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라배마| 앨라배마 주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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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월리스의 후보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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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미국 대선 미국 독립당 후보 | |
제45대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콜리 월리스 주니어 George Corley Wallace J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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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b10021> 출생 | 1919년 8월 25일 |
미국 앨라배마 주 클리오 | |
사망 | 1998년 9월 13일 (향년 79세) |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 |
국적 | 미국 |
학력 | 앨라배마 대학교 로스쿨 (법학 / LL.B.) |
재임기간 | 제45대 앨라배마 주지사 |
1963년 1월 14일 ~ 1967년 1월 16일1 | |
1971년 1월 18일 ~ 1979년 1월 15일2 | |
1983년 1월 17일 ~ 1987년 1월 19일3 | |
정당 |
[1] |
배우자 |
러린 번스[2](결혼: 1943년 ~ 사별: 1968년) 코넬리아 스니블리(결혼: 1971년 ~ 이혼: 1978년) 리사 테일러(결혼: 1981년 ~ 이혼: 1987년) |
자녀 | 4명 |
종교 | 개신교( 감리회) |
경력 |
앨라배마 주 하원 의원 제45대 앨라배마 주지사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독립당 후보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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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민주당 소속으로 앨라배마 주지사를 네 차례 역임한 인물이다. 역사상 가장 오래 앨라배마 주지사를 한 인물이다.인종분리 정책을 전면에 내세워 18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약 100년 동안 옛 남부연합 지역을 장악했던 남부 민주당파의 마지막 대표 주자라고 볼 수 있다. 1963년 앨라배마 주립대 흑인 등록 거부사건을 일으키며 케네디 행정부와 대립했고, 마틴 루터 킹과는 서로 앙숙 사이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발판으로 1968년 대선 때 인종분리, 68혁명 반대, 베트남전쟁 확전 등을 공약하며 극우 제3지대 후보로 출마해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1972년 암살 시도로부터 살아남은 다음 부터는 회심해서 적극적인 인종화합 정책을 펼치고 사과도 틈만 나면 하면서 인종찬반의 상징같은 인물이 되었다. 특히 1980년대 다시 주지사를 지내면서, 마틴 루터 킹의 날 재정, 제시 잭슨 등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와의 화합 등 적극적인 인종차별 철폐 행보를 보였기에 미묘한 평가를 받는다.[3]
2. 생애
2.1. 유년기와 정치 입문
1919년 8월 25일, 앨라배마 주 남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상업에서 일했고 할아버지는 의사였다.1935년 고등학생 시절 앨라배마 주 상원의 서기로 취업하고 1938년에 할아버지의 지방 선거 유세를 돕는 활동을 하며 정치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월리스는 앨라배마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하여 1942년에 졸업한다. 그 후 공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항공기관사로 복무한다.
1946년 앨라배마 주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며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경력 초창기에는 남부 정치인 답지 않게 인종관련 이슈에서 온건한 입장를 취했다. 예를 들어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남부 민주당원들이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인종 분리 정책 철폐 공약에 반발하여 대거 탈당했을 때, 월리스는 민주당에 남아있었다. 1952년에 지방 판사로 당선되는데, 당시 미국의 다양한 사회에 만연하던 인종차별적인 이미지와는 반대로 법정 내에서는 인종과 관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존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58년에 판사로서의 좋은 평판에 힘입어 앨라배마 주지사 민주당 경선에 출마하는데, KKK의 후원을 받던 상대 후보 존 M. 패터슨 (John M. Patterson, 1921-2021)의 인종몰이에 일격을 당해 경선에서 탈락한다. 이때의 패배가 큰 충격으로 남은 월리스는 인종 문제가 다시는 자신의 발목을 잡지 못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내가 왜 졌는지 알아? (경쟁 후보) 패터슨의
검둥이몰이에 당했기 때문이야. 내가 지금 여기서 장담하지.
다시는 당하지 않을거야.
경선 탈락 후 보좌관 세이모어 트래멜에게 한 말.
경선 탈락 후 보좌관 세이모어 트래멜에게 한 말.
2.2. 앨라배마 주지사
"제 경력과 좋은 도로와 좋은 학교에 대해 말해 봤지만 듣는 사람이 없었어요. 하지만
검둥이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갑자기 왜 인종차별적인 공약을 내세우는지 질문했던 지지자에게 했던 대답.
갑자기 왜 인종차별적인 공약을 내세우는지 질문했던 지지자에게 했던 대답.
"저는 지금
제퍼슨 데이비스가 섰던 곳에 서서 시민 여러분께 맹세합니다. 이곳은
연합국의 요람이자 위대한 앵글로 색슨 남부의 중심입니다. 우리는 우리 선대들처럼 다시 한 번 자유의 북소리를 울려야 합니다. 일어나 우리 몸에 흐르는 자유의 피에 호소합시다. 남부에 사슬을 채운 폭군에게 우리의 답을 전합시다. 지금까지 이 땅을 거닌 위인들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저는 이 불리한 상황에서 단호하게 반대하며 폭군의 발 앞에 도전장을 던집니다. 제가 말하기를 인종분리는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Segregation now, segregation tomorrow, segregation forever.)"
1963년 1월 14일 앨라배마 주지사 당선 연설
1963년 1월 14일 앨라배마 주지사 당선 연설
1962년 앨라배마 주지사 민주당 경선에서 여유롭게 1등을 차지한다. 이 당시 미국 남부에서는 공화당의 세가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민주당 경선이 사실상의 결선투표였다. 아니나 다를까, 월리스는 본 선거에서 96% 득표라는 결과를 보여주며 손쉽게 당선된다.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월리스는 인종 분리 철폐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케네디 정부와 대립각을 세운다. 연방정부가 군대를 동원시켜 앨라배마 대학교에 흑인 학생들을 입학시키려 하자, 자신이 직접 학교 강당의 정문을 가로막고 군대와 대치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에서 그대로 박제되어 현재까지도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역사에 빠지지 않고 회자되는 사건으로, 이를 계기로 월리스는 단숨에 남부 민주당 계파의 리더이자 전국적 스타로 떠올랐다.[4]
이 인기에 힘입어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경선에 출마한다. 사실상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승리가 예정되어 있는 싸움이었지만, 그래도 예상을 웃도는 결과를 선보이며 차기 대선 주자로 이목을 끄는 데 성공한다. 한편 사회적으로는 의료보험 확대, 주립 대학교 및 전문대학교 대거 건설, 대규모 공장 유치 등 포퓰리즘에 기반한 정책을 선보여서 민심을 잡는 데에도 성공한다.
앨라배마 헌법상 주지사 연임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월리스는 암으로 투병중이던 자신의 아내 루얼린 월리스를 1966년 주지사 선거에 얼굴마담으로 내보낸다. 남편의 후광 덕분에 루얼린은 경선과 본선 모두 무리없이 이기지만, 1년 반도 채 되지 않아 사망해 버린다.
2.3. 대통령 후보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월리스는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결심하였고, 민주당 경선에 참여하지 않고 제3당인 '미국독립당'의 후보로 출마했다. 거대 양당 후보가 아닌 이상 당선은 어렵다는 것은 물론 월리스도 알고 있었다. 실질적인 목표는 백악관 입성이 아니라 다른 후보들의 선거인단 과반득표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선거를 하원으로 끌고 가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희미해져가던 남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다시금 높여줄 뿐만 아니라,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 등 인종평등 법안들의 폐지를 이끌어 내는 한 수가 될 수도 있었다.부통령 후보로는 전 MLB 커미셔너였던 해피 챈들러[5], KFC 창업주 할랜드 샌더스 등이 물망에 올랐으며 최종적으로 전 공군참모총장인 커티스 르메이가 지목됐다.
대통령 선거에서도 인종 분리를 내세웠다가는 전국적인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한 월리스는 "난 한번도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 적이 없다"며 말을 싹 바꾼다. 백인우월주의나 네오나치 단체들의 공공연한 지지 및 후원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대신 전국적인 어필을 높이기 위해 의료보험과 사회복지 확대 등 기존에 해오던 복지정책들을 부각시켰으며, "민주당이랑 공화당이랑 하나도 다른거 없다"는 발언 등으로 비주류 이미지를 부각했다. 또한 외교적으로는 베트남 전쟁 완전 철수 등 고립주의를 내세웠고, 흑인들 대신 히피들을 집중적으로 규탄하며 법과 질서를 부르짖었다.
월리스의 언더독 전략은 거대 양당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후보는 보수층이 분열되어 어부지리로 민주당이 이기는 것을 두려워했고,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는 중서부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대거 이탈을 우려했다. 결과적으로는 리처드 닉슨이 대승을 거두며 월리스의 작전은 실패했지만, 선거인단을 무려 46명이나 확보하는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 현재까지 제3당이 선거인단을 확보한 사례는 월리스가 마지막이다.
2.4. 다시 앨라배마로
1970년에 주지사에 재출마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번복하고 앨라배마 주지사로 출마한다. 민주당 경선 상대이자 현직 주지사였던 알버트 브루어[6]는 더 이상 흑인들을 한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흑인 유권자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유세를 펼치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지지도 받는다. 이에 월리스는 당시 기준으로도 심하게 인종차별적인 유세로 맞선다. "앨라배마가 흑인들에게 넘어간다"는 발언이나 백인 여자아이가 흑인 남자들에 둘러싸인 TV 광고 등, 적나라하게 흑인들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선거전략으로 10년 전 자기가 당했던 인종몰이를 적극적으로 썼다. 결국 월리스가 3%p의 근소한 차이로 경선에서 이겼다.[7] 본선에서는 앨라배마주 전국민주당[8] 후보와 무소속 후보를 상대로 74.5%를 받아 압승한다.이후 더이상 대통령 출마 안 한다는 말을 번복하고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이번에는 민주당 경선에 참가했는데, 인종문제에 관련해서는 또 입장을 바꾸어 "난 항상 온건파였다"라고 하며 말뒤집기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북부에서도 나름 괜찮은 성적을 내며 승리 가능성이 보였지만,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아서 브레머라는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중태에 빠지면서 본의 아니게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월리스는 긴 수술 끝에 목숨을 건졌지만 평생을 하반신 불수로 살게 된다.
이 긴 수술과 수개월 간의 입원 과정에서 조지 월러스는 본인의 인종차별주의가 잘못됐음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월리스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앨라배마 헌법이 바뀌어 주지사 연임이 가능해지자 월리스는 1974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마지막으로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다시 한번 나서지만, 같은 남부 출신인 조지아 주의 지미 카터 주지사와의 경쟁에서 완패하면서 남부의 표조차 확실하게 얻지 못하게 되자 조기 사퇴했다. 1979년 주지사 임기가 끝이 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1969년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
2.5. 말년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지나가야 마땅합니다.
첫 주지사 임기 시절 앨라배마 대학교 정문을 가로막은 사건을 회상하며.
첫 주지사 임기 시절 앨라배마 대학교 정문을 가로막은 사건을 회상하며.
1980년대에 빌 클린턴 당시 아칸소 주지사와 조지 H. W. 부시 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 |
총격 사건의 후유증을 견디기 위해 종교를 다시금 접한 월리스는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난다. 신앙심의 여파로[9]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인종차별적인 행적에 대해 깊이 참회한다고 선언하고, 흑인 사회 지도자들에게 사과를 했으며 용서를 빌었다.
1982년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주지사 선거에 나섰는데, 유세방식과 내용이 이전 선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흑인 유권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으며, 다수의 흑인들을 주 정부 곳곳의 요직에 앉히겠다는 약속을 했다. 월리스의 참회가 진실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정치적으로 흑인 유권자들의 힘을 무시하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했기에 악어의 눈물을 흘린 것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결국 흑인 유권자들은 월리스에게 90%가 넘는 몰표를 주었고[10], 월리스는 흑인 두명을 자신의 내각에 임명하는 등 앨라배마 주 역대 최다 흑인 정부직 임명을 기록하며 유세 당시의 약속을 지켰다.
임기가 끝난 후 다시 은퇴하여, 미국 정치의 원로로 여생을 보냈다.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리틀록 사건의 주인공인 오벌 포버스와 함께 공식적으로 제시 잭슨을 지지하며 미국인에게 다시 한번 충격을 주었다.
그 이후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빌 클린턴이 지나치게 진보적이라서 남부가 공화당 텃밭으로 변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자당의 빌 클린턴이 아닌 조지 H. W. 부시와 밥 돌을 지지하였다. 아들 조지 월리스 2세는 1996년 민주당을 탈당한 뒤 공화당에 입당했다고 밝혔다. 조지 월리스도 공화당에 입당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말년에는 치매와 알츠하이머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98년 패혈성 쇼크로 사망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946 | 미국 앨라배마주 하원의원 선거 | 바버 카운티 |
|
1,526 (100.0%) | 당선 (1위) | 초선 |
1962 | 미국 주지사 선거 | 앨라배마 | 303,987 (96.27%) | 초선 | ||
1968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9,901,118 (13.53%, 46명) | 낙선 (3위) | ||
1970 | 미국 주지사 선거 | 앨라배마 |
|
637,046 (74.51%) | 당선 (1위) | 재선 |
1974 | 미국 주지사 선거 | 497,574 (83.16%) | 3선 | |||
1982 | 미국 주지사 선거 | 650,538 (57.64%) | 4선 |
4. 대중매체
- 레너드 스키너드의 노래 " Sweet Home Alabama"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되었다. 실명 언급은 아니지만 "남부 사람들은 주지사를 좋아한다", "주지사도 정직한 앨라배마" 등으로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닐 영이 "Southern Man"이라는 곡으로 남부 사람들을 조지 월리스 같은 개념 없는 인종차별주의자나 뽑는 극우파로 매도하자, 미국 남부[11] 출신인 레너드 스키너드가 "그래서 우리 주지사가 뭐 어땠다는 거냐. 우리도 최선을 다했는데 쟤가 뽑힌 것 어떡하냐[12]"라는 투로 넣었고 나중에 닐 영이 레너드 스키너드에게 남부 사람들을 일반화한 것에 대한 사과를 했다. 사실 레너드 스키너드는 조지 월리스의 인종차별 정책을 강하게 반대했고, 자신들은 진보주의와 인종 평등을 지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레너드 스키너드는 예전 공연할 때 남부 연합기를 걸고 팬들 중 남부 백인들이 많아 레드네크의 이미지가 강했던 밴드였으므로 이 곡이 조지 월리스 찬양곡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이 맥락을 모르는 상태로 가볍게 들었을 때와는 다르게 이 곡은 조지 월리스에 대한 찬양 곡이라고 할 수 없다.
-
타계하기 직전인 1997년에 그의 생애를 다룬 2부작 TV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했다. 월리스 역으로 게리 시니스[13] 와 월리스 부인인 코넬리아 월리스 역으로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했다. 존 프랑켄하이머가 감독을 맡았다.
- 포레스트 검프에서 등장한다. 흑인 학생들의 주립대 등록을 막으려다가 연방군과 대치하면서 케네디 정부를 군사독재로 비난하고 퇴장하고 그걸 옆에서 포레스트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듣고 있다. 나중에 총격을 당한 것 역시 언급된다. 포레스트 검프의 다른 실존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실제 영상이 그대로 쓰여졌다.
- 미드 지정생존자에서도 자주 언급. 미시간 주지사가 톰 커크먼 대통령의 리더십을 의심하며 주의 권리 운운하자 백악관 참모진들이 앨라배마 대학교 흑인 등록 거부 사건을 언급하며 강하게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 TNO에선 역사대로 앨라배마 주지사로 등장한다.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국가진보동맹 후보로 출마할 수 있다.
- 국내외를 막론하고 미국사 관련 커뮤에서는 갤주에 가까운 취급을 받곤 한다. 한때는 미국 역대 대통령 후보 중 가장 노골적인 극우, 인종주의적 성향을 내비치기도 했고 유명한 노래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종종 밈으로 쓰이며 찬양(?)의 대상이 된다.
[1]
1968년 대선때는 잠시 민주당을 나가
미국 독립당에 몸담았다
[2]
제46대 앨라배마 주지사(1967-1968)
[3]
그러나 이런 행보들이 기회주의에 기반했다는 비판도 만만찮다.
[4]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인 포레스트가 당시 이 앨라배마 대학교에 다니고있었다. 그래서 대통령인
존 F. 케네디가 흑인 학생의 보호를 위해 보낸 그레험 장군과 정문에서 대치하고 있는 윌리스의 실제 뉴스영상이 영화에 나온다. 포레스트가 그 둘 옆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게 CG로 합성한게 깨알 유머포인트.
[5]
MLB 첫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의 영입을 지지한 이력이 있어 탈락되고 만다(...).
[6]
러린 월리스의 임기 중 사망으로 주지사직을 승계했다.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월리스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수를 맞았다. 주지사직을 뺏겨서인지 1982년 주지사 선거에서는 공화당 후보를 지지한다.
[7]
브루어는 도시지역, 북부 앨라배마, 흑인들이 절대다수인 블랙 벨트에서 승리했지만 525,951표(48.44%)를 받아 559,832표 (51.56%)를 받은 월리스에게 경선에서 패배한다.
[8]
딕시크랫이 장악한 앨라배마 주 민주당에 항의한 일부 친민권 민주당 지지자들이 만든 지역정당
[9]
총격을 당했을 때 흑인 민권운동가인
셜리 치점이 자신을 병문안 온 것에 감동하여 회심했다는 주장도 있다.
[10]
사실 이렇게만 간단하게 말하는건 오해의 소지가 있다. 민주당 경선 단계에서는 흑인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월리스의 반대 후보를 찍었다. 하지만 본선의 공화당 후보인
에모리 폴마르가 월리스와는 비교도 안될 강경한
호모포비아에
인종주의자라는 미친 인간이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월리스를 찍은 것 뿐이다.
[11]
앨러배마 출신은 아니고
플로리다 출신이다.
[12]
민주주의로 뽑힌거라 우리도 가만히 있는건데 왜 우리를 싸잡아서 욕하냐
[13]
시니스는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의 전기 영화에도 출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