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10:06:12

김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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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인후_진상(眞像).jpg
이름 김인후(金麟厚)
생몰년도 1510년( 중종 4) ~ 1560년( 명종 15)
출생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1]
본관 울산 김씨
자(字) 후지(厚之)
호(號) 하서(河西), 담재(湛齋)
시호 문정(文正)
스승 김안국(金安國)
제자 변성온 · 기효간 · 조희문 · 정철 · 오건 · 양자징 · 남언기 등
주요저서 하서집(河西集),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 외 시문집(詩文集) 10여권
1. 소개2. 생애3. 죽음4. 사후5. 업적6. 가족 관계
6.1. 그의 후손
7. 評價8. 관련 문화재9. 관련 문서10.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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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동방 18현[2] 중 하나로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 일재 이항, 기대승과 함께 조선 중기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아울러 천문, 지리, 의약, 복서(卜筮)[3], 율려(律呂)[4], 도수(度數)[5] 등에도 능했다.

2. 생애

하서 김인후는 1510년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리(現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라 경순왕의 왕자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김덕지(金德摯)의 후예로 본관은 울산(蔚山)이다.(울산의 고호가 학성) 5대조인 '김온'(金穩)[6]은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흥려군(興麗君)에 봉해지고 양주목사에 재직 중 1413년에 졸하였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여흥 민씨의 친가가 태종의 왕권강화 정쟁에 연루되어 화를 입자가 여흥 민씨가 아들 3형제를 비롯한 가족들을 데리고 전라남도 장성군 맥동으로 낙담하였다.

그의 부친은 의릉참봉(義陵參奉)[7] 김령(金齡)이며, 모친은 옥천 조씨(玉川 趙氏)이다. 그의 출생에 관해서 붓바위(筆巖) 전설이 남아있다. 붓바위는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동 입구에 있는 바위로 붓모양으로 되어있다. "이 바위의 기운을 받아 하서(河西)가 태어났다"고 전한다. 영조때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8]가 ‘필암(筆巖, 붓바위)’이라고 적었다.
아득하고 먼 옛날 김도령과 이도령이 글공부에 여념이 없는데 이곳에 사는 백여우는 신령님께
사람이 되어 사람을 돕고 살고 싶다고 애원을 하여 신령이 밤에만 사람이 되어 일하도록 하여 주었다.
김도령은 가난하고 마음이 착한데 이 도령은 마음이 좋지 못하여 심술꾼이었다.
둘 다 과거를 보기 위하여 산속 암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밤이 되면 백여우는 김도령을 찾아가
시종을 들어주고 새벽에 돌아가곤 하였다. 그러기를 3년이 지나 과거를 보러 가게 되었는데
백여우가 "이걸 가지고 가시오. 이 붓은 여우 꼬리로 만든 붓이옵니다.
김도령님 부디 이 붓으로 장원급제하고 금의 환향하옵소서" 하며 붓을 주었다. 김도령은 이 붓을 고이 간직하고 상경하였다.
이 내용을 안 이도령이 이를 시기하여 과거보는 전날 밤 김도령의 붓을 잘라 버렸다.
김도령은 그런 줄도 모르고 과거장에서 붓을 찾으니 붓을 망가져 쓰지 못하게 되어 “내 붓! 내 붓!” 하며 정신이 돌아버리고 말았다.
한편 백여우는 김도령이 돌아오기를 이 바위에 올라가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아 이 바위를 핥기 시작하여
이로서 지친 백여우는 바위 위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바위를 붓바위(筆巖)라" 하였다고 한다.
장성군 전설 中

또 그의 천재성을 나타내는 유명한 유년기때 일화가 몇 가지 남아있다. 김인후가 어릴 적에 박상(朴祥)[9]이 김인후를 보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고로 기동(奇童)[10]은 좋게 삶을 마치는 자가 없으나, 오직 이 아이는 당연히 영종(令終)[11] 할 것이다’하였는데 사실대로 되었다. 김인후가 8세 때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던 조원기(趙元紀)[12]는 그의 고을에 사는 김인후가 신동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전주의 감영으로 불러 함께 시구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는 김인후의 높은 수준의 글 솜씨를 보고 ‘천동(天童)[13]의 ‘천하문장’이라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그가 아홉살 때는 기준(奇遵)[14]이 김인후의 인성을 칭찬하며 ‘참으로 영특한 아이다. 마땅히 우리 세자( 인종)의 양신(良臣)이 되겠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인후의 스승은 문경공(文敬公) ' 김안국'(金安國)[15]이다. 1531년( 중종 26년)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천원지폐에 계신분과 친분을 쌓고 학우가 되어 학업에 열중하였다.[16]

중종 35년(1540)에 별시[17] 병과[18]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19]에 등용되었다. 다음해 1541년 사가독서(賜暇讀書)[20]를 하고, 홍문관 정자[21](弘文館 正字)가 되었다. 중종 37년(1542)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22]이 되었다.

중종 38년(1543) 4월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23] 설서(說書)[24]로 벼슬이 올랐다. 이때에 인종이 세자시절 춘궁(春宮)[25]에서 덕을 기르기 위해 중종이 김인후에게 보도(輔導)[26]의 책임을 맡겼다. 한마디로 왕자의 선생님. 세자는 그의 학문과 도덕의 훌륭에 탄복하여, 김인후를 공경하는 예로써 자주 소대(召對)[27]하였다. 세자 역시 비범한 인물이라 나중에라도 반드시 당우(唐虞)의 다스림[28]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여겨 계도[29]하였다. 그리고 서로 뜻이 맞아 서로 신임이 날로 두터워졌다.

하서가 관아에서 숙직할 때, 인종이 간혹 몸소 나와서 조용히 문난(問難)[30]을 하며 밤이 깊어서 자리를 파하였다. 인종은 본래 예술에 능하였으나 남에게 나타내 보인 적이 없었지만, 유독 김인후에게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첩을 하사하고, 김인후에게 명하여 화축(畵軸)에다 시를 지어 쓰도록 하였다.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새가 모두 다 정미하니(根枝節葉盡精微)
바위를 친구 삼은 뜻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石友精神在範圍)
비로소 성스러운 우리 임금 조화를 짝하심을 깨닫노니(始覺聖神伴造化)
천지와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십니다.(一團天地不能違)
인종이 하사한 묵주도 화축에 하서가 지은 시

1543년( 중종) 38년) 6월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 副修撰)[31] 지제교(知製敎)[32]와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33]을 겸하게 되었다.

같은해 음력 7월에 경연(經筵)에서 차자(箚子)[34]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는바,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伸冤) 복원을 문신(文臣)으로서 최초로 개진하여 그 본분을 다하였다. [35] 이에 기묘사화의 당사자인 중종이 기묘명현(己卯名賢)[36]의 복원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고, 폐기토록 지시한 소학과 향약에 대해서만 철회토록 하였다. 이에 김인후는 이러한 영에 따를 수 없어 괴로워 하며, 연로하신 부모님 봉양을 이유로 8월에 걸양(乞養)을 청하여 귀향하여 12월에 고향과 가까운 옥과[현] 현감(玉果縣監)에 제수되고 춘추관[38]의 겸하였다.

1544년( 중종 39년) 11월에 중종이 승하하였다. 이어 1545년 음력 1월 1일 인종이 30세에 즉위하였고, 음력 4월 조정에서는 김인후에게 제술관(製述官)[39]을 제수하고 나서야 그제서야 비로소 입경하였다.

인종이 새로 즉위하여 태평성대를 기대했으며, 김인후에게 인종의 경연의 보도(輔導)를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갑자기 병을 얻었고, 왕에게 어떤 약을 써야 할지 논의에 참여하기를 청하였으나, 약원(藥院)[40]에서 직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되었다....[41] 이에 그는 또 다시 고향 부모님의 병을 핑계로 임소(任所)[42]로 돌아와 버렸다.

1545년( 인종 1년) 음력 7월 1일 인종이 7개월 만에 승하하였다.[43] 김인후는 이로 인한 충격으로 심장 발작도 왔다. 이에 벼슬의 뜻을 접고, 병을 핑계로 아예 사직하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와 입신양명의 뜻을 거두시었다. 이어 명종이 11세의 나이로 즉위 후,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명종이 김인후를 성균관 전적(典籍), 공조(工曹) 정랑(正郞), 홍문관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直講) 등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明宗)은 김인후의 재주를 중히 여겨 특별히 명하여 음식을 하사하였는데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오직 산림에 은둔한 채 시작과 학문에 열중하였고, 매년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에 집 앞에 있는 난산(卵山)[44]에 올라 북망통곡(北望慟哭)을 평생 거른 일 없었다….[45]

3. 죽음

1560년( 명종 15년) 1월 14일 약을 먹고 집안 사람에게 일러 ‘내일은 보름날이니까 정성들여 제사 음식을 갖추어, 자식들이 사당에 제사를 지내게 하라’고 하였다. 다음날 그는 위중함에도 일찍 일어나 의관을 정비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명하기를 ‘내가 죽으면 을사년(乙巳年, 1545년[46]) 이후의 관작(官爵)을 쓰지 말라’고 일렀다. 그 다음날 16일에 병이 위급하자 정침(正寢[47])에서 홀연히 역책(易策)[48]하였다 향년 51세 조선시대 평균나이에 천수를 누렸다 하나 현재로 보면 한창 젋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동년 3월에 장성 대맥동 원당산(願堂山)[49]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자리[50]에 장사지냈다.

4. 사후

  •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51],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 영경연사(領經筵事)[52] 홍문관 예문관(藝文館), 춘추관 관상감사(觀象監事)[53]에 추증되었고, 큰 영예인 불천위를 허락받았다. 전라남도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곡성 옥과면(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순창 어암서원(魚巖書院) 등지에서 제사를 지냈다. 정조 20년(1796년) 음력 9월 조선 유학자(儒學者)로서 최고의 영예인 문묘(文廟)에 종사(從祀) 되었다.
  • 그의 시호를 '문정(文靖)'에서 「문정(文正)」으로 고쳤다. 도덕박문왈문 이정복인왈정(道德博聞曰文 以正服人曰正)’이라 했다. 즉, 도덕박문[54]을 문(文)이라 하고, 이정복인[55]을 정(正)이라 하였다.
  • 김인후를 위한 제사가 '필암서원'(筆巖書院)에서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56]에 춘향제(春享祭) 및 추향제(秋享祭)가 열린다. 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꼭 한번 가보기 바란다. 홍길동 테마파크 가는 길에 있다. 가는 길에 들르면 된다.

5. 업적

김인후의 학문은 의리, 충의를 실천을 중요시 한다. 이는 조선의 유교 도덕에 관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었다. 그는 성리학 연구에 평생을 바쳤고, 그의 성리학 이론은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매우 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명종(조선) 12년(1557)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과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지었다. 그해 겨울에 이항(李恒)[57] 기대승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 음양설에 대해 리와 기는 서로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와 기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李恒)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하고 기대승의 주장이 옳다고 하였다.

명종 14년(1559년) 고향에 내려와 있던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강론할때 기대승이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四端七情)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해 깊이 의심하였다. 이황은, 사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주리론적(主理論的)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이황의 이러한 학설은 그 후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200여 년 간에 걸쳐 유명한 사칠변론(四七辯論)을 일으킨 서막이 되었다. 즉 기대승은 이황에게 질문서를 보내어,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내세웠으며, 이를 다시 이이(李珥)가 뒷받침하여 이기이원론적 일원론(理氣二元論的一元論)을 말하여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이이의 기호학파(畿湖學派)가 대립, 부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는 마침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사이에 벌어진 당쟁(黨爭)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에 이르렀다.[58][59] 기대승은 김인후가 죽은 후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사칠논쟁에 대해 강론할 때 그의 뜻을 많이 조술(祖述)해서 분변(分辨)하기가 거의 수만 언(言)에 이르렀다. 이것이 오늘날 그 유명한 퇴계(退溪), 고봉(高峯) 기대승의 사칠왕복서(四七往復書)이다.

명나라 유학자인 나정암(羅整庵)[60]이 곤지기(困知記)에서 이르기를 ‘도심(道心)은 성(性)이요, 인심(人心)은 정(情)이다. 지정(至精)의 체는 볼 수가 없는 고로 미(微)라 하고, 지변(至變)의 용(用)은 헤아릴 수가 없는 고로 위(危)라 한다’고 했는데, 소재(齋集) '노수신'(盧守愼)이 이를 강력히 지지하면서 「도심은 고요해서 동하지 않으며, 인심은 감(感)해서 마침내 통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김인후는 이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主宰者)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一身)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여 이름하여 주경설(主敬說)을 내놓았다. 김인후의 학문은 정성을 다하여 공경함을 중시하였는데, 스스로 절대로 도(道)를 안다고 자처하지 않았으며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김인후의 사후, 이황 기대승이 모두 그의 설을 존중하고 소재(齋集) 노수신(盧守愼)의 설을 반대하였다.

그의 도학이 성립된 계기는 기묘사화인데, 호남에 있어서도 기묘사화는 사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조광조가 전라도 화순군(和順) 능주면(綾州)으로 귀양 오게 됨으로써 그 정신적 정통성이 호남(湖南)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기묘사림(己卯士林)[61]들이 호남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기묘사림의 문하에서 성장하였고 그 정신을 계승하여 호남 유학(儒學)의 발전적 토대를 쌓게 되었다. 그러한 인품이 그의 작품에 그대로 나타났으며, 그 이후에 그를 기점으로 같은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김인후의 인품(人品)이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할 것이다. 그의 문장(文章)은 도(道)를 싣는다. 도는 하늘의 뜻을 마땅히 따르는 것이고, 문(文)은 도를 실현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후대 학자들이 평가하기를 그의 문장은 도가 나타난 것이었기에 자신의 도를 높이려는 선비들은 자연히 그 문장을 본받게 되었다.

김인후의 사상(思想)에 대해 살펴보면 도학(道學) 사상은 기묘사림(己卯士林)의 의식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 의식을 사상적으로 정립하고, 후대로 하여금 이론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데 있다. 그와 같은 사상적 정립을 이루도록 한 것이 바로 그가 만든 천명도(天命道)였다.

김인후의 유학정신은 충의(忠義)와 의리(義理)에서 비롯되고, 깊게 들어가면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인(仁)의 구체적 실체이다. 그가 말하는 의리(義理)란 착한 인간의 본성(本性)에서 나왔기에 국란이 생겼을 때 그 의(義)를 실천 할 수 있는 것은, 김인후의 올바름을 지키라는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충의(忠義) 및 의리(義理) 정신은 곧 호남의 의병운동( 동학농민운동, 진안 의병운동[62], 화순 의병운동[63], 근래에 와서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다.

6. 가족 관계

  • 고조부 : 김달원(金達源), 충좌위(忠佐衛)[64], 중령사정(中領司正)
  • 증조부 : 김의강(金義剛), 사온서(司醞署)[65] 직장(直長)[66]
  • 조부 : 김환(金丸), 종사랑(從仕郞)[67] 금구(金溝. 지금의 김제시)의 훈도(訓導)[68]
  • 부 : 김령(金齡), 의릉참봉(義陵參奉)[69]
  • 모 : 옥천 조씨(玉川 趙氏) : 안음 훈도(安陰 訓導) 조적(趙勣)의 딸
  • 부인 : 여흥 윤씨 : 진안 현감(鎭安 縣監)[70] 윤임형(尹任衡)의 딸
    • 첫째 아들 : 중룡(從龍), 자부(子婦) 성산 이씨 :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딸
  • 둘째 아들 : 종호(從虎), 자여찰방(自如察訪)[71], 자부(子婦) 남원 진씨 : 승지(承旨) 진벽(晉壁)[72]의 딸
  • 첫째 딸 : 월계(月溪) 조희문[73](趙希文, 함안 조씨)에게 출가
  • 둘째 딸 : 고암(鼓巖) 양자징[74](梁子澂, 제주 양씨)에게 출가
  • 셋째 딸 : 유경렴[75](柳景濂, 선산 유씨)에게 출가
  • 넷째 딸 : 요사(夭死)

6.1. 그의 후손

7. 評價

김인후는 일생에 걸쳐 인종에 대한 충의는 후대 사림 유학자들로부터 극렬히 추앙을 받았고, 그의 학문적 조예가 초절하고 기상과 인품이 뛰어났다.
'하서(河西)는 우리 동방의 주자이며, 염계(濂溪)이자, 호남의 공자이다.[76]
조선 개국 이래 도학(道學)과 절의(節義)와 문장(文章)을 모두 갖춘 이는 오직 하서(河西) 한 사람뿐'
정조 대왕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11월 8일[77]
"평생 함께 교유한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다.
퇴계 이황(李滉) 評
맑은 물에 뜬 연꽃이요, 화창한 봄바람에 비온뒤의 달이다.(淸水芙蓉 光風霽月)
율곡 이이(李珥) 評
우리 나라 인물 중에서 도학(道學)과 절의(節義)와 문장(文章)을 겸하여 탁월한 이를 그다지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세가지 중 한 두 가지에 뛰어나는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河西)선생을 종생(鍾生)하여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게 되었다
우암(尤庵) 송시열[78]
조선 중기 도학자로 호남에는 김인후, 영남에는 이황, 충청에는 조식, 서울에는 이이가 버티고 있었다.
우암(尤庵) 송시열

8. 관련 문화재

  • 장성문화재관련
  •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어린이대공원에 가면 김인후(金麟厚)의 동상(銅像)이 있고, 상기한 인종(仁宗)이 그린 그림에 시를 지어 넣은 ‘묵죽도(墨竹圖)’와 "천명도(天命道)"를 볼 수있다. 또한 그가 생전에 지은 한시 10여 점이 있다.
  • 김인후의 호인 하서(河西)를 따서 만든 길도 있다. 전남 장성군에 '하서대로'와 광주광역시 북구에 '하서로'가 있다.
  • 장성김인후난산비(長城金麟厚卵山碑): 김인후가 해마다 인종의 기일(忌日)인 7월 1일 현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 앞 난산(卵山)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 필암서원

9. 관련 문서

10. 미디어



[1] 현재도 울산 김씨 집성촌이다. [2] 신라 설총, 최치원, 고려의 회헌 안향, 포은 정몽주, 조선의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현석 박세채. [3] 점괘. [4] 음악이나 음성의 가락을 이르는 말 [5] 통계 자료의 각 계급에 해당하는 변량의 수량. [6] 고려 우왕 때 등과하여 이성계를 따라 요동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이성계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자 이조좌랑에 올랐으며 단양군사와 함양군사를 지냈다. 회군 때의 공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밀양부사가 되었다.정종2년에는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 되어 흥려군(興麗君)이라고 불리고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다. 태종 때 양주목사를 지내다 1413년에 졸하였다. 태종 이방원은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외척 세력을 배척할 때 자신의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옥사에 연루시켜 죽게하였다. 김온의 부인 여흥 민씨도 태종의 왕비인 원경왕후 민씨와 사촌자매 지간인데, 이때 부인 여흥 민씨의 친가도 여기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였다. [7] 종9품 [8] 1683(숙종 9)∼1767(영조 43).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9] 1474(성종 5)∼1530(중종 25). 조선 중기의 문신. [10] 지혜와 재주가 뛰어난 아이 [11] 오복의 하나.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을 이른다. [12] 1457(세조 3)∼1533(중종 28). 조선 중기의 문신. [13] 천인(天人)이 동자의 모습으로 인간계에 나타난 신이라고 한다. [14] 1492(성종 23)∼1521(중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15] 1478(성종 9)∼1543(중종 38). 조선시대 문신, 학자. 호는 모재(慕齋) [16] 이황이 김인후보다 9살 형이다. [17] 조선시대에 정규 과거 외에 임시로 시행된 과거, 현대로 치면 특채 [18] 조선 시대에, 과거 합격자를 성적에 따라 나누던 세 등급 가운데 셋째 등급. 문과에서는 23명, 무과(武科)에서는 20명을 뽑아 정구품의 품계를 주었으며,. 성균관ㆍ승문원ㆍ교서관의 임시직인 권지(權知)에 임명하였다. [19] 조선 시대에, 승문원이나 교서관에 속하여 문서의 교정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 [20] 조선 시대에,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 세종 8년(1426)에 시작하여 세조 때 없앴다가 성종 24년(1493)에 다시 실시하였다. [21] 홍문관ㆍ승문원ㆍ교서관에 속한 정구품 벼슬. 또는 그 벼슬에 있던 사람. [22] 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에 두었던 정팔품(正八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영사(領事: 正一品)가 1원으로 영의정이 예겸하며, 대제학(大提學: 正二品), 제학(提學: 從二品), 부제학(副提學: 正三品 堂上), 직제학(直提學: 正三品 堂下), 전한(典翰: 從三品), 응교(應敎: 正四品), 부응교(副應敎: 從四品) 각 1원, 교리(校理: 正五品), 부교리(副校理: 從五品), 수찬(修撰: 正六品), 부수찬(副修撰: 從六品) 각 2원, 박사(博士: 正七品) 1원이 있고, 아래로 정자(正字: 正九品) 2원이 있다. 1463년(세조 9) 11월 홍문관을 설치할 때 두었던 저작랑(著作郞)을 1466년(세조 12) 7월 관제개정 때 저작으로 바꾸면서 설치했고, 박사, 정자와 함께 남상(南床)이라고 불리었다. 국사의 수찬(修撰)을 담당했으며, 경연에 참석할 수 있었다. [23] 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 [24] 조선 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소속된 정8품의 관직. 세자에게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리키는 직책이었음. 정원은 원래 1인이었으나 뒤에 1인이 추가되어 2인으로 되었음. [25] 동궁과 같은 말이다. 세자가 묶던 궁. [26] 도와서 올바른 데로 이끌어 감. [27] 신하들을 불러 경전에 대해 물어보거나 의견을 듣는 일. [28] 요 임금과 순 임금의 태평성대 [29] 남을 깨치어 이끌어 줌 [30] 풀기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다. [31] 종6품 [32] 왕에게 교서(敎書) 따위의 글을 기초하여 바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33] 강독(講讀)과 논사(論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정육품 벼슬. [34] 조선 시대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 [35] 중종 14년(1519년)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 김정(金淨),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식과 유배를 당한 김구(金絿), 박세희(朴世熹), 박훈(朴薰), 이자(李耔), 유인숙(柳仁淑), 홍언필(洪彦弼) 및 사림을 두둔하여 파면을 당한 안당(安瑭),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김세필(金世弼) 등을 말함. [36]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림.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을 일컫는 말이다. [현] 곡성군 옥과면 [38] 둔(屯), 시정의 기록을 맡아보던 관아. 태조 때에 예문춘추관을 두었다가 태종 때에 예문, 춘추의 두 관으로 독립하였는데, 고종 때 없앴다. [39] 조선 시대 승문원(承文院)의 한 벼슬. 외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동행하는 수행원의 하나. 보통 글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전례문(典禮文)을 전담하여 짓게 하였다. [40] 조선시대에 대궐 안의 의약을 맡아보던 기관 [41] 김인후는 약학에도 정통하였다. [42] 지방 관원이 근무하는 직소(職所) [43] 인종 죽음 참조 [44]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 난산(卵山) [45] 인종보다 김인후가 다섯살 정도 많다. [46] 인종 즉위년 [47] 제사를 지내는 몸채의 방. [48]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이르는 말. 증자가 죽을 때를 당하여 삿자리를 바꾸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예기의 단궁편(檀弓篇)에 나오는 말이다. [49] 전라남도기념물 제219호,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산25 [50] 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자방(子方)을 등지고 오방(午方)을 바라보는 방향. 정북(正北) 방향을 등지고 정남향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51] 정일품의 종친, 의빈, 문무관에게 주던 으뜸 품계 [52] 경연의 으뜸 벼슬. 의정(議政)이 겸임하였다 [53] 관상감의 으뜸 벼슬. 정일품의 문관 벼슬로 영의정이 겸직하였다. [54] 도와 덕에 있어서 널리 들어 많이 앎. [55] 정(正)으로써 사람을 설복시킨다. [56] 그달의 두 번째 정일(丁日) [57] 1499(연산군 5)∼1576(선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유학자. 호는 일재(一齋) [58] 조선과 같은 계급사회에서 이황과 같은 대학자가 당시 말단 선비였던 기대승과의 서신을 주고받은 점에서도 차별을 두지않은 대학자의 그릇에 탄복할 만하다. [59] 김인후와 기대승의 나이차이는 17살 차이고, 이황과 기대승의 나이차이는 26살 차이다. [60] 1465~1547, 중국 명(明)나라 때의 유학자. 본명은 나흠순(羅欽順). 정암은 그의 호이다. 주자학의 입장에서 왕양명(王陽明, 1472~1528, 명대 중기의 대표적 철학자, 정치가, 주관적 관념론자.)의 신설을 비판하고 논쟁하였으나, 순수한 주자학자로 볼 수는 없다. 기(氣)를 떠난 이(理)는 없다 하여 이기일체론(理氣一體論)을 제창하였다. 이를 ‘기의 철학’이라고 하며, 주자의 ‘이(理)의 철학’의 수정이었다. [61] 조광조를 비롯하여 김인후의 스승 김안국(金安國) 그리고, 김정국(金正國), 김식, 김정(金淨), 박상(朴祥) 등이 중심 인물이다. [62] 개항기 전라북도 진안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63] 1895년부터 1911년까지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항일 항쟁. [64] 조선시대 오위(五衛)의 전위(前衛)로서 두었던 군대. 그 휘하에 충의위(忠義衛), 충찬위(忠贊衛), 파적위(破敵衛)의 2500명 병사를 두었다. [65] 궁중에 술과 감주 등을 마련하여 바치던 일을 담당하던 관서 [66] 영(令) > 승(丞) > 직장> 부직장 순 [67] 조선시대 정구품(正九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68] 조선시대 한양의 4학과 지방의 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한 교관. [69] 조선시대의 원(園), 능전(陵殿) 및 사옹원(司饔院), 내의원(內醫院), 예빈시(禮賓寺), 군기시(軍器寺), 군자감(軍資監), 소격서(昭格署) 등 많은 관서에 속해 있었던 관직이다. 최말단직의 품관이다. [70] 조선시대 동반(東班) 종육품(從六品) 외관직(外官職)으로 정원은 138원인데 후기에는 122원으로 줄었다. [71] 조선시대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설치된 자여역을 담당한 종6품 벼슬. [72] 조선 선조(宣祖) 때 좌승지(左承旨)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여러 곳에서 왜군(倭軍)을 맞아 싸워서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운 후 금산(錦山) 전투에서 순절(殉節)하였다. [73] 1527∼1578,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74] 1523~1594,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담양소쇄원(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소쇄원길(지곡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원.)을 지은 양산보(1503~1557, 조선 전기의 문신.)의 아들이며, 거창, 석성 현감을 지냈다. [75] 미암일기의 저자로 유명한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아들, 염수재(念修齋) 유진석(柳震錫)의 증조부 [76] 윤홍식, 오병문, 2006, 조선 선비들에게 배우는 마음 챙김의 지혜, 봉황동래 [77]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하는 의식을 행하면서 선포한 교서 [78] 하서 김인후 신도비명 [A] 본 인물의 13대손이다. [A] 본 인물의 13대손이다. [81] 본 인물의 15대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