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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대 아칸소 주지사 오벌 유진 포버스 Orval Eugene Faub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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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32c><colcolor=#fff> 출생 | 1910년 1월 7일 |
미국 아칸소 매디슨 카운티 | |
사망 | 1994년 12월 14일 (향년 84세) |
미국 아칸소 콘웨이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커먼웰스 대학교 (졸업) |
종교 | 기독교 ( 남침례회) |
직업 | 정치인 |
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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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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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제36대 아칸소주 주지사 직을 역임했다. 피부색을 이유로 학생들의 교육을 분리하거나 차별을 금지하도록 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주방위군을 동원하여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무력으로 강제로 막은 리틀록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다.2. 생애
1910년 10월 17일 포버스는 아칸소주 매디슨 카운티에서 샘 포버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샘은 사회주의자였고 그의 아들 오벌을 사회주의 전문 학교인 커먼웰스 칼리지에 입학시켰으나, 그는 아버지의 정치적 견해에 불만을 품고 강경 보수 정치가로 지내게 된다.포버스는 1930년대 초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1936년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매디슨 카운티의 순회 서기 및 기록관으로 선출되어 1941년 까지 역임하였고, 1942년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1954년 포버스는 당시 아칸소 주지사였던 프랜시스 체리를 경선에서 누르고 민주당의 주지사에 후보에 선출되었고, 그해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를 꺾고 주지사직에 당선되는데 성공했다.[1]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된 포버스는 당시 미국 대다수의 남부주들이 그랬듯이 철저한 인종분리 정책을 이어나갈 것을 선포했고, 1957년 주연방군을 동원하여 리틀록 고등학교에 9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등교를 저지한 리틀록 사건의 장본인으로 알려지며 세간의 비판과 화제를 받았다. 포브스의 주연방군 동원 사태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포함한 중앙정부와 전직 아칸소 주지사 시드 맥매스와의 마찰을 빚었다.[2] 리틀록 사건이 사회적 약자였던 흑인들과 중앙정부의 승리로 끝나자 포버스는 리틀록 나인 멤버들이 졸업한지 1년 뒤인 1960년 리틀록 고등학교를 폐쇄시켜버렸고, 이로 인해 수많은 대중들의 인기를 잃었다.
그러나 그도 대중들로부터 멸시만 받은것은 아니었다, 포버스는 인종분리 정책을 지지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어, 1958년 갤럽의 여론조사 "미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10인의 인물" 중 한명으로 꼽히면서 20세기 후반 아칸소 정치인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자 "가장 미움받는" 사람이었다.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포버스는 군소정당인 국가주의 권리당 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본선에서 0.07%의 처참한 성적으로 낙선했다.
그리고 강경 인종분리 정책의 선구자로 여겨졌던 그도 점차 온건한 정책을 펴면서 점차 백인우월주의자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62년 아칸소 주지사 선거를 앞두고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백인 시민 협회와 결별해 주지사 3선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1968년 주지사 선거 불출마 선언 이후 자신과 같이 인종 분리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조지 월리스 전 앨라배마 주지사의 러닝메이트 후보로 예상되기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인종 분리주의자라는 대중의 인식을 의식한 월리스는 자신의 부통령 후보로 커티스 르메이 전 공군참모총장을 선택했다.
포버스는 이후에도 주지사 선거를 위해 지속적으로 민주당 경선에 참가했지만 데일 범퍼스, 데이비드 프라이어, 빌 클린턴과 같은 경쟁자들에게 밀려 번번히 경선 탈락에 머물렀다. 1988년 그는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흑인 인권운동가 출신 정치인 제시 잭슨을 지지해 세간을 놀라게 만들었다.[3]
그는 정계에서 은퇴한뒤 자신의 지병인 전립선암으로 투병하다가 1994년 12월 14일 아칸소주 콘웨이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954 | 미국 주지사 선거 | 아칸소 |
|
208,121 (62.09%) | 당선 (1위) | 초선 |
1956 | 미국 주지사 선거 | 321,797 (80.65%) | 재선 | |||
1958 | 미국 주지사 선거 | 236,598 (82.47%) | 3선 | |||
1960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주권당 | 44,984 (0.07%) | 낙선 (6위) | |
미국 주지사 선거 | 아칸소 |
|
292,064 (69.21%) | 당선 (1위) | 4선 | |
1962 | 미국 주지사 선거 | 225,743 (73.27%) | 5선 | |||
1964 | 미국 주지사 선거 | 337,489 (57.00%) | 6선 |
4. 여담
[1]
포버스의 경선 후보 상대였던 체리와 그의 반대파들은 포버스의 커먼웰스 칼리지 재학을 문제삼아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그는 커먼웰스 칼리지 재학을 부정치 않고 당당하게 인정해 오히려 이 공산주의 몰이를 역효과로 전환시켰다.
[2]
참고로 시드 맥매스는 당시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남부 지방의 주지사를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에 대한 참정권 확대와 주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인사를 주 교육 위원회에 임명하는 등 온건한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이었다.
[3]
여담으로 그를 부통령 후보로 선택할지를 고민했던
조지 월리스도 잭슨을 대선 후보로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