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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의회 원내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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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적 60석 · 183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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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iheitliche Partei Österreichs | |
약칭 | FPÖ |
상징색 | 푸른색 |
영문명칭 | Freedom Party of Austria |
한글명칭 | 오스트리아 자유당 |
창당일 | 1956년 4월 7일 |
정치적 스펙트럼 |
우익 ~
극우 역사적 (1956 - 1986) : 중도 ~ 중도우파 |
이념 |
국민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유럽회의주의 우익대중주의 역사적 (1956 - 1986) : 자유주의 국민자유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범게르만주의[1] |
주소 | 빈 Theobaldgasse 19/4A-1060 |
유럽 정당 | 정체성 민주당 |
유럽의회 정당 |
|
국제 조직 | 없음[2] |
청년 조직 | 오스트리아 자유 청년단(RFJ) |
대표 | 헤르베르트 키클(Herbert Kickl) |
연방 의회(상원) 의석수 | 11석 / 61석 |
국민 의회(하원) 의석수 |
58석 / 183석
|
유럽의회 의석수 | 6석 / 20석 |
당가 |
Immer wieder Österreich (언제나 오스트리아) |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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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의 우익~ 극우 정당. 처음 이름은 독립연맹(Verband der Unabhängigen, VdU)이며 현재 이름으로 개칭한 것은 자유당이라는 군소정당과 합당한 다음 해인 1956년이다.2. 역사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전신 독립연맹(Verband der Unabhängigen, VdU)은 1949년 옛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원들과 동유럽에서 추방된 독일인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창당된 정당이었다.1955년 자유당이라는 군소 정당과 합당하면서 다음 해에 당명을 오스트리아 자유당이라는 현재 이름으로 변경했다. 나치 잔당의 정당이라는 것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첫 번째 당수(1956~1958) 안톤 라인탈러[3]와 두 번째 당수(1958~1978) 프리드리히 페터[4]는 모두 무장친위대 장성 또는 장교 출신이었다. 이렇게 당의 출발부터 나치 잔당 및 나치 친화적인 추방민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반에는 그리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그럼에도 이 정당의 존재가 용인될 수 있었던 데에는 중도우파 인민당의 지지표를 분산시키려는 사회민주당 측의 계산이 있었다.
그렇지만 두 번째 당수 프리드리히 페터는 자유주의적 오스트리아 인민당 탈당파를 수용하면서, 강성우파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t) 색채를 희석하고 중도우파 국민자유주의로 당의 이념을 이동시켰다.
1957년 대통령 선거에서 오스트리아 자유당은 인민당과 단일후보를 내세웠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두 번째 당수인 프리드리히 페터의 재임기간 동안 당은 선거연합 대상을 바꾸어 중도좌파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선거연합을 맺었으며, 공식적으로 선거연합을 맺기 몇 년 전부터 프리드리히 페터는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브루노 크레이스키와 친분을 돈독히 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자유당이 인민당과의 동맹을 파기한 다음 사회민주당과 1970년부터 1986년까지 선겨연합을 한 결과로 1983년부터 86년까지 연립여당으로써 장관을 배출했다. 이렇게 당의 이념을 변화시키고 선거연합 대상을 바꾸는 과정 속에서 당의 자유주의화에 반대한 당내 극우파는 1967년 당을 탈당하여 민족민주당이라는 독자정당을 창당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 자유당은 58년부터 86년까지 극우 정당이라기보다는 중도우파 국민자유주의 정당에 가까운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 당시에는 독일 자유민주당, 현재의 NEOS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986년 외르크 하이더가 당수로 오르면서부터 당 성향이 다시 극우화되기 시작한다. 우선 그는 사회민주당과 선거연합을 끝내고 히틀러 찬양 등의 극우 행보를 일삼았다. 그럼에도 카다피나 사담 후세인 같은 무슬림 독재자들과 우정을 돈독히 하는 행보도 같이 보였다. 하이더는 극우 행보 때문에 케른텐 주지사 직에서 짤리기도 했다.
그래도 수십년 좌우대연정에 대한 피로감과 나치 출신임이 들켜버린(...) 전직 유엔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에 대한 싸늘한 국제사회의 반응에 대한 억하심정이 겹치며 차근차근 지지층을 늘렸다. 결국 1999년 총선에서 인민당/사민당 대연정이 파토난 틈을 타 집권에 성공한 인민당과 협상 끝에 연정을 구성하여 다시 내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집권 기간 동안 수많은 구설수로 연정내에서도 갈등이 끊이지 않았으며, 결국 2002년 총선에선 대참패하고 만다. 이후 외르크 하이더는 당내 내분 과정에서 일부 계파와 함께 탈당해 오스트리아 미래동맹을 창당하지만, 2008년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그러다 인민당이 사회민주당과 다시 연립정권을 구성하며 정권도 내주지만, 유럽발 극우 열풍 속에 2008년 총선에서 다시 부활의 끈을 잡았고, 급기야 2017년에는 인민당과 연립정권을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인민당과 연립정부를 세우면서 1기 집권 때와 마찬가지로 불협화음이 지속해서 일어나고 있으며, 지지율도 크게 떨어진 상태가 되었다. 2019년에 연립정권의 부총리였던 하인츠크리스티안 슈트라헤 부총리의 부패 스캔들이 드러나면서 모든 자유당 출신 장관이 사임하여 연정에서 이탈했다.
2019년 총선에서 인민당으로 몰리면서 결국 의석수가 떨어졌다. 부패 스캔들과 합쳐 2020년 코로나19 정국에서의 구미권 극우 정당의 뻘짓으로 인해 유럽 극우정당의 지지율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면서 현재는 녹색당, 사민당에 이어 지지율 4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나마 야당으로 전락한 후 최근에는 야당으로써의 선명성을 강조하며 지지율이 회복세에 돌아서서 연립 여당의 리즈 시절에는 미치치 못하지만 다시 3위까지 올라왔다.
그러다 2023년 4월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인민당과 사회민주당이 쌍으로 멸망(…)하면서[5] 순식간에 다시 제1야당으로 올라갔다. 거기에 2024년에 치러질 총선에서 예상 지지율에 무려 1위를 기록했다.
2024년 초반 기준으로는 사민당의 부진 때문에 사민당의 지지율이 인민당과 비슷해지는 수준까지 가서 자유당이 확실한 지지율 1위 정당으로 도약했으며,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제1정당이 되었다. 2024년 오스트리아 국민의회 선거에서는 득표율이 4개월전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 때보다 오히려 더욱 올라서 총선에서 창당 이래 역대 최고 의석을 획득하며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국회 총선거에서 의석수 1위를 차지했다. 독일어권에서 극우 성향 정당이 의회에서 원내 제1당이 된 것은 1930년대 나치당 이후 최초이다.
[1]
독일 내셔널리즘과 관련 있다.
[2]
1993년까지
자유주의 인터내셔널
[3]
일반친위대 여단지도자
[4]
친위대 상급돌격지도자 및 무장친위대 중위
[5]
인민당은 전 선거에 비해 득표율이 대폭 낮아졌고, 사민당은 인민당 수준의 폭망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부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