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이 요시오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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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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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
[br] 2009, 2011, 2012, 2014, 201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 나인 |
[br] 2009~2014, 201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
2014년 퍼시픽 리그 수위타자 |
2016년 퍼시픽 리그 최다 도루 |
2011, 2012, 2014년 퍼시픽 리그 최고 출루율 |
보유 기록(NPB) | |
1경기 최다 2루타 | 4개 |
최고령 도루왕 | 35세 |
6년 연속 3할 20도루 골든글러브 수상 | 2009~2014년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26번 | ||||
무토 준이치로 (2002~2003) |
→ |
이토이 요시오 (2004~2010) |
→ |
니시카와 하루키 (2011~2014)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7번 | ||||
츠보이 토모치카 (2003~2010) |
→ |
이토이 요시오 (2011~2012) |
→ |
오비키 게이지 (2013~2014) |
{{{#ffffff [[오릭스 버팔로즈|오릭스 버팔로즈]] 등번호 7번}}} | ||||
아카다 쇼고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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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이 요시오 (2013~2016) |
→ |
요시다 마사타카 (2022) |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7번 | ||||
니시오카 츠요시 (2013~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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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이 요시오 (2017~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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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든 노이지 (2023~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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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이 요시오 糸井嘉男 | Yoshio Ito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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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81년 7월 31일 ([age(1981-07-31)]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교토부 요사군 이와타키초 (現 교토부 요사군 요사노초) |
학력 | 교토부립 미야즈 고교 (교토) - 킨키대학 |
신체 | 188cm, 92kg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우투좌타 |
입단 | 2003년 드래프트 자유획득제 (닛폰햄) |
소속팀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004~2012) 오릭스 버팔로즈 (2013~2016) 한신 타이거스 (2017~2022) |
등장곡 | SMAP - SHAKE |
응원가 |
닛폰햄 시절[1] 오릭스 시절[2][3] 한신 시절[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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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오릭스 버팔로즈, 한신 타이거스에서 뛰었던 야구선수, 현 야구해설가. 포지션은 초기엔 투수였지만 이후 외야수로 전향했으며, 등번호는 7번. 컨택, 수비, 주루(+선구안, 갭파워)를 모두 갖춘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2. 프로 입단 전
교토부 요사군 요사노초[6] 출신으로 부친은 전직 트라이애슬론 선수, 모친은 국민체육대회 출장 경험이 있는 전직 배구선수, 조부는 전직 체육교사[7]로 그야말로 체육인 집안에서 태어났다.학창 시절에는 주로 투수로 뛰었으며, 외계인 기질은 이때도 어디 안가서 중학교 시절 연습중 벤치에서 멍때리고 있는 걸 본 고문 교사가 "돌아가!" 라고 호통치자 진짜로 집에 가버린 적이 있다고 한다. 딱히 주목받는 선수도 아니어서 강호교가 아닌 집근처의 미야즈 고교에 진학했고, 무릎이며 어깨를 치료하느라 고교시절엔 4개월밖에 뛰지 않았다. 드래프트될 확률은 높지 않다고 생각해 대학진학을 선택, 긴키 대학으로 진로를 정한다. 대학 시절엔 3학년 때 추계리그 데뷔전을 가졌고 4학년부터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춘계리그 전에서 5승 무패(2완봉승)의 대활약으로 최우수 선수, 최우수 투수로 선정되었고 세 차례의 베스트 나인을 획득했다. 통산 성적은 9승 1패.
2003년 가을, 일본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 자유 획득 범위로 투수로서 입단하게 되었다. 입단 시 등번호는 26번[8]
3.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
186cm의 건장한 체격에서 뿜어대는 최고속도 151km/h의 강속구로 주목받았지만 제구력과 변화구 구사에 애를 먹었고 은근히 유리몸이었기 때문에 프로 적응은 영 좋지 않았다. 2004년부터 2년동안 1군 등판은 한 차례도 없었고 2군에서도 36경기 8승 9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4.86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이렇 듯, 투수로서는 별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당시 닛폰햄의 단장이었던 다카다 시게루[9]는 이토이의 타격센스와 50m를 5초 안에 끊는 준족, 강견에 주목했기 때문에 이토이를 외야수로 전향시키는 결정을 내린다.[10]
외야수로 전향한 첫 시즌인 2006년엔 1군 출장은 없었지만 2군에서 타격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타율 3할 6리, 8홈런, 8도루를 기록했다.
2007년엔 스프링캠프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 개막 로스터에 합류했지만 이내 부진하면서 다시 2군으로 떨어졌고, 9월에 다시 승격되면서 프로 첫 안타와 도루를 기록했고 2008년엔 개막전에 좌익수로 첫 선발출장하지만 또 부진하면서 2군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1군으로 복귀한 이후 5홈런을 때려내면서 잠재력을 발산했다.
2009년엔 드디어 포텐셜이 폭발했다. 개막전부터 모리모토 히초리를 누르고 주전 중견수 자리를 차지, 시즌 초반엔 모리모토와 플래툰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이내 타격감을 끌어올리면서 6월 월간 MVP를 수상, 닛폰햄의 레귤러 중견수로 정착하면서 올스타전에 출장하는 영광을 맛본다. 시즌 최종 131경기 타출장 .306 .381 .520 15홈런 58타점 24도루 40 2루타를 기록하면서 골든글러브와 베스트 나인을 싹쓸이했다.
이후엔 그야말로 퍼시픽리그 최고의 외야수로 자리매김했는데, 2010년 .309 .407 .482 15홈런 26도루, 2011년 .319( 우치카와 세이이치에 이어 리그 2위) .411(리그 1위) .448 11홈런 31도루, 2012년 .304 .404(리그 1위) .410 9홈런 22도루로 특히 2011년부터는 새로 도입된 통일구의 영향으로 극도의 투고타병이 된 NPB에서 변함없이 좋은 활약을 보여줌에 따라 그의 가치는 더욱 더 빛을 발하게 되었다. 정상급 수비력으로 4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은 덤.
2012 시즌 종료 후 연봉협상에선 구단에 포스팅 시스템으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할 의사를 전했다.
4.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선언한 이토이를 닛폰햄 구단은 안고 갈 생각이 없었는지, 이대호를 받칠 타자를 알아보고 있던 오릭스 버팔로즈와의 대형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 이 트레이드에서 닛폰햄은 오비키 게이지, 기사누키 히로시, 아카다 쇼고를 받는다.
닛폰햄 팬 입장에선 프런트 ㅅㅂㄻ라 평가받았고 오릭스팬 입장에선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 평가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시즌에 이대호 앞에 3번타자로 나오던 선수가 출루율 3할을 넘지 못하는 막장
2014 시즌에는 .331 .424 .524 19홈런 81타점 31도루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타격왕을 차지하긴 했는데... 그 모양새가 영 좋지 않아서 욕을 먹었다. 감독이 이토이의 타격왕을 밀어주기 위해 시즌 막판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타격 2위를 기록하고 있던 라쿠텐의 아카미나이 긴지에게 무려 5연속 고의사구를 작렬한 것. 이토이는 이 경기에 결장했다.[11]
2015년 시즌에는 드디어 노쇠화가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인지 .262의 타율로 시즌을 마감하며 7년 연속 3할 타율 달성에 실패했다.
11월 20일 한신행이 정해졌다. 참고 원래 7번을 달고 있던 니시오카 츠요시의 양보로 등번호는 계속해서 7번을 달게 되었다. 단 우익수 자리에는 후쿠도메 코스케, 좌익수 주전으로는 신예 다카야마 슌이 자리잡은 팀 사정 상 무슨 일이 생기지 않으면 이토이는 중견수를 볼 것이 예상되는데, 아무리 이토이의 운동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30대 중반의 나이인데다 오릭스 시절 우익수 수비 지표들도 하락세를 보였던 터라 불안 요소가 있다.
5. 한신 타이거스 시절
한신과의 계약은 4년 총액 16억엔(추정).
중간에 부상으로 한번 이탈하긴 했지만, 8할대 OPS를 찍으며 밥값은 그럭저럭 하고 있는 모습. 초반엔 중견수로 출장했으나 부상복귀 후에는 우익수로 이동했다. 좌익수 자리는 그 다카야마가 제대로 망하며 40세의 후쿠도메가 차지했다. 8월 30일 야쿠르트전에서는 프로 데뷔 후 첫 끝내기 홈런을 쳤다.
2017년 시즌 최종 성적은 114경기 출전, 타율 0.290(리그 10위), 장타율 0.447(리그 9위), 출루율 0.381(리그 7위), 427타수 124안타 17홈런 62타점 21도루.
2018시즌에도 여전한 타격 기량을 보여주며 팀의 중심타선을 치고 있다. 6월 30일 오른쪽 종아리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고도 3주만에 복귀해 복귀전에서 홈런을 쏘아올리는 초인적인 모습도 보여주었다. 다만 팀은 최악의 타격 생산성을 보여주며 순위싸움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중이다. 12경기가 남은 시점에서 타율 관리만 잘한다면 2년만의 3할 복귀도 가능해보인다. 그리고 9월 28일 경기에서 왼쪽 어깨 부상을 당하며 사실상 시즌을 마감하게 됐다. 성적은 119경기 출장, 타율 0.308, 장타율 0.480, 출루율 0.420, 419타수 129안타 16홈런 68타점 22도루. 그리고 팀은 17년만의 최하위로 망했다.
다만 우려되는 점이 있다면 수비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는 것인데 2015시즌 UZR지수가 -7점대였던것이 한신 이적후에는 -17점대까지 폭락했다. 2018년에도 전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16.8을 기록중. 이 수치보다 더 나쁜 수치를 기록하고 있는 선수는 블라디미르 발렌틴 단 1명 뿐이다. 즉 양대리그 합쳐서 이토이의 수비력이 뒤에서 2등이라는 셈.
2019년에는 빈타에 허덕이는 팀 안에서 그나마 3할 타율을 기록중이었지만, 두자릿수는 쳐주던 홈런이 5개로 폭락했다. 8월 3일 도루를 시도하다 왼쪽 발목을 다쳤는데, 당초에는 곧 복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지만 9월까지도 복귀하지 못하며 이대로 시즌아웃이란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그때까지의 성적은 103경기 출장에 타율 .314, 출루율.416, 장타율.403 5홈런 42타점, 9도루. 결국 복귀하지 못했다. 그래도 막판에 팀은 분전하여 가을야구에 복귀했다.
2020년도는 시즌 초 주전 우익수로 출장하고 있으며 3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좋은 타격으로 3번타자에 임하고 있다. 2할 5푼이상의 성적을 내주고 적시타를 종종 치면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치카모토 코지의 부진으로 인해 톱타자로도 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나이와 체력 문제, 요카와 나오마사의 성장으로 중반부터는 백업 및 플래툰 기용으로 물러났으나 여타 외야수들의 성적부진시에는 1순위로 쓰이는 백업 외야수.
다만 확실히 노쇠화가 역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2할 7푼의 타율은 백업 외야수로서는 훌륭하지만 본래 이토이는 다들 알다시피 좋은 백업 정도가 아니라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치는 선수였기 때문. 또한 장타력 역시 폭락해 10월 중순 기준 출루율이 .374인데 장타율이 .371에 2홈런으로 출루율이 장타율보다 높은 똑딱이가 되었고, 도루도 2개로 발도 죽어서 말 그대로 딱 방망이만 잘 친다. 타출갭은 1할 가까이 되어 선구안과 컨택은 아직 살아있는, 전형적인 눈은 보이는데 몸이 말을 안듣는 노장의 스탯.
일단 2020년 기준으로 한신과의 4년 계약이 끝났다. 지속적으로 빈타가 약점인 2010년대 후반 한신의 중심타선에서 그나마 좋은 활약을 하긴 했지만, 수비력의 저하와 계약 3, 4년차에 역력히 보여준 노쇠화로 인해 4년 16억엔이라는 거액에 걸맞은 활약은 아니었다는 것이 총평. 계약 첫 해 나이가 만 37세였으니 어느정도는 예상 가능했던 궤적이기는 했지만...결국 잘 해주었지만 좀 비쌌다 정도로 평할 수 있는 계약이었다.
그래도 아직 백업 외야수, 대타요원으로서는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기에 40세가 되는 내년에도 현역속행이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다. 결국 4억엔에서 2억 1500만엔이 삭감된 1억 8500만엔에 싸인하며 2021년에는 후쿠도메 코스케와 노우미 아츠시, 후지카와 큐지 등의 대 베테랑들이 빠져나간 구단의 최고참으로서 현역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토이 다음으로 나이 많던 야수가 1991년생 우메노 류타로, 투수까지 포함했을 시 1990년생 니시 유키일 정도로 이 시기 한신은 제대로 리빌딩을 하게 되었다. 2억 1500만엔은 구단 역사상 최고 삭감액으로, 이토이는 "나는 이제 주전이 아니며, 다시 한번 컨디션을 끌어올려 도전할 기회를 주는 것에 감사하다"는 겸손한 인터뷰를 남겼다.
2021시즌에 들어와서는 대타 위주로 출장하며 2할 전후를 오가는 부진한 성적을 남기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선수 이토이도 슬슬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성적. 결국 시즌이 끝나고 연봉이 1억엔이나 삭감된 8500만엔에 계약을 했다.
2022년은 개막 로스터에 포함되었으며, 개막전에 스타팅 멤버로 나와서 시즌 1호 홈런을 신고하며 산뜻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팀은 불펜이 7점을 내주는 대방화로 졌다. 이후로도 주전 좌익수로 거의 매 경기마다 선발 출전하고 있다. 멜 로하스 주니어가 영 못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토이 본인도 굉장히 페이스가 좋다. 작정하고 시즌준비를 잘 한 듯. 첫 1달이 지난 시점에서 주전 좌익 자리를 꿰차고 .305의 타율에 OPS .782 3홈런으로 팀 내 최고타율을 기록하며 40세라는 나이를 잊게 하는 활약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지... 교류전 때부터는 1할대 타율과 4할대 OPS로 성적이 급락해 7월 들어 출장이 뜸해졌고[12], 결국 7월 18일 2군으로 내려갔다가 조정을 거쳐 29일 1군에 합류했으나 합류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코로나 감염의심으로 다시 말소되었다. 그리고 2022년 9월 13일 은퇴를 선언했다.[13]
은퇴 시합에서 9번 투수 니시 준야의 대타로 나와 왼쪽에 안타를 기록하면서 마무리까지 초인으로써의 모습을 보이며 선수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6. 은퇴 후
2023시즌 오릭스-닛폰햄전에서 깜짝 은퇴식을 치렀다. 같이 오릭스-닛폰햄을 거쳤던 가네코 치히로와 합동 은퇴식.서로 오릭스-닛폰햄의 유니폼을 바꿔 입어가며 상대하는 이벤트를 가졌다.
이후로는 주로 TV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유튜브도 시작해서 제 2의 인생을 알차게 살아가는 중. 채널명은 현역시절 별명을 딴 이토이 요시오 초인채널. 유튜브도 구독자 9만이 조금 안되는 정도로 제법 구독자가 있다.
7. 플레이스타일
2010년대를 대표하는 완전체 5툴 플레이어.아버지는 트라이애슬론 선수, 어머니는 배구 선수의 체육인 혈통을 타고난데다가 본인이 단순무식하고 성실한 성격이라 그냥 놔두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않고 훈련만 한다는 모양. 그 덕분인지 그야말로 탈아시아급 떡대를 자랑한다. 체지방률은 8%. 거기다 50m 달리기 5.76초, 서전트 점프 87cm, 악력 70kg, 시력 2.0[14] 등등 흠좀무한 운동능력의 소유자라고. 그에 대해 메이저 스카우트는 "하반신이 안정된 타격은 메이저 투수들한테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발도 빠르고 어깨도 강하며 수비범위도 넓다. 당장 메이저리그에 와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다르빗슈 유도 '이상적인 신체'라며 부러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신체능력이 고르게 아주 뛰어나기 때문에 별명도 '초인'.
상술했듯 신체스펙 자체도 뛰어나며 원래 투수 출신인 만큼 어깨가 강하고 발도 빨랐다. 다만 타석 접근법 자체는 호불호가 약간 갈리는데, 삼진을 세금삼아 풀스윙을 하는 요즘 세대 홈런타자들과는 달리 철저히 일본 올드스쿨식 타격을 했다. 삼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나쁜 볼에도 배트를 자주 냈는데 흠좀무한 신체능력으로 억지로 안타를 만들어내던 배드 볼 히터. 덕분에 강타자임에도 타율이 항상 3할을 넘길 정도에 타격왕도 먹을 정도로 컨택이 좋았으며 볼삼비가 1대 1에 가깝고 삼진보다 볼넷이 더 많은 시즌도 있을 정도로 볼삼비도 우수했다. 연평균 삼진 65개 정도로, 알기쉽게 말하면 한국 김태균보다도 연평균 삼진갯수가 적은, 선구안과 정교함을 겸비한 타자.
다만 덕분에 벤치 150을 친다는 파워에도 불구하고 시즌 20홈런을 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가진 힘에 비해 홈런 갯수가 아쉬웠다. 커리어내내 삿포로 돔, 오사카 돔, 고시엔으로 넓은 투수구장만 돌아다녔고, 빠른 발을 살리고자 감독들이 4번보다는 2~3번에 배치했기에 이에 적응한 타석접근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조금 작은 구장에서 좀 더 삼진을 두려워하지 않는 스윙을 했더라면 시즌 40홈런도 넘겼을 거라는 평을 받는데,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워낙 가진 몸뚱이가 대단하다 보니 나오는 아쉬움.
저 신체스펙은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본래 입단때는 깡말라서 구속에 비해 구위가 약한 투수였다고 한다. 타자전향을 하면서 처음 잡은 배트가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져 충격을 받고 웨이트를 해서 지금의 근육덩어리 몸을 만들어낸 것. 석 달만에 원래 입던 양복이 안 맞게 될 정도로 성실하게 훈련을 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워크에씩도 매우 훌륭했던 한 시대의 대타자. 늦은 나이에 야수로 전향해 기본기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5년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노력하는 선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8. 이토이 요시오의 이모저모&기행
- 일본 야구계에 돌아이 투수에 이가와 게이가 있다면 타자에는 이 선수가 있다.
- 대졸 출신인데다 투수로 2군에서 시간을 좀 보내다 야수로 전향하는 등 시간을 많이 까먹어서 FA를 취득하려면 30대 후반이나 되어야 해서, MLB에 진출하려면 현실적으로 포스팅밖에는 방법이 없었으나 소속팀인 닛폰햄 파이터즈에서는 이미 32세였던 이토이의 포스팅피가 얼마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낮은 가격에 선수를 잃느니 트레이드를 선택해 이토이를 트레이드했고 오릭스 입장에서도 나름 크게 대가를 치르고 데려온 선수였고 팀의 기둥으로 자리잡은 선수였기 때문에 포스팅을 시켜주지는 않았다. 결국 구단들의 이해관계 속에 이토이의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고 36세에 FA권한을 취득하게 되어 일본에서 커리어를 마감하게 되었다.
- 동료들 사이에선 우주인이라고 불리거나, 기타 관계자들에게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알 수 없다'는 등으로 언급되며 괴짜 취급을 받는 듯 하다. 드래프트 후에 구단 관계자와의 회식에서 "어땠습니까?"라고 묻는 기자에 질문에 "새우튀김이었습니다"라며 먹은 메뉴를 말했다고.
- 대학 시절 등판했을 당시 상대팀에게 엄청 두들겨 맞고, 보다 못한 감독이 마운드로 올라와 한대 쥐어패려고 손을 치켜들었는데, 이토이는 이걸 하이파이브라고 생각하고서 감독의 손을 쫙하고 후려갈겨 버렸다.[15]
- 야수 전향 첫 날, 타격 후 3루를 향해 뛰었다고 한다.
- 대타로 출전후 삼구삼진을 당한 이후 기자들이 어떤 공을 기다리고 있었냐는 질문에 진지한 얼굴로 "스트라이크입니다" 라고 대답.
- 프로 입단 5년 차에 구단 직원에게 "우중간이 뭐죠?"라고 물었다. 묻기전까지 본인은 우중간이 우주 중간 사이의 무언가인줄 알았다고.
- 프로 입단 6년 차에 고의사구 이후 대주자가 나올 것으로 생각하고 1루로 가지 않고 벤치에 들어가려고 했다. 다음 타자였던 카네코 마코토가 엄청 화를 냈다고. 경기 후에 한 말이 "규칙 하나 배웠습니다".
- 퍼시픽 리그 대표로 올스타전에 출전했을 당시, '센트럴 리그 선수 중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선수가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엥? 저 센트럴 리그 대표로 출전하는 거에요?'라고 대답.
- 앞으로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공을 치면 달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
- 영어는 할 줄 모르지만 외국인 선수들과 텔레파시로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
- 계약변경을 위해 구단과 협상하는 자리에서, 서류에 도장을 찍으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꺼내든건 도장이 아니라 립크림이었다는 모양.
- 가끔씩 아웃카운트를 까먹는다. 2아웃에 주자로 나간 상황에서 뜬공을 쳤는데도 터치업 전력질주로 슬라이딩까지 한다든가, 수비에서도 2아웃에 상황에서 뜬공을 잡아놓고도 진루방지를 위해 공을 던진다든가.
- 홈런을 쳐놓고도 전력질주를 한다든가, 3루에서 헤드 슬라이딩을 하기도 한다.
- 한 평생 야구를 좌타자로 해왔음에도 선수들과 훈련 중에 타석에 들어설때 자기도 모르게 우타석으로 들어 갈 때가 있다고 한다.
- 2022년 스프링캠프에서 니시 유키와 함께 감독을 헹가래치는 서프라이즈를 벌였다.
- 2015년 시즌을 앞두고 오릭스의 주장으로 발탁되었는데, 주장이 된 소감을 듣는 인터뷰에서 기자가 "그 주장 마크의 무게를 느낍니까?"라고 묻자 '꽤나 가벼운 소재라서요(무게가 느껴지지는 않네요)"라고 대답하여 사람들을 빵 터지게 만들었다. 게다가 노리고 한 농담이 아니라 진짜 백치같은 느낌이었던지라.
- 롯데 자이언츠의 외야수 이우민과 얼굴이 매우 많이 닮았다. 두 사람은 우투좌타 외야수라는 것 마저 비슷하다. 다만 이토이는 공수주 셋 다 정상급이였지만 이우민은 타격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게 유일한 차이점.
- 굉장한 노안이다. 째진 눈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전체적으로 근육질에 지방이 없어서 볼이 패였고, 피부가 거칠고 검은 편이라 닛폰햄 시절부터 노안인 야구선수를 꼽으라면 꼭 꼽혔던 선수. 보통 나이에 비해 노안인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제 나이대를 찾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토이는 주름이 많이 생겨서 40살인 지금도 아직 나이가 얼굴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은퇴 직후
SASUKE 40시즌에 출전했다. 꽤 열심히 준비했는지 대부분의 야구선수 참가자들이 극초반 장애물인 쿼드 스텝스나 롤링 힐에서 광탈한 것과는 달리 1st 스테이지 5번째 장애물 드래곤 글라이더까지 갔다.
9. 관련 문서
[1]
今この瞬間に 輝き放て 男 糸井 力強く 突き進め前へ(지금 이 순간에 빛내라 사나이 이토이 힘차게 나가라 앞으로)
[2]
A멜로디: 託された願い乗せて 振り構えたその腕で 頂へと繋がる 架け橋を創れ(맡겨진 소원을 담아서 휘두른 그 팔로 정상으로 이어지는 가교를 만들어라)
[3]
B멜로디: 強烈な 速い打球を 飛ばしたれ 腕力で 叩き込め(강렬하고 빠른 타구를 날려버려라 완력으로 때려버려라)
[4]
전주: 輝く栄冠 突き進めこの道(빛나는 영관 나아가라 이 길을)
[5]
鋭いまなざし 猛虎の魂 力の限り 戦え糸井(날카로운 눈빛 맹호의 영혼 힘껏 싸워라 이토이)
[6]
아마노하시다테 인근에 있으며
교토 탄고 철도
미야토요선
요사노역이 있다.
[7]
노무라 카츠야가 그의 제자였다고 한다.
[8]
2004 ~ 2010까지 단 뒤 2011 ~ 2012년에는 7번을 달았다.
[9]
이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10]
투수로 입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구용품회사로부터 야수용 글러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후에 외야 전향 후 "그 때 이미 (야수전향이) 결정되어 있었네요. 회사도 알고 있었군요." 라고... 물론 회사 측의 단순한 실수.
[11]
오릭스는 바로 전날 라쿠텐전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1승 차이로 시즌 우승에 실패'했고, 이 고의사구까지 겹치면서 오릭스와 라쿠텐 양팀 팬덤간의 분위기는 일촉즉발 상태까지 가게 된다. 해당 시합에서는 양팀 응원단이 서로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을 정도.
[12]
교류전부터
에고시 타이가,
타카야마 슌,
시마다 카이리, 오노데라 단 등이 코너 외야~백업 외야 및 1~2순위 대타 자리를 두고 경쟁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시마다 카이리가 가능성을 보여주며 주전 외야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13]
한때 같은 팀 선배였던
후쿠도메 코스케의 은퇴발표로부터 1주일 후였다.
[14]
원래는 1.0였으나 라식수술을 받았다.
[15]
감독은 이토이와의 이 황당한 일 이후로 체벌에 대해 깊이 고찰하기 시작해, 결국 다시는 제자들을 때리지 않게 되었다는 의외의 해피 엔딩이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