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2 09:45:31

이그나시오 에이사기레

이그나시오 에이사기레의 감독직 및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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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파일:세비야 FC 로고.svg

30대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에피 페르난데스
(1948~1949)
이그나시오 에이사기레
(1949~1950)
아구스틴 가인사
(1950~1955)
}}} ||
이그나시오 에이사기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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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사모라상.jpg
1943-44 · 1944-45
}}} ||
파일:Ignacio Eizaguirre.jpg
이름 이그나시오 에이사기레 아레기
(Ignacio Eizaguirre Arregui)
생년월일 1920년 11월 7일
사망년월일 2013년 9월 1일 (향년 92세)
국적 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
출신지 스페인 왕정복고 산 세바스티안
포지션 골키퍼
신체조건 181cm | 84kg
소속팀 발렌시아 CF (1940-1950)
레알 소시에다드 (1950-1956)
CA 오사수나 (1956-1960)
국가대표 18경기 (1945-1952)
감독 CA 오사수나 (1959-1960)
레알 무르시아 CF (1960-1962)
RC 셀타 데 비고 (1962-1963)
그라나다 CF (1964)
코르도바 CF (1964-1965)
세비야 FC (1965-1966)
그라나다 CF (1966-1967)
RC 셀타 데 비고 (1967-1969)
코르도바 CF (1969-1970)
부르고스 CF (1970-1971)
에르쿨레스 CF (1971-1972)
CD 테네리페 (1972)
부르고스 CF (1973-1974)
데포르티보 알라베스 (1974-1975)
코르도바 CF (1975-1977)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선수
4.1.1. 클럽4.1.2. 개인

[clearfix]

1. 개요

스페인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에이사기레의 아버지 아구스틴[2]도 축구 골키퍼여서 에이사기레 역시 축구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에이사기레는 유스 시절에 여러 클럽을 돌아다니다가 아버지의 현역 시절 클럽이자 고향팀인 레알 소시에다드의 유스팀에서 데뷔를 앞뒀지만 스페인 내전으로 데뷔가 늦어졌다.

에이사기레는 전쟁이 끝난 후 본격적인 데뷔를 앞둔 시점에 발렌시아 CF로 이적하게 되면서 레알 소시에다드와 발렌시아 구단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레알 소시에다드 구단측에선 에이사기레의 발렌시아 이적을 불허했고 한동안 발렌시아에서 경기를 뛰지 못했다. 결국 에이사기레는 레알 마드리드 CF를 상대로 라리가에 데뷔했지만 발렌시아는 5골을 내주며 대패했고 이로 인해 한동안 세컨 키퍼로 활동해야 했다. 그러나 주전 골키퍼였던 피오가 집에서 팀에 가져다준 소시지를 너무 많이 먹었다가 배탈이 나서 선발 명단을 비운 사이에 에이사기레가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 발렌시아의 주전 골키퍼가 되었다.

1950년까지 에이사기레는 발렌시아에서 라리가 우승 3회,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 2회의 커리어를 남기고 가족들이 있는 산 세바스티안으로 돌아왔다. 에이사기레는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6시즌을 보내고 CA 오사수나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그는 현역 마지막 시즌에 선수 겸 감독으로 재직했다.

2.1.2. 국가대표

에이사기레는 스페인 대표팀에서 18경기에 출전, 31골을 기록했다. 그는 1950년 월드컵에도 참가, 2경기를 뛰었다.

2.2. 이후

에이사기레는 주로 세군다 디비시온 소속팀들을 감독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에이사기레는 매우 강력하고 민첩한 골키퍼로 좋은 반사 신경을 바탕으로 골문을 방어했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1.2. 개인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2] 아구스틴 에이사기레는 1920년 올림픽 당시 스페인 대표팀 멤버였지만 리카르도 사모라에 밀려 대회 참가도 못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