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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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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백석
白石 | Baek Seok
파일:백석(시인).jpg
1929년 오산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본명 백기행(白夔行, Baek Kihang)
출생 1912년 7월 1일[1]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리[2]
(現 평안북도 정주시 오산동)
사망 1996년 1월 7일 (향년 83세)
량강도 삼수군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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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수원 백씨[3]
신장 185cm[4]
배우자 장정옥(1939년~1940년)
문경옥(1942년~1943년)
이윤희(1945년~1996년)
학력 오산소학교 (졸업)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전문부[5] (영어사범과 / 졸업)
등단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
( 1930,《 조선일보)
시 『정주성』
(定州城, 1935,《 조선일보)

1. 개요2. 특징3. 생애4. 작품5. 대중매체6. 여담
6.1. 여성편력
6.1.1. 란(박경련)6.1.2. 배우자6.1.3. 김영한( 김자야)
6.2. 윤동주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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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 시인, 번역가.

2. 특징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중하여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평안도 사투리를 시에 넣기도 하고 서사를 시에 넣은 이야기시[6]를 구사하기도 하였다. 또 그의 시에는 먹을 것들이 많이 등장하기로 유명한데, 백석의 시에 나오는 음식을 연구한 식품영양학과 논문이 있을 정도이다.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고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백석의 시에서 그려지는 고향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진 않지만 안식과 평화로움의 정신적 가치가 있는 일종의 신화적 공간이며 공동체적 유대가 남아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고향은 현실적 조건 하에서는 이미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는 과거의 공간이다. 그의 시가 과거지향적인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고향의 풍물, 세시풍속, 생활도구, 전통예절을 잡다하게 나열하면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것은 훼손된 고향의 회복을 원하는 간절한 의지이며, 이것은 나아가 민족 공동체의 회복을 소망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 대표작으로는 여우난 곬족이 있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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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청년기를 보낸 시인으로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서 유학했다. 일제강점기에 창작된 그의 작품이 한국 문학계에서 명성이 높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며 등단하였으며, 1935년 시 『정주성』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단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936년 첫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다.

해방 이후 고향인 이북에서 문예 활동에 전념했으나, '사상 이외 문학성도 중시해야 한다'는 그의 논조로 인해 1960년대 즈음 북한 문단에서 숙청당했다. 이후 량강도 삼수군의 한 협동농장에서 농부로 일하면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과외 지도하며 여생을 보냈지만, 문단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7]으로,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그의 이름 가운데 '석(石)'을 가져다 필명 겸 아호(雅號)로 삼고 백석(白石, 白奭)으로서 작품 활동을 했다. 등단 이전 1933년 12월 방응모 장학금 회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서명에 이미 '백석(白石)' 및 '백석(白奭)' 이름이 등장한다. 이 밖에 '한얼생'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는 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

과거 한국에서는 월북 작가라는 인식이 강해 언급을 피했다. 그러나 월북 문인의 해방 이전 작품에 대한 공식 해금 조치가 이루어진 1988년부터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토속적인 우리말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한 뛰어난 시인으로, 지금도 많은 시인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명실상부한 현대시 최고의 절창.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이 갓 되었을 무렵에 이르기까지 백석의 영향을 받은 인물은 화가 이중섭, 시인 신경림, 동화작가 김요섭, 윤동주, 북한의 한설야 등이 있다.

4. 작품

  • 탕약(湯藥)
탕약}}}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9] 우에 곱돌탕관[10]에 약이 끓는다
[11]에 숙변[12]에 목단[13]에 백복령[14]
산약[15]에 택사[16]의 몸을 보[17]한다는 六味湯[18]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끊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萬年 옛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손으로 고히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옛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맑아진다. ||

5. 대중매체

  • 백석 시인은 생전에 그의 시가 남한에서 매우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교과서에도 실렸음을 알고 매우 만족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창작 연극 <백석우화-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에 나오는 내용으로, 비록 송준이 이윤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지만, 백석 자신이 남한에서도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백석의 유가족들을 직접 인터뷰할 때까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 남한 정보가 철저히 통제되는 상황에서 명예직이라도 받아 외국 손님을 접견하고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던 자리에 있 는게 아니었던 백석으로서는 이러한 정보를 얻는 것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 영화 모던 보이의 주인공 이해명( 박해일 분)의 모델이다. 백석이 모던보이의 대명사였던 만큼 그의 스타일을 참고한 듯하다. 백석의 인생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아니며, 단지 헤어스타일이나 느낌만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이해명은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친일파 아버지를 둔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기까지 하는 문제적 청년으로 나온다.
  • 최항기의 소설 <홍경래의 난> 마지막에 등장해서 시 정주성을 갓 썼다고 자랑하다가 친구에게 정주성에서 왜 홍경래를 떠올리지 못하느냐고 면박을 당하고는 당황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애초에 소설 자체가 대부분 홍경래의 난에 관한 내용이고 백석은 두페이지 정도도 나오지 않는다.
  • 김연수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의 주인공인 시인 '기행'이 백석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6. 여담

  •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특히 러시아어는 국내 러시아문학 번역에 상당히 큰 족적을 남겼다. 월북 이후 번역국에서 일하면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니콜라이 고골 ,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등 다양한 문학가의 문학을 번역하여 북한에 소개했으며 미하일 숄로호프 대하소설 <고요한 돈 강>은 2021년 지금까지도 백석 번역을 제외하면 일어 중역본과 축약본 밖에 없다[19]. 고요한 돈 역본은 풍부한 한국어 어휘를 적재적소에 집어넣는 탁월한 감각과 러시아어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 예술 번역, 사실상 백석의 창작품, 고유명사만 가리면 이북 배경 한국 소설이란 극찬을 듣는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러시아 시인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를 러시아어 원문을 통해 번역한 사람이 백석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1940년 최초로 국내에 번역한 사람 역시도 백석.[20]
  • 사랑에 관한 시를 찾아보면 대표작 중의 하나인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우선 먼저 거론되는데, 이 시에서 나타샤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은 편이다. 일단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작품[21]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중 하나라는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그 나타샤로 누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냐는 것. 다수는 ' 나타샤'가 일반적인 러시아의 여성들을 일컬는 이름[22]이므로 특정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편 하술할 고형진 교수의 경우 백석의 수필 <함흥>에서 백석이 "백계로인(白系露人)[23]의 어여쁜 처녀들"에게 빠져 있음을 지적하며, '나타샤'의 이미지 또한 이 백계로인 처녀에게서 비롯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4] 러시아 문학에 대한 동경과 이국적 이미지의 효과를 더하는 시어라는 점은, 문학계에서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 백석의 문학 작품에 대해 초창기에 연구했던 학자들 중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재직 중인 고형진 교수가 권위자로 꼽힌다. 2020년에는 백석의 시집과 수필, 소설집을 정본으로 펴내기도 했고, 같은 해 열린 모스크바 국제도서전의 일환으로 특별히 그가 관심 있게 다룬 음식들을 주제로 이욱정 PD와 대담하기도 했다.
  • 2004년에 나왔던 송준 저 <시인 백석> 1, 2, 3권도 백석의 생애를 아주 자세하게 적고 있다. 송준은 백석 연구가로, 백석의 시에 꽂혀 백석 연구에 몰두했다. 백석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를 익혔다. 백석 연구로 백석이 자취가 남은 곳은 안 다닌 곳이 없을 정도. 백석의 상징적 얼굴 사진도 그가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서 찾아낸 것이다. 자타 공인 백석 관련 자료 수집의 1인자이다. 그는 "90년대 초반부터 백석과 백석의 시가 끼친 영향과 관련해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백석 본인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도저히 쓸 수가 없어서 한동안 미뤘었다"고 글에서 밝혔다.
  • 2011년 근대서지학회에서 발간하는 근대서지 2호에 백석의 미발표 번역시 167편이 발표되었다. 백석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찾아보자.
  • 백석이 살던 동네는 수원 백씨 인주공파의 집성촌인데, 백인제의 아버지 백희행(白禧行)과는 10촌 지간으로 백인제는 11촌 조카뻘이 된다. 또한 백낙준과도 친척으로 백낙준이 손자뻘이다.
  • 시인 백석 1~3권을 저작한 송준 작가를 소개하는 Yes24 작가 소개에 충격적인 글이 올라왔다. 바로 송준 작가가 # 실제로 백석을 만났다는 내용이다. 허나 이는 잘못된 내용으로, 중국 북한 접경지역에서 부인 이윤희 씨를 만난 것이 와전된 것이다. 1994년 송준은 그간 모은 자료를 토대로 백석평전을 출간했다. 그리고 만주 북한에서의 행적을 담은 책을 내려고 할 무렵, 그는 중국 조선족 취재원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1963년 북한에서 숙청당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백석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1994년 그는 어렵사리 중국 국경에서 백석의 부인 이윤희 여사를 만난 것이다.
  • 시인 안도현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쓴 책이 바로 백석 평전이다.
  • 국내 소설가 김연수의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의 ‘기행’이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잘 알려지지 않은 분단 이후의 백석의 행적을 김연수의 문헌정보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소설이다. 또, 기행은 백석의 본명이기도 하다.
  • 헤어스타일이 당시 기준에나 지금 기준에나 굉장히 특이한 편인데, 이는 따라하기 매우 힘들다.
  •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네이버 인물 소개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면 제법 잘생겼다. 여성들에게 인기도 많았다고. 근 100년 전 사람인데 지금 기준에서도 잘생긴 편에 속한다. 넷상에서는 황순원, 윤동주, 임화와 함께 근현대문학 F4라고 하기도 한다.
  • 1912년생인데 키가 무려 185cm나 되었다고 한다. 2020년대 기준으로도 상위 약 4%에 속하는 장신이며, 저 당시 185cm는 오늘날로 치면 196cm는 되는 것이다.[25] 1930년대 조선인 징용과 관련해서 일제가 지역별 키를 분석한 결과, 남한 지역은 162~4cm 구간에 많이 포진하였으며 한국 전체에서 가장 키가 컸던 함경북도의 평균키가 167cm 였다. 당시 조선인 평균 키는 164.1cm이며 170cm만 넘어도 장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다.[26]
  • 배우 신성록이 카카오톡 이모티콘인 프로도와 더불어 백석을 닮은 것으로 언급이 되었다. 해당 사진은 별에서 온 그대 이재경. 더 많은 사진. 신성록도 백석과 닮았다는 것이 좋았는지 인스타그램에 백석의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6.1. 여성편력

백석은 조선일보에 입사해 여성 소설가 최정희[27]와 친해지면서, 여러 여성 문학인을 소개받아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최정희와 더불어 노천명, 모윤숙과도 자주 어울렸다. 이들 여성 3인방은 백석을 사슴이라 불렀다고 한다. 2001년 <문학사상>에는 최정희가 백석에게 받은 편지가 공개되었는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적힌 편지도 받았다고 한다.

무척 좋아하던 박경련(란)이 결혼한 이후에는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는데, 이 시절에는 제자 김진세의 여동생을 마음에 두었다는 설이 있다. 미모의 여인으로 함경남도 영흥군에 살았으며 집안이 상당히 부유했다고 한다. 백석이 정식으로 청혼했지만, 박경련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 집안으로부터 거절을 당했다는 말이 있다.

여기까지가 백석이 시인으로 활동할 당시 알려진 주변 여인들로, 모두 명문학교를 다닌 신여성들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자신이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여인도 나오게 된다.

6.1.1. 란(박경련)

백석은 통영을 아주 좋아했다. 경상남도 통영시에 가면 백석의 시가 새겨진 시비가 있고, <통영>으로 연작시만 3개가 있을 정도이고, 백석은 통영 바다를 거닐며 <바다>라는 시를 남겼다. 이는 통영에 그가 사랑했던 란(박경련)이라는 여인이 살았기 때문이다.

백석이 박경련을 처음 만난 곳은,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장이었다. 허준은 백석의 또 다른 친구 신현중의 여동생인 신순영과 결혼했는데, 당시 24살이었던 백석은 결혼식장에서 박경련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박경련은 통영 출신으로, 당시 18살이었으며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신여성이었다.

뜨거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 백석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몇 차례 통영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고, 그녀의 부모에게 인사를 겸한 청혼을 했으나 끝내 결혼 승낙도 받지 못했다. 당시 박경련에 대한 백석의 마음은 주변인 모두가 알 정도였으며, 그 마음은 박경련이 살고 있는 통영으로 이어져서, 백석은 통영을 소재로 여러 작품을 남긴다.

그러나 백석과 박경련은 이뤄지지 못했으며, 박경련은 1937년 4월 7일 신현중과 결혼한다. 신현중은 백석과 조선일보에 같이 근무하며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였고, 다른 여자와 약혼 중이었다가 파혼하고 박경련과 결혼한 것이다. 이에 백석은 많은 충격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아주 너저분한 일이 있었다. 백석이 박경련과 결혼하고 싶어하자, 박씨 집안의 어른들은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신현중은 따로 약혼녀가 있으면서도 내심 박경련을 좋아하고 있어서, 백석을 배신한다.

신현중은 "백석의 어머니는 기생 출신이거나 의 자식입니다."라고 백석의 출신을 헐뜯었다. 실제 백석의 모친은 단양군수의 딸이었고, 서울 출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백석의 부친 백시박과는 나이 차가 13살이나 났다. 당시 이런 기우는 혼사에 대해 '백석의 모친이 기생 혹은 첩의 자식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었다. 신현중은 박씨 집안의 어른들에게 "제가 박경련과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호소하여, 끝내 성공하고 만다.

박경련은 신현중의 누나 신순정의 제자였고, 신씨 집안도 통영 출신이었다. 그래서 박씨 집안과 신씨 집안은 피차에 집안 사정을 다 아는 사이였고, 부모님 대에도 서로 면식이 있었다. 또한 신현중의 아버지는 군청에 근무하여 형편도 꽤 좋았다. 반면 백석은 타향, 특히 이북 출신에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장남이었다. 결국 백석과 신현중의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박경련의 어머니는 신현중을 택했다.

아무튼 그렇게 결혼한 박경련과 신현중은 부부 금슬이 좋았으나, 폐결핵을 앓고 병약했던 박경련의 건강 문제인지 자식은 낳지 못했다.[28] 신현중은 언론인으로 재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교육자가 되어 경상남도 부산 일대를 떠돌다가 1980년에 생을 마쳤다. 그리고 박경련은 한참을 더 살았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뒷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바다 - 백석

통영 바다를 거닐며 연인 란에 대한 사랑을 읊은 시로, 사랑에 빠진 백석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중략)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하시던 산새에도
해오라비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
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내 친구 하나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수필 편지(1936.2.21 조선일보) - 백석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통영을 찾았던 기억은, 시 『바다』와 『통영』 3편과 『남행시초』 연작으로 남았으며, 수필 <편지>에 잘 나타나고 있다.
(상략)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29]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하략)
통영(統營) - 백석

란(박경련)과 헤어진 후 사건의 전말을 들은 백석이 지은 시. 절절하게 실연의 아픔이 느껴진다. 1938년 4월에 쓴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는 사랑하는 여인과 여인과 결혼한 친구에 대해 담겨져 있다. 이 무렵 백석은 신현중에게 이끌려 그의 신혼집에서 란과 인사하게 된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中 -백석

6.1.2. 배우자

"백석의 첫 번째 혼례는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이루어졌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의 첫 부인 장정옥은 남북간 갈등이 고조되자 외아들을 데리고 월남했다"는 기사가 있으나, 정확한 기록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2번째 부인 문경옥(1920∼1979)은 평양의 유명 변호사인 문봉의 서녀로, 북한 최초의 여성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문경옥은 김일성의 후원을 받아, 소련 레닌그라드(現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유학하여 음악을 공부했다. 그녀의 오빠 문학수는 화가였다.

1940년 9월 백석은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소속 측량 보조원을 그만두고 백구둔이라는 농촌에 잠시 체류하며 농사를 짓다가, 안둥시청에서 일하고 있던 소설가 염상섭이 안둥세관에 자리를 얻어주며 안동로 간다. 당시 문학수와 가까이 지내던 백석은, 문학수의 중신으로 1942년 평양에서 문경옥과 결혼식을 올린 뒤 안둥에서 살림을 시작한다. 처제 문경랑은 형부 백석에 대해, 지인인 작가 김자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매우 예민해서, 건너방에서 잔다고 할 때 웃음소리가 조금만 나도 신경질을 부린다. 가랑잎에 불이야 시인들은 다 그렇다나.
백석의 2번째 결혼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임신 8개월의 아이가 유산되며 고부갈등 등 관계가 악화되며 이혼했다고 한다.

그 후 해방 무렵 만난 3번째 부인 리윤희와는 3남 2녀를 두고 50년 넘게 해로했다. 백석은 1962년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리윤희와 삼수군 농장의 농부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6.1.3. 김영한( 김자야)

자신이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한 여인 중 하나는, 법정스님에게 길상사를 시주한 김영한( 김자야)이다. 길상사 시주가 언론에 널리 보도되면서, 당시 김영한와 백석과의 일화도 많은 주목을 받게 된다. 김영한의 호 '자야'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나오는 여인의 이름으로, 백석이 일본 아오야마가쿠인에 유학하면서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우며 심취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영한 광복 후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했는데, 말년에 법정스님에게 요정 전체를 시주하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당시 돈으로도 1,000억원이나 되는 거액이어서, 1987년 처음 제안을 받은 법정스님은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김영한이 몇 년에 걸쳐 끈질기게 매달려서, 결국 법정스님과 대한불교조계종은 시주를 받아들여 대원각을 길상사라는 사찰로 개조한다. 그리고 김영한은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영한은 생전에 "1,000억 원이란 돈도 그 사람의 시 한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이 가장 많이 생각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따로 때가 어디 있나" 등의 말을 남겼으며, 이는 뮤지컬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백석 측과 문학계는, 김영한이 백석의 연인이었다는 설을 부인하고 나선다. 백석의 주변인들은 김영한과 백석의 교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백석은 활동 당시 셀럽처럼 인기가 있어, 그가 좋아했던 여인이나 주변 여인들은 잘 알려진 편이다. 백석이 박경련(란)을 좋아하던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편 김영한으로 인해 "백석이 기방 출입이 잦았다"는 설이 나오게 되고, "백석이 함흥의 기생과 동거하여, 이것이 김진세의 여동생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유가 되었다"는 설도 나오게 된다.

백석 연구가인 송준 역시 "김영한을 직접 만나보기까지 했으나, 그녀는 백석에 관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질문을 하니 백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진짜 백석의 연인이었는지 의구심이 든다."는 요지로 책에 적고 있다. 김영한이 그렇게 돈이 많았으면서도 백석의 시집이나 관련 자료 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도 의심했다. 그래서 "백석이 유명해지니 관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으로 짧막하게 맺는다. 백석 전문가인 이동순 영남대학교는 말년의 김영한을 내사랑 백석을 내도록 독려했다.

6.2. 윤동주 관련

당시 1필이 5원이었는데, 백석의 시집 <사슴>이 2원 정도였다고 한다. 1936년 1월 100부 한정 판매를 하였는데, 시인 윤동주는 이 책을 구하지 못해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이 시집을 베껴 썼고, 그 필사본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한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시 < 별 헤는 밤>을 살펴보면 윤동주가 백석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30] 그리고 흰 당나귀는 백석과 윤동주 모두 좋아하는 이미지인데, 이는 두 시인의 시에서 담은 시인 프랑시스 잠이 좋아하는 이미지라 한다.
두 작품을 한번 비교해보자.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별 헤는 밤
윤동주

季節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來日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靑春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追憶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동경과
별 하나에 詩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小學校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패, 鏡경, 玉옥 이런 異國少女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詩人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1] 음력 1912년 5월 17일 [2]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승훈도 이 마을 출신이다. 통일교 교주 문선명과 동향이다. [3] 인주공파 18세 ◯행(行) 항렬. 수원 백씨 30세. [4] 현대 기준으로도 평균보다 11cm 가까이 큰 장신이며, 태어난 시기를 감안하여 현재 키로 환산하면 196cm가 된다. [5] 구제대학이 아니라 구제대학의 예과 내지는 구제고등학교, 구제전문학교에 상응하는 전문부 과정이라 학제가 학사과정보다 한 단계 낮다. 그래서 전문부 과정은 졸업해도 학사 학위로 인정이 되지 않았다. 대신 구제전문학교, 구제고등학교, 구제대학 전문부 졸업자는 구제대학 본과(학사과정)에 편입학할 수 있었다. [6] 당대에 이야기시를 구사한 시인으로는 임화 , 이용악 , 백석이 있었다. 단편 서사시라고 하기도 한다. 김동환 의 < 국경의 밤>은 서사시다. [7] 수원 백씨의 족보를 찾아 보면 이름자는 '행'이 분명하나, '갈 행(行)'에 삼수변을 쳐서 '넘칠 연(衍)'으로 쓴 기록도 있다. 이것은 아명(兒名)으로 추정된다. [8] 대학수학능력시험 사상 최초의 복수정답 사례로도 유명한 시다. [9] 질흙으로 구워 만든 화로 [10] 곱돌로 만든 약 탕관(湯罐),약탕기 [11] 삼(蔘). 인삼 산삼을 통틀어 이르는 말 [12] 숙지황(熟地黃). 몸을 보하는 한약재의 한 종류. 지황이라는 덩이뿌리 약재를 쪄서 말린 것을 숙지황이라 한다. 지황을 하(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글자 속 하(下)자가 변(卞)자로 잘못 읽히면서 숙지황을 숙하 또는 숙변이라고도 부른다. ‘숙하’가 맞고 ‘숙변’은 잘못이지만, ‘숙변’을 ‘숙하’의 변한 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므로, 사전에서도 그에 따라 ‘숙변’과 ‘숙하’를 둘 다 숙지황의 별칭으로 인정하고 이 두 단어를 유의어로 처리한다. [13] 목단피(牡丹皮)라고도 불리는 한약재. 모란(목단)의 뿌리껍질이다. [14] 白茯苓.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영양세포들이 모여 딱딱한 흰색 덩어리를 이룬 것으로, 한약재 중 하나다. [15] 덩굴 참마의 덩이뿌리를 산약(山藥)이라 부른다. 한약재의 하나. [16] 질경이 택사(澤瀉)의 덩이줄기로 한약재의 일종 [17] 補. 보충(補充) [18] 육미탕. 지황, 산약, 산수유, 복령, 택사, 목단피 등 총6가지의 한약재를 조합하여 달인 탕약으로 대표적인 보약 한약 중 하나. 한나라 시대 유명한 의사 장중경의 팔미탕을 송나라 시대 유명한 의사인 전을이 변형하여 만든 처방이 육미탕이다. 백석은 육미탕의 재료 중 산수유를 인삼으로 적는 실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또는 개인의 증상과 체질에 따라 약재를 더하거나 빼는 가감법에 따라 산수유를 빼고 인삼을 넣은 가감(加減) 육미탕이라 볼 수도 있다. [19]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교수였던 최유찬 평론가가 쓴 『고요한 돈』의 한국어 번역 판본 비교 = 백석 번역본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에 따르면, 백석이 번역한 이후 나왔던 번역본 중 일월서각판(장문평 외 다수 공역)은 카와데쇼보신샤판(요코타 미즈호 역)을 중역하였고, 문학예술사판(정성환 역)과 동서문화사판(맹은빈 역)의 경우 일월서각판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중역이 의심되며, 청목사판(정태호 역)은 원문을 편집하여 번역하였다. [20] 백석역 테스는 엄밀히 말해 완역이 아니다. 테스에는 당대 영국 시골풍경 묘사와 풍속묘사, 종교에 관한 언급, 작가가 직접 개입해 서술하는 부분이 많은데 백석은 40년대 조선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영국 고유의 묘사들은 대거 쳐냈다. [21] <백야>가 아니라 <전쟁과 평화>라고 함 [22] 우리나라의 '영희', '순희' 등과 같이 [23] 러시아 혁명 때 혁명에 반대하여 국외로 망명한 러시아인들 [24] 고형진. "백석의 수필과 시의 연관성 연구 -「가재미, 나귀」, 「무지개 뻗치듯 만세교」, 「선우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중심으로-." 우리어문연구, 63.0 (2019): 7-36. [25] 참고로 196cm 이상은 매년 신체검사를 받는 약 30만 명의 남성 중 고작 7~80명이 전부일 정도로 엄청나게 드물다. [26] 현재 평균 키가 174cm라는 걸 생각하면 그 당시의 170cm는 현재의 180cm인 셈. [27] 시인 김동환의 연인 [28] 양자는 있었다. 옆에 끼고 저녁을 먹을 '어린 것'은 없었던 셈. [29] 경상남도 통영시 명정동. [30] 어떤 의미에서는 표절 아닌가 싶을 지경인데, 윤동주의 시들 중 상당수는 습작시이고 윤동주는 자신의 시를 시집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윤동주의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는 윤동주가 죽은 후, 그가 생전에 써놓았던 시들을 긁어모아 출판한 것이라서 습작들도 모조리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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