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2:11:55

리카르도 사모라

리카르도 사모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23대
클럽
파일: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로고.svg

19대, 21대
파일:RCD 에스파뇰 로고.svg

19대, 25대, 27대

4대
카렐 쿠드르나
파일:OGC 니스 로고.svg 5대
리카르도 사모라
파일:OGC 니스 로고.svg 6대
주젭 사미티에르
1937년 1937년~1938년 1938년~1939년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페드로 바야나
(1924~1928)
리카르도 사모라
(1928~1936)
루이스 레게이로
(1936)
}}} ||
스페인의 前 축구인
파일:리카르도 사모라.jpg
이름 리카르도 사모라
Ricardo Zamora
본명 리카르도 사모라 마르티네스
Ricardo Zamora Martínez
출생 1901년 1월 21일
스페인 왕국 카탈루냐 지방 바르셀로나 주 바르셀로나시
사망 1978년 9월 8일 (향년 77세)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바르셀로나 주 바르셀로나시
국적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스페인 왕국1901~1931

[[스페인 제2공화국|
파일:스페인 제2공화국 국기.svg
스페인 제2공화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1931~1939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스페인국1939~1975

[[스페인|
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1975~1978
신체 187cm[1] | 체중 82kg
직업 축구선수( 골키퍼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RCD 에스파뇰 (1916~1919)
FC 바르셀로나 (1919~1922)
RCD 에스파뇰 (1922~1930)
레알 마드리드 CF (1930~1936)
OGC 니스 (1937~1938)
감독 OGC 니스 (1937~1938)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 (1939~1940)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 (1940~1946)
RC 셀타 데 비고 (1946~1949)
말라가 CF (1949~1951)
스페인 대표팀 (1951~1952)
RC 셀타 데 비고 (1953~1955)
RCD 에스파뇰 (1955~1957)
RC 셀타 데 비고 (1960)
RCD 에스파뇰 (1961)
RCD 에스파뇰 (1962)
국가대표 46경기 ( 스페인 / 1920~1936)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별명 신성한 사나이(El Divino)
등번호 -[2]
}}} ||

1. 개요2. 생애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사생활
4.1. 인격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5.1.2. 개인 수상
5.2. 감독
5.2.1. 대회 기록

[clearfix]

1. 개요

스페인의 前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61년 RCD 에스파뇰 감독을 맡았다.

선수시절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별명은 El Divino, 우리말로 신성한 사나이로 그 별명에 맞는 최고의 세이브들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의 패션 센스도 꽤나 유명했는데, 그가 경기를 뛸 때 착용하는 뉴스보이 캡과 터틀넥 티셔츠는 그의 차밍 포인트. 그는 그것이 항상 햇빛과 상대 선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2. 생애[3]

2.1. 어린 시절

1901년, 사모라는 바르셀로나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분위기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중산층이었고 아버지 프란시스코는 사모라가 자신처럼 의학을 배워 교수가 되길 바랐지만 사모라는 권투, 농구 등의 운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다 사모라는 8살 때 발을 돌에 찧는 큰 부상을 입고도 축구 시합에 나갔고 3일간 이를 숨겼다가 부모에게 들켰다. 이 부상으로 인해 결국 사모라는 발가락 두 개를 잘라내야 했다. 두 달간의 치료 중 사모라는 엄청난 통증에 시달렸고 그의 부모는 사모라가 축구 대신 공부를 하라고 그를 설득했다. 결국 사모라는 부모님과 약속을 했지만 부상에서 회복되자마자 다시 축구를 시작했다.

계속 길거리 축구를 즐기던 사모라에게 진짜 축구장에서 축구를 할 기회가 왔고 이에 사모라는 5 페세타를 주고 축구화를 사면서 더욱 열의를 불태웠다. 그렇게 축구를 즐기던 사모라는 FC 바르셀로나 관계자들의 눈에도 띄었고 사모라의 자서전에 의하면 바르셀로나의 유스팀에서 뛰기도 했다고 한다.

원래 사모라의 포지션은 센터 포워드였지만 골키퍼가 빠지게 되자 임시로 골키퍼를 보게 되었다. 당시 상대팀에는 나중의 사모라의 친구가 되는 주젭 사미티에르가 있었는데 이 경기에서 사모라는 사미티에르에게 말 그대로 농락을 당하기도 했다.

1914년부터 우니베르시타리 SC(Universitari SC) 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사모라는 1915년 2월 27일에 첫 리저브 팀 경기를 치렀고 이 경기 당시 긴장이 심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팀이 정비되지 않아 몇 차례 시합의 끝을 난투극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2.2.1.1. RCD 에스파뇰 1기
사모라는 1916년 RCD 에스파뇰에서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사모라가 에스파뇰에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팀의 주전 골키퍼였던 페레 지베르트(Pere Gibert)가 돌연 은퇴를 했고 그 자리는 자연스럽게 사모라의 차지가 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의 부모가 에스파뇰의 1군 선수가 되는 것을 반대했는데 에스파뇰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허락했지만 아예 축구 선수가 되기에는 사모라가 어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먼 친척이자 클럽의 회계 담당자였던 주제프 마리아 탈라다란 사람이 부모를 설득했고 사모라의 부모는 탈라다가 사모라의 튜터가 된다는 조건으로 승낙했다.

사모라의 데뷔전 상대는 레알 마드리드였고 기차 3등칸을 타고 마드리드에 가서 경기를 치렀다. 1916년 4월 22일, 사모라는 레알 마드리드와 데뷔 경기를 치렀고 에스파뇰은 1대1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 경기에서 사모라는 뛰어난 활약으로 에스파냐 데포르티바 편집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그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스타일로 공을 막아냈다는 찬사를 보냈다. 다음 날 치러진 2차전에서 에스파뇰은 레알 마드리드에 2대0으로 승리를 거뒀고 사모라는 잠시 우니베르시타리로 돌아갔다.

1917년 무렵, 사모라는 페레 지베르트를 완벽히 대체했고 이 무렵 유럽 최고의 골키퍼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즌에 에스파뇰은 카탈루냐 주 리그에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결국 에스파뇰은 1918년 카탈루냐 주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뒤이은 1918-19 시즌은 사모라에게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일단 팔 골절로 사모라는 몇 달간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다. 팀은 카탈루냐 주 리그에서 준우승에 머물렀고 설상가상으로 사모라는 아버지가 사망하는 슬픔도 겪었다. 아버지는 사모라에게 유언으로 축구를 그만 두고 의학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을 남겼고 결국 사모라는 축구를 잠시 접게 되었다.
2.2.1.2. FC 바르셀로나
사모라가 축구를 잠시 그만 둔 사이 놀랍게도 그는 FC 바르셀로나로 팀을 옮겼다. 사모라는 나중에 부모님과 축구를 그만 두고 공부를 계속하기로 약속을 했었지만 자신은 축구를 하기 위해 친구들을 계속 찾아다녔고 그들이 자신을 다시 축구로 이끄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사모라는 처음엔 공부로 인해 바르셀로나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다시 축구에 대한 열정을 되찾으면서 곧 자리를 잡았다. 15년간 바르셀로나의 골키퍼로 뛰었던 루이스 브루를 대신해 사모라는 잉글랜드의 크룩 타운 FC와의 경기에서 바르셀로나의 골문을 처음으로 지켰고 바르셀로나는 1대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 선수들 역시 사모라의 플레이에 감탄하며 그에게 명예상을 주기도 했다.

1919년 12월 14일, 사모라는 카탈루냐 주 리그 경기에서 페널티 킥으로 득점을 올리기도 했고 그 골이 결승골이 되어 1대0으로 바르셀로나가 승리하기도 했다.

그 이후 잭 그린웰의 지도하에 그의 친구들인 주젭 사미티에르, 사기바르바[4], 파울리노 알칸타라, 펠릭스 세수마가 등과 함께 원래 카탈루냐 지방의 강자였던 바르셀로나를 더욱 이길 수 없는 깡패팀으로 만들어놓았다. 3년간의 바르셀로나 생활에서 그들은 카탈루냐 주 리그를 3연패했고 코파 델 레이도 두 번을 우승했다. 특히 1919-20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사모라는 아틀레틱 클루브의 공격수 라카의 페널티 킥을 막아내며 2대0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2.2.1.3. RCD 에스파뇰 2기
사모라는 1922년, 친정팀 에스파뇰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FC 바르셀로나의 회장 조안 감페르와 급여 인상 문제로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페르 회장은 나중에 그가 제시한 금액을 훨씬 뛰어넘는 큰 액수를 제시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이 사건은 마드리드의 스포츠 저널들을 크게 자극했다. 일부 바르셀로나 서포터들은 이를 용서할 수 없다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바르셀로나 팬들은 코르츠[5]에 사모라가 다시 돌아왔을 때 따뜻한 환대로 맞아주었다.

그러나 에스파뇰에 복귀한 사모라를 기다리던 건 탈세 혐의에 대한 위증으로 인한 선수 자격의 1년 박탈이었다. 그럼에도 사모라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갔고 경기마다 5천 페세타씩 받아가며 친선 경기를 치를 정도였다. 그러면서 카탈루냐 대표팀 멤버로 경기를 뛰기도 했는데 이는 규정상 문제가 되진 않았다. 나중에 그나마 출전 징계는 3개월로 감경되었다.

1923년에는 그의 친구 후안 세라롱가(Juan Serralonga)의 요청으로 카디스 CF의 2차례의 친선 경기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 후에 다시 돌아온 에스파뇰에서 우승은 못했지만 스페인 최고의 골키퍼로 명성을 날렸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포르투갈, 스웨덴, 우루과이 등 세계 각지에서 에스파뇰에 친선 경기를 제의했고 에스파뇰은 경기장 증축에 쓸 수 있을 정도로 짭짤한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특히 1925년 우루과이에서의 친선 경기는 당시 남미 최고의 공격수였던 호세 피엔디베네와의 창과 방패의 대결이 유명했는데 무실점, 피엔데베네의 골이 사이 좋게 나오며 결과론적으론 무승부를 기록했다.

1928년에 사모라는 에스파뇰의 주장으로 임명되었고 에스파뇰은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하며 클럽 역사상 첫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따냈다.[6]

1929년에 스페인 전체를 아우르는 리그인 라리가가 출범하였고, 거기에서 다음 시즌까지 26경기를 전부 출전했지만 1930년에 레알 마드리드 CF로 떠나게 되었다.
2.2.1.4. 레알 마드리드 CF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한창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고 당시 레알 마드리드가 사모라에 투자한 이적료 15만 페세타는 스페인 축구계 최고의 이적료였다. 이 기록은 18년 후 라르비 벤바렉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입단하면서 깨진다. 또한 사모라는 출전 수당으로 월 3천 페세타를 받았는데 이는 당시로선 상당한 거액으로 스페인 총리의 봉급과 비슷할 정도였다.

당시 큰 기대를 모은 슈퍼스타의 이적으로 레알 마드리드 서포터들의 열기는 더 달아올랐고 사모라의 리그 데뷔전에는 경찰이 나서 소동을 진정시켜야할 정도였다. 하지만 사모라는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첫 시즌에 쇄골 골절로 많은 경기에 참가할 수 없었고 마드리드는 첫 시즌에 리그 6위에 그치며 죽을 쑤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수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대표팀 주전 수비수 하신토 킨코세스도 데려오는데 성공하였다. 사모라가 부상에서 복귀하고 시리아코와 킨코세스의 수비진이 안정을 찾으면서 레알 마드리드는 1931-32 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FC 바르셀로나에서 주젭 사미티에르까지 빼오며 또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 무렵 국가대표팀에서 사모라는 최악의 경기를 펼쳤는데 1931년 12월, 잉글랜드와의 시합에서 무려 1대7로 대패한 것이었다. 데일리  미러는 사모라는 스페인이 헌납한 7골 중 4~5골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으며 이는 잉글랜드의 유소년 골키퍼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1932-33 시즌 이후로 아틀레틱 클루브,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등에 밀려 3년 연속 리그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나마 코파 델 레이에선 2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아주 실망스러운 시기를 보내진 않았다. 특히 1936년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는 라이벌이자 사모라의 전 소속팀인 FC 바르셀로나를 만났고 사모라의 활약으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그는 바르셀로나 팬들이 던진 물병에 머리를 맞기도 했지만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고 주제프 에스콜라(Josep Escolà)의 결정적인 슈팅을 방어하여 이 경기의 영웅이 되었다. 이것이 사모라의 스페인 은퇴 경기가 되었다.

2.2.2. 스페인 내전

이 시즌이 끝나고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였고, 사모라는 오보의 희생양이 되었다. 스페인 방송국 ABC에서 사모라가 공화당원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오보를 낸 것이다. 스페인 국가대표 골키퍼 사모라 숨 쉰 채 발견 다만 공화당원들에 의해 투옥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공화당원들에 의해 모델로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그 이유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팔랑헤의 선전 모델이었기 때문이었다.[7] 이런 상황이면 거의 사망 플래그급이지만 사모라는 살아남았는데 체포 당시에는 사모라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던 군인들이 레알 마드리드의 팬이라 그를 죽이지 못했고 그 당시 감방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감옥에서는 교도소장 멜초 로드리게스와 간수들을 축구 이야기로 구워삶았기 때문이라고... 그와 함께 축구 경기를 뛰고 축구 강습까지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의 체포에 스페인의 각종 언론들이 들고 일어났음은 물론이고 쥘 리메 같은 외국의 저명 인사들도 석방을 탄원했을 정도라 이것도 사모라의 사형을 막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프랑스로 건너간다. 거기에서 OGC 니스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는데 당시 디비지옹 1 최고의 골키퍼였던 루돌프 하이덴과의 시합이 프랑스 축구팬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이후에 같이 니스에 있던 주젭 사미티에르와 함께 1938년 12월에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팔랑헤 군인들을 위한 자선 경기에 뛰기도 하였다.

2.2.3. 국가대표 커리어

2.2.3.1. 올림픽[8]
FC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하던 중 사모라는 프란시스코 브루 감독의 지휘하에 주젭 사미티에르, 피치치 등과 함께 1920년 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 사모라는 19세로 스페인 올림픽 대표팀 스쿼드에서 가장 어린 선수였지만 첫 경기인 덴마크전에서부터 수많은 세이브로 스페인이 1대0 승리를 챙기는 데에 공헌했다. 당시 이 세이브들로 악마같다(...)는 엄청난 찬사를 들었다.

사모라의 활약이 엄청나서 다음 경기부터는 세컨 골키퍼로 내정되었던 아구스틴 에이사기레(Agustín Eizaguirre)[9]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10] 스페인은 8강에서 대회 우승팀이 될 벨기에에 1대3으로 패했다. 이렇게 스페인은 금메달과 멀어졌다.

이 대회는 일반적인 토너먼트와 다른 베르그발 시스템[11]으로 치러졌는데 모든 토너먼트 경기에서 승리하면 금메달인 것은 같지만 8강 탈락팀들끼리 다시 시합을 해서 4강 탈락팀들과 시합 후 동메달을 받는 방식이었다.

스페인은 동메달 토너먼트 1차전에서 스웨덴을 2대1로 누르고 2라운드에 진출했다. 다음 상대는 이탈리아. 스페인은 세수마가의 2골로 이탈리아를 2대0으로 이기고 은, 동메달 결정전[12]에 진출했지만 사모라가 이탈리아 공격수의 이마를 무릎으로 가격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아 퇴장을 당하기도 했다. 이 퇴장 기록이 사모라 커리어의 유일한 퇴장 사례이다.

다행히 이 징계가 은, 동메달 결정전까지 이어지진 않았고 스페인은 이 경기에서 네덜란드를 3대1로 제압하고 그 대회에서 어부지리로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사모라는 그의 자서전에서 올림픽 경기에 모국을 위해 싸운다는 마음가짐으로 나섰고 올림픽 메달을 따던 때가 축구 경력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고 서술했다. 사모라는 대회 최우수 골키퍼로 꼽혔고 국가의 영웅으로 대우받았으며 멤버들과 스페인 국왕 내외 앞에서 친선 경기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사모라의 올림픽 활약은 그걸로 끝이었다. 1924년 올림픽에서 스페인은 1라운드 탈락이라는 굴욕을 당했고 1928년 올림픽에서는 스페인이 아마추어 선수들을 대표로 선발해서 사모라는 소집되지 않았다.
2.2.3.2. 1934년 월드컵
초대 월드컵에서는 스페인이 출전하지 않아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지만 다음의 월드컵에서는 지역 예선에서 포르투갈 제물 삼아 본선에 진출하였다. 게다가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를 상대로 비 영국팀이 처음 승리를 거둔 팀이 바로 스페인이었고, 이 경기에서 사모라는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에도 골문을 끝까지 지켜 4:3의 승리를 거두었다.[13]

사모라는 이 대회 역시 주장으로 출전하였고 스페인의 첫 상대 브라질이었다. 불꽃 튀는 명승부가 예상되었지만 스페인은 브라질에 3대1로 낙승을 거두었고 다음 상대는 개최국 이탈리아였다. 그 경기에서 사모라는 홈 버프를 받은 이탈리아를 상대로 엄청난 선방들을 연달아 보여주면서 무솔리니를 포함한 35,000명의 이탈리아 관중들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나마 먹힌 골도 조반니 페라리의 파울성 플레이 이후에 나온 것. 그 이후에도 계속된 선방으로 팀을 구해낸 사모라였지만 재경기에는 출전할 수 없었다. 골 장면에서의 파울로 인한 부상으로 경기를 뛸 수 없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결국 킨코세스가 사모라 대신 주장 완장을 차고 2차전을 치러냈지만 스페인은 결국 전반 11분에 터진 주세페 메아차의 결승골로 아깝게 패배하고 말았다. 사모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은 그렇게 아쉽게 끝났지만 사모라의 선방은 기자와 축구팬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고 그에게 월드컵 베스트 골키퍼 자리를 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신이 내린 골키퍼의 월드컵 나들이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사모라는 46경기의 대표팀 경기 중 42실점, 20회의 클린시트, 24회의 주장 출전의 기록을 남겼다. 그의 대표팀 경기 출장 기록은 1974년 호세 앙헬 이리바르가 경신했다.

2.3. 감독

선수 은퇴 이후 사모라는 여러 팀을 돌아다니며 감독생활을 했다.

스페인에 돌아온 사모라는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요청을 빙자한 협박으로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을 이끌게 되었는데 첫 경기부터 경기 내용이 맘에 안 든다는 으름장을 받기도 했다. #참조

어쨌든 사모라는 팀을 2년 연속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성공적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14]. 1940-41 시즌의 아틀레티코는 특유의 짠물 수비로 명성을 떨쳤는데 이 수비진의 별명이 철의 장막이 되었고 이 별칭은 지금도 튼튼한 수비를 가진 팀들에 붙는 흔한 찬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성적이 떨어져가고 사모라 역시 프랑코 정권에 충성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1946년에 사모라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직에서 경질당했다.

1946년에는 셀타 비고를 지도하면서 미겔 무뇨스[15]를 발탁하여 키워내기도 하였다. 1947-48 시즌에는 셀타 비고가 코파 델 레이 준우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셀타 비고 역사상 최고의 호성적이다.

그 이후 사모라는 말라가 CF, 스페인 대표팀 등을 이끌다가 1955년, 25년 만에 고향 바르셀로나에 돌아와 친정팀 에스파뇰의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1956-57 시즌의 코파 델 레이 준우승을 이끌었다.

2.4. 이후

사모라는 1961년에 RCD 에스파뇰의 감독직을 끝으로 은퇴하였고 1967년 9월 27일, FIFA는 사모라를 위한 기념 경기를 열었다. 이 경기는 스페인 선발팀과 비스페인 선발팀의 대결로 치러졌고 비스페인 선발팀이 3대0으로 승리했다.

사모라는 간질환으로 투병하다 1978년에 사망하였다. 사모라의 부고가 전해지자 당시 경기가 열리던 모든 스페인 축구 경기장은 일시적으로 경기를 중단하며 자국 축구 영웅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엘문도 데포르티보는 지면 전체를 할애해가며 사모라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실었고 그를 기념하기 위한 많은 추모 행사가 열렸다.

그의 무덤은 현재 몬주익 공동묘지에 위치해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크고 대담하지만 조용하다. 전설적인 기술과 용감함도 겸비했다. 그는 세계 축구계에서 가장 위대한 골키퍼 중 한 명으로 남을 것이다.
제라르 에르날루트(Gerard Ernalut)
사모라는 공격수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경기에서 지고 있을 때 그들이 사모라를 쳐다보면 골문은 더욱 작아보일 것이고 멀리서 골대마저 안 보일 지경이죠. 20년간 사모라는 세계 최고의 골키퍼였습니다.
남아메리카의 한 공격수가 사모라에 관해 남긴 평

194cm라는 당시나 지금이나 엄청나게 큰 키[16]와 긴 팔, 한 손으로 공을 잡아버릴 정도의 큰 손을 바탕으로 그만의 스타일을 정립했고 뛰어난 선방 능력을 보여주었다. 골키퍼로서의 사모라는 대담성, 예측력, 빠른 반사 신경, 넓은 활동 반경을 통해 엄청난 슈팅 방어 능력을 선보였다. 안정감도 뛰어나 사모라가 뛰던 당시 1대0과 사모라가 있는 감옥이라는 평도 있었는데 어떻게든 공격수가 골을 넣으면 사모라가 무실점으로 경기를 끝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모라는 상대 공격수와 공중볼 다툼을 할 때 당시의 다른 골키퍼들과는 다르게 팔꿈치나 팔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상대 공격수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는 사모라나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다소 상대 공격수는 물론이고 사모라 자신마저도 부상의 위험을 높이는 플레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스페인 축구계에는 기라성같은 골키퍼들이 많지만 FIFA 월드컵 우승에 빛나는 이케르 카시야스를 제외하면 사모라가 스페인 역대 최고의 골키퍼라 쳐도 문제는 없다. 지금도 사모라를 스페인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꼽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비슷하게 보는 시각도 있을 정도였다.

흔히 30년대 최고의 골키퍼를 꼽으라면 이탈리아 잔피에로 콤비, 체코슬로바키아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와 더불어 사모라가 3대장으로 꼽히는데 선방에 관한 이야기는 그에게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를 높이 평가한 IFFHS는 그를 20세기 최고의 골키퍼 중 5위에 올려놓았다.

라리가 최소 실점을 기록한 골키퍼에게 주는 상이 바로 리카르도 사모라 상인 것으로 그의 위엄을 알 수 있다.[17][18]

사모라의 현역 시절엔 축구계를 넘어 스페인에서 명망 있는 슈퍼 스타였으며 그의 패션 센스도 스페인에서 유행할 정도였다. 그 외에도 광고 출연 등으로 많은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사모라의 동료였던 킨코세스는 1978년 에포카와의 인터뷰에서 사모라의 인기에 관해 ' 그레타 가르보보다 더 유명하고 더 아름답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사모라 역시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1926년의 "마침내 사모라가 결혼한다(¡Por ​​fin se casa Zamora!)"라는 무성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는 사모라의 삼촌이 그가 묘사하는 여자와 사모라를 결혼시키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며 당시 스페인에서 꽤 유명한 영화였다. 그 외에도 "챔피언스"(¡¡Campeones!!, 1943), "한 켤레의 신발"(Once pares de botas, 1954) 등의 영화를 찍기도 했다.

스페인의 시인 페르난도 비얄론(Fernando Villalón)과 페드로 몬톤 푸에르토(Pedro Montón Puerto)는 세상엔 두 명의 수호자가 있는데 하늘엔 베드로, 땅에는 사모라가 있다고 서술하며 그의 인기에 극찬을 보내기도 했다. 1928년 올림픽 무렵에는 창작시 대회에서 사모라에게 바치는 헌정시가 1등을 하기도 했다.

이 인기는 현재에도 조금씩 이어지고 있어서 사모라가 몸담았던 클럽들에선 그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음은 물론이고 스페인의 축구 브랜드 호사커에서는 2009년 자사의 골키퍼 유니폼에 사모라라고 이름을 붙여 판매하기도 했다.

4. 사생활

사모라는 쇄골 부상으로 쉬던 1930년, 결혼식을 올렸고 1933년생인 아들이 한 명 있었다. 그 아들은 나중에 대를 이어 골키퍼로 뛰었지만 아버지만큼의 기량은 발휘하지 못했다.

사모라는 부인과 1950년대에 이혼했고 1968년 바르셀로나에서 다른 여성과 재혼했다. 전처가 사망한지 얼마 안 되어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4.1. 인격

인격에 대해서는 말이 좀 있는 편이다. 코냑 시가를 아예 달고 살 정도였고 담배를 하루에 3갑을 피울 정도로 골초였다고 한다.

1920년 올림픽에서는 대회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는데 죄목은 아바나 시가 밀수 혐의였다. 기차 좌석 밑에 숨겨놓은 시가를 신고하지 않고 밀반입하려다 기차가 프랑스- 벨기에 국경에서 장시간 정차해 있다 결국 적발되었다. 사모라는 이 혐의로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보냈고 결국 5백 페세타의 벌금과 일부 소지품을 압수당했다.

그 외에도 상술된 탈세 혐의도 있고 레알 마드리드가 그를 데려갈 때 에스파뇰에 준 이적료 15만 페세타 중 5만 페세타를 그가 받았다고 한다.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5.2. 감독

5.2.1. 대회 기록



[1] 키에 대한 자료는 매우 다양해서 181cm,194cm였다는 설도 존재한다.하지만 당시로서는 거인과도 같이 큰 키를 자랑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3] 출처: 위키백과 [4] 아르헨티나 출신 공격수로 바르셀로나에서 17시즌을 보냈다 [5] 캄 노우 이전 바르셀로나의 홈구장. [6] 이 결승전은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경기가 치러져 물의 결승전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7] 사모라가 바르셀로나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런 그의 정치적 배경에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엘 클라시코가 왜 그리 치열했는지 역사적 배경을 안다면 사모라의 이런 정치적 견해는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일수도 있지만 사실 당시 인구수로 따지면 마드리드가 아닌 바르셀로나가 명실부공한 스페인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정치적 다수파는 중상류층 사이엔 카탈루냐 민족주의, 노동계급 사이엔 아나키스트가 다수라도 바르셀로나 출신 우파 인물들도 많은 것도 당연했다. 사모라의 소속팀을 봐도 사모라는 카탈루냐인들을 대표하는 FC 바르셀로나가 아닌 카스티야인들을 대표하는 에스파뇰과 레알 마드리드에서 전성기를 보냈고 아버지도 카탈루냐 혈통이 아니었다. 어찌됐든 이런 사모라의 정치적 견해가 마음에 들었는지 프랑코는 1950년대에 사모라에게 훈장을 수여했을 정도였다. [8] 월드컵의 창설은 1930년이다. 즉 이 당시의 올림픽 축구의 위상은 지금에 비할 수 없이 높았다. [9] 1950년 월드컵에 참가했던 골키퍼 이그나시오 에이사기레의 아버지이다. [10] 그래도 스쿼드에 서드 골키퍼 라몬 곤살레스 피게로아가 있어서 후보 골키퍼가 없이 대회를 치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1] 스웨덴의 수구 선수인 에리크 베르그발(Eric Bergvall)에 의해 고안되어 베르그발 시스템으로 불린다. 이 방식은 1912년 올림픽과, 1924년 올림픽에서 사용되었다. [12] 원래는 3, 4위전이었지만 결승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가 경기 도중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경기 진행을 거부하다 성적 자체를 몰수당하면서 이 경기가 은, 동메달 결정전이 되었다. [13] 1900년대 초반의 유럽 축구계에서는 영국이 제일 수준이 높았고, 유럽의 다른 팀들은 모두 그 이하로 쳤었다. 실제로 잉글랜드를 필두로 영연 방팀들끼리나 전적이 비슷했지 대륙의 다른 팀들은 아예 상대가 못됐다. 1871년의 첫 축구 A매치 이후 계속 그런 기조가 이어져 오다 1929년에서야 스페인이 처음으로 잉글랜드를 깬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홈에서 비영국팀의 승리가 나오기까지는 그 후로 또 24년이 걸렸다. [14] 이 시기에 사모라는 잠시 구금되어 마르쿨레타가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다. [15] 1950년대에는 선수로, 1960년대에는 감독으로 레알 마드리드를 이끈 전설적인 감독. [16] 잔피에로 콤비 등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콤비의 머리가 사모라의 눈 밑에 있는 수준이다. [17] 사모라 상은 1958년 마르카에 의해 만들어졌다. 기록으로 평가하는 상이므로 수상자를 정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고 초대 수상자는 역시나 사모라이다. [18] 참고로 수상자 명단상으로는 1929년의 사모라가 초대 수상자인 것은 맞지만 사모라 상 자체는 1958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공식적인 초대 수상자는 1958-59시즌의 안토니 라마예츠이다. 1958년 이전의 수상자 명단은 상이 만들어 지고 시간이 지난 후에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