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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의 우드스톡 페스티벌 공연모습 | 공식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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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웹사이트.미국의 록 페스티벌 중 하나. 다만 후술되어있듯 매년 주기적으로 열리는 페스티벌은 아니다. 정식 명칭은 Woodstock Music & Art Fair이다.
2. 역사
전세계 모든 락 페스티벌의 시초로, 1960년대 후반 미국을 휩쓸었던 히피 문화의 절정 시절에 탄생했다.2.1. 제1회 페스티벌
처음엔 1969년 8월 15일 ~ 17일까지 3일간 미국 뉴욕주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뜨거운 관객들의 호응으로 1일 연장되어 총 4일간 개최되었다. '우드스톡'[1]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뉴욕주 얼스터 카운티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본래 여기에서 행사를 열려고 했기에 페스티벌의 이름에 우드스톡이라는 명칭이 붙었다.하지만 우드스톡 주민들의 반발과 정부 당국의 규제로 공연 부지 선정에 어려움을 겪는 바람에 공연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다가 이 소식을 알게 된 막스 야스거(Max Yasgur)라는 농장주가 73만평에 달하는 자신의 농장 부지를 제공하여 개최될 수 있었는데, 여기는 사실 우드스톡에선 약 100km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또한 애초에 공연장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드스톡은 음향 시설은 물론 화장실이나 급수시설 등 위생 시설이 제대로 설비되지 않았다. 그래서 페스티벌 중에 있었던 폭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공연장이 거대 진흙 뻘이 되기도 했는데 히피들은 낙천적이게도
32팀의 밴드가 무대에 올랐으며, 공연 입장객만 최소 30만에서 최대 40만 명까지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중 절반은 펜스를 부수고 무임승차했기 때문에 정확한 입장객 수는 알 수 없다. 티켓 판매 수입이 지미 헨드릭스의 32,000달러 개런티 등 출연료와 무대 시설 비용에 미치지 못해 공연 자체는 13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적자를 기록하지만, 이후 기록물 영상 저작권 등으로 어마어마한 이윤을 창출해 결과적으로 대성공했다.
특히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이 제일 유명했는데, 지미 헨드릭스는 여기서 미국 국가를 즉흥연주하여, 이펙터를 사용해 폭격기, 폭탄, 사이렌, 사람들의 비명 소리 등을 연출해내며 베트남 전쟁과 미국을 풍자했다.
레드 제플린이 이 공연에서 설 예정이었으나 몇달 앞두고 취소했다. 당시 레드 제플린은 1집을 내고 활동을 한창 하던 때인데, 지미 페이지가 밴드 홍보를 위해 모든 러브콜에 오케이를 했다고 한다. 덕분에 멤버들은 잔뜩 지쳤고, 어쩔 수 없이 우드스톡 페스티벌 참가는 무산됐다. 같은 이유로 롤링 스톤스 로큰롤 서커스 출연도 고사했다.
2.2. 이후
1994년과 1999년에 각각 25주년과 30주년 기념으로 다시 페스티벌이 열렸으나, 1969년 때의 근본 정신이 사라졌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나마 1994년의 우드스톡 리바이벌 페스티벌은 크랜베리스, 그린 데이, 에어로스미스 같은 당시 핫한 밴드들과 베테랑들의 참여에 힘입어 꽤 괜찮은 평가와 흥행 성과를 냈고, 역대급 공연을 펼치고 마지막 무대에서 악기들을 모두 부숴버리고 퇴장한 사이프러스 힐을 위시해서 볼거리도 많았다.하지만 이 1994년의 성과에 고무되어 MTV가 적극 개입하여 키드락, 림프 비즈킷 등의 자극적인 밴드들을 라인업에 넣고 개최한 199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절도, 방화, 성범죄를 비롯한 이런저런 사고와 폭동이 발생해 아수라장이 되었다.(...) 1969년, 1994년 우드스톡에서도 개별적인 사건사고는 있었지만, 폭동 수준의 1999년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대규모로 한껏 들뜬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느슨해진 사람들을 노리는 소매치기는 으레 발생하기 마련이고, 30~40만명이나 모인 곳임에도 경비 인력은 소규모에 변변한 취사장이나 화장실도 갖춰지지 못한 곳이라 사건사고가 일어나기 쉬운 환경이긴 했다. 이 행사 덕분에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명성은 추락했고, 훌륭한 프랜차이즈가 될 수 있었던 우드스탁의 명맥도 오랜 기간 끊겨버렸을 정도였다. 자세한건 후술된 문단 내용 참조.
참고로 99 우드스톡이 끝난 지 3개월 뒤 코첼라 페스티벌이 첫 개최되는데, 99 우드스톡을 보고 반면교사 삼아 물과 주차가 무료로 제공되는 등[2] 행사 준비에 만전을 기해 축제가 잘 마무리되면서, 이후 북미 유명 음악 페스티벌로 거듭나게 된다.
50주년인 2019년에도 열려고 했으나 취소되었다. #
2023년 미국 우드스탁 벤쳐스에 공식 라이센스를 구입하여 국내에서 최초로 개최 될 예정이었으나 결국 개최되지 않았다. 후술된 문단 내용과 우드스탁 뮤직 앤 아트페어 2023 항목 참조.
3. 여담
만화 피너츠의 우드스톡이라는 이름은 이 축제에서 유래되었다. 등장 자체는 2년 전인 1967년에 나왔지만, 이름이 붙은 것은 이듬해인 1970년부터였다.4. 1969년
4.1. 라인업
4.1.1. 8월 15일
- 리치 헤이븐스 (Richie Havens)
- 스윗워터(Sweetwater)
- 버트 소머(Bert Sommer)
- 팀 하딘(Tim Hardin)
- 라비 샹카르
- 멜라니 사프카(Melanie Safka) : The Saddest Thing을 부른 가수
- 알로 거스리(Arlo Guthrie)
- 조안 바에즈
4.1.2. 8월 16일
- 퀼(Quill)
- 컨트리 조 맥도날드 (Country Joe McDonald)
- 산타나(밴드)
- 존 B. 세바스찬 (John B. Sebastian)
- 킵 하틀리 밴드 (Keef Hartley Band)
- 더 인크레더블 스트링 밴드 (The Incredible String Band)
- 캔드 히트(Canned Heat)
- 마운틴(Mountain) : 명 기타리스트 레슬리 웨스트의 그룹이다.
- 그레이트풀 데드
-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4.1.3. 8월 17일
- 더 후
- 제퍼슨 에어플레인
- 조 카커 (Joe Cocker)
- 컨트리 조 앤 더 피쉬 (Country Joe & The Fish)
- 재니스 조플린
- 텐 이어즈 애프터 (Ten Years After)
- 더 밴드
- 조니 윈터 (Johnny Winter)
-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 블러드, 스웨트 앤 티어스 (Blood, Sweat & Tears)
- 크로스비, 스틸스 앤 내쉬 (Crosby, Stills & Nash)
-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 (Paul Butterfield Blues Band)
- 샤 나 나 (Sha Na Na)
- 지미 헨드릭스
5. 1999년
5.1. 개요
1999년 7월 23~25일, 미국 뉴욕주 롬에 있는 전 그린피스 공군기지에서 열린 우드스톡 페스티벌.1999년의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1969년 선대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모욕하는 수준을 넘어, 20세기 동안 열린 전세계 음악 페스티벌 중에서도 손꼽히는 개막장 중의 개막장으로 일컬어지는 음악행사였으며 그 지독한 악명으로 인해 이후에도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1999년 이후로 충분히 훌륭한 프랜차이즈가 될 수 있었던 우드스탁의 명맥이 오랜 기간 끊겨버렸을 정도. 현재 코첼라를 비롯한 대형 행사나 국내 워터밤에서 경직적인 성향의 통제, 안전팀의 태도도 과장 좀 보태 이 우드스탁 99에서 얻은 결과물이다.
1999년 우드스톡은 30주년을 기념해 1969년을 주최하고 총괄했던 마이클 랭과 당시 메트로폴리탄 엔터테인먼트의 존 셰어가 공동으로 다시 개최했다. 당초 마이클 랭은 오랫동안 우드스탁을 되살릴 뜻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의 피스 앤 러브 정신과 플라워 파워가 다시 통할것 같지 않다는 이유였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위시로 총기 사고가 늘어나자 당시 10~20대 세대들에게 68세대 당시의 우드스탁 정신을 알리고자 개최를 하게 된다.
5.2. 준비 과정
1999년 우드스톡 행사장은, 1969년 당시의 넓은 대평원 대신 미국 뉴욕주 롬의 폐쇄된 상태였던 그리피스 미합중국 공군 기지가 개최지로 낙점되었다. 15,000명을 수용할 주거 부지와 도로가 있었고 보안 체계와 병원,소방서 등이 갖춰져 1994년에 했던 것 처럼 수백만 달러를 들여 시설을 구축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으며 1969년 우드스탁에서 있었던 대규모의 무단침입 사태를 막을수 있는 콘크리트 방벽까지 갖추고 있었다. 원년 우드스탁 당시 이 대규모 도둑 입장 때문에 주최측은 성황 대비 그리 흑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군 기지 특유의 콘크리트 방벽은 주최측 입장에서는 든든한(무단입장 방지) 시설물이었지만 그 특유의 살풍경함으로 인해 임직원들간에 리모델링 의견이 나왔고 합판을 댄 후 화가들을 불러다 각종 그림들을 그려 넣었다. 뜻은 좋았으나 이 합판들은 후술할 폭동에 아주 좋은 재료가 된다.당시 뉴욕의 롬은 그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도시였고 시장은 잉여부지라도 살려볼까 하는 심정으로 섭외에 응했다고 한다. 그 후 진수식의 패러디격으로 무대 골조에 타이다이 티셔츠(홀치기 나염. 히피의 상징이자 1969년 오리지널의 키워드)로 감싼 포도주 병을 부딪혀 깨려고 하나 아무리 천으로 감쌌을지언정 무려 10회정도 병을 휘둘러 쇠파이프에 겨우 깼다. 시장 술회에 따르면 이때부터 전조가 안 좋았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영상을 보면 성인 남성이 풀스윙으로 아주 세게 휘둘렀음데도 병은 기이할 정도로 깨지지 않는다.
개최를 확정하고 난 뒤 주최측은 세계구급 인지도의 아티스트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는데 당시의 흐름에 맞춰 하드락 또는 누메탈 밴드들이 다수였다. 내부에서도 섭외 명단을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묵살당했다고 한다. 당시 현장관리 부책임자였던 리 로젠블렛이 회고하길 콘, 림프비즈킷 같은 라인업을 보고 '사랑과 평화'라는 우드스탁의 취지에도 안 맞고 너무 선동적이며 분노 어린 음악을 하는 밴드들이라 라인업을 재고해야 할 것 같다고 임원 회의 중에 제안을 하였으나 가볍게 무시 당했다고 한다. 당시 22세였던 로젠블렛은 누메탈에 대해 잘 아는 세대였지만 일단 핵심인 마이클 랭과 기성세대 임원들은 콘이나 림프 비즈킷,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이 어떤 음악을 하는 밴드인지 관심조차 없었고, 일단 이유야 어찌 됐든 "돈 되는 밴드"를 섭외한 것이다. 새파란 애송이가 대선배이자 어른들 앞에서 훈수 두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버려 임원 전원이 쏘아보자 로젠블렛은 꼬리 내리고 바로 의견을 접었다고 한다.
이렇게 우드스탁 99는 이 거칠고 공격적인 성향의 누메탈 밴드들을 필두로 술과 마약에 절어버린 관객들과 이들이 미쳐 날뛰기에 아주 좋았던 통제불능의 밀레니엄 분위기, 무능한 운영에서 비롯되어 무너진 행사 내 치안과 제반사항이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며 막장의 길로 치닫게 된다. 당시 유료관객으로 집계된 인원만 웬만한 중소도시 인구 수준인 25만명에 달한다.
5.3. 해당 행사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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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적인 바가지
당시 주최측은 케이터링, 머천다이즈 업체들과의 1대1계약이 아닌 중간업체를 통한 계약을 맺었으며 입구에서부터 식수, 도시락 반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입구에서부터 관객들이 싸온 각종 음식과 식수들이 마구잡이로 압수당해 버려졌으며 이것들은 하절기 32~34도를 웃도는 뉴욕 롬의 날씨에 속절없이 썩어나가며 갖은 오염을 발생시켰다. 한마디로 우드스탁 주최사가 아닌 중간업체가 판매권을 독점했으며 무시무시한 바가지를 행사했던 것이다. 당시 시중에서 60센트 정도면 살 수 있었던 500ml 생수를 무려 4달러라는 현시점 기준에서도 미친 바가지를 씌운 것도 모자라, 금요일에 시작된 공연이 일요일날까지 진행되면서 품귀현상이 발생해 생수는 한 통에 무려 16달러선까지 가격이 치솟았다.
이에 참가 관객들은 심각한 불만을 가졌고 마지막날 벤더 빌리지(푸드코트)를 습격하는 폭동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한편
버드와이저 가든에서는 염가로 맥주를 비롯한 술을 뿌려댔고 미성년자이건 성년이건 확인조차 안하고 맥주 탭이 닳도록 술을 팔았다. 그리고 음료수 한 잔에 풀떼기가 전부인 샐러드 콤보가 당시 가격으로 9달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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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고 미숙한 진행 인력
3일간 진행되는 행사임을 고려할 때 위생팀을 직영으로 편성해서 상시 쓰레기들을 외부로 실어나르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이 역시 외주계약으로 수거트럭이 아주 가끔 오는게 다였고, 폭동이 일어난 토요일 오후부터는 무섭다는 이유로 행사장 내로 들어가길 거부했다. 쓰레기와 오물들은 방치되어갔고 폭염에 무섭게 부패하기 시작했다. 또한 관객들의 수에 비해 생리 현상을 해결할 만한 기본적 시설도 턱없이 부족했으며 분노한 관객들이 부순 상수도 라인에 노상방뇨, 대변, 이동식 화장실에서 흘러나온 분변이 섞이며 1차 세계 대전 이후로 발병 사례가 전무했던 이른바 "참호구강염"(Trench mouth)이 1990년대 뉴욕에서 발생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또한 진행측은 무더위를 이유로 열을 식힌다는 명목으로 현시대의 워터밤을 방불케 할 정도로 물을 뿌려댔고, 이렇게 뿌려진 물은 이동식 화장실이 설치된 잔디지대로 흘러갔다. 그리고 군중들이 부순 상수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 역시 화장실로 흘러들어갔고 수용량 초과로 인해 오물 섞인 물이 그대로 역류하여 반경 수 미터가 오물로 뒤덮여 버리는 참극이 일어났다.
그리고 경비인력 또한 무능하긴 마찬가지여서 10대 후반에서 20대 청년들로 구성된 팀이 존재했으나[3] 소수 인원인 것도 모자라 상당수 관객들은 이들의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 게다가 이들은 경비업 경험도 없고 일에 대한 책임감도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 적었다. 심지어 일부는 관객들의 방종을 넘어선 기행에 겁을 먹고 일부러 일을 안했다. 특히 마지막 날 레드핫 칠리 페퍼스 스테이지에서는 그나마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총기반대 단체와 연합하여 10만여 개의 양초를 나뉘어주고 촛불집회를 연출하려고 했지만 이는 대규모 폭동으로 번진다. 나름 행사장 내 흉기 및 화기 반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통제했던 행사였는데, 관객들이 미쳐버린 공연 막바지에 10만여 개의 불을 손에 쥐어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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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브 파티
어찌보면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만악의 근원. 취지는 주간 스테이지에서 여흥이 덜 풀린 관객들을 위한 대규모 야간 클럽이라는, 페스티벌 관객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할 프로그램이었다. 스테이지 공연이 끝난 후 야간부터 격납고를 개조한 파티장에서 레이브 파티가 개최되었고 취지는 정말 좋았다. 하지만 대낮부터 이미 술과 마약에 쩔어버린 4천여명의 관객들이 격납고 안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었고 금요일 밤의 케미컬 브라더스, 토요일 밤의 팻보이 슬림이라는 호화 라인업으로 달리게 된다. 공연장에는 LSD 등 마약을 급조해서 판매하는 업자들이 아주 많이 숨어들어와 있었는데, 격납고 같이 어둡고 외부와 차단된 공간은 이들의 좋은 영업장이 되었다. 결국 여기선 약에 취한 채 이성을 잃은 천명 단위의 사람들이 발광하며 춤추고 난교하는 지옥이 펼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7월 24일 토요일 공연이었던
팻보이 슬림의 무대는 완전 아수라장이었다고 전한다. 팻보이가 훗날 진행한 인터뷰에서 밝히기로는, 어두운 격납고 안에서 공연을 하던 중 손전등으로 무대 아래를 비추어 보니 사람들이 뒤엉켜서 성관계를 하고 있었고 멀리서는 사람들이 벽을 짚고 일렬로 서서 난교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쉐보레 승합차가 격납고 안으로 들이닥치고 거기에서 약 20에서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승합차 난입을 재미있는 이벤트의 일종으로 착각했던 팻보이 슬림은 이에 실망한다. 거기에 추최 측은 사태를 진정시킨 뒤 격납고 안으로 난입한 승합차를 바깥으로 빼기 위해, 디제이인 팻보이 슬림으로서는 굴욕에 가까운 뮤직 컷을 하였으며 팻보이 슬림은 어이를 상실한다. 거기다 공연이 갑자기 멈춘 것에 대해 분노한 관객들이 그에게 쓰레기 세례를 날려 졸지에 망신도 당한다. 여튼 주최 측 관계자 중 한명이 승합차를 빼기 위해 문을 연 순간 안에서 마체테를 든 괴한과 옷이 벗겨진 채로 정신을 잃은 소녀, 바지를 주섬주섬 올리고 있던 소년의 모습을 발견하고 곧바로 소녀가 차에서 윤간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팻보이 슬림의 매니저는 이 장면을 목도하고 공연장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선 최대한 빨리 팻보이 슬림을 데리고 공연장을 탈출하여 공항에서 날밤을 새운 후 바로 영국행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고 한다. 차에서 윤간을 당한 소녀는 곧바로 앰뷸런스에 태워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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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방종
주최측에서도 30주년 당위성('사랑과 평화')을 위해 티벳 승려들을 초청해 축복, 명상회를 열었고 이에 편한 마음으로 참여한 관객들도 있었으나 이들도 점점 광기 어린 분위기에 미쳐가게 된다. 첫날 금요일 일찍 무대에 오른 록커이자 여장부인 셰릴 크로우의 공연에서는 남성관객들이 'Show your tits'(찌찌를 보여줘)라는 챈트를 합창했으며 크로우는 내 가슴을 보고 싶으면 돈 더 내라고 일갈하고는 쿨하게 넘겼으나, MTV 인터뷰 코너에서도 챈트가 쏟아지자 대놓고 저 머저리들 패러 내려가고 싶다고 한마디 남겼다. 일요일 후반무대에 올라온 쥬얼은 쉐릴 크로우의 이야기를 듣고 잔뜩 긴장한 채 무대에 올랐다가 서둘러 레퍼토리를 끝내고 바로 버스를 타고 떠나버렸다. 주최측 임원의 증언이 따르면 원래 금요일부터 그런 미친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백인 남자 대학생으로 보이는 그룹들이 대학교 사교동아리처럼 보이는 막가파식 술판과 기행을 벌이면서 그 분위기가 퍼진 것 같기도 하다고 하였다.
한편 1999년 당시는 밀레니엄을 앞두고 발맞추어 봇물터진 인터넷 문화로 인해 이른바 엽기(bizarre) 문화가 전세계적인 키워드였으며 한국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탈권위, 탈장르적인 사조가 대두되며 고전 헤비메탈의 강력함, 하드코어 펑크의 폭력성과 힙합의 랩핑, 그루브한 훵크, 그런지 문화, 스케이트 보드 문화가 뒤섞인 누메탈이 전 세계를 강타하던 시기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매체는 하루가 멀다하고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하던 때이다. 또한 남이 나를 어떻게 보든 개의치 않던 첫 세대인, 이 30만에 달하는 (78~82년생) 관객들은 찌는듯한 더위, 도처에 널린 술과 마약, 주최측의 무능한 운영에 같이 미쳐가기 시작한다. 공식적으로 보고된 강간은 10건 미만이나 실제 횟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며 공식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게 희한할 정도.
또
MTV가 개입하면서
페이퍼뷰(Pay Per View)로 현장중계를 했는데 이 역시도 취지는 좋았으나 결국 토플리스 여성들, 나체같은 자극적인 영상만 골라서 내보내며 여성 관객들의 탈의를 부추겼다. 이는 집단 성추행, 강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당시
MTV 진행자였던 아난다 루이스(Ananda Lewis)라는 여성은 실황 인터뷰 때 갑자기 엉덩이가 뜨거워 화들짝 놀랐는데 누군가가
담배빵을 놓은 것이었다고 한다.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던 게 더 기가 막혔다고 한다. 또한 원년 페스티벌에 참가했던 히피 중년들도 과거의 추억을 찾아 공연장에 들어왔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처참한 광경에 개탄하며 공연장을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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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들의 책임감(?)
지금도 이견이 있는 사항이다. 일단 역사적인 1999년 7월 23일 금요일 첫무대의 주인공인 제임스 브라운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뭔가 계약조건에 불만을 가진 브라운이 무대에 오르길 거부했던 것이다.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는 당시 영상을 보면 심기 불편한 표정의 제임스 브라운이 무대를 기웃거리며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브라운은 잔금(?)을 즉시 입금 안하면 공연 안하겠다고 버티고 있었던 것. 계속 공연이 딜레이 되고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지자 무대에 미리 올라와있던 브라스밴드 리더는 다급해졌고 연주를 강행해버렸다. 이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무대에 오른 제임스 브라운은 첫곡 섹스머신을 착잡한 표정으로 불러야 했다.
금요일 헤드라이너였던
콘은 콘 역사에 남을 역대급 무대로 말 그대로 박살을 내버렸고 관객들은 날뛰기 시작했다. 다음 주자인
부쉬의 개빈 로스데일은 콘이 너무 분위기를 띄워놔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봐 상당히 불안했다고 하며 분위기를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차분히 당대의 히트넘버 swallowed를 열창했다. 그리고 열띤 호응을 받으면서도 장내 분위기를 차분히 만들며 퇴장했다. 하지만 3일 내내 이어지는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키드락,
DMX같은 강력한 뮤지션들은 분위기를 들끓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정점은 7월 24일 토요일에 있었던
림프 비즈킷 무대였다. 당시 비즈킷은 전세계 넘버원 밴드임과 동시에 동세대 미국 틴에이저, 20대 사이의 남성들에게 아이돌과 같은 존재였고 보컬 프레드 더스트의 안하무인적 자신감은 어마어마한 영향력이 있었다. 게다가 그동안의 록스타와는 달리 흔한 브랜드의 (DC,디키즈)티셔츠에 바지,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고 무대를 뒤흔드는 더스트는 동시대 소년과 청년들에게 롤모델 그 자체. 등장하자마자 "여기
엔씽크 좋아하는 사람있냐?"라는 디스부터 시작해서 히트곡 메들리로 달리자 관객들은 슬램을 하다 방송탑을 뒤흔들기 시작하고 방송탑 골조에 박아놓은 합판 자재를 떼어내고 무차별 패싸움이 시작됐다. 게다가 그 합판을 보드삼아 군중위에서 서핑(!)을 하는 위험천만한 장면이 펼쳐졌고 당시 비즈킷 최대의 히트곡인 Faith를 연주하는 장면에서는 프레드 더스트도 그 합판 위에서 서핑을 타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연출했다. MTV 자본이 깊숙히 개입한만큼 인터뷰어가 무대에서 내려올 때부터 따라붙으며 인터뷰를 했는데 위험에 대해 관중을 계도했었어야지 않냐라는 질문에 더스트는 난 상관없다는 식으로 쏘아 붙이듯 답하고는 자리를 떠나버렸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은 밴드 결성부터 지금까지 초지일관인 단시간에 부수고 앵콜곡 없이 내려간다를 시전했고 항상 공연마다 장렬하게 불태우는 것으로 유명한 이들 역시 관객선동에 일조했다.
마지막날인 7월 25일 일요일의 헤드라이너였던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림프 비즈킷이 지른 불에 다이너마이트를 까버렸다. 밴드의 베이시스트인
플리는 아예 팬티까지 벗고 나체로 연주했으며 역시 역대급 무대를 선보이다 선술한 주최측의 촛불집회 유도로 인한 방화사태가 발생한다. 이에 주최측에선 공연중단을 선언하고 소방대 투입을 결정하나 소방대는 무서워서 못들어간다는 이유로 거부.. 대기하던 레핫칠에게 주최측은 당신들 말은 들을거라고 올라가서 한마디 해달라고 하나 앤서니 키디스는 뭔 할 말이 있겠냐고 거절했고 사태가 조금 수습되자 다시 공연은 시작된다. 그런데 앵콜곡으로 부른 게 지미 헨드릭스 트리뷰트 커버 "Fire "였다.... 이때부터 방화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며 일요일 소요사태로 이어진다.
사실 이들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콘의 역대급 무대에서 이어진 부쉬의 공연에서 개빈 로스데일이 발휘한 통찰력은 주목해야 할 부분으로 시종일관 달리는 무대였음에도 자각으로 완급조절을 한 것은 높게 평가받고 있다. 콘의 조나단 데이비스도 무대에 올라 이런 개판은 처음봐서 긴장했다고 술회했으며 펑크밴드인
오프스프링도 대놓고 "여기저기 다 벗고 뛰어다니고 있네. 이게 멋있는거냐?"라며 일갈하고 공연했다.
평상시 캐리비안 흑인의 뿌리와 한을 노래했던
푸지스(Fugees)의 와이클리프 쟝이 7월 24일 토요일 공연에서 솔로로 나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지금부터 나에게 쓰레기를 던져라라고 외친 후 기타로 미국 국가를 연주했다. 이때 압도적인 쓰레기들이 무대위로 던져졌고 쟝은 국가연주를 마친 뒤 기타를 부숴버렸다. 주최임원 술회에 따르면 이때부터 뭔가 잘못되어감을 느꼈다고. 특히 관객들을 제대로 선동해 놓은 림프 비즈킷은 평가가 매우 갈리는데 당시 주최측 임원중 한명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프레드 더스트를 "개자식" 이라고 부르면서 매우 혐오하는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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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고 미숙한 진행인력 2
1999년 7월 25일 일요일 오전, 더위와 비위생, 바가지에 질린 사람들이 오전부터 떠나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들의 이유는 단 한가지. 우드스탁99 특유의 방종에 맛이 갔거나 진성 헤드라이너는 따로 있다는 괴소문 때문이었다. 헛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레드핫 칠리 페퍼스 다음 스테이지로 재결성한 건즈 앤 로지스가 나올 거라든가, 그레이트풀 데드가 나올 거라든가,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가 나올 거라든가, 프린스가 나올 거라든가, 심지어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무대에 깜짝 등장할 거라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진짜 주인공은 아직 무대에 올라오지 않았다는 기대감. 당시 주최측 내에서도 마지막 히든카드 헤드라이너가 있다는 카더라가 돌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론 레드핫 칠리 페퍼스가 마지막이었고 더 이상의 공연은 없었다. 페퍼스가
지미 헨드릭스
커버를 마지막으로 하고 퇴장하고 나서도, 남아있던 관객들은 끝판왕이 올라오길 고대하고 있었는데, 현실은 남아있던 관객들이 본 건 스크린에 펼쳐지는 69년 공연의 지미 헨드릭스 영상이었고 "감사합니다. 곧 다른 공연에서 만나요~" 라는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였다. 애초에 히든카드
그런건 없었다. 이렇게 된 것은 관객들 사이에서 떠돌던
루머와 그리고 주최측 직원들도 이에 넘어가서 그런 게 있는거 아니냐면서 수근거렸던 것의 결과이며, 행사의 총책임자이자 수장인 마이클 랭조차 이 루머에 대해 아니라고 명확히 짚고 넘어가지 않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후부터 남아있던 잔존 관객들이 정말로 미쳐버리기 시작한다.
5.4. 난장판이 계속되다
일단 하루 일정이 끝난 다음날 주최측과 기자단이 기자회견을 가졌으나 별일 없었던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기자들이 이 비정상적인 운영에 대해 질타해댔고 주최측은 소수 정신나간 관객들의 일탈일 뿐 행사진행은 차질이 없다는 식으로 두루뭉실하게 넘어갔다. 게다가 정확한 대처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아 기자단을 어이상실하게 만들었다. 그 아비규환을 행사내내 바로 앞에서 목도해온 기자단은 그저 헛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이런식의 수수방관이 사태를 키운것이다.레드핫 칠리 페퍼스의 공연이 끝날 무렵 여러군데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불기둥의 원인은 몇몇 관객들이 펜스와 방벽 목재를 마구 잡아뜯어 방화를 한 것이었고,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관객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족히 10미터가 넘는 스피커 구조물에 여러 사람이 기어 올라갔고 그 구조물을 사람들이 매달려 있는 채로 밀어서 넘어뜨리기(!)까지 했다. 폭도로 변한 관객들은 행사 차량에 방화를 했고 차량 안에 있던 프로판 가스통이 연달아 3차례 대폭발을 일으켰다.이때 주최측은 폭동을 통제할 의지를 잃은 채 사무실에 숨어 문에 못질을 하고 있었다.
외부에서는 소수의 경비인력들이 폭도들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방화에 흥미를 잃은 폭도들은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노래(Fuck you, I won't do what you tell me! - killing in the name)를 합창하며 벤더 빌리지(푸드코트)로 향했고 겁에 질린 상인들은 도망쳐 버렸다. 이후 마음껏 벤더빌리지 내의 물품들을 약탈하고 ATM 기기들을 부수고는 약 22,000달러에 달하는 돈을 훔쳐가는 등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치닫는다. 결국 중무장한 뉴욕주 경찰과 기동대가 그리피스 기지로 밀고 들어왔고 해산을 명령했다. 정신 못차리고 이에 불복하여 달려드는 폭도들에겐 무차별 곤봉세례가 쏟아졌고 곧 사태는 일단락된다.
당시 벤더빌리지의 상인들은 마이클 랭에게 굉장히 실망했는데 이와 같은 대참사에 작은 위로라도 기대했건만 쑥대밭이 된 벤더빌리지를 휙 둘러보고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마이클 랭의 술회에 따르면 그땐 이거 다 언제 치우나 이 생각밖에 안들었다고 한다...
사태가 수습된 후 임직원들은 비밀보장 각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으며 이를 끝으로 이 전대미문의 행사는 막을 내렸다.
일단 원년 행사나 1994년 행사 때도 사건사고는 있었으나 1999년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었고 1999년처럼 생지옥이 열리진 않다. 1999년 우드스톡과 비견할 만한 공연 참사로는 경비 요원을 잘못 고용해[4] 살인 사건이 발생한 1969년 알타몬트 공연 정도 밖에 없을 것이다.
5.5. 이후
강간 당한 관객들의 가족들이 대규모 고소를 진행했으나 아비규환 속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한 범행이라 용의자를 특정하기가 어려워 주최자 마이클 랭도 책임에서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갔다. 학부모, 기성세대가 된 관객들은 무용담처럼 그때 이야기를 즐겨한다고 한다. "그때 우린 정말 인간이하로 놀았지만 그래도 그때가 인생에서 최고였다."는 투. 그리고 마이클 랭은 긍정적인 부분만 편집해서 담은 공연실황 dvd 등의 부가수입으로 큰 돈을 벌었다.상술한 부정적인 요소를 뒤로 하고, 긍정적 평가로는 과연 이름값 답게 라인업 또한 입이 벌어질만 한 수준이었으며 나온 뮤지션들마다 인생공연을 펼친것인데 콘과 림프 비즈킷은 말 그대로 밴드 역사에 남는 명연을 펼쳤고 금요일 첫 출연자 제임스 브라운은 브라스 밴드를 대동하고 소울의 제왕다운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리고 참가자 중 거의 유일한 힙합 뮤지션인 DMX역시 DJ 한명만 대동한 채 혈혈단신으로 30만 관객을 떡주무르듯 조련했다. 그리고 자미로콰이는 대규모 밴드를 이끌고 무대 위에 레일까지 설치하여 Virtual insanity를 부르는 장관을 연출했으며 키드락은 핌프를 연상시키는 밍크코트를 걸치고 느릿느릿 입장해서 히트곡 bawitdaba의 첫 소절인 "my name is ki~~d!!"를 샤우팅 한 순간 30만 인해가 파도로 울렁이는 역사적인 광경을 연출했다.
6. 해외의 우드스톡 페스티벌
6.1. 폴란드 - 우드스톡 페스티벌 폴란드 (현 폴'앤'록 페스티벌)
1995년부터 현재까지 폴란드에서 개최되고 있는 록 페스티벌. 폴란드 최대 규모의 록 페스티벌이며, 1995년부터 2017년까지 우드스톡 페스티벌 폴란드로 개최되었다가 2018년부터 현재 이름으로 바뀌었다. 현재까지 성황리에 잘 개최되고 있으나 거의 유일한 문제점이 우드스톡 명칭 라이센스를 구입하지 않고(...) 이름을 썼다는 점. 반대로 우드스톡 명칭만 제대로 구입하고 다른 부분들은 대거 문제점으로 지적되다 결국 개최되지 못한 우드스탁 뮤직 앤 아트페어 2023와 정반대되는 느낌의 페스티벌이다.
자세한 내용은 폴'앤'록 페스티벌 문서 참조.
6.2. 대한민국 - 우드스탁 뮤직 앤 아트페어 2023
2023년 10월 1일 부터 3일까지 임진각 평화누리 일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록 페스티벌.[5] 우드스탁 벤처스로부터 정식으로 라이센스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말도 많고 탈도 많아서 안 좋은 의미에서 주목을 받았던 페스티벌이었고, 결국 주최측에서 2023년 9월 18일 취소 공지를 올렸다.자세한 내용은 우드스탁 뮤직 앤 아트페어 2023 문서 참조.
7. 대중 매체
- 테이킹 우드스탁 : 1969년 첫 회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다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이안 감독 연출. 제62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출품작.
- 난장판이 된 사건사고: 우드스톡 1999 : 1969년의 우드스톡은 평화와 음악을 약속했지만, 1999년에 부활한 우드스톡은 며칠에 걸친 분노와 폭동, 그리고 실질적인 피해를 가져왔다. 축제는 왜 이렇게 최악으로 꼬여버렸을까? (출처: 공식 소개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링크
[1]
미국에서는 '우드스탁'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그 영향으로 '우드스탁'으로 부르는 사람이 꽤 많다. 흑역사가 된
우드스탁 뮤직 앤 아트페어 2023에서도 우드스'탁'으로 표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
이는 2020년대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3]
1999년 행사는 폭력배나 부적절한 경호 인원을 고용하여 인사 사고가 난 다른 페스티벌들을 상당히 의식했는지, 경비 인력을 아예 "평화 경비대"로 명명하고 남고생이나 남자 대학생 등의 일반 계약직 아르바이트생으로 편성했다. 하지만 질서 유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총이나 칼을 허리에 찬 등빨 좋은 문신까지 하면 트리플거구들이 일탈 행위를 살벌하게 지적하는 것이 1999년 우드스톡에서는 결과적으로 보면 더 나은 선택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4]
진짜 갱들을 고용했다. 그것도 그 악명높은
바이커 갱인
헬스 엔젤스 단원들을!
[5]
원래는 포천에서 7월 28일~7월 30일 하기로 했다가 여러가지 문제로 한 번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