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2:45:31

심상우

대한민국 제11대 국회의원
심상우
沈相宇 | Sim Sang-u
파일:심상우의원.jpg
<colbgcolor=#004c97><colcolor=#ffffff> 출생 1938년 5월 7일
전라남도 광산군 서방면 우산리[1]
사망 1983년 10월 9일 (향년 45세)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랑군 아웅산 묘소[2]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1유공자 묘역-13호
본관 청송 심씨[3]
부모 아버지 심만택[4], 어머니 탐진 최씨
형제자매 형 심상하[5], 심상수
남동생 심상순
배우자 임옥남[6]
자녀 아들 심인섭, 심진섭, 심현섭
딸 심효경, 심유경
학력 광주수창국민학교 (27회 / 졸업)
광주서중학교 (29회 / 졸업)
광주제일고등학교 (2회 / 졸업)
몬태나 주립대학교 공과대학 ( 산업공학 / 학사)
전남대학교 대학원 ( 산업공학 / 석사[7])
종교 가톨릭 (세례명 : 요셉)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1

1. 개요2. 생애3. 기타4. 선거 이력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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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기업인, 정치인.

2. 생애

1938년 5월 7일 전라남도 광주부(現 광주광역시)에서 아버지 심만택(沈滿澤, 1908. 2. 7 ~ 1953. 4. 11)과 어머니 탐진 최씨(1905 ~ 1952. 6. 23)[8] 사이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수창국민학교(27회), 광주서중학교(29회), 광주제일고등학교(2회), 미국 몬태나 주립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1967년 전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산업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68년부터 큰형 심상하가 호남전기(훗날 로케트전기) 회장이 되자 그는 사장이 되었고, 1970년 심상하 회장 사후에도 사장 직위는 유지하였다.

1971년부터 둘째 형인 심상수와 함께 전 사주인 김충식 사장으로부터 전남매일신문을 인수받아 1980년 언론통폐합 전까지 부사장(1971~1973)과 사장(1973~1980)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 호남전기의 실세인 형수 진봉자 여사와 심상수 회장의 갈등 + 설상가상으로 군사 정권 차원에서 기업 임원으로 넣어준 장군 1사람이[9] 상부에 투서를 제출, 한밤중에 이스즈 버스에 세무서 직원들이 타고 들이닥쳐, 회사를 뒤집어 놓았다고 하는데 사실 이게 진짜 치명타였다고 한다. 이 여파로 심상수는 다수의 지분을 내려 놓으며 호남전기 회장직에서 물러났고, 심상우도 사장직에서 밀려나게 되었다.[10][11]

1972년 1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전라남도 광주시 제6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80년에 전남매일이 언론통폐합으로 전남일보와 합쳐져 생긴 광주일보의 명예회장을 맡은 그는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전라남도 광주시 동구- 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임재정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3년 3월 민주정의당 당직개편에서 총재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는데 지금이야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서로 분리된 직책이지만 당시에는 대통령이 여당 대표를 겸해서 즉 대통령 = 여당 총재였기 때문에, 권력은 대통령과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말도 있듯이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총재 비서실장은 여당 내에서 꽤나 무게있는 요직이었다. 심지어 영남 정권에서 심상우가 호남 출신 임을 감안하면 대단히 파격적인 인사였다.

사실 대통령 비서실장은 세계 각국에서 대통령제를 시행하는 나라이면 다 있는 직책이지만, 당 총재 비서실장은 좀처럼 보기 드문 자리로 전두환 정권 때 신설된 직위이다. 하단에도 나와있지만, 심상우 비서실장은 평소 유머가 풍부하고 따라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데 매우 능숙한 사람이었는데, 전두환이 보기 드문 직위에 심상우를 임명하면서까지 곁에 가까이 두려 한 이유들 중 하나는 바로 심상우가 실력과 유머감각을 모두 갖췄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총재 비서실장 영전 7개월 후 전두환 대통령을 버마 순방에 수행하였다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사망하였다, 향년 45세.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심상우의 사망 후 고인이 생전 닦아온 터전들 중 일부는 유가족이 아닌 엉뚱한 사람들이 가로챈 경우도 있어, 유가족들의 슬픔이 더했다고 한다.

3. 기타

생전의 심상우는 정계에 투신한 후, 기자들을 상대할 일이 많아지자, 분위기를 부드럽게 할 방편으로 유머를 조금씩 곁들이고 했는데, 사실 원래부터 분위기를 띄우는데 일가견이 있는 쾌활한 성격이었으며,[12] '60년대 후반 ~ 70년대 초반' 호남전기(나중에 '로케트전기'로 사명 변경) 사장 시절에는, 직원들이 결혼한다고 하면, 전날에 조촐하게 축하자리를 마련해주고, 장난을 걸며 친근하게 대하면서 + 동시에 OO만원의 축의금 봉투를 건넸다는 일화가 있다. 10살 가까이 되는 후배들이라든가 자신 밑에서 일하는 비서 등 아랫사람들에게도 존칭을 쓰면서 친절하게 대했다고 한다.[13][14] 훗날 희극인의 길을 걷게 된 3남 심현섭 또한, 군기가 엄하기로 악명높은 희극계에서 후배들을 때리거나 심하게 괴롭히는건 고사하고, 군기 자체를 좀처럼 잡는 일이 없었다는 점을 볼 때, 선친의 대인배스러운 품성을 잘 물려받았다.

심상우 의원의 아내 임옥남 씨는 갑작스럽게 남편을 떠나보낸 슬픔을 안고 살다가 2019년 5월 9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2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전남 광주시 6

[[무소속(정치)|
무소속
]]
8,822 (41.41%) 당선 (1위) 초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광주시 ·

36,489 (22.96%) 당선 (1위) 초선 [15]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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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전남 광주시 6구) 11대 총선 (전남 광주시 동구·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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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라남도 휘장(~2000)_white.png 전라남도 제11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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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형
* 광주 동·북 심상우 사망 (1983.10.9.)
* 담양·곡성·화순 정래혁 사퇴 (198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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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광역시 북구 우산동 [2] 미얀마 양곤 관구 아웅산 국립묘지 [3] 안효공파(安孝公派)-훈도공(訓導公) 우현(友賢)파 23세 상(相)○ 항렬, 심상정 국회의원과 같은 항렬이다. () [4] 로케트전기 창업주. [5] 호남전기 2대 총수. [6] 林玉男. 1938년 2월 16일생. 조양 임씨(兆陽 林氏) 임도규(林道圭)의 딸이다. [7] 석사 학위 논문: 특성요인도에 관한 고찰 (1967) [8] 최덕원(崔德元)의 딸이다. [9] 업무 능력은 둘째 치고, 자꾸 회사 돈을 많이 가져가 엉뚱한 곳에 쓰려 해, 운영진이 내심 해임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10] 후임 사장으로 21세의 조카 심홍근이 앉았으나, 경험 미숙과 경영권 분쟁, 방탕한 생활로 회사를 위기로 몰아넣고 1977년 8월 9일에 강릉 옥계해수욕장 부근 개울에서 자살하였다. 결국 호남전기는 1976년부터 호남 연고기업 14개가 인수했지만, 1978년부터 초창기 6주주들 중 하나인 전남일보(= 광주일보) 사주 남봉 김남중(1917~1987)이 경영권 경쟁의 승자가 되었다. 다행히 경제개발 및 유가, 외환, 금리의 3저호황 국면을 활용해 다시 번성하였으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에너자이저, 듀라셀 등 해외 유명 브랜드와 중국산 저가 건전지에 시장을 잠식당했고, 1998년에 로케트 상표권과 판매권을 질레트에 넘긴 뒤 하청업체로 전락하다 2015년 2월에 회사가 정리되어 사라졌다. 반면 자회사 진해전지는 1978년에 세방기업에 인수되어 '세방전지'가 되었다. [11] 70년대에 호남전기 경영권을 "자의반 타의반" 내려놓은 6주주 중 하나인 고판남이, 서울의 서통 전지 후원을 시작, 회사가 본격 성장세를 타기 시작했다는 일화가 있다 [12] 일화 중 하나가 남재희 회고글에 하나 있다. '내가 정치에서 경험한 제일 가는 재담꾼은 심상우(沈相宇) 의원이었다. 당시 정계의 만장일치일 게다. 함께 있으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웃긴다. 돌발적인 일에도 즉각 유머다. 내장산에서 세미나를 할 때, 심 의원 선거구인 광주의 무등산수박을 차로 실어 왔다. 쪼개 보니 거의가 설익은 것이다. 그랬더니 심 의원 마이크를 잡고 "사무국장에게 수박을 보내라고 말했더니 잘못 듣고 호박을 보냈지 뭐예요." 그 심 의원은 코트 제스터(court jesterㆍ궁정 익살꾼) 역할을 맡다가 미얀마에서 불행을 당했다.' [13] 이게 사회분위기가 보수적이었던 80년대 중반 이전임을 감안하면 대단한거였다. [14] 그런데 사망 직전에 찍힌 사진을 보면, 표정이 매우 굳어있는데, 훗날 심현섭이 당시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에게 들은 바로는 그 날따라 아침부터 표정이 굳어있고, 말수도 적었다고 얘기했다. [15] 1983.10.9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으로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