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社 交 界 / Socialite황족, 왕족, 귀족 등을 포함한 상류층의 사람들이 모여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작위와 칭호 등을 가지지 않은 평민은 참석할 수 없다. 지적이고 세련된 대화나 행동을 하는 것이 요구된다. 프랑스의 궁정에 기원을 둔 살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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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세
프랑스 궁정에서 기원을 둔 살롱이 사교계 관련 용어로 유명하다. 데뷔라는 단어도 사실상 여기서 온 것.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 문화는 현대 상류사회 모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중이며 현대를 배경으로 한 서브컬쳐에서도 상류사회 묘사를 위해 곁들어지는 요소이기도 하다.2.1. 프랑스 사교계
지금이야 한국에서 그 의미가 부정적인 의미로 퇴색되었다지만, 실제로는 유럽의 고급문화가 탄생하고 교류하는 공간을 제공한 핵심적인 문화 커뮤니티이자 프랑스 사교계를 대표하는 살롱 문화의 기원은 의외로 고대 그리스 시절에서 시작된다. 기원전 4~5세기 무렵의 고대 그리스의 젊은 귀족들은 스포츠클럽을 만들어 몸과 마음의 정신력을 일깨웠다. 그리고 동시에 지적인 문화 모임을 가졌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 향연>을 보면 당대 저명한 지식인들이 당시 화제가 되던 정치, 문화, 철학의 주요 화제에 대해 포도주를 즐기며 담론과 토론을 나누었는데, 이러한 모임이 훗날 유럽의 프랑스에 살롱이 생긴 문화적인 토대가 되었다.고대 그리스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지식인 모임은 아테네의 아스파시아(Aspasia)라는 여성이 운영한 모임이었다. 밀레투스의 아스파시아는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 시기 아테네의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의 연인이었는데, 아름다운 용모에 해박한 지식과 재치 있는 언변을 모두 갖춘[1] 재색겸비의 여인이었다. 이 아스파시아가 주최한 모임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당대의 저명한 인물들이 토론의 장을 펼쳤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이러한 문화는 로마시대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대화의 장이자 발표회장이었던 플라자(Plaza)와 포럼(Forum),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이 예술가들과 함께 아름다운 산문과 시, 음악을 향유하던 무젠호프(Musenhof)를 거쳐 프랑스에서 살롱(Salon)이 생겨나는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지식인과 예술인들의 모임들을 기반으로 해서 탄생한 살롱은 귀족 부인들이 일정한 날짜에 자기 집 객실을 문화계 명사들에게 개방, 식사를 제공하면서, 문학이나 도덕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과 작품 낭독 및 비평의 자리를 마련하던 풍습. 즉, 살롱은 중세 유럽의 궁정을 중심으로 하여 싹튼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본격적인 살롱은 역시 개성의 자유와 여성 지위의 향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르네상스기(期)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에서 17세기 초에 꽃피었다.‘대화의 정신’이 어느 국민보다도 투철한 프랑스의 국민성과 합치되었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의 피비린내나는 종교전쟁을 거쳐 거칠어진 귀족들의 기질을 우아한 여성들과의 사교로 누그러뜨리면서, 예절과 말씨를 세련시키고자 당대 프랑스의 왕이었던 앙리 4세가 궁정 안에 살롱을 개최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탈리아 출신인 랑부이에 후작부인(Madame de Rambouillet)이 열었던 프랑스 최초의 개인 살롱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을 비롯한 정치가들과 말레르브나 코르네유 등의 시인이 그 단골 손님이었다.
최초로 개인 살롱 문화를 시작하고 주도한 랑부이에 부인은 남다른 지성과 예술적 재능을 겸비했던 사람이었다고 알려져있다. 그녀는 1608년 18개의 큰 의자와 커다란 병풍을 비치해 놓고 손님들을 초대했다. 당시 뛰어난 예술가들이 그의 살롱에 모여 만찬을 들며 무용, 음악, 철학, 역사 등 주제를 가리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생각들을 내놓으며 열띤 토론의 장을 만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당시 획기적으로 발전되고 있던 과학도 살롱의 주제가 되었다. 이 시기 천문, 물리, 화학, 자연학, 의학 등이 살롱에서 다루어지면서 이러한 학문의 발전에도 살롱이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랑부이에(Rambouillet) 부인의 살롱에 이어 프랑스와 전 유럽에는 크고 작은 살롱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드니 디드로, 데이비드 흄 등 당대 가장 뛰어난 사상가, 문학가들을 포함한 유럽의 교양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롱에서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발표하고 의견을 교환했다. 또한 살롱의 주재자는 저술가나 출판업자들과 연결하여 희귀본 책자들을 구하여 살롱에 온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지적 수준을 높이고 계몽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2]
살롱은, 모랄리스트 문학의 보금자리가 되어 잠언 ·인물묘사(포르트레) 같은 독특한 문학 장르를 낳음으로써 명석함과 절도가 특징인 고전주의 문학의 형성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라로슈푸코의 《잠언》, 라퐁텐의 《우화시》는 그 직접적인 소산들이고, 레스의 《회상록》, 세비네 부인의 《서간집》, 라파예트 부인의 《콜레브공(公) 부인》 등도 살롱이 낳은 특이한 작품들이다.
또한 살롱에서는 각종 연극과 음악회, 전시회 등이 개최되었다. 살롱은 지식인들과 훌륭한 연주가와 작곡가 그리고 미술가들을 연결시키는 문화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예술가들을 후원함으로써 문예진흥에도 큰 역할을 담담했다. 이렇듯 살롱은 유럽의 정신을 상징하고 구체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생산적인 토론문화를 정착시키고 예술을 향유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현대 문화사와 지성사에 큰 역할을 한 문화 커뮤니티였다.
한편 살롱의 세련된 취미는 때로 그 도를 넘어서게 되어 이른바 프레시오지테(선멋)로 흘러 몰리에르의 《선멋 부리는 여자들》에서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18세기에는 랑베르 부인, 탕생 부인, 조프랭 부인, 에피네 부인 등의 살롱이 유명했으나,[3] 신흥계급인 부르주아층 부인들도 차차 살롱을 열기 시작했고 또 남성이 주최하는 살롱도 나타나게 되었다.
허나 19세기부터 살롱은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살롱문화가 수그러들고 계몽주의 시대가 지나면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후, 카페(Café)는 살롱의 뒤를 이은 하나의 문화 공동체로 유럽의 문화를 이끌어 갔다. 카페에서 수많은 시인, 화가, 철학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담론을 나누고 예술적 영감을 얻었으며 이것은 살롱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새로운 사교계 문화로 자리잡았다.
19세기 프랑스 사교계의 장이 된 카페는 개개인이 문화를 향유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온갖 소식과 정보가 모이고 고급담론의 중심지가 되다 보니, 이탈리아의 카페 ‘플로리아’에서는 이탈리아 최초의 신문 <가제타베네타>가 창립되기도 했다. 피카소와 아폴리네트 등 여러 화가와 시인들이 손을 잡고 카페 ‘폴로르’에서 문예지 <파리의 저녁>을 창간했으며, 앙드레 지드가 중심이 되어 출간한 <신프랑스 평론>도 이곳에서 창간했다.
이렇듯 근대 프랑스 사교계의 대표격인‘살롱(Salon)’과 ‘카페(Café)’는 훌륭한 인문학자들과 예술가, 과학자 등 영향력 있는 명사들이 함께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토론문화를 활성화시키며 문화 커뮤니티로써 유럽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현대 시대에서 카페는 매우 대중적인 사교공간으로 자리잡아 프랑스를 넘어서서 세계 각국에서 여러 사람들의 사교공간으로 쓰이고 있다만, 사전적 의미의 사교계에서 쓰이는 장소와는 어느 정도 부합하지 않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현대의 카페는 오는 손님이면 그냥 거의 조건 안 따지고 다 받기 때문인데, 현대에서도 통용되는 사교계에서 쓰이는 장소들은 그와 정반대로, 특정 조건을 가진 사람들만이 들어가서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
2.2. 영국 사교계
여성향 시대물이나 유럽 중근세 스타일의 판타지물에서 멋지게 잘 차려입은 높으신 분들( 왕족, 귀족 등등)의 자제들과 높으신 분들이 화려한 분위기 속에서 모여서 뭔가 있어보이는 연출을 하는 서브컬쳐 속 사교계 연출의 기원을 알아보고자 한다면 18세기 영국 상류사회 문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4]일단 18세기의 영국은 계층 간 결혼이 엄격하게 지켜지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18번째 생일을 맞은 명문 가문의 어린 숙녀들은 그들이 속한 상류사회에 자신을 소개하는 데뷔 무대를 가졌다. 당시 영국 왕실에서는 매년 4월부터[5] 6월 마지막 주까지 세인트 제임스 궁전을 개방했고, 이 기간에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나와 그들의 런던 하우스에 머무르며 사교 시즌을 맞았다.
사교 시즌에서 결혼 적령기[6]에 접어든 각 가문의 숙녀들은 세인트 제임스 궁전을 방문해 왕비를 알현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때 왕비에게 소개되는 젊은 여성을 가리켜 ‘첫선을 보이다’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 데뷔(debuter)’에서 유래한 ‘데뷔턴트(debutante)’[7]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이로 인해 사교계에 데뷔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무도회를 지칭하는 말로 ‘데뷔턴트 볼’이 쓰이게 됐다.
그러나 이 데뷔턴트 볼에 참여할 수 있는 여성의 조건은 상당히 빡빡했다. 집안의 수준은 물론이고 참가하는 당사자도 어느 정도 높은 수준을 갖춰야 했으며, 문제있는 행적의 보유자라면 아예 발을 들이밀지도 못한다. 게다가 온갖 빡빡한 언행과 복장 규정을 다 거쳐야했다. 물론 이건 남성들, 즉 사교계에 참여하는 신사들도 다를 바 없다. 결국 사교계에 참여할만한 수준을 지닌 높으신 집안의 자제들 중에서도 빡빡한 조건들을 통과한 이들만이 사교계 정식 데뷔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애초에 이 자리가 상류사회 자제들끼리 벌이는 맞선 장소였음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아무튼 좁은 문같은 조건들을 거쳐 왕비를 알현하는 의식을 할 수 있는 숙녀는, 데뷔탄트 볼을 통해 정식으로 데뷔한 숙녀라고 볼 수 있다. 이 때 대부분의 여성들은 어머니가 직접 소개했지만 불가피한 경우 지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또한 이 때 데뷔하는데 성공한 숙녀들, 즉 데뷔탄트들은 반드시 깃털을 몸에 걸쳐야 했는데, 대부분 타조 깃털의 부채나 머리 장식을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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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시작된 이 결혼 풍습은 남북 전쟁 이전인 1748년, 미국으로 전해져 미국 남부의 엘리트 계층 사이에서 성황을 이뤘고, 이후 19세기 말부터 화려한 무도회로 발전했다.
영국 사교계를 대표하는 요소들로는 다과회, 무도회, 만찬회, 연극 등이 있었고 사교계가 열리는 시즌이 또 있었으며 시기를 안 놓치는 것도 중요하다고 여겨졌다고 한다.
사교계가 열리는 사교 시즌의 경우 봄철인 3~4월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성황을 이루게 되고,[9] 런던의 열기가 견딜 수 없어질 정도가 되는 초여름철, 즉 6월에 종료되었다[10]. 이후 가을철인 9월~ 11월 후반부까지, 즉 여우사냥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사람들이 잠시간 런던으로 올라와 소규모 사교 시즌이 개최되기도 했다.
사교 시즌 기간의 런던에서는 다양한 여흥이 마련되었는데, 대표적으로 (가면)무도회, 군대 사열식, 극장( 오페라, 연극 등), 클럽 모임, 야외에서의 아침식사(Alfresco Breakfast) 등은 미혼의 신사와 숙녀가 만나 서로의 가치를 가늠하고 결혼 여부를 재는 중요한 이벤트였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공원에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기도 했는데, 이걸 결혼 적령기의 남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승마를 즐기는 청년들을 곁눈질하는 숙녀들, 그리고 그 숙녀들을 다그치는 보호자들(Patroness)의 모습을 이 시기의 공원에서 볼 수 있었다.
시즌 이외에는 각자의 영지(Estate) 또는 휴양도시(Brighton 등)에서 여름과 겨울을 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미혼의 자녀를 둔 어머니들에게 이 사교 시즌은 무척이나 중요한 시기였는데, 위에 언급된 데뷔턴트 볼에서 갓 데뷔한 딸들을 좋은 신사에게 소개해 청혼을 받도록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지상 최고의 목표였다. 애초에 영국 사교계는 높으신 분의 딸들의 선자리나 다름없기도 했기 때문. 때문에 나이가 찬 숙녀(Debutant)는 세 시즌 이내에[11] 청혼을 받아야 성공적이라 평가받았기 때문에, 어머니들은 숙녀들을 온갖 유흥 자리에 데리고 다니며 신사들 눈에 띄이게 하려고 애를 썼다.
영국 사교계의 무도회는 사교계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이었다.[12] 남녀가 손을 맞대고 공개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은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이자 여기에 참여하는 신사숙녀가 서로를 면밀히 파악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춤은 4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영국의 전통 댄스(England Country Dance), 코틸리옹(Cotillion), 쿼드릴(Quadrille), 그리고 왈츠(Waltz)이다.
영국의 컨트리 댄스는 남녀가 열을 이루어 마주보고 선 뒤, 윗부분(Top)에 해당하는 커플이 춤을 추고 맨 끝 열로 가기를 반복하면서 추는 춤이다. 코틸리옹은 8명이 기본이고, 사각형 대형을 이룬 채 추는 춤으로, 진형(Figures)과 변화(Changes)가 존재했기 때문에 다소 어려웠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쿼드릴은 코틸리옹과 인원과 기본 대형은 같았지만 5가지의 진형(Figure)이 있을 뿐 도중에 뭔가 바뀌지는 않았다.
왈츠는 1814년 차르 알렉산더가 알막(Almack's, 유명한 사교클럽)에서 선보인 이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갓 데뷔한 숙녀들(Debutant)들에게는 엄격히 제한되었는데, 이 춤이 상기한 3가지 춤보다 훨씬 음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남녀 단 둘이 손을 붙잡고 플로어를 누비는 모습은 영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갓 데뷔한 숙녀들은 클럽(사교 모임)에서 후원자이자 감시자 역할을 하는 귀족 부인들이 선택한 신사와만 왈츠를 출 수 있었다.
영국에서의 사교계의 장을 주로 관할하던 거대한 클럽이 몇 개 런던에 존재했는데, 이중 알막(Almack's)에 대해서만 간단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 클럽은 1763년도, William Macall이 설립한 것으로, 이 설립자는 자신의 성을 철자를 바꾸어 알막이란 클럽 명을 만들어냈다. 초기에는 도박장(Gambling Club)이었으나 1764년 성 제임스 스퀘어(St. James Square)에 커다란 건물을 올렸고, 이듬해 2월 20일 오만가지 연회와 도박이 개최되는 이 거대한 사교 클럽을 오픈했다. 초기에는 10기니를 주고 이 클럽에 드나들 수 있었는데, 이 금액으로는 12주간 주 1회 개최되는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설립자 사후 이 클럽은 그의 여조카 부부가 물려받았는데, 그들은 이 클럽의 문지기(Door Keeper)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명망 높은 귀부인들이 위원회를 조직하도록 했다. 이 엄격한 위원회는 심사를 통과한 이들에게만 티켓을 발부하는 것으로 클럽의 격을 더욱 높여주었는데, 이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한 이들은 역사상 2천여명을 넘은 적이 없다.
6~7명의 귀부인들이 상주하는 이 위원회는 주 1회 개최되었는데, 아무리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도 천박한 짓을 일삼거나 스캔들에 휘말렸을 경우 클럽 입장이 거절되기도 하는 등 엄격한 사회적 잣대로 클럽 회원들을 평가했다. 이 회의에서 입장이 가능했던 사람이라도 클럽에 늦게 도착한다거나, 격식에 맞지 않은 복장을 했을 경우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19세기 영국의 숙녀들의 경우 사교계 데뷔 후 세 시즌이 지나기 전까지 성혼에 실패하면 대부분은 미혼인 상태로 가족에게 얹혀 살았다. 부유한 상속녀의 동반자(Companion)가 되거나 가정교사, 유모가 되는 방법도 존재했다. 다만 가정교사는 조금 천대받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다수는 집에 얹혀서 노처녀로서 살아남았고, 가족들에게 받는 무시나 멸시도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고 한다. 이따금 그들을 가엾게 여긴 친척의 주선으로 기준에 못미치는 혼처에 시집을 가는 경우가 있었다.
20세기 초, 회원제로 운영되는 사교 클럽이 활기를 띠면서, 데뷔턴트 볼은 부유한 집안의 소녀를 상류사회에 소개하는 무대가 되었다. 이 시기를 풍미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울워스의 상속녀이자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여인이라 불린 바버라 허턴, 훗날 하워드 휴스와의 염문으로 유명해진 반더빌트 가문의 상속녀이자 패션 디자이너인 글로리아 반더빌트 등을 들 수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미네소타 대학교의 예술사 교수인 캐럴 앤 마를링(Karal Ann Marling)은 그녀의 저서 <데뷔턴트, 미국 상류층의 관습과 특권>에서 “20세기 동안 데뷔턴트 볼은 1930년대 상류층 소녀들의 갈라 행사에서 1960~ 1970년대 쇠퇴기를 거쳐 1980년대 자선사업으로 진화했다”고 기술한다. 호화로운 드레스와 주얼리, 1천만 원을 훌쩍 뛰어넘는 값비싼 참가비, 폐쇄적인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질타를 받으며 한때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데뷔턴트 볼은 최근 엘리트층의 인맥을 구축하는 새로운 활로이자, 상류층의 의무와 숙녀가 지녀야 할 예의범절을 배울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고 있다.
1958년 엘리자베스 2세에 의해 폐지된 영국 사교계의 데뷔턴트 볼은 결국 1980년대 들어 자선사업이 목적인 행사로 재탄생했고, 1968년 학생들이 주축이 된 5월 혁명에 의해 오랜 세월 중단되었던 프랑스 파리의 무도회 역시 1991년, 자선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르 볼(Le Bal)’을 설립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오늘날 미국 전역에서는 매년 11월부터 1월 사이에 데뷔턴트 볼이 시행되고 있으며, 레바논의 베이루트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도 젊은 숙녀들을 사교계에 소개하는 무도회가 열리고 있다.
2.3. 현대의 사교계
근대 시대에 이르러 자유ㆍ 평등ㆍ 정의가 전 세계에 널리 보급된 덕분에 사교계가 아예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오히려 과거에 비해 더 많아지고 있다. 다만 전근대 시대와는 달리, 신분이 매우 높은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게 아니고 재산이 매우 많은 사람들끼리 모이는 경우가 많아졌다.3. 창작물에서
높으신 분들이 모여서 화려한 분위기 속에서 모임을 진행한다는 점 때문인지, 상류사회를 묘사하는 작품에서라면 거의 안 빠지고 등장하는 필수요소, 클리셰 급이 되었다. 단, 대다수의 창작물에선 사교계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현실적 고증보단 그냥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 정의 정도만 참고하고 묘사하는 수준이기에 고증적 측면에선 기대 못할 작품들이 많긴 하다. 가령 사교계에서 신분이 낮거나 추문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제법 묘사되는데, 사실 현실 영국 귀족 사교계에서 이런 사람들은 입구컷이었다고 한다. 복장 하나만으로도 나머지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도 입구컷해버리는 게 그 당시 사교계였다.아무튼 이런 있어보이는 이미지에 더해, 로맨스적 요소도 곁들일 수 있고 주역 여캐를 어필하기에 있어서 좋아보이는 이미지 때문인지 여성향 작품에서 좀 더 묘사가 잦은 편. 사교계, 특히 영국 사교계의 세부적 요소들을 잘 따져보면 여성향물에서 쓰기 좋은 소재들이 많은데다가 (고증 무시하고 대충 클리셰대로 묘사한다 가정할 경우) 연출도 어렵지 않고, 여자의 로망을 충족시키기에 좋은 장소기도 하다.[13]
따라서 창작물에서 주로 묘사되는 사교계는 정확한 고증을 따져 만드는 시대물 작품들이 아닌 이상 창작은 창작으로 보는게 좋다. 애초에 장르 자체가 로맨스 '판타지'니까. 사실 창작물에서 고증이 명확히 묘사된 사교계를 잘 알아보고 싶다면 현대에 쓰여졌어도 고증적으로 수준높다고 평해지는 작품들이거나, 아니면 아예 그 당시 쓰여진, 당대 상류사회를 다루는 작품들을 찾아보는게 그나마 더 나을 것이다.
3.1. 사교계가 묘사되는 작품들
- 오만과 편견
- 다운튼 애비 - 시즌4 크리스마스 스페셜 에피소드(9편)에서 레이디 로즈의 사교계 데뷔 주 내용이다. 런던의 타운 하우스, 이어지는 파티, 군주 알현 등 꽤 자세한 묘사가 나온다.
- 가십걸 - 시즌 1 10화에서 세레나와 블레어의 데뷔탕트가, 시즌 3 9화에서 제니의 데뷔탕트가 묘사된다. 그 밖에 시즌 6에서 세이지가 데뷔한다.
- 브리저튼 이야기의 핵심축이 사교계 이야기이다.
- 서양을 배경으로 한 여성향 시대물과 로맨스 판타지 상당 작품들.[14]
- 은하영웅전설 - 문벌귀족들은 자기들만의 사교계가 있었으며 이 출입에도 급이 있어서 가령 클롭슈톡 사건이 벌어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저녁파티[15]는 군 장교도 입장이 가능했지만 장성급만 가능하고 그 이하는 불가능했다.[16] 다만 역사상의 사교계처럼 뭔가 쓸모있는 일은 없고 그냥 먹고 마시고 즐기는 파티인 듯하다. 애초에 전형적인 문벌귀족 캐릭터 치고 능력있는 캐릭터가 없다시피 하니...
[1]
페리클레스의 연설문 원고를 써 주었을 정도라고도 하고,
소크라테스가 아스파시아의 지성을 극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만 당시 아테네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몹시 열악하였기에, 아스파시아의 이러한 행보가 '
외국인 여자 주제에 건방지다'고 여겨져 공격도 많이 받았다. 특히 페리클레스의 정적들이, 페리클레스를 공격할 수단으로 아스파시아를 끌어내려 죽이거나 추방하려고 시도했었다고.
[2]
즉 프랑스 사교계였던 살롱은 당대 내로라하는 지식인 모임이지, 현재 한국에서 왜곡된 것처럼 불건전한
룸살롱 이런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화가 없었던
아시아에선 살롱을 저리 취급하진 않더라도 살롱을 갖다가 무슨 강연이나 토크쇼, 미용 관련 등으로도 오인하는데 그런 것도 아니다. 그리고 룸살롱의 기원이라 한다면 오히려 유흥업의 장이 된 카바레라고 할 수 있다. 카바레는 프랑스 - 일본 - 한국 순으로 전파되었는데 한국에서 이게 룸살롱이 된 것.
[3]
그래서 보통 초기 살롱을 연 것은 프랑스의 귀부인들(마담)들이었다. 프랑스 살롱문화의 중심에 있던 마담들 중 이름난 살롱을 주관했던 귀부인들은 '그랑 담(Grand Dame)'이라고 불렀다. 보통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귀족부인들이 살롱을 주관했는데, 살롱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철학이나 문학, 예술을 논하는 토론의 장소였고 젊은 학자들이 지배층과 사교를 통해 인맥을 형성하거나 사회적 계급이동을 할 수 있는 통로로서의 역할도 했다.
[4]
물론, 실제 사교계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이라던가는 현대 서브컬쳐 속 사교계 묘사에서 제대로 지켜지는 걸 찾는 게 오히려 더 힘들 정도로 고증이 엉망진창이다. 달리 말하자면 세간에서도 고증 터치를 크게 안 하고 넘어가는데 이건 사교계의 이미지만 잘 알려져있지 세부적인 에티켓 등은 결국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 궁금한 사람들은
이런 책 등
근대 유럽
사회 사교계를 다루는 전문 서적들을 찾아보자. 만화 내에서도
레이디 빅토리안 등 영국 사교계 고증이 훌륭하게 된 작품들도 찾아보면 있으니 참고할 것. 이 시기 써진 영국 쪽 문학들도 사교계 관련 용어들이 제법 나온다.
[5]
빠르면
1월도 된다고.
[6]
주로 18세쯤.
[7]
혹은 데뷔탄트.
[8]
해당 링크는 사교계에 참여 가능한 숙녀(데뷔턴트)의 일상에 대해 다룬다.
[9]
참고로 새해가 시작되는
1월엔 영국에서
의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지방(
시골)에 있던 귀족과 중상류층은 런던의 타운 하우스로 거처를 옮겼다.
[10]
즉, 실질적인 시즌은 1달이라고 볼 수 있다.
[11]
즉 사교계를 3번 정도만 거친다는 것.
[12]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 베넷과 피츠윌리엄 다아시의 톡톡 튀는 대화는 춤을 추는 도중에 이루어졌는데, 이 역시 당대 사교계의 무도회라는 요소를 다룬 부분이다.
[13]
사실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 하에서 수도 일변도로 구축된 프랑스 사교계나 부르주아 계층의 대두에도 20세기 초엽까지 시대착오적인 전제군주정이 지속된 제정러시아 사교계의 시스템을 적용해보는 게 나을 수도 있지만 역시 영미권 문화자본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된 영국 사교계의 이미지가 워낙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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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계 소재가 많이 채용되는 것과 별개로 사교계 고증이 잘되는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세간의 이미지만 끌어다놓은 경우가 대다수고 독자들도 별로 고증기대를 하는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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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딸 엘리자베타의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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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시 대장이던 라인하르트는 참석할 수 있었지만 영관급이던 키르히아이스는 밖에서 대기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