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20:47:29

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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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調

조서(법률) 문서로.

2.

조서(詔書)는 ' 임금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이다. '조칙(詔勅)', '조명(詔命)', '조책(詔冊)', '조유(詔諭)', '제서(制書)', '전고(典誥)', '봉조(鳳詔)', '단서(丹書)', '금문(金文)'이라고도 한다.

천자 명의로 작성되는 공문서다. 천자의 명령을 담고 있으며 줄여서 조(詔)라고 한다.

천자는 보통 황제이므로 황제의 명령을 조라고 한다. 진시황이 천자로서 이 되고 이후 황제로 등극한 뒤 황제의 명령에 대해 네가지로 구분을 두었다.
  • '조()' : 조정(중앙정부)에 내리는 명령
  • '칙()' : 칙서(勅書), 칙령(勅令)이라고도 하며 중앙정부 이외의 기관, 백성에게 내리는 명령. 조서와 칙서를 합쳐 조칙(詔勅)이라고 한다.
  • '제()' : 제도를 고치거나 상, 벌을 내리는 명령.
  • '책()' : 책명(策命)이라고도 하며 제후를 봉하는 명령.

이런 천자, 즉 황제의 명령들은 통틀어서 '성지(聖旨)'라고 불린다. 지()는 '누군가의 뜻'을 의미하는데 거기다가 거룩할 성()을 더해 '신성한 자의 뜻'이라는 단어를 만든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황제의 명령을 '선지(宣旨)'라고도 한다. '위대한 자의 뜻'이란 의미.

천자의 조서는 한림원(翰林院)에서 제작한다. 천자가 구두로 명을 내리면 한림원 소속 관리들이 듣고 정리하여 받아 적는 식이다. 조서는 황제국에서만 사용되었으며, 제후국에선 교서(敎書) 등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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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의 조서(詔書).
청나라 때의 조서를 기준으로 볼 때 조서의 작성은 먼저 황제의 권위를 뜻하는 봉천승운황제조왈(奉天承運皇帝詔曰)을 쓰고, 그 뒤 내용을 쓴다. '하늘의 뜻을 받아 황제가 조한다'는 뜻. 봉천승운황제란 자칭은 주원장이 쓴 뒤로 청 대까지 쭉 이어졌다

마지막으로는 이를 알고 명을 따르라는 뜻으로 포고천하, 함사문지(布告天下,咸使聞知)나 간단히 공경하라는 뜻의 흠차(欽此)라는 말을 쓰고, 날짜(황제의 연호를 기준으로 한다.)를 쓴 뒤 옥새를 찍어 끝을 맺는다.

황제의 말씀과 명령을 적은 문서이므로, 당연히 그냥 서신 전달하듯이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보통 최고급의 종이 혹은 흰 비단 등지에 적어 고급진 비단 등지에 배접하여 두루마기 등으로 치장했으며, 화려하게 꾸민 문서함 등지에 넣어 가까이 부리는 내관 내지는 상서성 등지의 관료에게 주어 사자로서 전달하게 하였다. 사자 혹은 그 행렬이 가는 길 역시 수행단을 붙였으며, 특히 외지나 변방 및 외국에 가는 경우 더 화려하게 하여 위엄을 높였다. 이를 접수할 때 역시 예법을 지켜야 했는데, 그냥 받아 읽는 것이 아닌 주변을 정결하게 하고 조서를 향하여 절했으며, 그 대상자 및 수하들은 조서를 전달하는 사자 앞에 엎드려 황제가 내리는 조서를 접수하였다. 사자가 그 내용을 크게 읽으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 그 내용을 전달받았으며, 대상자는 그 내용을 듣고 황제폐하 만세 등의 수식어로 황제의 은혜에 감사를 표해야 했다.

군주가 존재하는 군주국에서 이 조서는 각종 공문서의 상위버전이고 저작권 보호대상이 아니라고 하지만 조서 위변조시 공문서 위조죄보다 형량이 높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공문서 위조시의 형량은 도장이 있으면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 도장이 없으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만엔 이하의 벌금인데, 조서는 3년 이상 혹은 무기징역이다.

한국 왕조에선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은 제후의 교()와 천자의 조(詔), 그냥 임금의 명령(命令)을 동시에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왕이 교하였다', '왕이 조하였다' 뿐만 아닌 '왕이 명령을 내렸다' 같이 명령의 명칭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다. 교서나 조서는 중국 왕조의 규정이므로 우리 왕조는 적당히만 수용한 것이다. 발해는 조칙에 관한 기록이 없다.
전주(前主)[1] 사군(四郡)(옛 한사군)의 땅()이 붕괴()하던 시기()에 구적(寇賊)을 없애 봉강(封疆)을 늘렸다. 그러나 아직 해내(海內)(천하(天下)의 다른 말)를 합치치 못했는데 민중()을 차갑고 난폭하게 다루니 간사함를 도리로 삼고 모욕함을 기술로 삼았다.

번뇌를 주고 부담을 늘리니 사람은 지쳐가고 은 허해졌다. 그런데도 궁실(宮室)을 늘리고 싶어하고 제도(制度)를 거치지 않으니, 노역이 멈추질 않고 원성이 뒤따라 커졌다.

계속하여 연호를 훔치고(竊號) 존호를 칭했으며(稱尊), 를 죽이고 아들을 죽였도다. 천지(天地)가 용납하지 않고 신인(神人)이 분노하니 궐서(厥緖)(세상의 질서)가 무너졌다. 그러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짐(朕)은 군공(群公)의 정성스런 마음(心) 덕분에 구오통림(九五統臨)의 극(極)에 올랐다. 풍속을 옮기고 부드럽게 할것이며 다같이 새로움을 추구할 것이다.

개철지규(改轍之規)를 지킬 것이며 벌가지칙(伐柯之則)을 깊이 지킬 것이다. 군신(君臣)이 어수지환(魚水之歡)처럼 지낼 것이며 하해(河海)(천하(天下))와 안청지경(晏淸之慶)을 지낼 것이니라.

이로써 내외군서(內外群庶)들은 짐()의 마음을 알지어다!
- 고려사 태조 세가 중 발췌. 철원성에서 즉위 후 내린 고려 왕조 최초의 조서(詔書).
고려는 전 왕조들처럼 교서와 조서를 섞어 쓰다가 점차 외왕내제 체제가 성립되면서 이후 임금의 명령은 모두 조, 칙, 제, 책, 성지, 선지로 부르며 '황제국(皇帝國)'은 아닐지언정 '천자국(天子國)'으로서 천하에 명령을 선포했다.

고려사 예지 65권 제 19항, 예(禮) 7조엔 거란, 여진 같은 북조 사신들은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만월대에 와도 고려국왕의 들어오라는 성지(聖旨), 선지(宣旨)가 있어야만 들어 갈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고려의 조서 또한 한림원[2]에서 제작되었다. 김부식, 이규보 등 유명한 고려시대 학자는 다 한림원에 소속된 적이 있다.

하지만 충렬왕 때 모조리 제후국 예법으로 격하되었고, 고려 다음의 조선 성리학 명분에 입각한 제후를 자처, 제후국 예법을 그대로 이용한다.

후 조선국왕(朝鮮國王)이 대조선국(大朝鮮國) 대군주(大君主)로 격상시키며 황제가 아닌 천자를 자칭, 대군주의 명령은 모두 천자국 예법으로 격상된다. 이후 대한제국(大韓帝國) 대황제(大皇帝)가 되면서 천자국 및 황제국의 예법을 갖춘다. 이 때 고종황제의 조서를 보면 스스로를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라고 칭하고 있다.

일본 제국의 경우 붉은 색 원고지에 우종서 쓰기로 조서를 작성하였으며, 조서를 다 쓰고는 천황의 수결(서명)을 쓰고 어새를 찍어 인증하였다. 그 뒤에는 해당 조서에 책임을 지는 국무대신들의 서명을 받았다.

어새의 크기가 워낙 커서 조서의 마지막 장은 3행 이내로 종결하고 7행 이상을 비운다는 정서법을 가지고 있었다. 한 변이 3촌(= 9.09cm)이라 찍을 공간을 두지 않으면 조서 본문에 인영(찍은 도장)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켜지지 못한 유명한 사례이자 유일한 사례가 바로 태평양전쟁의 일본의 항복을 선언한 그 종전조서다.

3.

한국 바둑에서 쓰이는 용어로 조훈현 서봉수를 묶어 칭하는 용어.
한국 현대 바둑의 선구자이자 대부(代父)인 조남철 이후, 조서 두 사람이 밀고 당기면서 한국바둑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시켰다. 이처럼 한국바둑에서 두 사람의 족적이 유난히 큰 까닭에 일종의 고유명사처럼 굳어졌다.

2012년 9월 경 박치문 기자의 글에 의하면, 두 사람은 1973년 1월에 첫 대결을 한 이래, 그 당시까지 총 366번 싸워 247:119(조훈현 기준)의 승패를 기록 중이었다. 두 사람은 현역으로 활동 중이므로 '조서전쟁'은 현재 진행 형.

4. 고대 중국 후한 말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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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건 궁예를 무조건 전주로만 불렀다. [2] 원봉성 → 학사원 → 한림원 순으로 부서명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