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72F35><colcolor=#ffcc00> 이탈리아 공산당 제6대 서기장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Enrico Berlingu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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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2년 5월 25일 | |
이탈리아 왕국 사르데냐 사사리 | ||
사망 | 1984년 6월 11일 (향년 62세) | |
이탈리아 베네토 파도바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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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자녀 4명 | |
종교 | 무종교 ( 무신론) |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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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약력 |
이탈리아 공산당 청년 연합회 위원장 이탈리아 하원 의원 (5선)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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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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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정치인. 이탈리아 공산당의 서기장을 무려 12년간 역임하였다. 이 시기의 이탈리아 공산당은 그야말로 최전성기로, 그가 급사한 후 공산당도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이탈리아에서는 공산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평가받는다.2. 생애
1922년 사르데냐에서 귀족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의 사촌은 기독교민주당의 당수이자 후일 이탈리아 대통령까지 오르게 되는 프란체스코 코시가였고 할아버지는 주세페 가리발디의 절친한 친구로 당연히 그도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1937년 반파시즘 운동을 접하고 감명을 받아 1943년 이탈리아 공산당에 입당해 무솔리니에 반대하는 폭동에 참여했다가 잠깐 구속되었고 아버지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비교적 진보적인 성향이었던 아버지가 그를 공산당의 당수였던 팔미로 톨리아티에게 소개해 줬고 그 인연으로 그는 공산당의 열성당원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1968년 그는 로마 지역구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얼마 안 가 루이지 롱고 서기장이 서기장직을 사퇴하자 학생 운동과 1957년 소련 방문으로 유명해졌던 그가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공산당 내의 반소파, 온건론자로서 소련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중국공산당과의 관계 단절도 거절했으며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회동을 가지고 이탈리아 가톨릭계와도 친선 조약을 맺는 파격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1973년 불가리아에서 그는 교통사고로 위장된 소련의 암살 시도로 죽을 위기에 내몰렸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이탈리아 시민들에 의해 그와 공산당이 소련과 다르다는 인상을 주어 지지율이 올라갔다.
1976년 총선에서 공산당을 주도로 한 정권 교체가 진지하게 제기되었고 막판 우파와 중도좌파의 표 결집으로 공산당이 1당이 되지는 못했지만 최대 의석을 확보하고 단독 개헌선도 차지하여 여당이었던 중도파 기민당과 중도좌파 사회당을 위협하였다. 그는 기민당과의 대연정을 추구하여 전후 처음으로 집권 정당이 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공산당과 사이가 매우 나빴던[1] 사민주의 정당들의 반대와 공산당의 집권을 두려워한 미국의 은밀한 방해, 결정적으로 알도 모로 전 총리가 과격파 공산주의 무장단체 붉은 여단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는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1981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공식적으로 비판하고 이어서 소련 공산당과의 관계도 단절하는 등 유럽공산주의의 시초라고 보일만한 민주적이고 반소적인 정책들을 연이어 내놨고 당내 좌파들에게서는 비판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이런 공산당의 노선 전환은 호응을 얻었다.
이도 잠시 1984년 그는 대중 연설 도중 뇌출혈로 인해 쓰러졌고 그대로 사망하였다. 향년 62세로 그의 죽음은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고 무려 100만명이 장례식에 참가했는데 이는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라고 한다. 그의 동정표로 공산당은 그해의 유럽의회 선거에서 11,714,428표라는 이탈리아 역사상 단일 정당으로는 최다 득표수를 기록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표를 받았다.
3. 여담
- 자녀는 4명을 두었으며 그 중 비앙카 베를링구에르는 유명한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 사생활이 매우 깨끗했다고 한다.
- 종교에 친화적인 몇 안 되는 공산주의자였지만 역시나 그도 무신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