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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앙덩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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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姜登選
간체 姜登选
한국식 독음 강등선
영문 Chiang Tengsien
생몰년도 1880년 ~ 1925년 11월 26일
초육(超六)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4. 관련문서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봉천군벌의 맹장으로 봉천의 오호장군 중 한 사람으로 불렸다. 양위팅과 함께 사관파에 속해 있었으나 궈쑹링이 일으킨 반봉사건에 휘말려 총살당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0년 하북성 남궁현 기현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일본 유학을 떠나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으며 1908년 일본육군사관학교 제5기 공병과[1]를 졸업했고 1912년에 바오딩 육군군관학교 교관이 되었다. 1913년 흑룡강성 장군 주경란이 그를 호군사 참모장에 임명했으며 광동성장으로 이임하면서 지앙덩셴을 데리고 갔다. 이후 주경란을 따라 사천, 운남을 전전하며 두루 인맥을 쌓았으며 특히 광동 시절에 광동어를 익혀 남방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이후 흑룡강성에서 허란주의 부하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궈쑹링을 만나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1920년 안직전쟁에서 봉천군벌이 직예군벌과 연합하여 승리를 거둔 이후 봉천군벌과 직예군벌의 불화가 시작되었는데 장쭤린 중국 국민당의 영수인 쑨원과 합작하여 차오쿤 우페이푸를 타도하고자 했다. 이때 나선 인물 중 한 사람이 지앙덩셴이다. 지앙덩셴은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봉천군벌의 패배로 끝난 이후 탄옌카이와 연락하며 봉천-국민당 합작을 추구했으며 1924년 진위군 1군단장에 임명되었다.

2.2. 2차 직봉전쟁 ~ 손봉전쟁

1924년 2차 직봉전쟁에 1군단장으로 참가하여 3군단 사령관 장쉐량과 함께 1,3 연합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때 관내진출에 반대하던 궈쑹링과 불화를 빚었다. 지앙덩셴 휘하의 2여단 포병단장 진침이 부대장 염종주가 작전에 힘쓰지 않다고 보고하자 지앙덩셴은 염종주를 해임했는데 염종주는 궈쑹링에게 달려가 호소했다. 궈쑹링은 즉각 1군단 소속이었던 진침을 자신의 부대로 배속시킨 후 진침을 단장에서 해임한 후 염종주를 복직시켜 지앙덩셴을 분노하게 했다.

10월 22일의 구문구 기습을 두고 지앙덩셴과 궈쑹링은 크게 언쟁했다. 궈쑹링은 즉각 구문구를 공격할 것을 주장했고 지앙덩셴은 이미 큰 전과를 올렸는데 병력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사관파와 사이가 좋지 않던 육대파의 수장인 궈쑹링은 장쉐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앙덩셴과 한린춘 등 사관파 인물들을 마구 비난한 다음에 회의장에서 나가버렸다. 이에 강등성은 궈쑹링을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다고 장쭤린에게 보고했다. 화가 난 궈쑹링은 병력을 일방적으로 철수시켰다. 이 떄문에 사하채 전투에서 봉군은 전선이 붕괴되는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후 지앙덩셴은 경극 배우의 말투를 흉내내며 궈쑹링을 조롱하곤 하여 더욱 궈쑹링의 원한을 샀다. 2차 직봉전쟁은 봉천군벌의 승리로 끝나고 장쭤린은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를 임시집정으로 추대했으나 봉군 내부의 불화는 여전했다.

장쭤린은 지앙덩셴에게 강소성을, 궈쑹링에게 안휘성을 주려고 했는데 양위팅이 강소성을 요구하였다. 이에 장쭤린은 양위팅을 강소독판에 임명하고 강등성을 안휘독판에 임명하고 상장으로 승진시켰는데 이 때문에 안휘성 접수 준비를 하던 궈쑹링은 닭 쫓던 개꼴이 되고 말아 크게 분노했다. 지앙덩셴은 궈쑹링이 임명한 참모장 팽진국을 해임했다. 이후에도 지앙덩셴은 강남의 지배자 자리를 노려 장쭤린에게 양위팅 대신에 자신에게 강남의 관리를 맡겨달라고 참소하곤 했다.
"강남의 정세는 매우 복잡합니다. '작은 제갈량'은 융통성이 부족하고 콧대가 너무 세어 강남의 국면을 대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강남을 저에게 맡기면 '작은 제갈량'보다 훨씬 유리할 것입니다."

이후 5.30 사건이 일어나자 학생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상하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부대를 파견했으며 10월에 직예군벌의 쑨촨팡이 5성연군 사령관에 취임, 손봉전쟁을 일으켜 봉천군벌에 대한 역습을 가하자 양위팅과 지앙덩셴 모두 패하여 달아나게 되었다. 쑨촨팡은 산동성경에 이르러 강소성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진격을 멈추었고 지앙덩셴은 1927년 11월 7일 덕주에서 제4방면군 군단장에 임명되어 휘하에 집익교, 진침을 여단장으로 임명했다.

2.3. 반봉사건과 죽음

휘하 부대를 북진으로 이동시킨 후 지앙덩셴은 소수 수행원을 이끌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봉천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때 궈쑹링이 반봉사건을 일으켜 장쭤린의 하야, 양위팅의 처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궈쑹링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몰랐던 강등성은 11월 24일 톈진에서 심양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야 궈쑹링의 전문을 보고 궈쑹링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알게 되었지만 설마 자신을 해치리라 여길 지는 몰랐는지 란저우에 이르렀을 때 궈쑹링이 참모장 팽진국을 보내 자신을 초청하자 의심하지 않고 그를 따라나섰지만 그대로 성냥공장에 수감되었다.

궈쑹링은 지앙덩셴을 만나는 것을 거부했고 지앙덩셴이 궈쑹링의 행동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하자 그를 즉시 총살할 것을 지시하여 성안에 보낸다는 구실로 11월 26일에 자동차에 태워 어느 백사장으로 데려갔다. 차안에 타고 있던 궈쑹링의 경호원들이 모래 때문에 차가 움직일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자 지앙덩셴이 이에 속아 차에서 내렸는데 그가 두발자국을 걷자마자 경호원들이 뒤에서 그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향년 44세였다. 하지만 봉천군벌 내부에 인맥이 많고 성격이 좋아 한린춘처럼 성격이 오만한 사람들까지 감화시키는 능력이 있던 지앙덩셴을 함부로 죽인 일은 궈쑹링에게 악수로 작용하였고 결국 궈쑹링 역시 진압당하여 총살당했다.

3. 참고문헌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곽송령의 "반봉사건", 송한용, 역사학연구 19권, 호남사학회.

4. 관련문서



[1]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894년 5기로 졸업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