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이에 대한 여담을 정리한 문서.2. 대중매체
- 게임 대항해시대 6에서 항해사로 등장한다. 스킬 중 구도장원공이 있다.
- 웹소설 여왕전하의 비선실세에서는 주인공이 조선으로 왔을 때 처음 만나며 실제 조상이라는 설정으로 둘의 얼굴이 서로 닮았다. 머나먼 후손인 주인공에게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형이라 불러서 주인공이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있다. 유럽에 대한 궁금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주인공을 골아프게 하기도 하며 잉글랜드로 파견되는 사신단에 서장관으로 따라간다. 천재적인 두뇌덕에 외국어 마스터 기능이 탑재돼 사신단에 합류하자마자 중국어를 익혀 몇 주만에 중국어 구사 능력이 통역 가능할 정도로 올라가고 엿듣는 것만으로 영어를 마스터 해버리는 수준에 라틴어까지 탑재했다. 독자들은 잉글랜드에 유학을 퍼뜨릴 것인지에 대해 잔뜩 기대하는 중.[1] 잉글랜드에 머무르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빠져 번역 중이다. 이것으로 인해 조선에 일어날 변화도 기대되는 장면.
- 대체역사 소설 근육조선에서는 근육이 크게 붙기 힘든 체질을 가졌다는 설정으로 등장하며, 그 대신 치밀한 근육 커팅을 통해 진짜 조각과도 같은 세밀한 근육을 도포 안에 감추고 있다는 묘사가 등장한다. 이를 본 2부 시점의 주인공 김성원은 자기도 모르게 ' 이소룡'이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왔으며, 이를 들은 이이는 자신의 별호로 소룡을 칭했고 다른 이들에 의해 소룡식 입신체비라는 학풍으로 새로이 만들어졌다.
3. 기타
-
민담 중에는
이황과 이이의
성관계에 대해
비교를 해놓은 것이 있다. 어느날 이이의 제자들이 스승의 부부관계를 엿보는 일이 있었는데 과연 대학자였다는 이이는 아주 점잖은 체위와 점잖은 빠르기로 조용히 일을 1회 치르고 바로 잠들었다 한다. 이이의 제자들은
라이벌이었던 이황의 제자들을 만나서 "실로 우리 선생께서는 방사조차
거유(巨儒)답게 하신다."고 자랑을 하였다. 그러자 약이 오른 이황의 제자들은 "우리 선생께서 율곡에게 점잖음으로 처지실 리가 있겠느냐." 하며 자기네도 스승의 부부관계를 훔쳐보기로 계획하곤 즉각 실천했는데, 뜻밖에 이황은 보기 드문
체위로 격렬하게
예?몇 번이고 일을 치렀다고 한다. 제자들이 졌다는 부끄러움에 다음날 스승에게 전말을 고하고 그 까닭을 따졌더니 이황은 허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릇 남녀의 정사란 천지간의 큰 화합과 같아, 비구름이 끼고 천둥이 몰아치듯 해야 한다. 율곡이 그 이치에 맞지 않게 일을 치르니, 필경 후사가 포도알처럼 많게 되지는 못하리라.
- 이이의 부인인 곡산 노씨는 이이가 사망한 뒤 8년을 더 살았는데 임진왜란 때 이이의 묘를 지키다가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이 때 가까이 지내던 하녀도 함께 살해당했으며 임진왜란이 끝나고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냈는데 본래는 이이의 묘에 노씨를 합장하려 했으나 시간이 지난 탓에 노씨와 하녀의 두 시신 중 어느 쪽이 노씨의 것인지 알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별개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이의 경우 이황과는 달리 자식 복이 부족한 편이어서 정부인인 노씨와는 딸만 1명이 있었고 그나마 일찍 죽었다. 이 때문에 이이가 죽은 후 서자 이경림이 대를 잇게 되었다. 양반들은 적자가 없으면 친척에게서 양자를 들였지만 이이처럼 서자가 있으면 양자를 들이지 못함이 원래 예법이다. 단 서얼은 과거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가문의 격이 떨어져서 친족들 중에 양자를 들이는 것이다. 가장이 적첩구무자(嫡妾俱無子), 즉 가장과 적실 또는 첩 사이에 낳은 아들이 없어야만 가능하였다. # 만일 서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입양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적자가 없고 서자가 있으면 성서탈적(聖庶奪嫡)이라 하여 서자를 양자로 들여야 함이 본래 예법이다.[2]
- 이이는 인간의 감정을 긍정하는 사람인데 비해 이황은 감정 이상의 도덕적 본성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일단 이이와 이황은 한 세대 정도 다른 시대의 인물임을 감안하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는 힘들다. 그러나 실제로도 이황은 적손이 있어 이황의 종손이 그의 사상을 정리하고 세계에 전파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반면, 이이는 적자를 낳지 못했다. 본처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못했지만 첩 전주 김씨에게서 1남 1녀, 용인 이씨에게서 1남을 보았으며 이 중 서녀는 이이의 제자이기도 했던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에게 첩으로 들어가 아들들을 낳았는데, 적자가 없던 김집은 서자에게 후사를 물려줬다. 서장자인 경림에게 대를 잇게 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면도 보였는데 후손들은 그렇게 해서 근근히 이어진 것이다. 불천위 제사도 멀쩡히 잘 지내고 있다. # 이를 생각하면 진실일지도...
- 민간 설화 중에 젊은 시절의 이이가 금강산 구경을 갔다가 천 년 묵은 구미호에게 홀렸다 달아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이야기를 읽은 이들의 공통적인 소감이 "주변 충고 더럽게 안듣는 찌질이"다. 실제로 이야기를 읽어보면 말 안듣고 멋대로 굴어서 자기를 도와주는 신들을 여럿 피보게 만든다.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한데 이이가 젊은 시절 금강산에 가서 수도하던 중에 일이다. 어느 날 자신을 누가 애타게 부르자 달려가보니 큰 잉어(또는 자라)가 어부의 그물에 잡혀있었는데 이이가 측은하게 여겨 어부에 사정해 물고기를 풀어주었다. 얼마 후 이이는 금강산 주막의 노파로부터 금강산에 혼자 사는 여인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듣는데 얼마 못 가 이이는 한 아리따운 처녀를 만나 유혹을 받는다. 아무래도 처녀가 노파가 말한 여인 같아 자리를 피한 후 노파에게 일러바친다. 노파는 처녀가 천 년 묵은 구미호니 접근하지 말라며 퇴치할 방법을 여럿 내주지만 그 때마다 처녀의 유혹과 충동에 사로잡혀 실패. 마지막으로 노파가 이전에 살려준 물고기에 도움을 받으라고 충고해주는데 알고보니 물고기는 용왕의 아들로 이이에게 목숨을 구원받아 은혜를 갚기를 기다리던 차였다. 용왕의 도움을 받아 용궁의 병사로 구미호를 퇴치하려 하지만 노파가 말한 금기를 어기는 바람에 실패. 결국 마지막 수로 이이는 용왕을 통해 상제에 건의해 간신히 구미호를 퇴치하는데 성공한다. [3] 이야기를 보면 알겠지만 진작에 퇴치할 수 있었는데 이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여러번 그르쳤다. 여담으로 주막의 노파는 원래 금강산의 산신령이었다고 한다. #
- 나도밤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는데 이이가 어린 시절 한 지나가던 스님이 이이를 보고는 "아깝다. 이 아이는 커서 큰 인물이 되겠지만 10살이 되는 해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겠구나!"라고 말했다. 이에 놀란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가 대책을 물어보자 스님은 "뒷동산에 밤나무 100그루를 심으면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원수는 그대로 행했다. 이이가 10살이 되던 해에 호랑이로 변신한 승려가 이이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이원수는 지나가던 스님이 말해준 대로 "밤나무 100그루를 이미 심었다"고 하자 호랑이는 직접 밤나무를 세더니 "1그루가 말라 죽었으니 데려가겠다." 하고 주장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너도밤나무가 "나도 밤나무다"라고 말해 호랑이는 도망쳤다는 이야기.[4]
- 파주에 별장이 있던 이이는 화석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이 때 이이는 비싼 송진과 기름을 정자에 수시로 발랐는데(또는 잘 타는 나무로 정자를 지었다고) 당시 사람들은 이이가 사치한다고 비웃었다. 이이 사후 터진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가 파주 나루터에서 불이 꺼져 배가 안 보이자 애를 태우게 된다. 이 와중에 생전 이이와 친했던 도승지 이항복이 이를 기억해내 정자에 불을 지르자 송진을 먹인 덕에 잘 탔고 멀리서도 비출 정도였다. 그 덕에 빈 배를 발견해 선조는 무사히 피난을 갔고 모두 이이의 혜안에 감탄했다는 얘기인데 다만 근거가 별로 없다. 이 내용은 류성룡의 < 징비록>에 비슷하게 언급되는데 임진나루를 건너면서 나루터를 관리하는 관청인 승정 건물을 부숴서 불을 질러서 밤길을 밝히고 왜군이 뗏목으로 만들 수 없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여담으로 화석정은 700m나 떨어져 있어서 너무 멀다는 점에서도 현실성이 부족하다.
- 이이에게도 어느 기생과의 러브스토리 이야기가 있으며 그녀를 위한 시까지 남겼다. 1574년 38세의 나이로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황주에 머물던 이이는 '유지'라는 12살짜리 기생의 시중을 받았다. 그 기녀는 본래 양반 출신이지만 천애고아가 된 후 기생으로 전락하고 만 불운한 소녀였다. 이이는 유지를 아껴주며 좋아하는 책도 마음껏 읽게 해 주었으며 당연히 그런 이이를 유지도 잘 따랐다. 얼마 후 이이는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어 두 사람은 헤어졌고 9년이 지난 후에 이이가 다시 황주에 잠시 들르게 되어 21살이 된 유지와 재회한다. 유지는 재회를 기뻐하며 술을 대접했고 어릴 때부터 품어온 흠모의 마음이 더욱 커져 밤에 홀로 이이의 숙소를 찾는다. 이이를 사모하는 마음을 고백하지만 이이는 당연히 가정도 있고 자신은 이미 47세로 늙고[5] 병든데다 나이차도 많이 나는지라 유지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녀를 돌려보내려 했으나 밤이 깊어져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한 방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이이는 유지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다음날 아침 그대로 그녀를 돌려보낸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으로 얼마 후 이이는 병사하게 되는데, 죽기 3달 전에 유지와의 사연과 그녀에 대한 마음을 이름없는 시와 글로 남겼다. 이는 후세 사람들에게 '유지사'라고 불리게 되었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유지는 결국 맺어지지 못했지만 이 시와 글들을 보고 이이의 자신에 대한 마음을 알고 크게 슬퍼하며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 충무공 이순신과는 같은 덕수 이씨로 촌수로 따지면 19촌이었다. 이순신이 하급 군관이었던 시절 이조판서로 재직 중이던 이이는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동문 사람이라 하여 한번 불러 만나보고자 하였지만 이순신은 인사권을 가진 이이와 자신이 같은 문중 사람이라는 이유로 사사로이 만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하며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현대로 따지면 일선 소대장을 먼 친척인 행정안전부 장관이 만나보려고 먼저 불렀는데도 거절한 것이 된다.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는 먼 친척이었지만 현대에도 항렬로 '대부님'이나 '아저씨' 등 호칭으로 촌수 상관없이 문중 사람들을 경칭하는 것이 남아 있을 정도에다 학연, 지연, 혈연에 의해 이권이나 혜택이 오고가는 것이 우리나라이다.[6] 하물며 종법에 훨씬 깐깐했던 조선 시대였으니 고급 관료로 재직 중인 같은 문중 사람이 있으면 찾지 않아도 먼저 찾아가 다리를 놓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후일 한국사 최고 유학자와 최고 명장이라 칭해질 이들의 역사적인 만남이 성사됐을 수도 있었다. 결국 이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이의 성품을 생각해보면 서운함을 느끼기보다는 촌수 먼 일가 사람의 올곧기 그지없다는 소문이 정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흐뭇해했을 듯하다.
- 흔히 세간에서는 이이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이가 강릉 오죽헌에서 신사임당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본래 강릉은 이이의 모친 사임당 신씨가 태어났던 고향이었으며 이이에게는 어머니의 친정인 외가가 있던 곳으로 사임당 신씨는 이이가 태어나기 전에 친정에 와서 이 곳에서 이이를 출산하였다. 이를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7]과 친영례(親迎禮)[8]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남귀여가혼이 주자가례에 어긋난다는 것을 모든 성리학자들이 인정했다는 것은 차처하더라도 결혼하고 2년이 지난 후에야 시가(媤家)에 인사를 간 신사임당의 경우는 특이한 사례이다. 다만 아이를 친정에 가서 낳는 풍속은 남귀여가혼과 별 상관없이 별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흔히 장자 상속과 친영 등 종법 질서가 자리잡는 것은 17세기 중후반이 지나서야 가능했는데 이이가 태어났던 16세기만 하더라도 균분 상속과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이이 또한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가진 문서가 남아 있다. 이이는 6살 때 가서야 아버지의 고향인 파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자랐고 이후 파주에서 서원을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다가 숨을 거두었고 묘소도 파주 자운산 근처에 있다. 아호인 율곡도 실제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의 '율곡'에서 본뜬 것인데 '알밤이 자라고 나는 골짜기'라는 뜻. 이이가 정착한 곳은 처가가 있는 황해도 벽성군 석담인데 수 백년간 후손들이 그 곳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다가 소련군정하에서 사유 재산 몰수가 한창 이루어지던 1947년 14대 종손이 월남했다. 월남 도중 북한의 내무서원들에게 잡혔으나 운 좋게도 직원 중 1명이 한때 종가집의 하인 일을 한 적이 있어서 몰래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 시대까지도 양반 상놈 노비하던 시절이라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결국 다른 종가집처럼 한옥 고택에서 기거하기는 곤란해서 경기도 고양시의 평범한 아파트에서 종가를 꾸려나가고 있다. 14대 종손도 원래는 셋째였는데 형제 중 장남은 한국 전쟁 때 행방 불명되었고 차남은 종가에 남아 있다가 남북 분단으로 소식이 끊어져서 종손 자격을 잇게 되었다.
- 이이의 저서인 < 성학집요>를 보면 왕조의 변천사를 창업 - 수성 - 경장의 3가지로 분류했다. 창업은 요, 순, 탕, 무의 덕을 갖추고 개혁해야 할 시대를 만나 하늘과 사람의 뜻에 순응해야 하므로 논할 필요가 없고, 수성은 성왕과 현명한 재상이 법령을 세우고 제도를 만들어 다스릴 수 있는 도구를 모두 갖추고 예악을 훌륭하게 하면 후대의 임금과 신하는 이걸 따르기만 할 뿐이라고 하였다. 경장은 나라가 세워진 지 오래되면 초기에 세웠던 정책과 제도가 본래의 뜻을 잃고 폐단이 발생하므로, 밝은 임금과 총명한 신하가 나라의 뼈대를 다시 세우고 묵은 폐단을 고쳐서 공적은 선열에 빛나게 하고 사업은 후손이 미치는 것이라 하였다. 수성은 중간쯤 가는 평범한 임금과 자리만 채우는 무능한 신하라 할지라도 할 수 있지만 경장은 현명한 견해와 빼어난 재주가 필요하므로 더 어렵다고 적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무너지려고 하는 집을 가진 집주인은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고 집수리에 쓸 재목을 구하려 것이라는 예시를 들어 경장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이이는 당대의 조선이 창업과 수성을 지나 경장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전정, 군정, 환곡, 공납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개혁책을 내놓았다. 훗날 대동법의 전신이 되는 수미법(收米法)이 대표적인 예.
- 정치에 있어서는 서인 쪽이 압도적으로 앞서서 이이-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는 서인 노론은 조선 후기 붕당 정치사를 주도하게 된다. 이걸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문묘에 배향된 18인을 의미하는 동국 18현이다. 동국 18현은 고려 시대에 헌액된 최치원, 설총, 성리학을 전래한 안향(또는 안유)가 종사되었고 조선 시대에 광해군 때 5현 종사를 시작으로 정몽주, 김굉필,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 종사되었다. 이 중에서 이이의 제자가 김장생과 조헌(성혼의 제자이기도 하다), 김장생의 제자가 송시열과 송준길(이 둘은 김집의 제자이기도 하다),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이자 이이의 사위이고 김집의 제자가 박세채이다. 이이의 후대로는 이이의 문열이 아니면 아무도 문묘 배향이 안되었다는 것이다.[9] 이황의 문열조차 이황을 제외하면 18현에는 없는데 기대승, 서경덕, 김안국, 조식[10] 등 굵직한 인물들의 명단은 하나도 없는 것을 봐도 위세를 알 만하다.
- 율곡 이이는 친척에게 양자를 들이지 않았고 자신의 혈육인 서자가 제사를 잇게 했다. 그러나 당시 서얼은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므로, 사실상 양반 신분에서 탈락한다는 의미였다. 사후에 그의 직계 후손들은 명문가의 혼인할 수가 없었으므로 자연스레 명문가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 이이의 이름은 16세기의 중세 한국어에서 성은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아 '니'로, 이름인 '귀고리 이' 자는 현재는 사라진 반치음 이었고, /zi/로 읽혔다. 따라서 이이가 생존해 있던 당대에 그의 이름은 니ᅀᅵ로 적고 /ni.zi/로 발음하였다.
- 평생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단순히 국법을 잘 지키는 모범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 사대부들이 몰래 쇠고기를 다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소의 힘으로 지은 곡식을 먹고 또 그 고기를 먹는 것이 옳겠는가'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진심으로 소를 중요하게 생각하기는 한 모양. 현대에도 이이의 제사상에는 쇠고기를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 대한민국 해군의 세종대왕급 구축함( DDG-I) 2번함의 함명은 그의 이름을 따 율곡이이함(DDG-992)으로 명명되었다. 대한민국 육군의 제22보병사단은 원래 '뇌종부대'였지만 이후 부대명을 변경하기로 하고 명칭을 공모했는데 22가 '이이'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 '율곡'으로 하자는 의견을 받아들여 '율곡부대'가 되었다.
-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이이는 다시 한 번 부상되는데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전면에 들고 나왔던 율곡사업 때문이었다. 이 시기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이슈가 되어서 수많은 논문이 쏟아지고 교과서에도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율곡 사업은 '율곡 비리 사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비리의 온상으로 드러났고 마침내 부정부패의 상징이 되었다. 이 때문에 덕수 이씨 문중은 비리 사업에 율곡 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조상 이름을 더럽힌다고 항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는데 비리 사업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기도 파주시, 강원도 강릉시 등 세 곳에 이이의 호를 딴 율곡로가 있다. 세 지역 모두 이이의 생애와 연관이 있는 지역이었기에 율곡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울 율곡로는 율곡이 관직에 있던 시절 인사동에 살았다고 전해져서 붙은 이름이고 강릉 율곡로는 율곡의 생가인 오죽헌을 지나치는 길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며 파주 율곡로는 아버지 이원수의 친가가 있는 곳으로 어린 시절 살았다고 전해져서 붙은 이름이다.
- 신유학(新儒學)을 주창한 두웨이밍 교수는 한국의 천 원 지폐와 오천 원 지폐를 가지고 다니며 유학자가 이런 대접을 받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 본래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1970년대 전후에 세워진 동상이 서울 사직공원에 있었는데, 사직단과 어울리지도 않았기에 결국 사직단 복원 계획과 함께 2015년 10월에 위에 언급된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자운서원 인근의 이이 유적지로 이전했다.[11]( 언급 블로그)
[1]
실제 유교에서 강조하는 군주에 대한 충성 사상은 모든 군주에게 있어서 매력적이기에 가능할 법한 이야기.
[2]
장자는 양자로 들이면 안 되지만 이 규정도 편법으로 무시했다. 지손 가문의 장자를 종가의 양자로 들이기가 성행했다.
[3]
여기서 더 이어지는 버전도 있다. 구미호를 퇴치한 한 후 노파가 구미호의 시체가 있던 곳에 여우 석상이 있을테니 절대 만지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이이는 이를 역시나 어긴다. 이이가 석상을 만지자 석상이 연기가 되어 이이에게 빨려 들어가는데, 놀란 이이가 노파에게 상담하니 구미호가 이이의 딸로 환생하여 재앙을 내리려 하니 나중에 태어날 딸을 죽여야지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며 마지막 충고를 한다. 그러나 이이는 딸을 죽일 수 없었고 그 대가로 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이루지 못하고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고 끝을 맺는다.
[4]
이야기의 다른
버전에 따르면 죽은 밤나무가 승려로 변한 호랑이에게 "죽은 밤나무는 밤나무가 아니더냐~!"라고 호통쳐서 호랑이가 달아났다고도 한다. 또다른 전승으로는 이원수가 심은 나무들 중
상수리나무가 1그루 섞여있었는데 상수리나무가 호랑이에게 "자신도 밤나무"라고 이야기하여 아이를 구하기 위해 상수리나무가 신통력을 발휘한것에 감명받은 호랑이가 이이를 포기하고 이원수에게 "아이를 잘 키우라"고 하고는 산으로 돌아갔다는 내용도 있다.
[5]
당시 기준.
[6]
영화 <
범죄와의 전쟁>에서 초반에는 설설 기다가 최민식이 하정우가 같은 성씨며 항렬이 낮음을 알고 사실상 남과 다름없는 하정우에게 족보를 들먹이며 하대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
[7]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본가로 돌아가는 형태
[8]
남자의 집에서 여자를 맞아들여서 혼례를 남자집에서 치르고 신혼을 보내는 형태
[9]
이이의 문묘 배향은 비교적 늦었으며 김장생, 김집, 송시열이 인조-효종-현종 시기에 정계를 장악한 서인들의 중심축을 형성하였기에 사실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당장 송시열은 '宋子'라고 불렸으니 문묘 배향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
[10]
조식은
광해군 때 문묘 배향이 될 뻔하였으나 제자들의
어그로로 실패하였다. 자기 스승만 올리면 되는데 이언적과 이황이 문묘 배향된 것을 시비 걸며 남인과 서인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었다.
[11]
이이 본인뿐만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의 동상도 함께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