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03:22:39

신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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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上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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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신상현(申常鉉)
출생 1932년 ([age(1932-01-01)]세)
경기도 경성부 관수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
병역 육군 특무부대 1등상사 전역 (1949년 ~ 1953년)
신체 178cm, 80kg
직업 조직폭력배
별명 명동의 황제[1]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본격적으로 주먹생활을 시작하다2.3. 무교동파와의 충돌2.4. 신군부 집권기2.5. 은퇴 이후
3. 여담4. 대중매체에서
4.1. 드라마 무풍지대4.2. 드라마 야인시대4.3. 드라마 명동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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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동의 황제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진 대한민국 조직폭력배. 명동 신상사파의 두목으로 전국구 주먹으로 유명하다.

군대에서 상사로 전역하여 신상사란 별명을 얻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932년 경기도 경성부 관수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에서 출생했다. 양복점을 운영한 부친 덕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학창시절 운동을 좋아해 권투, 유도, 검도를 배웠다. 이후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일본어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인 교사에게 자주 심한 체벌을 당했고, 이 때문에 학업에 충실하지 못해 결국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1949년 육군에 입대한 신상사는 3개월간 훈련을 받은 뒤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되었고 이때의 공으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듬해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강구리 강구항에서 조선인민군과 처절한 전투를 벌이던 중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치료를 위해 후방으로 이송된 그는 잠시 제9보병사단 제30보병연대에 배속됐다가 시험을 통해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인 육군 특무부대에 발탁되었다.[2]

2.2. 본격적으로 주먹생활을 시작하다

전쟁이 끝나는 해인 1953년 신상사는 육군 특무부대 1등상사 계급으로 전역했다. 이 선택엔 조선인민군과의 전투에서 입은 총상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후 1년을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더 머무른 그는 지역의 알아주는 주먹들을 모두 때려눕혔다. 대표적으로 씨름선수 출신 박치덕과 최시헌, 대구 K2 공군기지 군무원 갑빠가 그들이다. 특히 갑빠와의 결투는 "5분 동안 정신없이 때리고 보니 상대가 큰 대자로 누워있어 병원에 실어 보냈다."라고 회고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대구시 병 선거구 독립운동가 출신 이갑성 자유당 후보로, 이우줄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격돌하게 되었다. 당시 이우줄을 낙선시키라는 자유당의 특명이 하달되었고, 신상사는 경찰로부터 도움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선뜻 제안을 받아들인 그는 이우줄 후보의 유세장에서 난동을 피우며 방해했지만 선거 운동원 수십 명으로부터 집단 린치를 당했다. 선거 결과 역시 이우줄이 당선되었다.[3] 그는 이때를 악몽 같은 순간으로 기억하며 다시는 정치권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954년 고향 서울특별시로 돌아온 신상사는 중구 명동 중앙극장 옆에 자리 잡았다. 곧이어 양정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 등 전통의 명문 고등학교에서 주먹이 제일 강한 1진들을 휘하 조직원으로 두었다.

이후 명동황제 이화룡을 잡기 위해 을지로 태양다방에서 그로 지목된 사람을 흠씬 두들겨 팼다. 하지만 피해자는 이화룡이 아닌 그와 닮은 전파사 사장이었다. 이 소문이 돌자 이화룡의 직계 이영복이 50~60명의 조직원을 이끌고 신상사의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이후 신상사도 5~6명의 부하를 이끌고 이영복의 집을 습격하는 등 항쟁이 계속되었지만, 이화룡의 또 다른 직계 박일갑의 중재로 양측이 화해했다. 이후 신상사는 일단 본인은 부정하고 있지만, 범 명동파의 행동대장이 되었다.

신상사와 이화룡, 가장 오른쪽 인물은 신상사파 부두목 구달웅. 당시 명동파의 라이벌이었던 동대문사단의 행동대장 유지광 휘하에는 신상사파와 달리 학창 시절 2진들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고등학교 때부터 신상사파 조직원들에게 주눅이 들어 있었던 그들은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명동 세력에 밀렸다고 한다.

1955년 신상사는 5명의 종로파 조직원으로부터 몰매를 맞고 있던 김응규라는 사람을 구해준 뒤 그를 조직원으로 받아들였다. 김응규는 종로파 두목 아오마스에 대한 복수심이 대단했는데, 신상사는 이후 아오마스가 국일관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그를 찾아가 흠씬 두드려팼다. 당시 아오마스는 도망치기 위해 2층에서 뛰어내렸지만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세간에 국일관 사건으로 불리며 김두한의 후계자 아오마스가 새파란 후배인 신상사에게 개망신을 당한 사건으로 알려졌다.

1956년 신상사는 황금마차 습격사건에서 쳐들어온 동대문사단 조직원들을 박살 내고 1957년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을 저지른 뒤 도주하는 과정에서 명동파의 구역을 침범한 동대문사단 조직원들을 때려눕히는 등 두 조직 간 항쟁의 최일선에서 싸웠다. 그러나 1958년 충정로 도끼 사건으로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지만 상소하는 과정에서 형량이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출소한 신상사는 명동을 기반으로 조직을 재건했는데, 이 시기에 서울 주먹계를 사실상 평정했다고 전해진다. 기존의 최강 조직이던 동대문사단은 5.16 군사정변으로 두목 이정재가 사형당하고 남은 조직원들이 정종원과 유지광의 세력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전화위복으로 신상사가 무주공산인 서울을 접수하기가 쉬웠다. 특히 신상사는 5.16 이후 마산에서 서울로 상경한 구달웅을 만났고 이후 그를 부두목으로 삼는다.

신상사는 일본 3대 야쿠자 조직 중 하나인 이나가와카이의 중간보스 출신이자 니시야마 미노루란 이름으로 알려진 서순종과 권투 사업 및 여러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서순종[4]은 대한민국 최초의 권투 세계 챔피언 김기수를 키워냈는데, 그 외에도 유제두, 박종팔, 박찬희, 염동균, 김지원, 최점환 등 다수의 세계 챔피언을 배출했다.[5]

이 시기 신상사는 구달웅을 두목 대행으로 삼아 대부분의 조직 살림을 맡기고 자신은 지방의 거대 조직이나 일본의 야쿠자 조직과 제휴하는 등 큰일에만 직접 관여했다고 한다.

2.3. 무교동파와의 충돌

오랫동안 서울 주먹계 정점에 서있던 신상사는 이북에서 내려온 대구 출신으로 염천시장을 장악한 조창조와 정학모[6], 오종철을 필두로 무교동을 장악한 호남 출신 폭력배들이 힘을 합친 신흥 세력 무교동파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이에 대표적인 사건으로 서순종 납치사건이 있다. 당시 건설공사 관련 문제로 서순종을 납치한 무교동파는 그를 구하러 온 신상사파 조직원을 무자비하게 린치했다. 격노한 신상사는 구달웅과 전철웅을 투입하여 서순종을 잡고 있던 무교동파의 에이스 이경원을 각목으로 두들겨 패 초주검으로 만들고 서순종을 구출해냈다. 이후 벌어진 사건이 그 유명한 1975년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이다. 당시 무교동파는 명동파에게 사과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해 와 신상사를 비롯한 간부들이 자신들의 아지트 사보이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도 무교동 측이 오지 않자 신상사와 구달웅은 자리를 떴다. 얼마 뒤 무교동파 행동대장 조양은이 이끄는 조직원들이 회칼과 야구방망이를 들고 난입했다.

당시 조양은이 노린 메인 타깃이자 신상사의 매제인 김수일[7]은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맞아 피가 솟구쳤고, 우연히 자리에 있던 목포 출신 한 조폭은 구달웅으로 오인받아 온몸을 회칼로 난자당했다.[8] 김수일은 장시간의 뇌 수술을 받아 겨우 소생했지만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고 온몸을 난자당한 목포 출신 조폭도 마찬가지 과정을 겪어야 했다.

사보이호텔 사건 이듬해 벌어진 남산 도큐호텔 사건 역시 사소한 시비에서 비롯된 충돌 끝에 호남 출신 폭력배들이 신상사파를 습격하여 구달웅의 머리를 도끼로 찍고, 다른 조직원의 다리를 칼로 찔렀다. 당시 칼에 찔린 모 조직원은 도망치는 호남 조폭을 붙잡은 뒤 자신의 다리에 박힌 칼을 뽑아 상대의 귀를 자르고 "귀를 찾으려면 내일 사보이호텔로 나를 찾아오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하고만 있을 신상사파가 아니었기에 김태촌을 시켜 오종철을 칼로 난자해 은퇴시키고[9] 결국 조창조의 항복을 받아내는 등 맹렬한 보복과 반격으로 무교동파를 사실상 와해시켰다. 2013년엔 중앙일보와 당시 일을 인터뷰하였다.

조창조 역시 2008년 인터뷰에서 “사실 달걀로 바위치기였어요. 부끄러운 얘기지요. 사보이호텔사건으로 신상사파라는 조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됐습니다. 신상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사건이 나자 서울사람들의 응집력이 강하게 나타나더군요. 평상시 숨어 있던 신상사파의 방대한 세력이 드러났습니다. 힘으로도 돈으로도 백으로도 우리가 이길 수 없었습니다. 당시 양은이가 20대였습니다. 뭘 알겠습니까."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이야기로 알 수 있듯 사실이 한참 와전되어 신상사가 조양은에게 칼부림을 당해 패배하거나 은퇴했다는 말이 꾸준히 잘못 알려져 왔다.

2.4. 신군부 집권기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자 조직폭력배에게 철퇴를 가했다. 당시 신상사파 부두목 구달웅은 군사재판에서 사형 구형을 받고 1심에서 15년형을 받았다. 이에 신상사가 그를 구명하기 위해 당대 제5공화국 권력의 핵심이었던 노태우를 직접 만났다. 결국 노태우가 박재명 육군본부 법무감에게 써준 의견서 덕분에 구달웅의 형량은 6년 4개월로 감형되었다.[10]

1980년 말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신상사는 2개월 동안 훈련을 받았다. 일부 그를 알아보아 위로의 말을 건네는 지휘관과 조교들이 있었지만 일체의 차별 대우는 없었고, 새파랗게 젊은 교육생들과 악명 높은 봉 체조 등 모든 훈련을 동등하게 받았다. 신상사는 이때의 경험을 지옥 같은 2개월이라고 묘사하며 수치감을 동반한 심신의 피폐함을 경험했다고 한다. 굳이 특혜를 꼽자면 모든 훈련이 끝난 뒤 대대장이 따로 불러 자신에게 라면 하나를 대접한 것이었다.

이후 신상사는 이태원 미합중국 육군 제8군 사령부에서 다른 조직들이 큰 피해를 본 것과는 달리 신상사파는 유흥업소 갈취 등 서민 대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정권 인맥을 잘 이용해 별 피해가 없었다고 밝혔다.[11]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검경에서 흉악범죄를 저지르고 수배를 피해 잠적한 조폭들을 자수시키기 위해 신상사를 찾아갔다고 전해진다.[12]

2.5. 은퇴 이후

이후 판매점, 수입 자동차 대리업 같은 사업을 하다 2004년 땅 주인으로부터 1억 5,700만 원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는 충정로 도끼 사건 이후 약 46년 만에, 삼청교육대 이후 약 24년 만에 신상사가 구금된 사건이었다. 당시 한 검찰 관계자가 “신씨 소환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후배 조직원 십수 명이 동행하기도 했다. 신씨가 칠순에 접어들었지만 지금도 혼자서 2명 정도는 너끈히 상대할 정도로 몸이 건강하고 날렵했다."라고 전했다. # 또 다른 검찰 관계자는 “진정인들이 가명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신상사’라는 이름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라고 전했다. # 후속 보도가 없는 것으로 보아 합의 등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지 않고 흐지부지된 것으로 보인다.

2007년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의 아들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다.

2009년 서울 강남에서 신상사 딸의 결혼식이 열렸다. 유명인들의 축하 화환이 줄을 이었고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을 포함한 전국의 조직폭력배와 일본의 3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 스미요시카이, 이나가와카이의 간부가 포함된 약 4,000명의 하객이 다녀갔다. 거물급 하객의 대부분은 외부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예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얼굴만 잠깐 비추고 돌아갔다고 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경찰관 수백 명이 배치되었고 개그맨 강성범이 사회를 봤다. 단독보도-서울 강남에 전국 조폭 5,000명이 모인 까닭은?

2010년 수도권 일대에 투견장을 만들어 도박판을 열고 금품을 갈취한 혐의로 경기지방경찰청에 불구속 입건되었으며 폭력 교사, 불법 도박 등의 혐의를 받았다. # 그러나 이 사건은 다른 피의자들이 신상사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무혐의 처리되었다.

2013년 월간중앙과 인터뷰를 하고 회고록을 출판했다. 주먹으로 꽃을 꺾으랴

2022년 고령의 나이에 거동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13]의 팔순 잔치에 참석했다. 당시 사회를 맡은 유명 개그맨이 “지금 이 자리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회장님(신상사)이 계신다. 큰 박수로 맞이해주시길 바란다” 라고 언급했다. ‘깍두기 인사’ 대신 ‘구찌 클러치’ 든 하객… 조폭이 달라졌어요

2023년 6월 6일 어느 결혼식에 참여했는데 정대철도 보인다.

3. 여담

  • 세간엔 명동황제 이화룡의 직계로 알려져 있으나, 인터뷰에 따르면 형님으로 모시긴 했지만 느슨한 연합 관계였다고 한다.
  • 김태촌이 살아생전 인정한 7명의 전국구 두목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인정하는 주먹계 보스로 정종원, 신상사, 조일환, 이승완, 박종석, 정학모, 이강환 등을 꼽았다. #
  • 체격이 상대적으로 왜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드라마에서도 그렇게 묘사되는데, 정작 goodday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좀 마르긴 했어도 키가 178cm 몸무게는 80kg으로 나온다.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굉장한 키이지만 현재는 고령으로 3cm 이상 키가 줄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설사 체구가 작아보인다고해도 그런 일반적인 건달들에 비해서 작다는 것이니 괜한 오해는 절대로 하지 말자.
  • 회고록에서 자신의 싸움 기술을 밝혔는데 탁월한 발차기 실력, 번개 같은 선제공격, 단호하고 과감하게 상대의 눈을 순식간에 찌르며 급소를 가격하는 능력이 출중했고 싸움을 단번에 끝내는 실력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기 힘들었다고 한다.
  • 유튜브에 인터뷰 영상이 있다. 목소리가 상당히 괄괄하며 기자가 회장님이란 존칭을 쓴다.
  • 1970년대 청와대 정무수석의 부인이 요즘 돈으로 5,000만 원가량을 사보이호텔에서 소매치기당했다. 그 부인은 중부 경찰서에 피해 사실을 신고하려고 했으나 비서가 ‘경찰에 가봤자 어느 세월에 돈을 찾을지 모르니 신상사를 찾아가야 한다.’라고 하여 구달웅이 조직을 가동해 수소문한 결과, 대구에서 올라온 원정 소매치기 조직의 소행임을 알아낸 뒤 돈을 되찾아 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 신상사-구달웅의 뒤를 이어 명동파의 두목이 된 인물은 홍인수다.[14] 모 산업개발사의 대표로 알려진 그는 신상사의 설명에 따르면 1970~80년대 호남 세력의 거친 도전에 맞서 많은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홍인수는 2007년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 보복폭행 사건에도 연루되었다. 김승연 회장은 자신의 경호원은 물론이고 폭력조직 맘보파 두목 오재홍과 휘하 조직원들을 대동하여 자신의 아들을 폭행한 클럽 직원들을 납치한 뒤 폭행했다. 사건 이후 냄새를 맡은 언론사에서 관련 사실을 보도하기 시작하자 다급해진 오재홍은 정관계와 연줄이 좋은 명동파 두목 홍인수를 찾아가 청탁을 부탁하며 1,500만 원을 건넸다. 이후 홍인수가 오재홍-서울남부경찰서 수사과장-서울남부경찰서 강력2팀장과의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당시 식사 자리에 실제로 해당 경찰 간부들이 나왔지만 오재홍에 대한 수사를 무마해달라는 홍인수의 청탁을 듣는 순간 바로 거절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홍인수는 징역 1년을 구형 받는 등 옥고를 치렀다. 보복폭행사건 연루 명동파 두목 홍모씨 첫 공판
  • 작고한 충청도 주먹의 대부 조일환은 2007년 고희연을 방문한 신상사에게 큰 절을 올리며 존경심을 표한 바 있다. # 이렇듯 신상사는 전국 아우들의 경조사에 참석하면서 얼굴을 비추고 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 2013년에 불교철학자인 최평규 박사와 명동 퍼시픽호텔에서 우연히 만나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상사의 서명도 볼 수 있다. #
  • 2014년 신상사의 생일파티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개인 블로그에 게재되어 있다.
  • 2015년 신상사파의 행동대장이자 1975년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일선에서 보복을 진두지휘했던 방영길이 사망했다. ‘한강 이북의 최고 주먹’ 방영길 씨 24일 별세 기사에서 방영길의 한 후배는 "젊은 시절 완력이 대단했고, 따르는 후배들이 많아 최근까지도 서울 최대 조직에서 가장 큰 형님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갑작스런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당황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장례식에 참석한 신상사의 모습이 포착되었는데, 의외로 정장이 아닌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있다.
  • 2017년 영상을 보면 건장한 20대가 포함된 10여 명의 부하 조직원을 여전히 대동하고 다니는 모습이 관찰된다.
  • 2018년 약 50년 동안 명동에서 식당과 임대업을 해 온 김장환 씨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신상사…. 지금도 기억나. 깡패들이 명동을 장악했지. 수시로 상인들에게서 돈을 가져가 사채업을 했으니까. 명동에서 식당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어."라고 회고했다.
  • 2022년 8월 신상사의 직계 동생이자 영등포의 대부로 불린 이신영이 병환으로 사망했다. 순천향병원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서울의 조폭 거물들이 모두 몰려왔다. 이신영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1950~60년대 신상사파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영등포로 옮겨와 새마을파를 만들어 일대를 제패한 인물이다. 실제로 영등포의 여러 방계조직들이 새마을파에서 나왔다. 이신영은 이명박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 시절 연루됐다는 의혹이 있는 노조 추진위원장 서정의 납치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 또한 3김하고도 긴밀하게 연관된 정치적 커넥션이 굉장한 인물이었다. 이신영은 강남의 임페리얼팰리스호텔로 근거지를 옮겨와 강남에서도 활동했으며, 한때 신상사파의 후계자로도 불렸다. 2010년에 칠순 잔치를 했는데 경찰의 대동원으로 비교적 조용하게 열렸다. # 이렇듯 신상사파와 영등포 조직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 신상사파가 1990년대 이후 해체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상은 폭처법 4조 범단 때문에 신상사와 직계 동생들[15]은 조직이 있으면서도 없는 듯 뒤에 있는 것이며 영등포, 동대문, 이태원, 신촌, 종로 그리고 서울의 여러 조직들이 긴밀하게 신상사파와 연계되어 범신상사파를 이루고 있다. 강남의 호남 조직들과 김태촌의 서방파 역시 신상사파와 매우 밀접하게 교류하면서 연계되어 있다. 물론 명동 직계파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위에 서술한 홍인수를 중심으로 한 직계 조직도 있다. 따라서 서울의 실세 두목들이 전부 신상사의 동생들이거나 직방계 혹은 동맹관계로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16] 그렇기에 신상사는 단순히 원로로 존중받는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재산과 세력을 바탕으로[17]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전국 조폭계에서 가장 큰형님으로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18]
  • 한때 신상사와 싸웠지만 화해하고 친분을 유지하는 대구의 전국구 두목 조창조는 신상사와 6년의 연배차이가 있다. 조창조는 그 갭을 '뛰어넘을 수 없는 공백'으로 묘사했다. 주먹계 신화시대를 수놓은 인물들이 김두한, 이정재, 시라소니, 이화룡, 정팔 등이었다면 신상사는 '신화시대의 마지막 세대'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상사는 이들과 '함께' 시대를 풍미했지만 조창조 자신은 그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청년기를 보냈다는 고백을 했다. 염천시장 시절부터 조창조와 신상사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5.16 군사정변 직후 신상사는 동생 신덕현(작고)을 조창조에게 의탁시켰다고 한다. 이런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명동-무교동 전쟁 후 조창조가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사과하러 갔을 때도 신상사는 통 크게 조창조를 용서해 줬다고 한다. 그 이후 조창조는 역시 신상사는 '큰 오야붕'이며 이런 분한테 정말 잘해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지금까지도 그런 마음이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조창조는 신상사를 우리 시대 건달의 전설로 묘사하며, 건달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면, 건달로서의 삶에도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데, 조창조는 신상사 형님의 삶에 그런 의미와 신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상사와 좋은 관계를 맺으며 후배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일이 자신의 소망이라고도 했다.
  • 신상사의 회고록을 쓴 중앙일보 기자는 1970년대 서울 주먹계의 양대 산맥인 명동파와 무교동파의 수뇌부를 분석하며 명동의 경우 (소싯적엔 무투파로 이름을 날렸지만) 전략형 두목인 신상사를 무투파 부두목 구달웅이 보좌했고 무교동의 경우 무투파 두목인 조창조를 전략형 부두목 정학모가 보좌하며 각각 상호보완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 사보이호텔의 창업주 조준호의 외아들 조원창은 1967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난 뒤 사보이호텔을 이어 줄곧 운영했다. 조원창은 1994년 사망할 때까지 신상사와 막역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신상사 측도 당시 일본 관광객이나 재일교포들을 끌어모으는데 많은 역할을 해서 호텔의 매상을 올려주었다고 한다. 특히 신상사와 친분이 있는 일본 야쿠자들이 관광차 놀러 오면 호텔 몇 개 층을 전세 내서 일주일 동안 묵는 등 많은 매상을 올려줬다. 그래서 신상사는 항상 호텔의 VIP로 대우받았고, 사보이호텔이 신상사의 근거지가 된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 사보이호텔 외에 신상사가 근거지로 삼은 호텔은 이태원의 크라운호텔과 명동의 퍼시픽호텔이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보이호텔과 크라운호텔이 문을 닫자, 명동 퍼시픽호텔에 기거하며 아우들의 수행을 받고 있다.

4. 대중매체에서

신상사 이전 세대 조폭인 김두한, 이정재, 이화룡 등이 대부분의 영화, 드라마에서 실명 그대로 출연하는 것과 다르게 이쪽은 다큐멘터리 형식의 드라마인 명동백작을 제외하면 대부분 가명으로 출연했다. 아무래도 당사자가 2024년 기준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데다가 아직도 업계에서 왕성하게 활동중이기 때문인 듯.[19]

4.1. 드라마 무풍지대

야인시대의 프로토타입이라 할 수 있는 무풍지대에선 야인시대의 간지폭풍의 캐릭터와는 달리 무풍지대 드라마 자체가 유지광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스토리이기에 반동인물로 나온다. 그래서 야인시대의 간지폭풍의 오상사와 비교하면 다소 실망감이 클 수 있다. 마치 야인시대의 권상사 느낌에 가까운 캐릭터였으며 배우는 유종근. 실존인물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 본명이 아닌 불독이라는 가명으로 나왔으며 이는 야인시대에서도 그렇게 나왔었다.

4.2. 드라마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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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인물이 살아 있어서인지 오상사라는 가명으로 등장했다. 이후 신상사는 자신의 배역을 소화한 배우 라재웅을 불러 좋은 연기를 펼쳐주어 고맙다는 의미로 밥을 사준 적이 있다고 한다. #

여기서, 신상사는 라재웅에게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김두한이 어떻게 일본도를 든 20명을 혼자서 상대하냐고? 한 명도 이기기 힘들다. 그냥 도망가는 게 최고다." 라고 말해서 한참 웃었다는 일화를 방송에서 한 적이 있다.

4.3. 드라마 명동백작

여기서는 명동의 예술인들을 정치판에 끌어들이려는 이정재 일당으로부터 명동의 예술인들을 나름 보호해 주고 존중해 주는 조력자 이미지 덕분인지 본명 그대로 등장한다.[20] 배우는 아이돌그룹 브론즈 출신의 전태성이다.


[1] 50년대에는 신상사의 형님 격인 이화룡이 이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로 이화룡은 충정로 도끼사건으로 징역을 산 이후 손을 씻고 주먹계를 떠나 영화제작자와 사업가로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2] 당시 육군 특무부대의 위상은 대단했는데, 소속된 군인들이 갖고 다니던 공무집행 메달엔 '본 메달 소지자는 시기 장소를 불문하고 행동의 제한을 받지 않음'이라 적혀 있었다. [3] 하지만 1954년 5월 20일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이와 완전히 반대로 설명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신상사는 당시 무소속 후보였던 이우줄의 선거운동원이었다. 마이크를 밀어 쓰러뜨리고 소동을 일으킬려고 하다가 경찰에 구속되었긴 했는데, 사실은 자유당 이갑성 후보측에서 꾸민 소동인 것처럼 사람들이 인식하게끔 꾸민 것이라고. [4] 형이 이나가와카이의 최고 고문인 니시야마 테루(서휘)였다. [5] 서순종은 무하마드 알리, 마이크 타이슨, 조지 포먼, 에반더 홀리필드,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 로이 존스 주니어, 마르코 안토니오 바레라 등을 발굴한 것으로 유명한 국제 권투계의 거물 돈 킹과 깊은 유대가 있다고 알려진 전호연과 쌍벽을 이루며 한국 권투계의 황금기를 일구어냈다. 여담으로 돈 킹 역시 미국 제일의 마피아 조직인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관계자(High-level Associate)로 잘 알려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빈센트 지간테 문서와 마피아/기타 문서 참고. [6] 목포상고-경희대 태권도부 출신. 진로그룹 왕자의 난 당시 장진호 측 용역깡패로 고용되었다가 장진호의 경영권 장악 후 진로스포츠단 사장으로 취임하며 신분세탁에 성공한다. 진로그룹 부도 후 LG스포츠 사장으로 이직했으나, 김홍일 게이트에 휘말려 구속된다. [7] 조양은에 의하면 김수일은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와 의형제였다고 한다. [8] 이 부분에서 오종철-조양은측과 이야기가 조금 다른데 오종철이나 조양은측은 사보이호텔 사건 당시 회칼이 쓰였다는건 꾸준히 부인한다. 실제로 조씨는 사보이호텔 사건으로는 1심에서 징역 1년, 2심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는데 회칼이 쓰여서 사람이 다쳤다면 그런 형량은 불가능하다. 오종철 회고 [9] 무교동파 두목 조창조는 이때 부두목 정학모와 오종철의 조직 내 알력 다툼 때문에 오종철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오종철은 이후 김태촌과 화해하기는 했다. [10] 교도소에 수감된 구달웅은 출소하면 자신에게 사형을 구형한 담당 검사를 살해하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 그 검사에게 살인을 예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교도소 종교행사에서 만난 천주교 사제로부터 원수를 용서하란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11] 사실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조무래기들이면 몰라도 이름있는 오야붕들은 일반인들을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는다. 건드려봐야 이득도 없고 괜히 건드렸다가 조직 전체가 일망타진당하고 장기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리어 신상사처럼 성공한 사람들은 조폭 이미지를 벗기 위해 자원봉사를 하거나 기부를 하는 식으로 이미지 세탁을 하기도 한다고. [12] 그도 그럴 것이 신상사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건달, 그것도 어중이 따중이도 아니고 두목급만도 그 숫자가 얼마인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13] 이듬해 7월 세상을 떠났다. [14] 물론 일상적인 조직 운영과 별개로, 신상사가 생존해 있는 한 명동파의 ‘상징적인 두목(큰형님)’은 변함없이 신상사다. [15] 물론 신상사와 직계 동생들은 이미 다 고령이라 일상적인 조직 운영은 진작에 손을 뗐다. 실질적인 조직 운영은 현역 실세 동생들이 하고 있다. [16] 물론 서울에서 신상사와 관련이 없는 독자조직들도 있지만 그들도 신상사를 큰형님으로 존경하며 신상사파와 교류하고 있다. [17] 일설에는 차명으로 강남 테헤란로의 빌딩 수채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신상사가 충우회에 보낸 화환을 보면 주식회사 주경의 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18] 전국구 조폭으로 유먕한 조양은에 따르면 한국은 자유당 정권 이후로 조직이 도저히 클 수 없는 상황이고 당장 조양은 본인도 조직생활을 떠난지가 십수년이 되었음에도 지역 경찰과 경찰청 정보국 등으로부터 감시를 당하고 있을 정도로 조직폭력배에 대한 감시가 철저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성공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조폭 타이틀을 버리려고 안간힘을 쓴다고 한다. 이런식으로 힘있는 오야붕들은 조폭이 아닌것처럼 행세하고 불법적인 일들은 조선족이나 불체자 등을 이용해 암암리에 행하는 식이라고. 당장 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신상사는 60년대 이후로는 80년대 삼청교육대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것과 2004년 구속된 사건 이외에는 단 한번도 구속된 전적이 없다. [19] 마찬가지 이유로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조양은도 대부분 가명으로 출연한다. [20] 사실 캐릭터가 그렇다기보단 신상사가 몸담은 이화룡의 세력이 워낙 의적같이 나와서 덩달아 덕을 본 것이다. 작중 이화룡은 문인들에게도 존중을 받으며 상인들에게도 존경받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