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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논란/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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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바벨탑 이전에도 여러 개의 언어가 있었다
2.1. 의문에 대한 반박
3. 신이 한 분뿐인가?
3.1. 의문에 대한 반박
4. 다윗의 병적 조사5. 아담 가족 외의 인류6. 이사악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아들인가?
6.1. 의문에 대한 반박
7. 여섯 번째 재앙 때 이집트의 모든 가축이 죽었는가?
7.1. 의문에 대한 반박
8. 에서가 취한 바스맛은 누구의 딸인가?9. 브엘세바라는 이름의 유래10. 하느님은 악의 유혹을 받지 않는가?
10.1. 의문에 대한 반박
11.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 몇 년간 머물렀나?
11.1. 의문에 대한 반박
12. 모세의 장인은 누구인가?13.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의 전쟁 때 이스라엘은 몇 명을 죽였는가?14. 사울의 재위 기간15. 골리앗을 죽인 자16. 사울에 관한 기록의 모순17. 구약에 등장한 삼위일체?
17.1. 의문에 대한 반박
18. 언약궤에 든 것은?19. 히스기야 왕 시절의 년도 표기 문제20. 레위 자손들의 족보 불일치21. 에스라와 느헤미야 기록의 모순22. 아하지야가 왕이 될 대의 나이는 몇 살이었는가?23. 유다 왕 아히시야는 어떻게 죽임당했을까?24. 예후의 자손은 4대 동안 왕을 하리라?25. 유다 왕 아사의 신앙과 전쟁 여부26. 미칼의 자녀27. 솔로몬은 히람에게 보수를 얼마나 주었을까?28.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겐 아들이 몇 명일까?29. 사울의 가족과 관련된 오류30. 다윗은 몇 년간 헤브론을 다스렸나?31.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은 몇 명인가?32. 다윗이 조사한 인구 수는 모두 몇 명인가?33. 다윗이 죽인 아람 군사 수는 몇 명인가?34. 사해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18,000명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35. 성경의 뇌물 관련 기록36. 시드키야는 여호야긴(여호야킴)의 삼촌일까 아들일까?37. 여호람은 언제 왕이 되었을까?38. 히브리 12지파의 성읍들39. 솔로몬의 궁전을 지을 때 감독 수는 몇 명인가?40. 솔로몬의 신전에 쓰일 놋쇠 바다(물탱크)의 두께는?41. 마아가(미가야)는 누구의 딸인가??42. 엘리야의 수수께끼 143. 엘리야의 수수께끼 244. 므나쎄의 죽음45. 이사야서의 예수 탄생 예언?46. 예수의 족보 문제47. 이집트 피난의 모순
47.1. 의문에 대한 반박
48. 복음서 행적의 모순49. 세례 받은 예수는 다음 날 어디에 있었나?50. 기적의 순서51. 예수는 세례를 주었는가?52. 야이로의 딸은 죽어 있었을까?53. 두 개의 주기도문54.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어준 여인 일화 이야기의 불일치55. 예수 언행의 일관성
55.1. 의문에 대한 반박
56.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57.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나귀를 몇 마리 데려왔는가?58.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
58.1. 의문에 대한 반박
59. 인용 오류60. 예수의 동문서답
60.1. 의문에 대한 반박
61. 베드로는 예수를 언제 부인했는가?62. 예수는 언제 못 박혔나?63. 십자가 처형 기록의 모순64. 예수의 유언65. 예수가 죽을 때 찢어졌다던 성전의 휘장은 언제 찢어졌는가?66. 부활의 기록67. 이루어지지 않은 예수 재림에 대한 기록68. 이스카리옷 유다의 최후69. 사도 바울로 문제
69.1. 의문에 대한 반박
70. 시간을 초월하지 못하는 신71. 결론

1. 개요

성경 내 구절들이 상호 충돌하는 모순을 다룬 문서이다.

나무위키는 규정상 비(非) 종교위키이고, 세속적 관점에서 쓰이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특정 항목에서 세속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이 충돌할 경우 세속적 관점을 위주로 해당 항목을 작성해야 한다.
파일:attachment/bc_2.jpg
성경의 구약과 신약의 모순점을 모아놓은 사진 고화질 이미지
해당 이미지의 출처는 http://www.project-reason.org이나, 현재 모종의 이유로 해당 사이트는 접속해도 로고 이미지만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 있다.

아래 각각 항목에도 작혀있는 내용이지만 본 항목에 적혀있는 내용들 중에는 모순이 아닌 단순한 서술방식 의 차이로 볼수 있는 내용 들도 포함되어 있다.

2. 바벨탑 이전에도 여러 개의 언어가 있었다

바벨탑 이전에도 민족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다.
10 이들에게서 바다를 끼고 사는 백성들이 갈라져 나왔다. 이들이 지방과 언어와 씨족과 부족을 따라 갈려 나간 야벳의 후손들이다.
20 이것이 씨족과 언어와 지방과 부족을 따라서 갈려 나간 함의 후손들이다.
31 이상이 씨족과 언어와 지방과 부족을 따라 갈려 나간 셈의 후손들이다.
창세기 10장 일부분

다음 장에서 바벨탑 이전에는 세상 모든 민족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나온다.
1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6 주께서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창세기 11장

2.1. 의문에 대한 반박

창세기에 쓰여진 순서대로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창세기 10장 내용은 바벨탑 사건 이후의 이야기이다. 바벨탑 사건은 창세기 10장 5절과 31절에서 셈과 함과 야벳의 자손들이 각기 사용하는 언어가 왜 다른지에 대한 부연설명이다.

3. 신이 한 분뿐인가?

야훼께서는 너희로 하여금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요 다른 신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이 일을 보여주신 것이다. ( 신명기 4장 35절)
이스라엘의 임금, 그의 구세주,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시작이요, 내가 마감이다. 나밖에 다른 신이 없다." ( 이사야 44장 6절)

성경에서 야훼 이외의 신은 없으며 다른 신들을 향해 숭배를 하지 말라고 나와있다.
그 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가면서 전국에 있는 맏이들을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조리 치리라. 또 이집트의 신들도 모조리 심판하리라. 나는 야훼다. (출애굽기 12장 12절)

하지만 출애굽기에는 이집트 신화의 신들을 심판한다는 언급이 나온다. 만약 다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이집트 신들을 심판하는 걸까?
남들은 하느님도 많고 주님도 많아서 소위 신이라는 것들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다고들 하지만….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8장 5절)

또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는 신이라 불리는 것들이 있다고 다른 신의 존재를 주장한다.

3.1. 의문에 대한 반박

이 다음 6절에는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라며 하느님 한 분만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다른 신이 있든 없든 하느님만 믿어야 하는 것.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내용은 야훼말고도 '사람에 의해 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다는 거지 진짜 신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다. 이집트의 경우도 "이집트인이 믿는 여러 신들이 없음을 알게 하시고, 그러한 우상숭배를 하는 이집트인들을 심판하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4. 다윗의 병적[1] 조사

다윗에게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여 화를 불러 일으킨 것이 사무엘하 24장 1절에는 야훼가 했다고 나오나, 역대기상 21장 1절에는 그것을 사탄이 시켰다고 나온다.
야훼께서 다시 이스라엘에 진노를 내리실 일이 있어 다윗에게 이스라엘과 유다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셨다.
사무엘하 24장 1절
사탄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려고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였다.
역대기상 21장 1절

기독교 인간이 죄를 저지르면 하느님이 베푸는 가호가 사라지고 악령이 그 틈을 탈 수도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마치 욥기에서처럼 하느님이 사탄에게 명령하여 인구조사를 시켰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혹은 사탄이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허락하셨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욥기식으로 나열한다면 사탄이 이스라엘에 대해 고발하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사탄이 욥에게 한 것처럼 다윗에게 조사하게 했다.

5. 아담 가족 외의 인류

인류 유일의 조상인 아담 이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카인 아벨 중에,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또 다른 마을'로 갔다는 기록이나 카인이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내용이 나온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창세기 4장 14절

대개 카인 아벨 이외의 많은, 아담 이브의 자손들에 대한 것이라 주장하는데, 이렇게 되면 성경 상의 시간대를 따라갈 때, 카인과 아벨이 장성해서 아벨이 죽는 시점까지, 아담과 이브는 '사람들'이 다 장성해서 '마을'을 이룰 정도로 자식들을 많이 낳았다고 나온다. 물론 근친이라고 해도 부부 한 쌍이 마을을 이룰 정도로 자식을 낳았다는 게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기도 하다. 물론 성경 기록을 따라가면 창세기 시절 사람들은 장수했으므로 설명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또한 카인의 아내가 갑자기 나오는데, 카인은 아내를 어떻게 만났으며 그 자손들은 어떻게 아내를 맞이하였을까?

이에 대해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에 정말 일어났던 모든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기록만 하였으므로, 아담과 하와는 오랜 시간 살면서 자식들을 낳아 그 자식들은 번성했고, 성서적으로 중요한 카인과 아벨, 셋만 기술된 것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다르게는 인류의 조상이 아담이라는 것이 야훼를 믿기 시작한 최초의 사람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6. 이사악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아들인가?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사악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기꺼이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 약속까지 해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창세기 22장 2절

히브리서와 창세기에서는 이사악이 아브라함의 외아들이라고 한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외아들을 바치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습이 자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치는 하나님을 예표한다고 주장한다.
하갈은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 아브람은 하갈이 낳아준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다.
창세기 16장 15절
1 아브라함이 다시 아내를 맞았는데 이름은 크투라라고 하였다.
2 그는 아브라함에게 지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를 낳아주었다.
창세기 25장

그러나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기 전에도 이미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한 명 더 있었으며 이사악 사건 이후에는 총 6명의 아들을 더 낳는다.

6.1. 의문에 대한 반박

다만 이 사건이 있던 시점 기준으로는 유일한 아들이 맞기는 했다. 이스마엘은 그의 어머니인 하갈과 같이 광야로 쫓겨나기 때문(창 21:8~21). 그리고 후처 그두라와 사이에 낳은 아들들 모두 이스마엘과 마찬가지로 서자들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에게 약속받은 아들인 이삭을 유일한 아들로 보인다. 하나님은 사라와의 아들인 이사악만 인정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7. 여섯 번째 재앙 때 이집트의 모든 가축이 죽었는가?

다음 날에 주께서 그 일을 행하시매 이집트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에서는 하나도 죽지 아니하니라.
출애굽기(탈출기) 9장 6절
주의 여섯 번째 재앙으로 인해 이집트의 모든 가축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을 보내어 네 가축과 들에 있는 네 모든 소유를 모으라. 들에서 발견되고 집으로 들여오지 않을 모든 사람과 짐승 위에 우박이 내려 그것들을 죽게 하리라, 하라, 하시니라.
출애굽기(탈출기) 9장 19절
그런데 바로 19절에서 야훼가 파라오의 가축을 또 죽이겠다고 한다.
한밤중에 야훼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맏이들을 모조리 쳐죽이셨다. 왕위에 오를 파라오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땅굴에 갇힌 포로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에 이르기까지 다 쳐죽이셨다.
출애굽기 12장 29절
이집트의 가축을 모조리 죽이고도 약 며칠 후에 모든 가축의 처음 난 모든것을 죽이겠다고 한다. 가축들은 이미 모조리 죽었고, 가축을 새로 들여왔다고 해도 며칠 만에 번식하는게 가능한가?

7.1. 의문에 대한 반박

번역의 문제인 듯 보인다. 야살의 책에서도 모두 죽어있었다라고 기록되었지만 다음 10마리 중 1마리만 남았다라고 기록되었다.
25. 애굽인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들의 소 떼를 목초지로 데리고 가려고 할
때, 그들의 모든 소 떼가 죽은 것을 그들이 발견하게 되었다.
26. 애굽인들의 소 떼 중 남은 것이 열 마리 중 오직 한 마리였다. 그러나 고센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속한 소는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짐승을 가져왔다고 하면 말이 되긴 한다.

8. 에서가 취한 바스맛은 누구의 딸인가?

에사오는 사십 세 되던 해에 헷 사람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사람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았다.\
창세기 26장 34절
창세기 26장 34절에서는 바스맛은 헷 족속 엘론의 딸이다.
2 에사오는 아내감을 가나안의 딸들 가운데서 골라 헷족 엘론의 딸 아다와, 호리족 시브온의 손녀이며 아나의 딸인 오홀리바마와,
3 이스마엘의 딸이며 느바욧의 누이인 바스맛을 맞아들였다.
창세기 36장
그러나 창세기 36장 4절에서는 이스마엘의 딸이 된다. 하지만 동명이인이라고 하면 문제가 없긴 하다.

9. 브엘세바라는 이름의 유래

22 그 때 아비멜렉이 군사령관 비골을 데리고 아브라함을 찾아와 제안하였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는 함께 해주십니다.
23 그러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을 증인으로 삼고 맹세해 주십시오. 나와 내 혈육 일족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이오. 내가 당신에게 신의를 지켰듯이 당신도 당신이 정착해 사는 이 곳 사람들과 나에게 신의를 지키겠다고 하여주십시오."
24 "예, 맹세하지요." 하고 승낙하고 나서 아브라함은
25 아비멜렉의 종들이 자기의 우물을 빼앗은 일을 따졌다.

26 그러자 아비멜렉은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나는 모르오. 당신도 말씀해 주신 적이 없었고 오늘날까지 그런 말을 들어본 일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7 아브라함은 양과 소를 끌어다가 아비멜렉에게 주었고, 두 사람은 계약을 맺었다.
28 그리고 아브라함이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가려내자
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무엇하러 따로 골라내시오?"
30 그는 "이 어린 암양 일곱을 받으시고 이 우물은 내가 팠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31 이렇게 두 사람이 거기에서 서로 맹세했다고 해서 그 곳을 브엘세바라고 하였다.
창세기 21장 22~31절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주인공이며,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맹세로 인해 브엘세바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다음 기록을 보자.
25 그는 거기에 제단을 쌓아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고 그 곳에 천막을 쳤다. 그의 종들은 거기에서도 우물을 팠다.

26 어느 날, 아비멜렉이 친구 아후삿과 군사령관 비골을 데리고 그랄에서 이사악을 찾아왔다.
27 이사악이 그들에게 "내가 미워서 쫓아낼 때는 언제고, 왜 나를 찾아오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28 그들이 대답하였다. "야훼께서 그대와 함께 계시는 것을 우리가 똑똑히 보고 그대와 우리 사이에 조약을 체결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그대와 계약을 맺고 싶다.
29 우리는 그대에게 손 하나 대지 않고 잘 대접해 주었으며 떠날 때에도 편안히 보내주었다. 그러니 그대도 우리를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여라. 그대야말로 정녕 야훼께 복을 받은 사람이다."
30 이사악은 잔치를 베풀고 함께 먹고 마셨다.

31 이튿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나 서로 서약하여 조약을 맺고 이사악의 환송을 받으며 흐뭇한 마음으로 떠나갔다.
32 바로 그 날, 이사악의 종들이 저희가 파던 우물에서 샘 줄기가 터졌다고 와서 알렸다.
33 이사악은 그 우물을 세바라 불렀다. 그래서 그 도시를 오늘날까지 브엘세바라고 부르고 있다.
창세기 26장 25~33절
여기서는 이삭이 주인공이며,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고, 이삭이 이름을 지어 브엘세바라 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전자의 기록과 모순이 생긴다. 복음주의 기독교에서는 사람들이 두 가지 일화를 모두 알았고 그 결과로 브엘세바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본다.

반박을 하자면 이사악은 우물을 세바라고 불렀다고 했지 도시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이사악이 지었다고 적혀있지 않다.

10. 하느님은 악의 유혹을 받지 않는가?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
하느님은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40일간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받은 예수는 어째서 시험을 받은 것인가?[2]

기독교에선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몸을 입고 왔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고 해석한다. 실제로 서신을 보면 사도들도 예수가 하나님으로서의 권세를 내려놓고 자진해서 유혹을 받으셨다는 걸 인정한다. 로마서 5장 12절에서는 '둘째 아담'이라는 비유로 이야기한다. 혹은 사탄이 유혹을 하긴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유혹에 끌리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 이야기의 문맥은 유혹이 아니라 하나님을 탓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음 구절을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예레미야 31장 29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

유혹은 자신이 자초한 것이며 부모탓 남탓 환경탓 신탓 하지 말라는 것이 포인트이다

10.1. 의문에 대한 반박

17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18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17-18 RNKSV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악의 유혹을 받을 수 없다. 헌데
예수가 하나님인데도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는 건 모순이 아닌가?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사실상 사탄의 시험은 예수의 사역의 전체 의미(인류의 죄를 대신 지는 하나님의 어린 양)를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로,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육신으로 갖추신 뛰어난 자격은 자신을 낮추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시험을 받으시고 연약해지신 것이다. 엄밀히 볼 때 시험과 연약함은 우리 본성에 내재된 요소는 아닌 것이 사실이다. 그의 본성과는 더더욱 무관하다. 그러나 시험과 고통의 성격이 같은 것이라면 그가 받으신 시험과 우리가 받는 시험은 당연히 같다. 모든 점에서 같다.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드는 시험을 받는가? 그도 받으셨다. 자살을 부추기는 시험을 받는가? 그도 받으셨다. 매력적이지만 헛된 세상 것들의 시험을 받는가? 그도 받으셨다. 우상을 숭배하고 마귀를 예배하라는 시험을 받는가? 그도 받으셨다.[3] 이 점에서 그는 우리와 똑같으셨다. 그렇다. 구유에서 태어나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평생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로", 슬픔과 고통을 아는 자로 사셨다.[4] 그가 (성부)하나님의 명에 따라 이렇게 되셨으며 이런 일들을 겪으셨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렇다. 더 큰 사랑과 연민으로 제사장의 일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셔야 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5] 백성(이스라엘과 이방 족속. 즉 온 인류)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7-18] 그가 어떻게 이 자격을 갖추셨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보라. 그는 범사에,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를 동정하기 위해,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죄 때문에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생긴 불화를 해소하고 백성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이렇게 하셨다. 그렇다.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심으로서 대제사장의 일을 할 준비와 능력을 갖추셨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그래서 나(존 번연 본인)도 이것을 육신의 자격이자 필수적인 자격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와 동류가 되셨다는 점에서, 즉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다는 점에서, 우리와 본성이 같고 구조가 같고 타고난 성향[7]이 같다는 점에서 육신의 자격을 갖추셨다. 또한 이것은 필수적인 자격이기도 한데, 시험 자체 때문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 악에서 선을 끌어내시고 어둠에서 빛을 끌어내셨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우리(인간)를 위해, 자비하고 신실하게 우리를 구해 주기 위해 시험의 공격과 괴롭힘을 당하셨다.
오늘을 위한 퓨리턴08 기도 저자 존 버니언 185~187쪽 中
만약 예수가 유혹에 굴복했더라면, 외적으로 그는 이 땅에 와서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완수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 전체는 끝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나중에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시험으로 이어지는 이 유혹에다가, (성부)하나님은 자신의 아들과 창조세계 전부를 다 걸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걸었다. 그런데 그 유혹 앞에서 예수가 지닌 것은 극히 미약한 것이었다. 예수는 오직 계시된 말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유혹을 받을 때마다 예수는 독자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구약의 '기록된 말씀'을 준거로 삼는다. 그 말씀은 완전하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기 때문에 예수 자신은 그 말씀 뒤로 비켜선다. 예수는 사단을 대적하기 위해 스스로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힘이나 권한을 쟁점으로 삼지 않고, 단 하나의 문제,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자기주장을 따르느냐에 초점을 두었다. 예수는 순종의 태도를 취하여 하나님의 기적조차 요청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기적은 사단으로 하여금 그에게서 물러나게 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권능은 유혹을 없애고 종결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성서에 기록된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기록된 말씀'과 하나님이 계시한 진리를 분리시키지 않았다. 예수가 기록된 말씀을 다시 언명한 까닭에 그 말씀은 완전한 하나님의 뜻이 된다. (중략)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이 땅에 와서 행할 모든 것을 전부 다 (성부)하나님에게 결부시킨다. 예수는 전적으로 순종한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예수의 자유가 나타난다. (성부 하나님과 사랑으로) 매어있는 관계를 인정하고 이 땅에 온 목적이 오직 선지자들이 선포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것임을 받아들이면서, 예수는 스스로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으며 자신만의 독립적인 뜻을 하나도 구하지 않을 것을 수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는 정말 완전한 자유에 도달한다. 예수의 자유가, 육적인 욕구, 삶의 필연성, 권력, 지나친 과욕, 유혹 등에 대해서, 발현된다. 그는 죄의 노예가 아니다. 예수의 자유는 쟁점을 자유롭게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데서 나타난다. 각각의 유혹에 대응하는 예수의 답변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정말 적절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답변은 또한 중심을 비켜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답변은 사단이 설정한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문제의 중심을 이동시킨 것이다. 예수는 사단이 설정한 딜레마와 관점을 거부함으로서, 사단과 세상에 대하여 자신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나타낸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정당한 능력들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서, 자신의 자유를 드러낸다. "아무도 나에게서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내 생명을 내려놓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예수는 거부할 수도 있었고 유보할 수도 있었고 간직할 수도 있었지만 내려놓은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고 또 인간으로서 자유로운 존재라면, 그 사실은 예수의 자유는 가능한 것들을 보기하고, 권력을 사용하기를 거부하고, 가진 능력을 제어하는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예수의 자유는 (성부)하나님의 권능을 통해 도피하지 않고 (성부)하나님을 구실로 삼아 회피하지 않는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예수의 순종은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로서 존재한다. 그는 주 하나님을 기계적으로 그냥 단순히 반영하는 존재가 아니다.자유로운 인격체로서 예수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 책임을 온전히 맡는 것도 예수 자신으로, 그는 그 문제와 그 대응책을 하나님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는 "당신이 내게 준 여자 때문"이라는 아담과는 반대의 태도를 취한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이해할 때 그 점에 유의해야 한다. (중략)예수는 (성부)하나님의 자유를 존중한다. 그는 사단의 문제를 하나님에게 돌리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사랑과 순종을 보여준다. 그는 진실로 자유롭다. 사단을 향해서 자유롭고, 하나님 앞에서도 자유롭다. 왜냐하면 죄와 육체와 세상에 대한 복종은 노예적 예속과 소외를 불러오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은 자유를 불러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중략)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자유로운 의지가 아닌 두려움과 굴종으로 사랑하는 걸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이사야] 사랑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을 인간을 노예화할 수 없다.[9][타락하기]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사단과 혼동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그 자체가 자유이다. 순종함으로서, 예수가 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이다.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유를 부여받는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서의 말씀을 성취함으로서, 예수는 유혹 가운데서 자신의 자유를 증언한다. 우리 자신은 성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그 뜻에 순종함으로서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
자유의 윤리1:현대의 인간소외와 그리스도의 자유 113~118쪽 자크 엘륄 지음.

11.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 몇 년간 머물렀나?

야훼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똑똑히 알아두어라. 네 자손이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종이 되어 얹혀살며 400년 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다." ( 창세기 15:13, 공동번역성서)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 아브라함의 후손이 외국 땅에서 400년 동안 나그네로 있으면서 종살이를 하며 학대를 받으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7:6, 공동번역성서)
이 기록들에서는 공통적으로 400년간 애굽에 머물렀다고 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머무른 것은 430년 동안이었다. ( 출애굽기 12:40)

11.1. 의문에 대한 반박

출애굽기에서는 430년이라 기록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물론 이건 반올림하여 계산하여 대략적으로 서술했다고 쳤을때 마냥 모순이라고 보기 힘들수도 있다. 고려 역사는 474년이지만 고려가 500년간 지속되었다고 해서 틀렸다 하지는 않듯이.

또한 당시 유대인들은 40년을 한 세대가 바뀌는 상징으로 사용했으니 대략 10세대 정도가 이집트에서 살았다 해석 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한 다른 관점도 존재한다. 출애굽기 문서 참조.

12. 모세의 장인은 누구인가?

모세는 미디안 사제인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 ( 탈출기 3:1, 공동번역성서)
모세의 장인 호밥은 켄 사람이었는데, 그는 유다 자손들과 함께 종려나무 도시로부터 올라와 아랏 남방에 있는 유다 사막에 이르러 아말렉족과 어울려 살았다. ( 판관기 1:16, 공동번역성서)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가운데 켄 사람 헤벨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문중에서 떨어져 나가 케데스 근처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 판관기 4:11, 공동번역성서)
일단 미디안과 켄은 다른 지역이다. 또한 모세의 장인 이름이 탈출기에는 제사장 이드로라 되어 있고, 판관기에는 호밥이라 되어 있다.
모세가 자기 장인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청하였다. "우리는 이제 야훼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으로 떠납니다. 잘 대접해 드릴 터이니, 우리와 같이 갑시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잘 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소." ( 민수기 10:29, 공동번역성서)
이런 구절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명백한 모순이다. 게다가 민수기 10장 29절을 보면 호밥이 르우엘의 아들(모세의 처남)로 되어 있으니 여기서도 모순이 발생한다.

이에 대한 기독교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아마도 켄 족속이 "미디안 족 내의 소 부족"(Gordon J. Wenham, TOTC, 4:105)이거나, "정치적 동맹 부족"(Robert G. Boling, AB, 6A: 57)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호밥을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민수기 10:29)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바로 그 호밥의 후손을 "켄 사람"(사무엘상 15:6)이라고 표현하는 이유이다.
Fingerofthomas.org: "모세 장인의 이름은 르우엘인가? 이드로인가? 호밥인가? – 성경의 오류?"
그러나 이 주장은 증거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사료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 대해 '켄' 족속이 유목민족이라 미디안 족과 함께 살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몽골족은 유목민이라 떠돌아 다녔으니 제주도에 와서 살았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중근동의 지역이니 비유 자체는 안맞지만 결론은 근거가 없는 추측이라는 것.

또한 이드로와 르우엘이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전무하며, 아브람과 아브라함, 야곱과 이스라엘, 요셉과 사브낫바네아, 기드온과 여룹바알, 솔로몬과 여디디아, 다니엘과 벨드사살, 사울과 바오로는 모두 이름이 바뀌게 된 유래가 나와 있거나, 같은 텍스트 안에서 두 이름이 같이 언급되어 동일인임을 쉽게 식별할 수 있는데 왜 이드로와 르우엘만 그 모양인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다만 한글에서 "장인"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호텐"인데 그 뜻은 "처가집의 남자 식구"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르우엘, 이드로, 호밥은 모두 우리가 흔히 쓰는 의미의 장인이 아닐 수도 있다. 해석

야살의 책에서는 사람마다 모세도 이름을 다르게 불렀다고 기록되었다. 지금 시대에도 예명을 쓰거나 가명을 쓰는 일이 빈번하며, 야살의 책에서는 기본적으로 모세의 장인은 르우엘로 되어 있다.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어떻게 처리할까? 마술사들과 회의를 할 때 르우엘은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니 건드리면 안된다라고 말했다가 파라오의 분노를 사서 추방당했다. 이 시점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이드로라고 이름을 바꿔 미디안땅에서 살았던 것 같다. 야살의 책에서는 딸들을 도와줘서 모세를 대접하다가 모세가 이집트에서 왕자로 있다가 살인 이후 구스왕을 이어받다가 구스의 여왕이 1번도 자신과 동침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모세를 쫓아냈다는 말을 듣고 모세 때문에 우리 가정이 위험하다는 판단에 모세를 10년동안 감옥에 가뒀다.

13.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의 전쟁 때 이스라엘은 몇 명을 죽였는가?

그 때 전 이스라엘 군에서 뽑힌 10,000명 정예 부대가 기브아 정면에 나타났다. 싸움은 치열하였다. 베냐민 사람들은 자기들이 앞으로 얼마나 비참한 일을 당할지 까맣게 몰랐다. 야훼께서 이스라엘 눈앞에서 베냐민을 치셨다. 그 날 이스라엘군은 칼 쓰는 베냐민 군 25,100명을 죽였다. 베냐민 군은 자기네가 패하였음을 알았다. 이스라엘군이 베냐민 군이 보는 데서 뒤로 물러선 것은, 기브아 주변에 복병을 배치해 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복병은 재빨리 기브아에 밀려 들어가, 온 성 주민을 쳐죽였다. ( 판관기 20:34-37, 공동번역성서)
이렇게 해서 그 날 죽은 베냐민 전사자 총수는 25,000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칼을 쓰는 용사들이었다. 그러나 600명은 광야를 통과하여 림몬 바위까지 도망쳐서 4달을 그 바위 있는 곳에 머물러 있었다. 이스라엘군은 다시 베냐민의 민간인들에게로 돌아와서, 그 성 사람과 짐승을 만나는 대로 칼로 쳐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성읍들에도 닥치는 대로 모조리 불을 놓았다. ( 판관기 20:46-48, 공동번역성서)
두 기록은 같은 전쟁을 말하고 있는데도 전자는 25,100명, 후자는 25,000명으로, 100명의 차이가 발생한다. 물론 이 또한 대략적인 서술을 생각한다면 별반 다를바 없는 서술이라 볼 수도 있다.

14. 사울의 재위 기간

성경에 기록된 사울 왕의 나이와 재위 기간이 말 그대로 엉망이다. 사무엘상 13장 1절은 히브리 사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소라 본문 - בֶּן שָׁנָה שָׁאוּל בְּמָלְכוֹ וּשְׁתֵּי שָׁנִים מָלַךְ עַל יִשְׂרָאֵל (사무엘상 13:1)
(벤 샤나 샤울 베말호(코) 우슈테이 샤님 말라크 알 이쓰라엘)
어린 사울이 왕이 되었고 2년 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직역)[11]

사울이 1살때 왕이 된 뒤, 2년 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사무엘과 멀어지고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세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경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공동번역 - ... ㉠ 히브리어 본문에는 1절이 "사울이 왕이 된 것은 한 살 때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이 년간 다스렸다."로 되어 있으나 불합리하다. 한 전승에 의하면 사울은 사십 년간 다스린 것으로 되어 있다(사도 13:21 참조).
개역개정 - 사울이 왕이 될 때에 40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2년
개역한글 - 사울이 왕이 될 때에 40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2년
새번역 -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 그의 나이는 30살이었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은 42해였다.
현대인의 성경 - 사울은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2년째에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고, 그 중에서 3,000명을 골라 2,000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산에 있게 하고, 나머지 1,000명은 그의 아들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아에 있게 하였으며, 남은 백성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12]
직역 성경 - 샤울이 왕이 되었을 때 사십 세(본문[13]에는 나이가 빠졌음, 혹은 30세 - 역자 주)였고, 이스라엘을 이 년 동안 다스렸다.
신세계역 - 사울은 통치를 시작할 때에 ? 살이였으며 2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新共同訳- サウルは王となって一年でイスラエル全体の王となり、二年たったとき、
일본어 신공동역: 사울은 왕이 되어 1년에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고, 2년이 되었을 때,
NIV - Saul was thirty years old when he became king, and he reigned over Israel forty-two years.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30세였으며, 이스라엘을 42년간 다스렸다.
KJV - Saul reigned one year; and when he had reigned two years over Israel,
한국어 직역: 사울은 1년 다스렸다;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을 2년 간 다스렸을 때,
NASB - Saul was thirty years old when he began to reign, and he reigned forty two years over Israel.
사울은 그의 집권 시작 시기에 30세였으며, 이스라엘을 42년 간 다스렸다.
新改訳 - サウルは三十歳で王となり、十二年間イスラエルの王であった。
일본어 신개역: 사울은 30세에 왕이 되어, 12년 간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었다.
口語訳 - サウルは三十歳で王の位につき、二年イスラエルを治めた。
일본어 구어역: 사울은 30세에 왕의 자리에 올라, 2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공동번역에서는 생략해 놓았고, 다른 판본들도 서로 다른 숫자를 집어넣어 놓았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사도 바오로가 한 말이다.
그들이 왕을 요구하자, 하느님께서는 베냐민 지파 사람 키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세워 40년 동안 다스리게 하시다가, 그를 물리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사도행전 13:21~22, 공동번역성서)[14][15]
사도 바오로의 말과, 구약의 각 판본마다 사울 왕의 나이와 재위 기간이 일치하는 것이 거의 없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에 사울에 대한 많은 가르침 중에 하나를 따라 가르침을 전파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뒤에 다윗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사울의 나이와 재위 기간은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다.

마소라 본문에 문제가 있다면[16] 70인역이나 사해 사본을 참고해야 하나 이들도 불완전하다. 70인역의 권위있는 사본에는 사무엘상 13장 1절이 생략되어있으며 권위없는 일부 사본에 사울이 30세였다고 적고 있다. 사해 원본은 해당 부분이 남아있지 않다. 번역가들은 마소라 본문을 기준으로 추측성 번역을 더했거나 생략했다. 그러니까 추측성 번역까지 해야 할 정도로 미궁 속으로 빠진 형국이라는 의미이다.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

해당 모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13장 1절이 70인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원래 없는 내용인데 마소라 본문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나이와 재위기간을 공란으로 넣어두었다가 결국 채우지 못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17]

15. 골리앗을 죽인 자

골리앗을 죽인 사람에 대해서도 엘하난 다윗으로 각각 나와 있어 상호모순이 일어난다.
이리하여 다윗은 칼도 없이 팔매돌 하나로 불레셋 장수를 누르고 쳐죽였다. (사무엘상 17:50, 공동번역성서)
곱에서 불레셋 군과 또 한 차례 싸움이 붙었을 때 베들레헴 사람 야이르의 아들 엘하난이 갓 사람 골리앗을 죽였는데, 골리앗의 창대는 베틀 용두머리만큼 굵었다. (사무엘하 21:19, 공동번역성서)
그 후에 다윗의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나단이란 예언자가 나타났다. 번제물을 위하여 기름기를 따로 떼어놓듯이, 다윗도 온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뽑혔다. 그는 마치 염소를 데리고 놀듯이 사자를 다루었고, 어린 을 데리고 놀듯이 을 다루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거인을 죽이고 자기 백성의 치욕을 씻었다. 팔매돌 하나로 골리앗의 콧대를 꺾었다. (집회서 47:1~4, 공동번역성서)[18]
또 다른 불레셋과의 싸움에서 야이르의 아들 엘하난이 갓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의 창대는 베틀의 용두머리만큼이나 굵었다. (역대기상 20:5, 공동번역성서)
엘하난의 공이 다윗에게 흡수되었다는 해석과 다윗의 본명이 엘하난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전부 가능성이 낮다. 다윗의 아버지는 이새인 반면, 엘하난의 아버지는 야이르라고 기술되어 있다. 애초에 다른 사람이다. 사실 야이르와 이새도 동일인물 이하 자세한 사항은 엘하난을 참조할 것.

이 모순을 피하기 위해, 현재 사용되는 성서에는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엘하난이 골리앗동생 라흐미를 죽였다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한 기독교 측의 해석은 골리앗은 다윗에 의해 죽었고 엘 하난은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인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해당 링크의 주장은 결국은 '필사 오류'라는 것.

16. 사울에 관한 기록의 모순

우선 다음 두 기록을 보자.
사무엘은 기름 1병을 꺼내어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추며 이렇게 선언하였다. " 야훼께서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수령으로 성별해 세우시는 것이오. 그대는 야훼의 백성을 지배하시오. 그대는 사방에 있는 적의 세력으로부터 이 백성을 구해 내어야 하오. 야훼께서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의 몫인 이 백성의 수령으로 성별해 세우신 표는 이것이오.

오늘 그대는 나를 떠나 가다가, 베냐민 지역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무덤 근처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오. 그들은 그대의 부친이 그대가 찾아다니던 암나귀를 찾아냈으므로 나귀 걱정은 놓았지만, 그대들이 걱정되어 '내 아들이 어찌 되었느냐?' 하는 말만 되풀이한다고 알려줄 것이오. 거기에서 다시 다볼에 있는 상수리나무 쪽으로 건너가시오. 거기에서 그대는 하느님을 예배하러 베델로 올라가는 세 사람과 마주칠 것이오. 한 사람은 염소 새끼 3마리를 안고, 한 사람은 떡 3덩이를 가지고, 나머지 한 사람은 술 1자루를 메고 올 것이오. 그 사람들이 그대와 인사를 나누고 떡 2덩이를 줄 터이니 받으시오.

그리고 나서 불레셋의 수비대가 있는 하느님의 언덕에 이르면, 산당에서 내려오는 예언자들의 무리를 만날 것이오. 그들은 거문고를 뜯고 소구를 치고 피리를 불고 수금을 뜯으며, 신이 들려 내려올 것이오. 그때 야훼의 기운이 갑자기 내리덮쳐, 그대도 그들과 함께 신이 들려 아주 딴 사람이 될 것이오. 이런 일들이 일어나거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그대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시오. 나도 뒤따라 그대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번제와 친교제를 드리리다. 나와 만날 때까지 7일간 기다리시오. 그 때에 가서 그대가 할 일을 가르쳐주겠소."

사울이 사무엘을 뒤에 두고 길을 떠나자, 하느님께서 그의 속마음을 새롭게 하셨고, 그 날로 이런 조짐이 모두 일어났다. 사울은 종을 데리고 그 언덕에 이르렀을 때, 과연 예언자의 무리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하느님의 기운이 사울에게 내리덮쳐 그도 신이 들려 그들과 한데 어울렸다. 그래서 사울을 전부터 아는 사람들은 그가 예언자들과 함께 신들린 것을 보고는 서로 키스의 아들이, 저게 어찌 된 일이냐. 사울도 예언자들 중의 하나던가? 하며 수군거렸다. 거기에 있던 사람 하나가 "이들이 도대체 누구네 집 아들이냐?" 하고 묻는 바람에 "사울도 예언자들 중 하나더냐?" 하는 속담이 생겼다.
사무엘상 10:1-12, 공동번역성서
그리고 사무엘상을 조금 더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사울은 다시 군졸들을 보내면서 " 다윗을 침대째 들어 오너라. 내가 죽여버리겠다." 하였다. 군졸들이 와서 보니 침대에는 머리에 염소털로 짠 것을 씌워놓은 그 집의 수호신이 뉘어져 있었다. 사울이 미갈에게 "어쩌자고 이런 속임수를 써서 내 원수놈을 빠져 나가게 하였느냐?" 하고 야단치자 미갈이 아버지에게 "빠져 나가게 해주지 않으면 저를 죽이겠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하고 꾸며대었다.

다윗은 이렇게 몸을 피하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가 사울이 자기에게 한 일을 고하였다. 그는 사무엘과 함께 나욧으로 가서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사울은 다윗이 라마의 나욧에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군졸들을 보내어 그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보니 예언자들 한 무리가 사무엘 앞에서 신이 들려 있었다. 그 순간 사울의 군졸들에게도 하느님의 신이 내려, 그들도 신들린 상태에 빠져버렸다. 사울이 이 소식을 듣고 또 군졸 한 무리를 보냈으나 그들도 신들린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는 3번째로 다시 군졸들을 보냈으나 그들도 신들린 상태에 빠져버렸다.

할 수 없이 사울 자신이 라마를 향해 나섰다. 그가 세구라는 곳에 있는 큰 물웅덩이에 이르러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웬 사람이 라마에 있는 나욧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라마에 있는 나욧으로 가고 있는데, 그에게도 하느님의 신이 내려 라마에 있는 나욧까지 줄곧 신들린 상태로 걸어갔다. 사울도 옷을 벗어 던지고 사무엘 앞에서 신들린 상태에 빠져 하루 밤낮을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사울도 예언자들 중의 하나더냐!" 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사무엘상 19:15-24, 공동번역성서
그런데 자세히 보면 희한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자의 기록은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고 나서 이런 속담이 생겼다 되어 있고, 후자의 기록은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사자들을 보낸 후에 이런 속담이 생겼다 되어 있다. 또 마지막 구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양쪽이 완전히 다르며, 이외에 세부사항들 또한 다 다르다.

하지만 이 부분은 " 사울도 예언자들 중의 하나더냐!"라는 말이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고 나서 일시적으로 쓰였다가 잊혀지고 있었는데 나욧으로 사울이 간 당시에 다시 이 말이 쓰였다고 볼 수 있는 해석도 가능하다.

17. 구약에 등장한 삼위일체?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들 중에서 하나가 도피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아비아달이더라. 그가 다윗의 뒤를 따라 도망하니라. (삼상 22:2)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로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자기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삼상 23:6)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며 (삼하 8:17)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비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사브사는 서기관이 되며 (대상 18:16)
레위 사람들 중 하나인 느다네엘의 아들 서기관 스마야가 왕과 통치자들과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아버지들의 우두머리들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니라. 엘르아살을 위하여 한 으뜸가는 집안을 취하고 또 이다말을 위하여 한 집안을 취하였으니 (대상 24:6)
아히멜렉과 아비아달은 서로가 서로에게 아버지인 동시에 아들이다. 신약에서 등장하는 삼위일체가 구약에서도 이미 등장한 적이 있다. 그 와중에 대상 18:16에선 아히멜렉을 아비멜렉이라고 잘못 번역하기까지 했다.

17.1. 의문에 대한 반박

아히멜렉의 아들이 아비아달이며, 사독과 함께 다윗시대의 제사장이었다.
이 아비아달은 두 아들을 낳았다.
한 명은 요나단이며, 다른 한 명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아히멜렉이다.
즉, 아히멜렉(할아버지) -> 아비아달(아들) -> 아히멜렉(손자)
Rockefeller, Jr. 처럼 조상의 이름을 사용하는 형태이다.

18. 언약궤에 든 것은?

궤 안에는 두 개의 돌 판 외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것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에 주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거기에 넣은 것이더라. (왕상 8:9)
거기에는 금향로와 돌아가며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었고 이 궤 속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막대기와 언약의 돌 판들이 있었으며 (히 9:4)

민수기 17장 10절에 아론의 지팡이도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라고 되어 있다.
출애굽기 16장 33절에 만나를 항아리에 담아 증거판 앞에 간수하게 했다고 적혀있다.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긴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항아리와 지팡이는 도둑맞은 것으로 추측된다.

19. 히스기야 왕 시절의 년도 표기 문제

( 열왕기하 18:9, 공동번역성서) 히즈키야 왕 제4년, 곧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7년에 아시리아 왕 샬마네셀이 쳐들어와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 열왕기하 18:10, 공동번역성서) 3년 만에 함락시켰다. 사마리아가 함락된 것은 히즈키야 제6년, 곧 이스라엘 왕 호세아 제9년이었다.
불과 1절 차이인데도 모순이 생기고 있다. 히스기야 4년+3년=히스기야 7년이 되어야 하며, 호세아 7년+3년=호세아 10년이라야 맞다.

다만, 이 점도 햇수로 3년일 수 있다. 예수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혀서 2일 뒤인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사흘 만에라고 하는 예시를 보더라도.

20. 레위 자손들의 족보 불일치

우선 다음을 보자.
(대상 6:16)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며
(대상 6:17) 게르손의 아들의 이름은 립니와 시므이요
(대상 6:18) 그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대상 6:19) 므라리의 아들들은 말리와 무시라 이 레위 사람의 집들이 그 종족을 따라 이러하니
(대상 6:20) 게르손에게서 난 자는 곧 그 아들 립니요 그 아들은 야핫이요 그 아들은 심마요
(대상 6:21) 그 아들은 요아요 그 아들은 잇도요 그 아들은 세라요 그 아들은 여아드래며
(대상 6:22) 그핫에게서 난 자는 곧 그 아들 암미나답이요 그 아들은 고라요 그 아들은 앗실이요
(대상 6:23) 그 아들은 엘가나요 그 아들은 에비아삽이요 그 아들은 앗실이요
(대상 6:24) 그 아들은 다핫이요 그 아들은 우리엘이요 그 아들은 웃시야요 그 아들은 사울이며
(대상 6:25) 엘가나의 아들들은 아마새와 아히못이라
(대상 6:26) 엘가나로 말하면 그 자손은 이러하니 그 아들은 소배요 그 아들은 나핫이요
(대상 6:27) 그 아들은 엘리압이요 그 아들은 여로함이요 그 아들은 엘가나며
(대상 6:28) 사무엘의 아들들은 맏아들 요엘이요 다음은 아비야며
(대상 6:29) 므라리에게서 난 자는 말리요 그 아들은 립니요 그 아들은 시므이요 그 아들은 웃사요
대상 6:30) 그 아들은 시므아요 그 아들은 학기야요 그 아들은 아사야더라
아 졸음이 온다

이 기록에 따르면 에비아삽은 레위로부터 7대, 앗실은 8대, 다핫은 9대이다. 엘가나는 6대다.(그핫 자손) 또 야헛은 레위로부터 4대, 심마는 5대, 그리고 세라는 8대이다.(게르손 자손) 또한 여기서 말리는 레위로부터 3대다. 립니는 4대이다.(므라리 자손) 그런데 다음에 나오는 성경 구절들로 족보를 따져 보면 희한한 일이 생긴다.
(대상 6:31)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대상 6:32)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대상 6:33) 직무를 행하는 자와 그 아들들이 이러하니 그핫의 자손 중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저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사무엘의 아들이요
(대상 6:34) 사무엘은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여로함은 엘리엘의 아들이요 엘리엘은 도아의 아들이요
(대상 6:35) 도아는 숩의 아들이요 숩은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마핫의 아들이요 마핫은 아마새의 아들이요
(대상 6:36) 아마새는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아사랴의 아들이요 아사랴는 스바냐의 아들이요
(대상 6:37) 스바냐는 다핫의 아들이요 다핫은 앗실의 아들이요 앗실은 에비아삽의 아들이요 에비아삽은 고라의 아들이요』
(대상 6:38) 『고라는 이스할의 아들이요 이스할은 그핫의 아들이요 그핫은 레위의 아들이요 레위는 이스라엘의 아들이며』
(대상 6:39) 『헤만의 형제 아삽은 헤만의 우편에서 직무를 행하였으니 저는 베레갸의 아들이요 베레갸는 시므아의 아들이요
(대상 6:40) 시므아는 미가엘의 아들이요 미가엘은 바아세야의 아들이요 바아세야는 말기야의 아들이요
(대상 6:41) 말기야는 에드니의 아들이요 에드니는 세라의 아들이요
(대상 6:42) 아다야는 에단의 아들이요 에단은 심마의 아들이요 심마는 시므이의 아들이요
(대상 6:43) 시므이는 야핫의 아들이요 야핫은 게르손의 아들이요 게르손은 레위의 아들이며
여기서는 에비아삽은 레위로부터 5대, 앗실은 6대, 다핫은 7대이다. 엘가냐는 11대다. (그핫 자손) 또 야핫은 레위로부터 3대, 심마는 5대이며 세라는 8대다. (게르손 자손) 마지막으로 말리는 레위로부터 4대다. (므라리 자손) 에비아삽, 앗실, 다핫, 엘가나, 애핫, 말리의 대수가 틀렸다. 헤만과 아삽은 몇 대수나 차이가 나는데도 형제라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족보 자체가 둘 중 하나는 잘못되었거나 혹은 둘 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필사 오류이거나 당시 이스라엘에 동명이인이 넘쳐났던 것을 감안하면 동명이인들이 기록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21. 에스라와 느헤미야 기록의 모순

모순이 매우 많은 관계로(...) 일단 구절 내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 양측의 모순이 발견되는 구절은 모순, 아닌 부분은 o표시하였다.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의 자손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본성에 이른 자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바로스 자손이 이천 일백 칠십 이 명이요 (o) 스바댜 자손이 삼백 칠십 이 명이요(o) 아라 자손이 칠백 칠십 오 명이요 (모순1) 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이천팔백 십 이 명이요 (모순2) 엘람 자손이 일천 이백 오십 사 명이요 (o) 삿두 자손이 구백 사십 오 명이요 (모순3)삭개 자손이 칠백 육십 명이요 (o) 바니 자손이 육백 사십 이 명이요(모순4) 브배 자손이 육백 이십 삼 명이요(모순5) 아스갓 자손이 일천 이백 이십 이 명이요(모순6) 아도니감 자손이 육백 육십 육 명이요 (모순7) 비그왜 자손이 이천 오십 육 명이요(모순8) 아딘 자손이 사백 오십 사 명이요 (모순9) 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구십 팔 명이요(o) 베새 자손이 삼백 이십 삼 명이요 (모순10) 요라 자손이 일백 십 이 명이요 (o) 하숨 자손이 이백 이십 삼 명이요(모순11) 깁발 자손이 구십 오 명이요 (o) 베들레헴 사람이 일백 이십 삼 명이요(모순16) 느도바 사람이 오십 육 명이요(모순16123+56=179) 아나돗 사람이 일백 이십 팔 명이요 (o) 아스마웨??(아스마웹) 자손이 사십 이 명이요 (o) 기랴다림과 그비라와 브에롯자손이 칠백사십삼 명이요(o) 라마와 게바 자손이 육백 이십 일 명이요(o) 믹마스 사람이 일백 이십 이 명이요 (o) 벧엘과 아이 사람이 이백 이십 삼 명이요 (모순12) 느보 자손이 오십 이 명이요 (o) 막비스 자손이 일백오십육명이요(모순13-느혜미야엔 없음) 다른 엘람 자손이 일천 이백 오십 사 명이요 (o) 하림 자손이 삼백 이십 명이요 (o) 로드와 하딧과오노 자손이 칠백 이십 오 명이요(모순14) 여리고 자손이 삼백 사십 오 명이요 (o) 스나아 자손이 삼천 육백 삼십 명이었더라 (모순15) (에스라 2장 1절-35절)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로 돌아와 각기 본성에 이른 자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아사랴와 라아먀와 나하마니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베렛과 비그왜와 느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라 바로스 자손이 이천 일백 칠십 이 명이요(o) 스바댜 자손이삼백 칠십 이 명이요(o) 아라 자손이 육백 오십 이 명이요(모순1) 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이천 팔백 십팔 명이요(모순2) 엘람 자손이 일천 이백 오십 사 명이요 (o) 삿두 자손이 팔백 사십 오 명이요 (모순3) 삭개 자손이 백 육십 명이요 (o) 빈누이 자손이 육백 사십 팔 명이요(모순4) 브배 자손이 육백 이십 팔 명이요 (모순5) 아스갓 자손이 이천 삼백 이십 이 명이요(모순6) 아도니감 자손이 육백 육십 칠 명이요(모순7) 비그왜 자손이 이천 육십 칠 명이요(모순8) 아딘 자손이 육백 오십 오 명이요(모순9) 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구십 팔 명이요 (o) 하숨 자손이 삼백 십 팔 명이요 (모순11) 베새 자손이 삼백 이십 사 명이요 (모순10) 하립 자손이 일백 십 이 명이요 (o) 기브온 사람이 구십오 명이요 (o) 베들레헴과 느도바 사람이 일백 팔십 팔 명이요 (모순16-188) 아나돗 사람이 일백 이십 팔 명이요 (o) 아스마웨??(벧아스마웹) 사람이 사십 이 명이요 (o) 기럇여아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사람이 칠백 사십 삼 명이요(o) 라마와 게바 사람이 육백 이십 일 명이요 (o) 믹마스 사람이 일백 이십 이 명이요 (o) 벧엘과 아이 사람이 일백 이십 삼 명이요(모순12) 기타 느보 사람이 오십 이 명이요 (o) 기타 엘람 자손이 일천 이백 오십 사 명이요 (o) 하림 자손이 삼백 이십 명이요 (o) 여리고 자손이 삼백 사십 오 명이요 (o) 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이 칠백 이십 일 명이요 (모순14) 스나아 자손이 삼천 구백 삼십 명이었느니라 (모순15) (느혜미야 7장 6절-38절)
그리고 다음,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 칠십 삼 명이요 임멜 자손이 일천 오십 이 명이요 (o) 바스훌 자손이 일천 이백 사십 칠 명이요 (o) 하림 자손이 일천 십 칠 명이었더라 (o) 레위 사람은 호다위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 사 명이요 (o)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일백 이십 팔 명이요(모순17) 문지기의 자손들은 살룸과 아델과 달문과 악굽과 하디다와 소배 자손이 모두 일백 삼십 구 명이었더라(모순18) 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게로스 자손과 시아하 자손과 바돈 자손과 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악굽 자손과 하갑 자손과 사믈래 자손과 하난 자손과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르아야 자손과 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갓삼 자손과 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베새 자손과 아스나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부심 자손과 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과 바슬룻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더라 (여기까지 일치)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하소베렛 자손과 브루다 자손과 야알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스바댜 자손과 하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미 자손이니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이 삼백 구십 이 명이었더라 (o)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 종족과 보계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증거할 수 없으니 저희는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도합이 육백 오십 이명이요 (모순19)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에 하나로 아내를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으로 이름한 자라 이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 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방백이 저희에게 명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 삼백 육십 명이요 (에스라 2장 36절-64절)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 칠십 삼 명이요 임멜 자손이 일천 오십 이 명이요 (o) 바스훌 자손이 일천 이백 사십 칠 명이요 (o) 하림 자손이 일천 십 칠 명이었느니라 (o) 레위 사람들은 호드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 사 명이요 (o)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일백 사십 팔 명이요(모순17) 문지기들은 살룸 자손과 아델 자손과 달문 자손과 악굽 자손과 하디다 자손과 소배 자손이 모두 일백 삼십 팔 명이었느니라 (모순18) 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게로스 자손과 시아 자손과 바돈 자손과 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살매 자손과 하난 자손과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르아야 자손과 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갓삼 자손과 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베새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비스심 자손과 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과 바슬릿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느니라 (여기까지 일치)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소베렛 자손과 브리다 자손과 야알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스바댜 자손과 핫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몬 자손이니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이 삼백 구십 이 명이었느니라 (o)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돈과 임멜로부터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 종족과 보계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증거할 수 없으니 저희는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도합이 육백 사십 이 명이요 (모순19) 제사장 중에는 호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에 하나로 아내를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으로 이름한 자라 이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 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방백이 저희에게 명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 삼백 육십 명이요 (느혜미야 7장 39절-65절)
마지막으로,
그 외에 노비가 칠천 삼백 삼십 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 (모순20) 말이 칠백 삼십 육이요 노새가 이백 사십 오요 (o) 약대가 사백 삼십 오요 나귀가 육천 칠백 이십이었더라 (o)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즐거이 드리되 역량대로 역사하는 곳간에 드리니 금이 육만 일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일백 벌이었더라 (모순21)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그 본성들에 거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그 본성들에 거하였느니라 (에스라 2장 65절-70절)
그 외에 노비가 칠천 삼백 삼십 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사십 오 명이요 (모순20) 말이 칠백 삼십 육이요 노새가 이백 사십 오요 (o) 약대가 사백 삼십 오요 나귀가 육천 칠백 이십이었느니라 (o) 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하여 보조하였고 방백은 금 일천 다릭과 대접 오십과 제사장의 의복 오백 삼십 벌을 보물 곳간에 드렸고 또 어떤 족장들은 금 이만 다릭과 은 이천 이백 마네를 역사 곳간에 드렸고 그 나머지 백성은 금 이만 다릭과 은 이천 마네와 제사장의 의복 육십 칠 벌을 드렸느니라 (모순21)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이 다 그 본성에 거하였느니라 (느혜미야 7장 67-73절)

요약하자면, 이 통계적 목록 전체에 걸쳐서 모순이 산재해있다. 자손 숫자, 성전 내 직업인의 숫자 등 이 성경구절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숫자에 모순이 깔려있다. 그 와중에 마지막에 나온 '온 회중의 합계'는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도 혼란을 부추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세부 인원은 서로 다른데 그 인원들을 합산해서 나온 결과는 똑같다.

22. 아하지야가 왕이 될 대의 나이는 몇 살이었는가?

아하지야는 22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1년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는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의 손녀 아달리야였다. (열왕기하 8:26)
아하지야는 42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년간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는 오므리의 손녀로서 이름은 아달리야라고 하였다. (역대기하 22:2)
열왕기하에는 22세로, 역대기하에서는 42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기록 당시의 상황에서 기인한다.[19]

23. 유다 왕 아히시야는 어떻게 죽임당했을까?

유다 왕 아하지야는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벳하깐 길로 도망쳤다. 예후는 그의 뒤를 추적하며 "저놈도 쳐죽여라." 하고 명령하였다. 아하지야는 병거를 타고 이블르암 근처의 고갯길을 달리다가 화살을 맞아 상처를 입고 므기또로 도망하였으나 거기에서 죽었다. (열왕기하 9:27, 공동번역성서)
예후는 아합 가문의 죄를 다스리다가, 유다 군 장교들과 아하지야를 모시는 왕의 조카들을 만나 죽였다. 아하지야는 사마리아에 가서 숨어 있다가 끌려왔다. 예후가 그를 죽이자 사람들은 "그래도 한마음으로 야훼만 찾던 여호사밧의 아들인데." 하며 장례를 치러주었다. 마침내 아하지야 집안에는 왕노릇 할 만큼 강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역대기하 22:8-9, 공동번역성서)
열왕기하의 기록에서는 예후가 직접 쫓아가서 죽였다 되어 있고, 역대기하에서는 예후의 군사들이 예후에게 끌고 와서 죽였다 되어 있으며, 죽임을 당한 지역도 서로 차이가 있다.

24. 예후의 자손은 4대 동안 왕을 하리라?

(열왕기하 10:30, 공동번역성서) 야훼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마음에 들도록 일을 잘하였다. 나의 뜻대로 아합 가문을 잘 처치하였다. 그러므로 네 후손이 4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왕위에 오르리라."
예후를 대수에 포함하면 예후의 3대손까지 이스라엘 왕국의 국왕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이후 내용에서 정말 예후의 3대손까지 왕이 되었는가 확인해보자.
(열왕기하 10:35, 공동번역성서) 예후는 세상을 떠나 선조들에게로 돌아가 사마리아에 안장되었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즈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열왕기하 13:1, 공동번역성서)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즈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유다 왕 아하지야의 아들 요아스 제23년의 일이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17년 동안 다스렸다.
(열왕기하 13:9, 공동번역성서) 여호아하즈는 세상을 떠나 선조들에게로 돌아가 사마리아에 안장되었고, 그의 아들 여호아스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열왕기하 13:10, 공동번역성서) 여호아하즈의 아들 여호아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유다 왕 요아스 제37년의 일이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16년 동안 다스렸다.
(열왕기하 13:13, 공동번역성서) 여호아스는 세상을 떠나 선조들에게로 돌아가 사마리아에 있는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여로보암이 왕위에 올랐다.
우선 여기까지 나온 대수는 예후-여호아하즈-여호아스의 3대이다.
(열왕기하 14:23, 공동번역성서) 여호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지야 제15년의 일이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41년간 다스렸다.
(열왕기하 14:29, 공동번역성서) 여로보암이 선조들과 함께 잠들어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 곁에 안장되자, 그의 아들 즈가리야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열왕기하 15:12, 공동번역성서) 야훼께서 예후에게 "네 자손이 4대까지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으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요아스 이후로 2대가 더 나온다. 즉, 예후-여호아하즈-요아스-여로보암-즈가리야로 예후를 포함하면 5대가 된다. 사실은 예후를 뺀 4대까지 왕이 된다는 구절이었던 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긴 하다.

25. 유다 왕 아사의 신앙과 전쟁 여부

산당은 그대로 보존되었지만 그러나 아사는 일생 동안 야훼께 한결같이 신실하였다. 그는 자기의 부친과 자기 자신이 거룩하게 바친 각종 금은 집기들을 야훼의 전에 바쳤다. 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는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전쟁을 하였다. (열왕기상 15:14~16, 공동번역성서)
나라가 평온하였기 때문에 그는 유다 성읍들을 요새로 만들 수 있었다. 야훼께서 평화를 주셔서 여러 해 동안 전쟁이 없었다. 그는 유다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우리 하느님 야훼를 찾았더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다. 우리가 당신을 찾았으므로 이 땅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주셨다. 이런 때를 놓치지 말고 성읍들을 다시 세우자. 성벽을 둘러쌓고 성문을 만들어 달고 빗장을 만들어 꽂자." 그들은 성 쌓는 일을 잘 마치게 되었다.(역대기하 14:5-6, 공동번역성서)
이후 아사 왕 제삼십오년까지 전쟁이 없었다. (역대기하 15:19, 공동번역성서)

26. 미칼의 자녀

그 뒤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 (사무엘하 6:23, 공동번역성서)
사무엘하에는 다윗의 아내 미칼에게 죽을 때까지 자녀가 없었다고 나오는데, 역대기에는 미칼이 자녀를 두었다고 나와서 상호모순이 된다.

그러나 위의 구절은 다윗이 언약궤를 되찾으며 춤추는 모습을 본 미칼이 웃자 저주처럼 한 말이므로 그 이전에는 자녀를 가졌을 수 있다.

마소라 본문 사무엘하 21장 8절에서는 미칼에게 다섯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아드리엘에게 낳아주었다"는 것은 사울의 큰딸 메랍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본문은 서기관의 필사 오류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구전 토라에서는, 미칼이 메랍의 다섯 아이를 입양해서 양육했다고 한다(b. Sanh. 19b).

그리고 사무엘하 21:8에서 다른 판본에서는 사무엘의 다섯 아들이 전무 메랍의 자식이라고 하지만, 킹제임스판에서만 미갈의 자식이라고 되어있다. 성경 판본끼리도 내용이 통일되질 않는다.
공동번역 - 왕은 사울이 아야의 딸 리스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아르모니와 므비보셋, 사울의 딸 메랍이 므홀라 사람 바르질래의 아들 아드리엘에게 낳아준 아들 다섯을 잡아다
개역개정 -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NIV - But the king took Armoni and Mephibosheth, the two sons of Aiah's daughter Rizpah, whom she had borne to Saul, together with the five sons of Saul's daughter Merab, whom she had borne to Adriel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KJV - But the king took the two sons of Rizpah the daughter of Aiah, whom she bare unto Saul, Armoni and Mephibosheth; and the five sons of Michal the daughter of Saul, whom she brought up for Adriel the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NASB - So the king took the two sons of Rizpah the daughter of Aiah, Armoni and Mephibosheth whom she had borne to Saul, and the five sons of Merab the daughter of Saul, whom she had borne to Adriel the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27. 솔로몬은 히람에게 보수를 얼마나 주었을까?

(열왕기상 5:11, 공동번역성서) 그리고 솔로몬은 히람 왕실의 양식으로 20,000섬과 찐기름 20섬을 공급하였다. 솔로몬은 해마다 이만큼씩 히람에게 보냈다.
(역대기하 2:9, 공동번역성서) 채벌 기술자들에게 본인은 양곡을 대어주겠습니다. 20,000섬, 보리 20,000섬, 포도주 20,000말, 기름 20,000말을 당신의 일꾼들에게 대어주겠습니다."

28.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겐 아들이 몇 명일까?

(사무엘상 17:12, 공동번역성서) 그 때 유다 베들레헴에 이새라는 에브랏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 다윗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아들 8형제를 둔 이새는, 사울이 왕노릇 할 무렵에 이미 나이가 많았다.
(사무엘상 17:14, 공동번역성서) 다윗은 막내였다. 세 형들은 사울을 따라갔고
(역대기상 2:13-15, 공동번역성서) 이새가 낳은 아들들은 다음과 같다. 맏아들 엘리압, 둘째 아비나답, 셋째 시마, 넷째 느다넬, 다섯째 라때, 여섯째 오셈, 일곱째 다윗.
전자에서는 다윗이 8번째 아들이며 이새에게 아들이 8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후자에서는 다윗이 7번째였고 아들은 모두 7명이라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1명은 어려서 죽었으며, 그에 따라 이름 나열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29. 사울의 가족과 관련된 오류

(사무엘상 14:49-51, 공동번역성서) 사울에게는 세 아들, 요나단, 이스위, 말기수아와 큰딸 메랍과 작은딸 미갈이 있었다. 사울의 아내는 아히마스의 딸 아히노암이었다. 그의 사령관은 삼촌 넬의 아들 아브넬이었다. 사울의 아버지 키스와 아브넬의 아버지 넬은 아비엘의 아들이었다.
이제 다음을 보자.
(역대기상 9:39, 공동번역성서) 넬은 키스를 낳았고 키스는 사울을 낳았다. 사울은 요나단, 말기수아, 아비나답, 에스바알을 낳았다.
사무엘상 14장에서는 사울의 아들이 3명이라 하고 역대기상 9장에서는 4명이라 한다.

30. 다윗은 몇 년간 헤브론을 다스렸나?

그는 헤브론에서 7년 반 동안 유다 가문의 왕노릇을 했다. (사무엘 하 2:11, 공동번역성서)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는 33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 (사무엘 하 5:5, 공동번역성서)
여기서는 헤브론에서의 다윗의 통치가 7년하고도 6개월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윗 이스라엘을 다스린 햇수는 40년이다.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을 다스렸다. (열왕기상 2:11, 공동번역성서)
여기에서는 7년으로, 전자의 기록과 비교할 때 6개월의 차이가 발생한다. 이 역시 대략적 인 반올림으로 생각할수도 있다.

31.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은 몇 명인가?

다윗은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자리를 옮긴 뒤 후궁들을 더 얻어 아들딸을 많이 낳았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의 이름은 삼무아, 소밥, 나단, 솔로몬, 이브할, 엘리수아, 네벡, 야비아, 엘리사마, 엘리아다, 엘리벨렛이었다. (사무엘 하 5:13-16, 공동번역성서)
다윗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은 아래와 같다. 시마, 소밥, 나단, 솔로몬. 이 넷은 암미엘의 딸 바쎄바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그리고, 이브할, 엘리사마, 엘리벨렛, 노가, 네벡, 야비아, 엘리사마, 엘리아다, 엘리벨렛 등 아홉을 더 낳았는데, 이들이 모두 다윗의 적자들이다. 그 밖에 후궁들이 낳은 서자들이 있었고, 다말이라는 공주도 있었다. (역대상 3:5-9, 공동번역성서)

사무엘하에는 노가가 빠져 있고 역대상에는 엘리수아가 빠져 있다. 그리고 역대상은 엘리사마와 엘리벨렛이 중복 기재되어 있다. 단순 실수이거나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있다.

32. 다윗이 조사한 인구 수는 모두 몇 명인가?

요압이 왕에게 보고한 총 민병대 수는 칼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에 80만, 유다에 50만이었다. (사무엘 하 24:9, 공동번역성서)
보다시피 칼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에는 80만, 유다에는 50만이라 한다.
병적 조사한 결과를 다윗에게 보고했다. 칼을 쓸 수 있는 군인이 이스라엘에는 110만이 있었고 유다에는 47만이 있었다. (역대기상 21:5, 공동번역성서)
여기서는 칼을 쓸 수 있는 군인이 이스라엘에는 110만, 유다에는 47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인구 수에 대한 몇가지 가능한 설명이 있다. 우선 성경을 조금 더 자세히 봐야 한다. 역대상 바로 다음 구절인 21:6절.

그러나 요압이 왕의 말을 가증히 여겼으므로 그들 중에서 레위와 베냐민은 세지 아니하였더라. <역대상 21:6>

즉 다시 얘기하면, 이스라엘 군인은 총 110만명 이었지만, 요압이 계수를 하라는 왕의 명령에 불만을 품고 110만명 중에서 레위와 베냐민 지파를 세지 않고, 80만명 이라고 보고했다는 것.

혹은 역대상 27장 1절에서 15절까지 보면, 왕을 섬긴 관리들과 그 수가 나오는데, 12지파가 각 조당 24,000명씩 한달에 한번씩 교대로 왕을 섬긴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또 역대하 1장 14절을 보면 12지파에 24,000명이면 총 288,000명이고, 이를 반올림 하면 대략 300,000명 정도 차이가 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숫자를 뺀 기록일 수 있다.

유다 백성의 인구 수도 설명 가능하다.
사무엘하에서는 50만명 이라고 기록했고, 역대상 에서는 47만명 이라고 기록한다. 이에 대해서 두가지 설명이 가능한데, 첫번째는 단순하게 사무엘서의 저자가 반올림을 했을 가능성이다. 우리는 요압에 다윗에게 보고한 숫자가 정확한 숫자가 아니며 어딘가에서 반올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요압은 어디에서 반올림을 했을까? 이스라엘 군인의 숫자가 6째 자리 즉 10만의 단위로 반올림이 되어 있는 것으로 유다 군인을 만 단위에서 반올림을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두번째는 역대기의 저자가 왕궁의 수비대 였던 3만명 <사무엘하 6:1>을 뺀 숫자를 기록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왕궁에 있는 3만명은 이미 알고 있는 인원이었기에 실제 계수한 것은 47만명 이었지만, 왕에게 보고를 할 때는 왕궁에 있는 3만명 까지 합쳐서 보고를 했을 수 있다.

33. 다윗이 죽인 아람 군사 수는 몇 명인가?

아람 군은 진을 치고 다윗 군과 맞붙어 싸웠으나, 마침내 이스라엘군에게 쫓겨 달아나고 말았다. 다윗은 아람 병거대 700명과 기병대 40,000명을 무찌르고 적의 사령관 소박을 쳐죽였다. (사무엘하 10:17-18, 공동번역성서)
아람 군은 대진하고 있는 다윗을 맞아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이스라엘군에게 쫓겨 달아나고 말았다. 다윗은 아람 군 병거병 7,000과 보병 40,000을 죽이고 사령관 소박도 쳐죽였다. (역대기상 19:17-18, 공동번역성서)
전자의 기록은 700명을 죽였다고 하는데 후자는 7,000명을 죽였다고 되어 있다. 공통 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 되어 있으나,
사실 영어 성경과 개역개정에서는 철병거 700대라고 나와있기에 단순 번역 미스다.

34. 사해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18,000명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

(사무엘하 8:13, 공동번역성서) 다윗은 돌아오는 길에 소금 골짜기에 사는 에돔 사람 18,000명을 쳐죽여 이름을 떨치고,
(역대기상 18:12, 공동번역성서)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사해 골짜기에 사는 에돔 사람 18,000명을 쳐죽이고
동일한 사건에 대해 전자는 다윗이, 후자는 다윗의 신하인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하의 공적은 군주의 공적이다! 사실 다윗의 명령으로 아비새가 공격했다고 하면 문제는 없다

35. 성경의 뇌물 관련 기록

너희는 뇌물을 받지 마라. 뇌물은 멀쩡한 눈을 가려 올바른 사람들의 소송을 뒤엎는다. ( 탈출기 23:8, 공동번역성서)
' 뇌물을 받고 죄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 아멘!' 하여라. ( 신명기 27:25, 공동번역성서)
위선자의 무리는 그 씨가 마르고, 뇌물을 좋아하는 자의 천막은 타버린다네. ( 욥기 15:34, 공동번역성서)
모리배는 집안에 해를 끼치고, 뇌물을 멀리하는 사람은 복된 삶을 누린다. ( 잠언 15:27, 공동번역성서)
임금이 정의로 다스리면 나라가 튼튼히 서지만, 마구 긁어들이면 나라가 망한다. ( 잠언 29:4, 공동번역성서)
아무리 지혜로워도 탐욕을 내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뇌물을 받았다가는 망신을 당한다. ( 코헬렛 7:7, 공동번역성서)
그런데, 잠언의 기록은 이와 상반된다.
뇌물은 요술방망이 같아 어디에 쓰든 안 되는 일 없다. ( 잠언 17:8, 공동번역성서)
다만 이 구절의 전체적인 문장은 '뇌물을 쓰는 사람의 눈에는 뇌물이 요술방망이처럼 보인다. 어디에 쓰든 안 되는 일이 없다. (‭잠언‬ ‭17‬:‭8‬ RNKSV)' 이다.
은밀히 안기는 선물은 화를 가라앉히고, 몰래 바치는 뇌물은 거센 분노를 사그라뜨린다. ( 잠언 21:14, 공동번역성서)
뇌물을 받지 말라 하면서 뇌물을 주는건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것이 뇌물을 주라는 권장은 아니라고 본다. 잠언의 전체적인 기조는 이 문서 첫 6절의 성경구절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에, 인간의 일반적인 사회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이 서술은 오히려 앞뒤도 안맞을 뿐더러 오히려 권장하는것처럼 충분히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이 되는 대목임엔 분명하다.[20]

전체적으로 뇌물을 자신이나 가족의 이익을 위해서 쓰는 것은 저주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을 위해 뇌물을 쓰거나 화해를 할 때 뇌물을 쓰는 것은 권장하는 말이다. 그리고 잘 모르면 그냥 뇌물을 아예 받지 말 것을 권장하는 소리다.

36. 시드키야는 여호야긴(여호야킴)의 삼촌일까 아들일까?

(열왕기하 24:17, 공동번역성서) 바빌론 왕은 여호야긴의 삼촌인 마따니야를 왕으로 세우고 그의 이름을 시드키야로 바꾸도록 하였다.
(역대기상 3:16, 공동번역성서) 여호야킴의 아들은 여고니야요, 그 아들은 시드키야이다.
삼촌이면서 아들이다(…)무슨 족보가 이래 성경에 자주 보이는 근친상간 문제일수도 있다. 만약 여호야긴이 자기 할머니(...)와 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자기 자식이면서도 어머니나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일테니 가능은 하다. 혹은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다. 일단 정설은 시드키야는 여호야긴의 삼촌이라는 열왕기의 기록이 맞고, 훨씬 후대에 쓰인 역대기는 시드키야가 여고니야(여호야긴)의 후계왕이니 당연히 아들이겠거니 하고 쓴 오류로 본다. 비슷한 예로 백제 무령왕도 사실 개로왕의 아들이었지만 삼국사기에서 동성왕의 후임 왕이니 당연히 동성왕의 아들이겠지 하고 그렇게 기록한 오류가 있다.

37. 여호람은 언제 왕이 되었을까?

(열왕기상 22:52, 공동번역성서) 아합의 아들 아하지야는 유다 왕 여호사밧 제17년에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위에 올라 2년간 다스렸다.
(열왕기하 3:1, 공동번역성서) 유다 왕 여호사밧 제18년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위에 올라 12년을 다스렸다.
17년에서 2년이 경과하면 19년이지 18년이 아니다. 다만 햇수로 세면 모순이 해결된다.

38. 히브리 12지파의 성읍들

네겝 쪽으로 에돔과 접경하고 있는 유다 후손 지파 남단 성읍들은 아래와 같다. 캅스엘, 에델, 야굴, 키나, 디모나, 아드아다, 케데스, 하솔, 잇난, 지브, 텔렘, 브알롯, 하솔하다따, 크리욧헤스론 곧 하솔, 아맘, 세마, 몰라다, 하살가따, 헤스몬, 벳벨렛, 하살수알, 브엘세바, 비즈요드야, 바알라, 이임, 에셈, 엘돌랏, 그실, 호르마, 시글락, 마드만나, 산산나, 르바옷, 실힘, 엔림몬. 이렇게 모두 29성과 그 변두리 천막촌들이다. ( 여호수아 15:21-32)
12지파의 성읍은 모두 35개인데 이를 29개의 성읍이라 말하고 있다.천막촌들인가 보지

39. 솔로몬의 궁전을 지을 때 감독 수는 몇 명인가?

(열왕기상 5:29-30, 공동번역성서) 솔로몬은 또 짐 나르는 사람 70,000만과 돌깨는 사람 80,000을 산악 지대에 두었는데 그 외에도 일을 감독하는 솔로몬의 고급 관리 3,300명이 있었다.
(역대기하 2:17, 공동번역성서) 그 중에서 70,000명을 짐꾼으로 징용하고 80,000명은 산에서 돌 떠내는 일을 시켰다. 그리고 그 일꾼들을 부리는 감독으로 3,600명을 뽑았다.
성경의 기록대로라면 300명의 차이가 난다.

40. 솔로몬의 신전에 쓰일 놋쇠 바다(물탱크)의 두께는?

(열왕기상 7:26, 공동번역성서) 바다 모형의 두께는 한 뼘이며, 그 가장자리 테는 나리꽃 무늬로 잔의 테처럼 만들어졌다. 이 바다 모형에는 2,000말을 담을 수 있었다.
(역대기하 4:5, 공동번역성서) 바다 가장자리의 두께는 한 뼘 나비였다. 그 가장자리는 잔의 가장자리와 비슷하게 꽃무늬를 새겨놓았다. 그리고 그 바다 모형에는 물을 3,000말 담을 수 있었다.
동일한 이야기에 대해 하나는 2,000말, 하나는 3,000말이라 한다. 다만 꼬장꼬장하게 따질 경우 "최대" 2000말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3,000말을 담을 물탱크에 2,000말을 담을 수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순이 아닐 수 있다.

41. 마아가(미가야)는 누구의 딸인가??

(열왕기상 15:1-2, 공동번역성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18년에 아비얌이 유다 왕위에 올랐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기간은 3년밖에 되지 않았다. 왕의 어머니는 압살롬의 딸인 마아가였다.
(역대기하 13:1-2, 공동번역성서) 아비야가 유다 왕이 된 것은 여로보암 왕 제18년이었다. 그는 3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는 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로서, 이름은 미가야라고 하였다. 아비야와 여로보암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
보다시피 부친의 이름이 다르다. 압살롬과 우리엘 중 한 명은 남자같은 이름의 모친이라거나? 사실 이부분은 히브리어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구분이 없어 발생한 문제이다. 그냥 모두 '선조'로 퉁치기때문에 압살롬과 우리엘중 한명은 아버지 한명은 할아버지라 하면 모순이 되지는 않는다.

42. 엘리야의 수수께끼 1

엘리야의 이야기도 어설픈 부분이 상당하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아하시야가 왕이 병이 들어 엘리야를 찾는데, 50인 대장에게 엘리야를 불러 오도록 명한다. 50인 부장은 즉시 부하 병사 50명을 인솔하고 엘리야를 찾아간다.
50인 대장을 부하를 딸려 엘리야에게 보냈다. 그들이 산으로 올라가 보니, 엘리야는 마침 산 위에 앉아 있었다. 대장이 " 하느님의 사람이여, 당장 내려오시오. 어명이오." 하고 외치자, 엘리야는 그 50인 대장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렇다. 나는 하느님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너 대장과 함께 너희 50인 부대를 삼켜버릴 것이다." 그러자 하늘에서 이 내려와 대장과 함께 그 50인 부대를 삼켜버렸다. ( 열왕기하 1:9~10, 공동번역성서)
이런 짓이 2번 반복되어 순식간에 102명의 장병들이 불에 타죽는다. 2번씩이나 파견됐던 장병들이 모두 불에 타 죽었기 때문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단 1명도 없다고 성경에 쓰여 있다. 그런데 3번째 파견된 50인 대장의 말을 살펴보면
왕은 3번째로 50인 대장을 부하를 딸려 엘리야에게 보냈다. 그는 산에 올라가서 엘리야를 만나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였다. " 하느님의 사람이여, 소인과 이 군인 50명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미 2차례나 하늘에서 이 내려와 50인 부대를 대장과 함께 삼켜버렸습니다. 이제 이 목숨만은 아껴주십시오." ( 열왕기하 1:13~14, 공동번역성서)
성경에 따르면 첫번째와 두번째, 도합 102명이 모두 하느님의 불에 타 죽고,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따라서,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바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세번째의 50인 대장은,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걸하고 있다. 앞서 간 부대원들이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죽었다는 것은 유추가 가능할 수 있으나,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타 죽은 것'은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점이 설명되지 않는다. 누군가 제3의 목격자가 있었을까? 아니면 엘리야 자신의 증언일까? 혹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광경을 보았다는 추측도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도착하자마자 주변에 널린 뼈들을 보고 눈치를 깐 걸지도

이것은 위의 이집트의 재앙으로 가축이 모두 죽었다고 기록된 것과 같은 이치다. 번역의 문제이거나 문맥상 그리된 것이다. 모두 죽었다고 되어 있지만 실상 거의 다 죽었다고 봐야 한다. 즉 1마리나 1명의 생존자가 있을 수도 있다. 위에도 적혀 있지만 야살의 책에도 이집트의 가축이 모두 죽었다고 하다가 다음 구절에 오직 1마리가 살아남았다라고 기록했다. 스펙타클한 연출을 위해서 그리고 가독성을 위해서 모두 죽었다라고 간략하게 기록되었거나 번역을 잘못한 것이다.

43. 엘리야의 수수께끼 2

열왕기에 기록된 엘리야의 기적 부분도 논란의 여지가 되는 부분이 있다. 열왕기상 18장 부근을 보면, 엘리야 한 사람이 갈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 450여 명과 기적 대결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자기 앞으로 다가오라고 말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다가오자, 그는 허물어진 야훼의 제단을 고쳐 쌓았다. 엘리야는 일찍이 야훼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신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게서 나온 지파의 수대로 돌을 12개 모았다. 엘리야는 그 돌 12개로 야훼의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제단 주위에는 곡식 2가마 정도 들어갈 만큼 큰 도랑을 팠다. 그는 장작을 쌓은 다음 송아지를 잡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물을 4동이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대로 하자 그는 그렇게 한 번 더 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대로 하자 다시 한 번 더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3번을 붓자 이 제단 주위로 넘쳐흘렀고 옆 도랑에 가득 괴었다. ( 열왕기상 18:30~35, 공동번역성서)
돌로 단을 쌓고, 단 둘레에 곡식 2가마가 들어갈 만큼의 도랑을 팠다고 한다. 그리고 물 12통을 길어다가 제물과 나무에 부었더니, 모두가 물에 푹 젖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을 열심히 부어댄 것은, 젖은 상태에서 불이 붙는 장면을 연출하여 더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기 위함인데, 지금 이 시기 중동 지방은 성경에 따르면 엘리야의 예언에 따라 야훼에 의하여 3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동네는 우물의 깊이만도 자그마치 200~300m가 넘고, 가뭄이 아니더라도 와디라 하는 물 없는 뿐인 살벌한 동네다. 이런 지방에서 3년의 가뭄 뒤에 12통씩이나 되는 물이 어디서 났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 왕국의 왕인 아합조차도 마시고 세수할 물이 없어서 찾아 헤맸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부은게 사실 물이 아니라 기름이었다는 개드립같은 주장도 있다(...) 다만 가르멜 산의 위치가 지중해 연안의 바닷가이니, 바닷물을 길어다 부었다고 하면 설명이 된다.

일부 기독교계의 해석은, 갈멜 산이 거대했고 거의 모든 지형이 나무와 숲으로 뒤덮여 있었기에 어디선가 물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 본다. 이스라엘은 원래 부터 6개월 동안 건기였고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곳인데 그런 이스라엘 중에서도 갈멜 산은 특히나 물이 풍부한 곳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3년 동안 물이 없었어도 가축이나 사람이 죽지 않을 정도였을 것이기 때문에. 무리를 하면 당연히 그 정도는 물을 얻어낼 순 있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강이 그리 크지 않아서 말라 붙어도 곳곳에서 웅덩이가 숲 안쪽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다만 엘리야 당시의 갈멜 산의 기후적 특징에 대한 근거가 없다는 점이 지적된다.

그외에도 이상한 대목이 또 있는데,
그들은 준비한 황소를 받아 잡아놓고는, 아침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오, 바알이여, 대답하소서." 그러나 대답은커녕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 예언자들은 자기네가 만든 제단을 돌면서 절뚝거리는 춤을 추었다. 한낮이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말하였다. "바알은 신이니까, 더 크게 불러보아라. 깊은 사색에 빠져 계신지도 모르지. 외출 중인지, 아니면 여행 중인지, 혹은 잠이 드셨는지도 모르니 어서 깨워보아라." 그들은 더 크게 소리쳤다. 자기네 의식을 따라 칼과 창으로 몸에 상처를 내어 피까지 흘렸다. 한낮이 지나 제사 시간이 될 때까지 그들은 신접한 모습으로 날뛰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은커녕 아무 소리도, 아무 기척도 없었다. ( 열왕기상 18:26~29, 공동번역성서)
시기상 엘리야의 차례가 되어 번제물에 물을 끼얹는 행동을 하기 전에, 바알 예언자들이 먼저 나서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사를 지내도 바알의 응답이 없다는 내용의 기록이다. 바알 예언자들이 제사 지낼 때,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에 엘리야가 백성들을 시켜 1. 단을 쌓고 2. 도랑을 파고 3. 나무를 준비하고 4. 송아지를 잡아 각을 뜨고 5. 통 4개로 (없는) 물을 3번 길어다 붓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분명히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은 지났을 텐데, 다음을 보자.
제사 드리는 시간이 되어 예언자 엘리야가 앞으로 나와서 외쳤다. "오, 아브라함 이사악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이제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제가 한 모든 일이 당신의 말씀을 좇아 한 것임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여주십시오. 응답해 주십시오. 야훼여, 저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백성으로 하여금 야훼께서 하느님이심을 깨닫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신 분이 당신이심을 알게 하여주십시오." ( 열왕기상 18:36~37, 공동번역성서)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은 벌써 지났건만, 아직도 그 제사 드리는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타임 슬립 여기에 대해서는 어차피 상대방 하는 일이 뻘짓이라서 의도대로 안 될 걸 아니까, 미리 준비했다가 저녁 제사 시간 때 딱 내놓았을 수도 있다는 식의 해석도 나온다.

이는 30절을 시작하는 단어 그러자를 무엇으로 해석했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일 이것이 '저녁 제사 시간까지 저러는 꼴을 보고 나서'라고 해석한다면, 1. 단을 쌓고 2. 도랑을 파고 3. 나무를 준비하고 4. 송아지를 잡아 각을 뜨고 5. 통 4개로 (없는) 물을 3번 길어다 붓는 작업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명백한 모순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저런 뻘짓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자' 같은 식으로 해석했다면, 적어도 저들을 조롱한 한낮 이후부터 저 준비들을 다 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는 공동번역성서만을 보고 해석한 것이므로, 원문이나 다른 언어 번역본과의 대조가 필요하다.

44. 므나쎄의 죽음

구약 시절 유다 왕국의 왕 므나쎄에 대한 기록이 다르다.
(열왕기하 21장 16절, 공동번역성서) "므나쎄는 나의 눈에 거슬리는 그 못할 짓을 하도록 이끌어 유다 백성을 죄에 빠뜨린데다가, 무죄한 사람의 피마저 흘려 온 예루살렘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므나쎄의 나머지 사적과 행적, 그리고 그가 저지른 죄는 유다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므나쎄가 그 선조들과 같이 잠들자, 우짜 정원이라고도 하는 왕실 정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들 아몬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므나쎄가 마음을 고쳤다는 기록이 전혀 없이, 그냥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역대기하의 기록은 다르다.
(역대기하 33장 11~16절, 공동번역성서) 야훼께서는 아시리아 왕의 군대를 끌어들이셨다. 아시리아 군 장교들은 므나쎄를 갈고리로 끌어내어 놋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데리고 갔다. 이렇게 곤경에 빠지자 므나쎄는 자기의 하느님 야훼께 빌었다. 선조들의 하느님 앞에 굴복하고 빌었다. 그러자 야훼께서는 마음이 움직이시어 그의 애원을 들어주시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왕위에 앉게 해주셨다. 므나쎄는 그제야 야훼야말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그는 기혼 서쪽 골짜기에다가, 다윗 성 물고기문에 이르기까지 외곽성을 쌓아올렸다. 오벨 밖으로 돌아가며 성을 아주 높이 쌓아올렸고, 유다의 요새화된 성마다 군대와 장군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외국의 신상들을 치워 없애버렸다. 야훼의 성전에 있던 우상을 떼어내고 야훼의 성전 언덕과 그 밖에 예루살렘에 세웠던 제단들을 허물어 성 밖에 내다 버렸으며, 야훼의 제단을 세운 다음 그 위에다 친교제물과 감사제물을 바치고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를 예배하라고 유다인들에게 일렀다.
므나쎄가 바빌론에 잡혀갔다 돌아온 뒤 회개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회복하는 데 앞장섰다는, 열왕기하의 내용과는 정반대되는 이야기이다. 사실은 므나쎄가 둘? 저자인 에즈라가 바빌론 포로 귀환기 때의 종교적 지도자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귀환 후 옛 유대 땅에 정착해야 할 백성들의 신앙심을 고취시킨 뒤 결집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므낫세가 회개했다는 내용으로 변형시켰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아시리아의 기록에는 므나쎄가 치세 도중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 조공을 바치러 갔다 온 기록은 있는데 그걸 포로로 끌려간 걸로 곡해한 것으로 보인다.

45. 이사야서의 예수 탄생 예언?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하여 예수의 탄생이 구약에서부터 이미 예언된 것이라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사야서의 해당 구절을 살펴보자.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서 7:14
그렇다면 마태오 복음서의 해당 구절을 살펴보자.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주었다. 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오 복음서 1:21-23
보다시피 마태오는 이사야에서 예언했던 일이 일어났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구약에 나온 해당 구절만 글자 그대로 볼 때는 예수에 대한 예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통 기독교계에서는 예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언급할 때 이사야서 7장 14절만을 읽게 하는데, 그 뒤로 계속 이어지는 내용을 읽어보자.
그 아기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되기 전에 네[21]가 원수로 여겨 두려워하는 저 두 왕[22]의 땅은 황무지가 되리라. 야훼께서 아시리아 왕으로 하여금 너와 너의 겨레와 너의 왕실을 치게 하실 터인즉, 그 날은 에브라임이 유다와 갈라지던 날 이후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불행한 날이 되리라. 이사야서 7:16
보다시피, 이사야서 7장 14절에서 임마누엘이라 언급된 아기가 자라서 어른이 되기 전에 두 왕, 즉 아람 왕 르신과 에브라임왕(이스라엘)이 당시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앗수르에게 멸망 당한다고 유다왕 아하스에게 하는 말이다. 이 뒤로도 임마누엘이라 이름 붙여진 아기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23]
야훼께서 나에게 분부하셨다. "너는 큰 판을 가져다 거기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글씨로 마헤르 샬랄 하스 바스라고 새겨라." 그래서 나는 믿을 만한 증인으로 사제 우리야와 여베레키야의 아들 즈가리야를 세웠다. 그리고 내가 여예언자를 가까이하였더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야훼께서 나에게 분부하셨다. "이 아기의 이름을 마헤르 샬랄 하스 바스라 하여라. 이 아기가 아빠 엄마라 부를 줄 알기도 전에 사람들이 다마스쿠스의 보화와 사마리아에서 빼앗은 전리품을 아시리아 왕에게 가져다 바치리라." 이사야 8:1-4
이후로 이어지는 내용은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인데, 이 '아들'은 예수가 아닌 제사장 이사야의 아들 '마헤르 샬랄 하스 바스'라는 아이다. 또한 이 아이가 크기 전에 다마스쿠스와 사마리아를 앗수르가 쳐서 없앤다는 이야기며, 동정녀가 아니고 자기 아내와 동침한 결과다.

다만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이 서술은 개신교에서도, 가톨릭에서도 문자 그대로는 아하즈에게 주는 약속의 표지라고 본다. 다만 후술할 4중적 해석법 등의 성서해석과 주해를 도입해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가 이 구절에서 동정 마리아에 의한 예수 탄생의 '예표'를 해석하였다고 보는 것. 문제는 이 구절이 기독교계에서 너무나 유명해지다 보니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의 탄생을 문자 그대로 예고한 것이라고 오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장과 기장, 순복음과 성결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류 개신교계에서 이사야 서의 예언을 예수 탄생의 예언이라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부분 주일 예배 때 목사의 설교에서 심심하면 튀어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지적 자체가 문제가 있다. 앞뒤 맥락을 제대로 보자.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 이라고 할 것입니다. 15.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될 때에, 그 아이는 버터 와 꿀을 먹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되기 전에, 임금님께서 미워하시는 저 두 왕의 땅이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17. 에브라임 과 유다가 갈라진 때로부터 이제까지, 이 백성이 겪어 본 적이 없는 재난을, 주님께서는 임금님과 임금님의 백성과 임금님의 아버지 집안에 내리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앗시리아 의 왕을 끌어들이실 것입니다. 이사야서 7:14‭-‬17 새번역 성경
16절에서는 임금(아하스)에게 당신이 싫어하는 두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두 나라는 아이가 크기 전에 멸망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인지 태어나기 전인지는 나와있지 않다. 그러다 17절에서는 임금에서 그의 집안에 저주를 내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 뒷구절에서는 25절까지 아기는 나오지도 않고 유대에 닥칠 저주의 비유만 얘기한다. 그리고 나서 8장으로 넘어가는데, 과연 그 8장 앞부분에 등장하는 아기가 7장에 언급된 아기와 동일인이냐는 것이다. 7장의 아기에 대해서는 처녀가 임신한다고 썼으나 8장의 아기에 대해서는 여예언자와 동침해서 낳는다도 써있다. 이 때문에 7장의 아기와 8장의 아기가 동일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46. 예수의 족보 문제

마태오 복음서 루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족보가 서로 다르다. 두 사람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장문의 족보를 나열한다.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가 유대인의 믿음과 맞아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두 저자는 예수의 아버지를 나자렛의 요셉으로 본다. 여기까지만 일치한다는 게 문제다. 그런데 나자렛의 요셉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야곱'이라고 하는데 루카 복음서는 '헬리'라고 말한다. 두 복음서에서 제시하는 족보라는 게 고작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갔을 뿐인데 벌써 할아버지부터가 다르다. 그 위로 다윗이 나올 때까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24]

마태오 복음서 루카 복음서의 계보가 다른 족보라는 것은, 대부분 성서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성경 왜곡의 역사>의 저자 바트 어만이 저술한 <예수 왜곡의 역사> 63쪽을 보면, 루카 자신이 예수의 족보라고 밝히고 있다고 적고 있다. 바트 어만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3대를 빼버리는 등 무리하게 14대로 맞춘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를 가지고, 이런 방식이 유대인들의 정통 족보라고 하는 것은 무리라는 견해를 보였다. 더욱이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전근대였던 만큼, 그 시대에 살았던 저자가 여자의 족보를 적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25]

47. 이집트 피난의 모순

예수의 갓난 아기 시절 이집트 피난과 관련해서도 이상한 점이 있다.
박사들이 물러간 뒤에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하고 일러주었다. 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마태오 복음서 2:13~15)
보다시피 마태오 복음서 예수가 태어난 후 이집트로 도망을 쳐서 헤로데가 죽기까지 거기 있었다고 한다. 그럼 루카 복음서를 살펴보자.
여드레째 되는 날은 아기에게 할례를 베푸는 날이었다. 그 날이 되자,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는 날이 되자,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 루카 복음서 2:21~22)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태어난 후 8일만에 율법이 정한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기 위하여 예루살렘(헤로데 왕의 도성)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보다시피 내용이 불일치한다. 한편 일부 기독교 해석에서는 율법이 정한 정결 예식이 다 끝난 후에 동방박사들이 도착하고 예수 가족이 이집트로 피난 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설명도 이상하다. 성경의 기록상 예수가 태어나고,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만난 것은 분명히 베들레헴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도들의 주장대로라면, 1. 베들레헴 구유에서 태어난 예수가, 2. 8일 후에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3. 도로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동방박사들을 만났다는 것이 된다. 모순이 된다는 것.

야고보 복음서에는 예수살렘에서 정결의식을 치른 때가 헤롯에게 피신 후 잠잠해진 이후로 추정된다
야고보 복음서의 마지막에 즈카르야가 헤롯에게 죽고, 시므온이 선출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시므온은 누가복음에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자이다
야고보 복음서에도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볼 때까지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성령의 보증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되었다

누가복음에서 오해한 것이 8일만에 율법이 정한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기 위하여가 아니다
누가복음 2장 21절 할례할 8일이 되매라고 기록되었다
누가복음 2장 22절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라고 기록되었다
할례와 정결예식의 날은 각기 다른 날이다
누가복음 2장 21절과 22절 사이가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고 하자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숨긴 때이다
헤롯이 죽고 정결예식을 치르고 나사렛으로 간 것이다

47.1. 의문에 대한 반박

다만 이와 관련해선 다음과 같은 글로 반박이 가능하다. # 예수가 베들레헴에 있을 당시는 갓난 아기가 아니었고 말구유에 누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야고보 복음서에는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이르기 전에 동굴에서 나셨다라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산파를 구하러 베들레헴으로 가는데 산에서 내려오는 산파를 만나서 마리아에게 데려온다
마리아는 처녀인 상태에서 구름이 감싸이고 이후 예수님이 마리아의 젖을 먹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박사들도 동굴에서 예수님과 만났다라고 기록되었다

48. 복음서 행적의 모순

4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행적이 불일치하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루살렘 예수의 성전 정화 이야기가 앞부분(2장 13~25절)에 나오지만,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뒷부분(21장 12~13절)에 나오므로 상당한 시차가 발생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래아 지역에서만 가르쳤고, 유대 지방에서 가르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유일하게 생애 막바지에 예루살렘에 갔을 뿐이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래아와 유대에서 비슷하게 가르침을 펼쳤다'고 나온다. 한편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주로 예루살렘'에서 설교했고, 갈릴래아에서의 설교는 드물었다고 나온다. 이는 전승 자료를 가지고 복음사가들이 서술한, 지향점과 방점을 두고자 하는 면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데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이 드물었다는 것은, 고향에서의 예수 멸시를 강조하는 해석인 식이다.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낸 사건은, 오히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이 3년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로 쓰인다고도 한다. 또는 복음사가들이 수집한 자료를 일정한 '의도'에 따라 배열할 때, 그 의도 때문에 차이가 났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의 성전 정화를 공생애의 시작에 둔 것은 예수의 모든 행적을 집약적으로 표출하는 사건이 성전 정화라고 생각한 것이며,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의 성전 정화를 공생애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둔 것은 이러한 행적 서술로 예수의 모든 공생애 행적을 마무리하고자 한 까닭이다. 더욱이 예수의 성전 정화는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49. 세례 받은 예수는 다음 날 어디에 있었나?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 즉 공관복음에서, 예수 세례를 받은 후에 광야로 나가고 악마에게 시험을 받는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가 세례를 받고 '곧' 광야로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가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줄 때 성령 비둘기처럼 예수에게 내려와 머무는 것을 보았고(1:29~34), 이튿날 예수를 다시 보고는 예수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한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이런 선언이 분명 이틑날 있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예수는 제자들을 모으기 시작하고(1:35~52), 대외적 활동을 시작하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한다(2:1~11).

이 부분에 있어서는 진실은 예수님밖에 모른다. 가령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A와 만났다면 A는 예수님과 광야에서 첫만남이지만 예수님이 이후 다른 곳에서 B를 만났다고 하면 B 입장에서는 예수님과 그 곳에서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작성자의 시점에 따라서 다를 수 밖에 없다.

50. 기적의 순서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카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 요한 복음서 2장 11절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머무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 요한 복음서 2장 23절
예수께서는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의 카나에 다시 가셨다. 거기에 고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가파르나움에서 앓아 누워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자기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으니 가파르나움으로 내려가셔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사정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그 고관은 "선생님, 제 자식이 죽기 전에 같이 좀 가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예수께서 "집에 돌아가거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시니 그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길에 마중 나와 그의 아들이 살아났다고 전해 주었다. 그가 종들에게 자기 아이가 낫게 된 시간을 물어보니, 오후 1시에 열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그 때가 바로 예수께서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예수를 믿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돌아오신 뒤에 보여주신 2번째 기적이었다.
- 요한 복음서 4장 46~54절
이상하지 않은가? 첫 번째 기적이 있은 뒤 많은 표적이 있다고 해 놓고서, 2번째 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갈릴래아에서의 2번째 기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는데, 본문에서는 '이것은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돌아오신 뒤에 보여주신 2번째 기적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의 문장을 놓고 볼 때, 저 구절의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돌아온 뒤"는 단순히 시점을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 다만 서술을 정확하게 하지 못한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신 뒤 갈릴래아에서 보여주신 2번째 기적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야 정확하기 때문. 물론 이 횟수는 필자들이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기록한 것임을 참고해야한다. 객관적인 사실을 적은 건 아니기 때문에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51. 예수는 세례를 주었는가?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요 3:2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요4:2)
3장에서는 예수가 세례를 주었다고 하지만 4장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한글로는 문맥이 3장에 세례를 직접 베푸셨다고 적혀있지 않다.
번역이 에매모호한데 4장에는 오해할까봐 다시 적은 듯 하다
추측하자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하시다가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신 것 같다
4장의 요점은 예수님께서 친히 베푸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세례를 베푸셨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이 스스로 세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례를 베푼 것으로 봐야 한다

52. 야이로의 딸은 죽어 있었을까?

마르코 복음서에서, 회당장 야이로 예수에게 찾아와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한다.
예수께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다시 가시자, 많은 사람들이 또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호숫가에 계셨을 때에 야이로라 하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살려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를 따라 나서시었다.
마르코 복음서 5장 21~23절)
그러나 예수가 야이로의 집으로 따라가려는 찰나,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나타난다. 예수는 그녀부터 치료해준다.
군중 속에는 12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여 따라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서서 군중을 둘러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둘러보시며 옷에 손을 댄 여자를 찾으셨다. 그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코 복음서 5장 25~34절
그 후 야이로의 집에서 하인들이 달려와, 예수에게 너무 늦었다며, 야이로의 딸이 이미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타이르고 야이로의 집에 가서 그의 딸을 살려낸다.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저 선생님께 더 폐를 끼쳐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은 체도 아니하시고 회당장에게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시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사람들이 울며불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집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코웃음만 쳤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다음에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아이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12살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라 마지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마르코 복음서 5:35~43
마태오 복음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께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일어나 그를 따라가셨다.

마침 그 때에 12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어떤 여자가 뒤로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 여자는 대뜸 병이 나았다.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러 피리 부는 사람들과 곡하며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다들 물러가라.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코웃음만 쳤다. 그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간 뒤에 예수께서 방에 들어가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그 아이는 곧 일어났다. 이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마태오 복음서 9:18~26
마태오 복음서에서 야이로는 딸이 이미 죽은 후에 예수를 찾아간다. 여기서 야이로가 예수에게 바란 것은, 치료가 아니라 죽음에서 되살려주기를 바란 것이다.

53. 두 개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9-13)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눅 11:2-4)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성경의 모순들은 전부 성경 기자들의 관점 차이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주기도문에서조차도 이런 모순들이 발견되는 점에서 단순 관점의 차이라고 말하는건 무리가 있다.

모순이라기보다 누가복음이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똑같이 받아적는 건 불가능하다.
그 당시에 펜이나 종이가 귀했을 것이고,
에수님은 대부분 가난한 자들과 같이 있었으며,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시대임을 감안해야 한다.

54.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어준 여인 일화 이야기의 불일치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로 씻은 여인의 일화는 성경에서 매우 유명한 일화로, 종종 목사들의 설교에 등장한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를 포함한 공관복음서에서 그 내용이 불일치하는 문제가 있다. 일단 각각 복음서에서 정황을 어찌 묘사하는지 살펴보자.
그 때 예수께서는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셨는데,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탁에 앉으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분개하여 "이렇게 낭비를 하다니! 이것을 팔면 많은 돈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을텐데."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이 여자는 나에게 갸륵한 일을 했는데 왜 괴롭히느냐?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겠지만 나는 너희와 언제까지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나의 장례를 위하여 한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열두 제자의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대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당신들에게 예수를 넘겨주면 그 값으로 얼마를 주겠소?" 하자 그들은 은전 30닢을 내주었다.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마태오 복음서 26:6-16
예수께서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예수께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셨는데,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러자 거기 같이 있던 몇 사람이 매우 분개하여 "왜 향유를 이렇게 낭비하는가? 이것을 팔면 300 데나리온도 더 받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을 터인데!" 하고 투덜거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참견하지 마라. 이 여자는 나에게 갸륵한 일을 했는데 왜 괴롭히느냐?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으니 도우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도울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여자는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이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열두 제자의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대사제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유다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마르코 복음서 14:3-11
예수께서 어떤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를 받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다. 마침 그 동네에는 행실이 나쁜 여자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예수께서 그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신다는 것을 알고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을 적시었다. 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렸다. 예수를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 "저 사람이 정말 예언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며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시몬아, 너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을 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500 데나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50 데나리온을 빚졌다. 이 두 사람이 다 빚을 갚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돈놀이꾼은 그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겠지요." 하였다. 예수께서는 "옳은 생각이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을 계속하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아주었다. 너는 내 얼굴에도 입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맞추고 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주었다. 잘 들어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죄는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복음서 7:36-48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베다니아로 가셨는데,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가 사는 고장이었다. 거기에서 예수를 영접하는 만찬회가 베풀어졌는데, 라자로는 손님들 사이에 끼여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 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1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예수의 제자로서 장차 예수를 배반할 가리옷 사람 유다가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300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투덜거렸다.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의 일에 참견하지 마라.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 복음서 12:1-8

추가로,
앓고 있는 라자로는 마리아의 오빠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드린 적이 있는 여자였다.
( 요한 복음서 11:2)
보다시피 상술한 4가지 복음서에서 말하는 내용에 제각각 차이가 있다. 정리해보면,
  1. 향유를 부은 여인
    마태오 복음서: 신원미상의 한 여자
    마르코 복음서: 신원 미상의 한 여자
    루카 복음서: 그 동네에 죄인인 신원미상의 한 여자
    요한 복음서: 라자로의 여동생 마리아
  2. 장소
    마태오 복음서: 베다니아의 문둥이 시몬의 집
    마르코 복음서: 베다니아의 문둥이 시몬의 집
    루카 복음서: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의 집
    요한 복음서: 베다니아의 라자로가 사는 것
  3. 행위
    마태오 복음서: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의 머리에 부음
    마르코 복음서: 매우 값진 향유 곧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 머리에 부음
    루카 복음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에 부음
    요한 복음서: 비싼 향유를 가져다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음
  4. 다른 사람의 반응
    마태오 복음서: 제자들이(복수임) 그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책망함
    마르코 복음서: 어떤 사람들이 그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책망함
    루카 복음서: 주인인 바리사이가 "그 여자는 죄인인데!!" 하고 중얼거림
    요한 복음서: 이스카리옷 유다가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함
  5. 예수의 답변 혹은 반응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있고 예수는 그러지 않으므로, 그 여자가 좋은 행동을 하였다는 식의 이야기
    루카 복음서: 빚진 자의 빚 탕감 예화를 들려주고, 여자에게 죄 사함의 은사를 베품
    요한 복음서: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와 유사한 이야기

이에 대한 설명으로 향유를 부은 여인 문서 참조.

55. 예수 언행의 일관성

마태오 복음서에서 베드로가 용서에 관한 질문을 한다. 그러자 예수는 '완벽한 용서'라는 아름다운 가르침을 준다.
(마태오 복음서 18장 21~22절)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7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7번뿐 아니라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여라."
그런데 베드로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가 의문이다. 고작 한 문단 앞에서 예수가 이미 용서에 대해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 문단 앞에서, 예수는 무한의 용서를 가르치지 않았다.
(마태오 복음서 18장 15~18절)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여라.' 한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혀라.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3번만' 용서받을 기회를 주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무한의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인가? 게다가 이 구절에서, 3번을 용서해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예수의 말은 예수가 평소 자비와 사랑을 설파하며 죄인들도 사랑하라고 했던 그의 언행과 모순된다.

이 부분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용서를 비는 사람과 잘못을 모르는 자에게 지적한다는 차이가 있다.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비는 자에게는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고,
잘못을 지적받고도 듣지 않는 자에게는 3번 말하고 안들으면 더이상 말해봤자 안되는 것을 말하는 거이다.

55.1. 의문에 대한 반박

이는 완전히 잘못된 의문으로, 번역에서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이란 부분으로 인해 개인적 잘못과 용서의 부분으로 오해된 부분이다. 이 부분은 교회 내 죄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가 주제이며 원래 내용도 ‘너의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으로, 신자이자 영적 형제를 자처하는 교회 멤버가 신자로서 해선 안 될 죄를 짓고 있다면 이를 지적해 주어 죄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라는 의미이다. 교회의 지체들은 성결을 향해 나아가야 하고 내부의 죄를 묵과해선 안되며 사랑과 권징으로 서로를 돕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만약 그 형제가 너의 말을 받아들여 죄로부터 벗어났다면 좋다. 하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을 좀 더 모아 이야기를 해 보란 것으로, 이는 신명기 19장 15절의 잘못에 관해 논할 땐 두세 사람의 증언을 통해 하란 말을 근거로 둔 것이다. 네가 불러모은 그 사람들이 반드시 너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들은 이야기를 들어본 뒤에 판단할 것이다. 어쩌면 더 적절하게 형제가 죄를 지은게 아니었고 네가 과반응 or 성경을 잘못 알아 죄라고 생각한 것을 가르쳐 줄 수도 있다. 만약 이 사람들도 너의 의견에 동의를 해 형제가 죄를 짓고 있음이 맞다고 설득을 했음에도 듣지 않는다면 가장 큰 권위인 교회에 사안을 알리고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만약 교회의 말조차 무시한다면 그와는 더이상 동료 신자로서 인격적으로 깊은 교제(fellowship)를 가지지 말고 불신자처럼 여겨서 스스로도 물들지 않게 경계해야 한다. 물론 완전히 무시하거나 무례히 대하라는 뜻은 아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위의 해당 구절(15~18절)은 파문의 성서적 근거로 쓰이는데 결국 근본적인 목적은 비슷하다. 사실 교회 공동체 내에서 죄를 다루는 건 심각한 사안이다.[26] 이 정도로 다단계에 걸쳐 설득을 했음에도 듣지 않았다는 건 해당인물이 죄에 대한 의식이 심각하지 않으며 교회도 존중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는 그가 사실상 거듭나지 않은 명목상 교회회원일 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정쩡하게 교회에 소속감을 가지며 현상황에 거짓된 안도감을 가지게 하지 말고 파문이든 교제의 소원이든 드러나는 현상을 통해 자신의 현주소를 진지하게 인식하게 한다면 그게 그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즉 이는 공동체와 해당인물 모두를 위한 것이다.

56.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는 말한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거든 10리를 같이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마라. ( 마태오 복음서 5장 38~42절)
그러나 예수는 대제사장의 부하들에게 잡혀갔을 때, 한 사람이 자신의 뺨을 치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버젓이 말해 왔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내가 숨어서 말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한 말은 그들이 잘 알고 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곁에 서 있던 경비병 한 사람이 "대사제님께 그게 무슨 대답이냐?" 하며 예수의 뺨을 때렸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 하셨다. ( 요한 복음서 18장 20~23절)
왼뺨을 때렸으면 말이 된다.
예수: (왼뺨을 돌려대며)"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보아라."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제사장의 부하에게 하는 말의 경우는, 부당한 외부 압력에 맞서 굴종하지 않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애초에 예수의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대라는 가르침은 '불합리한 것에 무조건적으로 굴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말 문자 그대로 왼뺨을 갖다대라는 말이 아니란 얘기다. 타인에게 사랑을 베풀되 일어설 필요가 있을 때는 분연히 일어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의 성전 정화)이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또한 오른뺨과 왼뺨의 비유는, 익히 알려진 것과 정 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오른손으로 오른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려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에는 노예에게나 하는 모욕적인 표현이라고 한다. 즉, 오른뺨을 맞았다는 건 노예 취급을 받았다는 뜻이며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그에 대한 반발로, 뺨을 때린 사람과 자신이 동등한 인간임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만 이럴 경우,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는 것은 예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요구하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면 바로 뒤에 이어지는 구절과 전혀 문맥이 맞지 않게 된다는 문제가 생긴다. 다만 뒤의 구절들도 똑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긴 하다. #

물론 현대 기독교에서,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는 말씀은 단순히 복수를 하지 말라는 비유적인 얘기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의견들도 있다는 것으로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57.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나귀를 몇 마리 데려왔는가?

( 마르코 복음서 11장 2~8절) "맞은편 마을로 가보아라. 거기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 1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왜 그러느냐고 묻거든, 주님이 쓰신다 하고 곧 돌려보내실 것이라고 말하여라." 그들이 가보니 과연 어린 나귀가 길가로 난 문 앞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푸는데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이 "왜 나귀를 풀어 가오?" 하고 물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말하자 그들은 막지 않았다. 제자들은 새끼 나귀를 끌고 예수께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놓았다. 예수께서 거기에 올라앉으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놓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들에서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 루카 복음서 19장 30~35절) "맞은편 마을로 가라. 거기에 가보면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1마리가 매여 있을 터이니 그 나귀를 풀어오너라. 혹시 누가 왜 남의 나귀를 푸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그들이 가보니 과연 모든 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다. 그래서 나귀를 풀었더니 나귀 주인이 나타나서 "아니, 왜 나귀를 풀어가오?" 하고 물었다.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나귀를 끌고 와서, 나귀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고 예수를 그 위에 모셨다.
( 요한 복음서 12장 12~14절) 명절을 지내러 와 있던 큰 군중은 그 이튿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를 맞으러 나가,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 찬미받으소서!"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는 새끼 나귀를 보시고 거기에 올라앉으셨다.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 요한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가 1마리의 새끼 나귀를 데려오라고 했으며 그 나귀에 탔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2마리를 데려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 마태오 복음서 21장 2~8절) "맞은편 마을로 가보아라. 그러면 나귀 1마리가 매여 있을 터인데 그 새끼도 곁에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혹시 누가 무어라고 하거든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러면 곧 내어줄 것이다." 이리하여 예언자를 시켜, "시온의 딸에게 알려라. 네 임금이 너에게 오신다. 그는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타시고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27]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제자들은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그 위에 겉옷을 얹어놓았다. 예수께서 거기에 올라앉으시자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놓기도 하였다.
이것은 새끼가 있다는 것만 언급했지 새끼를 탔다는 말은 없다고 하면 해결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황당무계한 헛소리일 뿐이다. 어느 나귀에게 탔는지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말 이 말대로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가 새끼가 아닌 그냥 나귀를 탔다고 해석하면, 예수가 새끼 나귀를 탔다고 기록되어 있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과 또 다시 상충하여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애초에 마태오 복음서 혼자 나귀를 두마리나 데려오는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마태만이 '나귀'와 '나귀새끼'를 언급한다. 5절의 시적 언어는 짐승 두 마리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태는 나귀 새끼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서, 5절의 시적 언어에 대한 암시적인 반향을 보고 있다. 7절의 두 번째 '그 위에'는 예수님이 두 짐승 모두에 올라타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 겉옷' 위에 오르셨음을 가리킨다.(IVP성경주석 1280-1281쪽)
이 주장 역시 위와 같은 주장으로 논파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겉옷을 어디다 뒀는지 결국 명시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28] 또한 다른 복음서는 새끼 나귀 1마리만 데려왔다고 써놨는데 마태오 복음서 혼자 일반 나귀 + 새끼 나귀 해서 2마리를 데려온다. 이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고, 그저 예수는 나귀를 한마리만 탔으니 모순이 해결되었다는 핵심을 빗나간 주장을 펼칠 뿐이다.

58.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보낼 때 돈주머니나 식량 자루나 신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 부족한 것이라도 있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러나 지금은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가고, 식량 자루도 가지고 가거라. 또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 가지고 가거라. 그래서 '그는 악인들 중의 하나로 몰렸다.' 하신 말씀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나에 관한 기록은 다 이루어지고 있다." 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주님, 여기에 칼 2자루가 있습니다." 하였더니 예수께서는 "그만 하면 되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 루카 복음서 22장 35~38절)
'세상이 흉흉해지니 준비를 하라'고 한 말이라고 기독교 측에서는 해명을 하지만, 앞뒤 문맥으로 봤을 때도 달리 해석될 여지가 없다.

조금 후에 이스카리옷 유다 로마 제국 군인들이 예수를 붙잡으려고 몰려왔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사라고 시킨 그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친 베드로에게 그 유명한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라고 말한다.
그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의 귀를 쳐서 잘라버렸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12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한 성서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고는 무리를 둘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전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서 가르치고 있을 때에는 나를 잡지 않다가 지금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잡으러 왔으니, 내가 강도란 말이냐?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언자들이 기록한 말씀을 이루려고 일어난 것이다." 그 때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 ( 마태오 복음서 26장 51~56절)
이 때에 시몬 베드로가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 요한 복음서 18장 10~11절)
일부 기독교인들은 위의 언급에서 예수가 말한 '검'은 진짜 검이 아닌 영적인 의미로 주장하는데, 예수가 말한 '검' 이 진짜 '검' 이라면 돈주머니와 식량자루도 진짜 돈주머니와 식량자루일텐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검' 과 식량자루와 돈주머니를 가지라고 했는데 베드로는 예수에게 검만 보여주었는데도 예수가 말한 검이 진짜 검이었다면 베드로에게 "그만 하면 되었다."가 아닌 '잘봤다, 그런데 전대와 주머니는 어디 있느냐?' 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예수의 제자는 12명인데 베드로는 검 2개만 보여주었으므로. '족할' 리가 없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며, 만에 하나 예수가 말한 '검'이 진짜 '검' 이라 할지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해석도 있다. 예수는 칼로 '흥한'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는데 '흥하다' 는 '번성하여 잘되어 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예수는 '칼을 사라'라고 했지 '칼로 번성하라' 나 '칼로 잘되라'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또 이 말을 십자가 처형 때 두 죄수와 함께 못 박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또 이에 대한 가톨릭의 해설은, 칼을 준비하라는 구절은 제자들(사도들)과 나아가 신자들에게 세속에 맞선 영적 투쟁을 일깨워주는 용도로 사용된 일화라고 본다.

또한 제자의 수가 12명이니 칼도 12자루가 되어야 하는데, 칼 2자루만 보고 족하다 할 리가 없다는 기독교인들의 주장도 있는데, 2자루로 족하든, 12자루로 족하든 그것은 사람마다의 개인 차에 불과하다. 애초에 제자들의 수가 12명이라고 해서 반드시 12자루의 검이 있어야 족하다고 느낀다는 보장도 없다. 또 예수가 말한 칼이 실제 칼이라면 어째서 함께 언급한 식량 자루와 돈 주머니는 찾지 않았느냐는 지적도 있는데, 식량 자루와 돈주머니야 부피가 꽤 나가고 지고 있는 것이 눈에 띄니 굳이 묻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당 구절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해명에 따르면 칼이 실제 물건이 아닌 영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며, "그만 하면 되었다."라는 예수의 대답은 역설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 해당 문맥 자체만 보면 거기에 대한 근거가 없다.[29]

그러나 문제는 칼로 일어선자 칼로 망한다는 얘기가 칼을 쓰지마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렇게치면 식칼도 쓰면 안 되나? 이 말을 했을 시점도 베드로가 일이 자기 뜻대로 안 될때 칼을 쓰는 행위를 제재한 것이었다. 그러한 행위를 자제햐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대시대에는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들짐승들도 많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자기 방어용 칼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니 칼을 챙기는 건 당연하다. "여행할때 무기 챙겨가라." 라는 말이 "무기 함부로 쓰지 말아라." 라는 말과 모순되는건 아니지 않는가?

58.1. 의문에 대한 반박

예수님이 여기서 '검'을 언급하신다고 해서 셀롯당과 같은 혁명을 권하시는 것은 아니다. 대신 예수님은 일시적이고 상징적인 행동을 필요로 하신다. 자신이 혁명가로 기소되고 따라서 이사야 53장 12절처럼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기 위해서다. (사53장의 메시아적 의미에 관해서는 마 12:15~18에 대한 해설을 보라.) 그렇기 위해서는 검 두 개면 족하다(38절). 밤에 겉옷이 없으면 추울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제자들이 이제 직면하게 될 싸움에 준비되지 않은 채로 있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낫다는 것을 시사한다. (IVP 성경배경주석 1493-1494쪽)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새로운 상황에 대해 말씀하신다. 36절은 대단히 반어적이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자신과 제자들이 반대, 심지어 죽음에 직면할 것을 알고 계셨다. 제자들은 (그분의 반어법을 ) 오해했으며 무기를 마련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그 대화를 끝내기 위해서 '족하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알아야 할 예수님의 길은 칼의 길이 아니라 사랑의 길이었다.(IVP성경주석 1397쪽)

59. 인용 오류

4대 복음서에서는 심지어 구약 구절을 잘못 풀이하여 그리스어로 옮겨둔 부분까지 존재한다.

이를테면 예수가 바리사이인들의 주장을 반박하여 구약을 인용하는 대목이다. 예수가 인용한 구절은 구약을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구절이다. 그리스어 구절 자체는 예수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절로 들리지만, 원래의 히브리어 구절은 예수가 주장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고 전혀 도움도 되지 않는 구절들이다.

예수가 정통 바리사이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려고 일부러 유대성서를 그리스어로 오역한 것을 일부러 인용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 이상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어만 쓰기 때문에 자신들의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는 수많은 유대인 가운데 1명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구약을 인용하고, 그것을 예수가 인용한 것인양 꾸며 놓았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 7장 6~7절에서 예수 이사야서 29장 13절을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것을 인용한다.[30]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도 잘못 번역된 구절을 인용한다. 또 사도행전 15장 13~18절에서 야고보가 인용한 구절은 아모스 9장 11~12절을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31] 마태오 복음서 27장 9절에서 마태오는 즈카르야가 한 말을 예레미야가 한 말이라고 잘못 말한다.

마찬가지로 마르코 복음서에서처럼 사도행전에서도 히브리어 구약을 잘못 인용한다. 베드로 예루살렘 유대인들에게 자기 말을 입증하려고 구약을 인용하지만, 그 인용문은 그리스어로 전혀 잘못 번역된 구절이다. 원래의 히브리어 구절은 뜻이 전혀 다르다.

기원 직후 구약은 70인 역이라고 불린 그리스어 판본이 정경으로 취급 받았는데, 70인역은 번역이 문제가 있다. 그 번역을 그대로 갖고 오면서 생긴 문제점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도행전과 복음서를 보면 예수나 사도들이 왜곡된 히브리어 경전 구절을 가지고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는 번역의 문제로 돌릴 것이 아니다. 명백한 오류인 것. 번역 실수를 한 것이, '후기의 집필자'들이 아니라, 복음서와 서간에 의하면 예수와 사도들이다.

기독교계에서는 사도와 예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당시 사람들이 보고 믿는 성경을 인용했을 수 있다는 주장도 한다.

마태오 복음서 12장 40절에 따르면 예수는 이렇게 예언했다. ' 요나가 큰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삼 주야를 지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땅 속에서 삼 주야를 보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계산을 잘못한 것인가?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금요일 정오에 죽었고, 일요일 이른 아침에 살아났다고 한다.[32] 그렇다면 '땅 속'에서 예수는 단지 이틀 밤만을 보냈다는 것이 된다.[33][34]

유대인의 하루는 우리와 달리 저녁부터 밤을 포함한 점심까지를 하루로 본다. 그렇게 계산하면 금요일 정오가 매우 짧은 하루가 되고,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가 이틀, 토요일 저녁부터 주일 저녁까지 사흘로 맞아 떨어진다. 위의 수요일설과 목요일설은 출처 확인이 필요하다.

60. 예수의 동문서답

( 요한 복음서 13장 36~38절)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지금은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장담하자, 예수께서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정말 잘 들어두어라. 새벽 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3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셨다.
( 요한 복음서 14장 5절) 그러자 토마스가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럼 이제 몇 장 뒤 예수의 반응을 보자.
( 요한 복음서 16장 5~6절)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간다. 그런데도 너희는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한 말 때문에 모두 슬픔에 잠겨 있다.
몇 장 앞에서 분명 베드로와 토마스가 예수에게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는데 예수는 제자들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는다고 이야기 한다.(...)

60.1. 의문에 대한 반박

그러나 이는 시간적으로 얼마나 간격이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으며, 14장 5절 후에 그에 대한 설명이 있어도(14장 6절에서 예수는 도마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대답하셨다.) 제자들이 본격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으며, 베드로가 생각한 로마에 있어서의 왕국통치자가 될것이라 예상했던 예수님에 대한 길, 그리고 예수님이 생각한것은 구원을 주기 위해 희생을 위한 길임을 생각해야 한다. 핵심은 질문의 요지가 달랐다는 것. 제자들은 예수가 가는 곳이 물리적 공간이 아닌 성부 하나님의 곁임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

주석
16:5ㅡ15 성령의 역사. 5절과 13:36 및 14:5은 모순된 것처럼보인다. 뒤의 두 구절에서 베드로와 도마가 예수님이 어디로 가고 계신지를 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황들이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기 바란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명 전체의 완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다. 제자들은 이 일에 대해서 물을 만한 충분한 통찰력이 없었다. 베드로도, 도마도, 이전에 자기들이 한 질문에 대한 중요성을 다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이 더 알려 주신 계시의 말씀 때문에 더욱 당황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6절)라고 한마디 해주셨다. 예수님은 그 근심을 경감시켜주기 위해서, 자신이 떠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될 것임을 확신시켜주신다. 디시 한 번 그 대답은 약속된 성령의 오심에 근거해 있다. 이것이 네 번째로 보혜사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부분이다.'''(IVP성경주석 1456-1457쪽)

61. 베드로는 예수를 언제 부인했는가?

베드로 예수를 부인한 사건도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 마르코 복음서 14장 27~31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칼을 들어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말을 잘 들어라. 오늘 밤 이 2번 울기 전에 너는 3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더욱 힘주어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장담하였다. 다른 제자들도 다 같은 말을 하였다.
( 마태오 복음서 26장 31~35절)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칼을 들어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오늘 밤 너희는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난 후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말을 잘 들어라. 오늘 밤 이 울기 전에 너는 3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다시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장담하였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대체 어느 쪽이 맞는 것인가? 이 1번 울기 전인가, 2번 울기 전인가? 이에 대해 <그리스도의 삶>의 저자인 존스턴 체니는 " 베드로가 닭이 1번 울기 전에 3번, 또 닭이 2번 울기 전에 3번, 총 예수를 6번 부인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사실 그보다는 예수는 2번 울기전이라고 말했으나 들은 사람마다 울기전이라고만 기억하는 경우가 있고 2번 울기전이라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62. 예수는 언제 못 박혔나?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으며 성찬을 베풀고 다음 날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15:25)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서는 성찬을 베푼 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이후 예수는 이스카리옷 유다에게 배신 당해 출두하고, 감옥에서 밤을 보낸 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빌라도가 판결을 내린 때는 정확히 "유월절 준비일이고, 때는 낮 12시쯤이었다."(19:14)

많은 사람들이 이 모순을 해결하려 했으나 허사였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준비일'을 무슨 뜻으로 썼는지를 간과한 결과이다. 그 준비일은 '안식일'의 준비일이었지, 유월절의 준비일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마르코 복음서에서 이 날은 유월절 음식을 먹기 전 날이 아니라, 안식일 전 날이었다는 말이다. 금요일 오후에는 안식일을 위한 음식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그 날을 준비일이라고 했을 뿐이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는 목요일 밤[35]에 유월절 음식을 먹고 다음 날 아침에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요한 복음서에서는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았고[36] 유월절 음식을 먹기 전 날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37] 그리고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는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혔고 요한 복음서에서는 정오에야 사형 판결을 받고 그 후에 끌려 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일부 교인들은 이런 차이가 발견되는 이유를 유대인마다 그 주의 다른 날에 유월절을 기념했기 때문이라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되지 않은 일부 종파가 성전 관리자들이 잘못된 달력을 따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는 그런 종파들과 어울리며 도성 밖에 있지 않았다. 예수는 분명 예루살렘에 있었고 또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은 단 하루밖에 없었다.

63. 십자가 처형 기록의 모순

십자가 처형을 둘러싼 사건들에 대한 복음서들의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유대인 장로들의 심리를 받고 사형을 언도받는다.[38] 그리고 그 후에 빌라도에게 끌려가 공식적으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그리고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산헤드린 공회의 심리를 받은 후에 빌라도에게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는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지 않고, 곧바로 로마의 법정으로 끌려간다.[39] 그 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게다가 공관 복음(마태오,마르코,루가)에선 재판 과정에서 예수가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선 "하느님 나라"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관해 길게 말을 한다.[40]

64. 예수의 유언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가 했다고 전해지는 마지막 말이 복음서에 따라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시편 22장 1절의 '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구절을 예수가 마지막으로 외쳤다고 나온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에서는 시편 31장 5절의 '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는 구절을 마지막으로 외치고 운명한다고 나온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목마르다.'라고 말한 뒤, '이제 다 이루었다.' 하고 운명한다.

이것이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가상칠언( 십자가상에서의 7가지 말)'이다. 복음서마다 말이 달라서 약간 의아함을 느낄 수 있는데, 주류 기독교계의 해석은 저 7가지 말을 예수가 모두 했다고 본다. 보편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 루카 복음서 23장 34절)
2.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루카 복음서 23장 43절)
3. "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 요한 복음서 19장 26-27절)
4.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41] ( 마르코 복음서 27장 46절)
5. "목마르다."[42]( 요한 복음서 19장 28절)
6. "이제 다 이루었다." (요한 복음서 19장 30절)
7. "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루카 복음서 23장 46절)
한 사람이 한 사건에 임해 말하기에는 서로 모순되는 면모가 보임은 분명하다. 특히 마르코/마태오 복음서에서의 예수는 매우 괴로워하며 격정적으로 말하지만, 루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매우 평온하게 (말 그대로 '어린 양'처럼) 말한다.[43]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이 잠시가 아니고 반나절에 가까웠을 것을 생각하면, 여러 순간에 상황에 따라 다양한 말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65. 예수가 죽을 때 찢어졌다던 성전의 휘장은 언제 찢어졌는가?

( 마르코 복음서 15:37-38) 예수께서는 큰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2폭으로 찢어졌다.
( 루카 복음서 23:45~46) 태양마저 빛을 잃었던 것이다. 그 때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며 2폭으로 갈라졌다. 예수께서는 큰소리로 "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성전의 휘장이 예수가 숨을 거둔 이후에 찢어졌다고 기술하는 반면,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죽기 전에 찢어졌다고 기술한다.

기독교의 해설은 이 부분이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유대교에 대한 시각차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살아있을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유대교에 대한 부분적 거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구약과 신약을 가리지 않고, 성경 속 대부분의 책들이 이러한 의도와 지향점을 두고 집필되었다. 또 신자들도 이렇게 초래된 성경 내용의 세부적인 차이점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러한 시각 차이를 따로 기술하지 않고 사실 관계를 다르게 쓺으로서 나타낸다는 것이 영 껄쩍지근하다는 문제가 남는다. 집필 의도에 따라 사실이 다르게 기술되었다는 것 사실은 그 자체로서 해당 기록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원래 사실을 변개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히 예수의 사망과 만약 사실이었다는 가정 하에 휘장의 찢어짐이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었기에 그 당시로서는 정확한 시점의 선후관계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게 당연하다.

66. 부활의 기록

예수의 부활 사건에 대한 기록들이 다르다. 마르코 복음서 16장 5절에서, 예수의 여성 제자들 몇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동굴 속에서 흰옷을 입은 청년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 24장 4절에는 동굴 속에서 '문든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섰다'고 기록되어 있다.[44]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 28장 2~3절에서는 두 여자들이 보는 앞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고 한다.

마르코 복음서 16장 7절과 마태오 복음서 28장 7절을 볼 때 부활한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제자들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하지만, 루카 복음서 24장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갈릴래아가 아닌 예루살렘 근처에서 제자들 앞에 나타난다. 게다가 사도행전 1장 4절에 따르면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을 받았다.

이에 대한 반론은 예수/부활 이후의 행적 문서 참조.

67. 이루어지지 않은 예수 재림에 대한 기록

예수는 당시 살아 있는 자들이 죽기 전에 재림의 계시를 목격할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그의 예언은 이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볼 사람들도 있다. ( 루카 복음서 9장 27절)
그 때가 되면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말 것이다. (중략)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 루카 복음서 21장 25~32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과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불안해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아직 끝은 아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곳곳에 기근과 지진[45]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진통의 시작일 따름이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 속에 몰아넣고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가 서로 팔아넘기고 서로 미워하며,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나타나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 ( 마태오 복음서 24장 4-11절)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 ( 마태오 복음서 16장 28절)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 마태오 복음서 24장 34절)
하지만 '그 세대'가 다 지나가고 모든 제자들이 죽어서 묻힌 지[46] 대략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모든 일 가운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하스 페르쯔라도 있나보다 사실 공관 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시한부 종말론적 시각이 상당히 보인다.

그 세대 안에 재림이 아니라 재림 전에 있을 각종 환난들이 전부 일어난다는 뜻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사실 예수의 재림이 왜 이렇게 안오냐는 주장은 지금만의 주장이 아니었다. 신약성경 베드로2서 3장에선 재림이 언제 오냐면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거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내용이 언급된다. 베드로2서의 집필 시기를 감안하면, 서기 70년대의 초대 교회 시기부터 이런 논란과 논박이 오간 것으로 보인다.

또 이에 대해서는 '기독교 교리에서 언젠가 일어날 세상 전체의 환난과 심판, 종말'과 '당시 이스라엘의 멸망'이 중첩되어 예언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현 기독교의 주류 시각 중 하나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위의 복음서에서의 언급은 이스라엘 멸망의 예언임과 동시에 요한묵시록의 프리퀄 버전이란 것. 대부분의 신학계의 정설이다. 위에서 언급된 마태오 복음서 24장의 내용대로 예루살렘은 기원후 70년 경에 로마 제국 군대에 의해 멸망했다.

루카 복음서 9장 27절의 내용은 마르코 복음서 9장 1절에도 나온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바로 다음 절, 즉 루카 복음서 9장 28절과 마르코 복음서 9장 2절이 변화산 사건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변화산 사건을 뜻한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그와는 별개로, 사도 요한은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환시로 보았고 그 내용을 묵시록으로 남겼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볼 것이라는 것은 사후세계에 대한 언급이며, 이 세대라 함은 그 징조를 모두 경험한 세대를 뜻하는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68. 이스카리옷 유다의 최후

이스카리옷 유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마태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따라 다르다. 전자는 목을 매서 숨졌다는 기록, 후자는 곤두박질하여 창자가 쏟아져나와 죽었다는 기록.
( 마태오 복음서 27장 3~10절) 그 때에 배반자 유다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자기가 저지른 일을 뉘우쳤다. 그래서 은전 30닢을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며,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유다는 그 은전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대사제들은 그 은전을 주워 들고 "이것은 피 값이니 헌금궤에 넣어서는 안 되겠소." 하며,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의 을 사서 나그네 묘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의 밭"이라고 불린다.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정한 한 사람의 몸값, 은전 30닢을 받아서 주께서 나에게 명하신 대로 옹기장이의 밭 값을 치렀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사도행전 1장 16~18절) "교우 여러분, 예수를 잡은 자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빌려 예언하신 말씀은 정녕 이루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는 본래 우리 열두 사람 중 하나로서 우리와 함께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판 돈으로 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는 땅에 거꾸러져서 배가 갈라져 내장이 온통 터져 나왔습니다. 예루살렘의 시민들이 모두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그 밭을 그들 말로 '아겔다마'라고 불렀습니다. '피의 밭'이란 뜻입니다."
보통 목을 매달았는데 줄이 끊어지면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설득력이 부족한데, 보통 목을 매면 줄이 끊어져서 떨어지더라도, 배가 터져서 창자가 쏟아져 나올 정도의 외상은 없는 것이 정상이다. 실질적으로 추락하여 사람의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져 나올 정도면 대략 15m 이상의 높이라는 이야긴데, 당시 예루살렘 성읍이나 지리적으로 높은 몇몇 곳을 제외하면 그 정도 구조물이 없었을 뿐더러, 목을 매달고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이 실질적으로 그 높이까지 기어 올라가서 목을 매단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는다. 차라리 걍 뛰어내리지 더군다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 유다 예수를 판 값으로 산 에 곤두박질하여 창자가 쏟아져 나왔다'라고 하는데, 당시 유대의 밭 근처에 그 정도로 높은 위치에 목을 매달만한 구조물은 전무했다...곤 하지만 이부분에 대해서도 나름 변명하자면

일반적인 신체나, 죽은지 얼마 되지않은 시체의 경우라면 물론 그렇겠지만 부패한 유다의 사체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닐것으로 보인다, 목매달아 죽은 유다의 사체가 예루살렘의 뜨거운 태양아래 매달려있었다면 몸안의 세균들은 활발하게 번식했을것이고 시체가 부패하면서 조직과 세포들을 파괴했을것이며 부패하면서 생겨난 가스의 압력은 세포와 조직 밖인 복강 내부에 축적되어 높아졌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사체는 부풀어올랐을 것이다 또한, 조직의 부패는 필연 피부의 약화와 손상을 일으켰을 것인데 이 점을 고려하면, (목매달았던 나뭇가지나 밧줄의 끊어짐으로 인해) 사체가 땅에 떨어졌을때 시체의 피부는 쉽게 파열되었고, 가스의 압력으로 배는 터졌고 이로인해 내부의 창자는 다 흘러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서에는 " 유다가 은전 30냥에 예수를 팔지만, 막상 예수가 체포되자 죄책감에 못 이겨 그 은전들을 대제사장들에게 팽개치고 죽었고, 제사장들이 그 돈으로 밭을 샀다"고 나온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유다가 예수를 판 돈으로 밭을 샀고 그 밭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마태오 복음서의 경우 유다의 죽음은 '자신의 행동에 극심한 가책을 느끼며 자살' 한 것이 되고, 후자의 경우 '사악한 탐욕에 대한 응보'가 되어, 이스카리옷 유다의 사망에 대한 정황이 서로 모순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69. 사도 바울로 문제

(사도행전 9장 3~8절) 사울(=바울로)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그가 땅에 엎드러지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도 그 음성은 들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벙벙해서 서 있기만 하였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 뒤에 바울로는 그 사건을 다시 이렇게 말한다.
(사도행전 22장 6~9절) "길을 가다가 오정 때쯤에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나타나 내 주위에 두루 비쳤습니다. 내가 땅에 거꾸러지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예수다.' 하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그때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신 분의 음성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69.1. 의문에 대한 반박


위에 인용된 공동번역 성서에서 음성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의 원문은 φωνή로서 voice(음성), sound(소리)를 포괄하는 단어다. 즉 사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무언가 소리는 듣되, 뭐라고 말하는지는 듣지 못한 것이다. 또한 빛은 보았지만, 그 빛 속에서 있던 예수의 모습은 보지 못한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에 적힌 바울로의 증언은, 갈라티아서에 적힌 그의 증언과 모순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앞에서 언급한 경험을 한 후, 눈이 멀게 된 바오로가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만나 그의 기도로 눈을 뜨게 된다.[47]

그 직후 예루살렘으로 간 바울로는 바르나바의 소개로 여러 제자를 만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오로는 2번째로 예수를 보고, 이방인들에게 전교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바울로가 직접 썼다는 서간에서는 전혀 다르다.[48] 갈라티아서에서 바울로는 아나니아를 언급하지도 않으며, 개종 체험 후 3년 동안이나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갈라디아서 1장 17절)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이어서 그는 다시 열정적으로 기술한다.
(갈라디아서 1장 20절)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해 사도행전 9장 25절과 26절 사이에 시간 간격을 두면 모순이 해결된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본다.
(바울로가 눈이 멀음)->(다마스쿠스에서 아나니아를 만나 눈을 뜸)->(아라비아로 감)->(다마스쿠스로 감)[49]->(3년 후 사도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감)

70. 시간을 초월하지 못하는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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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주 신은 전지전능한 것처럼 묘사되지만 사실 시간을 지배하고 다루는 능력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 내에서 단 한번도 신이 시간을 초월하는 듯한 묘사는 다뤄지지 않았고 또한 인간을 만들려고 마음먹었을 때 카인의 후예들과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 결합하면서 극도의 타락할 것이라는 '미래'를 예상하지 못하였고, 결국 인간들이 타락하자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하며 노아의 일가족과 동물들을 방주에 태우고 대홍수를 일으켜 인간을 쓸어버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점으로 알 수 있는 건 신은 미래를 미리 알지 못하며, 시간의 역사가 어떻게 어떻게 흘러갈지를 미리 정해놓는 것 역시 불가능한데다 인간들이 타락했을 때 역시 과거로 돌아가서 시간의 역사를 바꾼다든가 하는 식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대홍수를 일으켜 인간을 쓸어버리는 방법을 사용한 걸 보면 과거나 혹은 미래로의 시간 여행은 불가능한 듯 보인다.[50][51] 성경에서 말하는 바에 의하면 본인이 직접 현실, 우주, 시공간의 차원을 창조한 신인데 시간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건 다소 아이러니한 부분, 혹은 시간이란 걸 설계했을 때부터 바꿀 수 없게 설계했다고 하면 애초에 '전지전능'이라던 신의 능력과 모순된다.[52]

물론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는 과학이 발달하고 그로 인한 인류의 상상력의 폭도 넓혀져 현재에는 대중화 된 소재라 여러 창작물에 등장한다지만 당시 고대인들의 시점에서 시간여행이란 개념이 알 수도 없고, 묘사할 수도 없다. 고대인들이 서술한 서적 내에서 등장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는 건 그 서술 속의 신 또한 고대인들의 창작물이란 소리랑 다를 게 없다. 고대인들의 지식 한도 내의 존재란 이야기니.[53][54]

그리고 사실 신이 인간의 후예들이 타락할 거란 '미래'를 예상하지 못하고 인간을 만들었으나 자신의 '실패'를 깨닫고 결국 인간들을 물로 싹 갈아엎었다는 점은 명백하게 신이 저지른 '실수'에 해당하며 이는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존재'라는 것에 모순된다. 전지라는 말 뜻이 '모든 것을 안다'라는 말인데 '미래'를 알지 못한 것을 보면 일단 '전지'에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정말 알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다. 알고 있었다는 가정 하에서도 계획적인 묘사는 존재하며, 미래를 보고 먼저 벌을 내린다면 그거야말로 성경은 개판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애초에 인간을 만들때부터 아예 타락할 가능성이 전혀 존재할 수 없도록 설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전능'하지 못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신이 인간을 자신이 짜여진 대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은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가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인격과 선택의 자유도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반론할 수 있겠으나, 개인의 인격권과 선택권을 주었다 하더라도 타락할 가능성을 완전히 없도록 설계하지 못했다는 것도 명백한 실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인공지능을 만들 때 폭주할 가능성이 없도록 완벽하게 프로그래밍을 하지 못하여 버그가 발생한 경우라고 볼 수 있겠는데 인간이야 실수를 하는 존재라지만,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묘사되는데 신의 창조물인 인간이 결국에는 타락해버리는 설계적 결함이 발생되었으니 과연 신이 전지전능한 게 맞냐는 지적이다.

만약 신이 시간을 초월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은 존재했지만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시간을 초월'한다는 발상이나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 것이라면 오늘날 '시간 여행'이라는 발상을 고안해낸 인류와 상대성 이론을 생각해낸 아인슈타인의 지능이 신보다 높다는 소리가 된다(…). 거기다 인류는 현재 성경에선 한번도 묘사되지 않았던 초끈이론, 다중우주이론, 다세계 해석, 양자 역학등의 이론까지 고안해냈는데 만약 신이 지금 언급한 이론들, 즉 우주의 모든 법칙들을 모두 간파하고 말 그대로 '완벽한 존재'였다면 최소한 미래를 예상하지 못하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걸 보면 최소한 신이 가진 지식과 지능으로는 지금까지 인류가 고안해놓은 이론들을 뛰어넘을 만큼은 못 된다는 말이다. 즉 능력은 신이 더 뛰어난데 이론을 몰라서 못했고 인류는 이론을 고안할 지능은 뛰어난데 능력이 안 돼서 못한다. 상상이 안 된다면 불완전한 피조물이 완벽한 조물주를 초월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된다.

만약 신이 시간을 초월할 수도 없고 미래도 알 수 없다고 가정한다면 신도 '현재'를 살아갈 뿐이라는 소리인데 이는 신이라는 존재도 결국 시간의 하위 차원에 존속된 존재란 것이다. 즉 신도 계속해서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기억을 얻어가고 있고, 그로 인한 마음이나 감정이나 사고관념도 가치관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 측에선 신이 한번도 변하지 않고 일관된 사고관념과 가치관을 가지고 계신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인간을 창조하고 죄인마저도 갱생의 기회를 줄 정도로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 하시던 분이 홍수를 일으켜서 인류를 쓸어버린 것만 봐도 가치관 변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신다더니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존재 안 믿는다고 지옥불에 태워 죽이는 건 또 어떻고?[55]

그로 인해서 시간 여행이 가능해도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 신은 전지전능하지만 신의 의지와 의도는 어떤 식으로든 시간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을 만들 때만 하더라도 희망과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인간들이 타락하자 홍수로 쓸어버리려고 마음을 바꾼 것이 대표적인 예다. 즉 신의 의도와 마음은 모든 시간을 통틀어 일관적이진 못하다는 소리다. 따라서 신이 시간여행을 했다면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또다른 시간대의 자신과 의견 충돌이 발생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성경이 타임 패러독스 SF물 소설로 장르 탈바꿈 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다만 성경 속에서 말하는 전지전능함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정의되진 않았으니 단순하게 사람이 생각하는 틀에 끼워맞추기만 하는 건 어려울 수 있다. 게다가 성경 속의 신은 사랑 뿐 아니라 질투 또한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며 자신을 믿지 않는 자는 후에 죽은 후 그 존재를 모른다 부정할 것이라는 묘사도 나온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신이지만, 그만큼 질투와 공의로움 등 인간마저도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생각들은 당연히 소유하고 있으므로 위의 행동들이 나오는 건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애초에 전지전능의 권위라는 것은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압도적인 권위다. 신이 선이라 여기는 것과 인간이 여기는 선이 같다면 좋겠지만, 만약 다르다면 당연 성서의 원리로는 신의 선을 따라야 한다는 것 또한 조금만 생각해봐도 신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바꿀 이유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과거도 알고 미래도 알지만, 애초에 완벽한 진행을 꿈꾸었다면 불완전한 인류, 더 나아가 우주라는 존재를 만들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완벽을 추구했다면, 처음부터 인간을 기계 같이 설정해놓고 잘만 돌아가게 하면 그만 아닌가? 또한 실제 어떤 이유가 있어 과거를 거스르거나 미래를 바꿨다 한들, 인간은 눈치채는 것조차 하지 못할 것이며, 신으로서도 그걸 성서에 꼭 기록해 알려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반론은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방패로 성경이나 그에 기반한 계시종교의 교리를 방어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특히 「전지전능의 권위라는 것은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압도적인 권위」라는 주장은 전형적인 무지에 의거한 논증 오류로서, 그냥 신의 위대함에 대해 아무런 반론도 하지 말고 무조건 수긍하라는 억지로 악용된 역사가 있다.[56] 더욱이 신의 기준과 인간의 잣대가 다를 수 있다는 것에는 어떤 명백한 증거도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다르다고 한다면 그 신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그저 악신(惡神)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구약성서 비판에서도 종종 나오는 대목처럼 유일신이 유아학살이나 집단강간 같은 범죄를 옹호하는 존재라고 하자. 그런 존재를 인간이 '숭배'하고 '신앙'해야 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심지어 대부분의 정통 종교라 평가 받는 곳에서는 자신들의 유일신을 '절대선'[57]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틀은 어디까지나 계시종교의 '성경'이나 그에 기반한 '교리'에서 묘사되는 유일신을 비판하는 항목이지 절대자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논하는 곳이 아니다. 설령 신이 실재한다 해도 절대선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라면 현대 계시종교의 관점에서 그 신은 인간이 숭배할 수 있는 존재에 해당하지 않는다.

'시간을 초월하지 못하는 신'이라는 비판에서 다루는 진정한 논점은, 만약 이 세상에 신이 실재한다고 쳐도 그자가 단순히 코즈믹 호러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면 현대까지 내려온 그들 종교와 교리, 그리고 신앙은 의미를 잃는다는 지적에 있다. 이에 대해 버트런드 러셀은 '만약 이렇게나 불완전하고 비극이 넘치는 세상에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존재한다면, 그 신은 매우 잔혹하고 변덕스러운 존재일 것이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즉, 이 항목의 목적은 단순히 신이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지 그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계시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이 그렇게나 선하고 완벽한 존재라면, 그런 힘을 가지고도 왜 세상을 이처럼 불완전하게 만들고 인간에게 고통과 비극을 줄 필요가 있었냐'는 모순의 지적에 있다. 신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든 혹은 존재해도 전지전능하지 않거나 절대선이 아니든, 어느 쪽이든 '계시종교에서 말하는 형태의 절대자'는 모순적인 존재이니 그와 연결된 신앙과 종교도 의미를 잃는다는 것이 이 항목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58][59]

이에 대한 기독교 측의 변호는 악의 문제, 칼빈주의/비판 문서 참조.

71. 결론


위 구절을 기계적 영감설, 즉 하느님이 한 글자 한 글자 다 직접 계시해주셨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순간 위 구절이 모든 모순 예시들과 모순된다.[60][61]

이는 저자가 달라서 그럴 수도 있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교과서들이 출판사와 저자에 따라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표현 방법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듯이, 성경도 경우에 따라 그런 묘사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세부적인 디테일에서 모순이 생기더라도, 그러한 모순이 그것에 해당하는 사건 자체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최소한 그것에 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는 데에 신빙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저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기본적 사실이 다르다면 신뢰성의 문제가 발생 할 수 있다.

또한 긴 세월 동안 전해지면서 신앙에 따라 윤색되어진 부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번역 과정에서 오류가 생겨날 수도 있다. 성경의 원문이 한글이 아닌 히브리어(구약성경), 헬라어(신약성경)이므로, 가령 한-영 번역에서 '노랗다'와 '누렇다', '누리끼리하다'의 미묘한 뉘앙스를 번역하기 힘든 것처럼 번역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뉘앙스나 해석의 차이라고 넘어가기엔 너무 심각한 오류[62]들을 생각해 봤을 때 현재 우리가 보는 성경은 결코 완벽하지 않은 셈이다.

또한 이런 부분들이 성경의 문맥적 주제까지 훼손하면서 성경 각 부분의 주제들을 충돌시키지는 않고 그 핵심 내용은 같다는 관점에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63]하는 것보다 문맥으로 해석[64]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의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65] 결국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성경 무오론'은 기존의 성경 문자 하나하나에 오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의 문맥적 주제에 오류가 없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66]


[1] 兵籍: 전쟁에 나갈 만한 장정의 수 [2] 칼케돈 공의회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은 구분되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라는 해석을 내렸다. 이 해석을 따르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지만 현재 이 해석을 따르지 않는 종파들은 이단취급을 받고 있다. [3] 마4:3-10, 눅4:1-13 [4] 사53:3 [5] 대제사장의 자격을 갖추어 [히2:17-18] [7] (성부)하나님이 막아 주지 않으시면 그와 우리를 망칠 수 있는 성향 [이사야]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이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9]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건이 아니니라. 이것(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도 억지로 하는, 하나님을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도구로 여기고 하는 기만적인 금식)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 58:4~7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완전한 자유를 줏셨다는 걸 주지하자. 시내산에 임재하실 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의 율법을 지킬지 안 지킬지 결정할 자유를 주셨다. [11] 40세라는 언급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12] 두 절이 합쳐져있는 형태이다. [13] 레닌그라드 B19a 본문을 의미한다 [14] 물론 왕위에 오른 기간이 아니라 생존 기간이라는 다른 해석의 여지도 있는 게 직역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왕을 요구하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빈야민 지파 사람 키쉬의 아들 샤울을 사십 년 동안 주셨다가" [15] 혹은 바오로가 말실수를 했거나로도 생각할 수 있다. [16] 전술한대로 사율이 1살에 왕이 되어 2년간 통치하다 다윗에게 빼앗겼다고 하기엔 너무 초자연적이다. [17] Smith, H. P. (1899).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books of Samuel [18] 그런데 집회서는 개신교에서는 없다. [19] 열왕기나 역대기 모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망하고 쓰여진 책이다. 다만 열왕기는 유대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야가 저자이며, 역대기의 저자는 에스라이다. 특히 역대기가 쓰여지던 시대는 유다 지방에서 다시 성벽 재건을 비롯하여 여러 일들이 벌어지던 시대에 쓰인 책으로 기록 시기가 상당히 크게 차이가 난다. 그나마 이 둘을 보조해 줄 '역대 지략'이 있다면 무엇이 맞는지 교차검증이라도 이뤄지는데 그 역대 지략이 진작에 소실되었으니 검증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20] 물론 뇌물의 유용성(?)을 먼저 말하고 그 뒤에 뇌물 받지 말라는 말이 나왔기에 종합해보면 '뇌물은 이러저러하게 유용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망하는 지름길이니 받지 말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1] 유다왕 아하스를 말한다. [22] 아람왕 르신과 에브라임왕(이스라엘)을 뜻한다. [23] 후굴하겠지만, 8장이 임마누엘라는 아기에 대한 이야기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 [24] 게다가 루카 복음서에는 대홍수 이전의 족보까지 써서 마지막에 아담과 하나님까지 거슬러올라가는데, 창세기에도 나와있는 대홍수 이전의 족보와 비교하면 창세기에 없는 한 사람이 루카 복음서에 추가되어 있다. 창세기가 잘못된 것인가, 루카 복음서가 잘못된 것인가? [25] 다시 말해 두 족보 가운데 하나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족보를 쓰고 '~의 딸 마리아'를 써야 할 자리에 '~의 사위 나자렛의 요셉'을 넣고 '~의 사위'라는 표현이 나중에 `~의 아들'로 바뀌었을 가능성(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26] 여호수아 시절 명을 어기고 노획물을 숨겼다가 사망한 아간이나, 나름대로 전답을 팔아 기증하는 선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양을 거짓말한 죄로 죽은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일화가 있다. 신적 영향력이 특히 가깝고 두드러지던 시기엔 인간적인 시각으론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죄도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진노로 이어졌다. [27] 즈가리야 9장 9절 [28] 두 마리에게 걸쳐서 뒀다는 것 역시 모순이 되므로 안된다. 더구나 이건 너무 초자연적이다. [29]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애초에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성경의 어느 부분의 어디까지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어느 부분은 영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전무한 것이 현실이다. 하단의 성경의 4중적 해석법 단락을 참조할 것.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독교인들이 불리한 구절에 대한 해명을 할 때만 영적 의미가 어쩌고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 밖에 없다. [30] 다만 문맥 상으로는 전혀 어색함이 없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마음 없이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한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다는 관점에서 봤을 때, 마르코 복음서의 이사야서 인용은 오류가 없다. [31] 아모스서에 이스라엘이 이방을 차지한다고 나온 것을 이방인들이 하느님을 찾는다고 번역했는데, 이스라엘이 이방을 차지한다면 이방인들이 하느님을 믿게 될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번역 오류긴 하지만 문맥 상으로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32]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는데 안식일에 시체를 매달아두지 않는다는 율법에 따라 금요일 정오에 예수의 사망 여부를 확인했고 이 때 사망을 확인한 예수를 무덤에 안치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이 무덤 곁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안식일이 시작되므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 바리새인의 군인들이 무덤을 지켰다. 다음 날 해질녘에 안식일이 끝났으나 날이 저물어 여인들이 가지 못 했고, 그래서 다음날 아침 일찍 무덤을 찾아갔더니 이미 무덤을 막았던 돌이 사라지고 무덤에 시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33] 요나서 1장 17절에 의하면 요나는 삼일삼야를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다. [34] 안식일이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토요일이 아니라 무교절에 포함된 절기 안식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학자에 따라 수요일설과 목요일설로 나뉜다. [35] 유대식 시간으로는 금요일이다. [36] 다만 성찬식 장면이 안 나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없었다고 하는 건 비약이다. 요한복음은 일부러 공관복음과 최대한 내용이 겹치지 않도록 쓴 노력이 보이는 복음서이다. [37] 유월절 준비일은 유월절의 전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이자 안식일의 예비일인 금요일, 즉 금요일인 유월절을 말하는 것이다. 준비일이라고 번역된 'παρασκευη'는 헬라어로 된 각종 유대 문헌에서 안식일의 준비일이라는 뜻으로만 쓰인다. [38] 하지만 이건 공식 사형 선고가 아니다. [39] 특정 장면이 생략됐다고 해서 그것이 모순이라고 하는 것은 억지스럽다. [40] 이것 역시 묘사에 대한 분량의 차이일 뿐 모순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41] 뜻은, "하느님이시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듯 하다. 그만큼 괴로워 하셨다고 말한다. [42] 이후에 해면(사실상 스펀지)에 포도주를 적셔서 예수의 입에 갖다 댄다. 특기할 점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타 포도주와 달리 신 포도주라고 강조된다. [43] 문제는 과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과연 저 말만 전했을지가 의문. [44] 처음 본 시점에는 한 명만 봤지만, 그들 곁에 섰을 때 두 명인 것이 드러났을 수 있다. [45] 여기서 지진은 단순히 큰 지진이 일어난다는 것만을 이야기하는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46] 이때 제자들은 뜨거운 기름이 끓는 가마 안에 들어간다든가, 물을 묻힌 동물 가죽 안에 갇히는 등, 평범하게 죽지는 않았다. [47] 하지만 성경의 다른 버전에 따르면 22장 8~9절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이 빛을보고 무서워했다 하지만 나에게 말하던 음성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48] 사도행전은 루카가 기록했다. [49] 갈라디아서 1장 17절의 다마스쿠스로 돌아갔다는 표현을 볼 때 이와 같은 행적은 타당성이 있다. [50] 다만 이런 시간조작은 인간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아무 의미도 두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만약 신이 실재하는 데도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현대 계시종교의 신앙과 위치를 위협하는 일이며 성경에서 묘사되는 절대자의 특성도 부정하는 일이 된다. [51] 하지만 아무리 인간의 존재와 자유의지를 존중하다 해도 스스로를 처음(알파)이자 끝(오메가)으로 칭하며 세상만물을 예정조화로 이끈다는 절대자가 인간의 타락을 예견하고도 방치한다면, 그것 자체가 절대선이자 전지전능하다는 기독교 유일신 특성의 모순이 된다. 본문의 서술에도 나와 있지만 전지전능, 즉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인간이 타락할 것도 당연히 예상했어야 하며, 충분히 그런 존재가 되지 않도록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속에서 묘사되는 신은 자신이 만든 인간이 타락하는 것을 보며 후회하고 노아와 같은 일부 의인 외에는 전부 학살하기로 결정한다. 철학적 고찰에 대해선 악의 문제 항목 참고. [52] 그러나 혹자는 하느님이 스스로 만든 질서와 규칙들을 지키길 원하거나 어길 수 없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버트런드 러셀은 '우리 인간조차 더 좋은 세상을 상상하고 실현할 수 있다'라는 말로써 간결하게 반박했다. 가령 사람이 만드는 '온라인 게임'에서조차 PK 금지구역을 설정할 수가 있는데, 성경에 의하면 신은 살인을 금지하고 죄악으로 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악의 문제'와 관련해 이러한 신의 태도는 여러군데서 찾아볼 수 있으며, 심지어 성경에는 직접 신이 '후회'했다는 대목도 찾아볼 수가 있다. 이는 신이 없거나, 있어도 전지전능하지 않거나, 혹은 잔혹하고 변덕스러운 존재이거나 셋 중 하나로밖에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여기서 신의 도덕이 인간의 도덕과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반론은 적절하지 않은데, 이 항목은 절대자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그에 의거한 계시종교에서 묘사되는 절대자에 대해 논하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성경과 그것을 믿는 신도들은 자신들의 조물주를 전지전능한 절대선이라 말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자신들의 종교가 유일한 진리이며 타인에게 강요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그것과 현대 과학의 시간관념을 비교해 모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항목에서 신을 코즈믹 호러와 같은 존재로 가정하며 성경의 모순을 변호하는 것은 명백한 논점일탈이다. [53] 그러나, 그 개념 자체가 없었고 몰랐기 때문에 알고 있는 개념 안에서 서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특히 시간에 관한 한, 인간들에게 기억되는 특정 시간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하나의 한 순간일 테니. [54] 그 경우에도 '인간이 부족해 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신의 위엄만을 지킬 수 있을 뿐이지, '성경' 자체가 현대 과학의 시간개념을 조금도 예견하지 못한 불완전한 서적이라는 비판에 대한 방어는 될 수가 없다. [55] 구약성경에서는 지옥이 불구덩이라는 설명이 없지만 신약에서는 엄연히 지옥불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루카 복음서 16장 19~31절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에 대한 내용에서 지옥 불구경이 나오며, 마르코 복음서 9장에도 불도 영원히 꺼지지 않고 구더기들도 사라지지 않는 불지옥이 언급된다. 단지 현대의 변화된 도덕관을 기준으로 사랑을 말하는 신이 너무 잔혹하다며 비판을 받게 되자 그 불을 '영적인 고통'을 비유한 것이라는 견해가 새로 등장하고 있을 뿐인데, 그것이 일반적인 의견도 아닐 뿐더러 설령 다수설이 된다고 해도 단순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는 명백히 지옥불과 유황 등을 언급하고 있다. [56] 과거 교회가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할 때 남용한 단골주장이기도 했다. '신의 원대한 뜻은 일개 인간의 미천한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니 함부로 의심하지 말라'는 식이다. 물론 지금은 '당신네는 그럼 인간이 아니라서 신의 원대한 뜻이 뭔지 아나보지?' 같은 말로 비웃음 당한다. [57]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절대적인 선'이라면 인간에게도 역시 선이 되어야 마땅하다. [58] 하지만 이 역시 완벽한 것은 아닌 게, 완벽의 기준이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또한 '세상을 불완전하지 않고 완벽하게 만들어 인간에게 고난을 주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논리인데, 교리 상 존재하는 '천국'이 그에 맞는 세상이라 한다면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보는 관점부터 달리해야 한다. [59] 완벽의 기준이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면 더 이상 그자는 성경과 그에 의거한 현대 계시종교에서 주장하는 '절대자'가 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있어 선이고 정의인 것이 그들이 말하는 유일신이며, 그래서 모든 이가 그 신을 받들어야 한다고 믿으며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해당 항목은 소위 '성경'이라 불리는 계시종교의 경전과 그에 의거한 교리에서 설정하는 절대자에 대한 비판에 있는 것이지, 결코 '절대자'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완벽의 기준이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전제하는 시점에서 이미 논의는 절대자를 코스믹 호러와 같은 존재로 보는 것과 실질적으로 변함이 없으며, 위에서 반박된 내용을 단어만 바꾸어 다시 적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60] 때문에 그런 식의 문자적 해석법은 좋지 못하며, 성경은 중심 주제가 중요한 책이지 과학, 역사, 논리를 논하자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위 모순 예시들은 사실 믿음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61] 다만 문자적 해석법을 부정하고 주제만에 주목한 믿음을 주장할 경우 성경에 의거한 계시종교들은 점점 컬트 종교의 영역으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과학적, 역사적, 논리적으로 다방면에서 오류가 존재하는 가르침은 결코 합리적 이성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진중하게 받아들여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과거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교부로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조차 본래 믿던 마니교를 부정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마니교의 가르침이 당대 천문학적 지식과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성경의 오류에서 눈을 돌리는 방식은 당장 개인의 신앙은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집단의 신앙은 유지하기 힘들 수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개인의 신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제로 유럽사회에서 계시종교의 이탈자 비율은 점점 늘어가고 있으며, 형식적으로는 교회나 성당을 다녀도 덴마크의 설문조사와 같이 하느님이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과반이 넘는 경우도 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도 진행 중인 현상이며, 그 시류에 어떻게든 대처하기 위해 많은 종교인과 종교단체가 사실에 맞지 않는 극단적인 주장을 포기하지 못하는 악수를 두고 있다. [62] 예를 들면 예수의 족보 문제 [63] 장로회 보수파, 침례회 등 보수적, 근본주의적 개신교 [64]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기타 개신교 진보파 [65] 이는 후대의 기독교인들이 현대의 변화된 도덕관, 과학적 합리주의, 문헌학적 연구 등에 영향을 받아 일부 거기에 끼워 맞춰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가령 위의 항목에서도 '하느님은 악의 유혹을 받지도 주지도 않는다?', '성경의 뇌물 관련 기록', ' 예수 언행의 일관성', '오른 뺨을 치면 왼 뺨도 돌려대라?' 대한 논란에서 그런 가치관의 충돌이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성경이 신의 말씀을 적은 신성한 경전이 아니라 그저 오랜 세월 여러 저자들에 의해 작성되고 수정된 하나의 '창작물'에 불과하다고 보면 납득할 수 있는 현상이다. [66] 맥락의 일관성=무오성이 될 수는 없다. 가령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그 반유대주의 사상에 일관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올바르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오성이 가치의 긍부가 아닌 전반적인 주제가 일치한다는 것을 뜻한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애당초 같은 문구를 두고 서로 '상반된 해석'도 가능하다는 시점에서 단순한 사실적 표기도 아닌 문맥이나 핵심적 주장이 일치한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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