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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
역대 우승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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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차 | 연도 | 우승 | 준우승 | 점수 |
1 | 1988~89 | 조훈현 | 녜웨이핑 | 3-2 | |
2 | 1992~93 | 서봉수 | 오타케 히데오 | 3-2 | |
3 | 1996 | 유창혁 | 요다 노리모토 | 3-1 | |
4 | 2000~01 | 이창호 | 창하오 | 3-1 | |
5 | 2004~05 | 창하오 | 최철한 | 3-1 | |
6 | 2008~09 | 최철한 | 이창호 | 3-1 | |
7 | 2012~13 | 판팅위* | 박정환 | 3-1 | |
8 | 2016 | 탕웨이싱 | 박정환 | 3-2 | |
9 | 2020~23 | 신진서 | 셰커 | 2-0 | |
10 | 2024 | 이치리키 료 | 셰커 | 3-0 | |
* 우승 당시 三단이었으나, 중국기원의 규정에 따라 즉시 九단이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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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쏘팔코사놀 레전드리그 선수단 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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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경북 Yes 문경 감독:
양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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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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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병 |
<colcolor=#fff>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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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우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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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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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네 | |
경기 의정부 행복특별시 감독: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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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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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혁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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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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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상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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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 |
부산 KH에너지 감독: 김성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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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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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석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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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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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훈 | |
경북 칠곡황금물류 감독: 윤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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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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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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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관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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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신 | |
경북 스타 영천 감독: 윤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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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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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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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능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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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면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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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헌 | |
경북 의성마늘 감독: 하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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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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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철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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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영 | |
경기 고양특례시 감독:
한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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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연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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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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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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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 | |
전북 수소도시 완주 감독: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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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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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효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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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문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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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훈 |
서봉수 徐奉洙 | Seo Bong-s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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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쏘팔코사놀 레전드리그|2024 쏘팔코사놀 레전드리그 스타 영천 1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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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직업 | 바둑기사 |
소속 | 한국기원 |
출생 | 1953년 2월 1일([age(1953-02-01)]세) |
충청남도
대덕군 유천면 (현 대전광역시 서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동양공업고등학교 (전학) → 배문고등학교 (졸업) |
입단 | 1970년 |
단급 | 九단 |
누적우승경력 | 33회 |
[clearfix]
1. 개요
한국 바둑의 전설 중 한 명으로, 조서시대를 이끌고 4인방[1]의 한 축으로 군림했으며 세계대회에서도 우승한 프로기사.2. 상세
중1때 기원을 운영했던 아버지(1급)의 영향으로 독학으로 바둑을 시작해 1년만에 기원 1급이 되었다. 배문고 재학시절 한·중·일 고교생 바둑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입단에 성공한다. 이때 나이가 만 17세였다. 심지어 바둑책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 현현기경"도 제대로 읽지 않고 입단한 것이라, 나중에 입단하고 한참 후에 "아, 이런 좋은 책이 있었구나!" 하면서 탄식했다는 일화가 있다.입단 전부터 서봉수는 유력한 입단후보로 공인을 받고 있었다. 그의 기재를 말해주는 에피소드 하나. 바둑평론가 노승일 씨(' 동양증권배'의 관전기 필자)의 회고담이다.
내가 노량진에 살 때의 일이었다. 서봉수도 그 무렵 노량진에서 좀 떨어진 신길동인가에 살고 있었다. 나도 서봉수도 '노량진기원'에 출입을 했다.
서봉수는 아마 고1때부터 나온 것으로 기억된다. 처음에는 호선이었나, 내가 백이었나 했는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내가 두 점을 놓고 두게 되었다. 그의 진보는 눈부신 바 있었다. 그때 노량진 기원에는 또 이원식 씨라는 유명한 아마 강자가 있었는데, 그가 말하자면 서봉수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웬만한 바둑꾼이라면 이원식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루는 이원식 씨와 내가 정석사전에서 묘한 정석 하나를 발견해 정석의 뒷부분을 생략해 놓은 채 서봉수를 불러다가 '이런 모양에서는 어떻게 두는 것이 최선일까'라고 물어보았다. 서봉수의 재주를 테스트도 해볼 겸 좀 골려주자는 장난기도 있었다.
그런데 서봉수는 그 모양을 보며 끙끙 앓더니 그래도 한수 한수 정석사전에 나와 있는 그대로 최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서봉수는 그 시절에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정석을, 어떤 모양에서도 최선의 길을 헤쳐가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다.
서봉수는 아마 고1때부터 나온 것으로 기억된다. 처음에는 호선이었나, 내가 백이었나 했는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내가 두 점을 놓고 두게 되었다. 그의 진보는 눈부신 바 있었다. 그때 노량진 기원에는 또 이원식 씨라는 유명한 아마 강자가 있었는데, 그가 말하자면 서봉수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웬만한 바둑꾼이라면 이원식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루는 이원식 씨와 내가 정석사전에서 묘한 정석 하나를 발견해 정석의 뒷부분을 생략해 놓은 채 서봉수를 불러다가 '이런 모양에서는 어떻게 두는 것이 최선일까'라고 물어보았다. 서봉수의 재주를 테스트도 해볼 겸 좀 골려주자는 장난기도 있었다.
그런데 서봉수는 그 모양을 보며 끙끙 앓더니 그래도 한수 한수 정석사전에 나와 있는 그대로 최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서봉수는 그 시절에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정석을, 어떤 모양에서도 최선의 길을 헤쳐가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다.
1972년 제4기 명인전 도전기 대국상황. 왼쪽은 대국수 조남철, 오른쪽이 서봉수. 서울 대원호텔
여하간에 프로에 입단한 직후 조남철 九단(당시 八단)을 물리치고 명인 타이틀을 차지했는데, 이 때 단수가 二단. 요즘이라면 初단이나 九단이나 실력 차이가 크다 보기 힘들고, 성적을 꾸준히 내거나 국제대회 우승을 하면 저절로 승단하지만 저 당시는 승단대회의 권위가 강력했다. 이마저도 대회 결승에 오를 때는 初단이었고, 결승 5번기 도중 승단대회를 통과해서 二단 승단한 것이다.1972년 제4회 명인전 결승 4국, 조남철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며 진을 쳤지만 진은 바람처럼 흔들리며 무너졌다. 이윽고, 조남철이 나지막이 말했다. 없군. 불계패, 바둑돌을 던진 것이다. 입단 2년 차, 스무 살의 서봉수가 조남철을 무너트리고 명인전을 차지한 것이다. 한국바둑역사의 획을 긋는 파천황의 사건이었다. 당시 조남철 九단은 '서봉수가 三단만 되었어도…'라고 탄식했다고.
우승 후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서봉수는 “정석을 잘 몰랐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국장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2]
입단에서 첫 우승까지 1년 8개월 걸렸는데,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기록이 박영훈 (당시)二단의 2년이다. 이후 명인위를 5연패하면서 서명인으로 불리게 된다.[3] 서봉수의 명인위 쟁취에 이어서 조훈현이 국수전을 우승하면서 한국 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九단과 김인 九단, 윤기현 九단 등 일본유학파 1세대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조국수 vs 서명인의 장기집권 시대가 열리게 된다.
1972년 군문제로 인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조훈현 9단은 1974년부터 타이틀을 따내며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반면, 서봉수 9단은 명인 타이틀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조훈현 9단에 비해 한 수 아래로 평가받고 있었다. 당시 관철동 한국기원에서는 조훈현 9단과 내기바둑을 두는 기사들이 많았는데, 서봉수 9단은 번번이 깨지면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서봉수 9단에게 돈 500원은 내기값이 아닌 수업료였던 것. 서봉수 9단은 조훈현 9단과의 수많은 대국으로부터 그의 날카로운 감각과 포석 센스 등을 습득, 마침내 제6기 명인전 도전기에서 조·서 첫 타이틀 대결이 성사된다. 결과는 서봉수 9단의 3 대 1 승리. 모두의 예상을 빗나간 결과. 그리고 이 대결 이후, 관철동에서 두 기사의 연습대국은 더이상 볼 수 없었다고 한다.
6기 명인전 도전기. 최초 조서격돌. 1974년 서 명인의 승리로 명인 방어
조훈현의 공세를 물리친 탓에 한숨을 돌린 건지 그해 서봉수는 제1기 국기전을 접수했다. 이듬해 명인전 도전자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조남철이었다. 조남철의 불꽃을 손쉽게 잠재운 서봉수는 왕위전에 쳐들어가 김인에게 항서를 받아냈다. 명인전 5연패 저지를 위해 도전자로 나선 것은 윤기현이었다. 살기 위해 반상 위에 모든 것을 건 서봉수의 앞길을 막기 위해 나타난 장벽은 하나같이 일본 유학파들이었다. 윤기현마저 진압하고 5연패에 성공하자 서명인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이 그의 이름을 대신했다. 명예와 부를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평생 라이벌과의 기나긴 대결이 시작됐다.
조훈현 독주시대에 서봉수가 이긴 경기가 조훈현이 이긴 경기의 반도 안될 정도로 전적에서 크게 밀림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도전자이자 '라이벌'로 불렸다. 1970년대부터 20여년간 조훈현과의 타이틀 매치(결승전)만 대략 150여 차례 이상 겨뤘는데, 이는 당시 국내에 조훈현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프로 기사가 서봉수 뿐이었기 때문이다.
서봉수 바로 아래급인 '도전 5강 - 서능욱, 강훈, 김수장, 장수영, 백성호'은 10여년간 끊임없이 도전했으나 일단 서봉수에게 막히고, 정말 어쩌다 서봉수를 넘어서도 조훈현에게는 무참히 박살났다. 심지어 도전 5강은 1985년 조훈현과의 이벤트 치수 고치기 10번기에서 정선과 두 점을 왔다갔다하는 굴욕을 당하기까지 했다.[4][5] '동등한 대결로는 조훈현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이 판명된 굴욕적인 수치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당시 대한민국 바둑계에서는 서봉수 외에 조훈현과 싸움이 되는 기사가 아예 없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타이틀 매치는 조훈현vs서봉수의 구도가 되었고, 이 조국수vs서명인 시대는 결국 1990년대 초 이창호, 유창혁이 등장할 때까지 10년 이상 이어진다.
1987년 서봉수-조훈현.30기 국수전 도전3국.순국산 국수 탄생. 운당여관
한국 바둑에서 흉내 바둑으로 역사의 한 장을 수놓은 적이 있었다. 절대강자 조훈현은 동갑내기 맞수 서봉수의 저항을 뚫고 국내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해 이른바 '전관왕'을 이뤘다. 2인자 서봉수는 오뚝이처럼 일어나 '조훈현 천하'를 무너뜨렸다. 서봉수가 앞세운 새로운 무기가 바로 흉내 바둑이었다. 1980년 12월부터 시작한 왕위전 도전기 7번기에서 서봉수는 흉내 바둑으로 포석을 짠 세 판을 이기며 4대3으로 '왕위'를 따냈다.
그때 서봉수는 흉내 바둑을 둔 것은 작전이었다고 말했다.
"판을 좁히자는 뜻이었다. 조훈현은 감각이 탁월하고 발이 빠르다. 그래서 조훈현과 겨룰 때는 언제나 포석에서 밀려버렸다. 중반 전투나 부분 수읽기나 끝내기 계산이라면 나도 최소한 대등하게 버틸 수 있었다. 흉내 바둑의 핵심은 초반을 엇비슷하게 짜놓자는 것이었다. 상대가 감각을 휘두를 여지를 되도록이면 줄이고 빠른 걸음을 묶어두자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초반
포석을 똑같이 해놓고 곧바로 중반부터 시작하자는 뜻이었다."
#[6]
1990년 2회 동양증권배에서 계속 지고 있던 소년 이창호 5단에게 3-1로 승리하고 우승했다. 큰 승부에 강한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1993년 2회 응씨배에서 정밍황, 후지사와 슈코, 다케미야 마사키를 이기고 준결승에서 자신이 우상이라 생각했던 조치훈과의 3번기를 두게 되는데 명국을 두면서 2-1로 승리하는데 3국이 백미로 서봉수 일생일대의 명국이라 칭할만하다. 결승에서는 오다케 히데오에게 3-2로 승리하고 우승하였다.
응씨배 우승당시 주최자 잉창치 씨와
1996-97년 제 5회 진로배 국가대항전[7] 이창호의 독주로 조훈현마저 밀려나는 와중에 서봉수는 완전히 뒷전으로 몰렸고, 모두가 "서봉수는 끝났다."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제4회 진로배에서는 국가대표로 뽑히지도 못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1996년 이창호는 국내 8관왕에 국제 2관왕을 기록하는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유창혁은 SBS연승전과 테크론배, 응씨배를 우승했으며, 조훈현도 패왕전과 기왕전을 우승하며 버티던 시기였다. 반면에 서봉수는 무관으로 4인방의 한축을 어렵게 지키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1997년의 진로배 국가대항전, 한국의 차봉(두번째 주자)으로 나선[8] 서봉수는 중국과 일본의 기사들을 9연승으로 쓸어버리며 한중일 삼국을 충격에 몰아넣었다.[9] 서봉수의 9연승을 앞둔 당시 연합뉴스 기사[10] 무려 15명이 출전한 올스타전에서 열린 대국은 고작 11국, 중국의 선봉 위빈이 거둔 2승[11]을 제외하면 나머지 대국은 모두 서봉수의 것이었다. 국가대항전 9연승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전무후무한 대기록.[12] 이 대회에서 서봉수는 우승 상금, 대국료, 연승상금을 포함해 1억 4천만 원의 거액을 챙겼고, 한 판도 안 둔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는 2500만원의 우승상금을 챙겼다. 오죽했으면 후배인 나머지 셋은 그렇다 치고 공짜로 2500만원 먹은 동갑내기 조훈현이 서봉수한테 맛있는 거 샀느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 정도. 당시 이미 전성기가 지났던 서봉수가 일본과 중국의 국가대표 9명을 연이어 박살낸 것은 말 그대로 센세이션이었다. 서 명인의 9연승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고
2000년대 이후로는 조훈현 九단에 비하면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커리어가 추락했다. 주요한 원인은 2003년 5월의 이혼으로[13] 인한 심리적 충격으로 보이며 이혼 후 성적이 급속도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이나, 이미 이혼 전부터 성적은 하강해 이세돌, 이창호 등의 일선 기사들과 비교하기엔 좀 무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일견 유창혁 九단과도 비슷한 케이스[14]로 보인다. 최근에는 큰 대회 본선에서는 보기 힘들고, 시니어 기전에서 우승권을 다투는 정도다. 한국바둑리그에서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바둑 관계자들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유학파 조훈현과 대조시켜 '순국산 바둑', 나아가 '된장 바둑'이라고 불렀는데 서봉수는 "내 바둑은 된장처럼 밋밋한 바둑은 아니고 고추장 바둑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된장 바둑은 이창호가 된장 바둑이지…"라며 촌평. 다만 몇 번이나 몰락했다가도 몇 번이고 다시 부활해서 일선의 기사들과 겨루고, 지금도 일선 기사들에 비해 모자람이 없는 조훈현 九단에 비해 서봉수 九단이 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철저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은 조훈현 九단에 비해 기본기 없이 독학으로 배운 바둑의 한계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 아니냐고 분석하기도 한다.
2018년 9월 4~5일 삼성배 32강전에 노장 선수로 출전했지만 퉁멍청-천쯔젠에게 패해 탈락했다.
2019년에도 다시 삼성화재배 시니어 예선을 통과하고 출전했는데, 이번엔 중국의 젊은 기사 궈신이를 이기고 16강에 진출했다! 후지사와 슈코 九단의 63세 응씨배 4강 기록과 조훈현 九단의 50세 삼성화재배 우승 기록을 깰 수 있을지 주목받았지만, 구쯔하오에게 지면서 8강에는 가지 못했다. 현재 서봉수 九단은 66세이다.
2019년 12월 26일, 시니어 바둑리그 챔피언결정전 1경기에서 조치훈 9단에게 불계패하면서 한국기사 중 최초로 통산 1000패(…)를 기록하였다. 물론 그만큼 긴 커리어를 유지했다고 보면 되겠다. 이날까지 서봉수의 전적은 무려 2695국 1692승 3무 1000패, 통산 승률 62.85%, 우승 30회(국제대회 3회 포함) 준우승 67회로 최다 대국 2위, 최다승 3위, 최다 우승 공동 4위이다.
최근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는 등 계속해서 도전을 이어나가고 있다. 링크
2021년 4월 14일에 열린 제8기 대주배 남녀 프로 시니어 최강자전에서 유창혁 9단을 상대로 흑 2집반으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2021년 하반기, 쏘팔코사놀 끝장승부에 출연해 아마추어 시니어 정상권 기사들과 치수고치기 대국을 벌였다. 유창혁과 달리 처음 시작한 치수에서 조금씩 밀렸지만 정선에서 5명 모두 막으며 마무리했다.
2022년에는 다시 쏘팔코사놀 끝장승부에 다시 출연해서 정상권 기사들과 치수고치기 대국을 벌였다.
2024년 5월 24일, 대주배 결승에서 한종진을 이기며 71세 4개월 23일로 한국 프로바둑 기전 최고령 우승 기록을 경신했다.
3.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서봉수/상대전적 항목 참조.4. 기풍
처절함과 독함. 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최철한과 조금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최철한은 독하지만 처절한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반면 서봉수의 바둑은 승부근성이 뛰어나고 처절한 맛이 있다.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조훈현이나 후대의 젊은 기사들과는 달리, 흔히 동네 기원에서 볼 수 있는 싸움바둑·힘바둑이다. 바둑계의 엘리트들이 걷는 정규교육과는 거리가 한참 먼 힘바둑 스타일로 정점에 선 매우 드문 기사이다. 시니어가 되어서는 단순히 힘바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공부와 유연한 사고로 다양한 유형의 바둑을 두는 편.시니어 치고도 나이가 굉장히 많지만 여전히 시니어 계에선 여포 모드이다. 그래도 많은 바둑팬들은 여전히 서봉수의 바둑을 '수없이 상처가 나도 피를 철철 흘리며 끊임없이 덤벼들어 끝끝내 상대의 목을 베는' 처절한 사투로 기억한다. 특히 그 처절함의 백미를 맛볼 수 있는 대국은 미학자 오타케 히데오와의 제2회 응씨배 결승 5국. 기세가 거의 넘어간 상황에서 초강수를 연거푸 이어가며 바둑을 혼전으로 만들었고 오타케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대마를 역으로 잡아내며 대역전승을 거두었다.
관전기자 박치문씨 말에 의하면 서봉수는 전쟁터엔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방위 출신이지만 자신이 하나의 '돌'임을 생래적으로 터득한 사람이다. 그의 수줍음과 과도한 허리 낮추기,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 토종의 된장 냄새, 지식을 뛰어넘는 본능과 직관, 잡초의 생명력 등은 모두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이것들이 서봉수의 '실전적 기풍'과 어울려 야전사령관이란 별명을 만들어냈다. 서봉수 9단 본인도 이 별명을 좋아한다. 탁상 머리에 앉은 사령관이 아닌, 바람 부는 전쟁터에서 먹고 자며 말을 달리는 야전사령관.
5. 인터뷰 및 어록
기사1970년 입단을 했는데 1년 8개월 만에 조남철 8단을 이기고 명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하늘 같은 선배들을 이긴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배운다는 생각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그래도 젊다 보니 겁 없던 시절이었고 패기가 넘쳤다. 덜컥 우승까지 하고 보니 지금도 내 별칭이 ‘서 명인’이다. 입단에서 첫 우승까지 1년 8개월 걸렸다는데 지금도 그 기록을 깬 후배가 없다. 당시로선 새파란 2단짜리가 당대 최고수를 이겼으니 바둑계에선 난리가 났다. 우승 소식이 신문 1면에 날 정도였다. 더구나 내가 순수 국내파라고 하니 주변에서 더 응원을 해줬다. 그때는 반일감정이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하던 시절이었다. 하여간 명인전 우승하고 나서 얼마 있다가 조훈현 9단이 일본 유학 마치고 귀국해서 국수전에서 우승했다. 그때부터 15년 가량은 ‘조 국수와 서 명인 시대’라고 표현하곤 했다.
"바둑에 신이 있다면 그의 눈에는
승부수니 기세니 하는 애매모호한 말은 전부 가소로운 것들로 비쳐질 것이다. 신의 눈에는 오로지 정수와 악수밖에 없다."
이 어록은
알파고의 등장으로 재평가를 받았다.신과의 기력 차이는 두 점이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세 점이다. [15]
참고로 강철허리
린하이펑은 세 점이라고 보았다.이창호와 2인자들간의 기력 차이는 한 집이다.
나는 영원한 학생이다. 체력이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는 계속 바둑을 배운다. 바둑은 공부할수록 계속 실력이 는다. 내 바둑도 계속 늘고 있다. 지금도 틈날 때마다
한국기원에 와서 연구생들 틈에 껴서 공부를 한다.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본다. 나이 차이가 50년은 나는 새까만 후배들이지만 실력은 수준급이니까 배울 게 있으면 배우는 거다.
사람들이 조 국수랑 나를 많이 비교하곤 했다. 굳이 내 방식으로 비교한다면 그는 천재형이고 나는 바보형이다. 조 국수는 순발력이 뛰어났다. 계산이 엄청나게 빠르다. 나는 보통사람이니 평범하게 꾸준하게 노력했다. 내가 농담으로 말하는게 ‘조 국수 샌드백 구실했다’는 것이다. 경쟁관계라고 말을 많이 하지만 사실 전적은 압도적으로 조 국수에게 밀린다.
조 국수와 내가 다른 게 또 하나 있는 데 조 국수는 이창호 9단을 제자로 키웠는데 나는 제자를 키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자를 키우려면 바둑 도장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나는 그러질 않으니까. 제자 키우는 건 아마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저 눈감는 날까지, 체력 되는 날까지 바둑을 두면서 살다가 죽는 게 소원이라면 소원이다.
세계 바둑계는 한국과 중국, 일본이 주도한다. 세 나라가 고루 발전하며 경쟁하는 게 제일 좋다. 일본이 예전 같지 않은 게 안타깝다. 큰 바둑대회만 해도 요즘은 한국과 중국에서만 개최한다. 그건 한국 바둑계한테도 좋지 않다. 일본이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보면 쇄국정책, 문을 열지 않아서 뒤처진 게 아닌가 싶다. 한국 바둑 역사를 나눠본다면 1대
조남철, 2대
김인, 3대
조훈현, 4대
이창호라고 할 수 있다. 5대는 아직 없다.
이세돌일지
박정환일지 아직 확신이 안 선다. 확실한 1인자가 없다. 최상위권 그룹은 형성돼 있는데 예전처럼 독주하는 사람은 없다.
앞으로 내 목표는 건강하게 즐겁게 살자는 것이다. 즐겁게 살면서 바둑도 즐겁게 두자는 뜻에서 ‘락심’(心)을 부채에도 써놨다. 술은 거의 안 한다. 젊어서는 승부욕이 강하다 보니 대국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대국 전날은 밥도 못 먹을 정도였다. 나이를 먹으니까 즐겁게 하게 된다. 젊어서는 어떻게 하든 이기려고 죽기 살기로 했는데 그러다 보니 건강에 안 좋더라.
바둑이란 나무판 위에 돌을 늘어놓는 것이다
바둑은 연결이다.
6. 여담
- MBC에서 제작한 3.1절 특집극 <맞수>에서 배우 정보석이 서봉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 닮았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특유의 시니컬한 성격을 아주 잘 반영해 연기했다. 드라마의 클라이막스가 서봉수가 93년 응씨배를 우승하는 장면.
- 실제로 만나면 박찬호 못지 않은 투머치토커, 사진 찍어달라 했다가 30분 바둑썰 듣는 것도 가능하다.
- 한국 최초로 1000승을 달성한 프로 기사이기도 하다. 조훈현은 대부분 대회의 타이틀 홀더였기 때문에 당시 도전기[16] 대회 방식이 많은 특성상 도전기를 제외하면 공식전을 치를 일이 많지 않았고, 덕분에(?) 조훈현에게 지면 다음 대회 본선으로 떨어지고 대부분 결승까지 올라갔던 서봉수는 조훈현에 비해 훨씬 많은 대국 수와 더 많은 승수를 쌓았고 조훈현보다 먼저 1000승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조훈현의 일본 기원 기록이 한국 기원에 인정되지 않은 점도 있다.
- 2004년 10월에 재혼을 했는데 상대가 베트남 인이라 바둑계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17] 한국 바둑계의 명예를 훼손시킨다는 비난이 일부 있었던 것인데, 인종차별적 편견이 들어간 비난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역으로 비판받고 묻혔다. 당사자는 자신의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밝힌 바 있으며, 이후에는 부인의 고향인 베트남을 종종 방문해서 바둑 보급 활동도 하고 있다. 부인의 친정에 생계수단으로 쓸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해 주는 것이 목표라고, 그리고 실제로 사준 듯하다. 베트남 간 서봉수-2007.02.15
- 독설가로 유명한데, 남에게 어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서 그런 것. 가장 유명한 얘기로는 "바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을 때 다른 기사들은 "인생"이니 "예술"이니 뭐니 하고 대답했는데 서봉수는 "판때기에 돌 놓는 게임"이라고 대답하여 질문자를 벙찌게 만든 바가 있다. 그런데 '바둑은 예와 도'라고 간주하던 일본식 현대바둑의 패러다임이 국제무대에서 끊임없이 도전받고 박살나 왔음을 생각한다면, 이 촌평은 오히려 바둑의 본질을 과격하지만 날카롭게 통찰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 2001년 컴퓨터 인공지능 바둑 붐이 일자 서 九단과 '가로수 닷컴 바둑대회' 우승 프로그램인 고메이트가 9점 접바둑을 둔 적이 있다. 서 九단은 이 바둑에서 첫 수를 '二의2'에 두어 컴퓨터를 멘붕시켰다(…). 컴퓨터가 실수를 계속 거듭하자 손쉽게 바둑 국면을 장악했다고 한다. 상식적인 대국자는 첫 수를 여기에 두지 않고,[18] 그래서 대응 방법이 입력되지 않았던 건데 그걸 한 큐에 잡아낸 것이다. 그의 기발함과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 그때 서 九단이 평가한 해당 프로그램의 기력은 9급. 허나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어떤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한국 최강급 바둑기사를 무참히 쓰러뜨리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로 인해 20년 전 그가 남긴 "바둑의 신이 있다면 그의 눈에는 승부수니 기세니 하는 애매모호한 말은 전부 가소로운 것들로 비춰질 것이다. 신의 눈에는 오로지 정수와 악수밖에 없다." 는 말이 재주목을 받았다.
- 조훈현과는 사이가 영 좋지 않다. 조훈현이 귀국해서 군생활을 마치고 한국 바둑계에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사이가 분명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어느 새 사이가 많이 나빠져서 복기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공식석상에서도 별로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19] 시간이 흘러서 이창호가 정상에 서고, 조훈현-서봉수가 뒤로 밀려나서 둘이 어느 정도 화해했나 싶었더니만 다시 관계는 악화일로. 바둑계 관계자들도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고 한다. 서봉수는 자신이 특별히 싫어한 건 아니고, 조훈현이 자신을 멀리하다보니 자신도 자연스레 조훈현을 멀리하게 됐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조훈현은 본인의 자서전인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에서 승률 90%에 달하던 자신에게 패배해도 전혀 무뎌지지 않고 사냥개처럼 집념을 보이며 자신을 꺾는 그의 모습에 언제부턴가 어긋나기 시작했고, 복기는 한 번 안 하게 되자 계속 안 하게 되었으며[20][21] 그 무렵부터는 사석에서 만나는 일도 뜸해졌고 일부러 더 확실한 패배감을 안겨주기 위해 다 이긴 경기에서도 독수를 두곤 했다고 고백했다.[22] 독기는 서봉수 9단이 더 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아서, 특별히 악감정이 없는 상대에게도 승리하기 위하여 일부러 적개심을 고취하는 방식으로 승부욕을 태웠다고 발언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애증 관계는 과거의 일이며, 조훈현은 환갑이 넘은 지금은 멀리서 그를 응원하지 서로 간의 악감정은 전혀 없으나 그 둘의 과거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또 서로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거리를 두는 게 현명할 거라고 판단했다고 둘의 관계를 언급했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에서 조 국수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기원에서 만났을 때는 또래라 금방 친해졌다고 한다. 짜장면 내기 바둑을 수없이 두었는데, 일본에서 바둑을 두고 온 입장에서 사범이나 선생도 없이 월간 바둑만 죽어라 읽으며 내기 바둑으로 성장한' 서봉수는 조훈현에게 '흙탕물에서 글러브를 끼고 이종 격투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한 것은 1974년 6기 명인전에서 조훈현이 서봉수에게 3대1로 패하고 난 뒤로, 이때부터 피 튀기는 진검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조훈현이 76년 왕위전에 이어 78년 명인위까지 빼앗으면서 상술한 대로 서먹함이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고. 그러나 조 국수는 '서 명인에게서 승부사의 기질과 투쟁 정신을 배웠다', '그가 있었기에 내 칼날이 무뎌지지 않았다', '요즘 기사들도 서봉수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했으며 서 명인 또한 '조 국수는 내 바둑의 은인이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훈훈하게 평가했다. # 감정적으로 상해 얼굴을 안 보는 사이가 아니라 그저 둘의 성향이 너무 다르기에 서로 거리를 두는 것일 뿐인 셈.
7. 주요 경력
1972년- 명인전 우승 ★
1973년
- 명인전 우승 ★
1974년
- 명인전 우승 ★
- 제1기 국기전(MBC-TV) 우승 ★
1975년
- 명인전 우승 ★
- 제10기 왕위전 우승 ★
1976년
- 명인전 우승 ★
1980년
- 국기전 우승 ★
- 왕위전 우승 ★
- 최고위전 우승 ★
1983년
- 바둑왕전 우승 ★
- 제왕전 우승 ★
- 명인전 우승 ★
- 기왕전 우승 ★
1986년
- 제30기 국수전 우승 ★
1987년
- 명인전 우승 ★
- 제왕전 우승 ★
- 국수전 우승 ★
1988년
- 국기전 우승 ★
- 기왕전 우승 ★
1991년
- 동양증권배 우승 ★
1992년
- 국기전 우승 ★
- 최우수기사상 수상
1993년
- 제2회 응씨배 우승 ★
- 제1회 진로배 한국대표 [우승] ★
1994년
- 제2회 진로배 한국대표 [우승] ★
1995년
- 제1회 신사배 우승 ★
- 제3회 진로배 한국대표 [우승] ★
1997년
- 제5기 진로배 한국대표 [9연승, 우승] ★
1999년
- 제1회 프로시니어기전 우승 ★
- LG정유배 프로기전 우승 ★
2000년
- 제34기 왕위전 준우승 ☆
2003년
- 제3회 돌씨앗배 프로시니어기전 우승 ★
2006년
- 제3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현무부 우승 ★
- 국수전 50주년기념 역대국수 초청전 우승 [비공식] ★
2008년
- 2008한국바둑리그 감독 [티브로드]
- 제5기 전자랜드배 현무왕전 우승 ★
2009년
- 2009KB국민은행 한국바둑리그 감독 [티브로드]
2013년
- 제3기 대주배 준우승 ☆
2014년
- 시니어왕위전(시니어바둑클래식) 우승 ★
2015년
- 시니어국기전 준우승 ☆
- 2015시니어바둑클래식 왕중왕전 준우승 ☆
2016년
- 제10기 지지옥션배 9연승(지지옥션 최다연승 신기록)
- 2016 한국기원 총재배 시니어 바둑리그 우승
- 2016 염성동방그룹배 한 · 중 바둑 단체 명인대항전 우승
2017년
- 2017 한국기원 총재배 시니어 바둑리그 준우승
2021년
- 제8기 대주배 남녀 프로시니어 최강자전 우승 ★
2024년
-제11기 대주배 남녀 프로시니어 최강자전 우승 ★
[1]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
[2]
본인은 대국수 조남철을 위해 겸손의 자세를 내비친거겠지만, 다른사람들이 볼땐 정석대로 안둬도 이겼다라고 자만심으로 보였을수도 있다.
[3]
뒷날
국수전도 우승하여 2연패를 했지만, 지금도 서봉수를 '서국수'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다.
국수(동음이의어) 참조.
[4]
바둑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바둑은 시작전에 홀짝을 통해 흑돌과 백돌을 쥘 사람을 정하고, 흑돌을 차지한 사람이 먼저 둔다. 그런데 당연히 먼저 두는 흑이 유리하니까, 대국이 끝난 후 집을 셀 때 백에게 6집반(한국, 일본) 또는 7집반(중국)의
덤을 준다. 그러나 실력이 명백하게 차이가 나는 경우 무조건 하수가 흑돌을 쥐고 먼저 두고, 백에게 덤도 주지 않는다. 백돌을 쥔 고수가 핸디캡을 안고 싸우게 해서 바둑을 대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정선이라고 하다. 그런데 둘 사이의 실력차이가 워낙에 커서 정선으로도 대등한 바둑이 되지 않는 경우, 흑을 쥔 하수가 미리 바둑돌을 몇개 깔아놓고 시작한다(이때 미리 깔아 놓은 돌의 개수에 따라 두 점 ~ 아홉 점 접바둑으로 부른다). 저 '정선과 두 점을 왔다갔다'라는 것은 그 정도의 어드밴티지를 줘야만 조훈현과 비슷한 승부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이며, 한마디로 도전 5강은 조훈현보다 두세 단계 아래였다는 의미이다.
[5]
보통 바둑에서 3집 반 정도의 차이면 최정상급 기사들 기준으로는 역전이 힘든 수치라고 본다. 헌데 5집 반(당시에는 일본룰(=한국룰), 중국룰 모두 덤이 5집반이었다)을 접어주고도 죄다 역전시켰다는 소리니…아예 상대가 안 되는 것.
[6]
이 대결 이후 조훈현은 흑을 잡을 시 첫수를 소목 대신 화점을 두기 시작했는데, 이 경우 상대가 흉내바둑을 두면 축을 몰아 응징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7]
현재의 연승전 방식의 국가 대항전인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의 전신 격인 대회라 할 수 있다.
[8]
보통 연승전 형식의 국가대항전에서는 강한 기사일수록 뒤에 배치하는 방식의 엔트리를 쓴다. 당시 서봉수 뒤에 남은 3명이 이창호, 조훈현, 유창혁이었고, 당시는 이미 서봉수가 저물어 가던 시기였다. 훗날 농심배에서 이세돌이 선봉출전한 적은 있으나, 이는 개인의 강력한 희망이 반영된 출전이었고 대부분은 부장(마지막에서 두번째)이나 대장으로 출격하였다.
[9]
위에서 언급했듯이 강한 기사일수록 마지막에 넣기에 서봉수는 사실상 약한 기사였다고 해도 무방했다. 근데 그 사람이 9승을 해서 올킬을 시켜버렸으니 경악할 만할지도…
[10]
'실성한 사람처럼 앞뒤 안가리고'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11]
한국의 김영환 四단, 일본의 아와지 九단 상대.
[12]
심지어 이 9연승은 흑으로 5승, 백으로 4승을 한 것이다. 그리고 역전 반집승이 무려 세 번이나 있었다. 심지어 마지막 대국마저도 초반 완착을 두어 어렵게 흘러가나 싶었던 대국을 상대가 둔 완착을 빌미로 역전승한 것(…).
[13]
서봉수는 1976년부터 2003년까지 약 26년간 전처와 결혼 생활을 하면서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서봉수 본인이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자책하거나, 재산 관리 실패 등이 기사에서 언급되는 것을 보면 보증, 투자 실패, 사업 실패 등의 경제적 문제가 원인이 되어 이혼한 것으로 보인다.
[14]
유창혁도 2004년에 상처했다.
[15]
이제 정상급 AI는 최정상급 프로기사와의 두 점 접바둑을 손쉽게 이긴다. 그런데 AI의 기풍을 흡수한 요즘의 최정상급 프로기사들은 이세돌을 무너뜨렸던 알파고 이상의 기력을 갖고 있으며 최첨단을 달리는 AI와 2016년의 알파고 간에는 석 점 이상 기력 차이가 난다. 즉 이 말을 했을 적의 서봉수와 바둑의 신 간에는 못해도 석 점보다는 큰 기력 차이가 있을 것이니 어느 정도 자신과 당시 바둑계를 과대평가한 셈이다.
[16]
타이틀 홀더(전대회 우승자)는 미리 결승전에 직행해 있고, 나머지 사람들끼리 대회를 치러서 도전자 1명을 뽑는 방식.
[17]
국제결혼 알선 관련 일을 하던 그의 팬이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둘의 나이차는 29세. 아내는 1982년생이니 거의 딸 뻘인 셈이다.
[18]
정상적인 게임에서는 첫 수를 화점에 두거나 '三의4' 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고 매우 낮은 확률로 '五의4'나 '三의3' 에 두며, 천원. 즉 한가운데에 두는 경우도 가끔 가다가 나온다. 이 외의 수는 재미로 두는 게 아닌 이상 구경하기 어렵다고 해도 좋은데, 특히 '二의2'는 그야말로 맨 구석의 위치라 집을 거의 만들 수가 없고 중앙으로 진출하기에도 도저히 여의치 않기 때문에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수다.
[19]
실제 1970년대 중후반까지는 한국기원 대국실에서 다른 젊은 기사들과 어울려서 하루 종일 바둑 두고 복기하고 담배피고 배고프면 짜장면 시켜먹고 나가서 당구도 치고 그렇게 잘 지냈다고 한다. 근데 선배기사들을 무너뜨리고 둘이서 타이틀 매치에서 붙는 일이 점점 많아지자 어느새 멀어졌다고.
[20]
참고로 바둑이 끝난 후 바둑기사들은 졌건 이겼건 그 바둑을 복기하고 아무리 진 것이 분하다 하더라도 감정을 숨기는 것이 관례이다.
[21]
다만 언제부터 복기조차 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는데, 1987년 초의 특집기사에서는 기왕전 4국에서 1집 반승을 한 서봉수와 조훈현이 복기하는 장면이 분명히 나오기 때문이다. 아마 하다 말다 하지 않았을지 추정된다.
[22]
사실 둘 맞대결 성적은 조훈현이 2:1 정도로 꽤 앞서긴 하지만, 이창호 등장전에는 한국에서 조훈현에게 이정도 승률을 거둔 바둑기사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이창호는 애제자라는 점에서 본인이 세대교체에 대해 수긍하면서 받아들였으나 본인과 비슷한 나이인 서봉수가 독기를 세우고 패배를 안기는 일이 지속 발생되자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