국임"이라고 개정할 것을 주장하자 홍진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주장하며 '균치'를 가할 필요가 없다고 반박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에 차이석은 대한민국 임시헌장 총장에 인민의 권리의무에 광복운동자 자격을 포괄하고 균치의 내용을 적당하게 추가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임시정부를 혁명정부로 개칭하고 각부 행정도 위원제를 채용하자는 의견에 대해서는 '정부' 두 자 위에 관사를 둘 필요가 없고 임시의 성질을 가진 때문에 '임시' 두 자를 쓰게 되었다면서 관사를 고치면 오히려 여러 가지 병폐가 생길 수 있다며 반대했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혁명정부로 고치면 임시정부는 없어지고 혁명정부가 나온 것 같이 생각될 수 있ㅇ기 때문에 그대로 임시정부를 써야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1942년 9월 한국독립당 당의의 이론적 체계 초안을 작성해 발표하여 한국독립당의 이념을 분명히 밝혔다.

2.9. 사망

1945년 8.15 광복으로, 일제는 패망하고 조선은 광복을 맞이했다. 이에 차이석은 임시정부를 국내로 환국시키는 데 필요한 작업에 착수했다. 1945년 9월 3일 임시정부가 김구 주석 명의로 발표한 성명서인 '국내외 동포에 고함'과 임시정부 당면정책 14개 조항은 차이석이 생전에 남긴 마지막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차이석은 격무에 지쳐 탈진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환국 준비에 여념이 없다가 9월 5일 임시정부 청사에서 근무하던 중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급히 인근의 관인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상태가 매우 위급했다.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윤경빈 증언'에 따르면, 그는 병원에 입원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여기서 죽는구나....

1945년 9월 9일 저녁 11시 20분, 차이석은 끝내 조국에 발을 들여보지도 못한 채 충칭의 관인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64세. 그의 유해는 충칭에 묻혔다가 김구의 자제 김신에 의해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2가 효창공원 임정요인 묘역에 이장되었다. 김구는 1948년 이시영과 함께 차이석을 위한 사회장을 치르면서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발표했다.
차이석 선생은 해외혁명운동자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시기로 유명하시었다. 탁월한 사무처리의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 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차이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여담

  • 2019년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가 자신의 책 《 반일 종족주의》를 출간할 당시 조국 당시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이 책을 두고 "구역질 나는 책"이라며 이영훈에 대해 "시민들이 (이영훈 같은 이들을) 친일파라 부를 자유가 있다"고 원색적인 비난을 가하자, 이에 대해 "나는 친일파가 활동하던 역사와 무관한 사람이며, 오히려 독립운동가 차이석 선생의 외손"이라고 주장했다. #
하지만 차이석의 외아들 차영조씨는 이영훈 전 서울대학교 교수가 차이석이 아닌 차이석의 큰형 차원석의 외증손자이며, 심지어 차원석은 아들 없이 딸만 두었는데, 이영훈은 차원석의 딸의 딸의 아들이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차이석은 이영훈 전 교수에게 '외외증종조부'가 되는 것. 더군다나 효창공원에 있는 산소에 단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고, 차이석의 명예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


[1] 3.1 운동 상하이로 망명하기 전에 차필성(車必成)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2]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쉬후이구(徐匯區) 싱슌난리(興順南里) 지구. [3] 심지어 조소앙 이승만 임시 대통령에게 쿠데타를 권유하는 서한을 보내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