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0:32:44

통일주체국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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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835b38><colbgcolor=#f5f5f5,#2d2f34> 구성 인사(3공) · 인사(4공) · 통일주체국민회의
여당 민주공화당
연립여당 유신정우회
정책 및 방향 제1-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중화학공업화 · 수출주도산업화 · 녹화사업 · 그린벨트 · 새마을운동 ·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 · 국민교육헌장 · 중·고교 평준화 · 한강의 기적 · 한일수교 · 베트남 파병 · 혼분식 장려 운동 · 통일미 · 율곡사업 · 핵무장 · 향토예비군 · 주민등록증 · 재형저축 · 한글전용 · 부가가치세 · 백지계획 · 강남 개발 · 금지곡 · 방위세 · 방위병
평가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 정치 · 사회·문화 · 안보·국방 · 외교 · 경제) · 논란이 있는 평가
타임라인
국가재건최고회의
1961년 5.16 군사정변 · 국가재건최고회의 설립 · 혁명재판 · 전국 18개 학군단 창설 · 수도방위사령부 창설 · 농어촌고리채법 · 은행국유화(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 · 경제기획원 설립 · 중앙정보부 창설 · 한국전력주식회사 창설 · 농업협동조합 창설 ·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 · 연호에 관한 법률 개정
1962년 서력기원 사용 · 문화재보호법 제정 ·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발표 · 주민등록법 제정 · 화폐개혁 · 4대 의혹 사건 · 마포아파트 준공 · 김종필- 오히라 메모 · 대한항공공사 설립 · 5차 개헌 공포 · 제1차 국민투표
1963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족 · 민주공화당 창당 · 3.16 성명 · 감사원 개원 · 의정부역- 능곡역 구간 교외선 개통 · 서울 대확장 · 부산 직할시 승격 · 박정희 의장 예편 후 민주공화당 입당 · 삼양라면 출시 · 서울가정법원 개원 · 제5대 대통령 선거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 구로공단 조성 · 황태성 사건 · 의료보험법 제정
대한민국 제3공화국
1963년 국가안전보장회의 설치 · 파독 근로자 파견
1964년 미터법 실시 · 삼분폭리사건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보완계획안 발표 · 울산정유공장 준공 ·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 · 6.3 항쟁 · 베트남 전쟁 파병안 통과 ·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 · 무즙 파동 · 서독 공식 방문 · 국가기술자격 시행
1965년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 · 독도 밀약 · 수출제일주의 표방 · 제2한강교 준공 · 춘천댐 준공 · 광복회 발족 · F-5 20대 도입 · 원충연 반혁명 사건 · 한일기본조약 조인 · 전매청 신탄진공장 준공 · 야당 불참 속 한일협정 비준 및 베트남 전쟁 파병 동의안 가결 · 베트남 전쟁 1개 전투사단 파병 · 이승만 대통령 서거 · 한국해외개발공사 발족 · 농어촌 전화 사업 추진
1966년 KIST 설립 · 국세청 발족 · 장면 별세 · 태릉선수촌 설립 · 한미행정협정 조인 ·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 국회 오물 투척 사건 · 사카린 밀수 사건
1967년 산림청 개청 ·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 한국외환은행 발족 · 대도시 그린벨트 설정 · 짜빈동 전투 · GATT 가입 · 과학기술처 신설 · 제6대 대통령 선거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 동백림 사건 · 한국수자원개발공사 설립 ·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 · 정부종합청사 착공
1968년 1.21 사태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 684부대 창설 · 서울사범대학 독서회 사건 ·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설립 · 향토예비군 창설 · 주민등록법 개정 · 통일혁명당 사건 · 만화 검열제 · 육군3사관학교 창설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 주민등록증 발급 실시 · 국민교육헌장 발표 · 경부고속도로 서울- 수원- 오산 구간 개통 · 경인고속도로 개통
1969년 교련 과목 개설 · 한국도로공사 발족 · 가정의례준칙 · 서울 중학교 무시험 제도 · 금화시민아파트 준공 · 경부고속도로 오산- 천안- 대전 구간 개통 · 호남정유 여수공장 준공 ·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 MBC 개국 · 3선 개헌 · 제2차 국민투표 · 제3한강교 개통 · 울산고속도로 개통 · 경부고속도로 대구- 부산 구간 개통
1970년 정인숙 살해사건 ·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포항종합제철소 착공 · 새마을운동 제창 · 우편번호제 도입 · 경부고속도로 대전- 대구 구간 개통 (완공) · 호남고속도로 대전- 전주 구간 개통 · 백원 주화 발행 ·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 병무청 설립 · 모산 수학여행 참사 · 전태일 분신 사건 · 번개사업 · 남영호 침몰사고 · 4대강유역 종합개발 계획 확정 · 정부종합청사 개청
1971년 전국 중입시험 폐지 ·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 · 고리 원자력 발전소 기공 · KAIS 설립 · 주한미군 7사단 철수 · 제7대 대통령 선거 · 진산 파동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 광주대단지 사건 · 브레튼우즈 체제 종료 · 실미도 사건 · 국토종합계획 발표 · 통일로 개통 · 영동고속도로 신갈- 새말 구간 개통 · 대연각호텔 화재
1972년 정병섭군 자살사건 · 경주고도개발 10개년 계획 확정 · 7.4 남북 공동 성명 · 통일미 개발 · 8.3 사채 동결 조치 · 제1차 남북 적십자 회담 · 10월 유신 · 울산석유화학단지 준공 · 제3차 국민투표 · 통일주체국민회의 발족 · 제7차 개헌 ·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대한민국 제4공화국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 ·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추진 · 남서울아파트 분양 ·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 · 승압사업 개시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 KBS 설립 · 베트남 전쟁 종전 · 유신정우회 창립 · 윤필용 사건 ·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 서울어린이대공원 개장 · 1973 서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 화전민정리 5개년 계획 수립 · 포항종합제철소 준공 · 대덕연구단지 착공 · 불국사 복원공사 준공 ·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 · 김대중 납치 사건 · 소양강댐 준공 · 제1차 오일쇼크 ·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 태백선 고한- 황지 구간 개통(완공) · 호남고속도로 전주- 순천 구간, 담양지선 개통(완공) · 남해고속도로 개통 · 친아랍 성명 4개 조항 발표
1974년 율곡사업 추진 · 긴급조치 1·2호 선포 · 긴급조치 3호 · 현대울산조선소 제1호선 진수 · YTL30호 침몰 사건 · 서울/부산 고등학교 평준화 첫 실시 · 창원국가산업단지 조성 · 민청학련 사건 · 긴급조치 4호 선포 · 팔당댐 준공 · 속초해전 ·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 ·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 · 새마을호 운행 시작 · 긴급조치 1·4호 해제 · 대왕코너 화재사고 · 주안국가산업단지 준공 ·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
1975년 제4차 국민투표 · 한강 이북지역 택지개발금지조치 · 핵확산금지조약 비준 · 민방위 결성 · 긴급조치 7호 선포 ·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사형 집행 · 김상진 할복 사건 · 종합무역상사 제도 실시 · 여의도 국회의사당 준공 · 영동고속도로 새말- 강릉 구간 개통(완공) · 동해고속도로 개통 · 여천석유화학단지 기공 ·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개장 · 1975 서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1976년 포항 석유 발견 사건 ·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 한독맥주 사건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 서울 UFO 격추미수 사건 ·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 한국수출입은행 발족 · 잠수교 개통 · 국산자동차 현대 포니 첫 수출 · 코리아게이트 · 안동댐 준공 · 함평 고구마 사건 · 직업훈련기본법 제정
1977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백지계획 발표 · 박흥숙 살인사건 · 월성 원자력 발전소 기공 · 고리 원자력 발전소 1호기 가동 · 의료보험 시행 · 부가가치세 시행 · 남해화학 여수공장 완공 ·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 · 구마고속도로 개통 · 이리역 폭발사고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발족 ·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 여천석유화학단지 준공 ·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 제9대 대통령 선거 · 8.8 조치 시행 · 백곰 미사일 발사 성공 · 자연보호헌장 선포 ·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1979년 서울 지하철 2호선 착공 · 정부 제2청사 착공 · 보문관광단지 개장 · 고리 원자력 발전소 3.4호기 착공 · 2차 오일 쇼크 · YH 사건 · 성수대교 개통 ·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 김형욱 실종 사건 · 부마항쟁 · 삽교천방조제 준공 · 10.26 사태 ·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 · 서울의 봄 · YWCA 위장결혼식 사건 · 12.12 군사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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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제10대 대통령 선거 최규하 당선 · 긴급조치 9호 해제 · 12.12 군사반란 ( 하나회 실권 장악)
1980년 1980년 의주 지진 · 5.17 내란 ·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 5.18 민주화운동 ·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 김재규 사형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조직 · 최규하 대통령 하야 최규하 정부 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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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민주정의당
정책 및 방향 3S 정책 · 2기 지하철 계획 · 언론통폐합 · 삼청교육대 · 녹화사업 · 서울 올림픽 유치
평가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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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12 군사반란 · 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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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 안산노동자해방투쟁위원회 사건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노동자해방사상연구회 사건 · 제헌의회그룹 사건 · 대전 성지원 사건 · 김만철 일가족 귀순 · 한국민중사 사건 · 한국여성단체연합 결성 · 평화의 댐 착공 ·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 서울 택시기사 연대파업 · 4.13 호헌조치 ·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 서울남부지역 노동자연맹 사건 · 서대협 결성 · 서머타임제 실시 · 광양종합제철소 준공 · 공기업 민영화방안 확정 · 강우확률예보제 실시 ·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망 사건 · 6월 민주항쟁 · 1987년 노동자 대투쟁 ·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 6.29 선언 · 1987년 노동자 대투쟁 · 문화예술 자율화 대책 · 금지곡 186곡 해금 · 영화 시나리오 사전심의 폐지 · 출판활성화조치 실시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결성 · 독립기념관 개관 ·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 · 장의균 간첩조작 사건 · 한국여성민우회 결성 · 민족문학작가회의 출범 · 전교협 결성 · 신민주공화당 창당 · 평화민주당 창당 · 언론기본법 폐지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 KBS 별관 점거농성 사건 · 제13대 대통령 선거 · 중부고속도로 개통 · 구로구청 선거부정 항의 점거농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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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주체국민회의
統一主體國民會議
National Conference for Unification
파일:통일주체국민회의.png
당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휘장
<colbgcolor=#0a58a5><colcolor=#fff> 상급기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설립일 1972년 12월 23일
설립 근거 대한민국 헌법 제3장
해산일 1980년 10월 27일
후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1. 개요2. 명명 이유3. 헌법
3.1. 제3장 통일주체국민회의3.2. 제4장 대통령3.3. 제6장 국회3.4. 제12장 헌법개정
4. 문제점
4.1. 독재4.2. 대의원 구성4.3. 대통령 선거4.4. 국회의원 선거4.5. 부속법률의 문제
5. 평가6. 여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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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www.kdemo.or.kr/00724624_0001.jpg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1]

대한민국 제4공화국 시기에 존재했던 헌법기관. 1972년 10월 유신으로 설치되었다가 1980년 제5공화국 출범 직전 폐지되었다.[2] 국민주권을 수임(受任)하는 기관으로 명목상 헌법 최고기구였지만, 이름과 달리 통일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았고 국민이 직접 관여할 수도 없는 기형적인 구조의 조직이었다.

이 기구의 역할은 크게 3가지였다. 우선 대통령을 선거할 것, 관선 국회의원을 인준할 것[3], 국회에서 의결한 헌법개정안을 의결할 것이다. 이외에도 "통일 정책 심의" 등의 명목상의 업무가 더 있긴 했지만.

2. 명명 이유

공식적으로는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이후 남북통일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자 "통일을 하되, 우리 민족의 주도로 통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유신헌법의 명분으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삼다 보니 무언가 남북통일 분위기를 피우는 근사한 이름을 갖다붙인 것일 뿐이다. 박정희는 공동 성명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 이를 보여주듯 남북공동성명 이후 2년 만에 남북관계는 급냉각기에 들어갔다. 더불어 김일성도 이 공동성명 이후 신설된 국가주석에 모든 권한이 집중된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4] 주체사상을 이용한 1인 영구 지배체제를 확립했다.

3. 헌법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헌법의 제3장에 규정되어 있었으며(참고로, 제2장이 국민 권리 의무, 제4장이 대통령, 제5장이 정부, 제6장이 국회이었다), 그 밖의 다른 장에도 언급되어 있다.

3.1. 제3장 통일주체국민회의

제3장 통일주체국민회의
제35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온 국민의 총의에 의한 국민적 조직체로서 조국통일의 신성한 사명을 가진 국민의 주권적 수임기관이다.

제36조 ①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대의원으로 구성한다.
②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수는 2,000인이상 5,000인이하의 범위안에서 법률로 정한다.
③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장이 된다.
④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제37조 ①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될 수 있는 자는 국회의원의 피선거권이 있고 선거일 현재 30세에 달한 자로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국민주권을 성실히 행사할 수 있는 자라야 한다.
②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될 수 있는 자의 자격에 관하여는 법률로 정한다.
③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으며, 국회의원과 법률이 정하는 공직을 겸할 수 없다.
④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한다.[5]

제38조 ①대통령은 통일에 관한 중요정책을 결정하거나 변경함에 있어서, 국론통일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심의에 붙일 수 있다.
②제1항의 경우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재적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통일정책은 국민의 총의로 본다.

제39조 ①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토론없이 무기명투표로 선거한다.
②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재적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자를 대통령당선자로 한다.
③제2항의 득표자가 없는 때에는 2차 투표를 하고, 2차 투표에도 제2항의 득표자가 없는 때에는 최고득표자가 1인이면 최고득표자와 차점자에 대하여, 최고득표자가 2인이상이면 최고득표자에 대하여, 결선투표를 함으로써 다수득표자를 대통령당선자로 한다.

제40조 ①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의 국회의원을 선거한다.
②제1항의 국회의원의 후보자는 대통령이 일괄 추천하며, 후보자 전체에 대한 찬반을 투표에 붙여 재적대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당선을 결정한다.
③제2항의 찬성을 얻지 못한 때에는 대통령은 당선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계속하여 후보자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변경한 후보자명부를 다시 작성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제출하고 그 선거를 요구하여야 한다.
④대통령이 제2항의 후보자를 추천하는 경우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거할 국회의원 정수의 5분의 1의 범위안에서 순위를 정한 예비후보자명부를 제출하여 제2항의 의결을 얻으면, 예비후보자는 명부에 기재된 순위에 따라 궐위된 통일주체국민회의선출 국회의원의 직을 승계한다.

제41조 ①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회가 발의·의결한 헌법개정안을 최종적으로 의결·확정한다.
②제1항의 의결은 재적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제42조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조직·운영 기타 필요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3.2. 제4장 대통령

제45조 ①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는 때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늦어도 임기만료 30일전에 후임자를 선거한다.
②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는 3월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 다만, 잔임기간이 1년미만인 때에는 후임자를 선거하지 아니한다.

3.3. 제6장 국회

제76조 ①국회는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의원 및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거하는 의원으로 구성한다.

제77조 국회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한다. 다만,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거한 국회의원의 임기는 3년으로 한다.

3.4. 제12장 헌법개정

통일주체국민회의로 인하여 헌법개정 절차가 2개의 방법을 가지게 된다. 하나는 대통령이 제안하고 국민투표를 거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국회의원이 제안하고 국회의 의결을 거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결을 거치는 것이다. 제5공화국 헌법으로 바꿀 때 전자의 루트로 개정되었으므로, 후자의 방법은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 사실상 이 방법은 쓸 수가 없다. 국회의원 제안→재적의원 3분의 2 찬성→통일주체국민회의 의결 확정으로 헌법을 바꾸는 루트는 사실상 봉쇄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일단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유신정우회 의원이 국회의원 의석의 1/3을 차지한다. 또 이렇게 통과되면 국민투표로 가는 게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결로 가버린다(…).
제124조 ①헌법의 개정은 대통령 또는 국회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로 제안된다.
②대통령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은 국민투표로 확정되며, 국회의원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은 국회의 의결을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결로 확정된다.

제125조 ①국회에 제안된 헌법개정안은 20일이상의 기간 이를 공고하여야 하며, 공고된 날로부터 60일이내에 의결하여야 한다.
②헌법개정안에 대한 국회의 의결은 재적의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③제2항의 의결을 거친 헌법개정안은 지체없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 회부되고 그 의결로 헌법개정이 확정된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 회부된 헌법개정안은 회부된 날로부터 20일이내에 의결되어야 한다.

4. 문제점

4.1. 독재

10월 유신으로 유신헌법이 선포되면서 조직되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게 되는 간선제로 바꾸는 것이다. 겉모습으로는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거인단을 선출하는 미국 선거인단과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아니었다. 박정희는 대화 타협에 의한 의회제도를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였으며, 특히 견제 비판이라는 민주정치의 기본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야당을 쓸데없이 발목만 잡는 쓰레기 집단으로 생각했다.

제7대 대통령 선거 때 선거비용으로 700억원[6]을 뿌리고도 신민당 김대중 후보에게 불과 950,000표 차이로 간신히 승리한 것이 박정희로서는 대통령 직선제에 대해 염증을 느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미 그 선거에서 " 다시는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해서 직선제 하에서는 다시 대통령 선거에 도전할 수도 없었고 설령 어찌저찌 다시 도전할 수 있다고 쳐도 그렇게 말했는데도 1,000,000표도 안되는 격차로 이겼으니 다음 선거에서는 이길 것이란 가능성이 적었을 것이다.

의장은 현직 대통령이 맡았고, 통일 관련 중요 정책의 결정이나 변경 사항이 있을 경우 재적 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 바꿀 수 있었다. 국회의원 정수의 1/3 선출, 헌법개정안의 최종 확정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실상은 몇년에 한 번 체육관에서 박정희 대통령 선출안과 박정희가 지명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명단을 거의 만장일치 박수로 통과시키는 거수기에 불과했다. 1년에 한 번 모여서 김일성, 김정일 또는 김정은이 제안한 모든 안건을 찬반여부 당원권 들면서 의견표시 이후 만장일치 박수로 통과시키는 북한 최고인민회의와 똑같았다. 그렇게 통일주체국민회의로 입법과 행정을 다 해먹었다. 정권에 장악된 지 오래인 사법계[7]는 말할 것도 없으니 삼권분립은 이로서 완벽하게 붕괴된 셈이다.

유신정우회에 관해서는 대통령이 추천한 국회의원 명부 전체에 대해서 찬반투표를 했다. 만일 사람 한 명마다 찬반 투표를 했다면 그나마 의미가 있었겠지만, 명단 전체를 통으로 찬반투표를 하니 눈가리고 아웅이었다. 하나씩 뽑건 통으로 뽑건 반대표가 나왔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모여서 투표를 하여 뽑았기 때문에 " 체육관 대통령"이라고도 불렀다. 제8, 9대 대통령 박정희와 10대 대통령 최규하, 11대 대통령 전두환을 이 방식으로 선출했고 제5공화국에서는 선거인단에서의 선출방식으로 바뀌면서 폐지되었으나 간선제의 방식은 그대로였다.

4.2. 대의원 구성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대략 도시는 1개 동마다 1명, 농어촌은 면마다 1명씩 직접선거로 선출했다. 후보는 여러명으로 대략적인 경쟁률은 2:1 수준이었다. 그러나 출마후보들의 직업을 살펴보면 기업인[8]을 비롯해 예비군 지휘관, 새마을 부녀회장, 반공연맹(현 한국자유총연맹) 지부장, 지역농협 조합장[9], 한국노총[10] 계열 노조위원장 등 전형적인 관변 성향 지역유지들이었다.

이렇게 정권 입맛에 맞는 후보자만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후보자 등록 요건이 1. 30세 이상인자라는 조건 외에도, 2. 평화적인 통일을 위하여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라는 참 도깨비 방망이와도 같은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당표명금지라는 조항이 포함되는데, 이건 이전에 정치적 성향을 보인 사람들을 전면 배제할 수 있게 해주는 조항이었다.[11] 이러한 요건과 관권 개입으로 야당 인사의 출마는 원천봉쇄했으며 반대운동도 탄압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대의원 선거는 한자리 하고 싶은 지역유지들끼리 도토리 키재기 선거로 흘러갔다.

공식적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들은 정당표명을 금지하고 자신이 누구를 지지하는지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후보자 등록에 들어갔으며 공식적으로는 어떤 성향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투표하라니까 하는 수준으로 투표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대의원들이 독자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면 지방선거의 의미라도 있었겠지만, 대의원에게는 명목상의 찬반 권한만 있기 때문에 대의원이 각자의 지역을 위해서 뭘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었다.

여기까지 만들어두면 이제 후보군들은 박정희 지지라는 사상검증이 끝난 상태이다. 따라서 그 뒤로는 지방선거와 비슷한 형태로 아무런 개입 없이 공정한 양 투표를 시켜도 결과에 문제가 생길 수가 없다. 왜냐면 후보 A=박정희 지지, 후보 B=박정희 지지, 후보C=박정희 지지이기 때문이다. 누가 되어도 결과는 같다.

4.3. 대통령 선거

가장 중요한 기능은 역시 대통령 선거였는데, 후보 등록에는 대의원 200명의 추천이 필요하며, 토론 없이 무기명으로 투표를 했다. 대의원 후보자들이 모두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이었기 때문에 야당 후보는 대의원 200명 추천을 받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선거는 매번 집권당 단일 후보 한명을 두고 벌이는 찬반투표로 사실상 요식행위였다.

실제로 첫 회 실시된 1972년 제8대 대통령 간접선거에서는 총 2359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가운데 2명의 표가 무효 처리됐다. 후보는 당연히 박정희 하나뿐. 그 무효도 박정희의 한자 잘못 쓴 게 원인이었다. 반대는 물론 없었다. 그 뒤에도... 이름을 잘못 쓰지 않았다면 100%가 되었을 것이다.

계속해서 이런 식이었다.

4.4. 국회의원 선거

두번째로 중요한 기능은 국회의원 선거였다. 유신 헌법에 따라 국회의원 중 3분의 2는 원래대로 국민들의 투표로 뽑았지만, 3분의 1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뽑았다. 정확히는 대통령이 지명자 명단을 정해서 발표하면 대의원들이 찬반 투표를 통해 가결하는 방식이다. 즉 말이 선거지 사실상 인준이다. 코렁탕을 먹고 싶지 않고서야 반대 투표를 하기 어려운 분위기는 덤이다. 그것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지명자에 대해 개별적으로 찬반 투표를 하는 게 아니라, 폐쇄형 비례대표 명부제처럼 명단 전체에 대해서 한 번 투표하는 것이다. 물론 찬성표 비율대로 지명자가 선출되는 것이 아니고 지명자 전체가 선출된다.
  • 제9대 국회
    • 전반기: 찬성 2,251표, 반대 82표, 무효 21표 (재적 2,359명 중 2,354명 투표)
    • 후반기: 찬성 2,274표, 반대 8표, 무효 7표 (재적 2,303명 중 2,289명 투표)[13]
  • 제10대 국회
    • 전반기: 찬성 2,539표, 반대 23표, 무효 11표 (재적 2,581명 중 2,573명 투표)

이렇게 해서 당선된 간선 국회의원들은 어째서인지 민주공화당에도, 신민당에도 들어가지 않고 유신정우회라는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심지어 원래 민주공화당이나 신민당 당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도 임명과 동시에 탈당했다. 이들이 민주공화당에 입당하면 대놓고 여당이 의회를 장악하게 하기 위해 간선 국회의원을 도입한 것임을 자인하는 꼴이 될까 봐 "이 의원들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이라고 우기려 한 것으로 보인다.[14] 제10대 국회가 전반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강제 해산되면서 간선 의원들은 3기를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4.5. 부속법률의 문제

유신헌법의 헌법부속법률인 통일주체국민회의법에는 아래와 같은 규정들이 있었다. 그 자체는 국회법과 비슷하나, 대통령의 친위 기관이 국회 흉내만 내는 모습이라 대단히 폭압적인 뉘앙스를 띄게 되었다.
제25조 (발언) 대의원이 발언하고자 할 때에는 미리 발언할 내용의 요지와 소요시간을 정하여 의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대의원은 '발언'을 하고 싶으면 미리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어느 의회에나 발언 시 의장의 허가를 얻도록 하는 규정은 있다. 실제로 국회법의 경우 의원이 발언 시 의장의 허가를 받을 것을 제99조에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의장이 가진 직위의 무게감이나 현실 권력이 차원이 다르다. 따라서 국회에서보다 발언을 하기 훨씬 까다롭다.
제27조 (표결방법) ① 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거할 때에는 등록된 후보자에 대하여 토론없이 무기명으로 투표용지에 후보자 1인의 성명을 기재하는 방법으로 투표하여 표결한다.
②국민회의에서 국회의원의 선거, 헌법개정안의 의결·확정, 대의원의 징계 또는 자격심사를 할 때에는 무기명투표로 표결한다.
제1항과 제2항에 정하여진 이외의 의안의 표결은 의장이 대의원으로 하여금 기립하게 하여 가부를 결정하거나, 이의의 유무를 물어서 이의가 없다고 인정한 때에는 가결되었음을 선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의가 있을 때에는 의장은 기명 또는 무기명투표로 표결하거나 대의원으로 하여금 기립하게 하여 가부를 결정한다.
대통령 선거와 헌법 개정안 이외의 안건에 관한 투표는 대통령이 "이의 있으면 일어나봐."라고 하거나, "이의없지? 넘어가자."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국회법 제112조 제3항에도 "이의 없으면 가결!"을 외칠 수 있는 규정이 있는데, " 이의 있습니다!"를 외치는 의원이 1명이라도 있으면 정식으로 표결해야 한다.[15] 형식상으로는 저 법에서도 그러도록 하고는 있지만, 대통령에게 이의를 제기한다는 조건은 대단히 무겁다는 점이 문제다. 그렇잖아도 대통령의 친위기관이 되도록 설계되어있는 기관이라 이의가 먹힐 가능성 역시 너무 낮다.
제28조 (투표절차)
④투표의 수가 명패의 수보다 많을 때에는 재투표를 한다. 다만, 투표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할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현행 국회법 제114조 제3항에도 똑같이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기관이 기관이다보니, 대놓고 부정표결을 해놓고 어물쩍 넘어갈 수 있게 장치해둔 것 같은 기묘함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는 그럴 필요도 없었겠지만...
제34조 (의사절차의 결정) ① 국민회의의 의사절차·표결·투표·개표등의 절차와 방법 기타 회의의 운영이나 의사진행등에 관한 모든 절차는 이 법과 이 법에 의한 대통령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장이 정한 바에 의한다.
②제1항의 결정에 대하여는 누구든지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견을 진술할 수 없다.
국민회의의 의사진행에 관한 모든 절차는 법령에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통령이 결정한다. 그리고 이 결정에 대해서 누구든지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견을 진술할 수 없다.

5. 평가

간단히 요약하자면 대한민국판 최고인민회의, 전국인민대표대회이다. 당시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북한 선거제도를 두고 후보는 한 명이며, 실질적으로 반대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비판했는데 사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상황. 다만 북한과 달리 지역구 국회의원은 야당 후보를 뽑을 수 있기는 했는데, 결국 실질적인 정권 견제에는 거의 도움이 안 되었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유신정우회를 포함해서 여당이 개헌선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16]

당시 이를 이용하여 정권을 비판하는 지하 유인물이 나오기도 했는데, 제9대 대통령 선거가 체육관 선거로 진행되자, 재야 민주 단체인 한국인권운동협의회에서 이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어서 뿌렸다. '유신헌법 철폐', ' 긴급조치 해제' 등 정권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쓰면 잡혀간다는 점을 교묘히 우회해서, 유인물 앞면에는 당시 반공 교과서에 수록된 "북한 애들은 선거를 형식적으로만 하며 빨갱이 국가는 100% 찬성률이 나옴"이라는 부분을 집어넣고, 뒷면에는 99%의 찬성으로 박정희가 재선된 1978년 당시 신문기사를 가감없이 그대로 실어 놓은 것. 당시의 검열을 통과한 신문 기사와 정부에서 발행한 반공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실어 놓았기 때문에 당시의 긴급조치법으로도 이 유인물을 배포 및 제작한 사람들을 처벌할 수 없었다.
공산국가에서도 형식상 선거를 치른다. 그러나 그 선거는 민주주의국가에서 실시하고 있는 선거와는 다른 일종의 사기행위이다. ……우선 공산국가의 선거에서는 단 한사람의 입후보자에 대하여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것을 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유권자는 찬성할 수 있는 자유는 있어도 반대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 선거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많은 사람 중에서 적격자 한사람을 고르는 선택행위인데 입후보자가 한사람밖에 없다는 것은 벌써 선거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선거 결과는 항상 99% 이상의 투표율과 99% 이상의 찬성으로 나타난다. 이런 선거 분위기 속에서 반대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공산당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의무만이 있을 뿐 다른 어떤 권리도 인정되지 않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국가들임을 알 수 있다.
— 대한민국 문교부가 발행한 중학교용 교과서 《승공통일의 길 2》 47, 52, 53쪽 내용 일부 출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6일 상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오는 84년까지 재임할 임기 6년의 제9대 대통령을 선출한다. 국민회의는 6일 상오 10시 개회식을 한 뒤 단일후보인 박대통령에 대한 제9대 대통령 선출 투표에 들어간다.
— 7월 6일 《 한국일보》 1면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차 회의는 6일 상오 10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회식을 갖고 현 박정희 대통령을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제2대 국민회의 대의원 2583명 가운데 2578명이 참석, 박정희 후보가 2577표(무효 1표)를 얻어(99.9%) 임기 6년의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 7월 7일 《한국일보》 1면)

조갑제의 저서 <유고>(1987)에서는 이 유인물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유신시대에 나온 수많은 지하 유인물 중에서 이것만큼 간결하고 탁월하며 뚜렷한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은 없다. 객관성과 함축성, 유신체제의 본질을 까발린 간결성·해학성으로 해서 이 전단은 예술적 감동마저 주고 있다. 이 전단을 지하 유인물 가운데서 베스트셀러로 만든 것은 안전성 덕분이었다. 여기에 인용된 것은 모두 유신체제에 편입된 제도언론과 관제 교과서였기 때문에 법으로 옭아맬 아무런 꼬투리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전단엔 주관적 서술이 없다. 그런 것은 오히려 군더더기로 느껴질 만큼 비교법이 완벽하다.

6. 여담

  •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운영을 심사하는 20~50여명의 운영위원을 '의장'(대통령)이 직접 임명했다. 국회운영위원회와 이름이 같지만, 그냥 가끔씩 모여서 활동 계획 논의하는 모임에 가까웠다.
  • 장충체육관에서 모여서 연 ' 체육관 선거'가 유명한데, 꼭 이렇게만 모인 것은 아니고 대통령 선거가 아닌 유신정우회 거수기(...) 노릇을 할 때는 지역별로 모이는 경우도 있었다. 관련기사 지역회의는 각 도(道)의 지정 체육관에서 모이고, 투표를 한 다음 봉함하고 서울에서 집결하여 투표를 집계하는 방식이었다. 관련기사
  • 사무집행기구인 사무처에는 별정직 사무총장과 차장을 두었다. 업무는 다른 국가기관에 위탁해서 처리하거나, 다른 국가기관에서 사무처를 겸직할 수 있었다.
  • 대의원은 국회의원, 공무원을 겸직하는 것이 금지되며, 정치 관여 역시 엄격하게 금지된다.
    • 대의원이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면 2년을 기다려야 했다.
    • 대의원 선거에 출마하려는 정당원은 선거 공고일로부터 5일 이내에 탈당해야 한다.
  • 선거구는 1630개 정도. 소선거구 중선거구가 섞여 있었으며, 선거구의 인구에 따라서 1~5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인구 2만 이하의 읍면 선거구는 1인, 인구 2만 이상의 선거구는 2만명을 넘을 때마다 +1명씩 되며[17] 최대 10만명까지 한 선거구에 묶이게 되므로 최대 5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가 나올 수 있다. 유권자는 후보자 가운데 1명에게만 투표하며 중선거구에서는 득표 순위에 따라서 선출된다. #
  • 선거는 완전한 선거공영제. 1. 합동연설회 2. 선거공보 3. 선거벽보 3가지만 허용되었다. 그 외의 방법으로 하는 후보자 개인의 선거운동은 금지되었다. 연설은 20분으로 제한되고 주제는 유신에 관한 것이어야 했으며 연설 중에 정당 지지 등의 발언은 불허되었다.
  • 피선거권을 얻으려면 30세 이상 국회의원 피선거권이 있는 자로 2년간 같은 선거구에 거주해야 했다.
  • 후보자 등록을 하려면 유권자 300명 이상(5천 명 이하 선거구는 100명)이 기명날인을 한 추천장이 필요했다. 이때 이미 다른 후보를 추천한 유권자로부터 추천을 받으면 후보등록이 '무효'로 처리된다.
  • 1972년 초대 대의원 선거 때에도 각 선거구에 평균 2.5명 정도가 입후보해 경쟁률이 저조하다는 평을 받았는데, 1978년 제2대 대의원 선거에 이르러서는 그보다 떨어진 2.16명을 기록했다. 심지어 초대 대의원 중 67%만이 재선에 도전했는데, 처음에는 대의원이 국회의원처럼 중요한 자리인 줄 알았다가 사실은 하는 일 없는 명예직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관심이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대의원은 명예직이며 세비나 보수는 주어지지 않았다. # 다만 회의참석 수당과 교통비 등의 경비는 지급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
    • 당선자에게는 메달과 수첩을 부상(?)으로 주었다. 검색해보면 가끔 올려놓은 사람이 있다.
      경비내역 72년~77년 77년 이후

      회의 출석 수당 하루 1천원 하루 5천원

      왕복 교통비 8천원 1만원

      (도서지방) 1만 8천원 2만원

      숙식비 하루 7천 2백원 하루 1만1천5백원

      시내교통비 2천원 3천원

      참고로 소비자물가지수에 의한 화폐가치계산에 따르면 1972년의 1만원은 2020년의 169,650원, 1977년의 1만원은 83,140원에 상당한다.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사실상의 후신.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면서 그 사무처 인원들은 물론, 장충체육관 옆에 있는 사무처 청사 등 물적 구성과 통일여론 조성이라는 업무가 평화통일자문회의로 넘어갔으며, 1987년 그 명칭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로 바뀌었다.

7. 관련 문서



[1]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은 애초에 한 곳에 모일 일이 6년에 한 번 밖에 없기 때문에 굳이 국회의 국회의사당처럼 따로 건물을 마련하지 않고 대신 장충체육관에서 모였다. 이러한 점에서 답정너식 간접선거, 부정선거를 뜻하는 말인 ' 체육관 선거'가 유래하였다. [2] "이 헌법 시행과 동시에 이 헌법 시행당시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폐지되고 그 대의원의 임기도 종료된다." ( 제8차 개정 헌법 부칙 제4조). [3] 유신 헌법에 따라 국회의원의 3분의 1은 국민의 투표로 뽑지 않고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변경되었다. [4] 당연히 국가주석은 김일성 자신이었다. [5] 이는 유신헌법의 대통령 임기와 맞춘 것이다. [6] 당시 대한민국 전체 국가예산이 4,900억원 정도였으니 7분의 1인 셈이다. 참고로 2014년 국가예산은 357조 7,000억원이다. [7]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은 대법관을 포함한 법관의 임명권과 파면권이 있다. [8]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와 박병규 해태그룹 창업주가 대표적인 예이다. [9] 당시 농협은 대통령이 농협 중앙회장을 임명하고, 이 중앙회장이 각 지역농협장을 임명하는 체계로 사실상 정권이 통제하는 어용단체였다. 이 때문에 1980년대 이후로는 지역마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농민회가 탄생하였다. [10] 이 당시 한국노총은 정권이 통제하는 어용노조 였다. 한국노총 위원장은 임기를 마친 후에 보통 근로자대표 명목으로 집권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승진하곤 하였다. [11] 현재는 정치적 중립이 강하게 요구되는 교육감 선거 정도에만 정당표명 금지가 규정되어 있다. [12] 박승국 전 국회의원이 그 무효 1표는 자신이 기표한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물론 그 회고가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13] 그새 사망하거나 사퇴한 대의원이 70명에 달했지만 한 번도 보궐선거를 하지 않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에 " 대의원에 궐원이 생긴 때에도 재적 대의원 수가 2천 인 이상인 경우에는 보궐선거를 행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써 있기 때문. 자기들 스스로도 이 기구가 하는 일 없는 명목상 기구임을 알았기에 보궐선거 같은 돈 낭비를 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14] 물론 민주공화당 역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들을 탐탁치 않게 여겨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상호 성향이 안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15] 다만, 이를 무시한 사례는 민주화 이후에도 정말 수도 없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국회 날치기 상황. [16] 득표율은 신민당이 더 높았지만 2인 선거구로만 구성된 중선거구제로 의석은 공화당이 더 많았다. 그리고 1/3은 대통령이 지명하는 유정회이니 결국 개헌선 2/3을 장악한 건 동일했다. [17] 즉 한 선거구에서 선출되는 대의원 수는 해당 선거구의 인구수에서 나누기 2만을 하고 소수점 이하는 올린 숫자로 한다. [18] 당시에는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의 유지였다고 한다. [19] 참고로 이 법의 폐지안을 발의한 사람은 자유한국당 전희경 의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