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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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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념3. 역사
3.1. 한국사3.2. 유럽사

1. 개요

의 주인이자, 그 성을 중심으로 한 일대의 지도자이다.

봉건국가들이 형성되었던 중세 유럽과 일본의 역사책에서 많이 보이는 직위이다. 일본에서 성주는 대영주인 다이묘(大名) 아래에 속한 존재였다.

2. 개념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의 주인"이며 그렇게 쓰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주로 요새화한 시설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통치하는 지위를 가리켰다.

관료제 중앙집권국가가 아닌 곳에서 흔히 보인다. 대표적으로 봉건제였던 중세 유럽이나 관료제 성립 이전의 동아시아 지역들, 근대 폐번치현 이전의 일본 등이 있다. 이들 성주는 현지에 기반을 둔 유력자 출신으로서 자기 권역 내에서는 (반)독립적 권력을 보유하였으며, 자의적으로 조세를 수취하고 노동력을 징발하면서 통치 및 경영하였다. 반면, 중앙집권국가에서는 중앙정부가 관료를 파견하여 직접 전국토를 통치하므로 성주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분권적 질서를 겪어온 중세 유럽이나 일본 역사에 관한 서적에서는 자주 보이는 표현인 반면, 일찍이 관료제적 중앙화를 이룩하였던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표현이다.

중세 유럽에서 성주(castellan; châtelain)는 영주의 일종으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선, 협소하게는 중소 영주로서 성을 근거로 통치하는 통치작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들 성주는 본래 프랑크 왕국시대에서 여러 관직에서 기원한 것으로, 각지에 파견된 장관( comes)의 일종으로서 성채 방어를 위하여 임명되었다. 이후 제국이 분할되는 과정에서 중앙권력이 미약해지자 독립적 세력으로 발전하였으나, 애초에 그 권한이 한정적이었던 까닭에 유력 제후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이들의 임지는 성채 및 그에 딸린 소규모 토지였는데, 성채가 위치한 곳은 많은 경우 도시이거나 이후 도시로 발전한 까닭에 전통적인 도시영주인 주교 주교후의 봉신이 되거나 인근 백작(comes)의 봉신이 되었다. 이들 주군들이 세력을 상실한 이후에도 그 자리를 성장한 왕권과 결탁하여 자치권을 얻은 도시공동체가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계속해서 소규모 영주로 남게 되었다.

확장된 개념으로서는, 중세 초 지방행정장관(comes)이나 변경주장관( marchio), 군관구사령관( dux) 등 옛 관직에서 독립영주로 발전한 영역제후(princeps)와 대조적인 개념으로서 중세 중기 독자적으로 성을 축조하고 하층 지배계급으로 합류한 지방유력자 및 이들이 대두한 현상을 가리키는 학술용어로서 사용된다. 이러한 신흥영주들은 자유토지를 보유한 부유한 자유민( baro)이나 군주와 제후, 주교, 기존 영주 아래에서 봉사하던 부백작(vicecomes), 장원관리인(steward), 종사(serviens), 기사(miles)을 포괄하는 가신집단 중 유망주 출신으로, 자기 재산을 기반으로 독립하거나 주군의 지위를 탈취하면서 탄생하였다. 특히 조선시대 마름처럼 일정한 영역의 관리를 목적으로 파견되었던 이들이 더 쉽게 기회를 얻었는데, 원래부터 제후가 보유한 여러 성마다 파견하였던 성주가 그대로 자기 임지를 가산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10~11세기 사이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가 12세기 초부터 국왕이나 제후들의 통제력이 회복되어 성주들이 이들에게 복속되면서 사그라들게 된다.

3. 역사

3.1. 한국사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성(城)을 후대의 현(縣)에 상응하는 행정구역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해당 행정구역의 지방관은 고유 관직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종종 한자어인 '성주(城主)'로 불리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안시성 전투의 주역인 안시성주가 있다.[1]

신라는 ' 삼한일통'을 전후하여 종래의 행정구역 단위인 성(城)·촌(村)을 현(縣)으로 전환했고, 관직 또한 '소수(少守)'와 ' 현령'으로 교체했다. '성주'라는 칭호는 이렇게 사라졌으나, 후삼국시대에는 호족들이 할거하면서, '장군'이나 '성주'를 자칭하여 다시 등장했다.[2] 또한 신라 말에는 각 주(州)의 도독과 태수를 '성주'로 통칭한 용례 또한 발견된다.

3.2. 유럽사

유럽에서 성주(Castellan)는 원래 성벽을 두른 도시 또는 요새에 파견된 관리로, 해당 지역의 영주의 봉신이었다.

9세기 무렵에 축성기술이 발전하면서 방어력이 향상되자 일부 성주는 성관(castle)을 거점으로 삼아 본래의 주군인 영주를 무시하면서 독자세력을 키우기도 했고, 토착 유력자가 스스로 축성하여 성주를 자처하기도 했다. 10~12세기에는 이런 현상이 만연해지면서, 성주들의 할거로 인해 종래 제후의 영지가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1~12세기 남프랑스에서 성주(Chatelain)들의 할거로 아키텐 공작이나 툴루즈 백작 같은 영주들이 통제력을 상실해버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이른 시기부터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제가 발달한 서유럽 지역에서는 지방 유력자들로 대두된 성주들이 국왕 직속의 봉신이 되어 정식 작위를 하사받거나 아니면 국왕 직할의 지방관으로 신분을 전환했다.

반면,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질서의 수립이 상대적으로 늦었던 중부나 동부 유럽에서는 이들이 오랜 기간 토착세력으로 할거했고, 나중에 국왕이나 유력 제후에게 종속되면서 백작(Graf) 계열의 정식 관직인 'Burggraf'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들의 영지는 보통 하나 이상의 주(Gau)를 다스리는 일반적인 백작에 비해서 그 관할 지역이 좁고 세력도 영세했기에, 백작(Graf) 계급 안에서는 하급의 서열로 통했다. 이들의 영지는 작지만 자신의 영지에서는 다른 백작과 동등한 권한이 주어졌기에, 한자문화권에서는 그 어원을 살려 Burggraf를 '성백(城伯)'으로 번역하고 있다. 참고로 후일 서유럽 지역에서 공식 작위로 도입된 자작을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Burggraf와 동격으로 취급했다.

[1] 안시성주의 경우 연개소문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어, 해당 사례를 근거로 고구려가 지방 토착세력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고 거론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는 5세기 무렵에 지방통치체계가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또한 안시성은 고구려의 성들 가운데에도 당나라의 주(州)에 상응하는 단위인 '중성(中城)'이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어, 처려근지(處閭近支)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토착 유력자가 아니라 고구려 5부 출신인 중앙귀족이 파견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안시성주는 연개소문 정권이 고구려 내부에서 널리 승인되지 않았다는 사례로 거론되는 편이다. [2] 나말여초 지방세력가들을 호족으로 부르는게 옳지 않다고 보는 역사학자들은 호족 대신 당대인들이 사용한 성주나 장군이란 표현을 쓴다. 하지만 당시의 소위 '호족' 중에는 성주나 장군 칭호를 쓰지 않은 세력가도 있어서, 완전히 대체 가능한 용어가 아닌 문제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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