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4 15:14:16

이능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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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고려 호족과 군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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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191970> 이능일
李能一
생몰년 ? ~ ?
공신호 개국벽상좌명공신(開國擘上左命功臣)
품계 삼중대광(三重大匡)
관직 사공(司空)
봉작 성산백(星山伯)
작호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본관 성산 이씨
초명 능필(能弼) 혹은 능(能)[1]
정처 정순궁주(淨順宮主)
장자 좌윤(佐尹)[2] 이일권(李逸卷)
장손 제능령(諸陵令) 이광연(李光演)

1. 개요2. 생애
2.1. 무격 성격 및 관련 설화 2.2. 조물성 전투와 일리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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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말~ 고려 초기에 활동했던 호족으로 본피현(本彼縣)[3], 지금의 성주군 근방을 다스렸다. 초명은 이능필(李能弼)로 표기되며, 고려 개국 때 세운 공으로 왕건에게 삼한일통의 일(一)을 하사받아 이능일이 되었다. 삼중대광과 삼공 중 하나인 사공에 올라 왕건의 정순궁주(淨順宮主)를 처로 맞이해 부마도위가 되었고, 훗날 성산백에 추봉되었으며 성산 이씨의 시조이다.

2. 생애

2.1. 무격 성격 및 관련 설화

사람에 따라 이 성산(星山)이라는 명칭을 이능일이 지녔던 호족적 성격과 연관짓기도 하는데, 경산지 권4 인물조에 실린 이능일은 성황당에서 제사를 지내던 사람이라는 기록[4]을 보면 이능일은 장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산의 제주(祭主)까지 겸했던 호족으로서, 후삼국시대가 고대와 중세의 과도기였던 만큼 당시 경산이 제정일치적인 체계가 남아있던 사회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때문인지 성주의 사창(司倉, 관아)도 이능일의 소거지(所居地, 생가)와 신정(神井)의 터에 건립됐고, 성주 지방에서 주민들도 이능일을 신앙시해 향사했는데, 이능일과 그의 우물 이공신정(李公神井)에 연관된 설화들도 전해내려 온다. 대표적으로는 성주목사 신학(申㶅)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생전에 쓰던 우물 터가 더럽혀졌다며 깨끗이[5]하라고 겁박(...)했던 설화가[6] 존재한다.

심지어 성주목사 김윤제가 음사(淫事)라며 이능일 목상을 신주로 제사지내던 성황당을 불태웠던 일화에서는 관아 안에 역질까지 돌았다. 결국 김윤제가 목욕제계하고 글을 지어 올리며 제사를 지내고, 성황당이 있던 자리에 성황사[7]를 짓고 나서야 역질은 가라앉는다. 현재 성주성황사는 소실되어 없고, 해당 자리는 홰나무[8] 고목이 위치해 있다. 그 아래로 성황사 터의 유래를 알리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어 찾아가 보는 것도 가능하다.

후한 말 알자복야(謁者僕射)였던 배무 이각을 토벌한 것이나 오두미교의 교주였던 한중의 장로, 한국사에서 나타나는 남해 차차웅 등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처럼 호족 및 장군이었던 이능일이 동시에 제주(祭主)이자 무격(巫覡) 성격을 띠는 것은 동양사에서 특이한 일이 아니다. -사실상 동양사에서 군왕 외에는 제사를 지낼 수 없다.- 멀리 볼 것 없이 동시대 소율희 또한 비슷한 성격의 호족이다.[9][10]

신뢰성은 낮지만, 제주목사 이원조를 추적하는 《제주시대》 칼럼에서 이경화는 가야 금관국 왕족 계통이었던 김유신의 사례와 같이, 이능일 또한 이전부터 그 일대에 유세를 잡고 있던 벽진국의 왕족 계통이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이외의 기타 문건에도 경산 지방에 토착 세거해 온 사족(士族)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성산(星山)은 이능일의 무격(巫覡) 특징이 아니라 벽진[11]이란 전례의 지역명을 따른 것으로, 음차인 벽진은 이총언에게, 본 뜻의 훈차는 이능일에게 간 것이 된다.

물론 벽진국 왕족설을 차치하고 본관은 본적과 관향에 기초하는 만큼,[12] 성산은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 확실하다. 성산지에는 "이능일은 성산인이다"란 기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본피현 호족인 이능일의 출신은 성산현(星山縣)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13] 참고로 이능일의 공으로써 경산부에 합쳐져 승격한 곳은 성산(星山), 적산(狄山), 수동(壽同), 유산(濡山), 본피(本彼) 5개 현이다.

앞서 언급된 이총언의 문중은 이능일의 문중과 함께 성주에 난 두 이씨가 있으니 하나는 벽진장군 이총언(李悤言)의 후예며, 다른 하나는 사공 이능일(李能一)의 후예라는 기록이 있어,[14] 조선시대까지도 성주 지방을 양분했던 유력 가문이었음이 문헌으로 남아있다.[15] 이러한 두 인물 중 이능일이 성산의 성황신으로 모셔진 것은 일반 백성들에게 이능일의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었는지 귀납할 수 있게 하는 사례다.

2.2. 조물성 전투와 일리천 전투

과거 일리천 전투에서 배최언과 육백 병사를 이끌었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16]가 많으나, 이는 조물성 전투에서의 기록을 오인한 것이다. 정작 일리천 전투에서는 고려사 세가 권2 태조 19년 9월조 고려사절요 권1 태조 19년 9월조에 공통적으로 대장군인 대상 공훤(公萱)과 원윤 능필(能弼), 장군 왕함윤(王含允) 등에게 기병 300명과 여러 성에서 모은 군사 1만 4700명을 이끌게 하여 삼군의 원병(爲三軍援兵)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남아있기에, 다른 두 장수와 함께 일만오천의 대군을 이끈 것이 확인된다.

이능일이 배최언과 육백 병사만 이끌고 견훤군과 맞선 기록으로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권18 인성질장일자조(人聲質章一字條)에 본부장군 이능일이 최언등과 더불어 육백인을 이끌고 태조를 도와 견훤을 토벌했다는 기록과, 성산지 권3 인물조에 이능일이 견훤란 때 최언 등과 더불어 백제를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견훤란은 보통 "견훤란에 경애왕이 피시하고 국토가 소탕되어……"라는 식으로 언급되는데, 포석정에서 경애왕이 목숨을 끊은 것이 927년, 그 시초로 견훤이 군사를 이끈 때가 925년의 조물성 전투다. 더구나 일리천 전투 시기는 견훤이 이미 고려에 투항한 이후이기에 견훤군을 토벌했다는 서술이 어긋난다.

경상도지리지 성주목관조(星州牧官條) 또한 경산부장군 이능일(李能一), 배신예, 배최언 등이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합할 때 천수 을유년 병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도와 백제에 승리했으며 그 공으로 능일을 벽상공신 삼중대광에 봉했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천수 을유년이란 태조 8년, 즉 조물성 2차 전투 시기와 같다. 훗날 이 공을 들어 본피현과 유산현 등 5현을 묶어서 경산부로 승위했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는 만큼, 시기가 더욱 정확하다. 이전까지 존재하던 일리천 전투에 대한 서술은 을유년을 태조 8년이 아니라 18년으로 잘못 계산했거나, 조물성 전투가 고려군이 승리한 전투로 보기는 어렵기에 생겼던 술자의 오독으로 보인다.

이를 미루어 보아 "이능일은 성산인이다. 고려개국 벽상공신으로 벼슬이 삼중대광 사공 성산부원군[17]에 이르고……"라는 기록은 이능일이 삼한일통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조물성 전투 이전, 상당히 이른 시기에 고려군으로 합류한 개국 공신이라는 의미로 이어진다.


[1] 고을 사람들이 사우(祠宇)를 세워 모셨다는 경상도읍지 기록 등에서는 능(能)까지만 표기되어있다. [2] 고려는 건국 초기 독자적인 공적 질서체제를 운영했다. 그중 좌윤(佐尹)은 태봉 때부터 이어받아 사용한 관계(官階)로서, 고려 왕권에 복속한 친고려적 정치집단인 호족에 내려지던 문무관 위계(位階)이다. 왕건은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했는데, 좌윤이 비관인층과 지방 호족에게 제수되는 위계임을 감안해 보면, 2대인 이일권은 관직에 나아가기 보다 호족으로서 봉토를 다스렸음을 알 수 있다. 성씨닷컴에서는 종3품 좌윤장군이라 소개하고 있는데, 고려 초기 좌윤은 종5품으로, 이는 고려 후기 공민왕 때부터 시행된 삼사좌윤과 혼동해 한국뿌리문화보존회 측이 잘못 기재한 것이다. [3] 본피현은 이능일이 조물성에서 공을 세운 뒤 다른 4개의 현(縣)과 합해져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했다. 이때 경산(京山)은 서울 경(京)을 쓰며 지금의 경산시(慶山市)와는 한자가 다르다. [4] 다만 경산지 제4권에 실린 원문 李能一卽城隍堂所祀者은 일반적으로 이능일이 성황당에서 제사를 지냈다로 해석 되지만, 이능일은 성황당이 제사를 올리던 사람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전자라면 이능일이 경산의 제주(祭主)임을, 후자라면 성황당에서 성황신으로 모셨음을 기록한 말이다. 해석을 차치해도 이능일의 집이 사후 사창(司倉)이 되었다가 절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성산 일대 주민들이 성황사(城隍祠)를 세우고 이능일의 초상(肖像)을 모시며 국가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해 왔기에, 경산지가 집필되던 조선중기와 동제를 지내던 근대까지 이능일이 성황신으로서 모셔졌던 것은 확실하다. [5] 무속에서도 치성, 즉 신앙 행위를 하기 위한 정안수는 상당히 중요하며, 이를 위하여 이른 새벽에 길은 우물 물을 정화수(井華水)라 부른다. [6] 결국 신학은 현판까지 달며 신정을 준설했다. [7] 이로써 성주군의 주된 신앙이 무속신앙에서 불교로 옮겨진 것을 알 수 있다. [8] 사족으로 홰나무는 한자로 槐라 쓰는데, 공교롭게도 태위•사도•사공의 삼공 직을 뜻한다. 또한 상형 조자(造字)에서 짐작되듯이 벽사(辟邪)하는 길상목(吉祥木), 액귀(厄鬼)를 물리치는 나무라 알려져 있으며, 그 열매가 부적을 만드는 괴황지의 재료로 쓰이고, 무당들이 굿을 올리는 나무이기도 하다. 성주는 이런 홰나무가 많아서 성주 향교의 회화나무나 정월대보름 회화나무 동제가 유명하다. [9] 이러한 내력의 영향인지 이능일의 손자인 이광연(李光演) 또한 제릉령(諸陵令), 즉 제릉서(諸陵署)의 영(令)에 올랐다. 제릉서는 고려시대 제왕(諸王)의 능을 관리하며 수호하는 일과 제사를 맡았던 관서다. [10] 삼국유사 소충자의 기록을 보면 소충자가 금관고성(김해)을 차지한 후 그의 부하인 영규가 김해 김씨로부터 수로왕에 대한 제사 권리를 박탈했다가 저주를 받아 죽고, 결국 수로왕의 후손인 규림에게 그 제사 권한을 돌려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학계에서는 이를 토대로 신라말 할거하던 호족들 중에는 군벌, 거상, 토호 외에도 토착 신앙을 관장하던 세력도 존재했다고 해석한다. [11] 벽진은 진변한 고어로 볏(별)의 훈차로서, 마찬가지로 벽진국을 고려에서는 성산가야라 통칭했다. 참고로 본피현은 신라가 벽진국을 무너뜨린 뒤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12] 선우씨 사마씨 등 예외적인 경우가 존재한다. [13] 마찬가지로 성산지가 쓰이던 시기를 기준으로 성산에 난 인물이란 해석이 유력하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성산 영역은 동쪽으로 대구부의 경계까지 26리이고, 칠곡군의 경계까지 24리이다. 남쪽으로 고령군의 경계까지 49리이고, 옛 현풍의 경계까지 54리이다. 또한 경산지에는 이능일은 경산인이다라는 기록도 존재한다. [14] 대동운부군옥 권 9 상성지장리자조(上聲紙章俚字條) 기사. 원문은 星州李有二派一則碧珍將軍李悤言之後又有司空李能一之後이다. [15] 벽진 이씨 어르신 중에서 성산 이씨와 벽진 이씨는 과거 남매 간에 갈라진 집안이라 들으셨다는 구술이 있는데, 성주육이씨(星州六李氏)가 동성동본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사실을 보면, 성씨를 제수받기 이전부터 이총언의 벽진 이씨, 이능일의 성산 이씨는 실제 가까운 집안이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16] 다음 카페나 블로그 등지에도 일리천 전투로 잘못 퍼져 있다. [17] 高麗開國壁上功臣三重大匡司空星山府院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