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00:15:20

블라디 디박

블라디 디바치에서 넘어옴
블라디 디박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파일:오륜기(여백X).svg
1988 1996

파일:FIBA 농구 월드컵 로고.svg
1986[1] 1990 2002

파일:FIBA_EUROPE.png
1987 1989[2] 1991 1995 1999

베스트팀
파일:NBA 로고.svg

FIBA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archive.fiba.com/2626_0.jpg
블라디 디박
헌액 연도 2010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명예의 전당 블라디 디박.jpg
블라디 디박
헌액 연도 2019년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5a2b81> 파일:새크라멘토 킹스 로고.svg 새크라멘토 킹스
영구결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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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rowcolor=#ccac00> No. 1 No. 2 No. 4 No. 6 No. 11
<rowcolor=#ffffff> 네이트 아치발드
(Nate Archibald)
미치 리치몬드
(Mitchi Richmond)
크리스 웨버
(Chris Webber)

(Sixth Man)
밥 데이비스
(Bob Davies)
<rowcolor=#ccac00> No. 12 No. 14 No. 16 No. 21 No.27
<rowcolor=#ffffff> 모리스 스톡스
(Maurice Stokes)
오스카 로버트슨
(Oscar Robertson)
페자 스토야코비치
(Peja Stojaković)
블라디 디박
(Vlade Divac)
잭 트와이먼
(Jack Twyman)
<rowcolor=#ccac00> No. 44
<rowcolor=#ffffff> 샘 레이시
(Sam Lacey)
}}}}}}}}}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등번호 12번
로니 레스터
(1984~1986)
블라디 디박
(1989~1996)
제롬 커시
(1996~1997)
자네로 파고
(2002~2004)
블라디 디박
(2004~2005)
섀넌 브라운
(2009~2011)
샬럿 호네츠 등번호 12번
케니 앤더슨
(1996)
블라디 디박
(1996~1998)
코리 알렉산더
(2005)
새크라멘토 킹스 등번호 21번
트레버 윌슨
(1993~1995)
블라디 디박
(1999~2004)
영구 결번
}}} ||
파일:블라디디박.jpg
새크라멘토 킹스 No. 21
블라데 디바츠
Владе Дивац | Vlade Divac
<colbgcolor=#5a2b81> 출생 1968년 2월 3일 ([age(1968-02-03)]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국기.svg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SFR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유고슬라비아 SFR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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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유고슬라비아 SFR
]] 세르비아 SR 베오그라드
국적
[[세르비아|
파일:세르비아 국기.svg
세르비아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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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216cm (7' 1") | 120kg (265 lbs)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1989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6순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지명
소속팀 앨란 플리포레 (1980~1982)
슬로가 크랄레보 (1982~1986)
KK 파르티잔 (1986~1989)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89~1996)
샬럿 호네츠 (1996~1998)
츠르베나 즈베즈다 (1998)
새크라멘토 킹스 (1998~2004)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2004~2005)
등번호 12번 - 레이커스 / 샬럿
21번 - 새크라멘토

1. 개요2. 선수 시절3. 은퇴 후4. 수상 내역5. 플레이 스타일6. 국가 대표7. 기타

[clearfix]

1. 개요

세르비아의 농구인. 2010년에 FIBA 명예의 전당, 2019년에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도 각각 헌액됐다.

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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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블라디와 매직 존슨의 대화.jpg
1989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6순위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지명받으며 미국 대학교에서 한 번도 뛴 적이 없는 유럽 출신 선수로서는 드라젠 페트로비치에 이어 2명째가 되었다. 당시에는 전혀 영어를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카림 압둘자바 매직 존슨의 지도를 받으며 향상된 플레이와 몇가지 새로운 비결 방법으로 아메리칸 스타일 농구에 적응하게 되었고, 영어에 서툴렀던 그가 곧바로 팀에 융화된 재능을 발휘한 덕분에 NBA All-Rookie First Team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압둘자바의 은퇴 후 그 뒤를 잇게 되지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방출당하고 대체자로 샤킬 오닐이 영입되는데 즉 카림 압둘자바의 은퇴와 샤킬 오닐이 영입되는 그 7년의 기간동안 LA 레이커스는 사실상 센터의 암흑기였다.

파일:블라디 샬럿 호네츠 시절.jpg
아무튼 7시즌 동안 뛴 레이커스를 떠난 후, 1996-97시즌부터 코비 브라이언트와 트레이드 형식으로 샬럿 호네츠로 이적하며 두 시즌을 보냈다. 1998년에는 NBA의 파업으로 잠시 세르비아에 귀국해 츠르베나 즈베즈다(레드스타스)에서 2경기에 출전했다.

파일:external/images.complex.com/afrozbur23mle5ayd0lj.jpg
1998-99시즌에는 FA 계약으로 새크라멘토 킹스로 이적해 같은 세르비아 출신의 페자 스토야코비치와 터키 출신의 히도 터콜루, 또 디박과 같은 해에 이적한 크리스 웨버와 2001-02시즌에 킹스로 이적한 마이크 비비까지 합류하며 침체되었던 팀의 인기가 다시 급상승해졌다. 그러나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친정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이끌었으나 결승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파일:external/images.express.co.uk/83388.jpg
2004-05시즌을 앞두고 킹스와의 계약 연장 제안을 거절하고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복귀했는데 샤킬 오닐이 마이애미 히트로, 데릭 피셔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게리 페이튼이 보스턴 셀틱스로, 칼 말론이 은퇴함에 따라 대부분 선수의 공백을 메우는데 필요하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시즌 중반에 심한 등 부상으로 고작 15경기 밖에 뛰지 못했고 결국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3. 은퇴 후

파일:external/www.divac.com/divacpr_sacramento_website_20150305_165304.jpg
새크라멘토 시절인 2000년에 후배 프레드락 다닐로비치와 함께 옛 소속팀 파르티잔을 인수해서 사장이 됐으나, 자신이 선수 생활에 너무 집중한 탓에 다닐로비치에게 실질적인 운영을 맡겼다.

2005년 은퇴 후 레이커스에서 1년동안 스카우트를 맡았다가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 발론세스토의 단장을 맡은 후, 2008년 세르비아 정부의 스포츠 자문관을 거쳐 2009년부터 8년 간 세르비아 올림픽 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다.

2015년 3월부터 새크라멘토 킹스의 운영부사장으로 추대된 후 8월부터 단장이 됐으나, 팀이 14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면서 단장직을 사임했다. 특히 황금 드래프트라고 평가받는 2018 NBA 드래프트에서 차세대 리그를 이끌어나갈 슈퍼스타인 루카 돈치치를 만류하고 버스트라고 평가받는 마빈 베글리 3세를 뽑아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구단주는 돈치치 픽을 원했으나 당시 팀 내 주전포인트가드였던 디애런 팍스와의 공존문제를 들먹이며 마빈 베글리 3세를 선택한 참사를 가져왔다. 말 그대로 안목이 흔히 말하는 머문가들보다 안좋다는 평가를 받을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 뒤로 킹스는 여전히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돈치치를 데려간 댈러스는 연달아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고 매시즌 돈치치 한명만으로도 우승컨텐터 팀으로 평가받기 시작하였다. #

4. 수상 내역

수상 내역
NBA 올스타 (2001)
J. Walter Kennedy Citizenship Award (2000)
FIBA's 50 Greatest Players (1991)
NBA 올 루키 퍼스트팀 (1990)
Mister Europa Player of the Year (1989)
유로바스켓 금메달 3개 (1989, 1991, 1995)
유로바스켓 동메달 2개
파일:FIBA-Logo.png 1986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스페인 동메달
파일:FIBA-Logo.png 1990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아르헨티나 금메달
파일:FIBA-Logo.png 2002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미국 금메달
파일:오륜기(여백X).svg 1988 서울 올림픽 은메달
파일:오륜기(여백X).svg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5. 플레이 스타일

현역 시절 하킴 올라주원, 샤킬 오닐, 데이비드 로빈슨, 패트릭 유잉 4대 센터를 비롯해 알론조 모닝, 디켐베 무톰보, 브래드 도허티 같은 특급 센터들이 득실득실해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았지만, 센터로써 충분한 경쟁력을 보였던 선수이다.

신장 216cm와 몸무게 120kg의 체격을 살린 힘, 거기에다 능숙한 포스트 플레이와 함께 팀 동료에게 공을 패스하는 센스도 뛰어났던 선수. 보드 장악력 또한 준수해서 90년대 센터들의 전성기에 세 차례 시즌 더블-더블을 기록하기도 했었다.

아비다스 사보니스와 함께 동유럽을 대표하는 센터였으며 유러피언 빅맨 답게 부드러운 움직임과 뛰어난 패싱 센스가 돋보였다. 밀레니엄 킹스 시절에는 NBA 매니아의 일부 유저들이 그를 두고 포인트 센터[3]라고 부르기도 할 정도로 시야가 좋고 센터답지 않은 패스를 보여줬다. 또한 드리블 실력 역시 센터치고 매우 뛰어나서 간혹 볼운반을 맡기도 하는 등 동시대 센터들과는 이질적인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위에 언급한 포스트업, 패스, 드리블 외에도 골밑 수비, 리바운드 등 농구에 필요한 기술들이 전체적으로 탄탄했던, 농구를 알고 하는 기술자형 선수.

이 선수의 불운을 보여주는 이력이 바로 만 33세이던 01시즌에 첫 올스타가 됐다는 점이다. 전성기 끝물에 올스타에 뽑힐 정도로 기량이 출중했지만, 정작 전성기 때는 위의 괴물들 때문에 좌절되었다. 사실 당시엔 레전드 센터인 패트릭 유잉이 MVP 투표에서 5위에 들고도 서드팀에도 꼽히지 못한 시즌이 있을 정도로 센터포지션의 스타 뎁스는 공포 그 자체였다. 만약 디박이 센터 뎁스가 떨어지는 2000년대~2010년대 중후반에 활약했다면 수상 기록이나 올스타 선정 횟수가 꽤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뎁스를 떠나 수상이나 올스타 경쟁에서는 경쟁력이 비교적 약한 축에 들어가는 선수이기도 했다. 시즌 커리어하이 득점이 16점에 그치며 그 외엔 평균 15득점을 넘긴 시즌이 없고[4] 준수한 포스트업에 나름 중거리 슛도 가졌지만 적극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득점에서 높은 볼륨을 보장해주는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리바운드 두자릿수를 기록한 시즌도 3시즌 뿐이라 사이즈 대비 좋다고 보긴 어려웠다. 당대 센터들 중 최상급으로 분류되던 패싱스킬 역시 어시스트 수치로 잘 드러나지는 않았는데, 이는 득점 기회를 찔러주는 A패서라기 보단 팀 오펜스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윤활유같은 플레이에 능한 타입이었기 때문. 이렇듯 탄탄한 기본기와 BQ로 득점, 패스, 리바운드, 수비 등 농구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준수하게 잘 해내는 선수였지만 그렇다고 어느 것 하나가 아주 특출나진 않았고[5], 전체적인 스탯볼륨도 비교적 평이한 편이었다.

물론 당시 리그에 우글거리던 엘리트 센터 중에는 약한 편에 들어갔지만, 하나 감안해야할 것은 디박은 아비다스 사보니스와 더불어 그 위력이 스탯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선수였단 점이다. 사보니스도 마찬가지로 의외로 스탯이 괴물같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고, 사보니스가 " 데이비드 로빈슨에게 판정승을 거뒀다"는 평가를 받는 1988 서울 올림픽 당시에도 스탯이 13점 13리바운드에 불과했다. 두 선수 모두 센스가 좋아서 수비력이 좋았지만 NBA시절 기준으로 블럭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고, 시야가 넓고 패스센스가 뛰어나서 팀오펜스에 활력을 불어넣었지만 의외로 어시스트 수치가 아주 높진 않았다. 물론 둘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사보니스의 전성기는 NBA 입성 전이었고 전성기의 그는 당연히 디박을 상회하는 선수였다. 그러나 사보니스가 느려지고 기량이 저하되어 NBA에서 뛸 당시에도 출장시간의 한계로 올스타는 되지 못했지만, 코트에서 뛰는 시간만큼은 확실히 올스타급 기량이었다. 실제로 디박이 약간 더 좋긴 하지만 NBA에서 둘의 스탯라인은 상당히 유사하게 뽑혀나오는 편이다.

포인트는 그가 볼륨스코어러나 강력한 리바운더는 아니었을지언정, 코트 위에서 올스타급 공헌도를 할 수 있는 선수였으며 당대에도 그 기량을 충분히 인정받는 선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전성기는 16점 10.4리바운드 2.2블럭 4.1어시스트로 커리어하이를 보낸 1994-95 시즌으로, 리빌딩 레이커스가 새로운 쇼타임으로 부활한 시점이었다. 이때 부활한 팀성적 덕으로 세드릭 세발로스만이 올스타에 선정되었는데(커리어 유일한 선정), 사실 이때 둘의 성적으로 보면 디박이 모자랄 것이 없다. 득점은 세발로스가 크게 앞서지만 리바운드, 어시스트, 수비 등 다른 부분에서 모두 디박이 앞서고, 둘은 경력이나 나이 면에서 비슷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1994-95 시즌~1995-96 시즌은 1990년대 중에서도 센터뎁쓰가 비정상적으로 두꺼운 시절이었다. 2시즌 연속으로 MVP 상위 5명 중 4명이 센터였을 정도[6] 사실 그래서 2000-01시즌에는 전성기가 지났는데도 반대로 얕아진 센터뎁스와 좋은 팀성적 덕분에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정리하자면 디박은 4대센터처럼 매년 당연하게 올스타에 뽑힐만한 레벨의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성기가 다 지나서 센터기근 틈타서 딱 한번 올스타에 뽑힐 만큼 애매한 선수도 아니었다. 디박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선 인기가 없었지만 감독추천으로 올스타 게임에 기웃거릴만한 선수였고, 감독들은 대부분 그가 얼마나 뛰어난 선수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미친 센터뎁쓰만 아니었다면 레이커스가 부활한 1994-95 시즌~1995-96 시즌 정도는 확실히, 상황에 따라 그 이상도 노려볼만한 선수였다. 실제로 4회 올스타인 빌 레임비어와 디박은 각기 시대에서 위상이 비슷했으며[7], 디박의 커리어는 대충 커리어 3~5회 정도 선정된 올스타들과 비슷하다.

특기할 점은 덩치가 대단히 크고 힘이 센 선수임에도 헐리웃 액션의 최고봉이라는 점이다.[8] 보통 이런 헐리웃 액션을 자주하는 선수들은 언더사이즈인데 디박은 샤킬 오닐이나 사보니스 정도를 제외하면 피지컬적으로 크게 밀리는 선수가 없었음에도 헐리웃을 매우 즐겼다. 이 때문에 오닐은 디박의 플레이스타일을 매우 싫어했고, 킹스와의 경기 이후 인터뷰에서 욕을 했다가 벌금을 물었다.

우연일 수 있지만 디박이 거쳐간 팀들은 (말년에 거의 못 뛴 레이커스를 빼면) 디박이 합류하고 팀이 본 궤도에 올랐다가 그가 떠나면 흔들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처음으로 레이커스를 떠나 샬럿으로 이적했을 당시 샬럿 호네츠는 이전 시즌(1995-96시즌) 에이스 알론조 모닝이 떠나고 새 에이스 글렌 라이스가 들어오면서 41승으로 플레이오프 실패했으나, 디박이 처음 합류한 1996-97 시즌엔 오프시즌에 원투펀치였던 래리 존슨을 잃은 상태로 맞이한 시즌임에도 54승이나 가뒀다. 1997-98 시즌에도 51승(승률 .622)를 했으나, 그가 떠난 1999 시즌엔 플레이오프 탈락한다.[9]

킹스에서는 새로운 에이스 크리스 웨버와 동시에 합류해 전 시즌까지 바닥권(승률 .329)이던 팀을 승률 54%[10]로 올렸다. 그러나 2004 오프시즌에 디박이 떠난 이후 킹스는 우승후보권에서 내려오며 같은 시즌 내에 웨버가 이적, 다음 시즌에 페자 스토야코비치까지 떠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디박은 기량도 기량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는 라커룸 리더로서 역할이 컸다. 디박은 유럽 출신으로서 가장 먼저 NBA에서 성공을 거둔 선수 중 하나였으며[11], 그 외 선수들에게도 베테랑으로서 신뢰가 두터웠다.[12] 오히려 팀 주장이었던 웨버는 그동안 사고를 많이 쳐서 신뢰를 잃은 것도 있고, 페자를 공개적으로 디스하기도 했다. 특히 킹스에서 디박의 역할은 더욱 컸는데, 2003-04 시즌에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낸 페자는 그가 떠나고 어시스트를 제외한 전부문에서 기록이 하락하며 흔들렸고, 그와 웨버 사이의 갈등이 계속 이어지다 결국 웨버의 이적, 본인의 이적으로 이어졌다.[13]

6. 국가 대표

1988 서울 올림픽을 통해 서울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주전 센터였으며 드라젠 페트로비치, 토니 쿠코치가 팀 동료였다. 결승전에 올라온 아비다스 사보니스가 주축이 된 소련 대표팀과의 대결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끝내 팀이 패하여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파일:URSS - Yugoslavia. Final Juegos Olímpicos Seúl 1988.mp4_20170808_003008.021.jpg
소련 대표팀과의 결승전에서 바스켓 카운트로 추가 자유투를 얻어낸 후의 모습. 이때 나이가 21살이었다.41살 아니다

7. 기타

이름을 발음하는 방법이 블라디 디박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상단 이름 소개에 써있는 것처럼 유고슬라비아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블라데 디바치가 원래는 정확한 발음이다.[14] 하지만 디박이 처음 NBA에 왔을때만 해도 그런 식의 배려는 미국에 전혀없었고 원어 발음으로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하지만 디박의 활약 이후 동유럽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여기저기서 디박 혹은 디바치라고 부르니까 본인이 오랫동안 익숙해진 디박이 좋다고 생각하여 디박으로 통일 해달라고 하였음으로 사실 지금은 디박이 맞다.

다만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블라디 디박이라고 불러달라고 하였음에도 다른 유럽계 선수들의 이름 발음에 대해 영향을 많이 끼쳤다.[15] 디박의 이름에 대한 발음을 계기로 이후 NBA 등장한 토니 쿠코치, 페자 스토야코비치, 디르크 노비츠키와 같은 선수들의 이름이 정확하게 발음되는 계기가 되었다.[16] 순간이나마 영어식으로 이름이 읽힌 적은 있어도 이 선수들을 현재 발음할때는 전부 본토의 발음에 가깝게 발음해준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면 2010년대까지도 축구 선수들의 경우 영어식으로 그냥 싹다 읽어버리기 때문이다.[17]


1990년에 레이커스의 팀 동료였던 A.C. 그린, 마이클 톰슨과 함께 면도기 회사 쉬크의 광고에 출연했다.

파일:external/file.dailian.co.kr/news1252111031_169928_1_m.jpg
2009년에는 NBA 아시아챌린지 2009의 일원으로서 1988 서울 올림픽 이후 두번째로 한국에 방한했다. 옆은 로버트 오리.


친정팀 레이커스로 돌아온 디박이 무려 90,000달러의 자선금을 건 도전 과제에서 아주 긴 하프 샷을 넣어 결국 받게 되었다.

위의 사진에도 볼 수 있듯이 무려 10대 시절부터 덥수룩한 수염을 고수한지라 엄청난 노안이었다. 이 때문에 샬럿으로 트레이드될 때 그가 노장인 줄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때 그는 20대 후반으로 전성기였다.

유럽 출신 NBA 선수들 중에 1세대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고[18] 인품도 뛰어난지라 같은 팀의 유럽 출신 선수들에게 좋은 멘토 역할을 했다. 특히 같은 세르비아 출신인 페자 스토야코비치에겐 경기 중 세르비아 말로 크게 응원하는 등 든든한 버팀목이 됐는데, 이 때문에 디박이 2004년에 레이커스로 이적하자 스토야코비치가 크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19]

그가 한창 NBA에서 뛰고 있었을 때는 자신의 조국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기에 마음고생이 심했다.[20] 1990년 세계선수권 우승 당시 크로아티아 국기를 펼치고 난입한 관중을 보자 화를 내며 국기를 뺐으면서 논란의 중심이 되었고[21] 이로 인해 친한 국대선수이며 같이 NBA에서 뛰고 있던 크로아티아 출신의 드라젠 페트로비치와는 절교상태까지 가기도 했다. 간신히 마음을 열어놓을 즈음 페트로비치가 갑자기 별세하면서 결국 그 둘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다.

오랜 후 비운의 천재인 페트로비치와 그가 있었던 유고슬라비아 농구 대표팀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ESPNOnce Brother에서 나레이션을 맡으며, 그와 페트로비치의 농구인생에 대해 설명했다. 여기엔 또한 크로아티아 국기를 뺐던 사건에 대한 자기변호도 있었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자마자 결국 다시 논란의 중심이 되었고, 페트로비치와 같은 크로아티아 국대동료였던 스토이코 브란코비치는 디박을 맹비난하기도 했다.

정확한 상황을 설명하면 잘 알려져있다시피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를 포함해 남슬라브인들로 이뤄진 국가들의 연합이었으나, 1980년대 차관 상환 문제와 극심한 실업률 상승으로 인한 경제 위기 이후 각 민족간의 갈등 때문에 분열이 일어나고 있어 그 갈등이 절정에 이른 게 1990년 당시였다. 이로부터 1년 뒤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정리하면 갈등은 극심했으나 아직 전쟁까지는 이르지 않은 상황에서 유고슬라비아 승리 이후 한 관중이 크로아티아 깃발을 들고 난입했고, 디박이 이 깃발을 뺏은 것까지는 확실한 팩트다. 그러나 디테일은 확실하지 않은데 디박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이 먼저 "이 승리는 (크로아티아만의 것이 아닌) 유고슬라비아의 승리이니 그 깃발을 흔들면 안 된다"고 말했고, 이에 이 남성이 유고슬라비아 국기를 모욕하자 그때 깃발을 뺐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위에 각주로 언급된 페트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는데, 페트라의 친부모가 사망한 것은 1990년 세계선수권 대회 이후에 일어난 유고 전쟁 당시 일이었고, 범인은 코소보 해방군이었다.

즉, 당시 디박은 따로 크로아티아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으며, 그랬다면 상식적으로 크로아티아인인 페트로비치과 베프일 리가 없다. 또한 연합국가로서 승리를 거뒀는데 그 중 하나 국가의 깃발을 흔들며 코트에 난입한 남성의 행동도 잘못임은 명백하다.[22] 이 당시 디박의 행동이 논란의 여지가 있음은 분명하고, 크로아티아 국기를 뺏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인들로서는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여러 복잡한 배경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영화 스페이스 잼에도 비중은 적지만 주요 등장인물들인 NBA 선수들이 외계인들에게 실력을 뺏긴 후 '라커룸 입장을 거부하는 LA 레이커스 선수들 중 하나'로 등장한다. 선수들 중에선 대사도 많은 편인데 라커룸에 들어가라는 델 해리스 감독의 말에 "절대 안 돼요 감독님. 라커룸엔 못 들어가요"라고 한 다음, 팀동료 세드릭 세발로스가 "바클리랑 유잉한테 일어난 거 보셨잖아요. 무슨 병균같은게 있는게 틀림없어요"라고 한다. 해리스가 "그건 3천 마일 떨어진 뉴욕에서 생긴 일이야."라고 하자 앤서니 밀러는 "그런 박테리아는 광속보다 빨리 움직인다고요"라고 하자 디박이 "맞아요. 바디 스내처의 침공(Invasion of Body Snatchers) 같은 거일 수 있다고요"라고 한다.[23]

토니 쿠코치는 니콜라 요키치가 수치상으로는 월등할지 몰라도 같은 센터 선배들인 블라디 디박이나 디노 라쟈(Dino Radja)보다는 못 미친다고 평했다.


[1] FIBA 세계선수권 MVP 선정 [2] 유로바스켓 MVP [3] 이런 유형의 선수를 컨트롤타워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정식명칭은 아니다. [4] 커리어 평균으로는 12점 가량에 그칠 정도로 득점력은 별볼 일 없었다. [5] 물론 시야와 패싱 스킬만큼은 4대 센터 이상이었다. [6] 실제로 당시 서부에선 하킴 올라주원이 주전, 데이비드 로빈슨 디켐베 무톰보가 백업으로 나왔는데 제독과 하킴은 MVP 투표 각각 1위와 5위였으며, 무톰보는 DPOY였다. 이 정도면 억울함을 토로할 수도 없는 라인업. 1995-96 시즌에도 저들 셋이 그대로 나왔다. 1996-97년에는 디박이 동부로 왔더니 무톰보가 같이 동부로 와서(...) 또 밀렸다. [7] 물론 레임비어는 볼륨스탯이 더 좋고 디박이 더 다방면에서 공헌한다는 차이가 있다. [8] 디박의 커리어 초창기에는 몸이 상당히 호리호리하고 파워가 그리 강하지 않은 편에 속했다. 이 때문에 디박은 힘과 체격을 내세우는 파워플레이어보다는 테크니션으로 성장했고, 이후 체중이 늘면서 NBA기준으로도 육중한 체구를 갖게 된 이후에도 체격이나 힘을 앞세우는 플레이스타일은 아니었다. 사실 NBA에선 각 포지션에서 요구하는 기본적인 체격을 갖춘 선수들 사이에서는 누가 힘이 더 세냐보다 누가 힘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를 두고 플레이스타일이 갈린다.(샤킬 오닐처럼 논외급으로 체격이 큰 경우는 당연히 예외) 일례로 패트릭 유잉은 전성기에도 260파운드를 넘기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큰 체격이 아니었지만 전성기 때 가장 강력한 파워센터 중 하나였으며, 290파운드가 넘던 룩 롱리를 로우포스트에서 압도했다. 시카고 시절 100kg을 넘지 못한 마이클 조던이 당대 가드들 중 가장 강력한 포스트업 실력을 자랑한 것도 마찬가지. [9] 물론 이건 디박 뿐 아니라 에이스 글렌 라이스가 이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0] 승률로 하는 이유는 단축시즌이었기 때문에 승률은 올랐으나 승수 자체는 똑같아 혼동할 수 있기 때문. 정확히 말하면 27승 55패에서 한 시즌만에 27승 23패가 되었다. [11] 2020년대인 현재는 유럽과 NBA의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고, 특히 2019년부터 2024년까지 6번 중 5번이나 MVP가 유럽선수에게 가고, 파이널 MVP도 2021년부터 2024년까지 4번 중 2번이나 유럽선수에게 가고, 신인왕도 2019년부터 2024년까지 6번 중 2번이나 유럽선수에게 갔다. 국제무대에서도 미국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려면 전력을 다해야 하는 수준이 되었는데, 디박이 NBA진출을 시도하던 당시 미국과 세계간의 농구 수준 격차는 엄청났다. 92년 드림팀 출범 이전까지 미국은 대학선수들만 올림픽에 보냈는데도 성인팀을 통틀어 대표팀을 꾸린 다른 팀들과 대등히 경쟁하며 최상위권의 성적을 거뒀고, 프로들이 출격한 92년에선 거의 프로와 아마추어 수준의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디박보다 선배인 데틀레프 슈렘프가 유럽인으로서 성공을 거두긴 했어도 그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대학을 나와 미국식 농구를 배운 선수였다.(슈렘프만큼의 기량은 아니어도 비슷한 케이스가 뉴멕시코 대학을 나온 호주 출신 룩 롱리) 이런 와중에 유럽에서 농구를 배운 디박이나 드라젠 페트로비치는 선진 미국 농구를 배우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였으며, 이들의 성공은 유럽 및 다른 나라에서 농구가 자신감을 얻고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NBA로 보면 미국인들이나 미국 대학 출신들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던 리그가 전세계에서 각자 방식으로 성장한 유망주들이 몰려들어 리그의 경쟁력과 수준을 높이게 된 것인데, 여기에는 디박이나 페트로비치, 더 나아가 토니 쿠코치, 게오르그 뮤레산이나 그 이후 세대인 최초의 유럽인 MVP 디르크 노비츠키, 최초의 유럽인 파이널 MVP 토니 파커, 최초의 유럽인 신인왕 파우 가솔, 유럽인은 아니지만 유럽에서 맹활약하고 NBA에 입성한 후 1992년 이후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최초 올림픽 금메달과 올해의 식스맨상과 올 NBA 서드팀을 동시에 수상한 마누 지노빌리 등의 공헌이 절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12] 실제로 디박은 2000-01 시즌부터 킹스를 떠날 때까지 항상 팀의 최연장자였다. 또한 버논 맥스웰, 타이론 코빈, 빌 웨닝턴처럼 은퇴하기 전 잠깐 한 시즌씩 뛴 선수들을 제외한 실질적 전력들 사이에선 킹스 유니폼을 입은 기간 내내 가장 연장자였다. [13] 특히 루키 시즌부터 디박과 함께한 페자는 그를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경기를 보면 어린 페자가 멋진 플레이를 하면 디박이 일부러 세르비아어를 써서 큰 소리로 응원해주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14] 블라데 디바치도 최대한 원어 발음을 존중해 미국인들이 발음하는 것이고, 실제 원어민 발음은 조금 다르다. https://ko.forvo.com/word/vlade_divac/. 참고로 유튜브에 "블레이디 다이벡'으로 발음해놓은 영상도 있는데, 이 인물은 페자 스토야코비치를 "페자 스토자코바이크"로 디르크 노비츠키를 "덜크 노와잇츠카이"로 발음해놓은 걸 보면 그냥 트롤러로(...) 추정된다. [15] 애초에 디박은 사람들이 헷갈릴까봐 그냥 통일해서 디박이라고 불러달라고 한거지, 엄밀히 따지면 디박은 잘못된 발음이다.(디박이 미국으로 귀화했다면 몰라도 그는 아직도 세르비아 국적을 갖고 있다) 원래 아킴인데 사람들이 다들 하킴으로 알고 있어서 그냥 따로 태클을 걸지 않고 인정한 하킴 올라주원과 마찬가지 케이스. 첫 단추를 잘못 꿴 디박같은 케이스가 아니면 원 발음을 존중해주는 것이 옳다. [16] 토니 쿠코치는 데뷔 후 한동안 "쿠콕'으로 부르다가 95~96년 사이에 대부분 해설자들이 "쿠코치"로 발음을 고쳤고, 노비츠키는 98년 드래프티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더크 노위츠키"로 불렀다. "스토야코빅" 역시 마찬가지. 90년대 중반에 나온 NBA Jam같은 경우 확실히 "쿠콕!"으로 녹음되어 있다. [17] 그러나 영미 역사 다큐멘터리, 드라마에서는 2020년인 현재에도 과거의 영미식 발음을 고수하고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마크 앤서니. 특히, 미국은 특출나게 외국어와 외국 명칭에 대한 관심부족이 여전한데, 그나마 스포츠에서는 전세계에서 온 운동선수들 덕분에 조금 나은 상황이다. 다만 앞서 언급된 시저같은 경우 외국위인이지만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잘 알 정도로 "줄리어스 시저로서" 인지도가 높기 때문에 갑자기 "율리우스 카이사르"라고 하면 혼란이 올 수 있다. [18] 그 전에 NBA에서 뛴 유럽 선수들은 여럿 있었지만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가장 최초로 NBA에서 스타급으로 성장한 유럽인 선수는 데틀레프 슈렘프인데 슈렘프는 고등학교-대학을 모두 미국에서 나와 사실상 미국 농구를 배운 선수라 좀 차이가 있다. 유럽에서 프로데뷔까지 하는 등 농구를 완전히 익힌 '유럽식 선수'가 스타급이 된 선수는 1989년에 나란히 데뷔한 디박, 드라젠 페트로비치(1986년 드래프티이지만 데뷔가 늦었음)이다. 보통 이 둘에 1993년에 드래프트 된 토니 쿠코치까지 해서 유럽 출신 NBA 선수 성공사례 1세대로 많이 본다. 좀 더 엄격히 보면 디박과 페트로비치. 왜 드래프트년도가 확 늦은 쿠코치까지 묶이냐면, 페트로비치와 디박은 NBA 진출 초창기에는 전혀 중용받지 못해 1992~93년 쯤부터 스타급이 됐기 때문이다. 특히 1993년에 NBA 내에서 유망주로 많이 언급이 되었다. 즉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시기는 페트로비치와 쿠코치가 1~2년 정도 차이 밖에 없다. [19] 우연이겠지만 페자는 2004 시즌에 전성기를 보내고 나이로는 전성기를 누려야할 28세이던 2005 시즌부터 서서히 기량이 하락세를 그리게 된다. [20] 당장 자신의 수양딸 페트라의 친부모가 전쟁에 휘말려 죽었다. [21] 이와 비슷하지만 반대되는 사례로, 비슷한 시기 즈보니미르 보반 디나모 자그레브 서포터를 보호하기 위해 세르비아계가 중심이 된 경찰에게 쿵푸킥을 꽂은 사건을 들 수가 있다. [22] '슬라브인'이라고 묶이기에는 이들은 수세기 동안 서로 다른 제국들과 종교가 영향을 미쳐온 민족들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한중일이 연합국을 세웠는데, '동아시아 연합'이 승리했는데 갑자기 일본 국기를 들고 난입한 관중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23] 참고로 Invasion of Body Snatchers는 외계 생명체가 침공해 인간과 동일한 복제인간이 되어 인간을 대체한다는 내용의 SF호러 영화로, 외계생명체의 침공이란 점에서 의외로 핵심을 짚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