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17:53:31

비에른 안드레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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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a8319><colcolor=#fff> 비에른 안드레센
Björn Andrésen
파일:bjornandresen2018.jpg
본명 비요른 요한 안드레센
Björn Johan Andrésen
출생 1955년 1월 26일 ([age(1955-01-26)]세)
스톡홀름
국적
[[스웨덴|]][[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1]
가족 전 배우자 수잔나 로만[2](1985년 - 1997년)
장녀 로빈 안드레센(1984년생)
장남 엘빈 안드레센(1987-1987)[3]
이부여동생 안니케 안드레센(1955년생)[A]
손녀 니모(Nemo)(2008년생), 니케(Nike)(2014년생)
직업 배우, 음악교사, 뮤지션
데뷔 1970년 ' 스웨덴 러브 스토리'
활동 1970년 ~ 현재

1. 개요2. 생애3. 활동4. 출연 작품
4.1. 영화4.2. 다큐멘터리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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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출연했던 것을 후회하진 않아요. 하지만 누군가 "15살 때로 돌아갈래?"라고 물어본다면 "아뇨"라고 대답할 겁니다.
비에른 안드레센
스웨덴 배우이자 음악가.

2. 생애

파일:비에른 안드레센.gif
파일:1A4A2C10-EDA8-44E6-A88F-61B0690BA84A.jpg
그의 대표작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中
다큐멘터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The Most Beautiful Boy in the World)(2021)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기구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1955년 1월 스웨덴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친부에 대해 죽을 때까지 함구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5] 같은 해 12월에 이부 여동생인 안니케 안데르센이 태어나며, 마치 쌍둥이처럼 친구로 자랐다.[A] 외모는 어린 시절 사망한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그의 필름카메라에는 젊은 시절 어머니의 생전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목구비와 웃는 모습이 판박이 수준.

탐색 기자였던 어머니 바르보로 엘리사베트 안드레센은 자유로운 예술가적 성향이었으며, 실제로 미술 갤러리를 운영하거나 디올의 모델로도 일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아이들을 데리고 1년 동안 유럽 전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에른이 11살때 실종된 후 이듬해 숲에서 시체로 발견됐고, 정황상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에른은 그로부터 55년만인 2020년에 어머니의 유언장과 함께 사망 증명서를 확인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는 여동생과 조부모의 집에서 지내기 시작했는데, 집안 환경은 나름 유복했고, 본인이 낯을 많이 가리고 원했던 것이 아니었지만 잘생긴 손자를 유명인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할머니에 의해 아역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후술할 활동 때문에 영어, 프랑스어, 약간의 일본어 배운 적이 있다.

3. 활동

파일:IMG_6148.jpg
촬영장에서 루카노 비스콘티와 함께
데뷔[7]한지 얼마 안 된 1971년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베니스에서의 죽음)을 통해 처음 배우로 알려졌다. 당시 비스콘티는 영화에 출연할 가장 완벽한 미소년을 찾기 위해 몇 년 동안 동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캐스팅에 매진했는데, 비에른을 보자마자 주인공보다 나이가 많고 키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캐스팅한다. 당시의 오디션 영상을 보면 그전까진 자리에 앉아 참가자인 소년들을 바라만 보고 내보내던 비스콘티가 비에른이 오디션장으로 들어오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며 앞전 참가자들에겐 요구하지 않던 포징 같은 것을 이것저것 시킨다. 말끝마다 잘생겼다며 찬사를 보내는 건 덤. 이윽고 스태프들에게 ' 얘 사진 좀 찍어라! 어깨 나오게 얼굴 찍고 옆모습도 찍어놔'라고 지시하며 사실상 캐스팅 확정을 내렸다. 베니치아에서의 죽음은 예술성이 강한 예술영화여서 대중적으로 큰 흥행은 거두지 못했지만, 이 영화에 등장한 비에른의 이미지는 희대의 미소년으로서 전설이 되었다.

영화 단 한 편으로 이름을 알렸기에 서양에서 인기를 끌진 못했지만 유달리 일본에서 큰 인기가 있어서 일본을 2번 방문하며 음반을 내기도 하였다.[8] 일본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 오르페우스의 창 유리우스 폰 아렌스마이야[9]의 모델[10]이다. 특히 이케다 리요코 베르사유의 장미 오스칼의 모델이 그라는 사실을 밝혔다. 애초에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1971년작이고, 베르사유의 장미는 1972년작이라 영향이 아예 없을 수가 없다. 이케다 리요코는 1970년대 때 그를 처음 접했을 때 그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충격을 받았고 이후 그의 얼굴에 무언가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2010년대 초 때 한 미국 남성이 비에른에게 그가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의 모델이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는 농담으로 여겼으나, 2021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이케다 리요코와 만났을 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케다 리요코는 처음에는 긴장을 했지만 이후 그에게 친절하게 대해줬고, 그림 2장을 선물했다. 한글 번역

다케미야 케이코 바람과 나무의 시의 질베르 콕트의 모델이 되기도 했는데, 다케미야 케이코는 이케다 리요코와 함께 일본 소녀만화계의 방향성을 확립하였다고 일컬어지는 24년조(24年組)에 소속된 사람이다.

은하영웅전설이 실사화되면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역으로 가장 잘 어울릴 얼굴일 거라는 찬사까지 있을 정도. 베르세르크 그리피스도 머리색은 다르지만 그를 떠오르게 한다. 파타리로에서는 이름까지 그대로 쓰였다. 일본 순정만화 뿐만이 아닌 일본 매체의 미소년이란 개념에 영향을 줬다. 일본인들이 장발 꽃미남을 선호하는 데에는 이 사람도 본의 아니게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10대 중후반에 씌워진 환상적인 미소년이라는 이미지가 본인에겐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스트레스가 심해서 미성년자 착취라고 느꼈을 정도. 이외에도 베니스에서의 죽음 촬영 도중 루키노 비스콘티가 억지로 그를 게이바에 데려갔는데, 늙은 게이들에게 추파를 받아 상당히 불편해했다. 기사, 한글 기사. 아름다운 외모로 동성애자냐는 소문도 났으나, 본인이 확고하게 부정하였다. 굳이 따지자면 동성애자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 때문에 호모포비아에 가까운 쪽이다. 한 번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사회운동가이자 작가인 저메인 그리어(Germaine Greer)가 2003년 저서인 《아름다운 소년 The Beautiful Boy》에 그의 사진을 표지로 사용하는 바람에 크게 분개한 적도 있다. 그리어는 그 사진을 찍은(= 판권을 소유한) 사진사에게 허락을 받았다지만, 안드레센은 사진을 사용할 때는 거기 담긴 사람의 허락을 받는 것이 상식이 아니냐며 항의했다고. 어쨌든 비스콘티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좋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에 출연했을 때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또한 유독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할머니에게 언어도 문화도 완전히 다른 일본에서 활동하도록 종용받았다. 다만 일본 활동은 새로운 나라에서 방학숙제를 하는 느낌이라 즐거웠던 경험도 있었다고.

1976년 영화 촬영을 위해 프랑스 파리에 1년 동안 체류한 적이 있는데 집세는 그를 좋아하는 슈가대디들이 대신 내줬다.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음에도 선술했듯이 각종 문제에 시달려서 그런지 자국 스웨덴 지역 작품 위주로 활동해왔다. 나이가 든 이후에는 음악교사와 함께 배우 일을 한다. 1990년대 초 9년 동안 공백 기간이 있었지만, 스웨덴 TV 드라마 위주로 복귀했다. 나중에 영화 경계선으로 유명해진 알리 압바시의 2016년 영화 셸리에 출연했다. 2019년 영화 유전으로 유명한 감독 아리 애스터 미드소마에도 절벽에서 떨어지는 노인인 '단'이라는 이름의 등장인물 역으로 카메오 출연했는데 죽기 전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장면에서 보여준 열연이 상당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배우 일과 함께 음악교사가 되어 [11]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친다. 뮤지션 일도 하며 밴드 Sven Erics에 연주자로 소속되어 순회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2021년 스웨덴에서 제작되었다.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The Most Beautiful Boy in the World)'. 이 영화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되었으며 2022년에 대한민국에 개봉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작가인 이케다 리요코 특별 출연했다.

어린 시절 사진은 많이 찾아볼 수 있어도 나이 든 사진은 찾기 어렵다는 말도 있지만 그냥 조금만 검색하면 얼마든지 나온다. 옛날만큼의 미모는 아니지만 상당히 품위있게 나이가 들었다. 마치 윌렘 대포 빌 나이를 연상케 한다.

4. 출연 작품

4.1. 영화

<rowcolor=#fff> 연도 제목 배역 비고
1970 스웨덴 러브 스토리 파의 친구 데뷔작
1971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타지오
1977 Bluff Stop 스테판
1982 단순한 살인자 세 천사 중 한 명
2004 펠리컨맨 피아니스트
2016 셸리 레오 알리 압바시 감독의 영화
2019 미드소마 카메오

4.2. 다큐멘터리

<rowcolor=#fff> 연도 방송명 비고
2016 The Hotel
202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

5. 여담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출연 이후 미모로 현재까지 회자될만큼 미소년계에서 전설이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아름다움과 데뷔하기 전부터 불우했던 유년기로 인해[12] 삶이 불행했던 스타로 꼽힌다. 영화 미드소마에서 자신의 얼굴이 망가지는 역을 맡은 것도 그렇고 다큐멘터리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에서의 고백을 보면 안드레센이 어린 시절 연예게에서 아역배우로서 겪었던 고통과 혼란을 알 수 있다. 이 문서 최상단에 적혀있듯이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출연한 걸 후회하진 않지만 누군가 15살 때로 돌아갈 거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겠다고 할 정도로 스스로도 자괴감이 컸던 모양. 그나마 공적으로나 사생활적으로 어떤 물의도 일으키지 않고 원래 좋아하던 음악을 하면서 노년이 된 현재에는 손녀도 보고 약간이지만 다시금 안정을 찾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
  • 한국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기네스북 꽃미남으로 올라있다는 문구가 널려 있는데, 공식적인 인물정보 등에는 이런 자료가 전혀 없다. 외국 사이트에도 이런 언급이 없는 걸 보면 기네스북 얘기는 사실무근일 가능성이 높다. 기네스북은 정량적으로 순위를 매길 수 있는 것만 기록한다. 세계 3대 미남으로 선정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해외에서 그 정도로 인지도가 높지 않은 배우이므로[13] 사실무근이다. 이 모든 루머 2000년대 중반부터 돌다가 2010년대 초반 네이트판에서부터 널리 퍼지게 되었다. 네이트판의 한 유저가 '세계 3대 미남' 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을 올렸고 안드레센을 설명하는 단락에서 세계 최고의 꽃미남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고 거짓 서술한 것이 인터넷상에 퍼지면서 사실인냥 받아들여진 것이다. 커뮤니티에서 그럴듯하게 쓰여진 낚시성 게시글이 사실인 것처럼 인터넷상으로 널리 퍼진 케이스인 것이다. 하지만 안드레센이 잘생겨서 아무도 의심을 안한다.


[1] 만15세에 잰 키라 지금은 조금 더 클 수도 있다. [2] 그의 데뷔작 스웨덴 러브 스토리에서 공동 주연을 맡은 사람이다. [3] 생후 8개월때 영아돌연사증후군으로 사망했으며, 아들이 영아돌연사가 아닌 애정결핍으로 사망한 것이라는 자책감에 괴로워하다 결국 아내와는 별거 이혼했다. 2019년 인터뷰에서는 죽은 후에 아들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후 새 여자랑 살고 있는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에서 여친으로 추정되는 동거인이 등장했다. [A] 같은 해 12월 생으로, 비에른과는 아버지가 다른 이부남매다. 어머니가 비에른을 출산한 후 곧바로 임신해 태어났기 때문에 사실상 쌍둥이처럼 자랐다고. 실제로 덴마크에서는 이를 '반쪽 쌍둥이'라고 부른다. [5] 친정가족과 어머니의 친구들조차 몰랐으며, 비에른의 필름카메라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친부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을 가진 금발 머리 남성으로 추측될 뿐이다. [A] [7] 데뷔작은 훗날 스웨덴 영화계의 거장으로 성장하는 로이 앤더슨의 스웨덴 러브 스토리 주인공 친구 역이었다. [8] 미소년/소녀를 선호하는 일본의 취향 덕분에 그 인기에 힘입어 일본에서 음반을 낸 외국 배우들이 꽤 있다. 한 예로 에드워드 펄롱도 일본에서 광고를 찍거나 앨범을 발매한 적 있다. [9] 출처 [10] 디어 브라더의 아사카 레이는 이케다 리요코의 전작 베르사이유의 장미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을 모티브로 했기 때문에 비에른 안데르센의 영향은 간접적으로 받았다. [11] 본인도 연기보다는 음악에 좀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12] 아버지가 누군지 평생 정체도 몰랐고 어머니는 11살 때 자살이 유력한 죽음을 맞았으며 어머니의 사후 양육을 맡은 외할머니는 잘생긴 손자를 스타로 만들 욕심에 눈이 멀어 연예계에 혹사시킨 인물이었다. 성인이 되어 결혼한 이후에도 어린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전처와 이혼하는 등, 굴곡이 많았다. [13] 비에른의 해외 인지도 대다수는 베니스에서의 죽음으로 비롯된다. 연기력은 괜찮은 편이지만, 루키노 비스콘티와의 3년 계약으로 전성기때 크게 해외 활동을 하지 못했고 노년에 조단역으로 출연한 영화들이 유명세를 타면서 알려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