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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제는 천부적인 글솜씨가 있었고, 붓을 들면 곧 문장이 되었다. 아는 것도 많은데다가, 기교와 예술성을 겸비했다. 만약 여기에 넓은 도량과 공평함, 도와 덕을 더했다면, 어찌 옛날의 현명한 임금들과 멀다고 할 수 있겠는가
文帝天資文藻,下筆成章,博聞強識,才藝兼該;若加之曠大之度,勵以公平之誠,邁誌存道,克廣德心,則古之賢主,何遠之有哉!
삼국지 무제기의 진수의 평
文帝天資文藻,下筆成章,博聞強識,才藝兼該;若加之曠大之度,勵以公平之誠,邁誌存道,克廣德心,則古之賢主,何遠之有哉!
삼국지 무제기의 진수의 평
조비의 인간성을 평가한 문서.
2. 조비가 싫어한 사람들
조비의 문제점은 본인의 사사로운 개인적 감정을 본인의 권력으로 갚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조비는 왕이 되자마자 왕자시절 자기를 괴롭혔거나 좋지 않은 감정이 있던 사람들을 권력을 이용해 처단하거나 손 봐 주었다. 이는 법치와는 거리가 멀던 당시에도 사람들의 손가락짓을 받을만한 행동이었고, 진수도 이런 점만 보완했으면 고대의 성군처럼 되었을 것이라고 평을 하여 애둘러 조비를 비판했다. 비슷한 짓을 한 것이 법정인데, 유장시절 찬밥을 먹던 법정도 유비가 촉을 장악하면서 권력을 쥐자 사사로운 원한을 권력으로 갚았고, 당시 촉의 최고실세였던 제갈량에게까지 이런 일이 보고되었다.[1] 당시에도 이런 행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문제가 될만한 행위였던 것이다. 조비는 다른 벼슬도 아닌 황제였기 때문에 이렇게 사사로운 감정을 권력으로 갚으려고 한 행위는 두고두고 회자되며 "도량이 넓지 못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하지만 몇몇 부분은 조비의 입장,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할 문제도 있기에 몇몇 인물에 대해서는 다른 시선도 서술해두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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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진수가 저술한 정사 삼국지에는 207년 조조군의 일원으로 백랑산 전투에 참전한 장수가 유성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사망했다고 기술했으나[3], 배송지가 인용한 《 위략》에는 조비가 장수를 일부러 잔치에 초대한 뒤 형을 죽인 네가 어떻게 뻔뻔하게 녹봉을 받아먹느냐는 식으로 쏘아 붙이는 짓을 여러 번 반복했고 장수는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고 나온다. 다만 년도에 오류가 있는데 위략에는 207년에 오관장 조비가 장수를 갈구어서 죽게 했다는데 실제로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된 것은 위서 문제기에 따르면 211년이다. 즉 연도부터 오류를 보이고 있어서 이 기사는 신빙성은 좀 떨어진다.
위략의 기사가 사실이라면, 조비는 조조가 대인배적으로 용서하여 귀순을 받아준 장수를 정신적으로 학대하여 자살하게 만든 것이고, 이는 조비의 안티들에게 조비의 저열한 인간성을 보여주는 예로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조비의 입장에선 장수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없을 수가 없다. 조비는 조조와 같이 완성에 있으면서 형과 사촌형 조안민이 어떻게 죽었는지 봐야 했고 장수에게 자신의 목숨마저 위협받았다.
그는 이복형인 조앙을 잘 따랐는데 이때 조앙의 죽음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겨서 사람이 비뚤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 이 가설대로면 연회 중에서도 계속 그를 쏘아붙이고 몰아댔던 것도 큰형에 대한 마음의 부채 문제로 보아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조비의 개인적인 사정이고 먼저 원인을 제공한건 조조였으며 그걸 떠나서 그 당시 장수는 분명 자비를 구하며 스스로 항복해온 '투항자'이고, 조조는 이런 장수와 사돈까지 맺고 환영 잔치를 벌이며 더이상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사실 조조가 먼저 장수의 과부를 겁탈하고 부하를 포섭하는 등 장수의 분노를 유발한 만한 짓을 한 것도 있다.
조조의 속마음은 어쨌든 조조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아들이자 신하인 조비도 겉으로나마 따르는게 마땅한데, 조조 사후도 아니고 생전에 아직 후계자로 내정되지도 않은 조비가 대놓고 장수를 불러다가 과거일을 거론하며 직접적으로 무안을 준다는건 조비의 미성숙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아버지 조조의 명을 어기고 얼굴에 먹칠을 하는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조비의 이런 노골적인 행동이 독단적인 게 아닌 조조의 의도라는 추측도 있다. 조비가 한두번도 아니고 계속 이러면 조조 귀에 안 들어갈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조조는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라는 것. 자세한 내용은 장수 문서로. 조금 더 극단적으로 주장하면 조조를 대신해 조앙을 죽게 만든 장수를 갈굼으로써 조조에게 점수를 딴게 아니냐는 말까지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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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충
왕충은 젊었을 시절 정장을 맡고 있었으나, 이각 곽사의 난 때문에 기근이 들자 살기 위해 인육을 먹은 적이 있었다.[4] 조비가 오관중랑장이던 시절, 조비는 광대를 시켜 무덤에서 해골 하나를 가져와 왕충의 안장에 매달게 해서 왕충을 웃음거리로 삼았다. 다만 왕충은 이후로도 조씨 정권에서 계속 승진했고, 조비가 제위에 오르고 위나라를 건국하는 데도 앞장서서 거들었으며, 조비가 죽은 후에도 16년이나 더 살다가 도정후까지 올랐다.
조비는 식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살려고 발버둥친 왕충을 젊었을 때는 공개적으로 조롱할 정도로 비루하게 봤는데, 부하에 대한 배려심이나 자비심은 눈곱만치도 없는 듯 하지만, 이후에 자신의 치세에서 왕충을 계속 승진시킨 것으로 봐서는 왕충을 저평가하지는 않은 것 같다. -
우금
조비의 인간성이 비판받는 데 빠지지 않는 대목. 아버지 때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명장 우금[5]이 관우에게 항복하여 오나라에 붙잡혀있었는데, 후일 조비 대에 손권에 의해 석방되어 항복 사절과 함께 돌아왔다. 이후 오나라에 사자로 보내면서 가는 중에 조조의 묘에 들러서 참배토록 했는데, 그곳에다 미리 관우가 방덕과 우금을 사로잡는 장면을 그려두었다. 그것도 방덕은 떳떳한 모습인 반면 우금은 비굴하게 항복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이를 본 우금은 울화통이 터져 병을 앓다가 죽게 된다. 게다가 사후에 준 시호는 여(厲)로, 시법의 해석에 따르면 "무고한 이들을 살육함(殺戮無辜曰厲)"을 뜻한다. 심지어 막상 우금 앞에서는 위로를 하며 "재해를 만나서 진 것이지 우금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식의 말을 해놓고 뒤로는 저런 졸렬한 행동을 저질렀다.
사실 우금의 항복은 오늘날에도 팬덤에서 의견이 상당히 나뉘는 논제지만, 우금을 죽게 만든 방식이 실로 비열하고 치졸했다는 것은 대체로 부정되지 않는다. 우금의 투항이 죄라면 송환된 뒤 법으로 따져서 공정하게 처벌하거나 처형하고, 과거의 공을 감안해야겠다면 형량을 좀 낮추거나 그냥 깔끔하게 용서해주고 귀향시키거나 하는 것이 순리다. 우금 앞에서는 위로하면서 뒤로는 정신적으로 커다란 모욕을 줘서 홧병에 걸려 죽게 만든건 조비의 도덕관을 의심케 한 사건이며 오히려 (조비가 싫어하던) 우금에 대한 동정론만 만들어준 실책이다.
북송의 사마광도 《 자치통감》에서 조비가 우금을 죽이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 수법의 비열함은 임금이 할 짓이 아니라고 직접 의견을 적었다. 우금은 조조가 직접 눈여겨 보아 중용한 인물이며, 그 기대에 부응해 수십 년 조조를 따라 종군하며 크고 작은 공훈을 세우고 완에서는 위기에 몰린 조조를 구하기도 했다.물론 조조조차 번성의 일에 대해 방덕보다 우금이 못할 줄은 몰랐다고 실망감을 드러내며 한탄하기도 했고 조조의 협천자 이래 유비나 원소 등 여타 세력들을 전부 괴뢰집단으로 규정했던 것이 조위의 명분이기 때문에 우금의 번성 항복 건은 명분상 무려 반란 세력에게 정예군을 헌납한 행위에 해당하는 대죄이며 번성 공방전에서의 크나큰 실패로 평가가 엇갈리기에 까이는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 실패를 포함해 평가해도 오자양장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이런 장군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없는 짓이니만큼 더더욱 많이 거론되는 일화이다.
북송의 사마광도 《 자치통감》에서 조비가 우금을 죽이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 수법의 비열함은 임금이 할 짓이 아니라고 직접 의견을 적었다. 우금은 조조가 직접 눈여겨 보아 중용한 인물이며, 그 기대에 부응해 수십 년 조조를 따라 종군하며 크고 작은 공훈을 세우고 완에서는 위기에 몰린 조조를 구하기도 했다.물론 조조조차 번성의 일에 대해 방덕보다 우금이 못할 줄은 몰랐다고 실망감을 드러내며 한탄하기도 했고 조조의 협천자 이래 유비나 원소 등 여타 세력들을 전부 괴뢰집단으로 규정했던 것이 조위의 명분이기 때문에 우금의 번성 항복 건은 명분상 무려 반란 세력에게 정예군을 헌납한 행위에 해당하는 대죄이며 번성 공방전에서의 크나큰 실패로 평가가 엇갈리기에 까이는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 실패를 포함해 평가해도 오자양장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이런 장군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없는 짓이니만큼 더더욱 많이 거론되는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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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
조비는 수렵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특히 세자 시절부터 사냥을 좋아해서 틈만 나면 사냥을 했다. 세자 시절 업군에 있을 때 이미 최염에게 사냥 좀 그만 하라는 쓴소리를 들은 바 있고, 새벽에 사냥을 나갔다가 밤에 들어오는 일이 있자 잔잠에게도 자제하라는 간언을 들었다.
220년 장수교위(長水校尉) 대릉이 조비가 사냥하러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며 반대하고 여러 차례 건의하자, 조비는 크게 노하여 대릉에게 사형죄를 내렸다. 하지만 곧 파직으로 형을 낮추었고, 대릉은 다시 복직되며, 조예시대에는 제갈량의 북벌을 막기 위해 종군한다.
사실 황제나 왕이 사냥을 좋아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심각한 민폐를 끼치는 일이었다. 한 번 사냥갈 때마다 몰이꾼에 호위병에 수백 수천 명이 동원되는 건 예사라 적지않은 예산이 소모되었다. 사냥에 일단 맛들이면 현대의 골프처럼 끊기가 쉽지 않았다. 손권 또한 호랑이 사냥을 즐겨했고, 장소도 이런 위험한 짓을 하지 말라고 여러번 간했지만, 손권은 듣지 않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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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칙
조비가 사냥을 나갔을 때 나무 울타리가 허술해 사슴이 울타리를 넘어 도망치자 분노한 조비가 칼을 뽑아서 감독하는 관리들을 전부 잡아들여 죽이려고 했다. 이때 소칙이 머리를 조아리고 조비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간언하자 조비는 소칙에게 그대는 충직한 신하라고 칭찬했지만 이후 그를 두려워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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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
악사 두기(杜夔)가 주종공(鑄鐘工) 시옥(柴玉)이 만든 종의 소리를 듣고는 퇴짜를 놓았는데, 이에 시옥이 억울하다고 하여 조조가 직접 시험해보니 두기의 말이 맞아 시옥과 그 두 아들에게 말을 돌보는 벌을 내렸다.
그런데 문제는 시옥과 친했던 조비는 이 일로 두기에게 불만을 품었다. 또한 일찍이 조비가 두기에게 좌전 및 빈객들 가운데서 생황을 불고 금술을 타라고 명했는데 곤란하다는 기색을 보이며 그의 요구를 거부한 적이 있어서, 이 일도 앙심을 품고 있었다. 결국 조비는 트집을 잡아 두기를 체포해 옥에 가뒀고 두기는 결국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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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
상술한 우금과 함께 조비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일화 중에서도 손꼽히게 자주 나오는 부분이다. 조비는 어렸을 적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숙인 조홍을 미워했으며[8] 나중에 황제가 되자 트집을 잡아 그를 사형시키려 했다. 하지만 조비의 어머니인 변씨가 조비를 질책하는 한편[9] 조비의 아내 곽여왕에게도 조홍이 처형당하면 황후 자리를 보존하지 못할거라고 압박하여 곽여왕도 조비를 말려서, 조비도 어쩔수없이 간신히 조홍의 면직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마저도 석방하면서 재산을 몰수해버렸기에 변씨가 다시 조비를 힐난해서 결국 재산도 돌려줬다.
이에 대해 조홍이 재물에 인색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사실 제 아무리 조카라도 돈을 빌려주고 말고는 본인 맘이다. 그리고 조홍은 거의 초창기부터 쭉 조조와 함께 해왔으며 서영에게 깨지고 목숨을 잃을 궁지에 몰렸을 때 구해준 적도 있는 정말 위나라 최고의 공신 중 한 명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를 죽이려하며 재산을 빼앗은것이 말도 안되는 처사긴 했다. 오죽하면 본래 정치에 목소리를 크게 낸 적 없던 변씨가 직접 나섰을까. 심지어 조비는 돈을 빌려 놓고 갚지 않는 일도 많았기 때문에 채무자로서도 떳떳한 입장은 아니었다.
게다가 하후돈, 하후연, 조인 등이 전부 세상을 떠났기에 당시 조홍은 조씨 황실의 유일하게 생존했던 1세대 거물이자 동시에 최고 웃어른이었으며, 군부의 원로이기도 했다. 고작 금전 관계가지고 이런 거물을 죽이려고 한 조비의 인간 됨됨이는 조홍이 진짜 인색했더라도 그것과는 별도로 욕을 먹어도 싸며, 실제로 중신들이 이 일로 조비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는 기록까지 있다.
이 일은 당시 곁에 있던 조진 입장에서도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일전에 조홍이 오질, 왕충과의 연회 자리에서 조진을 뚱뚱하다고 놀린 적이 있는 상황이었는데,[10] 하필 조진이 옆에 있을 때 조홍을 구금하자 조진이 "이러면 제가 조홍을 모함해서 일이 난 거라고 오해를 받잖습니까"하고 불만을 드러냈음에도 조비는 "내가 조홍을 잡아가둘 뿐인데 네가 왜 난리야."라는 말로 비웃으며 씹었다.[11]
가까스로 풀려난 조홍은 조비를 칭송하는 아부성 가득한 글을 써서 바쳤는데, 이 글로 조비는 화를 풀었지만 말년에 억울하게 감옥살이 및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난 만큼 더욱 비참해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조비는 조홍을 괴롭혔던 그해 세상을 떠나고 조홍은 복직되었으며 그보다 6년을 더 살다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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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훈
포훈의 아버지 포신은 조조를 초창기에 지지하고 지원해주었다. 조조는 승상이 된 후, 포신의 공을 기려 그의 아들 포소와 포훈을 후하게 대우했다.
포훈은 굉장히 공명정대한 사람으로, 조비의 첩이었던 곽여왕의 동생이 도둑질을 하다 체포되자 봐달라고 하는 조비의 부탁을 무시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서 사형시켰다. 그러나 이 일로 포훈은 조비한테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다. 나중에 조비가 조조의 상중에도 사냥을 다니자 포훈이 나서서 이를 절제해달라고 표를 올렸으나 조비는 격분하여 오히려 표를 직접 찢어버리고 사냥을 나섰다.
이후에도 포훈은 간언을 많이 해서 조비에게 밉보였고 조비는 트집을 잡아 포훈을 잡아들인다. 포훈을 재판하는 관리는 징역이면 충분하다고 했으나 조비는 법을 위반하고 기어코 포훈을 사형시킨다.이 때 대신들이 공동으로 표를 올려 선처를 부탁했지만 소용없었다. 포훈이 죽고 그 집을 가보니 사사로이 모은 재물이 하나도 없었고 사람들은 그 억울한 죽음을 슬퍼했다. 이마저도 포훈이 죽고 나서 약 두 달 뒤 조비가 죽었는데 그제서야 눈치 안보고 슬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보다시피 사냥에 연루되어 욕을 본 신하만 해도 대릉, 소칙, 포훈 세 명이나 된다. 조조는 비록 권력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공신이라도 쳐내는 비정한 인물이었을지언정 그릇은 제법 커서 신하들의 간언을 경청하기도 했으나, 조비는 황제로서 민생을 굽어 살펴야 하는 입장임에도 백성에게 부담이 되니 사냥 좀 자제하라는 간언을 한게 고까워서 바른말 하는 신하들을 죽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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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
양준은 인물평을 좋아했는데, 조조에게 자신과 조식을 칭찬하면서도 조식이 아름답다고 말한 이유로 조비는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완에서 수레를 이끌고 갈 때 저자거리의 열기가 가득하지 않다는 죄목을 달아서 양준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이건 조비의 친구이던 사마의까지 말렸는데도 듣지 않았다. 사실 양준이 조식의 인물평을 내렸을 때가 아직 조비와 조식 중 누가 태자가 되느냐가 정해지지 않았던 때인 만큼 조비 입장에서는 굉장히 한스러웠을 것이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저런 식으로 죽인 것은 너무하다는 평이 다수.[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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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운
순운은 조식과 친했기 때문에 조비는 그를 싫어했지만, 순운의 자식들은 총애했기 때문에[13] 단순히 순운 본인에게만 감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순운은 일찍 병으로 죽었고, 딱히 조비에게 해를 입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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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안
조비는 금향공주의 남편 하안을 싫어해서 살아있는 동안 관직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조비가 하안이 얼굴에 분을 칠하고 다녀서 얼굴이 하얀 것이라고 여기며 망신을 주기 위해 여름철인데 뜨거운 국을 자리에 내오게 했다. 하안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건(혹은 옷소매)으로 얼굴을 닦았는데, 수건에 (분이 묻어) 더욱 희어졌다고 한다.
하안이 훗날 권력을 남용하거나, 자신이 속해있던 일파를 팔아넘기면서까지 본인만 살려고 하는 추한 행적[14]을 보면 조비가 하안을 개인적으로 싫어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친지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심하게 보인 조비 본인의 성향까지 더해진 결과로 보는 게 더 사리에 맞을 것이다. 하안은 조조가 사실상의 양자로 양육한 인물에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능을 보여 조조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던 만큼, 조비가 하안을 가리켜 '가짜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안이 사실상 조씨 문중에서 조조의 아들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은 것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는 사실 현대에도 재혼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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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이 형제
정의는 동생인 정이, 양수와 함께 조식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으며, 또한 조조의 총애도 받았다. 정의를 조조의 딸 청하공주와 결혼시키기로 했는데 그것을 조비가 반대해서 무산시켰으며 그 이유라는 게 여자들은 외모를 중요시 하는데 정의는 사팔뜨기라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곤 자기랑 친한 호색한에 인간성도 능력도 바닥인 하후무와 혼담을 넣어 청하공주와 결혼시켰고 조조는 뒤늦게 정의의 재주를 보고 ''정의가 장님이라 할지라도 그를 사위로 삼았어야 했다며 후회했다.[15]
정의 또한 청하공주를 신부로 얻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였으며, 조비의 반대파라고 할 수 있고 후계자 경쟁을 해야 하는 조식이 가장 대표적으로 정의와 정이를 측근을 삼았기에 조비와 멀어지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조조가 그를 태자로 세우려 할 때, 정의와 그의 동생 정이도 조식에 대해 좋게 말하였으므로 조비에게 밉보였다. 결국 조비는 즉위 후 정의와 정이 형제를 잡아 가두고 죽였고 이때 조비는 정씨 형제의 집안 남자들은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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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황후 견씨
조조가 업성을 함락시켰을 때, 조비는 원희의 아내 견씨를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 하지만 이후 다른 첩을 좋아하게 되면서 본처인 견씨가 소외되자, 실의에 빠진 견씨는 조비에 대해 원망의 말을 말했다고 문소견황후전에 전해진다. 이 행동이 조비의 노여움을 사 조비는 견씨에게 자결을 명령했다.
3. 조비의 여러 일화들
일부 삼덕들이 조조가 죽은 후 조비가 삼년상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불효자라고 주장하나, 이미 전한시절부터 모든 사회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삼년상에 문제가 많음은 누누이 지적되었다. 한나라 최고의 성군이었던 한문제는 삼년상이 너무 허례허식이며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하여 유언에서 자신이 붕어하라도 전국의 관원은 3일만 곡을 하되, 그 이후에는 상복을 벗고, 궁궐의 신하들도 15일만 지내라고 명령하기도 했고,[16], 결과적으로 이후로는 황제나 제후의 경우 3년상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만약 제왕이 3년상을 지낸다면 통치초반의 3년을 고스란히 날릴 수밖에 없으니 이는 국정에 크나큰 지장을 주는 일이었다. 물론 유교관념에 투철한 일부 관리는 벼슬을 내놓고 3년상을 지내기도 했다.[17] 하지만 일반적으로 벼슬을 내놓을 수 없는 제왕에게는 삼년상은 해당되지 않았고, 이는 조비도 마찬가지다.- 삼국지 선주전에 주를 단 배송지는 <위서>[18]와 <전략>[19]의 기록에 의거하여 두가지 정황을 기록했다. <위서>의 기록에 의하면 조조가 죽자 유비가 사신으로 한염(韓冉)을 보내 조문하고 조문품을 가져왔는데, 조비가 형주자사에게 명령하여 조문품만 받고 한염을 죽였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인용한 <전략(典略)> 의 기록에 의하면 한염은 상용에서 조문품과 유비의 편지를 위나라 관리들에게 전달했고, 조비는 이를 읽고 답서를 주었다고 한다. 유비는 이 답서를 받은 후 황제로 즉위했다고 한다. 만약 전자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조비는 사이코패스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으나, 두번째 기록이 사실이라면 일반적인 조문 및 답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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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년 갑오일에 고향인
초현에 가서 관현은 물론 백성들과 함께 날이 저물도록 크게 축제를 벌이며 같이 즐겼다. 이때는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위나라를 건국한 날이며, 당연히 조비의 고향사람들은 자기 고장 출신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른 것에 축하했을 것이다. 조조가 죽은지 얼마 안되었으므로 조비는
삼년상을 치뤄야 했다며 비판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위 입장에서 새 왕조가 건국된 것은 경사임에 틀림 없었다. 애당초 전근대 사회에서도 당장 국정을 돌봐야 하는 왕/황제가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는 삼년상을 제대로 치르는 경우는 당시에 거의 없었다.[20]
- 다음 해인 221년에는 업에 있는 조조의 무덤에 가지 않고 낙양에 있는 건시전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민간의 제사와 동일하게 제사를 지냈다.(위서 문제기 주석 위서) 조조는 죽을 당시 위왕이었고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위나라를 건국한 뒤에 태조 무황제로 추증까지 했으니 제왕의 격식에 맞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
다만 이는 당시의 시대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상술되었듯
한문제 이후 왕/황제는 삼년상을 치르지 않는 것이 관습화되면서 위진 시기에는 상례 문화가 많이 유연해졌다. 훗날 하증이
죽림칠현의 일원인
완적에게 모친상중에 술과 고기를 먹었다며 디스하자 '효로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인 사마소가 오히려 완적을 쉴드친 사례도 있다.[21]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 와중에 사마소 본인의 아들이었던 진무제
사마염이 '백성들을 예로 교화해 온 집안의 사람인 내가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준엄하게 꾸짖으며, 관습을 깨트리고 삼년상을 강행하고 후세 사가의 극찬을 받으며 이러한 전통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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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은
형주 침략 이후 조비와 화친을 맺은 뒤에 오왕으로 책봉받았다. 이에 손권은 신하인 조자를 보내 감사를 표시하고자 했는데 조비는 당시에도 사치품으로 간주되는 상아, 공작, 진주, 코뿔소 뿔,
금계 조공으로 요구했다. 손권은 상중에 있는 사람이 이런 선물을 요구한다며 이에 격분하였다고 한다.[22] 또한 손권은 조비가 요구하는 사치품을 자신에게는 '기왓조각이나 돌멩이와 같다'고 평하여 자신의 검소함과 도량을 드러내 보였다.(자치통감 69권) 이 밖에도 손권은 조예 때는 보석을 주고 말을 받아오는 등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세종대왕도 본받아야 한다며 칭찬하기도 했다.
# 다만 조비는 이에 대한 답례품으로 손권에게 북방의 마필을 보냈으며,
사대나
조공항목에서 보듯이, 이렇게 조공품 및 답례품은 어느정도 균형이 맞아야 하므로, 한두필 정도로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당시의 말은 북방에서 주로 조달되는 군수품이기 때문에 잠재적 적이 될 수 있는 봉신국 오나라에 대한 답례품으로는 조비가 나름 성의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조비가 신기한 물건을 좋아해 저런 것을 요구한 것은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 있어도, 아주 날강도 같은 심보만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 후대에 손권이 위나라에 칭신을 그만두고 황제로 즉위하여 오나라를 건국한 이후, 전략물자인 말을 사들이면서 군비를 증강시킬때 이제는 위나라의 외번이 아니라 적국인 오나라에 말을 팔지 말것을 위나라 조정에서 논의하였는데 조비의 아들 조예는 본인의 사치를 위해 말을 적국 오나라에 계속 팔아치우고 대금으로 사치품을 받은 어리석은 행태를 보였다. 이런 조예의 암군 행동에 비하면 그 아비인 조비의 행동은 정석적인 사대교린의 예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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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는 아니지만 《
세설신어》 현원편(賢媛篇)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조조는 죽을 때 자신의 측실들로 하여금 바느질을 하며 스스로 먹고 살라며 약간의 재물을 주고 귀향시켰는데, 조비가 병에 걸려 생모인
무선황후 변씨가 조비의 침실로 문병을 갔더니 조조의 측실들이 있었다. 왜 이곳에 있냐고 물어보니 조조가 죽은 직후부터 조비가 그들을 불러 살게 했다[23]는 것이다. 경악한 변씨는 자신의 아들이 죽어가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남긴 것은 개나 쥐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욕을 했으며, 조비가 죽고 난 후에도 무덤에 가서 애도하지 않았다.
다만 세설신어는 당대의 유명인사들에 대한 민간 소문을 담아낸 가십 모음집이라 역사적 신뢰도는 낮은 편이라 이 얘기가 진짜 있었던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저 이 썰을 통해 위진남북조시대에 어느 정도 조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 하후상은 조비의 친구였다. 두습은 하후상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조비에게 그 놈이랑 놀지 말라고 타일렀는데, 조비는 듣지 않고 하후상과 계속 교유했다. 이후 하후상은 조비의 일족인 덕양향주 조씨[24]와 결혼했는데, 하후상은 본처 덕양향주를 놔두고 다른 애첩을 매우 총애했다. 그러자 조비는 자기 가족처럼 아끼던 덕양향주를 위해 사람을 보내 그 첩을 처형했다. 그 충격때문인지 하후상은 중병에 걸렸다. 조비는 절친 하후상이 병석에 들자 여러차레 문병을 갔다. 하후상이 끝내 사망하자 도후라는 작위를 추증했다. 이렇게 남의 가정사에 권력을 동원해 끼어든 조비의 행태는 훗날 지나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 조비에게도 효자로서의 일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조비가 조조 상중에 잔치 벌이고 놀았다는 것 때문에 까이긴 하지만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사마부전)에 따르면 조조 사망 후 조비가 슬픔이 과하여 계속 꺼이꺼이 울어대고 신하들도 곡만 하며 절차 진행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조씨 정권 조정이 마비된지라 결국 사마부가 총대를 메어 조비에게 "천하가 전하의 명에 기대고 있으니 위로는 종묘를, 아래로는 만국을 위해야 하는데 어찌 필부의 효를 본받고 있습니까?"라고 일갈하여 조비를 정신차리게 하고, 화흠과 함께 나머지 신하들도 그만 좀 울고 일하라고 간언해 겨우 수습했다고 한다.
4. 조비와 그 혈육들
조조는 아들 중에서 조충을 조비는 물론 조식이나 조창보다도 마음에 들어했는데, 10대 초반에 일찍 병사했지만 굉장히 사려 깊고 지혜가 뛰어나 조조가 이미 후계자로 마음 두고 있었다 한다. 조비도 제위에 오른 후에 "만약 창서(조충의 자)가 살아있었다면 나는 천하를 지배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종종 얘기했을 정도. 조충이 죽자 조조가 남은 자식들에게 "조충이 어린 나이에 죽은 게 나에게는 불행이나 너희들에게는 행운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문무 양방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두루 보인 조조의 자식들 답게, 조비의 형제들은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위에서 보듯이 조비 역시 나름대로 능력을 타고 났으며, 무엇보다 조앙과 조삭의 사망으로 인한 것이긴 하나 장자의 자리를 타고 났으니 행운아라고 할 만 하다.
조비는 견제 속에 왕(그리고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이 되고 난 후에는 형제들을 권력의 핵심에서 몰아냈다. 조식과 조창 등의 형제들을 경계하여 각각 왕위를 줘서 지방 임지에 묶어두고 감시하면서 수도로 절대 올라오지도 못하게 했고, 벼슬이나 일도 맡지 못하게 했다.
사실 형제로서는 좀 비정하지만, 친족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하여 권력의 안정성을 높인 선택이었다고 보면 군주로서 비판할 일은 아니다. 이는 왕조시대 왕자의 난에서 자주 보이는 일이며, 조비의 개인적 문제라고 보기는 힘들다. 삼국지 내에서만 한정해봐도 원소나 유표는 결국 후계자 다툼을 둘러싼 왕자의 난때문에 그 세력이 멸망했다. 이는 한국의 재벌가에서도 자주 벌어지는 일이고 이를 전적으로 조비의 저열한 인간성 탓으로 돌리는 건 무리한 주장이다.
이에 반해 조비는 조간에게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등, 자기 권력에 위협에 되지 않는 여러 가솔들에게는 오히려 후대한 경우가 많았으며, 이게 지나쳐서 나중에 손가락질 받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자신과 어렸을때부터 친족으로 자란 의붓 누이인 덕양향주 조씨의 남편인 하후상이 애첩만 사랑하자 누이를 위해 애첩을 처단했는데 남의 가정사에 권력을 동원에 개입한 조비의 처사는 두고두고 욕먹는 경우가 되었다.[25]
이렇게 형제들에 대한 냉랭한 태도는 일부 팬덤의 주장처럼 조비가 본성적으로 사이코여서 그렇다기보다는 일종의 통치술이라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다만 이것이 조예 대로 가면서는 황제의 친위세력이 될 만한 친족들이 빌빌거릴 지경이 되어 사마씨의 권력 찬탈에 유리한 환경이 되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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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조식이 후계자에서 탈락하고 조비가 세자가 된 이유는 연의에서 나온 것처럼 조비의 비열한 계략 때문은 절대로 아니다. 일단 조비는 장자이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세자가 될 가장 큰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형편에서 조비가 세자에서 탈락하려면 조식이 조비의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능력이나 공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조식은 오히려 계속 삽질을 했다. 조비는 가후나 사마의 같은 여러 중신의 지지를 얻었지만 조식의 지지세력은 권력 핵심부에서 밀려난 양수나 혹은 조비와 사사로은 악연이 있는 정이 형제뿐이었다. 게다가 연의에서 미화된 것과는달리 조식은 술을 너무 좋아하는 치명적 결점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는 술 취해서 궁궐의 사마문[27]을 통과하는 대형사고를 치기도 했으며, 조식에게 문을 열어준 관리는 처형되었다. 연의에 나와있지 않아 잘 안알려진 일화지만, 세자에서 탈락한 이후에 219년에 벌어진 번성 공방전에서는 관우의 공세에 위기에 빠진 조인을 보좌하기 위해 남중랑장으로 파견되었으나 술에 취해 아무일도 못했고, 조조의 분노를 샀다. 이를 보면 조식은 알콜중독이 의심되며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조비는 후계자 경쟁을한 조식에게 큰 한을 품었는지, 즉위한 후 조식을 죽이려고 했으나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와 더불어, 조식의 칠보시에 마음이 움직여,조식을 죽이는 걸 포기하고 그를 추방하는 데에 그쳤다. 조식은 왕으로는 봉해졌지만 항상 봉지가 바뀌었다.(견성왕 - 옹구왕 - 준의왕 - 옹구왕 - 동아왕 - 진왕) 다만 조비가 바꾼 것은 견성에서 옹구로 한 번이고 나머지는 조예가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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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
조창이 임지로 돌아가자, 연이어 해마다 식읍을 추가하고(220년), 공으로 봉하고(221년), 왕으로 봉하는(222년) 등 후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다음해 수도에 와서 조비를 알현한 뒤 갑자기 병에 걸려서 수도에 있던 관저에서 급서(의문사)했다. 《세설신어》에는 조비가 조창을 독살했다고 나온다.
물론 조창은 안그래도 호랑이를 맨손으로 쳐죽일 만큼, 당대의 맹장인 데다가 조조의 장례 후 가규에게 옥새의 행방을 물으며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 여러 기록상으로는 꽤 권력 투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이 나타나기에 형제들 중에서도 특히 큰 위협이라 제거했을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보자면 조창은 조조 휘하에서 재능을 증명하고 무훈을 쌓은 상황에 따르는 이들도 많았고, 본인의 권력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닌 상황에서, 다른 형제들은 모두 봉지에 연금해버린 상태에 느닷없이 조창만 수도로 불러 알현시키더니, 조창이 며칠 후 병에 걸려 급사했다는누가 봐도 미심쩍은상황인 것이다. 이에 조창의 후대 역시 조창의 입지와 기세에 대한 일종의 인정과 타협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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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
조비는 형제들을 전부 왕으로 봉했지만 엄격하게 통제해서 친우든 친척이든 함부로 만날 수 없었으며 형제끼리라도 사사로이 왕래를 할 수가 없었다.[28] 심지어 따로 관리하는 사람까지 두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게 했다.
조곤은 학문을 좋아하고 몸가짐이 바르기에 감시하는 관리가 좋은 뜻으로, 마땅히 이러한 선행도 보고해야 한다고 하자 조곤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 '강용하다' 내지는 '인망을 샀다' 같이 경계심을 자극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몸가짐이 바르다는 칭찬인데 그마저도 조비의 귀에 들어가는걸 이토록 무서워했을 정도이니 형제들에 대한 견제가 얼마나 서슬퍼렀는지 알 수 있다. 조곤은 원래 자신을 내세우는 걸 극도로 꺼린 인물이기에 그러한 천성도 반영된 일화일 것이나 조비의 감시가 매우 철저했음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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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간
막내동생인 조간에게는 유독 호의적이었다. 조조가 죽기 전 "조간이는 이제 어린 나이에 엄마 아빠도 없으니 니가 잘 보살펴 줘라."라고 부탁하기도 했고, 아무리 냉혹한 조비라도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동생 조간은 너무 불쌍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조간이 너무 늦게 태어나 후계자 분쟁과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왜냐면 조조가 조간을 본 나이가 무려 60대다. 또한 조창, 조식, 조충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자신과 다투었지만 조간은 이미 조비가 후계자로 선정된 다음에 태어났다.
나이차 때문에 조간은 조비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조비는 매번 형이라고 고쳐 주는 한편 일찍 아버지를 잃은 조간을 딱하게 여겼다고 한다.[29] 심지어 조간은 조비의 아들인 조예보다도 11살이나 연하였다. 조비에게 조간은 자기 아들보다도 어린 동생이었다. 그런 고로 나이 상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어 조비에게는 자기 아들보다 더 아들같아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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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공주
조비는 자기 이복누나 청하공주를 절친인 하후무와 혼례를 주선했다. 이를 들어 하후무와의 친분때문에 조비가 누나를 부적절한 사람과 결혼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하후돈의 집안과 조조의 집안은 매우 가깝고, 꼭 친분이 아니더라도 사돈을 맺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군사적 재능이 없는 하후무가 나중에 진동장군이 되어 전선에 나간 것은 매우 부적절한 일이지만 그건 조예때 일이고 조비 시절에는 전선에 나간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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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목황후 조씨
매우 비극적인 경우. 이복동생인 조절은 헌제의 황후였다. 선양을 받아내어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르는 과정에서 이복동생과 대립한 것이다. 헌목황후는 "하늘은 결코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다!"는 독기 어린 말까지 해 가며 조씨 정권의 찬탈을 비난했다.[30] 이 케이스는 무엇보다도 '같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다른 왕조를 섬기는' 구도가 아주 문학적이기 때문에 자주 거론되며 조비의 비난에 이용되는 경향이 있는데, 조비가 아니라 다른 이가 황제가 되었어도 유명무실한 한실 대신 조씨가 천자를 선양받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상당한 개연성을 갖는 일이기 때문의 조비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시대적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수 있다.예를 들어 이성계도 사돈 ( 이방번의 장인이었다) 인 정창군 왕요를 고려왕에 즉위시켰다가 자신이 왕에 즉위한 이후 사약을 내려 죽였으니 이런 일은 시대를 지역을 불문하고 자주 일어난다.
5. 조비가 후대했던 이들
조비는 학자나 문인을 우대했다. 아래 나와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잘 쓰거나 혹은 학문적 업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공융 같은 경우는 아버지 조조시대 처단되었지만, 조비는 공융의 글을 높이 평가하여 건안칠자의 으뜸으로 놓았다.또한 항장도 후대했는데, 이는 조비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조조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공융
공융은 조조를 여러번 조롱했으며, 결국 조조의 분노를 사서 역적으로 몰려 집안이 멸문당했다. 하지만 조비는 원희의 처였다가 자신이 처로 삼은 견씨의 일로 자신을 모욕했다고 볼 수도 있는 공융을 집권하자마자 복권했으며, 당대 걸출한 7명의 문인인 건안칠자의 으뜸으로 기록했고, 조조 이후 산산히 흩어진 그의 글을 모으기 위해 포상금까지 내걸었다. 이외에도 왕찬의 아들들은 위풍(삼국지)의 난에 가담했다가 조비 휘하에서 모두 처단당해 왕찬의 대는 끊겼지만, 조비는 역적의 아버지인 왕찬을 글쏨씨가 뛰어나다며 건안칠자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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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달
조비는 관우의 죽음으로 처지가 곤란해진 맹달이 위나라로 귀순해 오자 매우 후대했다. 사마의, 비시, 유엽 등이 맹달을 혹평하며 중히 쓰지 말라고 간언했으나 조비는 듣지 않았다. 일부 삼덕들은 이를 맹달의 외모 때문이라고 주장하나, 그건 맹달이 잘생겼다는 사서의 기사를 기반으로 한 추측일 뿐이고 사서에는 조비가 맹달의 외모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조비가 맹달을 후대한 이유로 들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위왕을 계승하자마자 이전에 거의 이탈자가 없던 유비 진영에서 중신이 귀순하는 일이 자신의 권위를 높여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31] 그리고 삼국지 팬덤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맹달은 문인이었으며, 문집을 세권이나 남겼다고 전해진다. 맹달의 문집은 남아있지 않지만, 맹달이 관우의 죽음을 추궁하는 유비를 떠날 때 유비에게 변명하면서 남긴 글을 봐도 문장이 매우 유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문인을 자처하는 조비는 맹달의 이런 글재주를 높이 평가했을 것이고 조비는 공융에서 보듯이 글재주가 있는 사람은 설령 자기를 조롱했다고 해도 높이 평가했으며, 조비는 맹달의 외모보다는 글재주를 높이 평가했다는 보는게 더 근거가 있다. 이렇게 후대를 받은 맹달은 위나라군을 이끌고 본인이 촉에 있을 때 다스리던 상용을 탈환했고, 조비는 이를 바탕으로 신성군을 설치하여 위나라 영토로 확정했다. 맹달은 조비 치세에는 그곳에 주둔하면서 오나라와 촉나라를 잘 견제했으니, 조비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훗날 맹달이 다시 배신했기 때문에 이는 조비의 얼빠성향이 빚어낸 인사참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나, 어쨌든 조비 생전에는 맹달은 조비가 우대할만한 공도 세웠고 그럴만한 재주도 있었다. -
황권
황권은 원래 촉나라 세력이었지만, 이릉대전에서 포로로 잡혀 위나라에 투항했다. 촉나라에서는 아직 촉에 남아있는 황권의 처자식을 체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왔지만 유비는 황권이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황권을 버린 것이라며 그러지 않았다. 후일 유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쌤통이라 여기며 잔치를 베풀면서 다들 크게 기뻐하는 와중에 황권 혼자만 서럽게 울었는데, 조비는 오히려 이런 황권을 충의지사라며 총애했다.[32] 조방 대에는 심지어 군부의 최고 인사 가운데 하나인 거기장군으로까지 승진하는데, 조비 대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고위 인사로 승진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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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예
오래 전의 항장인 전예에게 신경을 써주기도 한다. 여담으로 전예는 이민적 토벌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으로, 조비가 견제했던 그의 친동생 조창과 콤비로 오환을 때려잡은 경력이 있다. 아무리 질투하는 자기 동생과 엮인 인물이라도, 그 뛰어난 능력과 공훈을 무시할수는 없었던 듯하다. 전예 본인의 문제없는 깔끔한 처신 또한 한몫 했을 것이다. 황초 연간(220년 ~226년) 전예가 호를 토벌했는데, 영호준이 전예가 지시를 조금 위반했다고 법으로 잡으려 했다. 조비는 분노해 영호준을 포박하고 벼슬을 파면해 죄를 묻고서 조서를 내렸다. 조비가 조서를 내리면서 영호준은 어찌 그리 멍청하냐고 했기에 우(愚)를 이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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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후
자신의 형을 죽게 만들고 자신조차 위험에 빠뜨렸던 인물인데도 조비 휘하에서 중용받았다. 가후의 성향상 보신적이었으며, 그 역시 조씨가문에 한 일과 동탁 밑에서 일했다는 오점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몸을 사리고 주군의 기분을 최대한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언하는 등 스스로 처세를 잘했다. 조조에게 원소와 유표의 일을 말해 에둘러서 조비를 지지한 일도 한 몫했을 터이다. 조비 또한 이걸 전해 듣고는 따로 가후에게 후계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방안을 물어보기도 했고.[33]
이에 대한 보답인지 가후는 군권은 없지만 태위라는 고관대작에 임명된다. 그러나 문제는 명예직이 단순히 공이 많다고 올리는 자리도, 보답만으로 주어지는 자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실권은 없되 처신이 올곧고 명망이 있어 다른 신하의 모범이 되는 조정의 웃어른 격 위치이자 대외적인 얼굴이나 마찬가지인, 이른바 '명예'로운 자리인데 역적인 동탁의 수하였던 흠이 있는 가후의 임명은 명예직의 무게와 취치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손권은 이런 조비의 안목을 비웃었고 가후 역시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평소부터 처신을 신경을 쓰고 있었던 터라 불안감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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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원래 원소 밑에서 일했으나 조조를 섬긴 인물. 조비와 개인적으로도 친밀하여, 세자 책봉 때 너무 기뻐서 신비를 꼭 끌어안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조비 때 간언을 하다가 신세를 망친 인물이 한두 사람이 아니지만, 신비는 직언을 하고도 조비에게 해를 당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신하이다.
항장을 우대하는 것은 물론 조비만의 특색이 아니고, 어느 세력이든 적대 세력으로부터의 항장은 우대하는 것이 정상이다. 유훈, 왕충, 방덕, 허유 등의 인사는 물론 오자양장 중 장료, 장합, 서황 셋이 항장이다.[34] 조비의 항장 우대는 항장의 특성과 결부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대체로 항장은 항복하고 나면 정치 기반이 전혀 없기 때문에 군주의 비호를 받지 않고는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할 수가 없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군주의 친위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큰 부류이므로 군주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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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
유학자. 조비가 크게 아낀 학자로, 함께 서전을 논의해 해가 저무는 것도 모를 정도였으며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설군'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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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순
명망 높은 학자. 조비와 조식이 모두 불러들이려고 했으나 조조가 조식에게 소속시킨다. 이후에 조식의 스승이 되어 조조에게 조식을 칭찬하는 등 조비에게 원망을 샀는데, 미운털이 박힐 일을 한 것치고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말년을 편안하게 보냈으며 오히려 글을 잘 쓴다고 상을 받기도 한다.
- 장범, 병원
모두 학문으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장범의 아버지 장연는 후한의 태위였고, 할아버지 장흠[35]은 사도였다. 하지만 장범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했고 병원도 이름 높은 학자였다. 조비는 이들을 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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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질
어렸을 때부터 박학다식했고, 조비와 친구가 되었다. 오질은 조식과 경쟁하는 조비를 도와 후계구도를 굳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오질은 조비를 믿고 조비가 황제가 된 후 방자하게 굴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가 죽은 후에는 세간에 오만하다는 평을 받았다.
종요는 매우 학식이 높았으며, 서예실력이 출중하여 서예사에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현재까지도 그 서체가 내려오고 있다.. 이랬기 때문에 조비의 총애를 받았고 종요도 아부에 소질이 있었는지, 원래 옥괴(옥으로 된 고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조비에게 바쳤고, 조비는 종요에게 감사편지를 썼다. 이 감사편지 <여종대리서(與種大理書)>는 현재도 전하고 있다.
위략에는 이 정황을 기록했는데, 조조가
한중공방전에 출정한 사이 내정을 맡고 있던 세자 조비가 임치후(조식)을 보내서 종요에게 이를 달라고 했고, 종요는 깨끗히 주었고 어떤 사람은 조비가 이렇게 종요로부터 옥괴를 강탈했다고 주장하면서 조비의 저열한 인간성을 보여주는 예로 들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보면 조비가 종요로부터 빼앗았다기보다는 종요가 세자 조비에게 잘보이려고 조비가 관심을 갖자 바로 준 것으로 보이고, 조비도 종요에게 보물을 받은 만큼 후하게 보답했다. 이 사건의 전후로 생긴 변란이 연의에 나오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바로
위풍(삼국지)의 난이다. 위풍은 조조가 없는 틈을 타서 업성에서 봉기하여 조위 인사를 죽이고 정권을 잡으려 했는데 위풍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종요였으며, 이 난에 연루되어 위풍과 가까운 수십명이 처형당했지만 종요는 이렇게 옥괴를 바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냥 파면에 그쳤다. 조조는 이 난이 진압된 후야 낙양에 도착했다가 바로 사망하는데[36] 종요는 조비가 위왕을 계승하자 바로 복직되며 벼슬이 최고위직의 하나인 태위에 이르렀다.
6. 조비의 선정
물론 조비도 마냥 인간성이 모자란 면모들만 보여준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인간성에 문제만 있었다면 조조의 후계자가 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미담도 있다.- 위왕 시절, 전쟁터에 나선 병사들 중 간혹 유해조차 거두어 돌아오지 못한 자들이 있는데 자신은 이를 애석하게 여겨왔다며 이제부터는 작은 관을 갖추어 전사한 병사들의 유해를 보관해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하고 제사도 지내주자고 말했다.
- 222년, 홀아비, 과부, 중환자, 빈자들을 구휼하는 정책을 펼쳤다.
- 223년, 기주 지역에서 기근이 들자 구휼했다.
- 225년에는 패국을 순찰하던 도중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물을 내려주었다.
- 조비에게는 조간이라는 막내동생이 있었는데 조비가 39세때, 그리고 조조가 61세때 태어났다. 조간이 세 살때 생모가 사망한지라 조조는 조비에게 조간이 세 살때 엄마를 잃고 이제는 아빠까지 잃으려는 불쌍한 앤데 네가 좀 잘 챙겨주라고 부탁하고 죽었고, 조비는 조조가 시킨대로 조간을 돌봐주었다. 조간은 큰형 조비랑 나이차가 너무 심해서인지 조비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37] 그러자 조비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할아버지가 아니라 형이라고 정정해주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본인과의 나이차가 너무 심하게 나는 동생이라 자기 권력에 위협이 될 리 없고, 아버지가 말한대로 부모를 일찍 잃었기에 가엾게 여겼을 것이다.
[1]
다만 제갈량도 이 일을 덮어두었다. 법정이 유비의 입촉에 세운 공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공정무사를 제일로 치던 제갈량도 법정을 이를 들어 처벌할 수 없었다.
[2]
이밖에도 일부 삼덕들의 자의적 사료 해석이 마치 정설인양 퍼지기도 했다. 아래 종요부분 참조.
[3]
이때
곽가도 유성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봐서, 장수도 같은 병으로 죽은 것으로 보인다.
[4]
사실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여러 기근에서 생존을 위한 식인의 사례는 종종 발견된다.
[5]
《촬요(撮要)》의 기록이다. 흥미롭게도 이 대목은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에서도 등장하는데,
영락제가
건문제를 두고 일으킨
정난의 변에 대한 당시 정황과 연관되어 있다. 해당 문서로. 여기에 따르면
유엽은 손권이 훼이크치는 거라며 믿지 말라고 했는데 조비는 낚였다는 식이다.
[6]
어찌보면 조비보다 더 철딱서니없다고 할 수 있는게,
손권은 사냥도 그냥한게 아니라 일부러
마차의 덮개를 뜯어낸 상태에서, 짐승들이 덤빌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을 덮치는 순간에 근거리에서
창으로 찔러서 잡는 것을 즐겼다. 일개 장수가 해도 무모한 짓이라고 비판받을 일인데, 무려
일국의 황제가 이 짓거리를 하니 신하들이 뜯어말릴 만도 했다. 이것 말고도 손권이라는 인물이 워낙에 만용을 부리는 일이 잦아서 피본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7]
정사 원문은 다음과 같다. (소칙) 신이 듣기로는 옛 성왕들은 동물때문에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는 합니다. 폐하는 요임금을 본받으셔야 하는데 많은 관리를 죽이려하니 어리석은 저는 그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히 죽음으로 사면을 청합니다. 문제는 "경은 강직한 신하요"라고 답하며 모두를 사면했다. 이후 이 일 때문에 소칙을 어렵게 생각했다.(臣聞古聖王不以禽獸害人,今陛下方隆唐堯之化,而以獵戲多殺群吏,愚臣以為不可。敢以死請! 「帝曰:」卿,直臣也。 "遂皆赦之。然以此見憚 ) 일부 삼덕들은 憚을 "싫어하다"로 해석하여 조비가 소칙을 싫어했다고 주장하지만, 憚은 한문에서 주로 "경외하다" 또는 "무섭게 생각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8]
비단 100필을 달라 했다고도 한다.
[9]
무선황후는 행동을 가볍게 하는 인물이 아니었으며, 사서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최대한으로 봐도 그녀가 개입을 한 건 자신의 동생이 빈곤하게 산다고 남편 조조에게 벼슬 좀 올려달라고 부탁한 것과 아들 조식을 살리기 위해 나선 것 밖에 없다. 즉 웬만해선 간섭하지 않던 태후가 당시 황후를 압박하면서까지 강하게 나설 정도로 미친 짓이었던 것이다. 조홍은 단순한 종친이 아니라 개국공신이자 황실의 웃어른, 심지어 조조의 생명의 은인이므로 조비 자신의 은인으로 공경해도 모자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별 것도 아닌 이유로 처형시킨다면 황실의 권위가 떨어질 것은 자명했다.
[10]
정확히는 '오질이 조진의 건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편을 들어줬다. 오질이 조비라는 뒷배경을 밑고 위나라 원로인 조홍과 친족인 조진에게 대놓고 오만하게 굴면서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일이 허다했다.
[11]
조비가 후일 일찍 세상을 뜨자 조진을 탁고대신으로 삼은 것을 생각했을때 이는 조진이 충분히 불만을 가질 만한 조비의 경솔한 행위가 맞다. 조비가 유사시 탁고를 맡길 정도로 조진은 당대 조씨 황실을 지탱할 유력한 종친 중 한명이었는데 그런 이의 명성을 깎아서 좋을게 뭐가 있겠는가. 또한 앞서 설명한대로 조홍은 황실의 최고 웃어른인 만큼 (조조에게 성을 받아 들어왔다지만) 엄연히 황실 소속인 조진도 말은 못했지만 조홍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12]
비슷한 케이스인
한단순은 조식을 칭찬했을 뿐만 아니라 조식의 사부였음에도 죽지 않았다.
[13]
순운의 아내가 조조의 딸이자 조비의 누이인
안양공주였다. 해서 순운의 자식들은 조비 자신의 생질들인지라 총애했다고.
[14]
사실 조상 일파의 정치, 특히 하안에 대한 이 두 평가 모두 반론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안 항목으로.
[15]
다만, 이렇게 말한 것 치고 조조는 정의를 중용하지 않았다. 헌제 앞에서는 유종을 칭찬했으면서도 손권과 유수구에서 싸울 때 유종을 이복형 유기와 함께 개돼지 같다고 싸잡아 비하한 조조의 평소 언행을 고려해 볼 때, 저 탄식은 느닷없이 혼담이 깨진 정의를 달래주는 립서비스이거나 '내 딸을 하후무 같은 놈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아니었다.'는 아버지로서 후회를 돌려 말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16]
한서 문제기 문제7년(기원전 157년) 6월 기해 기사
[17]
원소가 그 경우에 해당한다.
[18]
위나라 고관인 왕심이 저술한 책이며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위서>는 남북조시대의 북제가 저술한 것으로 남북조 위나라의 역사서로 흔히 <
북위서>로 더 잘알려져 있다.
[19]
이것도 위서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역사서이며, 현재 전하지 않는다.
[20]
당장 조선의 경우도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고 해서 하루를 한 달로 쳐서 27일만 상복을 입어도 삼년상(27개월)을 끝낸 것으로 여겼다. 이걸 FM으로 하다가 건강을 해쳐 요절한 조선
문종이나
인종의 사례만 봐도 임금이 국정을 돌보는데만도 힘에 부치는 판인데 삼년상에 유도리가 없는 것은 오히려 조종이 물려준 국가에 대한 책임감 결여로 볼 소지가 있다.
[21]
사실 당대에는 유교가 지나치게 교조화되어 본질적인 것은 망각하고 형식에만 치중하여 그 원뜻과는 달라진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삼년상 도중 잠시 어지러워서 옆에 있던 여자한테 기댔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벼슬길에서 쫒겨난 이도 있었을 정도였다. 완적이 모친상 때 술과 고기를 먹은 이유도 그러한 풍조를 비판하기 위한 의도적인 도발이라고 보는 분석이 다수다. 애시당초 죽림칠현이 이런 허례허식에만 치중한 유교 문화를 비판하기 위해 생겨나기도 했고 말이다.
[22]
출처: 오서 오주전 주석 강표전
[23]
단순히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것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첩을 취했다는 뉘앙스가 있다.
[24]
덕양향주의 아버지는
진백남였는데, 그는 조조의 목숨을 구해주고 대신 죽었다. 이에 조조는 그 공을 기려 그의 성을 조씨로 바꾸고 그의 아들
조진,
조빈과 딸 덕양향주를 자기 자식들과 같이 길렀다. 그러니 조비와 덕양향주가 친남매는 아니었어도 친남매처럼 같이 자란 사이였다.
[25]
하지만 하후상은 조비와의 친분으로 조비의 의붓누나인
덕양향주 조씨와 결혼하여 조조의 외척이 되었고, 이후 이 연줄로 고속승진을 했음에도 애첩만을 총애한 것은 당연히 지각없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조비가 남의 가정사에 개입한 것도 문제긴 하지만, 하후상 같은 경우도 잘했다고 보기 힘들다. 조선왕조도 마찬가지였지만 중국에서도 황녀와 결혼한
부마는 첩을 두는데 상당한 제한을 받았다. 명나라 같은 경우 주원장의 딸 남강공주의 남편이 호관과 결혼했는데, 영락제 시절 호관은 기녀에 빠져 산다고 조정에서 매우 비난받았다. 부마는 공주가 죽어도 첩을 둘 수 없었는데, 마찬가지로 주원장의 딸인 보경공주의 남편인 조휘는 보경공주 사후 첩을 들였다가 조정에서 비판받았다.
[26]
사실 친족의 세력이 약한 것보다는 조씨 황제들이 다 요절하거나 젊은 나이에 폐위된 것이 사실 가장 큰 문제였다. 사실 황제가 이런식으로 요절하는 것은 중국 왕조의 멸망의 패턴이며, 이후로도, 당, 송(남송), 명, 청 모두 마지막 황제들은 이런식으로 즉위했다가 왕조가 멸망했다.
[27]
황제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 사마문 일화는 연의에서는 각색되어 마치 조식이 조조의 명을 받고 자신을 가로막는 관리의 목을 치고 통과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상은 조식이 술에 취해 엄청난 사고를 친 것이다. 이때 조조는 위왕에 갓 올라서 황위 찬탈의 전단계로 가는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었는데, 조식이 사마문을 통과해 이를 확증시켜준 셈이 되어버렸다.
[28]
이러한 배경 속에 조식은 이복동생인 조정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며 석사부라는 글을 지었으며 친척들과 교류를 할 수 있게끔 압박을 풀어달라는 식의 상소를 올리기도 한다.
[29]
둘의 나이차는 무려 30살이었다. 오늘날에 30살 많은 맏형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짧고 만 15살만 되어도 성인이었던 데다가 조혼 및 조산이 당연하던 그 시절에 30살 차이면 정말 할아버지와 손자뻘처럼 여겨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30]
헌목황후 조씨는 260년 6월 7일에 사망했는데, 같은 달 조모가 사마소에게 살해당하며 결국 그녀는 죽기 전 위가 멸망해가는 모습을 보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31]
황권을 우대한 이유도 마찬가지로 설명된다.
[32]
다만 그 성격은 어디 안 가서 황권에게 어서 출두하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오는 중에도 사람을 더 보내 닦달했다. 아마 황권이 당황해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걸 보고 싶었던 듯. 하지만 황권은 시종 태연하고 침착했으며, 조비도 장난이었기에 해코지는 안하고 이후에도 계속 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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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가후는 어디까지나 장수의 부하에 불과했기 때문에 조조의 패배, 그리고 조앙의 죽음은 조조에게 원한을 갖고 조조군을 야습한 장수에게 책임이 있다. 이에 따라 조비는 장수를 증오했으며 자살할 때까지 괴롭혔다. 가후도 물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주군을 위해 계책을 짠 것 뿐이고, 가후 본인도 언행을 조심하면서 조비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조비 입장에선 그럭저럭 쓸만한 놈으로 보였을 것이다.
[34]
장료는
동탁의 부하 출신,
장합은
원소의 부하 출신으로 둘 다 조조의 적대 세력의 장수였으며, 서황 역시
백파적 출신이라는 추측이 있으며
양봉의 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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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의 장흠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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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의 난은 219년 9월에 벌어졌는데, 한중공방전이 5월에 끝났지만, 정사 삼국지 무제기를 보면 당시 조조는 10월에야 패잔병을 이끌고 낙양으로 복귀한다. 패전의 충격과 함께 조조의 건강은 매우 나빴던 것으로 보이며, 조조의 건강이 나빠지자 위풍은 쿠데타를 기획했다가 진압당한 것으로 보인다. 조조는 복귀 직후인 220년 1월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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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차이가 40세 가까이 나니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