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5px -11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03E22, #B25530 20%, #B25530 80%, #803E22);"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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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명 | 라우렌시오(Laurentius) | ||||||||||
세속명 | 없음 | ||||||||||
출생지 | 실전됨 | ||||||||||
사망지 | 루피우스 포스투미우스 페스투스의 영지 | ||||||||||
생몰년도 | ? ~ ? | ||||||||||
재위기간 | 498년 ~ 499년, 501년 ~ 5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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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심마코에 대항한 대립교황.2. 행적
출생년도, 출신지, 집안배경, 대립교황이 되기 이전의 행적 등은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산타 프라세데 성당의 수석사제였다고만 전해진다. 498년 11월 22일 교황 아나스타시오 2세가 사망한 뒤 심마코가 새 교황에 등극했다. 그는 제노 황제가 칼케돈파와 단성론파의 갈등을 해소시켜서 제국의 단합을 유도하기 위해 발표한 헤노티콘(Henoticon)을 배격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친 동로마 성향의 주교, 로마 원로원, 신자들은 라우렌시오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아야 소피아의 강사였으며 교회 역사 연대기를 집필한 테도오로스 아나뇨스테스에 따르면, 로마 귀족이며 472년 집정관을 역임했던 루피우스 포스투미우스 페스투스가 라우렌시오의 교황 선출을 지원했다고 한다.그후 로마 사회는 심마코를 지지하는 세력과 라우렌시오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고, 양자간의 유혈 충돌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이에 당시 이탈리아 전역을 통치하는 동고트 왕국의 국왕 테오도리크 대왕은 로마의 혼란을 종식시키기로 마음먹고 심마코 세력과 라우렌시오 세력에게 라벤나로 대표단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양자의 의견을 검토한 뒤 더 많은 지지자를 얻은 심마코가 교황에 더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라우렌시오 측에서는 심마코가 심마코가 표를 얻기 위해 금품을 살포했으므로 선출 자체가 무효라 주장하며 국왕의 결정에 불복했다.
심마코는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499년 3월 1일 72명의 주교와 모든 로마 성직자가 참석한 공의회를 소집한 뒤 테오도리크 대왕의 결정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후 라우렌시오를 캄파니아 지방 누체리아의 주교로 임명하여 회유했고, 라우렌시오도 교황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이리하여 모든 분쟁이 종식되는 듯했으나, 501년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이 심마코가 부활절 미사 날짜를 지키지 않은 점과, 그 외에 각종 비리 혐의로 고발했다. 테오도리크 대왕이 심마코에게 소환령을 내리자, 심마코는 도주했다. 라우렌시오는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로마에 입성한 뒤 교황을 자칭했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로마에서 공의회를 재소집하기로 했고, 심마코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하기로 했다. 그런데 공의회는 교황이 주최해야 하나, 심마코가 죄인이 되어버리면 교황이 없으니 공의회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다. 또한 교황을 신이 아닌 사람이 정죄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결국 로마에서 공의회를 반대하는 소요가 벌어졌다. 주교들은 이 혼란에 지쳐 돌아가려 했지만, 어떻게든 합의를 보라는 테오도리크 대왕의 엄명에 굴복하여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을 사람이 치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심마코가 계속 교황 직을 유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소요는 계속 이어졌고, 라우렌시오는 4년간 교황을 자칭했다.
심마코는 이에 대항하고자 교회 심판 기록들을 조작하였고, 정쟁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506년, 동로마 제국을 적대하게 된 테오도리크 대왕은 명백한 친 동로마 인사인 라우렌시오를 로마에서 영구 추방하고 심마코를 교황으로 확정지었다. 그후 라우렌시오는 페스투스의 영지 중 한 곳으로 은거한 뒤 검소하게 지내다가 사망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