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 말기의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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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00> 1853년 7월 8일 | 쿠로후네 사건 |
1854년 3월 31일 | 미일화친조약 체결 | |
1858년 7월 29일 |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 |
1858년 ~ 1859년 | 안세이 대옥 | |
1860년 3월 24일 | 사쿠라다 문 밖의 변 | |
1862년 2월 13일 | 사카시타 문 밖의 변 (坂下門外の變) | |
1862년 5월 21일 | 사쓰마 번 지사 숙청 사건 (薩摩藩志士肅淸事件) | |
1862년 8월 21일 | 나마무기 사건 | |
1863년 8월 15일 ~ 1863년 8월 17일 | 사쓰에이 전쟁 | |
1863년 9월 30일 | 8월 18일의 정변 (八月十八日の政變) | |
1863년 ~ 1864년 | 시모노세키 전쟁 | |
1864년 7월 8일 | 이케다야 사건 | |
1864년 8월 20일 | 금문의 변 | |
1864년 8월 24일 ~ 1865년 1월 24일 | 제1차 조슈 정벌 | |
1866년 3월 7일 | 삿초 동맹 | |
1866년 7월 18일 ~ 1866년 10월 8일 | 제2차 조슈 정벌 | |
1867년 11월 9일 | 대정봉환 | |
1868년 1월 3일 | 왕정복고의 대호령 | |
1868년 1월 27일 ~ 1869년 6월 27일 | 보신 전쟁 | }}}}}}}}} |
삿초 동맹 薩長同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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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사카모토 료마가 6개조 서신 뒷면에 작성한 보증 서신 | ||
체결일 | 1866년 3월 7일( 게이오 2년 1월 21일) | |
가맹 세력 |
사쓰마 번 조슈 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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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삿초 동맹(薩長同盟)은 1866년 일본 에도 시대 말기에 사쓰마 번과 조슈 번 사이에 맺어진 정치적, 군사적 밀약을 말한다. 삿초 밀약(薩長密約)이라고도 한다.에도 막부 말기 사쓰마와 조슈는 웅번[1](雄藩)으로 떠올랐지만 사쓰마는 친막부 온건 개혁파[2]가 주류였고 조슈는 반막부 급진 개혁파가 주를 이뤄 둘은 정치적 이념의 차이가 있었다. 사쓰마는 개혁 군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자체가 에도에 인질로 간 동안 막부와 친분을 쌓았고 덕분에 막부를 등에 업고 이복동생 시마즈 히사미츠를 세우려던 아버지 시마즈 나리오키를 몰아냈으며 더구나 쇼군가와 사돈지간이었기 때문에 친막부가 주류였다.
조슈가 교토를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간을 보던 사쓰마가 막부 편을 들었다. 사쓰마는 조슈를 역적으로 몰아 교토 정치무대에서 몰아내는 데 앞장서면서 둘은 견원지간이 되었다.
막부는 조슈를 토벌하기 위해 서일본의 영주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린다. 조슈와 원수가 되긴 했지만 존황양이란 대의 명분에 대해 동의하는 번내 여론 때문에 '막부 편을 들어 눈꼴스러운 라이벌을 완전히 몰락시키는게 좋다' vs '조슈 다음은 우리 차례일 게 뻔한데 막부를 돕는 건 우리 스스로 조슈라는 방패막을 없애는 거나 마찬가지' 라는 두가지 격론이 대립하게 된다.
도사 번 출신의 탈번 낭인인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가 둘을 화해시켜 동맹을 맺는데 이를 삿초 동맹이라고 한다는 설이 있지만 최근의 역사학자들은 이 설을 부정하고 있다. 이후 토사 번까지 삿토맹약(薩土盟約)으로 합세해 힘의 균형이 바뀌고 막부는 이듬해인 1867년 대정봉환으로 정권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1868년에는 보신 전쟁을 치르며 신정부의 기틀을 닦았고 이후 진행된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구화되었다.
이후 사쓰마와 조슈 출신들은 육해군과 행정부, 입법부를 장악하고 '번벌'(藩閥, 한바츠)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3]
2. 배경
1853년 쿠로후네 사건은 에도 막부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수도 근처에 갑자기 나타난 증기선 함대는 공포를 주기에 충분했다. 미국 함대 제독 페리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요구했다. 당시 에도 막부의 최고 중신인 이이 나오스케는 서양 문명을 알고 있었고 청나라가 형편없이 영국에 패해 온갖 수모를 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대결하기보다 달래자고 마음 먹고 교토 황궁에 조약 체결을 윤허해 달라고 청했다.그러나 당시 고메이 덴노는 윤허를 자꾸 미뤘다. 이이 나오스케는 막부 독단으로 조약을 체결해 버렸다. 지가 정권을 잡았으면 잡았지, 국가 원수를 제끼고 마음대로 한 점에 대해 평소 막부 신분제에 불만이 많던 하급 무사들, 낭인들을 애국지사로 만들었다.
지방 영주들은 감히 막부에 도전할 생각을 처음에는 못 했지만 이미 국제 무역을 통해 실력을 쌓았던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달랐다. 막부에 평소 진언도 하고 막부도 눈치를 좀 보던 관계였는데 막부의 독단에 대해 둘 다 불만을 표하고 이이 나오스케를 압박했지만 결국 두 번은 다른 길을 걸었다. 사쓰마 번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양녀 아츠히메를 막부에 시집보내면서 친막부 성향을 띄게 됐고 반대로 조슈 번은 유신 지사들을 번주가 적극 등용하면서 점점 더 막부와 의견 충돌을 빚게 되었다.
에도 막부는 이들을 달래는 한편 서구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기존 일본의 정치 체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과 군사력을 흡수하려던 그들은 중세 수군이 아니라 '해군'을 키우자고 마음먹고 해군 조련소를 설치하고 청나라나 서양에 사신단을 자꾸 보내면서 길을 모색했다.
그럴수록 불만을 가진 측은 더 저항이 극렬해졌다. 바지사장도 사장이라고 지존께서 오랑캐가 싫으시다는데 굴욕적인 외교를 한 막부에 맞섰는데 그들은 소속이 없는 낭인들 아니면 아니면 막부 질서의 하부에서 신분제에 갇힌 하급 무사들이었다. 하급 무사들은 영주를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탈번해 낭인으로 떠돌았다.
조슈 번은 이런 애국 지사들이 모여 있었다. 1858년 천황의 밀지를 받고 번주 모리 다카치카가 '존황'으로 방향을 잡았다. 곧 번내 군제를 서양식으로 바꾸고 신무기를 들여오려고 애썼다. 이것이 점점 막부의 주의를 끌었다. 영주는 정이대장군의 명령을 따르고 사사로이 군을 움직이거나 바꾸면 안된다. 이게 막부다. 조슈 번은 역적이 될 수 있었다. 천황의 밀지 하나 믿고 점점 위험한 길을 갔다.
결국 1860년 사쿠라다 문 밖의 변으로 이이 나오스케가 미토 번사들에게 처참하게 암살되었다. 자객들도 대부분 죽었는데 이를 기회로 칼 든 낭인들이 곳곳에서 암살과 테러를 거듭하면서 민심은 더욱 흉흉해지고 있었다. 당시 교토 황궁을 수비하던 조슈 번은 항해원략책, 군제 개혁책 등을 들고 막부를 만났다. 알아서 서구식 온건 개혁을 추진 중이던 막부는 달갑지 않았다. 이를 막부의 사돈인 사쓰마 번이 이용해 막부와 조슈 번을 이간질했다.
1863년 7월 20일 조슈 번은 독단을 감행했다. 프랑스 무역선을 멋대로 포격해 프랑스 함대의 십자 포화를 맞고 번이 쑥대밭이 됐다.( 시모노세키 전쟁) 막부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외국에 전투를 걸어 중한 벌이 예약됐고 고메이 덴노도 조슈의 과격한 행동에 경악하여 사쓰마, 아이즈 번 등의 조슈 축출 계획을 허가했다. 이9월 30일(음력 8월 18일)에는 8월 18일의 정변이 일어나 산조 사네토미 등 친조슈 공경들이 자리를 잃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등의 조력을 받아 조정을 장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쓰마는 요시노부에게 협조적인 입장이었으나 요시노부가 시마즈 히사미츠를 계속 홀대하면서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한편 교토에서 암약하던 조슈 번사들이 신센구미같은 막부 측 치안대에 의해 체포되고 살해됐다.( 이케다야 사건) 복수를 위해 조슈 번 측 지사들이 병력을 이끌고 직접 교토로 쳐들어오던 금문의 변을 일으키지만 아이즈군을 비롯해 막부 측 번 병력과 사쓰마군, 막부 교토 수비대 등에게 막혀 죄다 죽거나 쫓겨났는데 이때 쿠사카 겐즈이, 테라지마 츄자부로, 키지마 마타베 등을 잃었다. 천황을 위한다고 난을 일으켰건만 천황 손에 결국 역적 신세가 되었다.
막부는 고메이 덴노에게 칙령을 받아내 제1차 조슈 정벌을 준비했는데 이때 막부군 참모 사이고 다카모리가 교섭안을 제시했다. 조슈는 3명의 가로[4]를 할복시키고 양이파 지사들을 탄압하며 막부에게 순종했고 기도 다카요시, 타카스기 신사쿠 등은 잠적했다. 막부는 조슈의 항복을 받아들여 1차 조슈 정벌은 무산되었다.
그런데 이때 조슈 번사들의 세계관이 변화를 맞았다. 존황양이는 그대로 밀고 가지만 일본의 국가 시스템까지 싹 서양화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오랑캐를 쫓아내는 게 아니라 서양식으로 변모한 새로운 나라를 그리게 됐다. 서구화가 싫어서 이 난리를 쳤건만 이제 일본에는 막부에 반항할 수는 있어도 서구화에 반대하는 세력은 없어졌다.
그해 겨울 후쿠오카로 도망갔던 타카스기 신사쿠는 시모노세키로 돌아와 800명의 키헤이타이(奇兵隊, 기병대. 말타는 기병이 아니라 기습부대라는 뜻이다.)와 이토 히로부미가 이끄는 리키시다이(力士隊), 유게키다이 등으로 구성된 연합 부대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다시 실권을 장악했다. 곧이어 양이파의 리더인 기도 다카요시도 조슈로 돌아왔다.
양이파가 다시 조슈의 실권을 잡자 막부는 제2차 조슈 정벌을 준비했다.
3. 각 세력의 사정
막부는 다른 번들과 서양 열강 사이의 무역을 통제[5]하는 동시에 프랑스를 통한 군제 개혁을 실시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고메이 덴노의 역적 토벌 칙령을 다시 받아내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교토로 상경하면서 제2차 조슈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사쓰마는 분큐의 개혁을 통해 어느정도 정치 주도권을 가져오는듯 했으나 산요 회의[6]의 붕괴로 끝내 실패하였다. 이후 아이즈 번과의 연합을 통해 중앙 정계 진출을 재시도했으나 아이즈의 힘만 커지는 꼴이 되었고 결국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 반막부 성향 하급무사 세력을 중심으로 막부에 대한 강경론이 대두되었다.
조슈는 막부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타카스기 신사쿠의 기헤이타이(奇兵隊, 기병대)가 사무라이, 농민, 상인 등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병사들을 모집해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고 기도 다카요시의 리더십으로 똘똘 뭉쳐 있었지만 막부와의 병력 차이가 압도적이었고 그것을 극복할 신식 무기의 도입도 앞서 설명한 막부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했다.[7]
이때 사쓰마의 지원을 받는 사카모토 료마와 조슈의 지원을 받는 나카오카 신타로가 양 번의 동맹 중개에 나섰다.
4. 삿초 동맹의 성립
게이오 원년(1865) 봄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의 주선으로 두 번의 회담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시모노세키에서 사이고와 기도 다카요시 간의 회담이 성사되기 직전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배를 탄 사이고 다카모리가 갑자기 교토로 돌아가는 행동을 저질러 기도 다카요시의 분노를 샀다.삿초 동맹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으나 사카모토 료마는 기지를 발휘하여 사쓰마의 명의로 조슈를 위해 군함과 신형 소총을 구매하고[8] 조슈는 사쓰마를 위해 쌀을 전달하는 것으로 서로의 쌓인 앙금을 풀기 위한 거래를 제안한다. 료마 일행과 타카스기 신사쿠, 오다무라 이노스케[9]의 설득으로 기도 다카요시는 거래 및 회담 제안에 승낙했다.
이 거래로 신뢰를 어느 정도 회복한 양 번은 1866년 1월 초 사쓰마 번의 가로 고마쓰 다테와키의 저택에서 회담이 진행되었다. 회담에는 고마쓰 다테와키,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카츠라 히사타케, 요시이 토모자네, 시마즈 이세, 나라하라 시게루(이상 사쓰마)과 기도 다카요시(이상 조슈)가 참석했다.
게이오 2년(1866) 1월 20일 료마는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저택에 들렸으나 양쪽 모두 아직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특히 기도 디카요시는 단신으로 사쓰마 측에 찾아간 것까지는 참고 넘어갈 수 있지만 막부의 침공을 막기 위해 사쓰마에게 숙이는 것 같아 수치심이 들었다. 그러자 료마는 사쓰마 측에게 달려가 먼저 조슈에게 손을 내밀기를 청했고 마침내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삿초 동맹이 체결되었다.
회담의 내용은 철저하게 밀약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기록이나 공식 문서도 없다. 다만 이 밀약을 기도 다카요시가 6개조로 정리하고 사카모토 료마가 보증인으로서 빨간 붓글씨로 서약한 서신이 남겨져 오늘날까지 미디어 매체를 통해 조금씩 각색되어 전해지고 있다.
마치다 아키히로 (2019)의 연구[10]는 삿쵸 동맹의 성립과 관련된 (위의 통설과는 다른) 타임라인을 제시했다. 케이오 2년 (1866년) 1월 18일, 사쓰마 번의 가로 고마쓰 다테와키의 저택에서 회담이 진행되었다. 회담에는 고마쓰 다테와키,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카츠라 히사타케, 요시이 토모자네, 시마즈 이세, 나라하라 시게루(이상 사쓰마)과 기도 다카요시(이상 쵸슈)가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 6개조문의 아웃라인이 나온 상태였는데 구두협약이었고 문서화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한편 료마는 게이오 2년(1866) 1월 10일 토사번 낭인 이케 쿠라타, 신구 우마노스케, 쵸후번사 미요시 신죠와 더불어 시모노세키를 출발, 1월 18일 사츠마번 오사카번정[11]에 들어가 19일 후시미 테라다야에 머물고 있었다. 20일 밤 료마는 이케, 신구와 함께 교토로 잠입하고, 21일 고마쓰 다테와키 저택으로 들어갔다. 이때까지도 6개조문은 성문화되지 않은 채, 구두 협약으로 붕 떠 있는 상태였는데 확실한 증빙서류를 원하는 쵸슈측 기도 다카요시와는 달리 사츠마측은 밀약을 문서화하는 것에 상당한 저항감을 갖고 있어서 기도(=카츠라 코고로)도 (서류를 남기려는) 요구사항을 관철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밀약의 내용을 문서화를 하려고 해도 사츠마 번사측에서는 증인을 구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12] 기도가 고마쓰 다테와키 저택을 떠나기 직전에 마침 료마[13]가 나타나자 21일 당일 그를 증인으로 세워서 6개조의 내용을 확인하고[14] 23일 6개조 서약문(고마쓰-기도 각서)을 성문화시킴으로서 오늘날 알려진 서신문(사카모토 료마 서명첨부)이 남겨지게 되었다.
4.1. 6개조(6ヶ条)
밀약이기 때문에 원죄를 사면받는 대상의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다. 조슈는 당시 조정의 적이었기 때문에 밀약이 누설됐을 경우에 대비한 보험일 가능성이 높다.一、戦いと相成り候時は直様二千余の兵を急速差登し只今在京の兵と合し、浪華へも千程は差置き、京坂両処を相固め候事
하나,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는 2천 여 명의 군대를 속히 보내어 지금 교토에 있는 군대와 합류하고, 나니와에도 천 정도를 두어, 케이한 두 곳을 서로 굳게 방비할 것.
一、戦自然も我勝利と相成り候気鋒これ有り候とき、其節朝廷へ申上屹度尽力の次第これ有り候との事
하나, 전쟁이 일어나 우리가 승리하여 기세가 올랐을 때, 조정에 반드시 사면 건의를 드릴 것.[15]
一、万一負色にこれ有り候とも一年や半年に決て壊滅致し候と申事はこれ無き事に付、其間には必尽力の次第屹度これ有り候との事
하나, 만일 패색이 짙어져도 일 년에서 반 년 사이에 (조슈가) 괴멸당할 일은 기필코 없도록 할 것.
一、是なりにて幕兵東帰せしときは屹度朝廷へ申上、直様冤罪は朝廷より御免に相都合成候に屹度尽力の事
하나, 이에 따라 막부군이 동쪽으로 돌아갈 시에는, 반드시 조정에 아뢰어 직접 (조슈의) 원죄를 사면 받을 수 있도록 서로 힘을 모아 진력할 것
一、兵士をも上国の上、橋会桑等も今の如き次第にて勿体なくも朝廷を擁し奉り、正義を抗み周旋尽力の道を相遮り候ときは、終に決戦に及び候外これ無きとの事
하나, 병졸이나 상국[16] 이상, 하시카이소[17] 등도 작금의 시기에 황송하옵게도 조정을 옹립해 모셔야 하며, 정의를 다투는 일에 앞장서 길을 가로 막을 때에는 결국 결전 이외에 없을 것.
一、冤罪も御免の上は双方誠心を以て相合し皇国の御為皇威相暉き御回復に立至り候を目途に誠心を尽し屹度尽力仕まつる可しとの事
하나, (조슈의)원죄를 사면받고 양측(삿초)이 힘을 합쳐, 황국의 안위를 위해 서로 황위를 빛내고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성심을 다해 진력해야 할 것.
서신 뒷쪽에는 보증인 사카모토 료마가 붉은 글씨로 회신을 한 흔적이 남아있다.[18]하나,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는 2천 여 명의 군대를 속히 보내어 지금 교토에 있는 군대와 합류하고, 나니와에도 천 정도를 두어, 케이한 두 곳을 서로 굳게 방비할 것.
一、戦自然も我勝利と相成り候気鋒これ有り候とき、其節朝廷へ申上屹度尽力の次第これ有り候との事
하나, 전쟁이 일어나 우리가 승리하여 기세가 올랐을 때, 조정에 반드시 사면 건의를 드릴 것.[15]
一、万一負色にこれ有り候とも一年や半年に決て壊滅致し候と申事はこれ無き事に付、其間には必尽力の次第屹度これ有り候との事
하나, 만일 패색이 짙어져도 일 년에서 반 년 사이에 (조슈가) 괴멸당할 일은 기필코 없도록 할 것.
一、是なりにて幕兵東帰せしときは屹度朝廷へ申上、直様冤罪は朝廷より御免に相都合成候に屹度尽力の事
하나, 이에 따라 막부군이 동쪽으로 돌아갈 시에는, 반드시 조정에 아뢰어 직접 (조슈의) 원죄를 사면 받을 수 있도록 서로 힘을 모아 진력할 것
一、兵士をも上国の上、橋会桑等も今の如き次第にて勿体なくも朝廷を擁し奉り、正義を抗み周旋尽力の道を相遮り候ときは、終に決戦に及び候外これ無きとの事
하나, 병졸이나 상국[16] 이상, 하시카이소[17] 등도 작금의 시기에 황송하옵게도 조정을 옹립해 모셔야 하며, 정의를 다투는 일에 앞장서 길을 가로 막을 때에는 결국 결전 이외에 없을 것.
一、冤罪も御免の上は双方誠心を以て相合し皇国の御為皇威相暉き御回復に立至り候を目途に誠心を尽し屹度尽力仕まつる可しとの事
하나, (조슈의)원죄를 사면받고 양측(삿초)이 힘을 합쳐, 황국의 안위를 위해 서로 황위를 빛내고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성심을 다해 진력해야 할 것.
表に御記成被候六条は小西両氏及老兄龍等も御同席にて談論せし所にて毛も相違これ無き候、後来といへとも決して変り候事はこれ無きは神明の知る所に御座候
표에 기록되어 있는 6개조는 고(小), 니시(西) 두 사람 및 노형 류(龍) 등과 함께하여 담론하였으며, 이에 대해서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장래라고 하여도 결코 변질될 일은 없음을 천지신명께서도 알고 계시는 바이다.
표에 기록되어 있는 6개조는 고(小), 니시(西) 두 사람 및 노형 류(龍) 등과 함께하여 담론하였으며, 이에 대해서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장래라고 하여도 결코 변질될 일은 없음을 천지신명께서도 알고 계시는 바이다.
5. 기타
- 세간에는 사카모토 료마가 동맹을 기획 및 주도했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실질적으로 삿초 동맹을 구상했다고는 볼 수 없다. 허나 기도 다카요시(=가츠라 코고로)와 안면이 있었던 사카모토는 중간에서 교량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공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없다. 최신의 연구 학설에 따르면 사카모토 료마는 삿초동맹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으며[19] 회의에 참석했던 가츠라가 동맹에 혼자 참석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증명해 줄 증인이 필요해서 부탁을 받고 증인을 섰을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 상기한 6개 조항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삿초 동맹의 목적은 도막의 결의보다 제2차 조슈정벌의 중단, 조적(朝敵) 조슈 번의 사면, 도쿠가와 요시노부, 아이즈 번 등의 정치적 견제에 있었지만 요시노부는 많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아이즈를 견제하려는 목적이 가장 컸다.
- 시마즈 히사미츠의 측근으로 근무했던 이치키 시로[20]에 의하면 삿초 동맹은 어디까지나 밀약이며, 공식적인 동맹 체결은 1867년 11월, 시마즈 타다요시와 모리 모토노리와 막부 토벌을 위한 출병 협정을 맺은 시점이라고 말하였다. 마치다 아키히로 (2019)는 자신의 연구서에서 삿초 동맹 6개조문은 군사 동맹을 의미하는게 전혀 아니었고, 단순히 <삿쵸 간의 서류가 남았다> 혹은 <서로를 향한 신뢰를 쌓기 시작/시도했다> 정도로 평가한다.[21] 해당 연구에서에는 당대 인물들의 반응도 같이 소개하고 있는데 삿초 동맹의 당사자들이었던 사츠마 번사(참석자)들은 지금 자신들이 고마쓰 저택에서 성문화 하고 있는 밀약문서가 어떤 영향력을 가지는지 자각하지 못했고[22] 기도 다카요시가 떼를 쓰자 사츠마 출신이 아니었던 료마[23]를 내세워 형식적으로 써내려간 립서비스용 문서 1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쵸슈 측 기도 타카요시(=카츠라 코고로)조차도 쵸슈의 운명을 책임질 거창한 군사동맹을 기념하고 이를 박제하기 위해 증빙서류를 요구했다기보다는 그저 교토로 올라와 정치적/외교적 성과를 이뤘다는 사실을 (본국인 쵸슈로 돌아가) 여기저기 과시하고 싶어서 사츠마 번에 6개조 문서를 성문화하자고 떼를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밀약이 이루어진
고마쓰 다테와키의 저택은
꽃밭의 저택(御花畑屋敷)이라는 별칭으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다. 본처가 향도(香道)라고 해서 향초를 태워서 향을 즐기는 취미를 가져서 꽃을 많이 길렀는데 2016년 위치, 규모 등이 밝혀져
NHK 대하드라마
세고돈에서 최초로 일부 구현되었다. 현대 일본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삿쵸동맹의 실질적인 입안자는 고마쓰 다테와키라는 학설이 있는데
사카모토 료마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상에서 활약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고마쓰 다테와키는 개인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번 내 상급무사 출신으로 당시 사쓰마 번주의 친아버지이자 사쓰마 번의 정치 실권을 쥐고 있던 시마즈 히사미츠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총애를 받아서 27세 젊은 나이에 사쓰마 번의 가로[24]가 되었으며, 당시 사츠마의 외교를 담당하는 번정 내 2인자의 위치였다. 삿쵸동맹을 할까 말까 고민하며 최종 결정할 수있는 시마즈 히사미츠와 고마쓰는 직언, 직통하는 사이였다. 사츠마와는 멀리 떨어진 토사 번 출신의 하급 무사 가문의 탈번 무사인 사카모토 료마가 이들을 움직여서 삿쵸동맹을 하라 마라 참견하고 끼어들 여지는 없으며 실제로 삿쵸 동맹의 실무를 담당한 사츠마 번의 하급 무사 출신인 사이고 다카모리 조차도 이 고마쓰 다테와키의 부하였다. 결국 결정권을 가지고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고마쓰 다테와키였던 셈이다.
- 153년 후인 2019년 일본의 대한국 수출 통제로 인한 협상 중에 한국 정부 관계자가 "요시다 쇼인과 타카스키 신사쿠가 살아있었으면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 협력에 대한 나의 평가에 동의할 것이라 확신한다"고 하며 삿초 동맹을 언급하여 논란을 빚었다. # 뜻이야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해 아베 내각과 일본 국민들이 알기 쉽게 일본 역사에 비유한 것이라지만 비유의 대상이 정한론자인 요시다 쇼인이라는 점에서 비난을 받았다. 이후 이 관계자는 논조를 180도 바꾸어 대일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
[1]
경제력과 정치력이 있는 유력 다이묘 세력. 쉽게 말해서 봉건 제도 하의 여러 지방 중에서 눈에 띄게 강한 지방이라고 보면 된다.
[2]
사쓰마가 정치 일선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해 각지 유력 다이묘들이 모여 함께 정치를 펼친다는 목표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공무합체(公武合体), 분큐의 개혁(文久の改革), 산요 회의(参預会議), 4제후 회의(四侯会議)가 있다.
[3]
도사 번은 상대적으로 중앙 정계에서 소외되는 편이었다. 따라서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자유민권운동이나 이와사키 야타로의
미쓰비시 그룹 등 민간 분야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4]
쿠니시 치카스케(国司親相), 마스다 치카노부(益田親施), 후쿠하라 모토타케(福原元僴), 당시 조슈 번 최고 가신 3명. 이름에 모두 한 글자씩 번주의 이름 글자가 들어 있다. 번주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다는 뜻이다.
[5]
막부의 중개 및 허락 없이는 어떠한 서양 열강과 거래를 할 수 없다.
[6]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마츠다이라 슌가쿠, 시마즈 히사미츠, 다테 무네나리, 야마우치 요도 등이 공무 합체를 위해 결성한 협의회.
[7]
시모노세키 전쟁 이후 조슈 번은 양이에서 개국으로 노선을 바꿨다.
[8]
상기한 바와 같이 막부의 무역 통제가 있었는데, 사쓰마는 조슈 정벌을 위한 무기 구매라고 애둘러 말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9]
대하드라마 꽃 타오르다의 주조연.
오오사와 타카오가 배역을 맡았는데, 주인공의 형부이며 후일 두번째 남편이라 별거 아닌 이 인물이 비중을 받았다.
[10]
해당 연구에서 인용된 사료는 기도 타카요시 서간문(수신인 사카모토 료마, 1866.01.23.), <킷카와 츠네마사 주선기>, <카츠라 히사타케 일기> 등이 거론된다.
[11]
오사카 내의 사츠마번정으로 추정
[12]
사츠마측 번사들은 증인으로 서기 싫어해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13]
사츠마측의 사자로써 쵸슈측에 파견된 전례가 있어서 양측에 면식이 있고 쵸슈번 입장에서는 이미 반쯤 사츠마번사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기도 입장에서는 굳이 싫다는 토박이 사츠마 번사 대신 내세우기도, 이용해먹기도 좋았다고 한다.
[14]
이 과정에서 고마쓰 다테와키의 내용 컨펌이 있었다고 한다.
[15]
1867년 사후회의에서 사쓰마가 조슈 사면을 주장하였다.
[16]
율령 국가의 등급 구분을 나타낸다. 국력에 따라 대-상-중-하로 나뉜다.
[17]
일명 이치카이소 정권을 일컫는다. 이치카이소란 히토츠바시(一橋) 가문의 一, 아이즈 번(会津)의 会, 쿠와나 번(桑名)의 桑 등을 가리키는 막부의 핵심 세력. 一 대신에 들어간 橋는 히토츠바시(一橋)의 橋이다.
[18]
밀약이기 때문에 료마는 그들의 이름대신 가명으로 모두 작성하였다.
[19]
삿초동맹의 회의는 료마가 교토에 오기 전에 이미 시작하고 있었고 료마가 교토의 온 목적도 실은 다른 별건의 일 때문이다.
[20]
일본 최초의 인물 사진인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은판 초상화를 찍은 인물.
[21]
따라서 마치다는 해당 문건 및 해당 역사적인 사건 자체를 <삿쵸 동맹>이라는 표현 대신 <고마쓰-기도 각서>라는 별도의 용어를 만들어 밀고 있다.
[22]
막부에 발각되면 골치아파지는 문서(밀약문)였기에 + 삿쵸 간의 응어리가 아직 남아있었기에 사츠마 번사들은 6개조문 증빙서류의 증인으로 나서길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발통문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셈.
[23]
해당 연구에서는 증인으로 나선 료마조차도 6개조문을 성문화할 필요성을 느껴서 깃발 들고 나섰다기보다는 고마쓰 다테와키 저택에 막 도착해 우물쭈물 눈치보던 중에 기도에게 딱걸려서 이름을 차용당하고 증인으로 이용당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24]
家老: 번주의 선임 보좌역으로 번주 밑의 최고 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