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19:00:22

육식금지령


1. 개요2. 역사3. 영향4. 회피5. 비슷한 사례6. 매체에서의 묘사7. 여담

1. 개요

675년 덴무 덴노가 육식을 금하도록 선포한 명령으로, 1872년 메이지 덴노가 해제할 때까지 약 1200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에는 몰래몰래 고기를 먹었지만 나중에 가면 정말로 고기를 안 먹게 되면서 고기를 먹는 문화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즉, 고기를 먹지 못한 게 아니라 정말로 고기를 먹지 않게 된 것. 근대화 이전까지는 육식 문화가 거의 전멸해버렸다. 그나마 약이라 하여 조금 고기를 먹는 정도에 그쳤을 따름이다.

2. 역사

庚寅. 詔諸國曰. 自今以後. 制諸漁獵者. 莫造檻穽及施機槍等之類. 亦四月朔以後. 九月卅日以前. 莫置比滿沙伎理梁. 且莫食牛馬犬猿鷄之完. 以外不在禁例. 若有犯者罪之.
경인(17일)에 제국(諸國)에 조를 내려 “금후 각종 어업, 수렵에 종사하는 자에게 금하노니 올무를 놓거나 함정을 파는 일, 기계를 이용한 창 놓기 등의 행위를 하지 말라. 또 4월 1일부터 9월 30일 이전까지 어린 고기를 잡는 것을 하지 마라. 또 소, 말, 개, 원숭이, 닭의 고기를 먹는 것을 삼가라. 이 이외에는 금례에 들지 않는다. 만약 이를 어기는 일이 있으면 벌을 내린다.”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29, 덴무 4년(675년) 4월 17일 # 영인 페이지[1]
당나라· 백제를 통해 일본 불교가 유입되어 신토와 함께 자리잡자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 교리에 따라 675년 덴무 덴노는 농경 기간 동안 , , , 원숭이, [2]의 섭취를 금지했다. 헤이안 시대 이후 덴노의 영향력이 극감했지만 이 명령의 효력은 오래토록 유지되었는데, 오랜 기간 불교 국가였던 것과 맞물려[3] 일본의 문화로 정착한 것으로 생각된다.

메이지 덴노가 즉위하고 메이지 유신을 선포함에 따라 전통으로부터 단절을 선언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임에 따라 육식금지령도 1197년만에 해제되었고 천황이 직접 공개적으로 고기를 먹었으며 이를 알렸다. 다만 1000년 넘게 이어져온 전통이라 반발이 심해 자객이 궁궐에 침입할 정도였다.[4] 전통도 전통이지만 오랜 기간 고기를 먹지 않다 보니 고기 특유의 누린내에 대한 거부감도 컸다. 그래도 스키야키,[5] 돈까스[6] 경양식이나 일본식으로 개량한 고기요리를 먹어 서서히 고기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나갔다. 소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과장광고가 나왔을 정도로 이전과는 달라졌다. 고기를 먹는 행위가 문명화된 사람의 상징처럼 통하는 분위기도 있었을 정도였다.

오랜 기간 유지되어 식문화에도 영향을 줄 정도였지만 오늘날에는 일본 사람들도 고기를 잘 먹는다. 근래에 일본에서 유행하는 한국 요리에도 육류가 많은 편이다.

3. 영향

육식금지령으로 인해 일본인들은 계란, 채소, 곡물 위주로 식사했다. 단백질 섭취는 아니면 주로 생선 같은 수산물을 통해 이루어졌다. 애초에 법령에 생선은 포함되지 않았고 당시엔 생선과 고기는 엄연히 다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고래고기도 마찬가지이다. 생물학적으로야 고래는 포유류지만 당시 사람들은 물고기라고 생각했다. 페스키테리언(pescetarianism) 계열의 채식주의를 한 셈이다. 일본인들이 고래 고기에 집착하는 것도 이 정책의 영향일 수 있다.

동물을 키워도 잡아먹을 용도로는 키우지 않았다. 소는 오직 농사에만 사용했고 말은 교통수단으로만 사용했으며 닭은 알람시계, 계란 생산에만 사용했다. 그리고 만약에 키우다가 죽으면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고 기름을 짜내 불붙일 때 사용했지만 절대로 살을 발라내 먹지 않았고 나머지 부위는 땅에 묻었다. 11대 조선 통신사(1763년)의 일행 중 한 명이었던 원중거(元重擧, 1719∼1790)는 에도시대 당시 육식을 하지 않는 일본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여섯 가지 가축(소, 말, 양, 닭, 개, 돼지)을 먹지 않으며 집안에서도 키우는 마축이 드물다. 풍속에서 도살을 기피하는데 개나 말이 가장 심하다. 가축이 죽으면 모두 땅에 묻는다. 소가 만약 병들어 죽으면 태워서 기름을 취하여 등(燈)을 태우는 데 쓴다. 이런 일은 천한 자들로 하여금 맡아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꺼려서 나가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즉시 그 나머지 살과 남은 뼈를 땅에 묻는다. 혹 병자의 약으로 쓸 경우에는, 소를 낭떠러지 위에 세워 놓고 밧줄로 끌어서 거꾸러뜨려 추락사하면 적당히 약용을 취하고 그친다. 나머지도 죽은 소의 예와 같다.
집돼지는 가정에서 키우는 것이 전혀 없다. 우리 사행을 위하여 멧돼지를 산채로 잡아서 보내주었기에 잡게 하여 음식으로 하였다. 닭 또한 드물게 키우는데 그 키우는 자들은 단지 때를 알려주는 것만 취할 뿐이요 음식으로 먹기 위한 것은 아니다.
화국지(和國志, 1763?) - 음식(飮食) 편[7]
매우 오래 전에 내려진 명령이고 '육식 금지'라는 폭이 너무 넓기에 정말로 곧이곧대로 지켰을까 싶지만, 아래 언급한 몇몇의 회피 사례를 제외하면 육식을 꺼리는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이어져온 듯하다. 위의 조선 통신사 일행의 기록에서 보듯 외국인인 조선 사람도 일본인의 육식 금지를 언급하고 있으며,[8] 비슷하게 18세기에 출간된 일본의 백과사전 화한삼재도회에서도 "우리나라(일본) 사람들은 고기를 피한다"라는 내용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1200년 가까이 지속된 명령이었기에 당연히 일본 식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양갱(羊羹)이란 원래 이름대로 양고기에서 나온 선지로 만든 요리였는데[9], 일본에서 선지를 으로 대체해서 만든 것이 현재의 일본식 양갱이 되었다. 만두 중국은 두꺼운 피에 여러 고기, 야채, 향신료를 넣어 주식으로 먹고 한국은 얇은 피에 고기, 야채, 두부, 당면[10]을 넣어 반찬으로 먹지만 일본은 밀가루 피 안에 팥앙금을 넣어 간식으로 먹었고, 이것이 만쥬이다. 그 외에 양갱과 유사한 과자류로 규히(求肥)라는 것이 있는데 이 역시 중국에서 본래 牛脾라고 소 지라로 만든 음식이었던 것을 찹쌀가루로 대체하고 글자를 求肥로 바꾼 것이다.

또한 전근대 일본인들의 평균 키는 남녀 모두 한국인들의 평균 키보다 약 5cm 정도는 작았고, 현재도 일본인들의 평균 키는 한국인들의 평균 키보다 2~4cm 정도 작은 편인데 육식금지령의 영향이 있으리라 보기도 한다. 일본인들의 턱이 주변민족에 비해 갸름하고 그에 따라 덧니같은 부작용이 흔한 것 역시 이 육식금지령의 영향이라는 연구도 있다.

일본에서 십이지 돼지(ぶた)가 아닌 멧돼지(いのしし)인 것 역시 육식금지령의 영향인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에서 멧돼지를 기르기 시작한 것이 일본서기에는 600년대 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11] 이 시기에 육식금지령도 이루어졌으니 집돼지로의 개량이 활발히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위 화국지 기록에서도 돼지가 아니라 멧돼지를 잡아서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육식 자체를 쉬쉬하는 문화다 보니 육식을 위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도축업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한국에서도 ' 백정'이라는 말이 비하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기를 먹는 문화권이니 어떻게든 곁에 끼고 살아야 하는 이들이었지만 일본에선 "먹어서는 안 될 것을 죽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4. 회피

고기 문서에서도 보듯 '육식 금지'는 너무나 폭이 넓기 때문에 여러 회피 수단이 등장했다. 집권층은 약재용이니 뭐니 이런저런 꼼수로 고기요리를 즐겼으며 일반 백성들까지도 다양한 편법으로 법망을 피해 고기를 즐겼다. 가령 오리고기는 물에서 나오니 생선이라는 식으로, 멧돼지고기는 산에서 나오니 고기가 아니라 채소라던지 산에 사는 고래이므로 생선이라던지. 굶주림에 몰래 도축해 먹거나, 신분에 상관없이 질병 치료형식의 약으로 삶거나 구워서 먹는 경우도 많았다. 육포의 형태로 말린 것을 환약처럼 만들어서 조선의 비법이라면서 '조선우육환'(朝鮮牛肉丸)이라고 만들어 팔기도 했다. #

역사적 인물들 중에서도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이들이 꽤 있다. 전국시대때 오다 노부나가 엔랴쿠지를 공격하면서 "무슨 스님들이 매일 술과 고기를 먹으면서 비단옷을 입고 여자를 끼고 사냐?" 하는 투로 비판했고 승려로 출가한 다케다 신겐도 죽기 몇 년 전부터 약으로 매일 닭을 잡아서 삶아먹었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록도 있다. 참고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느 날부터 다케다 신겐의 전속 요리사가 닭을 잡지 않고 있다는 간자의 보고를 듣고 신겐이 죽었음을 눈치챘다고 한다.

다만 이런 식으로 먹어봤자 편법으로 남의 눈을 피해서 하는 짓이라 전반적으로 육식 문화는 엄청나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쉬쉬하는 요리이니 고위층들의 식단으로도 전면에 오를 수 없고, 고기 요리를 잘 한다고 누가 잘 대접해주긴커녕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니 고기 요리 방법이 발달하기 어려웠다. 단적으로 말해서 일본에는 제대로 된 토착 고기요리는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일본 고유의 고기요리라 할 만한 스키야키마저도 본래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두부, 곤약, 버섯 등만 넣어 만든 채식 요리였다가 나중에 고기가 추가된 것이다. 고기 냄새가 낯선 일본인이 이를 감추기 위해 달걀을 넣었다는 설도 있다. 근대기 발생한 고기 요리는 대부분 한식( 야키니쿠, 호르몬 등), 중식( 징기스칸 요리, 교자, 라멘 등), 양식( 돈가스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5. 비슷한 사례

고려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문화가 쇠퇴했다. 다만 일본처럼 정부가 나서서 금지하는 건 아니고 대놓고 육식하는 것을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생긴 정도. 이 때문에 도축기술이 쇠퇴해 중국 사신에게 대접할 고기를 두들겨 패거나 절벽으로 떨어트리거나 산 채로 불태우고 핏물도 제대로 안 뺀 것을 대충 구워서 만들 정도였다고. 그러나 이는 고려 초기였고, 유목민족인 원나라의 간섭을 받은 후기에 이르러서는 육식이 성행하였으며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조선은 숭유억불로 불교 문화를 탄압했기에 오히려 육식이 더 융성해졌다.[12]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 조선 침공을 위해 전국에서 군사들을 징발해 시모노세키 군항으로 집결시켰는데, 당시 시모노세키는 복어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징병된 군인들은 당연히 전국각지에서 모인 이들이었기에 바다를 접해보지 못한 이들이 많았고, 이때문에 제독 기술이 부족한 군인들이 복어의 독을 완벽히 제거하지 못하고 요리해먹다가 조선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죽어나자 복어금식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는 에도 막부에서도 유지됐다가 근대화 이후 이토 히로부미가 해제했다. #

6. 매체에서의 묘사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의 일본은 육식금지령을 반영하여 게임 내에서도 동물의 도축과 사냥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본은 일본만의 특수건물을 지으면 동물 가축이 그 주변에 모여들어서 모여들어 있는 동물의 수만큼 자원이 쌓이는 구조로 되어있다.
    문제는 컴퓨터와 동맹을 할 경우 컴퓨터 동맹군의 주민들이 멋대로 우리 영토로 들어와 도축하고 채취해가는 일이 발생한다. 사람과 동맹해도 마찬가지 동맹이 멋대로 주민으로 도축해가면 막을 방법이 없다.
    다만 자동으로 그냥 막 자원이 올라가는 구조 자체가 좀 일뽕이다 싶을 정도로 사기적인 면이 있다. 에이지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후반으로 갈수록 자원이 고갈되어 몰빵전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일본처럼 자동으로 올라가는 치트키스러운 구조로는 쭉 농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밸런스적으로는 양해할 만한 페널티이다.
  •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장 파스파르투가 일본을 구경할 때 육식금지령에 관련된 언급이 잠시 나온다.
    는 일본의 푸줏간에는 양고기나 염소 고기, 돼지고기가 전혀 없다는 걸 알고 놀랐다. 또 일본에서는 소를 오직 농사짓는 데만 쓰고, 소를 죽이는 것을 불경한 일로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쇠고기가 매우 귀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결론지었다.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쇠고기는 없다 해도 멧돼지나 사슴, 꿩이나 자고새, 가금류 또는 일본인들이 쌀과 함께 거의 주식으로 삼다시피 하는 생선이라도 먹을 수 있었다면 만족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불운을 견뎌야 했다. 양식을 구하는 일은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쥘 베른, ' 80일간의 세계일주' 중에서. 시공주니어 김주경 번역본(1872년)

    위는 장 파스파르투가 돈도 없이 일본에 상륙해 식량을 찾아나서는 장면이다. 1872년에 나온 소설인데 메이지 유신 이후지만 아직 육식금지의 영향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7. 여담

  • 일본서기의 기록을 잘 보면 ', , , 원숭이, '을 금한다고 되어 있는데 오늘날에는 그다지 먹지 않는 원숭이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오히려 현대인이 식용하는 육류의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돼지는 목록에 들어가 있지 않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서 돼지고기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다. 때문에 후대에 '육축을 금지한다'라고 할 때의 '육축'에는 원숭이가 빠지고 대신 돼지와 양이 들어가있다. 돼지는 확실치 않지만 은 분명 600년대 일본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1] 왼쪽 페이지, 오른쪽에서 2번째 줄부터이다. [2] 여기에 원숭이를 빼고 돼지, 을 더해 육축六畜(소·말·양·돼지·개·닭)을 금지했다고도 종종 언급된다. [3] 대승 불교에서 육식을 금하게 된 것은 보통 양무제가 517년 내린 단주육문(斷酒肉文)으로부터인 것으로 본다. [4] 이들은 체포되고 나서 "일본은 신의 나라인데, 외국인들처럼 고기를 먹으면 타락할까봐 두려워서였다."라고 동기를 밝혔다. [5] 고기를 얇게 썰고 날계란물에 찍어 먹어 그나마 익숙한 비린맛인 계란 비린맛으로 육향을 가렸다. [6] 고기를 얇게 피고 튀김옷으로 완전히 덮어버려 육향을 가렸다. [7] 번역은 "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박재금 역, 소명출판, 2006"을 그대로 옮겼다. 번역서 기준 308쪽에 해당 내용이 실려 있다. [8] 위의 기록에서도 보이듯이 외국 사신에게는 고기 요리를 대접했는데, 고기 요리법이 발달하지 못했다보니 누린내와 같은 잡내를 전혀 잡지 않아 먹는게 고역이었다고 한다. [9] 원래 갱(羹)이라는 글자의 뜻 자체가 고깃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10] 당면이 전래된 이후. 한국에 당면이 들어온 건 일제강점기 때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이전의 정통 한국 잡채는 문자 그대로 채소와 나물을 섞어 만든 것이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양을 불리기 위해 당면을 섞은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한복려 여사의 어머니 황혜성 여사의 스승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주방상궁으로서 조선궁중요리 초대 기능보유자(일명 인간문화재)였던 한희순 여사는 늘 당면잡채를 '가난뱅이 잡채'라고 깎아내리면서 제자 황혜성 여사에게도 '가난뱅이 잡채'는 절대 만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을 정도였다. [11] # [12] 단, 소가 여전히 농업국가의 주요 자산이었기 때문에 고기를 얻기 위한 도축을 금지해서 대놓고 쇠고기를 먹지는 못했다(물론 편법으로 먹을거 다 먹었다). 숭유억불의 영향으로 육식이 더 보편화된 것과 반대로 문화는 불교색이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오히려 주춤했고, 조선의 차 문화는 후기에 와서야 다시 부흥했다. 차례도 원래 고려시대까지는 문자 그대로 차를 올리는 것이었는데 조선시대부터 차가 술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