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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5b62,#4a5b62><colcolor=#c7ac58,#c7ac58> 이명 |
누르시아의 베네딕토 (Benedictus Nursi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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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480년 3월 2일 | ||
오도아케르 왕국 움브리아 노르차 | |||
사망 | 547년 3월 21일 (향년 67세) | ||
동로마 제국 몬테카시노 수도원 | |||
직업 | 수도자 | ||
소속 | 베네딕도회 | ||
성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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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5b62,#4a5b62><colcolor=#c7ac58,#c7ac58> 성인명 |
베네딕토(가톨릭) 베네딕트(성공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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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서양 수도회의 아버지, 신비가 | ||
시성 |
1220년
4월 14일 교황령 교황 호노리오 3세 주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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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
3월 14일[1] 7월 11일[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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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 | 유럽, 농부, 학생, 유혹을 받는 자, 악마로부터 공격을 받는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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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수도자. 출신지인 누르시아[3]를 이름에 덧붙여 누르시아의 베네딕토라고도 불린다.가톨릭의 대표적인 수도회 중 하나인 베네딕도회를 설립했고, 수도자들이 준수해야 할 규율과 원칙들을 명시한 성 베네딕도 규칙서를 확립함으로써 서방 교회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등 교파 상관없이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다만 축일은 교회별로 차이가 있는데, 가톨릭, 성공회, 그리고 루터교회에서의 축일은 7월 11일이고, 정교회에서의 축일은 3월 14일이다.
2. 생애
베네딕토는 누르시아의 명망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어, 수도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유모가 같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젊은이들이 그러했듯이 베네딕토는 수사학 등의 학문을 배우기 위해 로마로 갔지만 혼란스럽고 타락한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베네딕토는 유모와 함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어느 도시에서 첫 기적을 일으키게 되었다. 유모는 밀가루 음식을 만들기 위해 동네 사람에게 체를 빌렸는데 잘못 놓아둔 탓에 떨어져 부셔지고 말았다. 유모는 당황하여 아주 통곡하였는데, 신앙심 깊은 베네딕토가 기도를 하자 체가 원상복구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베네딕토의 능력을 경이로워하여 성당 문 앞에 걸어두었는데, 베네딕토는 이런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아무도 모르게 산 속으로 피하였다.
베네딕토는 로마누스 등 선배 독수자[4]의 도움를 받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바구니에 빵을 담아 보내주는 간접적인 도움이었으며, 처음에는 혼자서 동굴에서 은둔하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베네딕토의 수도생활을 방해하는 악마의 유혹이 끊임없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베네딕토는 끝내 이를 이겨냈다. 베네딕토 전기에서는 이때 악마가 성 베네딕토에게 치를 떨며 "너는 베네딕토(축복받은 자)가 아니라 말레딕토(저주받은 자)다!"라고 악담을 했다고 전한다.
대단한 명망을 얻은 베네딕토는 어느 수도원의 원장으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매우 느슨하게 살아왔던 수도원과는 다르게 베네딕토한 엄격한 규율로 수사들을 지도하자, 수사들은 베네딕토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는데, 그게 바로 베네딕토가 마실 포도주에 독약을 타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베네딕토에게 포도주가 건네어지고, 베네딕토가 음용 전에 축복하자 포도주잔이 돌 맞은 유리창처럼 깨어졌다.
그 후 베네딕토는 그 수도원에서 나와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다. 베네딕토는 기존의 수도원의 규율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취사선택하여 새로운 규율[5]을 만들고[6] 그의 제자들을 길러내었고, 이후로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많아지면서 베네딕토 규칙서는 수도자를 위한 하나의 거대한 규범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베네딕토의 이러한 업적 때문에 사람들은 베네딕토를 일컬어 '서방 수도승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한국에는 독일 오틸리아의 베네딕토회와 이탈리아 올리베따노의 베네딕토회가 진출해 있다. 칠곡군, 대구광역시, 부산광역시, 서울특별시 등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있고, 대구와 창원[7], 부산[8]에 베네딕토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있다.
베네딕토의 쌍둥이 누이인 성녀 스콜라스티카(축일 2월 10일)도 수도생활을 하였는데[9], 매년 한 번씩 오누이가 서로 왕래하며 영적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헌데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의 <대화집 제2권(베네딕토 전기)>에 의하면, 남매간 우애가 지극했다고 한다. 당시 가족간이라도 남녀가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규정 때문에, 모처럼 남매 간의 재회가 이루어져도 서로 얼굴을 오래 보지도 못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한 번은 스콜라스티카가 오빠 베네딕토와 자기들이 각자 수도 생활하던 수도원의 중간 지점에 있던 한 집에 모여서 영적인 대화를 하려는데 베네딕토가 수도원의 규율을 이유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내심 오빠와 오래 있고 싶었던 그녀가 곧바로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가 돌아가지 않기를 청하며 눈물을 흘렸고, 이내 그 눈물과 함께 (그 지극한 사랑 때문에 기도가 통하여) 폭우가 쏟아져서 베네딕토의 발이 묶여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극적인 재회가 두 남매의 마지막 만남이었는데, <대화집 2권(베네딕토 전기)>에 따르면 이 재회 이후로 며칠 뒤에 몬테카시노의 수도원에서 베네딕토가 여동생의 영혼이 비둘기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543년 사망). 결국 스콜라스티카는 자신의 죽음이 코 앞으로 다가와 오라비와 만남은 이제 마지막임을 알았기에 폭우를 부르는 기적을 청했던 것이다.
555년~560년 사이에 베네딕토는 사망하였는데, 이때 스콜라스티카와 같은 곳에 묻히게 되었다.
3. 성 베네딕토의 수도규칙서
누르시아의 베네딕토는 평생에 걸쳐 수도규칙서 한권 이외의 책을 저술하지 않았다.
전체 내용은 여기서 무료로 열람 가능하다.
4. 성 베네딕도 십자가 메달 (분도패)
베네딕토 성인의 모습과 십자가, 라틴어 구마 기도문을 약자로 새긴 성 베네딕토 메달은 악마의 공격을 막아주는 효험이 있다 하여 은근히 수요가 있으며, 묵주나 목걸이에 자주 사용된다. 성 베네딕토 메달을 한국 천주교에서는 한자식으로 '분도패'라고 부른다. 다만 가톨릭 신자로서 주의해야 할 점은, 가톨릭교회는 저런 류( 성상, 십자고상 포함)의 특정 물건 자체에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보진 않는다. 구마경을 외든, 메달을 패용하든 어디까지나 악마를 막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가진 능력이다. 따라서 부적처럼 사용하기보다는 몸에 지니면서 베네딕토 성인의 행실을 상기하는 용도로 씀이 바람직하다.4.1. 역사
성 베네딕토 메달은 대략적인 틀은 있어도 표준은 따로 없었다. 그런데 성 베네딕토가 직접 머물렀던,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 수도원[10]에서 1880년에 성 베네딕토 탄생 140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기념 베네딕토 메달을 발행하였다.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종교예술로 명성이 높았던 보이론(Beuronese) 양식[11]을 따라 디자인되었는데, 너무나 인기 있던 나머지 누구도 그렇게 정한 적은 없지만 사실상 성 베네딕토 메달의 표준이 되었다. 성물 제작사들은 기념 베네딕토 메달의 틀을 대충 따라 만들지만, 정말로 정확하게 똑같이 만드는 곳은 드물다.성 베네딕토 탄생 1400주년 기념 분도패의 복제품 |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만들었던, 성 베네딕토 탄생 1400주년 기념 분도패 원본의 이미지를 볼 수 있는 링크는 다음과 같다. 링크
4.2. 구성
1880년 베네딕도 성인 탄생 1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제작된 이 메달은 몬테카시노 수도원(베네딕도 성인이 설립하고 돌아가신 곳으로 베네딕도회의 발상지) 것으로, 파스카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하게 십자가의 구원적 가치를 표현한다.- 성인의 오른손에는 십자가, 왼손에는 규칙서, 그 아래에는 까마귀와 독배(독이 든 잔)가 있다.
- 성인의 좌우에는 CRUX SANTI PATRIS BENEDICTI(사부 성 베네딕도의 십자가)라는 명문이 있고, 발 아래에는 EX-S-M-CASSINO MDCCCLXXX (1880년 거룩한 몬테카시노에서)라는 글귀가 있다.
- 가장자리에는 Ejus in obitu nostro praesentia muniamur (우리기 죽을 때에 그의 현존으로 보호받기를 바라나이다)라는 글귀가 있다. 성인은 성체를 모시기 위하여 일어서서 기도하면서 사망하였다.
- 십자가의 세로축에는 CSSML (crux sancta sit mihi lux: 거룩한 십자가는 내 빛이 되소서), 가로축으로는 NDSMD (non draco sit mihi dux: 용이 내 인도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이라고 간구하는 내용으로 라틴어 두문자들이 있다.
- 십자가의 네 모서리에는 CSPB(crux santi patris Benedicti: 사부 성 베네딕도의 십자가)란 글자, 십자가 위에는 PAX (평화)라는 모든 베네딕도회의 모토를 새겼다.
- 가장 오른쪽 위에서부터 아래로, 그리고 왼쪽 아래에서 위로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들어 있다. VRSNSMV SMQLIVB (Vade retro Satana, numquam suade mihi vana, sunt mala quae libas, ipse venena bibas: 물러가라, 사탄아! 결코 나에게 헛된 것으로 유혹하지 마라. 네가 주는 것은 악이니, 너나 그 독을 마셔라.)라는 구절의 라틴어 두문자들이 있다.
4.3. 대중 매체
5. 여담
- 한국에서는 종종 '베네딕도', 또는 한문 음역인 '분도(芬道)'라고도 불린다. 성공회에서는 '베네딕트'라 한다. 가톨릭 계열의 ' 분도출판사', '성분도병원' 등은 다 베네딕토 성인의 이름을 딴 것이며, 어르신들의 경우 분도라고 해야 이해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다.
- 베네딕토의 생애를 서술한 유일무이한 문헌으로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대화집 제2권 (베네딕토 전기)》가 있다. 그가 유명해진 이유가 이 베네딕토 전기 때문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평.
6. 관련 문서
[1]
정교회 축일.
[2]
가톨릭,
성공회,
루터교회 축일.
[3]
현재
이탈리아
움브리아에 위치한 노르차의 옛 지명이다.
[4]
혼자서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5]
<베네딕토 규칙서>(Regula Benedicti: RB)
[6]
특히 베네딕토 규칙서 이전에 존재하던 <스승의 규칙서>(Regula Magistri: RM)라고 불리는 규칙서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베네딕토 규칙서에는 스승의 규칙서와 똑같은 문장이 여럿 있으므로, 아무래도 베네딕토는 스승의 규칙서를 펴놓고 생각하며 자신의 규칙서를 집필했던 듯하다.베네딕토 규칙서가 유명해진 뒤에 필사된 스승의 규칙서 사본 중에는 역으로 베네딕토 규칙서를 보고 다시 문장을 따온 듯한 부분이 있다.
[7]
포교 성 베네딕도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다. 대구에 있는 쪽이 더 오래됐다.
[8]
광안리에 있는 올리베따노의 성 베네딕도회 수녀원 근처에 성 분도 치과병원이 있다. 예전에는 직영으로 초량동에 성 분도병원과 서울 용산 동자동[13]에 서울 성 분도병원도 있었지만, 두 병원은 모두 문을 닫고 용호동 부산성모병원을 위탁경영하고 있다.
[9]
베네딕토 수녀회의 창시자다.
[10]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언급하는 바로 그 수도원이다. 항목 참조.
[11]
19세기
독일 베네딕토회 보이론(Beuron) 수도원에서 시작한 예술양식. 옛 이집트 교회의 성화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유의 서체를 개발하여 적용하곤 했는데, 1400주년 기념 분도패 앞면에 양각된 기도문도 그 서체를 따랐다. E를 마치 좌우를 뒤집은 '3'처럼 표현한 점이 특징적이다. 19-20세기에 가톨릭교회에서 주목받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있었다.' 하는 정도.
[12]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차이는 메달 앞면에 있는 성 베네딕토의 얼굴. 원본보다 얼굴이 훨씬 뭉개졌다. 또한 성 베네딕토의 발 아래 있는 반원형 공간에 원본에는 EX·S·M·CASINO MDCCCLXXX (거룩한 몬테카시노에서, 1880년)이라고
라틴어와
로마 숫자로 새겨졌고 쉽게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