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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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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혁3. 조직4. 위상5. 관련글

1. 개요

중추부(中樞府)는 조선시대의 행정관청으로 자문기관에 해당한다.

2. 연혁

전신은 고려시대의 군정기구 밀직사(중추원)이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중추원이라고 하였는데 의흥삼군부의 존재 때문에 유명무실해졌다. 1400년( 정종 2) 중앙군을 담당하는 삼군부에 합쳐지고 승지(承旨)는 왕명 출납을 전담하는 승정원으로 분리되었다가 이듬해인 1401년( 태종 1) 삼군부가 승추부(承樞府)로 바뀌고 승정원이 합쳐져 기능이 환원되었다.

1405년(태종 5) 승추부의 군기, 군령권 오위, 군정권 병조에 귀속되고 대언(승지)이 승정원으로 완전 독립하면서 사라졌다가 1432년( 세종 14) 다시 설치되었다. 1436년에는 정1품의 영중추원사[1]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세종 후반대에 관직명을 추후 정비하여 정1품 영중추원사 밑에 2명의 판중추원사가 임명되고 3명의 중추원사가 임명되어 관제를 정비하였다. 그후 1461년( 세조 7) 중추부로 개칭되어 무임소 고위 대신들의 자문 관부가 되었다.

3. 조직

조선 중추부의 관직들은 모두 실무직이 아니고 실무나 작위가 없는 고관이 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하거나 현직 고급 대신들이 의례적으로 겸직하기도 하는 관직이었다.
- 정1품 영사(領事) 1인
- 종1품 판사(判事) 2인
- 정2품 지사(知事) 6인
- 종2품 동지사(同知事) 7인
- 정3품 첨지사(僉知事) 8인
- 종4품 경력(經歷) 1인
- 종5품 도사(都事) 1인

4. 위상

여말선초에선 고려의 중추원을 계승한 군국기무 관부였지만 군무를 병조 및 삼군부, 왕명 전달을 승정원에 각각 이관한 이후 군사적 성격까지 실질적으로 사라져 하위 관원과 실무 없이 국왕과의 회의에만 참여하는 고급 명예직을 위한 고문 기관이었다. 조선 후기 중추부의 고위 관료는 현직 삼정승인 시임대신(時任大臣)과 대비되어 다른 명예직과 함께 원임대신(原任大臣)이라고 불렸다.

일종의 허설기구다 보니까 조선 중후기 최명길, 최석정, 정약용 등이 중추부 혁파론이나 실질적인 비변사의 업무를 중추부에 이관하여 도병마사, 중서문하, 중서추밀 등으로 명실공히 재상 중심의 신권론이나 왕권강화론 위주의 정식 군국기무 관부로의 개편 혁신론을 실학에서 주장하였으나 조선 말까지 존치되었다가 철폐되었다. 사실상 영 무의미해보이는 잉여 고문관 부서였으나 특정 직무 실권을 부여하지 않은 명예직 성격상 의외로 정무적으로 활용할 유용성이 있었기에 장기적으로 존치될 수 있었던 조선판 정무장관급 관청이라 할 수 있다.

5. 관련글


[1] 좌의정을 지낸 최윤덕, 남지 등이 이 직위로 임명. 이후 영중추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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