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3:39:24

요한 23세(대립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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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요한 23세(대립교황).png
교황 요한 23세(John XXIII)
세속명 발다사레 코사(Baldassarre Cossa)
출생지 나폴리 왕국 프로치다
사망지 피렌체
생몰년도 ? ~ 1419년 12월 22일
재위기간 1410년 5월 17일 ~ 1415년 5월 29일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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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대적한 대립교황.

2. 행적

나폴리 왕국 나폴리 근교 프로치다 섬에서 프로치다의 영주 조반니 코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가족의 해적 활동에 참여해 많은 부를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이 기록은 그를 비하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는 나폴리 왕국의 군대에 들어가서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 이후 전개된 아라곤 왕국과 앙주 왕조의 시칠리아를 둘러싼 전쟁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어느 시기에 군대를 떠나 교회에 들어갔고, 볼로냐에서 교회법을 공부한 뒤 보니파시오 9세 교황청에서 활동했다.

1396년 볼로냐 대주교에 선임되었고, 1402년 보니파시오 9세에 의해 성 에우스타치오의 부제이자 추기경에 선임되었고 볼로냐와 로마냐의 특사를 역임했다. 1403년부터 1408년까지 볼로냐에서 거주하면서 뛰어난 행정 능력을 발휘해 서방교회 대분열로 인해 붕괴 위기에 몰렸던 교황령이 재정비될 수 있도록 기여했다. 그러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가 분열을 종식시킬 의사가 없는 듯이 보이자 결별하고, 피사로 가서 통합을 이루기를 원하는 추기경들과 함께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 모두를 거부하고 단독 교황을 세우기로 결의했다. 1409년 6월 26일, 이들은 밀라노 대주교 피에트로 필라르고를 교황 알렉산데르 5세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이후 알렉산데르 5세에 의해 피렌체의 추기경에 선임된 그는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오가 북부 이탈리아를 공략하기 위해 복상하자, 그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시에나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의 동맹을 이끌어냈다. 이후 라디슬라오의 세력권에 들어갔던 로마를 공략하는 한편, 추가 지원을 얻고자 이탈리아 북부와 프로방스로 이동했다. 그러던 1410년 5월 3일, 알렉산데르 5세는 볼로냐에서 그와 만나 라디슬라오와의 전쟁에 관하여 논의하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피사 추기경들은 볼로냐에 모여서 선거를 벌인 끝에 1410년 5월 17일 그를 교황 요한 23세로 추대했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알렉산데르 5세를 독살했다는 의혹과 비난에 시달렸다.

요한 23세는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보헤미아 왕국, 포르투갈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 제후들, 피렌체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청을 포함한 수많은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지지를 받았으며[1],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폴란드 왕국도 뒤따라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 시칠리아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의 지지를 받았고, 로마에 있다가 라디슬라오에 의해 가에타로 옮겨졌던 그레고리오 12세는 나폴리 왕국, 카를로 1세 말라테스타[2], 바이에른 공작들,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 독일과 폴란드의 일부 지역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라디슬라오가 계속 교황령을 노렸기 때문에, 요한 23세는 앙주 공작이자 나폴리 왕위 요구자 루이지 2세에 의존했다.

1411년 5월 19일 루이지 2세가 로카세카에서 라디슬라오를 격파한 후, 요한 23세는 로마에 입성했다. 그는 교회 계획을 계속하겠다는 명분으로 공의회를 소집했지만, 단지 교황의 권위를 부정한 존 위클리프를 비난하고 라디슬라오에 대한 십자군 결성을 주장하는 그를 비판한 얀 후스를 파문했을 뿐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병력과 물자가 소진된 루이지 2세가 앙주로 돌아갔고, 1412년 라디슬라오에게 고용된 용병대장 카를로 1세 말라테스타가 안코나 변경백의 일부 영역을 공략했다. 이에 요한 23세는 라디슬라오와 타협하기로 하였다. 1412년 6월 14일 라디슬라오를 나폴리 국왕으로 인정하고 7만 5천 플로린을 배상했다. 라디슬라오는 그 대신 그레고리오 12세를 가에타에서 리미니로 이주시키고 교황으로 지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요한 23세가 배상금 7만 5천 플로린 지불을 차일피일 미루고, 피렌체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독일왕 지기스문트와 연합해 다시 나폴리 왕국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라디슬라오는 1413년 5월 중순에 군대를 일으켜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해 6월 8일, 그의 군대는 로마를 공략한 뒤 약탈을 자행했고, 요한 23세는 피렌체로 달아났다. 라디슬라오는 뒤이어 움브리아 북부로 향했다. 피렌체는 라디슬라오의 공세를 두려워해 그가 교황령을 정복하는 것을 인정하는 대가로 불가침 협약을 맺었다. 그 후 이탈리아 북부를 향한 대규모 원정 준비에 1413년 후반기를 보낸 라디슬라오는 1414년 4월 로마를 떠나 볼로냐로 진격했다.

요한 23세는 더 이상 이탈리아에서 라디슬라오를 막아설 동맹이 없자 지기스문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지기스문트는 피렌체로 진군해 요한 23세와 만난 뒤 공의회를 소집해 교황 난립 문제를 해결하자고 권했고, 요한 23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1414년 8월, 북부 이탈리아를 금방 석권할 듯한 기세로 몰아붙이던 라디슬라오가 토디 공방전을 치르던 중 갑작스러운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리하여 여유를 얻은 지기스문트는 유럽 각지에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는 공의회에 참석할 인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건물을 빠르게 건설했고, 로마 아비뇽, 피사 모두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때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는 불참했지만, 요한 23세는 지기스문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요량으로 공의회에 참석했다.

이리하여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지기스문트는 공의회가 소집되기 전부터 대분열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세 교황을 모두 퇴위시키고 로마에서 통치할 단 한 명의 교황을 선출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공의회에 참석한 이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자신의 뜻에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다수의 참석자들이 지기스문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당초 지기스문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추종자 100여 명과 함께 회의에 참석했던 요한 23세는 외국인 참석자들이 지기스문트의 의견에 따르는데다 자신과 함께 온 이들마저 지기스문트 쪽으로 기울었음에 경악했다. 그는 이 회의가 여우들의 덫이라며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1415년 2월 중순, 공의회의 압력을 받은 요한 23세는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가 사임한다면 자신 역시 사임하겠다는 선언서에 서명했으며, 콘스탄츠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마부로 변장한 뒤 콘스탄츠에서 탈출한 후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4세에게 의탁했다. 지기스문트는 자신의 계획을 망친 그에게 분노해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를 시켜 프리드리히 4세에게 "당장 그를 데리고 콘스탄츠로 오지 않는다면 응징하겠다."라고 전하게 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이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고 요한 23세를 데리고 콘스탄츠로 돌아갔다.

그 후 요한 23세는 이단, 분열을 조장한 혐의, 해적질, 강간, 살인, 수간, 근친상간 혐의로 기소되었고,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에게 넘겨진 뒤 하이델베르크 만하임에 잇따라 투옥되었다가 1418년이 되어서야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돈을 빌려주어 몸값 3만 8500길더를 지불한 후 석방되어 피렌체로 갔다. 그 후 콘스탄츠 공의회에 의해 교황으로 선임된 마르티노 5세에게 복종했고, 그로부터 프라스카티 성당의 주교이자 투스쿨룸의 추기경으로 선임되었지만 실제로 부임하지 않고 피렌체에 머물다가 1419년 12월 19일에 사망했다. 조반니 데 메디치는 피렌체 세례당에 그의 무덤을 건설했고, 석관에 "전 교황 요한"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마르티노 5세는 이에 대해 항의했지만 무시당했다.[3]

요한 23세는 일반적으로 서방교회 대분열 시기의 세속적이고 기회주의적인 교황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거의 보이지 않았고, 라디슬라오와 전쟁하고 콘스탄츠 공의회와는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발휘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했던 교황령을 보전하는 데 성공하는 등 교황청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또한 공의회가 퇴임을 원하지 않는 교황을 강제로 해임시킬 권한이 있는지를 두고 논란이 많고, 그에게 걸린 혐의는 대부분 날조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요한 23세를 최악의 교황으로 간주한 전통적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1] 특히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수장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무려 1만 두카트에 달하는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2] Carlo I Malatesta: 이탈리아의 용병대장이자 리미니, 파노, 체세나, 페사로의 군주 [3] 조반니의 이런 처사는 메디치 가문은 신의가 있다는 좋은 평판을 불러와 후일 그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 시대에 가문을 굴기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