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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클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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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동인도 회사의 장교2.3. 벵골의 정복자2.4. 영국의 인도 식민화 정책의 기반을 닦다2.5. 비참한 말년

1. 개요

영국이 인도를 식민화시키는 토대를 마련한 인물.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벵골 토후국 군대를 물리치고 영국의 벵골 지배권을 확보했으며 무굴 제국 황제와 담판하여 영국이 벵골을 영구 소유하는 것을 인정받는 협약을 맺게 했다. 그러나 말년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고 끝내 자살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로버트 클라이브는 1725년 슈롭셔에 있는 가족 소유지인 스티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여러 해 동안 영국 의회에서 몽고메리셔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어머니는 멘체스터의 나다니엘 가스켈 경의 딸이었다. 클라이브는 13명의 자식들 중 장남으로 7명의 여동생과 5명의 남동생들이 있었는데, 그 중 6명이 유아기 때 사망했다. 어린 시절 클라이브는 공부는 뒷전으로 둔 채 싸움이나 일삼는 불량 청소년이었다. 그는 런던의 머천트 테일러 학교로 보내졌으나 동창생들과 싸움박질이나 일삼고 선생님들에게 반항해 여러 차레의 징계를 받았다.

결국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기초 교육을 이수하기 위해 허트포드셔에 있는 무역 학교로 보내졌다. 이때 철이 든 그는 나름대로 공부에 전념했으며 그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개발했다. 이후 무역학교를 졸업한 클라이브는 1743년 또는 1744년 동인도 회사에 들어가 '작가' 신분으로서 마드라스에 파견되었다. 그는 도중에 브라질에서 9개월 동안 억류 생활을 하는 동안 포르투갈어를 배웠다. 인도에 도착한 그는 처음 2년 동안 향수병에 걸려 종종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던 1746년 마드라스가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고 그는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에 그는 기회를 틈타 마드라스를 탈출하여 남쪽으로 32km 떨어진 성 데이비스 요새로 피신했다. 그는 그 요새에서 소위로 복무했으나 1748년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동인도 회사의 직원으로 돌아갔다.

2.2. 동인도 회사의 장교

1751년, 클라이브는 로렌스 소령에 의해 대위에 임명되는 동시에 켈커타에 주둔한 영국군의 보급을 책임지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얼마 후, 카나르틱의 나와브 챤다 사히브는 소규모 영국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트리치노폴리를 공격했다. 이에 클라이브는 200명의 유럽인과 300명의 세포이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트리치노폴리 요새를 사수했다. 챤다 사히브는 프랑스군 지원부대와 함께 이 요새를 포위했고, 클라이브의 병사들은 50일간의 포위전을 거치며 120명의 유럽인과 200명의 세포이로 줄어들었다. 이에 마드라스 주지사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 구원병을 파견했으나 도중에 격퇴되었다.

그러나 클라이브는 끝까지 항복을 하지 않고 버텼고, 그 사이 영국으로부터 고용된 무함마드 알리 휘하 3천 명의 마라타 군대가 챤다 사히브의 본거저인 아코트로 진격했다. 이 소식을 접한 챤다 사히브는 요새를 한 차례 공격했으나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아코트로 돌아갔다. 이후 클라이브는 인도로 돌아온 로렌스 소령의 휘하에서 챤다 사히브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영국 의회로부터 시가 700파운드 상당의 검을 수여받았다. 1753년 초, 클라이브는 마가렛 메스켈린 양과 결혼한 후 마드라스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클라이브는 에어 쿠테 소령을 파견해 프랑스군을 추격해 베나레스까지 진군하게 했고, 포드 대령을 비자가파탐으로 파견해 마드라스의 북부 지구를 총괄하게 했다.

2.3. 벵골의 정복자

1756년 클라이브는 인도로 돌아와 성 데이비스 요새의 주지사가 되었으며 인도 주둔 영국군의 중령이 되었다. 그러던 1756년 6월 16일 벵골 나와브 시라지 웃 다울라는 코끼리 50마리를 포함한 5만에 달하는 병력과 화포 50문을 이끌고 캘커타로 진군해 영국군이 세운 윌리엄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결국 6월 20일 윌리엄 요새 수비군 146명은 중과부적임을 인지하고 백기를 들었다. 시라지는 이들을 윌리엄 요새 내의 지하감옥 '블랙홀'에 가뒀는데, 요새 사령관 존 스파이나 홀웰이 훗날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이곳에 갇힌 이들은 질식 상태에 빠져 대부분이 사망하고 23명만 살아남았다. 영국인들은 이에 분노했고, 영국 동인도 회사는 로버트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인 병사들과 세포이 용병대를 파견해 윌리엄 요새를 탈환하게 한다.

1757년 2월 4일, 클라이브는 2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벵골 토후국 군대 5만 명을 기습했다.( 캘커타 전투) 그는 당초 기습을 성공시켜 적을 와해시키고 시라지를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대신 윌리엄 요새를 탈환했다. 이후 영국군은 2월 4일 저녁 적의 진지에서 400m 이내까지 대담하게 진군해 무력시위를 벌인 뒤 요새화된 진지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며칠 후, 시라지는 영국에게 캘커타를 돌려주고 영국인들의 재산을 반환하며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시라지는 영국의 위협을 영구히 제거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프랑스와 연합하여 영국군을 축출하기로 결의했다.

1757년 3월, 클라이브는 프랑스군이 세워놓은 찬드나가르 요새를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라지는 영국과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군과 연합해 영국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사전에 시라지의 이러한 음모를 감지한 클라이브는 벵골 토후국 군 사령관 미르 자파르와 밀약을 맺어 그가 시라지를 배신하는 대가로 벵골 나하브에 추대하기로 했으며 1만 파운드를 추가로 그에게 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1757년 6월 23일에 벌어진 플라시 전투에서, 클라이브는 미르 자파르의 배신에 힘입어 2,800명으로 벵골 토후국군 군대 5만 명을 격파했다. 시라지는 도망치던 중 미르 자파르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클라이브는 6월 29일 미르 자파르를 벵골 나하브로 추대했다. 미르 자파르를 꼭두각시로 부려먹기 위해 영국의 입장을 그에게 전달할 대리인으로서 25세의 청년 워렌 헤이스팅스를 임명한 뒤 1758년 5월 캘커타로 돌아갔다.

1759년, 샤 알람은 벵골을 정복하기 위해 우드 족과 나와트 족과 연합하고 4만의 대군을 일으켜 패트나로 진격했다. 벵골의 나와브 미르 자파르는 공포에 질려 아들을 클라이브에게 보내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클라이브는 즉각 출격하여 샤 알람의 군대를 물리쳐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1760년, 클라이브는 새포이 부대를 재편성하고 캘커타시의 개조 작업을 지휘하다가 건강상의 문제로 영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그는 적어도 30만파운드의 재산을 모았고 연금을 연간 2만 7천 파운드를 받게 되어 영국 최고의 거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영국에서 3년간 머무르면서 동인도 회사의 시스템을 개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76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 마무리된 후, 클라이브는 영국에게 반기를 들려 했던 벵골 나와브 미르 자파르를 축출하고 무하마드 알리를 나와브로 옹립했다.

2.4. 영국의 인도 식민화 정책의 기반을 닦다

1764년, 인도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무함마드 알리가 급사한 후 벵골 나와브에 선출된 미르 카심은 영국 상인들에게만 부여된 면세특권을 폐지하고 파트나의 동인도회사 직원들을 살해했다. 이후 그는 영국을 축출하기 위해 무굴 제국 황제 샤 알람 2세에게 지원을 호소했고, 샤 알람 2세는 이에 따라 벵골을 전격 침공했다. 동인도 회사는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클라이브에게 벵골 총독과 인도 방면 영국군 총사령관의 직책을 수여하고 벵골로 파견했다. 클라이브는 벵골에 도착한 뒤 문로 소령에게 7천 명의 병력을 줘서 무굴 제국군을 막게 했고, 문로 소령은 1764년 10월 북사르 전투에서 무굴-아와드-벵골 연합군 4만 명을 격파했다.

1765년 5월 3일 캘커타에 도착한 클라이브는 벵골의 나와브 미르 카심을 몰아내고 벵골 전역을 영국의 지배하에 통합시키고 8월 12일 베나레스에서 무굴 제국 황제 샤 알람 2세와 대면하여 영국 동인도회사가 벵골, 비하르, 오리사 일대의 징세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알라하바드 조약'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의 세 지역에 살고 있는 3천 만 인도인들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고 매년 4백만 스털링의 수익을 올렸다. 클라이브는 또한 무굴 제국의 모든 부관들 중 최고인 데칸 최고위직에 올랐다.

이후 클라이브는 회사 시스템을 재편성했다. 그는 동인도 회사 직원들이 박봉에 시달리면서 부정부패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던 것을 개선하고자 직원들의 봉급을 인상했고 인도인들로부터 선물을 받는 것을 금지했으며, 내륙 무역에 참여하는 것을 중단한 회사원을 처벌했다. 또한 그는 전군을 3개 군단으로 나누고 각 군단의 정원을 완전히 채워서 그 자체로 어떠한 인도 토착군과도 대항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2.5. 비참한 말년

1767년 2월 인도를 마지막으로 떠난 클라이브는 1769년 에스더 근처의 클레어몬트에 있는 저택과 정원을 구입했다. 이제 말년을 편히 보내는 듯했던 그였지만 1772년에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영국 의회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실태에 대해 조사하던 중 클라이브가 지나치게 막대한 부를 챙긴 점을 지적하며 그가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청문회에 소환되어 여러 의원들로부터 힐난을 들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막강한 권력을 비교적 제한적으로 이용했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나 자신도 나의 절제심에 놀랐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의혹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1769년과 1773년 사이에 벵골에서 큰 기근이 일어나 벵골의 인구가 3분의 1로 줄어들었는데도 영국 동인도 회사의 수익이 오히려 늘어난 사실을 들어 클라이브 등 회사 관계자들이 사익을 챙기고자 무역과 토지세의 독점권을 남용했을 거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또한 1773년 클라이브의 정적 중 한 명이었던 존 버고인 장군은 클라이브의 재산 중 일부는 회사와 정부의 희생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클라이브는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면서 "내 재산을 가져가도 좋다. 그러나 내 명예만은 가져갈 수 없다."고 발언했고, 의회는 투표를 실시한 뒤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클라이브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의혹은 끈질기게 제기되었다.

1774년 11월 22일, 클라이브는 우울증과 아편 중독에 시달린 끝에 런던의 버클리 스퀘어 홈에서 펜 나이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했다. 향년 49세. 그는 슈톱셔의 생가 근처에 있는 모어튼 세이의 성 마가렛 교회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