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04:24:03

이방자/생애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이방자
1. 개요2. 출생3. 어린 시절4. 신문을 보고 안 이왕세자와의 약혼 발표5. 영친왕의 약혼녀, 민갑완6. 결혼 비화7. 결혼 준비8. 영친왕과의 만남9. 외국의 반응10. 결혼에 대한 걱정11. 3.1 운동과 협박 전화12. 결혼식과 임신13. 첫 출산과 조선 방문14. 이진의 죽음과 유산15. 관동대지진과 대학살16. 가엾은 덕혜옹주17. 순종의 죽음과 유럽 여행18. 다이쇼 덴노의 죽음과 쇼와 덴노의 즉위19. 차남 이구의 탄생20. 광복 이후21. 사망

1. 개요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세월이여 왕조여>를 참고해서 작성되었다. 혼인 전에는 '마사코 여왕(方子女王)'이라고 한다.

2. 출생

일본의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梨本宮守正王)과 화족 나베시마 이츠코(鍋島伊都子)가 결혼한 지 1년여 후인 1901년, 첫 아이로 마사코 여왕이 태어났다. 일본 최초의 세습친왕가였던 후시미노미야 가문의 20대 당주였던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伏見宮邦家親王)에게는 수많은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중 7남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久邇宮朝彦親王)의 4남이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이었다. 즉 이방자 여사는 후시미노미야 가문의 분가의 분가 출신인 것.

이츠코는 훗날 평민[1] 쇼다 미치코 아키히토 황태자와 혼인한다고 하자,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쓰면서 한탄했다. 그녀는 가쿠슈인 동창회장이었던 여동생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와 마찬가지로 결혼 반대에 나섰고, 다른 황족 및 화족들과 함께 미치코 황태자비를 괴롭히는 데 가세했다.

쇼와 덴노의 아내인 고준 황후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의 차남이자 구니노미야 2대 당주였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久邇宮邦彦王)의 딸이기 때문에, 이방자는 고준황후의 친사촌 언니다. 쇼와 덴노의 남동생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아내 세츠코 비는 이츠코의 여동생인 노부코의 딸로, 이방자에게는 이종사촌 여동생이 된다.

외가인 나베시마 가문의 역사[2] 외에도 한국과 인연이 있는데, 과거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 고로가 지은 집에서 태어났다. 미우라 고로가 지은 집을 궁내청의 전신인 궁내성에서 사들였고, 이 집이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과 나베시마 이츠코의 신혼집이 되었다. 그리고 마사코 여왕은 이 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07년에는 유일한 친형제인 여동생 노리코 여왕(規子女王)이 태어났다. 아버지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은 (옛날 아버지들이 대개 그러하듯) 엄한 가장이었고, 어머니인 이츠코 왕비는 (옛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순종적이었다고 한다.

3. 어린 시절

마사코 여왕이 어릴 적에 일본 러시아 전쟁을 했다. 이땐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어린아이들도 전쟁놀이를 즐겨 하고 군가를 따라 부르며 놀았는데, 마사코 여왕 역시 어린 시절 전쟁놀이를 즐겨 했다고 한다. 어머니 나베시마 이츠코의 일기와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활달한 성격이어서, 전쟁놀이를 할 때면 퍽 용감한 군인 행세를 했다"고.

학교에 입학한 후로도 마사코 여왕의 적극적인 성격은 여전했고, 이러한 면모는 강한 승부욕으로 발전했다. 운동경기나 내기를 할 때면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자신이 이길 때까지 중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마사코 여왕은 연극도 좋아했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동경하여 여류 비행사를 꿈꾸기도 했다.

1908년, 마사코 여왕은 집 근처에 있던 가쿠슈인 여학부(女學部)[3] 초등과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는 역사, 미술, 일본어 등의 과목을 좋아했다고 한다. 가쿠슈인 황족 화족을 위한 관립학교[4]로 소규모였으며, 여학부는 더욱 인원이 적었다고 한다.

가쿠슈인 원장은 군인인 노기 마레스케 장군이었는데, 이방자 여사는 노기에 대해 "매우 완고하고 까다로워, 여학생도 남학생처럼 취급했다"고 회고했다. 교칙도 매우 엄격하여, 평소에는 화려한 옷과 장식도 모조리 금지되었다.[5] 그래도 이방자는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서, 가쿠슈인에 다니던 학생 시절을 아무런 근심 없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가쿠슈인에 다녔던 시절에는 황태손 시절의 히로히토도 가쿠슈인에 다녀서 알고 지냈다고 한다. [6] 이건 나가코 여왕도 마찬가지.

마사코 여왕은 사촌 여동생이었던 나가코 여왕과도 친했다. 나가코 여왕은 자신보다 연상이었던 마사미야(方宮)[7]가 혼인할 당시 예쁘다면서 칭찬했고, 마사코 또한 나가코 여왕에 대해 "아름답고, 상냥하고, 노래를 잘 불렀다.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가 된다고 했을 때 자랑스러웠다."라고 회상했다.

이방자가 11살이던 1912년 메이지 덴노가 죽었고, 곧이어 노기 마레스케 장군과 그의 아내 시즈코(靜子)가 덴노를 따라 자결했다. 아직 어렸던 마사코 여왕은 난생 처음 접하는 '죽음'과 '은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2년 후인 1914년 메이지 덴노의 아내 쇼켄 황후가 죽었을 때, 마사코 여왕은 가쿠슈인 여학부 중등과 1학년이었다. 연이어 이어지는 죽음들을 보며, 사춘기 소녀였던 마사코 여왕은 삶과 죽음에 대해 나름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중등과에 진학한 후로는, 교과목 수업 외에 여러 교양 교육도 받았다. 피아노, 일본 전통 악기, 와카, 프랑스어 등을 배웠는데, 장래 황족 또는 화족 가문의 훌륭한 귀부인이 되기 위한 교육이었다. 이방자는 이러한 과목들도 즐겨 배웠고, 어머니와 주변의 귀부인들처럼, 자신 또한 어느 황족이나 화족의 아내로서 살아가게 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4. 신문을 보고 안 이왕세자와의 약혼 발표

16세(만 14세)였던 1916년 8월 3일 아침, 별장에서 마사코 여왕은 별 생각없이 신문을 집어 들었다가, 자신이 구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였던 이은과 혼인한다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린 걸 보게 된다. 이 기사는 일본 정부에서 멋대로 실은 것이었다고 한다.

약혼 발표가 있기 얼마 전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은 궁중에 불려갔는데, 자기 딸이 황태자비로 간택된 줄 알고 기뻐하면서 갔다. 하지만 다이쇼 덴노 데이메이 황후는 "마사코 여왕을 이왕세자 이은에게 시집보내라"는 명령을 내렸고, 당연히 모리마사 왕은 멘붕했다. 조선총독을 맡았던 데라우치 마사타케 원수는 " 일본의 장래를 위해 말씀하는 겁니다. 일본과 한국의 두 왕실을 굳건히 결합시킬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강요하다시피 권고했다.

다이쇼 덴노는 황태자 시절 대한제국에 갔다가 황태자 이은과 처음 만난 이후 대화를 해보려고 한국어까지 배운 것으로 보아, 다이쇼 덴노는 개인적으로는 이은에게 악의가 없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의 황실 재산을 그대로 물려받았던 이은의 재산은 이승만이 가져가기 전까지는 상당히 많았으며, 덕혜옹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구 대한제국 황족들은 꼭두각시, 인질 신세와 별개로 상당히 높은 예우를 받았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게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 있어 폭탄인 것은 변함없었다. 물론 당시 일본 황실전범의 규정상 황족이 아니라 왕공족이라는 애매한 취급을 받던 구 대한제국 황실과 혼인하는 건 불법이었지만, 이 결혼을 위해서 "황족 여자는 왕공족과 결혼할 수 있다"고 황실전범을 개정하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일본 정부 일본 황실은 이 결혼에 진지했다. 누구든 떠맡아야 했던 상황에서, 운 나쁘게도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이 걸린 것. 그것도 황태자비 후보 논의까지 되던 규수였으니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

이왕세자와의 결혼을 대비하여, 마사코 여왕은 방과 후면 집에서 따로 개인 교사를 불러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한일관계의 숙명적인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하루아침에 황태자에서 왕세자로 떨어진 영친왕의 처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약혼이 정해지기 이전에는 아무 관계가 없던 사람이라 별 생각이 없었지만, 이제 자신의 약혼자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무척 슬프게 느꼈다고 회상했다.

결혼식이 내후년 1월로 결정되면서, 마사코 여왕은 어머니 이츠코와 함께 궁중을 방문하여 다이쇼 덴노 데이메이 황후(쿠조 사다코) 부부에게 인사를 올렸다. 특히 사다코 황후는 "이러한 특별한 인연을 잘 받아주셨습니다. 대단히 경사스러운 일이지만 불쌍하게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나라를 위한 것이니까… 아무쪼록 몸조심하세요."라고 말했다. 마사코 여왕은 슬픔과 감사함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고, 동시에 새삼스럽게 책임의 무거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등과 졸업 후 마사코 여왕은 가쿠슈인 여학부 고등과에 진학했으나, 결혼 준비를 위해 중퇴하는 바람에 졸업하지 못했다.[8]

5. 영친왕의 약혼녀, 민갑완

양가 부모님들과 당사자들의 의견을 무시한 것뿐만 아니라, 당시 영친왕에게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다. 이는 영친왕이 일본인 강제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는지, 고종황제 순헌황귀비 엄씨가 1907년 당시 11살의 어린 영친왕을 민씨 집안의 동갑 처자였던 민갑완과 서둘러 약혼시켰고 혼인도 서둘렀기 때문. 그런데 마냥 어리다고만 하기는 그런 게, 전통적으로 조선에서는 세자와 세자빈을 10살 즈음에 혼인시키고 14살~15살 때 초야를 치르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유학'이란 구실을 붙여 영친왕을 볼모로 일본에 끌고 갔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사이 일제는 이 약혼을 깨버렸다. 사실 둘을 파혼시키기 위해 일제는 민씨 집안에 핍박을 가한 것은 물론이고, 황실에 보낸 혼수품을 강탈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여파로 민갑완은 파혼한지 몇 개월 되지 않아 중국 상하이로 반강제적인 망명을 하게 되는데, 이때 민갑완의 아버지 민영돈은 화병으로 사망한다.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식만 못 올렸을 뿐 삼간택이 다 끝나고 선정된 여자는 다른 남자와 혼인할 수 없었고, 조선시대의 종법을 그대로 이은 대한제국에서도 매한가지였다'는 낭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민갑완은 그저 들어오는 혼담을 모두 모두 거절하여, 못한게 아니라 안 했을 뿐이다. 게다가 민갑완은 삼간택을 거쳐 선정되지도 않았다. 간택을 거쳐 선정되었다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민갑완 개인의 주장이고, 국가공식 기록인 실록에 기록된 재간택 후보엔 민갑완의 이름이 없다. 민갑완은 영친왕을 일본으로 유학보내려는 일제의 계획에 결혼을 서두르다보니 간택에서 탈락했는데, 약혼자가 된 조선왕조에 찾아볼 수 없는 비정상적인 사례인데 민갑완은 이를 치부로 여겼는지 숨기고 윤색했다. 최대한 호의적으로 추정하자면 당시 어렸던 민갑완에게 집안 어른들이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으나, 설사 그렇다쳐도 늙어 죽을때까지 몰랐다는건 이해하기 힘들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사코 여왕은 어느 의미로든 민갑완이라는 존재에 대해 신경을 썼고 동정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방자의 <세월이여, 왕조여>에서는 이름 대신 '민 규수(閔閨秀)'라는 호칭으로 자주 언급된다.

6. 결혼 비화

파일:external/blog.cha.go.kr/1221273618964525.jpg
영친왕 이방자 여사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결혼의 배경은 이러하다. 그녀는 당시 일본 황태자였던 히로히토의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어느새 영친왕의 신붓감 후보로도 언급되더니, 불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일본 황실에 의해 영친왕과 약혼하게 된다. 다만 이건 소문이 그랬다는 거고 실제 사실과는 달랐다. 이방자는 실제로 3번 임신 했었기 때문[9]. 그리고 약혼 4년 뒤인 1920년에 결혼했다.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일제는 황실 전범의 내용을 고쳐 "황족 여자에 한해 왕공족과 결혼이 가능하다."는 조항을 새로 만들기까지 했다. 어찌됐건 한국의 황족과 일본의 황족이 결혼한 것은 최초였기 때문에, 당시 주위에서도 둘의 결혼 생활을 꽤 걱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방자 여사의 사촌 여동생이자 고준 황후의 친동생인 오타니 사토코 이방자 여사의 자서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상했다.
"단정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때때로 대기실[10]에서 머리를 단정하게 만져주었던 이방자 님, 아직 어렸던 나는 아름답다고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겨우 5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는 꽤나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 이방자 님을 매우 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자 님이 이은 전하와 결혼할 당시 나는 가쿠슈인 초등과를 졸업하고 교토부립 제1 고등여학교에 입학했으므로 더욱 만날 기회가 줄어들었습니다만 이방자 님이 이국 분과 결혼해서 여러가지로 고생이 많을 것이라고 까닭 없이 추측해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일화를 보면 이은과 이방자는 여러차례 충돌을 했던 모양이지만, 패전 이후 의친왕의 장남 이건이 일본인 아내 요시코와 이혼한 것과 달리 이혼하지 않았고, 말년의 이은이 대한민국으로 가자 자신도 외국인 대한민국으로 따라갔다. 남편 사후에도 죽을 때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살았던 걸 볼 때,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웬만한 부부는 사소한 거 가지고도 다 싸우니 이들만 특이한 것도 아니다.

이왕가는 또한 막대한 재산으로 일본 황족과 귀족들의 부러움을 사는 집안이었다. 조선에 소재한 구 황실 소유의 궁궐과 토지 등 각종 부동산, 한일합방 당시 약속되어 일본으로부터 정기적으로 거액의 돈을 지급 받았기 때문이다. 후술할 아카사카 별궁 등 도쿄 내에 소재한 재산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지냈던만큼 다소 간의 불화는 부부관계를 유지하는데에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외 당시 이방자 여사가 임신하자, 그녀가 불임이라고 보고했던 의사들은 전원 할복하였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는데 이런 불임설을 알고 있었던 이방자 여사는 " 일본 정부가 한국 황실의 대를 끊기 위해 자신을 영친왕과 결혼시킨 거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이 영친왕과 결혼한다고 결정되었을 때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이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분노했다고 언급한 걸 보면, 애시당초 불임 운운이라는 게 정말로 있었던 신체적인 문제였기보다는 어른의 사정인 냄새가 더 짙다.

게다가 이방자 여사의 의심과 달리 일본 쪽에서 정말 불임이라서 황태자비 후보였던 마사코 여왕을 영친왕과 결혼시켰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황태자비 후보 관련은 소문이었을 뿐으로, 진짜 논의된 건 그보다 2년 뒤인 1918년의 일이라고 한다. 이때 이방자 여사는 이미 영친왕과 약혼한 상태라 당연히 황태자비 후보가 아니었다. 또한 1916년 당시 일본 정부가 염두에 둔 영친왕의 신붓감 후보들은 전원 일본 황족이었으며, 마사코 여왕은 그 중 1명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진[11] 이구 두 아들을 낳았으니 그녀가 불임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불임설은 1970년대까지도 세간의 구설에 올랐는지, 심지어 낙선재로 이방자 여사를 취재하러 간 기자가 당사자 앞에서 그것을 대놓고 물어보는 결례를 저지르기도 했다. 물론 이방자가 불임이 아닌 것은 온 세상이 이미 다 알고 있으니 기자의 질문 요지는 "전혀 문제가 없으셨는데 왜 그런 헛소문이 돌았던 건가요" 였지만, 이 질문에 이방자 여사는 상당한 불쾌감을 나타냈으며, 아직까지도 이걸 두고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걸 상당히 언짢아했다고 한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애초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사이에서 자식이 생긴다 하여 일본에게는 조금도 손해가 되지는 않는다.

이들 사이에서 아들이 생긴다면 한국 황실 후계자의 외가가 일본 황실이 되고, 한국 황실과 일본 황실은 서로 혈연 관계로 얽히게 된다. 이는 내선일체를 그렇게 강조하던 일본 당국에게 나름대로 득이 된다는 것이다. 본래 경술국치 조약 중 하나가 일본 황실에 한국 황가가 편입되는 것이었는데, 500년 동안 자국민하고만 혼인해온 조선 왕실의 직계였던 구 대한제국 황족들은 일본 황실과 조금도 피가 섞이지 않았다. 실제로 영친왕 이방자 여사의 정략결혼 자체가 한국과 일본 두 황실의 내선일체를 노리고 일본 당국에 의해 기획된 것이긴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영친왕의 신붓감을 일부러 직계와 멀다고 하지만 황족 여자로 고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제는 이와 비슷한 황실간 혈연 맺기를 청나라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의 남동생 푸제에게 하기도 했다.[12] 바로 외가로부터 일본 황실의 혈통을 받은 사가 히로를 푸제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청나라 왕조를 일본인으로써 이어나갈 발상하에 이뤄진 정략결혼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결혼도 유사한 발상에서 성립된 것이라고 보는 게 더 논리적으로 타당할 것이다.

7. 결혼 준비

봄이 되자 마사코 여왕은 가쿠슈인 여학부 고등과에 진학했다. 세월은 어수선하고 바쁘게 흘러 다시 우기에 접어들었다. 바로 그녀를 그렇게 깜짝 놀라게 했던 그 여름이 또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1년 동안 그녀와 영친왕은 아직 대면도 하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1960년대까지도 부모 내지는 집안 어른들이 정해준 대로 혼인해서 결혼 전까지 얼굴 한 번 보지 않는 일은 허다했으니, 이건 마사코 여왕과 이은만 해당되는 사안은 아니었다. 쇼와 덴노의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도, 결혼식(1943년) 이후에야 남편 히가시쿠니 모리히로(東久邇盛厚)와 만났을 정도다.

학생 생활 최후의 휴가는 교토 사단장으로 있는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에게 가서 산센인에서 지냈다. 산센인은 마사코 여왕의 조부가 주지 스님으로 있던 유서 깊은 이다. 그곳에서 산에 올라가거나 명소, 고적들을 찾으며 만 7살 아래인 여동생 노리코 여왕, 양친과 함께 보냈다. 마사코 여왕은 친정에서의 마지막 여름을, 하루하루가 귀중한 추억이 되고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싶었다.

가을부터 본격적인 결혼 준비가 시작되어 바쁘고 초조한 가운데 11월 14일, 마사코 여왕은 만 17세의 생일을 맞았다. 이방자 여사는 생가에서의 마지막 생일이라고 생각하니 앞으로 닥칠 운명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뭔가 가슴에 자꾸 치밀어 올라왔다고 회상했다.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의 직원 30여명으로부터 축하 인사까지도 가슴에 사무쳤다. 모두 함께 기념 사진을 찍으니, 시집가는 날이 가까워진 것이 실감되었다.

이것도 마지막이고 저것도 마지막이었다. 11월 30일에는 학교를 떠나가는 마사코 여왕을 위해서 반(班) 송별회가 열리고, 그 날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긴 학교생활도 끝이 났다.

8. 영친왕과의 만남

마사코 여왕의 결혼에 대한 천황의 칙허가 12월 5일에 내려졌고, 3일 뒤인 8일에 약혼을 뜻하는 납채(納采) 의식이 행해졌다. '납채'는 일본식으로는 '노사이'라고 읽으며, 시가의 어르신이 처가에다 패물들을 건네고 정식으로 약혼관계가 되는 의식이다. 현대 일본 황실에서도 정식 약혼 의식으로 여전히 치르고 있다. 그 이전까지는 공식 약혼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약혼 예정자'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11일에는 그녀의 양친과 함께 도리이사카(鳥居坂)에 있던 이은과 약혼자로서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정식 결혼식은 이듬해 1월 25일로 결정되었다. 새해의 1월 9일, 그녀는 궁중으로부터 보관장 훈이등을 받는다.[13] 결혼을 위한 복잡한 절차는 다 끝났다.

이은 왕세자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에 임관되어 근위 보병 제2연대 소속으로 있었기 때문에 일요일만 외출이 가능했기에, 납채 의식을 거행하고 정식 약혼자가 된 뒤 왕세자는 매주 일요일에 만났다고 한다. 왕세자는 말이 없는 사람으로 말을 붙이기 어려웠고, 이들은 뜰 산책을 하거나 트럼프 놀이를 했다고 한다.

마사코 여왕은 왕세자에 대해 "키가 작지만 어깨가 넓어 믿음직스러워 보였고, 말 한 마디나 행동이 온후하고 교양이 깊어 보였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외롭게 성장했기 때문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만나보니 다정했다"고 평했다.[14]
내가 시집가는 곳은 전하의 따뜻한 마음 옆인 것이다. 선일융화니 정치니 하는 것은 나와 상관없다. 외로운 전하의 옆에서 애정과 위로로 따뜻한 친구가 되어드리는 것이 내 의무다.

마사코 여왕은 정해진 혼례에 순종적이었어도 내키지 않는 결혼이었지만, 왕세자와 만나고 나서 걱정한 것만큼 나쁜 생활이 되지 않을 거라고 안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 사람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뒷이야기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왕세자 이은은 결혼을 원치 않아서 수 차례 연기되었다. 이때까지도 고종황제는 살아있었는데 나라를 빼앗고 명성황후를 죽인 원수인 일제와 국제결혼하는 것에 노발대발했지만 결국 인질이었던 전 황태자의 신변 때문에 허락했고 영친왕도 고종황제의 안전을 위해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9. 외국의 반응

1920년 6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발행되는 불문잡지 <자유대한(La Coree Libre)>에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는 기사가 실렸었다. 자유대한(自由大韓)은 1919년 9월 파리 강화 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러 갔던 상해임시정부의 김규식 박사가 그대로 파리에 머물면서 항일투쟁을 하기 위해 발행하는 잡지였다.
조선의 이왕 세자와 일본 나시모토 왕녀와의 결혼

기사는 정략결혼과 조선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왕세자를 강제로 부왕과 떨어뜨려 영친왕을 강제로 일본 정부의 감시하에 남겨두기 위해 일본 황실 근위대의 지휘관을 만든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10. 결혼에 대한 걱정

이들의 결혼에 대한 조선 내에서의 항일 파동, 왕세자의 강경한 거절, 외국의 신문사설을 통한 비판을 물론 당시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 왕실에서도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원했으니 너를 환영할 것이다"라며 그녀를 위로하려고만 들었다.
이은 전하가 나와의 결혼을 좋아하거나 쉽게 승낙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은 전하는 나를 미워할지도 모른다.

물론 강요로 인한 결혼이었고, 국제정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조선 왕실이 환영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사코 여왕 또한 기뻐한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거기다 민갑완 규수의 일도 마사코 여왕에게 있어서 제대로 된 결혼생활이 될지 걱정하는 원인이었다. 본래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던 11살 때 두 사람은 의미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뛰어놀면서 지냈지만 인질로 일제로 끌려간 뒤 다시 만나지도, 교류를 하지도 못했다. 일본 황실의 종법과 달리 조선왕실의 종법을 이었던 대한제국에서는 식만 안 올렸을 뿐 삼간택이 끝난 황태자비는 다른 사람과 혼인하는 게 불가능해서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여자로서 마사코 여왕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럴수가 있을까?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매장하는 일인데. 그 규수의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클까?

왕세자도 티는 안 냈지만 민갑완 규수를 잊지는 않았기 때문에 마사코 여왕의 앞날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11. 3.1 운동과 협박 전화

1919년 1월 25일로 예정된 결혼식을 4일 앞둔 1919년 1월 21일, 시아버지가 될 예정이었던 고종황제가 갑자기 사망했다. 황태자 이은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급히 조선으로 돌아갔고, 두 사람의 결혼식은 내년 봄으로 연기되었다. 결혼식으로 들뜨던 나시모토노미야 저택은 암울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독살이 의심되는 고종황제의 죽음을 기폭제로, 조선은 얼마 안 가 3.1 운동으로 떠들썩해진다. 그 때문에 마사코 여왕은 매일 악몽을 꾸면서 불안에 떨어야 했다.

신문을 보며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은 "독립 만세 운동으로 조선이 무척 소란스럽군"이라며 크게 걱정했다. 늘 말없이 남편에게 순종만 하던 이츠코는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요, 그런 결혼은 아무래도 좋지 않다고 했잖아요!"라면서 유일하게 남편에게 역정을 냈다고 한다.
이번 결혼은 국가적인 배경으로 하는 일인 만큼, 내선(内朝)관계가 악화됐을 때는 매우 곤란해질 터인데… 그래도 이왕가에 시집 갈 자신이 있느냐?
그녀는 다시 한번 결단을 내려야했다. 그녀는 스스로 운명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설사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악화되더라도 저는 그 분을 믿을 테니까요.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저는 이은 전하 개인에게 시집가는 것이지, 한국이라는 나라에 시집가는 게 아니니까요.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은 마사코 여왕에게 괜찮겠냐면서 물어봤지만 마사코 여왕은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안심한 모리마사왕은 "그래, 너의 말이 옳다. 그러면 그 분이 돌아오시는 대로 빨리 결혼식을 올리자"고 말했다. 하지만 마사코 여왕은 단호하게 말했지만 사실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때 벌어진 3.1 운동의 여파로 많은 한국인들이 잡혀가고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결혼을 앞둔 나시모토노미야 저택에는 밤낮으로 수많은 협박 전화와 전보가 왔다. 주로 이은과의 결혼을 단념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어지간히도 시달렸는지 가족들은 벨소리만 울려도 '또 협박전화로구나' 싶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고 한다. 사실 이런 협박전화는 이은도 시달렸다고.

12. 결혼식과 임신

기다림과 악몽의 연속이던 2달 후, 이은은 1919년 3월 중순에 돌아왔다. 아버지 고종황제가 죽은 뒤 이은은 심리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으려고 한 건지 마사코 여왕을 이전보다 자주 찾아왔다. 결혼이 본래 예정보다 1년 뒤로 연기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결혼 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교제할 수 있었다. 당시 황족들은 결혼 전의 교제로 1회~2회의 형식적인 방문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두 사람은 특별한 경우인데다 도중에 워낙 우여곡절이 많아 결혼까지의 기간이 길었으므로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는 두 사람이 티격태격거리면서도 말년까지 이혼을 겪지 않은 근본적인 원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1달에 2~3번 만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은은 말이 적은 사람이었지만 마사코 여왕에게 있어서는 곁에 있는 것으로도 안심이 되었다고 한다.

마사코 여왕은 엄밀히 따지면 황족 이외의 남성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신적강하가 될 수도 있었지만, 당시 왕공족은 일본 황실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 여왕' 칭호를 유지하라는 다이쇼 덴노의 칙령( 『관보』 제2320호 「궁정록사」)도 있었기에 이후에도 여왕 지위를 유지하였다.

1920년 4월 28일 결혼식이 치러진 후 3일 동안은 파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정신없이 바쁘고 떠들썩한 3일이 지난 뒤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왔다. 두 사람이 결혼식 날에 타고 온 의장 마차가 도리이사카 언덕을 오를 때 폭탄을 던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 경상도 출신의 한국인 유학생 서상일이었는데, 폭탄의 성능이 좋지 않아 터지지 않았으므로 이방자는 결혼식 직후 3일 동안에는 이를 모르고 있었다. 이 사건은 극비에 부쳐져서 관계자와 일부만이 알고 있었고,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이방자가 이 소식을 들으면 놀랄 것이라고 걱정한 것 같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운명에 이방자는 앞으로 닥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있었기에 침착했다고 한다. 이은은 결혼한 해에 일본육군대학에 입학했으며,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이방자는 집안을 정리하고 조선인 직원들을 불러서 조선의 풍습과 예의를 배웠다. 한복을 입는 방법도 그들로부터 배우고 입고 행동하는 것까지 일일이 연습하기도 했으며, 이방자가 파란색 동그라미 무늬가 있는 한복을 입은 적이 있는데, 이 때 이은은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했다. 기뻐하는 이은을 보고, 이방자는 앞으로 자주 한복을 입으리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13. 첫 출산과 조선 방문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방자는 임신했고, 1921년 8월 18일 장남인 이진이 태어났다. '진(晋)'이라는 이름의 뜻은 어떤 운명이나 역경 속에서도 밝고 행복하게 살라는 뜻이었다. 첫 아이의 재롱을 보며 영친왕과 이방자는 더 행복해졌으나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진이 생후 7개월이 되던 1922년 4월 영친왕과 이방자는 최초로 함께 조선을 방문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아직도 영친왕의 맏형인 순종황제에게 결혼 보고를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선 방문을 너무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생후 7개월 된 이진을 데리고 조선까지 먼 여행을 하는 것이 불안했다. 그래서 아기를 데리고 갈 것이냐, 도쿄에 남겨두고 갈 것이냐로 고민을 했다. 이진은 모유에 유모의 젖까지 보충해야 하는 시기였고 기후나 풍토가 다른 땅이며 배를 타고 하는 여행인만큼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나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방자는 마음대로 아들을 두고 갈 수 없었는데, 이진 왕자는 조선 왕실을 이을 왕자였다. 그런 이진 왕자를 그녀 마음대로 두고 갔다가는 조선 왕실에 대해 무례하고 부도덕한 여자로 오해받을 수도 있었다. 결국 영친왕과 이방자는 장남 이진 왕자를 데리고 가기로 결심했다.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린지 2년 만인 1922년 4월 28일, 두 사람은 조선에서 조선식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이때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의 맏형 순종황제와 이복 여동생 덕혜옹주를 처음 만났다. 덕혜옹주는 1922년 히노데(日出) 소학교 1학년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는 일본인 학교였다. 소학교 입학 전에도 덕혜옹주는 일본인 교사와 보모에 의해, 일본어와 일본식 풍습 속에서 길러졌다. 덕혜옹주를 일본식으로 물들이기 위해 일제가 꾸민 일이었다. 영친왕과 이방자는 떠나기 전 날인 1922년 5월 7일까지 역대 선왕에게 결혼 보고를 하고 가든 파티에 참석하고 영친왕의 어머니 엄귀비가 세운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에 방문하는 등 많은 일정을 보냈다. 이진 왕자는 아무 탈 없이 귀여움을 받았다. 고종이 독살 되었다는 소문에 일본인 수행원들은 무척 신경을 곤두세워 이방자의 음식을 일일이 점검하고는 했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약 2주 동안 세 식구는 편안하게 조선에서 시간을 보냈다.

14. 이진의 죽음과 유산

그러나 경성을 떠나기 전날 밤, 건강하게 잘 놀던 이진 왕자는 갑자기 얼굴이 파랗게 되어 청록색의 젖을 토해내기 시작했는데 의사들은 "우유를 잘못 먹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진 왕자는 모유 외에 소량의 우유를 먹고 있었으나 이방자가 보기에는 토하는 것이 우유가 아니라 다른 음식물인 것 같았다. 그리고 우유가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아기가 이렇게 심하게 아픈게 말이 되나 하는 의구심 속에, 이방자는 아들을 돌보는데 소홀했음을 크게 후회했다.

"우리 아기가 죽지만 않게 해달라"는 수많은 기원과 몸부림과 눈물에도 불구하고 이진 왕자는 1922년 5월 11일 새벽 3시 15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방자는 "겨우 생후 7개월된 아기가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내가 일본 여자라고 해서 그래서 우리 아들을 죽여야 한다면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는가"하고 세상을 원망했다.[15] 이에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 누가 왕통을 노려서 왕자를 죽일 수도 없고, 더구나 무슨 원수를 갚겠다고 그런 참혹한 짓을 저지를 사람은 없다."고 말했지만 이방자는 의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방자는 작은 이진의 몸을 부둥켜 안고 소리내어 한없이 통곡했다. 체면이고 신분이고 따질 겨를없이 미친 상태가 되어 울고 또 울었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22세(만 20세)였다.

당시 조선 풍습상 아이가 어려서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았는데,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불효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죽은 사람이 왕의 아들이라도 마찬가지였으나 순종은 특별히 장례식을 치르도록 배려했고, 1922년 5월 17일에 이진 왕자의 장례식을 치렀다. 다만 궁중 의례에 따라 이방자는 장례식에 참석할 수도 없었고 입관 후의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이후 청량리 홍릉 자리에 있는 숭인원에 무덤이 들어섰는데, 이진 왕자의 할머니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인 영휘원 옆에 있다. 영친왕과 이방자는 장례식 다음날인 1922년 5월 18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진 왕자의 죽음은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이방자의 친정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소식을 들은 이방자의 아버지 모리마사 왕, 어머니 이츠코 비, 여동생 노리코 여왕도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으며 이방자는 친정 가족들을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이방자는 집에 도착하자 아직도 아들의 옹알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 슬펐다. 하지만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혼자 눈물을 흘리는 남편 영친왕을 위해서라도 남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다시 안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방자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 마에다 사에코(前田朗子)[16] 이모의 권유로 불경을 베껴 쓰면서(사경)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때로는 "보통의 일반 부부라면 무리하게 어린 자식을 데려가지 않았을 텐데, 왜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이 같은 결혼을 해서 어린 아들을 데려갔는가?"라는 원망과 슬픔이 들어서 사경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차차 마음이 진정되고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이방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진 왕자를 생각하며 멍청히 앉으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기도 했다. 날이 밝으면 이 화창한 날에 꽃도 못 보고 새소리도 못 듣고 답답한 흙에 눌려있는 아기가 불쌍했고, 비가 오는 날에는 빗물에 축축히 젖어도 움직일 수 없는 어린 아들이 너무 가엾었고, 서울의 숭인원에 달려가 이진 왕자를 보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온종일 정원 벤치에 앉아 서울 쪽만 바라보고는 했는데, 그러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불경을 썼으며 차차 안정을 되찾으면서 다시 영친왕의 아들을 낳기를 바랐다. 한편 영친왕은 모든 것을 잊으려는 듯 군사훈련에 열중했는데, 이방자는 남편이 없는 시간이면 더욱 쓸쓸하고 허탈했지만 사경에 몰두했으며, 그녀는 생(生)과 사(死)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위안을 받았다.

이진 왕자의 출생 1주년이 되는 1922년 8월 18일은 무척 우울한 날이었는데, 이진 왕자가 살아 있었다면 돌잔치로 떠들썩했을 날이었기 때문이다. 영친왕과 이방자는 이진 왕자의 명복을 위해 정원 한 구석에 작은 사당을 세웠으며, 서울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음식을 차려놓고 향도 피웠는데, 이렇게라도 하니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1923년 봄에 이방자는 임신했지만 금방 유산되었는데, 작년 이진 왕자의 죽음이 너무 충격적이고 마음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17] 이방자는 행복이 주어졌다가 빼앗겼다가 다시 주어졌다가 되돌아가는 행복의 그림자에 매달리는 약한 인간에 대한 운명의 희롱을 절실하게 깨달으며 무기력해져 갔다. 1923년 여름 영친왕은 장기 훈련으로 2주일간 집을 비웠는데, 이방자는 닛코(日光) 린노지(輪王寺)라는 의 깊숙한 뜰 안에 있는 행랑채를 빌어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더위를 피하기보다는 세상 모든 것에서 떨어져 있기 위해서였으며 사람을 만나거나 집안 일, 격식을 차려야 하는 크고 작은 행사들이 모두 싫어지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모든 의욕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15. 관동대지진과 대학살

1923년 9월 1일에 간토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날 영친왕은 아카하네의 공병대에 출장을 나갔다가 정오 조금 전에 돌아왔다. 영친왕과 이방자가 점심 식사를 위해 식탁에 앉아 막 젓가락을 들자마자 대지가 부르르 떨리면서 집이 금방 부서질 듯 흔들거렸다.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는데 뗏목이라도 탄 듯이 땅이 흔들거려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으며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끌어당기며 정원의 큰 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당시 일본 학교에서는 지진에 대한 특별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특별 교육이라도 별 방법은 없지만 지진 때는 큰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으며 집에서 빠져나가 최대한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큰 나무 밑으로 피하라는 것 등이었다.

영친왕과 이방자는 정원의 큰 오동나무 밑으로 가려고 했으나 당시 지진이 너무 커서 땅이 솟아오르고 상하좌우로 함께 요동했다. 두 사람은 수없이 넘어졌으며 너무 급하게 뛰어나오느라 신발도 신지 못한 채 겨우 오동나무 밑으로 갈 수 있었다. 일본의 집은 지진에 대비해서 지붕 서까래를 깍지 끼듯이 만들어놓기 때문에 잘 부서지지 않았지만 당시 지진이 심해서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방에서 화재가 일어나 불길과 시커먼 연기가 도쿄 시내를 뒤덮고 있었다. 지진이 잠깐 잔잔한 틈을 타서 영친왕과 이방자는 조용히 집에 들어가 필수품을 꾸렸다. 불길은 시내를 질풍같이 휩쓸어 바로 두 사람의 집이 있는 언덕 아래까지 다가왔다. 한밤중이었지만 이방자의 친정 아오야마(靑山)의 나시모토노미야 저택으로 피신했으며 지진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으므로 공포 속에 온 가족이 밤을 새웠다.

다음 날부터 화재 진압이 시작되었는데 도쿄의 태반이 잿더미로 화했고 10명 중 1명은 집을 잃었으며 수만 명이 불에 타 죽었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난 시간이 마침 점심 시간이라서 대부분의 가정과 식당에서 요리를 하느라 불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당시 일본에는 목조 가옥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화재가 미친 듯이 번진 것이다. 식량 공급은 중단되었고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져 도둑이 날뛰자 일본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물론 영친왕과 이방자는 왕족이었고 무슨 일이 생기면 국제적 문제가 되기 때문에 보호를 잘 받아서 별 탈이 없었지만 이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는데, 그건 한국인들이 곳곳에서 학살당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어지럽게 유포되어 삽시간에 들불처럼 타오르고 확대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집과 가족을 잃어 미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죽이려고 떼를 지어 몰려다녔다. 조선인 유학생 노동자들이 수천 명이나 일본인에 의해 비참하게 학살당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불령단으로 몰아서 불령단 수색대라는 것을 만들고 자신들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자경단을 만들어 거리를 휩쓸며 조선인을 사냥하러 다녔는데 이들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오히려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을 묵인하고 부추겼다. 영친왕도 조선인이기 때문에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두 사람은 집을 버리고 궁내성 제 2대기실 앞에 쳐진 텐트 속에서 1주일 동안 피신해야 했다. 영친왕은 슬픔과 분노로 목소리를 떨고 있었으며 1주일 내내 영친왕은 눈물을 글썽이며 괴로워했다.

이방자는 그런 영친왕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는데, 이방자 역시 일본인이므로 이 모든 일이 그녀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서 죄책감을 느꼈다. 이방자는 자신과 남편이 국가나 피를 초월한 애정과 이해로 굳게 맺어져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번 사건으로 그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미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깊은 도랑이 가로놓여 있었다. 이진 왕자를 조선으로 데려가느냐 마느냐 고민한 것처럼 이방자는 이런 일을 결혼 생활 중 여러 번 겪어야 했으나 일본은 친정, 조선은 시가였다. 공개적으로 어느 누구의 편을 들 수도 비난할 수도 없는 처지였는데 이방자는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이 자신의 운명을 슬퍼하며 혼자서 숨막히게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참혹한 사건을 보며 이방자는 영친왕에게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는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선인들과 같이 무자비한 일본에 대해 적개심을 품는 것과 남편과의 사이가 이 일로 멀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조선인들을 나쁜 쪽으로 끌어들이지?? 조선인은 참 불쌍한 위치에 있는데, 왜 그들을 또 죽이려고 하나?? 불쌍한 수많은 노동자들을 말이야. 일본인들은 너무 부당한 짓을 하고 있어!!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당시 일본 내각의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郞) 내무대신과 계엄사령관 후쿠다 육군 대장 등은 이 때 "지진으로 집을 태우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선동되어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눈이 뒤집힌 민중의 심리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인들을 일종의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이런 사회주의자들도 함께 학살당하곤 했다. 혁명을 두려워한 잔인한 비상 수단으로 인해 조선인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것을 들은 이방자는 일본인들의 잔혹함을 피부로 느낀다. 죄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킨 일본 정치에 대해 그녀는 애매한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일 간에 있었던 이러한 일들을 직접 체험하면서 일본인들이 너무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은 영원히 갚지 못할 빚이라고 생각했다.

1주일이 지나자 일본 정부에서도 조선인 학살을 중지시켰는데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왔고 영국을 비롯한 외국의 반응이 의외로 강했으며,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지진으로 인해 집이 무너지고 뒤처리가 힘들어서[18] 바쁜 날을 보냈으나 이방자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는데 모든 것이 싫고 무의미하고 절망되고 무기력했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잠들어도 꿈 속을 헤매다가 갑자기 깨어나고는 했다. 지진이 일어난지 20여 일이 지나고 정원을 빨갛게 수놓았던 칸나도 모두 시들어갔다. 정원에서 진 꽃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 역시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자신이 있는지 허무할 뿐이었다.
일본인들의 잔인한 행위는 무엇인가? (영친왕) 전하와 내가 결혼함으로서 한일관계를 위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가? 우리의 결혼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나의 아들 진의 죽음조차 이제는 아무 가치가 없게 되었구나!

16. 가엾은 덕혜옹주

덕혜옹주가 히노데소학교 5학년 때인 1925년 정월, 이왕직 차관 고쿠부 쇼타로(國分象太郞)는 순종황제에게 덕혜옹주의 일본행이 결정되었음을 통보해왔다.

순종황제는 " 영친왕만 볼모로 데려다가 도쿄에 있게 했으면 됐지, 왜 어린 옹주까지 데려가야 하느냐"고 반대했지만, 실권 없는 순종황제의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당시 이미 일제는 조선의 궁궐인 창경궁을 개방하여 동물원을 만들었고, 광화문 자리에는 경복궁 근정전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조선 총독부의 석조 건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순종황제는 이제 일반 시민에게 동물원으로 개방된 고궁이나 돌보는 주인에 불과했다.

덕혜옹주는 3월 25일 서울을 출발하여, 30일 오전 8시 반 도쿄역에 도착했다. 집의 직원들과 함께 옹주를 마중했을 때, 이방자는 깜짝 놀랐다. 순진하게 생글생글 웃던 옹주는 피로에 지친 듯 흐려져 있고, 얼굴도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이방자가 "긴 여행에 무척 피로하시죠?"라고 말을 걸어도, 옹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덕혜옹주와 덕혜옹주의 생모 복녕당 귀인 양씨의 슬픔을, 자식을 사랑하고 잃어 본 어머니의 마음으로서 이방자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덕혜옹주는 일본 황족과 화족의 딸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가쿠슈인 편입학했다.

이방자는 그녀 자신이 올케니까 덕혜옹주를 어머니와 같은 애정으로 위로하고 충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며칠 동안 옹주와 나란히 누워서 얘기를 하고 옹주가 잠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래도 올케라고 믿고 안심하고 잠드는 덕혜옹주의 순진한 얼굴을 보고, 어린 옹주가 가여워서 눈물이 나곤 했다.
고약하고 괘씸한 사람들 같으니. 인질은 나 하나로 족하거늘, 무엇이 부족해서 저 어린 아이까지 끌어들인단 말인가?

영친왕은 비록 어머니는 다르지만 덕혜옹주는 일본에서 유일한 혈육이니 이방자에게 옹주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이방자도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덕혜옹주를 데리고 잘 보살피겠다는 희망도 무참히 거절당하고 말았다.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는 어린 덕혜옹주를 데리고 살며 직접 돌보길 원했지만, 일본은 그마저도 못하게 한 것이다. 덕혜옹주는 가쿠슈인 기숙사로 가게 되었다.

이후 영친왕은 꿍하니 말도 잘 하지 않고 조선 왕실이 일본 왕실에 사사건건 지시를 받는 것에 대해서도 신경질을 내곤 했다. 어느 날 영친왕은 분통이 터졌는지 여느 때와 달리 큰소리로 한탄했다.
도대체 내가 자유로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손님을 만나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도 정치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니, 사람들은 나만 보면 조선 이야기를 피하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돌려야 하고, 이중 인격자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야. 그런데 덕혜마저 나와 같은 신세가 되다니…

영친왕의 그 말에 이방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영친왕 역시 무슨 해결책을 듣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한탄을 하며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1925년 12월 6일, 히로히토 황태자와 나가코 황태자비의 첫 아이인 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 히가시쿠니 시게코)이 탄생했다. 라디오에서는 시게코 공주의 탄생을 알리는 요란한 종소리가 흘러 나왔다. 도쿄 시내는 어둠 속에서도 축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시게코 공주의 출생을 기리는 축하의 노래가 지어졌고, 이 노래는 라디오의 전파를 타고 거리에 퍼져 나갔다. 시민들이 들고 다니는 축하 깃발이 거리를 메웠고, 일본은 연일 축하 분위기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이방자는 "누구는 아기를 낳아 행복하겠구나" 하고 부럽고 우울할 뿐이었다. 허전함을 달래려 불경을 베껴 쓰고,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고, 그림이나 자수를 해봐도 아무 소용 없이, 그녀에게는 한 해가 헛되이 지나갔다.

17. 순종의 죽음과 유럽 여행

1925년 가을쯤 두 사람은 궁성으로부터 내년 봄 유럽 여행을 제안받았다. 이방자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특히 영친왕은 새장 속의 새같이 답답한 일본 볼모 생활을 탈출해서 마음대로 보고 듣고 숨쉴 곳을 찾을 수 있어서 무척 기뻐했다. 1926년 3월 11일로 여행이 예정되었고 다이쇼 덴노의 칙허와 하사금을 받았으며 두 사람은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으나, 운명의 신은 그들에게서 자비를 빼앗듯이 갑자기 순종의 병이 악화되었다.

1926년 3월 1일 두 사람은 급하게 경성으로 가야만 했는데, 순종이 중환이기는 했지만 아주 위독한 수준은 아니어서 순종에게 유럽 여행의 인사를 드리고 도쿄에 돌아갔다. 예정대로 1926년 3월 11일에 여행을 가려 했지만 순종이 "결정적으로 아주 위독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중환 수준의 병"이 계속되다가 다시 병환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26년 4월 13일 경성으로 서둘러 갔다. 한편 1926년 3월에 두 사람이 창덕궁에 갔을 때 이방자는 "간호원과 이름있는 양의와 양약을 둘 것"이라고 지시했으나, 하나도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오랜 관습의 개선이란 게 이렇게 어려운 시도였는가'라고 그녀는 아연하고 답답했다. 순종은 병중이었지만 두 사람을 기쁘게 맞이했으며 영친왕은 라디오, 이방자는 흰 비단 속에 새털을 넣은 쿠션을 순종에게 선물했는데, 순종은 라디오를 신기해하며 만지고 쿠션이 무척 편하다고 좋아했다. 이방자는 순종에게 뭔가를 더 해드리고 싶어도 조선 왕실의 관습과 규칙이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걱정 속에 하루하루가 흘러가던 날 1926년 4월 25일 새벽 1시, 창덕궁 대조전에서 자고 있던 순종은 호흡 곤란에 빠졌다. 영친왕과 이방자는 황급히 대조전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순종은 사망했는데, 순종은 재위 19년만에 한 맺힌 숨을 거둔 것이다. 영친왕은 "형님께서 너무 불쌍하다"고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이방자 역시 일본에 의해 어머니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것을 지켜보고 권력을 빼앗기며 나라가 망하고 독이 든 홍차를 마셔 앞니 여러 개가 빠지고 평생 병약한 몸으로 살아야 했고 그 홍차가 원인이었는지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어린 이복동생 영친왕을 왕세자로 책봉했지만 동생들을 강제로 일본에 인질로 보내야 했던 순종이 왕으로서가 아닌 순종의 개인 인생이 너무 가엾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순종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보내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순정효황후 윤씨였다. 순정효황후는 순종의 죽음 후에 바로 서쪽 방에 들어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크게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 곡소리는 간장을 끊는듯 궁 내에 크게 울려펴졌고 이방자는 그런 순정효황후가 너무 가여워서 이방자 역시 그 방에 들어가 통곡을 했다. 옛 관습에 따라 순정효황후는 앞으로 수십 일 동안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세수나 빗질도 하지 못한 채 미음만 먹고 죽은 남편만을 애도해야 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20살이나 연상인 남편과 결혼해서 약 20년 동안 구중 궁궐에 갇혀서 1년에 1~2번만 비원을 산책한 게 유일한 외출이었고 순종은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니 약 20년 동안 얼마나 적적한 세월이었는지 이방자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33세의 나이에 홀로 수십 년 세월 동안 평생 구중 궁궐에 갇혀 사는 슬프고 외로운 인생만이 남아 있었다. 만약 영친왕이 조선의 황제가 된다면 이방자 역시 그런 삶을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히는 듯했고 같은 여인으로서 순정효황후가 너무 불쌍해서 눈물만 흘렸다. 영친왕과 이방자는 순종의 죽음 이후 약 20일간 머물며 순정효황후를 위로한 뒤 도쿄로 돌아왔는데 그동안 미뤄졌던 유럽 여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 황족들이 그러하듯 스스로 돈을 지불해본 적이 없던 이방자는 약 1년간의 유럽 여행을 위해 거스름돈을 받는 연습을 했다.

18. 다이쇼 덴노의 죽음과 쇼와 덴노의 즉위

1927년의 신년 새해는 다이쇼 덴노의 국장으로 인해 축제없이 조용히 보냈다. 2월 7일 아오야마에서 장의식장이 거행되었다. 장례식 전날은 무척 추워서 밤을 새며 장의식장을 올리는 사람들은 몸의 감각이 없을 정도였으나, 털옷을 입을 수가 없어서 고통스럽게 밤을 보냈다. 다이쇼 덴노는 어려서부터 병약했으나 15년의 재위 기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선왕인 메이지 덴노의 후광과 그 측근들의 도움 덕분이었는데, 이제 선대가 이룩한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아니면 성공적으로 이끌지는 새 천황인 쇼와 덴노에게 달려있었다. 이방자는 쇼와 덴노가 자신과 동갑이며, 그의 아내 고준 황후가 자신의 사촌 여동생이기에, 덴노 내외의 앞날을 걱정했다.

19. 차남 이구의 탄생

이진 왕자가 죽은 지 정확히 10년이 되던 해, 1931년 12월 29일, 차남 이구가 태어났다. 차남이긴 하지만 사실상 외아들로서 이왕 이은의 이왕세자가 되었다.

20. 광복 이후

1945년 한반도는 광복이 되고 이방자 영친왕을 따라 호적상 재일 한국인이 된다.[19] 1947년 5월 3일에 일본국 헌법 시행과 함께 왕공족 제도가 폐지되면서 그 지위를 잃어서 친정 나시모토노미야 일가의 도움을 토대로 어렵게 살아갔다. 이방자의 평민 강등은 이왕의 왕비로서 일본 황실 여왕 지위를 유지하다가, 왕공족 제도 폐지와 함께 지위를 잃은 것이라서, 일반적인 일본 황실의 황적이탈과는 별개인 특이한 케이스였다. 이후 동년 10월 14일에는 나시모토노미야 가문마저 황적이탈하여 구황족이 되었다. GHQ는 기존 구황족·왕공족·화족이 누리던 면세 특권을 폐지하여, 보유 재산의 70%를 넘는 엄청난 재산세를 내야 했다. 한국에 있는 재산은 동결되어 이후 국가로 귀속되었다.

1948년 미군정이 끝나고 남한에 한국 정부가 수립되자 영친왕은 귀국과 국적 취득을 타진했는데, 이승만 정부는 그들이 일본 황족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일본으로 귀화한 것이라 주장하여 한국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 정부는 이들의 일본 아카사카 저택을 "한국 재산이니 주일 대표부 공관으로 내놓으라"며 압박하기도 했다. 그래서 부부는 일종의 무국적 상태로 살아갔는데, 와중에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카사카에 있던 대저택 참의원 의장 공관으로 대여했고, 별장도 매각하였다.

1950년 일본을 방문한 이승만을 만나 국적 취득과 귀국을 논의했을 때도 여전히 냉담한 반응이었으며, 같은 해 차남 이구가 미국 MIT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여권 발급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일본 정부가 발행한 임시 여권으로 미국을 오갔다고. 이후로도 아들 이구의 졸업식과 결혼식 등으로 미국행을 위해 지속적으로 여권 발급을 요구했으나, 끝내 이승만 정권은 한국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남편 영친왕과 함께 1960년에 일본으로 귀화(이방자 입장에서는 일본 국적 회복)하여 국적을 얻었다.

그런 와중에 경제적 어려움은 더해갔는데, 아카사카의 대저택은 결국 세이부 그룹의 창업자인 츠츠미 야스지로(堤康次郎)에게 팔려 1955년 그 자리에 그랜드 프린스 호텔이 들어서게 된다. 1954년에 대한민국에서 〈구황실재산처리법〉이 제정되어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을 모두 국유화하는 대신 황족의 직계와 배우자에게 매월 생활비가 지급되도록 하였지만, 영친왕 이은은 거기서도 제외되었다. 이에 쇼와 덴노( 히로히토)가 특별히 어용금 10만 엔을 매달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1960년대 들어 이승만 정부가 4.19 혁명으로 물러나고 장면 내각을 거쳐 박정희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그제서야 영친왕 덕혜옹주의 상황을 살피게 된 박정희 정부는 두 사람의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로 결정한다.[20] 그리고 1963년에 이르러 드디어 이방자 여사는 국적회복을 통해 한국 국적을 얻고[21] 남편 영친왕과 함께 한국에서 살게 된다. 한국에서는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면서 육영수 여사의 지원을 등에 업고 수원시 자혜학교,[22] 안산시 명혜학교[23] 같은 각종 장애인 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사회봉사활동을 펼쳤다.[24] 당시 뉴스

노후에는 자개공작(칠보) 등을 배우고 스스로 만든 장신구 등을 팔며, 노동의 즐거움과 스스로 삶을 영위할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하여 큰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1965년 3월, 쇼와 덴노를 예방한 이동원 당시 외무부장관은 그와 40여분이나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화를 마친 쇼와 덴노가 이 장관을 배웅하면서 '리 마사코'에게 안부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21. 사망

파일:external/photo.korea.kr/9cc8bb32-01a1-4c51-8991-6851175732c1.jpg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top_2016_570546_14708161132576684.jpg
1981년 낙선재에서 이방자 여사

투병을 하면서도 말년까지 자선 활동에 힘쓰다가 사촌제부이자 동갑내기 먼 친척인 쇼와 덴노가 죽은 지 3개월여 후, 시누이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난 지 9일 후인 1989년 4월 30일, 향년 87세를 일기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정맥류로 타계했다.[25] 시기가 묘한데, 주변인들은 행여나 시누이의 죽음을 알고 병세가 악화되지는 않을까 염려해 이방자 여사에게 덕혜옹주의 사망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장례는 9일장으로 치러졌고, 사후 이 여사는 남편 영친왕이 안장된 영원(英園)에 합장되었고, 현덕정목온정자행비(顯德貞穆溫靖慈行妃)라는 사시(私諡)를 받아 남편과 함께 종묘 영녕전에 배향되었다. 어디까지나 우연이라고는 하지만, 묘하게도 이때까지 영녕전의 제실 공간은 딱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배향될 공간만 비어 있었다라고 한다. 사후 의민황태자비장의위원회에서 '의민황태자비장의록'을 발간했는데,[26] 나중에 회은황세손 이구의 장례식 때 참고되었다. 영원의 비각(碑閣)에는 '대한(大韓)/의민황태자영원(懿愍皇太子英園)/의민황태자비부좌(懿愍皇太子妃附左)'라는 묘표가 새겨졌다. #

장례식 때는 쇼와 덴노의 막내 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과 유리코 비 부부가 비공식 방한해서 식에 참석했다. 고준 황후의 사촌언니이자 방계 황족이었던 마사코에 대한 예우로 보인다.[27]

사망하기 전 투병 생활을 할 때는 이런 일화가 있었다. 한국 주재 일본인 기업가들의 부인들이 병문안을 왔는데, 그녀들이 이방자 여사에게 "어떤 요리를 해드리면 좋을까요?" 라고 물었다. 이방자 여사는 "어렸을 때 먹었던 이런이런 요리들이 참 맛있었지요." 라고 답했다. 그런데 그 요리들은 일본에서 난다 긴다 하는 부유층 사모님이었던 그 부인들에게조차 생소한 요리여서, 그 부인들이 "역시 황족 출신은 다르다!" 며 감탄했다고 한다.[28]

2005년 7월 차남인 이구 역시 자녀 없이 사망함으로써 이방자의 직계는 그대로 끊겼다. 이후 이구의 호적상의 양자로 이구의 명목상 지위를 계승한 이가 이원.

이방자 여사의 생전 모습을 알고 싶다면 당시 뉴스데스크 보도를 참고하자. 참고로 본 뉴스의 앵커는 보면 바로 알아챌 수 있는 당시 MBC 기자였던 손석희 JTBC 사장이었다. 장례 현장 영상

[1] 말이 평민이지, 친가는 대재벌이며 외가는 옛 화족. [2] 나베시마 가문은 임진왜란 때 대규모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한 가문 중 하나이다. [3] 이방자가 재학 중일 때 가쿠슈인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새 교사(校舍)를 지은 것을 계기로 가쿠슈인 여학부는 여자가쿠슈인(女子學習院)으로 개편되었고, 패전 후 오늘날의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여자 고등과· 여자대학교 체제로 개편되었다. [4] 패전 이후 사립학교로 전환되었고 평민에게도 개방되었지만, 여전히 금수저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라고 한다. [5] 다만 특별한 행사나 축제 때만큼은 예외였고, 이런 날이면 학생들은 모처럼 마음껏 화려한 옷을 입고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6] 히로히토와 이방자는 1901년생 동갑에 공교롭게도 둘다 1989년에 죽었다, 히로히토(1901.4.29~1989.1.7)가 이방자(1901.11.4~1989.4.30)보다 6개월여 먼저 태어나서 3개월 반 전에 먼저 죽었다. [7] 당대 일본 상류층에서 황족의 딸은 이름에다 미야(宮)를 붙여서 호칭했고, 화족의 딸은 키미(君)를 붙여서 호칭했다. 나가코 여왕은 나가미야(良宮)라고 불렸다. 다만 황족도 화족도 아니었던 덕혜옹주는 도쿠에히메(德惠姬)라고 불렸다. [8] 사촌 여동생 나가코 여왕 가쿠슈인 여학부 중등과 재학 중에 황태자비로 간택된 후, 결혼 준비 및 비(妃)로서의 교육을 받기 위해 학교를 중퇴했다. 패전 이전의 가쿠슈인 여학생들은 모두 황족이나 화족의 딸이었고, 결혼 준비를 위해 중퇴하거나 상급 단계로의 진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9] 이방자는 3번 임신했지만, 1번의 유산과 2번의 출산으로 아들 둘을 낳았다. [10] 가쿠슈인은 황족과 화족의 자제들을 위한 학교였으므로, 학생들은 등하교 때마다 시종들을 거느리고 다녔으며, 교내에는 시종들의 대기실도 있었다. 시종들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대기실에서 주인을 기다리며, 중간 중간 쉬는시간마다 잔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 [11] 첫째 아들로, 후술되어 있지만 태어난 지 7개월 후인 1922년 순종황제에게 인사차 경성에 왔다가 갑자기 병으로 급사했다. [12] 푸이의 경우 남색을 즐긴다는 소문이 도는 등 동성애를 의심받았던 인물이라 이성관계가 영 신통치 않았다. 실제로 푸이는 청나라, 만주국은 물론 국민당이 국부천대하고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한 이후에도 살았을 정도로 장수했지만 끝내 자식은 없었다. 푸이의 마지막 아내 리수셴은 동성애설을 부정하고 불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3] 당시 명칭은 보관모란장 [14] 실제로 이복 여동생인 덕혜옹주를 위해 가난해진 시절에도 거액의 병원비를 지원해준 걸 볼 때 주변 사람에게 상냥한 사람이었던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15] 물론 채 돌이 지나지 않은 어린 아기에게 갑작스러운 장거리 여행은 상당한 무리였고, 이 때문에 급사했다는 게 가장 현실적인 설이기는 하다. 다만 정황상 독살설도 있기는 하다. 이에 의하면 범인은 한국 황실의 대를 끊으려고 한 일본 군부 강경파였다는 설과, 한국 황실의 적장손이 일본인 혼혈이라는 것을 용납치 못한 한국 황실 내부 소행이었다는 설로 이야기가 갈린다. [16] 이방자의 어머니인 이츠코 비의 이복 언니. 이방자의 외할아버지 나베시마 나오히로는 우메타니 타메코(梅溪胤子)와 결혼하여 딸 사에코(朗子)와 아들 나오미츠(直映)를 낳았으나 우메타니 타메코가 죽은 후 히로하시 나가코(廣橋榮子)와 재혼하여 이츠코 등 4남 4녀를 더 낳았다. 우메타니 타메코와 히로하시 나가코 외에도 아사치요(朝千代)라는 측실에게서 도시코(俊子)라는 딸도 하나 낳았는데, 도시코의 딸 마츠다이라 요시코(松平佳子)는 훗날 의친왕의 장남 이건과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17] 산모의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유산은 21세기에도 자주 있는 일이다. 의학 기술로도 스트레스는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 [18] 상술했듯 지진의 위력이 강해서 지반이 변형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집을 다시 짓는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19] 이때 이름도 한국식으로 고쳤는데, '마사코(方子)'의 한국어 발음인 '방자'로 고쳤다. 한자는 그대로고 발음만 고친 것. [20] 장면 내각 당시 장면 총리는 영친왕에게 주영대사직을 권유했으나, 이미 그즈음 영친왕은 뇌일혈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고사했다고 한다. [21] 당시 국적법에 따르면 혼인에 의해 조선적(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호적)을 취득했으므로 해방 이후에도 조선 국적을 가졌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면서 한국 국적을 잃은 것이므로, 이방자 여사 입장에서도 국적회복이 된다. [22] 설립 당시 자행회, 지적 장애인을 위한 시설. [23] 언어장애와 소아마비 환자를 위한 시설로 출발. 영친왕의 아호 명휘(明暉)을 따서 '명휘원'이라고 부르다가 이후 기존 명휘원(明暉園)의 '명(明)'자에 이방자 여사의 아호 가혜(佳惠)에서 '혜(惠)'자를 따 명혜학교로 개칭, 교사는 서울시 종로구에서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을 거쳐 지금은 안산시로 이전했으며, 1985년 가톨릭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 운영을 맡겼다. [24] 드라마 <무지개를 이은 왕비>에서는, 남편인 영친왕의 유지를 받든 것이라고 소개된다. [25] 이 시기 언론에서는 덕혜옹주도 그렇고 이방자 여사도 그렇고 '영면에 들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26]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순정효황후 윤씨와 영친왕의 장례가 있었지만 두 사람의 장례는 기록으로 남지 않은 상태이다. [27] 다카히토 친왕은 이방자 여사와 촌수상으로 가장 가까운 황족이었는데, 1989년 4월 당시 다카히토 친왕의 형인 히로히토(1989년 1월), 야스히토(1953년) 및 노부히토(1987년)는 이미 고인이었기 때문이다. [28] 평민이 된 지금도 구황족 및 화족의 콧대는 여전히 하늘을 찌른다. 법적으로는 완전히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틈만 있으면 황가의 일에 간섭하려고 하고, 과거엔 황태자비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온갖 구박을 해대기도 했다.(심지어 미치코 상황후는 말이 평민이었지 재벌 가문 출신에 화족 혈통도 섞인 다이아 수저였다.) 게다가 이왕가는 지위도 지위지만 당대 기준으로도 막대한 재산을 운용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반면, 한국 주재 기업가 부인들은 물론 상당한 부유층이긴 하겠지만 일개 평민일 뿐이니 서로 살아간 문화가 다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