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르 제국 ·
무굴 제국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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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5D23><colcolor=#fcd116> 역사 | 무굴 제국/역사 | 수르 제국 |
정치 | 파디샤 | 틀:역대 무굴 황제 | |
행정구역 | 아그라 | 델리 | 라호르 | 벵골 수바 | 아우랑가바드 | |
경제 | 루피 | |
인물 | 미르자 나자프 칸 | 사프다르 장 | 아사프 자흐 1세 | 틀:역대 파디샤 베굼 | |
문화 | 타지마할 | 비비 까 마끄바라 | |
기타 | 화약제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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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의 시대별 강역 변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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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국
무굴 제국의 초대 황제 바부르[1]는 티무르의 자손이자[2] 모계로 칭기즈 칸의 황금씨족 혈통[3]을 잇는 인물로, 자수성가의 대명사이자 온갖 고된 사건들을 다 겪고 대제국의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원래 바부르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동부인 페르가나 지방을 지배하던 군주였는데, 어린 나이에 즉위한 직후부터 인근 왕국의 왕들과 내부의 반란으로 고생을 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할머니의 도움과 운으로 어찌어찌 왕좌를 지킬 수는 있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인근의 사마르칸트에 7개월 동안 공성전을 벌였고 결국 함락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공성전 도중 홈그라운드인 페르가나에서 신하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우즈베크인들의 왕이었던 무하마드 샤이바니 칸이 사마르칸트를 탈환하면서 바부르는 말그대로 갈 곳없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바부르는 이후 겨우 살아남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타슈켄트 등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았다. 이때의 바부르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로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면서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맛보았다.
그러던 중,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카불을 다스리던 왕이자 바부르의 친척이 후계를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바부르는 이 틈을 노려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카불로 진격, 카불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1504년에 드디어 새로운 왕국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바부르는 1526년까지 이 카불의 통치자로 살았으며 워낙 산악 지대에 위치하여 상대적으로 빈곤했던 카불의 세력 확장을 위해 풍요로운 인도 지방으로 남진, 약탈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바부르는 카불을 중심으로 힘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서쪽에서 샤이바니 칸의 공격으로 도망쳐온 티무르계 왕족들을 받아들여 주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티무르 제국 계열의 살아남은 유일한 군주로 떠올라 황제라는 뜻의 '파디샤'에 즉위했다. 다만 이 시기에도 카불 내부 상황은 상당히 불안정해서 간간히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고, 우즈베크인들의 위협도 끊임없이 받으면서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바부르는 이란의 이스마일 1세와 연합을 맺었다. 그는 이스마일 1세의 도움을 받아 우즈베크인들을 대적하며 이란의 사파비 왕조와 중앙아시아를 양분했다. 이때 사마르칸트를 3번째로 점령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뺏겼다.
바부르는 카불에서 북쪽으로 진출하기보다는 풍요로운 남부의 인도 지방으로 뻗어나가기로 결심하며 1519년에는 파키스탄과 북인도 지방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1524년까지만 해도 바부르의 목표는 펀자브 지방까지만을 점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시기 북인도는 델리 술탄국의 로디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으나 이미 델리 술탄국은 무너지고 있었기에 사실상 권력의 공백지나 마찬가지였기에 바부르의 원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이슬람 국가였던 델리 술탄국은 현지의 힌두교 신자들을 종교적으로 차별했고, 이때문에 델리 술탄에 대한 반발이 컸었던 덕분에 바부르는 더욱 손쉽게 북인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부르는 파니파트 전투, 칸와 전투, 찬데리 전투 등에서 델리 술탄국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파했다. 덕분에 바부르는 델리와 아그라 지역을 점령하면서 북인도의 패권을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바부르가 카불 지역으로 귀환하는 중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으며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후마윤이 황위를 이었다.
바부르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마윤 역시 아버지 못지 않은 풍운아였다. 1530년에 즉위한 후마윤은 즉위 직후부터 카불에 아버지의 묘를 건설할 것을 명령했으며 남서쪽의 구자라트의 술탄과 비하르의 군벌이었던 셰르 샤 수르과 대립하면서 무굴 제국의 국력 신장에 힘을 쏟았다. 무굴 제국은 서쪽의 강대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막강한 화력의 근대식 화기들을 지원받았다. 이 막강한 무기를 통하여 화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인도 군벌들을 무찌르고자 했던 것이다. 다만 인도의 군벌들도 바보는 아니었던지라 해안가의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하여 총기를 들여왔고 무굴 제국과 주변 인도 왕국들은 대치 상태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구자라트가 무굴 제국을 침공할 것이라는 첩보를 전해들은 후마윤은 곧바로 대군을 이끌고 구자라트를 침공, 승리했다. 하지만 인근의 셰르 샤 수르가 후마윤이 승리에 취한 틈을 노리고 무굴 제국을 침공했다. 후마윤은 어느 정도 샤 수르를 막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형제들이 겹겹이 반란을 일으키고 샤 수르가 기껏 맺어놓았던 평화 조약을 어기고 기습을 가하는 통에 대패, 결국 아그라와 라호르를 거쳐 카불까지 후퇴, 최종적으로는 인근의 페르시아까지 후퇴하여 망명을 요청할 정도였다.
후마윤은 고작 40여 명의 호위를 데리고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에 몸을 의탁했다. 당시 페르시아의 샤였던 타흐마스프 1세는 그를 크게 환대해주었다. 타흐마스프 1세는 그에게 페르시아의 화려한 문화를 직접 소개시켜 주었으며, 그의 형제이자 그를 배신했던 캄란 미르자가 후마윤을 죽이기 위해 내놓으라는 요청을 했을 때에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후마윤에게 300여 개에 달하는 황실 천막 등을 동원한 잔치를 열어줄 정도였다. 이 잔치에서 샤는 후마윤에게 12,000여 명의 정예 기병을 빌려줄 것을 밝혔다. 만일 후마윤이 성공하면 칸다하르 지방을 페르시아에게 넘겨준다는 조건이었다. 후마윤은 이 페르시아 기병대의 힘을 받아 그의 형제인 캄란 미르자가 있는 카불을 공격했고, 인근 부족들의 도움을 받아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결국 카불 재탈환에 성공했다. 다만 후마윤은 끝까지 자신에게 반기를 든 형제들을 죽이지는 못했고 대신 눈을 멀게 해서 아라비아의 메카로 성지순례를 보내버렸다고 한다.[4]
한편 1545년에 셰르 샤 수르가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인 이슬람 샤가 1554년에 또 사망하자 수르 왕조는 극심한 내분에 휩싸였다. 후마윤과 무굴 제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도로 다시 진격했다. 결국 후마윤은 1555년 6월의 시르힌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델리를 탈환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이로써 무굴 제국은 1540년에 인도에서 쫓겨난 이래 약 15년 만에 다시 인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후마윤은 도서관의 계단을 오르다가 망토를 잘못 밟고 발을 헛디뎌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정신을 잃었고, 결국 3일만에 사망하면서 1556년에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가 바로 그의 아들 악바르 대제이니 그의 재위기에 무굴 제국은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2. 전성기
남색 실선이 바부르 재위기인 1525년의 강역, 노란색이 악바르 시기인 1605년의 강역, 주황색이 아우랑제브 시기인 1707년의 강역이다.
2.1. 악바르 대제
악바르 대제의 초상화 | 신하들을 축복하는 악바르 황제 |
후마윤 사후 어린 황제가 즉위하면서 무굴 제국은 일시적으로 크게 흔들리는 듯 보였다. 후마윤에게 쫓겨난 수르 왕조가 다시 델리와 아그라를 탈환하는 데에 성공했고, 제국 곳곳에서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막론하고 반란의 징조가 보였으며 이웃 국가들의 침략도 날로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바르는 섭정 바이람 칸의 도움을 받아 수르 왕조를 성공적으로 동쪽의 벵골 지역으로 격퇴했다. 게다가 펀자브 지방의 반란을 제압하고 라호르를 되찾는 등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정복 작업에 나섰다.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악바르는 마침내 카불에 있던 모든 왕족들과 기물들을 인도의 델리로 데리고 왔으며, 앞으로 무굴 제국의 본거지는 인도가 될 것임을 천명하면서 후마윤까지만 해도 아프가니스탄 지역과 카불을 본거지처럼 여겼던 것에 반하여 본격적인 인도를 향한 남진을 시작했다. 1559년에는 라지푸트와 말와 지역을 향하여 대대적으로 진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이와 동시에 18세의 성인이 된 악바르는 섭정인 바이람 칸을 숙청해버리기도 했다.[5] 한편 성공적으로 말와를 정복한 악바르는 얼마 지나지 않은 1564년에는 산악 지방이자 군용 코끼리의 생산지인 가르하 지방을 정벌했다. 특히 이 가르하 지방에서 악바르는 이들이 쌓아두었던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탈취할 수 있었다. 게다가 1,000여 마리에 달하는 코끼리들을 손에 넣으면서 군사력 역시 크게 증강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때조차 무굴 제국이 내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6] 우즈베크인들은 끊임없이 무굴 제국을 침공해 들어왔으며 신하들은 허구한날 악바르의 형제를 대신 황위에 올리고자 카불이나 아그라 지방에서도 몇 번씩 반란을 일으키고는 했다. 악바르는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성격이었기에 반란을 일으킨 자들과 심지어는 반란을 주도한 자신의 형제까지도 몇 번씩 용서해주었으나 반란이 지나치게 끝없이 일어나자 결국 코끼리에게 짓밟혀죽게 하는 등 극단적인 수를 쓰기도 했다.
라지푸트와 말와, 가르하 지방을 장악한 무굴 제국은 이제 북인도 지방 거의 대부분을 다스리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악바르는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심지어 델리 술탄국의 술탄들도 정복하지 못했던 라지푸트나 지역으로 향했다. 1561년에 본격적으로 라지푸트나 지방 정벌에 나선 무굴 제국은 이 지역 대부분의 토호들의 충성 맹세를 받아내는데에 성공했으며,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에게는 그 지위를 그대로 인정하고 지방 내에서는 황제의 명을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의 자치권을 부여했다. 다만 역시 모든 소왕국들이 무굴 제국에 그대로 충성을 다짐한 것은 아니었던지라 여러 차례 극렬한 전투가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메와르 지방의 치토르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에는 무려 4개월의 시간이 소요됐다. 치토르에 질려버린 악바르는 전투가 끝난 후에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 항복한 모든 군인들과 3만여 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모두 참수해버리기도 했다. 치토르 요새를 끝장낸 직후인 1568년에는 인도 전역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라고 알려져 있던 란탐보르 요새로 진격했으며, 란탐보르 요새도 2달여 만에 함락시키면서 무굴 제국은 라지푸트나 지역 대부분을 정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라지푸트나를 정복한 악바르는 다음 정복 목표를 해안과 접하여 경제력이 굉장히 부강했던 구자라트 지역으로 잡았다. 1572년에는 구자라트의 반란군들의 연락을 받고 이에 응답하여 구자라트를 다스리던 왕을 쫓아내고 수도에 들어가 구자라트의 정당한 왕이 되었음을 선포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저항하는 해안도시들도 싹 밀어버리면서 구자라트 지역 역시 완전히 장악했다. 한편 원래 구자라트 왕은 끝없이 도망치다가 결국 한 옥수수 밭에서 잡혔다. 악바르는 이때 역시 관용을 베풀어 죽이지는 않고 평생 연금을 지급하면서 살아가도록 했다고 한다. 어쨌든 악바르는 이후에도 군사적 정벌 활동을 끊임없이 벌였고, 1585년부터 약 13여 년 간은 아프가니스탄 원정에 나서면서 제국의 북서부 국경을 확립하고 우즈베크인들과 아프간 저항세력들을 내쫓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악바르는 아프가니스탄 원정을 통하여 비록 이전 바부르 시기에 통치했던 아프간 지역들을 전부 되찾는데에는 실패했으나, 아프간 토후들과 평화 협약을 맺고 무굴에 적대하는 부족들이 국경을 함부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등 적절한 외교술을 펼쳤다. 또한 카슈미르 지방으로 진군하여 인더스 계곡 유역의 영토까지 정복했으며 1590년대에는 휘하의 장군을 보내어 발루치스탄 지역까지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한편 이 시기에 약간씩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와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사파비 왕조는 악바르가 점거하고 있던 코라산 지방이 전통적인 페르시아의 영토임을 주장했고, 1558년에 군대를 보내어 무굴 제국의 총독을 내쫓고 대신 자신들이 다스렸다. 그러나 당시 우즈베크인들을 막아내느라 한참 정신없던 악바르에게 페르시아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때문에 이후 약 30여 년 동안 코라산은 사파비 군대의 지배 하에 놓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페르시아가 서쪽의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동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사라졌고, 페르시아의 왕자가 무굴로 망명해 오는 등 정치 상황이 혼란해지자 악바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코라산으로 군대를 보내어 도시를 회복했다. 다만 양국이 서로 워낙 적들이 많았고 관심사도 달랐던 터라 이후에도 완전한 적대관계로 지내지는 않았다. 양국은 여전히 친선사절이 오고가거나 선물들을 주고 받기도 했다. 달라졌던 것은 바부르와 후마윤 시기에는 사파비 왕조가 완전한 우위에 있었다면 이제는 악바르의 무굴 제국이 더 우월한 위치에 놓였다는 것 뿐이었다. 악바르는 북서부 국경을 확립한 직후에는 또다시 데칸 고원 쪽으로 손길을 뻗쳐 지방 토후들을 제압하고 당시 인도에서 가장 부유했던 벵골 지방을 정벌하는 등 인도 동부 지방까지 정복하면서 제국의 경제력을 크게 끌어올렸다. 이를 통하여 악바르가 죽은 직후의 무굴 제국은 북부 인도 전역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으며 당대 인도의 최강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악바르 대제는 영토 확장 뿐만 아니라 종교와 내치 문제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특히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정책들을 굉장히 많이 베풀었는데, 그 종교적 관용이 어느 정도였냐면 본인은 물론 지배계층 및, 황족들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음에도 이슬람교 전통의 지즈야, 곧 타 종교인들에게만 거둬들이는 인두세도 폐지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하고, 본인 자신도 힌두교인인 라지푸트 출신의 공주[7]와 결혼했으며, 힌두교계 학자와 신하들도 이슬람계와 아무 차별없이 등용하고 신임했다.[8] 그리고 그때까지 땅 없이 떠돌아다니기 일쑤던 시크교도에게도 힘을 실어주어 안정된 정착생활을 할 수 있게도 만들어주었다. 1580년대 이래 악바르의 지배에 놓인 시점 이래 시크교가 자리잡은 펀자브 지방은 지금까지도 가장 큰 시크교의 성역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조치를 모두가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무슬림들은 발끈했지만 황제는 신경 안 썼다. 1580년엔 동생인 무함마드 하킴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악바르도 고생을 좀 했지만 이 반란 진압 이후로 악바르는 확고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고 완벽하게 자신의 뜻대로 국가를 통치하게 된다.
악바르는 치세 중 단순히 종교적 관용만을 베푼 것이 아니라 종교적 토론 또한 즐겼다. 아예 궐내에서 악바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각 종교 대표 논객들이 나와서 자신들의 논리대로 상대를 비난하거나, 동조하거나 등등의 견해 차를 보이며 치열한 입싸움을 벌였고, 악바르는 그 논쟁을 지켜보길 즐거워했다.
이 종교 논쟁 중의 일화 2가지만 소개하자면,
1.한 시크교도는 악바르에게 토론 중 이런 진언을 올린 바가 있었다.
"출생도 신분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행동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을 허뭅니다. 종교를 가지고 사람을 우려먹는 건
신성모독입니다. 연민이나 자기비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물로 죄를 씻어낸다든가 여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을 열등한 존재라고 비하하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2.
델리에서 악바르 황제와 그의 종교 토론을 본 한
포르투갈인
신부는 이런 글을 썼다."
무신론자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을 그 왕도 범하고 있다.
이성을
신앙의 밑에다 두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는 문제를 불완전한 이성으로 처리하면서 자기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9]
이건 여담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실 악바르는 '딘 이 일라히'라고 해서 자신이 직접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기도 했다.[10] 주로 채식을 권장했으며, 비폭력을 중시하고 신의 유일성을 핵심 교리로 삼았다. 기본적으로
이슬람교 교리를 베이스로 깔았으며, 불교와 힌두교, 조로아스터교의 사상들을 따왔으며 심지어는 기독교의 교리까지도 섞어 놓은 종교였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악바르 자신만을 지나치게 우상화한 종교라 악바르 사후에는 딱히 세를 불리지 못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렸다. [11][12]여하튼 이 악바르 치세를 기점으로 무굴 제국은 군사력에 더하여 행정적 체계[13] 또한 갖춤으로써 비로소 단순한 정복기를 지나 안정적인 팽창기에 들어선다. 학자들은 악바르의 치세를 기점으로 하여 인도의 군벌 국가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무굴 제국이 본격적인 제국으로 탈바꿈했다고 평가한다. 현재의 방글라데시인 벵골 지역이 인도에 귀속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14] 게다가 문화적으로도 산스크리트어, 우르두어, 페르시아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 온갖 언어로 씌어진 24,000여 권의 장서를 구비한 도서관을 만들어 학자들에게 개방하고, 종교적 관용을 베풀어 복속된 힌두교도들이나 시크교도들에게서도 충성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으니 가히 무굴 최고의 황제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황제였다.
당시 서양에서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악바르의 동시대였는데, 엘리자베스 1세 이후 영국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면, 악바르 때 인도에서는 툴시다스라는 시성이 활동하고 있었다.[15] 오스만 제국은 이 무렵 쉴레이만 대제 치하에서 역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악바르와 쉴레이만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거나 사절을 보내는 등의 교류를 했으며, 악바르 시대에 인도에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 포르투갈에 맞서는 문제에 대해 함께 논의하기도 했다. 자기 직계 조상이 오스만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2.2. 자한기르와 샤 자한
자한기르 황제 | 샤 자한 황제 |
1613년에는 포르투갈과의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자한기르의 어머니이자 황태후였던 마리암-우즈- 자마니는 '라히미'라는 이름의 거대한 선박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선박이 10만 루피에 달하는 보물들과 메카로 떠나는 순례자들을 싣고 항해를 하는 동안 포르투갈 총독이 중간에 이를 압류하고 무굴 제국의 반환 요청에도 거부한 것이다. 당연히 자한기르와 무굴 궁정은 극노했다. 자한기르는 인도 내에 있던 포르투갈 거래소들을 전부 폐쇄한 다음 제국 전역에 포르투갈인들을 대상으로 한 추방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게다가 포르투갈 국적의 예수회가 소유하고 있던 성당들마저 대거 국유화시켜버리면서 말그대로 분노를 여과없이 쏟아냈다고 한다. 어쨌든 자한기르는 그 후에도 1615년에는 벵갈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무사 칸을 토벌하고, 1620년에는 캉그라 요새에 공성전을 펼쳐 치열한 싸움 끝에 함락시키는 등 카슈미르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반란들을 무력화시키고 제국을 안정시키는 데에 주력했다.
자한기르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으로는 관용적인 정책을 폈다. 후대의 아우랑제브에 비해서는 거의 자유와 마찬가지일 정도로 관대한 황제였다. 하지만 자한기르의 시대에 시크교와 무굴 제국 정부의 사이가 본격적으로 벌어졌는데, 자한기르가 시크교의 구루(영적 지도자)인 아르준이 장남의 반란을 도왔다고 생각했고 이때문에 결국 그를 처형했기 때문이었다. 아르준이 반란에 가담했냐는 사실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이는 시크교와의 우호관계에 상당히 악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시크교와의 갈등은 종교적이라기보다도 정치적인 문제였고, 자한기르 본인은 아버지처럼 타 종교에 우호적인 편이어서 관용 정책을 지속해나갔다. 또한 자한기르는 아버지의 문화 정책에 관심이 대단히 많았으며 예술에 대한 후원 역시 아끼지 않았다. 자한기르 황제는 예수회나 서구의 상인들이 들여오는 르네상스 풍의 예술품들에 관심이 지대했고 이들을 감상한 다음 황실 작업장에 내려보내 이를 모사하거나 재해석한 예술품들을 따로 만들라고 명령할 정도였다. 또한 새들의 색깔부터 꽃, 식물과 동물 등 자연에도 관심이 많아 이들에 대한 책들을 편찬하도록 명했고 건축에도 막대한 양의 돈을 투자했다. 다만 이때문에 서구에서는 그를 나약한 황제로 평가하기도 했으며, 지나치게 문치적인 정책들을 펴나가느라 정작 인사 정책과 군사 정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등의 비판을 들어먹기도 했다.
이 시기 무굴 제국의 국부는 엄청난 수준으로 늘어나게 된다. 악바르 대제 이래로 서방과의 교류가 촉진되면서 엄청난 양의 부가 국내로 밀려들어왔으며, 덕분에 당시 무굴 제국은 경제 대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무굴 고고학자인 압둘 아지즈의 연구에 의하면 자한기르 때 국고에 쌓인 금이 7톤, 은이 1,116톤, 다이아몬드가 80파운드(500만캐럿 이상), 루비와 에메랄드가 각 100파운드(각 650만캐럿 이상), 진주가 600파운드, 그 외 각종 보석이 무진장했다고 하니 그 당시 무굴 제국이 굉장히 부유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종종 무굴 제국의 부유함은 프랑스와 페르시아를 합한 것보다 더 굉장하다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자한기르 황제가 1627년에 마침내 사망하자 라지푸트 공주와 자한기르의 3남으로 태어난 쿠람 왕자가 경쟁자였던 누르자한 왕자 등을 물리치고 제위를 계승하는 데에 성공하니 이가 바로 무굴의 5대 황제인 샤 자한이다. 샤 자한 황제는 즉위 직후부터 엄청난 규모의 대군을 편성하고 서서히 남진 정복 정책을 계속했다. 이 때 워낙 많은 수의 병사를 운용했기에 당시 무굴 제국의 보병은 90만 명이 넘었고, 기병은 18만 5천 명에 이르렀으며, 1년 세입은 악바르 시절의 2배가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왕자 시절부터 관심을 기울였던 예술과 건축 부분에 많은 재정적, 정치적 후원에 나섰고 이뿐만 아니라 경제 활성화에도 신경을 쏟았다. 그 덕분에 인도의 잠재력이 폭발하며 경제 성장이 훌쩍 뛰어올랐고 1700년에는 청나라를 제치고 세계 전체 GDP의 24.4%를 차지하면서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으로 급부상하기도 했다.[17] 또한 군사적으로도 발전을 거듭하여 선진 기술을 도입한 대포들을 대량 양산하여 군대에 실전배치했으며 자신의 자식들에게 군대를 맡기고 남쪽의 소왕국과 군벌들을 복속시키도록 했다. 이로 인하여 샤 자한의 무굴 제국은 거대한 전쟁 기계처럼 돌아갔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그 외에도 샤 자한은 무굴 제국의 정치적 중앙집권화를 이룩하는 데에 성공했으며 항복한 지방 토후들에게 유화 정책을 펴면서 지방의 안정을 유지하는 등 내치에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
샤 자한 황제는 인도 건축의 정수라 불리는 타지마할로도 굉장히 유명하다. 재위 초기인 1631년에 그의 아내인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자[18] 무지막지한 애처가였던 샤 자한은 죽은 아내를 위하여 어마어마한 규모의 초호화 무덤을 지어주기로 작정하니 이 것이 바로 타지마할이다. 1632년부터 1653년까지 약 22년 동안이라는 시간에 걸쳐 지었으며 이 무덤 건설을 위하여 총 3,200만 루피 정도가 깨지면서 당시 무굴 제국의 재정이 휘청일 정도였다.[19] 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수도 샤 자한 나바드를 델리에 짓고, 제국의 황궁으로 붉은 요새(Red Fort)를 지었으며, 카슈미르에 777개의 정원을 짓거나 라호르에 대규모 요새를 건축하는 등 온갖 종류의 건축계획을 동시에 진행시켰다. 게다가 신드 지방이나 페샤와르 지방에 거대한 규모의 호화 모스크들을 지어대는 등 가히 건축에 미친 정도의 열정을 보이며 무굴 제국의 문화를 크게 흥성시킴과 동시에 국고를 파탄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인도 문화사에서 무굴 제국의 비중이 훨씬 높아졌고 이 시기에 현재 인도가 자랑하는 전통 건축물 상당수가 지어졌으니 좋아보이기도 하지만, 당시 이 건물들을 짓기 위하여 동원되었던 백성들의 노고와 국고 파탄을 생각하면 무굴 제국으로서 좋은 것만은 절대 아니었다. 참고로 붉은 요새 공사에는 총 6,000만 루피가 추가적으로 소요되었다고 한다.
2.3. 아우랑제브
무굴 제국 6대 황제였던 아우랑제브 | 전투를 지휘하는 아우랑제브의 모습[20] |
새롭게 무굴 제국의 6대 황제에 오른 아우랑제브는 호전적인 기질이 다분한 황제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대규모 군사원정을 시작한다. 그는 1663년부터 점차 군대를 남하시켜 남부의 소왕국과 토후국들을 합병하기 시작했으며, 1685년에는 아들인 무함마드 아잠 샤에게 5만 명의 군대를 맡기고 비자푸르 지방을 정복하도록 했다. 또한 골콘다의 왕이었던 하산 쿠트브 샤를 굴복시키면서 인도에서 가장 거대한 다이아몬드 광산을 거머쥐면서 막대한 양의 보석을 얻어내기도 했다. 또한 대포의 성능을 개량하고 막대한 수의 코끼리 부대를 창설하면서 무굴의 군사력을 급격히 강화한 업적을 남겼다.
무굴 제국은 점차 인도 남부로 진군하면서 토착 힌두교 세력인 마라티인들과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전에 비자푸르와 골콘다까지 무굴 제국이 점령을 해버리자 위협을 느낀 마라타인들이 서로 뭉치는 모습을 보였으며, 무굴 제국 군대를 여러 차례 꺾은 민족 영웅 시바지 본슬레 아래에 집결하면서 세를 불려나갔다. 시바지 본슬레는 인도 남부에서 마라타 연맹을 1674년에 창설하고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으며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내면서 무굴 제국과 맞섰다. 마라타 연맹은 시바지 본슬레 사후에도 왕들을 배출하면서 무굴 제국에 맞서고자 했는데 당시 마라타 연맹은 체계가 통일되지 못했고 군대도 분열되어 있었던지라 한참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무굴의 압도적인 군세를 이기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무굴 군대의 발목을 끝없이 잡았고, 아우랑제브 황제는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보면서까지 조금씩 조금씩 남하를 계속해갔다.[22] 다만 점령한 영토들이 완전히 무굴 제국에게 굴복한 것은 아니었으며, 조금만 군대가 떠났다하면 바로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제국 남부는 사실상 반란지대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전에 편입되었던 벵골이나 북인도, 인도 동부 지방에서도 끊임없는 반란이 일어나면서 아우랑제브 황제의 재위기에는 반란이 그칠 날이 없었다. 게다가 힌두교도들이 아우랑제브의 종교 탄압에 반대하면서 다수의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거의 100년 전부터 무굴 제국에 속했던 델리 인근에서도 반란이 속출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이 지방들은 아우랑제브 사후 무굴 제국이 흔들리는 그 즉시 제국에게서 독립해 떨어져 나갔으며 이로 인해 무굴 제국이 더더욱 급속히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다.
어찌되었든 아우랑제브 황제는 아삼 지방의 반란, 사타미들의 반란, 시크교 신자들의 반란, 파슈툰인들의 반란들을 모두 꺾어내는 데에 성공하면서 겨우겨우 무굴 제국의 국경을 확립했으며, 아우랑제브 황제가 세상을 떠날 쯤의 무굴 제국은 타밀나두 등 인도 아대륙의 최남단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영토를 정복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게다가 이 최남단의 왕국들마저도 직간접적으로는 무굴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당시 무굴 제국의 영향권은 인도 전체에 두루 미치고 있었다. 이처럼 아우랑제브 황제의 활발한 정복 사업 덕에 무굴 제국은 마우리아 왕조 이래 몇 천년 만에 인도 대부분을 지배한 국가라는 명예를 누렸으며 엄청난 국토와 인구를 자랑하며 세계 최강대국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아우랑제브 황제의 업적과 무굴 제국의 영광은 어디까지나 영토 면적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 반대로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제국은 퇴보를 걷기 시작했다. 그 핵심적인 이유는 재위 20년을 넘기면서 이슬람빠였던 아우랑제브 황제가 힌두교도, 시크교도 국민들에게 철저한 불관용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1679년에는 비무슬림들에게 매기는 세금들을 모두 부활시켰으며 조세 징수관들도 무슬림으로만 뽑았다. 또한 무슬림 상인들에게는 자국 내 관세를 2.5% 정도로 낮게 유지하는 데에 반하여 힌두교도를 포함한 타종교인들에게는 무려 5%라는 고세율 관세를 매겼고, 이때문에 무굴 제국에 복속되어 있던 각기의 힌두 귀족 세력들이 점차 반발심을 품게 된다. 게다가 쿠란에 근거한 샤리아법을 제국 전역에 시행하려 들었고 힌두교 사원들을 강제로 철폐한다거나 무슬림 모스크들만 대거 짓는다는 둥 타 종교인들이 싫어할만한 극렬한 정책만 골라서 폈다. 다만 아우랑제브 황제도 바보는 아니었던지라 무조건적으로 탄압 정책만을 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재위기 동안 궁정에 비무슬림 관료들이 약 30% 정도를 차지하면서 무굴 역사상 가장 많은 비율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 것이 비무슬림들의 분노를 가라앉혀주지는 못했다. 사원 철폐령이나 제한령 등 타종교 탄압령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반란이 각지에서 터져나왔고, 아우랑제브는 또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고 막대한 전비를 지출해야만 했다.[23] 긴 재위(48년) 내내 팽창정책을 구사했으나 내치에서 퇴보를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그가 죽고 난 직후 태어난 청나라의 건륭제나 동시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24]
3. 반란과 쇠퇴
무굴 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던 아우랑제브 황제는 데칸으로의 군사 원정 도중 급격히 병세가 나빠졌고 결국 아마드나가르 인근의 군 주둔지에서 88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아우랑제브는 죽기 직전 총애하던 무함마드 아잠 샤를 새 황제로 지명했지만 티무르 제국 이래로 후계자들이 싸움을 벌여 승리한 왕자가 황위를 차지하는 전통을 물려받은 무굴 제국에서 그런 건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결국 무함마드 아잠 샤는 1707년 6월에 자주 전투에서 샤 알람 왕자와 싸우다가 전사하며 그대로 사망했다. 무함마드 아잠 샤를 죽인 샤 알람 왕자는 바크쉬 왕자 등 나머지 경쟁자들도 처리하고 스스로 바하두르 샤 1세로 즉위한다. 하지만 바하두르 샤 1세는 즉위하자마자 제국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수많은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업무를 떠맡게 된다.특히 아우랑제브가 구루를 죽여버리는 등 탄압했던 시크교 신자들은 그가 죽자마자 반란을 일으켜 암리차르와 라호르를 공격할 정도로 제국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1709년 12월에 이르자 시크교도들은 펀자브 일대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고, 아예 독립적인 시크 왕국을 세워 떨어져나갈 시도까지 하면서 무굴 제국에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 한편 바하두르 샤 1세는 아버지 아우랑제브 황제에 비하면 문약했고 군사적 재능도 썩 그닥이었지만 일단 흔들리는 제국을 다잡는 데에는 어느 정도 능력이 있었다. 그는 아우랑제브가 죽자마자 반란을 일으킨 시크교 신자들을 억누르는 데 성공했고, 반란을 주도한 반다 바하두르[25]를 저멀리 히마찰프라데시 지방까지 쫓아내면서 제국을 안정시켰다.
제국 내의 반란들을 어느 정도 평정한 바하두르 샤 1세는 즉위할 즈음 이미 60대가 넘은 고령이었다. 아버지 아우랑제브가 지나치게 오래 장수했기 때문. 안그래도 고령이었던 바하두르 샤 1세에게 수많은 반란 진압과 엄청난 양의 서류 작업은 너무나도 벅찬 일이었고, 결국 바하두르 샤 1세는 재위 5년만인 1712년에 사망하고야 만다. 그나마 제국의 안정을 위하여 노력했던 바하두르 샤 1세 사후, 무굴 제국은 궁정 암투에 반란, 그리고 형제들 간의 내전까지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게다가 이전 시기부터 쌓여왔던 피정복민들의 불만들이 급증하면서 이미 악바르와 샤 자한 시기의 성세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추락하게 된다.
아우랑제브 시절까지 무굴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세수원은 구자라트 지방, 그 중에서도 항구도시 수라트였다. 바하두르 샤 사망을 전후하여 델리와 아그라 지역에서 주요 운송로의 안전이 완전히 붕괴된다. 네덜란드인 상인들의 보고에 의하면 정부로부터 수조권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자민다르(대지주)들이 선동한 무장 농민들이 내륙에서 수라트로 향하는 운송로를 파괴했는데 이런 무장 농민들은 수천 명 단위로 뭉쳐서 몰려다녔기 때문에 경찰력으로 간단하게 진압하기 힘들었다. 결국 구자라트 지방의 경제는 완전히 무너지고 수라트의 유럽인 상인들은 도시를 떠났으며 여러 은행들이 붕괴해버렸다. 인도아대륙의 무역 중심지는 무굴 제국의 영토 수라트 대신 영국의 식민 도시인 뭄바이로 옮겨갔으며, 이는 무굴 제국 세입의 급속한 감소로 이어졌다.
바하두르 샤 1세가 사망한 뒤 황위를 둘러싼 암투는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제국의 쇠락은 급속도로 진행됐다. 바하두르 샤 1세의 뒤를 이어 1712년에 즉위한 자한다르 샤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다. 자한다르 샤는 일개 무희를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황후로 삼는 등 기행을 벌이며 향락만을 탐닉했다. 당시 무희를 황후로 삼는다는 발상은 전 무슬림들을 경악시켰고 자한다르 샤는 무슬림들에게 지지를 잃어가기 시작한다. 자한다르 샤는 결국 11개월 만에 그의 조카이자 바하두르 샤 1세의 손자인 파루크시야르와의 계승 전쟁에서 패배하고 폐위당했다. 그는 아그라에 연금당해 있다가 1713년 2월 11일 파루크시야르가 보낸 암살자들에게 죽임당하면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을 자칭한 명문가 사이드 가문의 형제인 후세인 알리 칸과 압둘라 칸의 도움으로 즉위한 파루크시야르 황제는 즉위 이후부터 사이드 가문을 멀리하고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라자스탄 봉기 진압 원정, 시크교도 반란 정벌 등을 연이어 실시했으며, 남부 지방의 자치권을 허락하면서 무굴 제국의 권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루크시야르는 기본적으로 흔들리는 대제국을 다잡기에는 능력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그의 인사에 불만을 품은 말와 지방의 총독 아짓 싱이 권력에 소외되어 불만이 많았던 사이드 가문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면서 결국 파루크시야르는 1719년에 붉은 요새에서 살해된다.[26] 한편 파루크시야르는 자신의 병을 고쳐준 의사를 소개해준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영국에게 매년 3,000루피를 바치는 대가로 무굴 제국과의 자유무역을 허가하고 곳곳에 거래소를 짓게 해주면서 훗날 영국 침략의 단초를 놓아주기도 했다.
파루크시야르를 죽이고 무굴 제국의 권력을 한손에 틀어쥔 사이드 가문은 그의 아들 라피 웃 다라자트를 11대 황제로 옹립했다. 하지만 라피 웃 다라자트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얼마 못가 결핵으로 사망했다. 난감해진 사이드 가문은 라피 웃 다라자트의 형제였던 샤 자한 2세를 또 꼭두각시 황제로 올렸다. 물론 라피 웃 다라자트와 마찬가지로 사이드 가문의 형제들이 동석하지 않으면 신하들도 마음대로 알현하지 못하는 등 그저 이름뿐인 허수아비 황제였다. 그러나 결핵이 유전이었던 것인지 샤 자한 2세도 제 동생과 똑같이 결핵 증세로 시름시름 앓다가 1719년 9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기껏 즉위시킨 황제들이 병든 닭처럼 죽어나가자 사이드 가문은 이번에는 좀 더 젊은 무함마드 샤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한다.
3.1. 나디르 샤의 침공
사이드 가문이 새로 옹립한 무함마드 샤는 이전의 꼭두각시들과는 조금 다른 인물이었다. 기본적으로 유약한 성정도 아니었고 나름 능력도 있어서 꼭두각시로는 살기 싫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무함마드 샤는 충성파인 카마루딘 칸의 도움을 받아 사이드 가문과 그 패거리들을 오히려 역으로 축출하는 데에 성공한다. 카마루딘 칸은 무너져가는 제국을 어떻게든 살려보겠답시고 군사 개혁과 재정 개혁을 단행했지만, 뿌리깊은 무굴 제국의 부정부패에 막혀버렸고 결정적으로 무함마드 샤마저 그의 개혁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자 깊이 실망해 재상직을 그만두고 데칸으로 낙향했다. 카마루딘 칸은 당시 데칸의 총독인 무바리즈 칸을 샤카르케다 전투에서 쫓아내버리고, 하이데라바드에 왕국을 세운 후 스스로 니잠의 칭호를 칭했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무굴 제국의 봉신국이었지만 사실상의 독립국을 선포한 것인데, 이는 결국 무굴 제국의 데칸 영향력이 확연히 약해지는 효과를 낳는다.[27]한편 이렇게 무굴 제국이 알아서 망해가는 사이에 남쪽에서는 마라타 동맹이 슬그머니 올라오고 있었다. 아우랑제브가 죽을 때까지 간신히 눌러놓던 마라타 동맹이었지만 그가 죽자 무굴 내부에서 혼란이 일어나면서 마라타에까지 신경을 쓸 여지가 없었던 탓이다. 남쪽의 하이데라바드 왕국과 아사프 자흐 1세는 마라타 군대를 막기 위해 분투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당시 마라타 동맹 역사상 최강의 정복 군주 바지라오 1세는 연달아 전투에서 승리하며 북상해 말와, 구자라트 등 북인도 지방까지 모조리 쓸어간다. 1737년에는 심지어 수도이자 핵심 도시인 델리까지 쳐들어갔지만 아직 이때까지는 무굴 제국이 살아있었던 터라 델리 함락에는 실패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 외에도 시크교 세력들이 끈질기게 게릴라 전투를 벌이면서 무굴 군대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무굴 제국은 여전히 마라타 동맹과 함께 인도를 좌지우지하는 양대 패권국 중 하나였고 북인도 전역을 지배하는 대제국이었다. 하지만 무굴 제국은 페르시아 아프샤르 왕조의 나디르 샤의 공격을 받으면서 그야말로 목숨이 간당간당하는 치명타를 맞는다. 당시 페르시아에서는 전통적인 강대국 사파비 왕조가 신흥 세력인 나디르 샤에게 얻어맞고 멸망해버렸다. 전투기계나 다름없던 나디르 샤는 서쪽 오스만 제국과도 싸워 승리를 쟁취한 다음 이젠 동쪽 인도의 무굴 제국에게 눈길을 돌렸다. 막 신흥국가를 세운 그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고 북인도의 부유한 무굴 제국에서 돈을 뜯길 바랬다. 그는 무굴 제국이 자신에게 맞서다 인도로 도망친 아프간 반군들을 송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738년 무굴 제국을 침공하게 된다. 나디르 샤는 말그대로 물밀듯이 인도로 밀고 들어왔고 5월에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일대, 6월에는 카불, 11월에는 카이베르 고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카이버 패스 전역을 반년도 안되어 떨어뜨렸다.
나디르 샤가 이렇게 급속도로 제국을 깨부수자 경악한 무함마드 샤는 총력을 동원해 나디르 샤를 막도록 지시했다. 나이르 샤가 이전의 침략자들처럼 단순히 약탈만 좀 하다가 얌전하게 떠날 성격의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디르 샤는 그러거나말거나 무굴 군대의 필사적인 저항을 뚫고 1739년 1월에는 대도시 라호르를 함락했고, 구자라트와 신드 지방을 싸그리 불태우고 약탈하며 진군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몰리자 무함마드 샤는 직접 대군을 몰고 나디르 샤와 맞서기로 결정한다. 무함마드 샤와 나디르 샤는 카르날 지방에서 격돌했는데, 3시간 만에 대파당하면서 무굴 제국의 패배로 끝난다. 이를 카르날 전투라고 부른다. 사실 이 카르날 전투에서 아예 무굴 군대가 작살난 건 아니었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온존했다. 하지만 무함마드 샤의 잘못된 판단과 거듭된 실책으로 인해 무굴 수뇌부의 분열이 일어나 군대가 뿔뿔히 흩어지며 전멸한 거나 다름없는 참사가 일어났다.
카르날 전투 | 델리를 공격하는 나디르 샤의 모습 |
나디르 샤의 침공은 안그래도 흔들리던 무굴 제국의 숨통을 완벽히 끝장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때 200여 년 동안 무굴 제국이 델리에 쌓아오던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부와 재화가 모조리 페르시아로 날아가버렸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무굴 제국의 국력은 치명타를 입었으며 무굴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이 피해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단순히 델리의 부가 약탈당한 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나마 아우랑제브 황제 이래 무굴 제국이 보유하고 있던 인도 최대의 대제국이라는 타이틀이 사라져버린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아직까지 무굴 제국의 군사력이 두려워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던 인도 전역의 토후들이 나디르 샤의 침공으로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나버린 무굴 제국을 만만하게 보기 시작했고, 나디르 샤가 돌아간 직후부터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이는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던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역시 나디르 샤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무굴의 모습에 크게 놀랐고, 이후 본격적으로 인도의 식민화 작업에 들어간다.
3.2. 외세의 침략과 제국의 붕괴
무함마드 샤가 겨우 나디르 샤를 되돌려 보낸 뒤, 반란을 일으키는 봉신국들을 제압하려 애썼다. 그러나 나디르 샤가 물러난 뒤에도 무굴 제국의 상황이 절망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서쪽에서는 나디르 샤가 폭정으로 민심을 잃어 암살당한 뒤 왕조가 조각조각나버렸는데, 개중 무굴 제국과 가까운 아프가니스탄 지방은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등장해 휘어잡기 시작한다. 두라니는 나디르 샤를 본받아 부유했던 북인도 지방을 주기적으로 약탈하는 한편 무굴 제국의 힘을 빼놓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 결국 라호르의 나와브였던 나와즈 칸이 반란을 일으켜 두라니와 힘을 합쳐 1만 2천 대군을 끌고 무굴 제국을 공격했다. 놀란 무함마드 샤는 아와드의 총독 사프다르 장, 왕세자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 등을 시켜 마누푸르 전투에서 간신히 이들을 막아냈다. 허나 마누푸르 전투에서 그가 신임하던 대재상 카마르 웃딘 칸이 전사하자 황제는 그를 애도하다 세상을 떠난다.무함마드 샤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자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가 무굴의 제14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사프다르 장을 대재상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받아 자라 어머니와 후궁들에게 의지하는 성격이 강했던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는 지나치게 외척의 간섭을 용인하면서 이에 불만을 품은 사프다르 장과 정면 충돌한다. 사프다르 장은 군대를 몰아 황태후가 총애하던 자베드 칸을 포로로 잡은 후 죽여버리기까지 했다.[28] 사프다르 장이 황제의 중재를 받아 군사를 물리기는 했지만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의 마음 속에는 그에 대한 불신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로 인해 황제는 사프다르 장을 견제하기 위해 이마드 울물크라는 카드를 꺼냈다. 하지만 이마드 울물크는 최악의 선택이었으니, 권력을 잡은 이마드 울물크는 사프다르 장보다도 훨씬 더한 행패를 부렸던 것이다. 놀란 황제가 이마드 울물크를 축출하려 시도하자 이마드 울물크는 오히려 황제의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어버린 뒤 1754년 알람기르 2세를 새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했다.
3.2.1. 제1차 카나틱 전쟁
그렇게 무굴 제국이 이마드 울물크의 횡포로 알아서 망해가는 와중에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 열강들은 인도 정복에 열을 올렸다. 네덜란드, 스페인 등 여러 국가들이 인도에 손을 뻗쳤지만 개중 가장 두각을 드러내던 나라는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조금씩 유럽인들이 인도 대륙으로 침공하던 와중, 유럽 본토에서는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지고 이 전쟁에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참전했는데, 영국과 프랑스가 이 전쟁에서 서로 싸우게 되며 상황이 달라진다. 프랑스는 인도에서 충돌을 피하려 들었지만 영국은 그렇지 않았다. 1746년에는 영국의 공격으로 네가파탐 해전이 발발했고 영국 해군이 패퇴해 물러났다. 프랑스는 보복으로 영국 소유의 마드라스를 공격해 점령해버렸다. 난감해진 영국은 카나틱의 나와브였던 안와룻딘 칸을 꼬셔 프랑스에게 마드라스를 반환하도록 압박했지만, 프랑스는 안와룻딘 칸의 요구를 거부했다. 화난 안와룻딘 칸은 대군을 보내 프랑스를 공격했지만 소수의 프랑스 정예병에 털려 패퇴해버리고 만다.이후 1746년 유럽에서 엑스라샤펠 조약[29]이 체결되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종결됨과 동시에 인도에서의 전쟁도 끝났다. 프랑스는 이 전쟁에서 얻었던 마드라스의 영국 요새를 돌려주는 대신 북아메리카의 루이스버그 요새를 돌려받았다. 이를 '제1차 카나틱 전쟁'이라 부르고 1746년부터 1748년까지 약 3년 동안 지속되었다. 1차 카나틱 전쟁 최고의 수혜자는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안와룻딘 칸의 대군을 소수의 병사들만으로 물리치는 데 성공하면서 얼마나 인도 토후들의 군대가 서구 군대에 비해 약한지 깨달았다. 인도 군대가 머릿수만 많았지 화력은 빈약해서 까보면 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것.[30] 이 전쟁 이후로 퐁디셰리를 거점으로 삼아 각 토후국들의 승계 문제나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남아시아권에 대한 영향력을 늘려나갔다.
3.2.2. 제2, 3차 카나틱 전쟁
제1차 카나틱 전쟁이 끝나고 또 얼마되지 않은 1749년에는 제2차 카나틱 전쟁이 터진다. 1차 카나틱 전쟁에서 승리해 기세등등해진 프랑스가 군사적 우위를 이용해 남인도 지방에 패권을 늘려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인도 토후들의 승계 전쟁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프랑스를 막고자 했던 영국 역시 개입하면서 대리 전쟁이 터진 것이다. 발단은 하이데라바드 번왕국의 아사프 자흐 1세의 죽음이었다. 아사프 자흐 1세가 1748년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나시르 중과 손자 무자파 중 사이에서 후계를 놓고 싸움이 일어났는데, 사실상 적이나 다름없던 카나틱의 나와브 안와룻딘이 나시르 중을 지원하자[31] 프랑스는 무자파 중을 지지했고 영국은 또 반대로 나시르 중을 지지했다. 특히 이 시점에 마라타 동맹에 구금되어 있던 찬다 사히브가 풀려나는데, 찬다 사히브는 옛 카나틱의 사와브인 도스트 알리 칸의 양자로 안와룻딘을 증오했다. 찬다 사히브는 역시 안와룻딘을 적대하던 프랑스에 붙어 카나틱을 되찾으려 들었다. 안와룻딘이 전투 도중 전사하자[32] 이제는 하이데라바드 번왕직에 이어 카나틱의 나와브 자리도 공백이 생기게 된다.이제 영국과 프랑스는 2개의 자리를 두고 자리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하이데라바드의 니잠[33]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안와룻딘의 사망으로 공백이 비어버린 카나틱 나와브의 자리였다. 안와룻딘에게는 무함마드 알리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무함마드는 안와룻딘 사망 직후 찬다 사히브가 군대를 이끌고 카나틱 지방으로 진군해오자 겁을 먹고 달아났다. 안와룻딘을 치워버린 프랑스는 거칠 것 없이 나시르 중을 죽이고 무자파 중을 하이데라바드 니잠으로 옹립하면서 하이데라바드와 카나틱을 모두 얻어가게 된다. 그러나 무자파 중이 즉위하자마자 몇 달 후 급사하자 프랑스는 아사프 자흐 1세의 또다른 아들인 살라밧 중을 새 하이데라바드 니잠으로 세웠고, 그 대가로 막대한 양의 재화와 조세권을 뜯어갔다. 상황이 지나치게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비상이 걸린건 영국이었다. 영국은 로버트 클라이브[34]를 시켜 카나틱의 수도 아르콧을 기습함락했고, 이어진 전투에서 찬다 사히브가 전사하자 영국이 밀던 무함마드 알리가 카나틱의 나와브로 즉위했다.
이제 하이데라바드는 프랑스가, 카나틱 지방은 영국이 접수하면서 전세는 백중세로 접어들었다. 전쟁을 지원하느라 엄청난 전비 손실을 겪은 프랑스와 영국 양국 모두 1754년 퐁디셰리에서 평화조약을 맺어 제2차 카나틱 전쟁을 종전한다. 각자 무함마드 알리와 살라밧 중을 인정하고 더이상 인도 내 정치계에 관여하지 않는 조건이었다. 영토는 조약 체결 시점에 양측이 점령한 국경선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한편 인도 내 프랑스 총독이던 듀플렉스는 2차 카나틱 전쟁에서 지나치게 많은 물자 소진과 과소비 때문에 프랑스 본국의 분노를 사서 총독직을 박탈당하고 프랑스로 송환되어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 전쟁의 의의로는 더이상 인도인들이 제 운명을 결정하는 데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히 드러났다는 점이다. 명목상으로는 무함마드 알리나 살라밧 중이 여전히 지방의 통치자였지만 서서히 서구 열강들에게 경제적, 정치적으로 종속되며 허수아비 신세가 되어간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의 인도 침탈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후 3차 카나틱 전쟁이 일어나지만 이 전쟁이 일어날 즈음 무굴 제국은 전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1756년 7년 전쟁이 유럽에서 터지자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격돌하게 되는데, 이때 인도에서도 새로운 전선이 또 생겨난다. 하지만 3차 카나틱 전쟁의 경우 이전의 1차와 2차 전쟁과는 확연히 달랐다. 제일 큰 차이점은 프랑스가 재정적으로 고갈되어버린 상태였다는 것. 영국군은 프랑스의 허점을 파고들어가 1757년 프랑스의 핵심 무역소이던 찬단나가르를 함락했고, 마드라스를 치고 들어오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1760년에는 완디워시 전투에서 영국이 프랑스에 대승을 거두며 완전히 전쟁에 승기를 잡았고 1761년에는 프랑스의 대인도 본거지나 다름없던 퐁디셰리를 함락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결국 1763년 체결된 파리 조약에서 영국은 찬단나가르와 퐁디셰리를 프랑스에게 되돌려주었지만 대신 인도 내 프랑스의 모든 영향력을 몰아내버렸다. 프랑스 관리들이 인도에 출입할 때는 항상 영국의 협조를 받아야했고 프랑스 상인과 인도 간의 직접 무역을 금지했다. 이렇게 인도를 독점하게 된 영국은 아무 경쟁자 없이 혼자서 인도를 집어삼키기 위한 밑작업에 들어간다.
어쨌든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가 이마드 울물크에 의하여 쫒겨나고 새 황제로 즉위한 알람기르 2세[35]는 날때부터 유약한 성정으로 황제에 걸맞은 인물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마드 울물크가 허수아비로 세워놓은 이유가 그것이기도 했지만. 이마드 울물크는 오히려 무굴의 최대 적국이던 마라타 동맹의 손을 잡고 제국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심지어 황족들 가운데에 굶는 자가 나올 정도로 황실의 신세가 비참해졌고, 알람기르 2세의 반감은 날로 심해졌다. 그러던 와중 옛날에 마누푸르 전투에서 패배해 힘을 추스르며 기회만을 노리던 아프가니스탄 두라니 왕조의 군주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1755년 북인도를 다시 침공했다. 1757년 10월에는 델리까지 밀고 들어와 이마드 울물크를 쫒아냈고, 대신 무굴 제국을 배신하고 두라니 쪽에 붙은 로힐랴족 장군인 나집 웃다울라를 델리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델리에서 도망친 이마드 울물크는 친하게 지내던 마라타 동맹에게 막대한 돈을 바치고 대군을 끌어와 델리를 되찾았고, 나집 웃다울라는 얼마 못가 쫒겨났다. 그러나 황제가 다시 두라니 왕조의 힘을 빌어 저를 축출할까 두려워했던 이마드 울물크는 알람기르 2세를 살해하고[36] 샤 자한 3세를 옹립했다.
3.2.3. 영국의 벵골 합병
플라시 전투의 상상화. 영국이 벵골 지방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기념비적인 전투다.
샤 자한 3세는 오래 못가고 제위에서 쫓겨났다. 이마드 울물크의 횡포는 날로 심해졌고, 이마드 울물크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재화를 횡령하면서 그에 대한 제국 신민들의 명망은 땅으로 떨어졌다. 결국 잠시 쫒겨갔던 나집 웃다울라가 두라니 왕조의 도움을 받아 대군을 이끌고 델리를 재정복했다. 나집 웃다울라는 알람기르 2세의 아들들 중 가장 정통성이 강했던 샤 알람 2세를 새로운 무굴 황제로 옹립한다. 이렇게 옹립된 샤 알람 2세의 재위기에 인도는 마라타 동맹이나 아프가니스탄 따위와는 비교와도 안되는 위협에 직면한다. 바로 인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야심으로 충만했던 영국 동인도 회사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알람기르 2세 시절부터 이미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벵골 수바를 갉아먹고 있었다. 영국은 원래 벵골의 나와브던 시라지를 플라시 전투에서 쫒아내고 영국에 붙은 미르 자파르를 벵골 나와브로 임명했지만, 알람기르 2세와 무굴 궁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샤 알람 2세는 어느 정도 제국이 안정을 되찾자 바로 벵골 지방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1760년 웃드 지방의 나와브이자 당시 제국의 대재상이던 슈자 웃다울라, 그리고 로힐랴족 니잡 웃다울라 등이 지휘하는 3만의 대군이 벵골과 비하르의 파트나 지방으로 향했고, 도중에 징집을 하면서 심지어 4만에 이르는 엄청난 대군으로 불어났다. 4만 무굴 대군이 몰려오자 겁에 질린 미르 자파르는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로버트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군이 무굴 군대를 대파하며 샤 알람 2세의 꿈은 무위로 돌아간다. 하지만 미르 자파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의 간섭을 지긋지긋해하며 다시 무굴 제국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번이야말로 영국을 벵골에서 몰아낼 절호의 기회라 여겼던 샤 알람 2세는 대군을 끌어모아 벵골로 재진군했다. 하지만 1764년 10월 22일 북사르 전투에서 무굴 군대가 대패하며 또다시 패전기록을 갱신, 무굴 제국이 벵골을 되찾는 일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샤 알람 2세는 알라하바드 조약에서 벵골의 세수권과 사실상의 통치권을 넘겨주었고 다시는 벵골에 대한 통치권을 되찾지 못했다.[37]
3.2.4. 마라타 동맹의 보호국
샤 알람 2세는 알라하바드 조약 체결 후에도 알라하바드에서 계속 머물렀다. 영국과의 조약 내용 때문에 수도 델리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 대신 나집 웃다울라가 델리에서 황제의 대리인을 자처했다. 1770년 나집 웃다울라가 사망하고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나집 웃다울라의 아들 자비타 칸이 자리를 이어받자 기회를 노리던 마라타 동맹의 마하다지 신데는 북인도를 침공하여 수도 델리를 정복했다. 이때 마하다지 신데는 명분을 갖추기 위해 무굴 황제를 델리로 데려가고자 했고, 샤 알람 2세는 마하다지 신데의 호송을 받아 1771년 5월에 알라하바드를 출발하여 1772년 1월 델리에 도착했다. 그렇게 무굴 제국은 마라타 동맹의 보호국으로 전락해 근근히 목숨을 이어나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래도 미르자 나자프 칸이라는 걸출한 군사 영웅이 등장하며 최후의 불꽃을 불태웠다. 미르자 나자프 칸은 군사개혁을 실시하고 군대의 근대화를 추진, 재정개혁까지 이룩하며 무굴 군대를 강군으로 훈련시켰다. 덕분에 1779년에는 5천이 넘는 시크교 병사들을 죽이는 등 제국을 잠시 동안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때 저멀리 남인도의 마이소르와 카르나타카 나와브도 무굴 황제의 권위를 인정할 정도로 무굴 제국이 부활하는 듯 보였다고. 그야말로 마지막 부흥기였던 셈.이렇게만 계속 나갔다면 무굴 제국은 이전만큼은 아니어도 북인도에 대한 영향력은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겠지만..... 1782년 미르자 나자프 칸이 사망해버리고 말았다. 미르자 나자프 칸이 죽자 4명의 부관이 총사령관의 지위를 놓고 내분을 벌였는데, 마하다지 신데가 이에 개입하여 4명의 부관을 제압하고 무굴의 내란을 진정시킨다. 샤 알람 2세는 이에 따라 1784년 마하다지 신데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무굴의 섭정이자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게 된다. 그러나 힌두교도가 무굴 제국의 최고위직을 겸하는 상황에 무굴 궁정의 이슬람교도가 반발했고, 1787년 랄소트 전투에서 라지푸트족의 암베르-마르와르 연합군에 마하다지 신데가 패배하자 마하다지는 무굴 궁정에서 일시적으로 실각한다. 그와중에 샤 알람 2세는 이해되지 않는 실책들을 저지르며 기껏 미르자 나자프 칸이 키워놓은 군대를 허물어버렸다. 심지어 부정부패로 실각한 마자드 웃다울라를 다시 대재상으로 임명하는 등 최악의 실수를 연발했던 것. 마자드 웃다울라는 시크교도들에게 뒷돈을 받고 2만에 달하던 대군을 5천 수준으로 줄여버리고 군비를 횡령하는 등 제국을 아예 말아먹을 작정으로 거하게 나라를 해먹었다. 이렇게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다.
마자드 웃다울라 임명이 되고 얼마 후, 나집 웃다울라의 손자이자 로힐랴족의 군주였던 굴람 카디르가 델리를 침공했다. 그리고 이때 무굴 제국의 권위는 정말 땅바닥에서도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굴람 카디르는 함부로 황궁에 침입해 정말 할 수 있는 패악질이란 패악질은 모두 부리고 다녔다. 그는 붉은 요새를 약탈해 2억 5천만 루피에 달하는 보물들을 훔쳐갔고 1788년 8월 10일에 샤 알람 2세의 눈을 찔러 장님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피를 흘리는 황제를 시종들이 부축하려하자 그들의 목마저 베었다고 한다. 굴람 카디르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황녀들의 옷을 벗긴 뒤 능욕한 뒤 자신의 앞에서 나체로 춤을 추게 만들기도 했다.[38] 심지어 늙은 황제의 수염을 잡고 흔들기까지 했다니 굴람 카디르가 얼마나 막나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굴람 카디르가 이렇게까지 막나가자 실각되어있던 마하다지 신데가 1788년 10월에 군대를 이끌고 굴람 카디르를 죽인 후, 샤 알람 2세를 복위시킨 뒤[39] 무굴의 보호자를 자처했다.[40] 샤 알람 2세는 고마움을 표하고 그를 '무굴 제국의 보호자'라 불렀다.
3.3. 영국의 허수아비 제국
샤 알람 2세로부터 인도 통치권을 양도한다는 서약을 받아내는 영국인들. |
인도 대륙의 패권을 두고 영국 동인도회사와 마라타 연맹 간에 일어난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 와중에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가 1803년에 영국에 점령된다. 1803년 델리 공성전에서 마라타 군대를 몰아내고 델리에 입성한 영국군은 샤 알람 2세를 나름대로 예를 갖추어 대했다. 물론 실권이나 실질적인 부나 재화는 단 하나도 주지 않았지만 명예직 정도로는 대접해 준 것. 샤 알람 2세에게는 그저 주둔군이 바뀌었을 뿐 다른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영국은 무굴 황제의 타이틀을 교묘히 이용해 그의 이름으로 동전을 발행하고 각지에 포고문을 선포하는 등 샤 알람 2세를 훌륭한 얼굴마담으로 활용했다. 인도 각지의 나와브와 수베다르들도 (절대 영국군이 무서워서는 아니고) 티무르 제국 시대부터 내려온 무굴 황실의 권위는 존중했던지 기도 시간에 그의 이름을 넣어 기도문을 읊거나 무굴 제국이 내린 칭호를 그대로 유지하는 등 무굴 제국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샤 알람 2세는 그렇게 말년에는 영국의 허수아비로 살다가 1806년 11월 19일 자연사로 험난한 생을 마감했다.
47년 동안 무굴 제국이 허물어지는 꼴을 봐야했던 샤 알람 2세가 죽자 악바르 2세가 새 황제로 즉위했다. 이름은 옛 악바르 대제와 동일한 '악바르'였지만 상황은 전혀 달랐다. 악바르 2세 시절의 무굴 제국은 델리의 시가지 정도만을 간신히 다스리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델리라는 도시 자체는 영국군의 치안 통제 하에서 꽤나 안정을 되찾았지만 무굴 제국이라는 국가로서는 도시 하나만을 움켜쥔 비참하기 그지없는 수준이었던 것. 다만 영국의 보호국 처지이기는 하나 번왕국이나 토후국 수준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형식적으로는 '전(全) 인도의 황제'로 군림하면서 황제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악바르 2세가 워런 헤이스팅스 총독에게 제국 주권의 온전한 양도를 거부하는 등 영국의 심기를 거스르자 이런 형식적인 대우도 끝나버린다.[41] 영국은 악바르 2세를 '인도의 황제'에서 '델리의 왕'으로 신분 격하해버렸으며, 더이상 무굴 제국의 관직을 받는 시늉도 하지 않았고 발행하는 동전에 황제의 초상화가 아닌 동인도회사의 문장을 새겨넣었다. 악바르 2세는 1806년부터 1837년까지 재위했고, 재위기간 내내 보기좋은 얼굴마담 수준으로 살면서 델리의 붉은 요새 밖으로는 제대로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4. 세포이 항쟁과 멸망
1857년 델리를 공격하는 영국군 | 영국군에게 체포당하는 바하두르 샤 2세 |
세포이들의 장악 하의 델리는 온갖 혼란이 일어났다. 약탈이 빈번했고 치안은 무너져 행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못했다. 바하두르 샤 2세는 제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미르자 무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델리를 통제하도록 했지만, 황제의 명령도 무시하는 세포이들이 황태자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밖에서는 영국군이 식량 보급줄을 끊어버리고 대군을 소집해 델리 탈환을 위해 진군해오면서 델리는 나날로 위태로워졌다. 결국 9월에 영국군이 델리를 가볍게 제압하는 데 성공하면서 바하두르 샤 2세의 짧은 황제 생활도 끝난다. 바하두르 샤 2세는 겁에 질려 후마윤 황제의 영묘로 피신했지만 윌리엄 호드슨 소령이 9월 20일에 체포했다. 황제를 사로잡은 윌리엄 호드슨 소령은 직권으로 황태자 미르자 무굴을 포함해 바하두르 샤 2세의 아들 미르자 키즈르 술탄, 손자 미르자 아부 바크트를 권총으로 처형하고 델리 탈환을 선포했다.[44] 영국은 직후인 9월 21일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했다.
영국인들은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고 책임을 묻기 위해 전범 재판을 열었다. 재판은 약 21일 간 진행되었다. 원래는 동인도 회사의 고위 간부들이 편하게 참석할 수 있는 캘커타에서 재판을 열기로 했지만 나중에 일정이 바뀌어 델리 붉은 요새에서 법정이 열렸다. 당연히 항쟁의 핵심 관계자였던 바하두르 샤 2세도 재판의 주요 피고인이었고, 황제는 총 4개의 죄목으로 기소당했다. 그 4개의 죄목들은 다음과 같다.
- 병사들의 항명을 방관하고 뒤에서 지원한 죄
- 영국 정부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을 지원하고 이에 협조한 반란죄
- '인도의 황제'라는 직함을 함부로 참칭한 죄
- 선량한 기독교도들을 살해하는 데에 협조한 죄
바하두르 샤 2세는 재판 20일 차에 항변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재판록을 살펴보면 바하두르 샤는 자신이 거의 반강제적으로 세포이들에게 휘둘렸다고 항변했다. 세포이들이 자신의 허락도 없이 황제의 인장을 찍어 칙령을 내리거나 문서를 작성했다는 것을 증거로 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바하두르 샤 2세는 항쟁 내내 무기력했고 거의 얼굴마담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가 법정에서 말한 것만큼 완전한 허수아비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가 주도해서 추진한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당연히 영국인들이 늙은 황제의 항변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판사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대신 호드슨 경에게 자진항복한 것을 참작해 사형에서 미얀마 랑군으로의 추방형으로 형을 낮춰줬다. 결국 바하두르 샤 2세는 1858년 10월 7일 새벽 4시, 가장 가까운 가족들만을 데리고 영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쓸쓸하게 미얀마로 추방당했다. 이렇게 무굴 제국은 330년 만에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문제는 330년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150년이 혼미한 상태였다는 것이지만...
무굴 제국을 멸망시키고 나머지 남인도, 스리랑카, 미얀마까지 병합한 영국은 1877년 전 인도 반도를 아우르는 인도 제국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1]
호랑이를 뜻하는
페르시아어가 'babr'인데, 여기서 파생된 이름이다.
[2]
티무르의 3남 미란 샤의 자손이다.
[3]
모계로 모굴리스탄의 유누스 칸의 자손인데 그는 칭기스칸의 둘째인 차가타이 계통이다.
[4]
참고로 캄란 미르자는 1557년에 메카에 당도하기 직전 죽었다고 한다
[5]
사실 바이람 칸을
메카로 성지순례를 보낸다는 명분이었으나, 바이람 칸은 중도에 의문사를 당해 죽었다.
[6]
무굴 제국이 형제들의 반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흔들리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
[7]
이름이 '조다'로 알려져있지만, 그 밖에 다른 여러가지 이름이 있다.
인도 영화 '조다 악바르'는 이 공주와 악바르 사이의 이야기이다. 영화에서는 조다 공주가 잘랄루딘 무함마드(악바르의 본명)의 유일한 아내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악바르에게 부인이 36명이나 있었다.
[8]
바부르, 후마윤과 함께 인도로 온 기존 무굴 제국의 지배층, 즉 중앙아시아 출신의 튀르크인들을 견제하기 위함이라 추측된다. 튀르크인들이 중앙 집권 체제와 왕권 강화를 아주 싫어했던 것은 이 시절도 여전했던 모양이다.
[9]
이 문장에 대하여 훗날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된
자와할랄 네루는 "그것이 무신론자라면, 우리에게는 무신론자가 많을수록 좋다."라고 비꼬는 글을 남겼다.
[10]
다수설이라 하면 악바르가 단지 이슬람의 (이단적인) 종파를 만들었다는 것. 악바르가 만든 종파는 악바르를 (준)성인으로 칭송했다. 이는 악바르가 그 자신의 신민들에게 그 자신에 대한, 더 나아가 무굴 황실 그 자체에 대한 충성에 신성성을 더해주기 위함이라 추측된다. 그에 대한 일례로 악바르의 사후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자한기르는 딘 이 일라히의 주장 대부분은 폐기했지만 왕권의 강화에 도움이 되는 부분은 모두 남겼다. 또, 종교적 경직성으로 많은 비난을 받는 아우랑제브도 왕권의 강화에 도움이 된다면 악바르의 이단적 주장을 실행에 옮기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후일 무굴 제국이 영국에 대항하는 저항에 지도자로 추대된 것 역시 악바르의 종파가 남긴 영향이라 평가된다.
[11]
이 종교/종파가 지나치게 악바르의 후빨을 한 탓에, 악바르의 이와 같은 행위를 노망이 아닌가 하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절대 아니다. 이 종교/종파를 악바르가 선포했을 때 악바르의 나이는 고작 40살에 지나지 않았고, 딘 이 일라히는 종교라기보다는 일종의 사상에 더욱 가까운 것이었다.
[12]
추가하자면 악바르가 이 종교를 창시한 목적은 위에 나온 바와 같이 힌두, 이슬람, 시크, 자이나 등 당시
인도 반도에 존재하던 여러 종교들을 통합하는 것에 있었다. 각 종교의 좋은 점(본인의 생각에)들을 짬뽕하여 만든 것이 바로 악바르의 종파였다.
[13]
재미있는 것은 무굴 제국의 행정 체계는 사실 후마윤을 인도 바깥으로 추방했던 셰르 샤 수르의 체계에 기반하고 있다.
[14]
당시 인도에서 가장 부유했던 벵골 지역은 1576년에 악바르에게 항복했다.
[15]
툴시다스의 주저 람차리트마나스는 산스크리트 서사시 라마야나를 힌디어의 방언인 아와디어로 개작한 것으로 북인도에서 가장 인기있는 경전이자 서사시 중 하나로, 2010년도 기준 단일출판사 누적 판매량이 7천만 부 정도였다. 단테의 신곡이나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과도 견줄 만한 작품임에 틀림없으나, 외부적인 인지도는 발미키의 원본 '라마야나'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 유감.
[16]
그래서 외국의 사신들이 자한기르에게 티무르와 관련된
유물을 선물로 주거나, 유물을
미끼로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했단다.
[17]
악바르 시절의 1년 세입이 영국 파운드화로 1,750만 파운드 정도였는데, 샤자한 시절의 1년 세입은 3,770만 파운드 이상이었다고 한다. 아우랑제브의 시절에는 3,860만 파운드 이상이다!
[18]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은 샤 자한이 왕자 신분이었던 시절부터 굉장히 사이가 좋았으며 심지어는 전쟁터도 같이 따라가 함께 할 정도였다. 둘 사이에는 14명의 아이들이 있었으며 이들 중 7명만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19]
참고로 당시 무굴 제국의 연 세입은 3억 180만 루피 정도였고, 연간 약 145만 루피가 들어갔으니 연간 조세 수입의 2% 가량이 고작 무덤 축조 따위에 들어간 것이다. 적어보일지 몰라도 국세의 2%는 절대 적은 수치가 아니다.
[20]
왼편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우랑제브가 보인다.
[21]
그나마 자신의 아내가 묻힌 타지마할이 보이는 곳에 유폐된 게 다행이랄까... 샤 자한은 남은 여생 동안 아그라 성의 발코니에서 서서 하염없이 타지마할을 바라봤다고 한다.
[22]
참고로 아우랑제브는 결국 마라타를 완전히 복속하는 데에 실패한다. 시바지 본슬레의 후계자인 샴부 본슬레가 데칸 고원에서 무굴 제국군을 격퇴하는 데에 성공했으며, 얼마 안가 아우랑제브가 사망하고 이후 무굴이 급격한 쇠퇴기를 맞으면서 무굴 제국의 인도 남부 평정은 끝까지 이루어지지 못했다.
[23]
아우랑제브 또한 죽기 직전
'나는 전쟁을 너무나도 좋아했다.'라며 후회했다.
[24]
여담으로 루이 14세 역시 "
나는 전쟁을 너무나도 좋아했다."고 말한 바 있다.
[25]
바하두르는 페르시아어로 '용사' 혹은 '용감한'이라는 뜻이 있다.
[26]
아짓 싱은 그를 저잣거리로 끌어내 바늘로 눈을 찔러 실명시키고 죽여버렸다고 한다.
[27]
아와드 지방의 사다트 알리 칸, 벵골 지방의 슈자웃딘 무함마드 칸 등 유력한 지방 총독들이 말이 신하국이지 거의 독립국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로 변하면서 제국의 붕괴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되어 버렸다. 특히 군사적으로 강했던 하이데라바드, 제국 재정의 절반을 담당하던 벵골의 독립은 무굴 제국에게는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28]
자베드 칸은 어마어마한 양의 국고를 횡령하는 등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다.
[29]
1748년 10월 18일
신성 로마 제국의
아헨에서 체결된 조약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종결한 평화 조약이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 사르데냐 왕국, 오스트리아가 서명했다.
[30]
그동안 유럽 열강들이 직접 인도 군대와 맞붙어본 적이 없어 국력이 가늠이 안되어 함부로 싸움을 걸지 않았지만, 이 전투 이후로 속빈 강정이란 걸 알아채고 노골적인 침입을 시작한다.
[31]
특히 무굴 제국 역시 나시르 중을 공식 하이데라바드 총독으로 인정했다.
[32]
1749년 암부르 전투에서 찬다 사히브의 기습으로 죽었다.
[33]
나와브보다 서열이 높은 독립적인 왕의 칭호.
[34]
후일의 벵골 총독이 되는 인물이자 영국의 인도 진출에 핵심적인 발판을 놓은 인물이다.
[35]
알람기르 1세는 아우랑제브다.
[36]
그는 황제에게 힌두교 성인이 궁전 앞에 와있다고 거짓말을 쳤다. 성인이 와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황제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궁궐 밖으로 나갔지만 이는 함정이었고 이마드 울물크가 보낸 암살자들이 그를 참혹히 살해했다.
[37]
이후 벵골은 완벽히 영국 식민지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다. 명목상의 통치권은 무굴 황제에게 있었지만 알짜배기인 세수권은 영국이 가지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무굴 황제의 징세관'이라는 직함을 달고 벵골을 다스렸다.
[38]
이때 당시 황태자였던
악바르 2세도 함께 여자 춤을 추게 만들어 싸잡아 모욕했다.
[39]
굴람 카디르는 중간에 샤 알람 2세를 폐위시켜버리고
샤 자한 4세를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했지만 굴람 카디르의 실각과 함게 샤 자한 4세도 함께 살해당했다.
[40]
황제가 장님이 되어버렸다는 말을 듣고 동정심을 느낀 마하다지 신데는 굴람 카디르의 눈과 귀를 산 채로 잘라 샤 알람 2세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
[41]
악바르 2세는 자존심이 높아 자신을 접견하러 온 영국인들을 종처럼 대했다. 악바르 2세를 연금받은 퇴물 늙은이 정도로 취급했던 영국인들이 보기에는 기막힌 일이었다.
[42]
실제로 바하두르 샤 2세는 재능있는 시인이었다.
[43]
세포이들 상당수는 힌두교도들이었는데, 바하두르 샤 2세가 평소에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무슬림인 그를 황제로 올리는 데 동의했다.
[44]
정확히는 이미 대세가 기운 걸 안 황후 지낫 마할이 황제가 델리를 탈출하지 않고 영국에 투항하면 황제와 황후 자신, 황후 본인이 낳은 세 황자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영국군과 거래한 것이다. 이때 나머지 황자들의 신원보장은 약속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머지 아들들과 손자가 처형된 것을 알게 된 바하두르는 큰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