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98년 생애를 요약한 영상(중국어)
1. 생애 초기
교토제국대학 재학 시절
현 행정 구역 기준으로 신베이시(新北市) 싼즈 구(三芝區)에서 태어난 본성인이다. 집안이 대대로 지역 유지( 신사)였던 덕에 집안 사정은 괜찮은 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리진룽(李金龍)은 대만일치시기 경찰관이었고, 이 때문에 어린 시절 리덩후이는 아버지의 인사 이동에 따라 이사와 전학이 잦았다고 한다.[1] 1940년에 일본이 식민지 체제에 충실한 대만인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갖도록 하고 우대해주기로 하자[2] 경찰관이었던 리덩후이의 아버지 리진룽도 가족과 함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었으며 이에 따라 리덩후이는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라는 일본식 이름을 얻었다.
공부를 꽤 잘 해서 다이호쿠 구제고등학교(현 국립대만사범대학)를 거쳐 1943년에 교토제국대학 농학부 농업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3] 그러다가 학도병으로서 징집되어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해 나고야의 고사포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실전에 나가기 전에 일제가 패망하여 실제 전투에 참여한 적은 없다.
전후에는 대만으로 귀국하며 국립타이완대학 농업 경제학과에 편입했는데 국립타이완대학은 갓 재건된 상황이라 2학년 학부까지 밖에 없었고 이미 교토제국대학에서 3학년까지 수료한 리덩후이는 1학년부터 새로 배워 총 6년을 대학을 다녀야 했다.
당시 국민당이 대만에서 벌인 실정에 반감을 가지고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으며 194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가 1948년 탈퇴했다.[4] 이렇게 본성인 + 일본의 고등 교육을 받음 + 공산주의자 쓰리콤보가 겹쳐 2.28 사건 당시에는 국민당군의 탄압을 피해 시골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2.28 사건 이후로도 국립타이완대학에서 계속 농경제학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 대학 조교를 하다가 1949년에 은행원인 부인 청원후이(曾文惠, 증문혜)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코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에 행정원 부원장 장징궈의 미국 방문 때 그의 친한 친구가 장징궈를 암살하려 하는 바람에 큰 위기에 처하지만 은사인 내정부장 서경종, 장언사 등이 그를 적극 변호함에 따라 무사할 수 있었다. 귀국 후 국립타이완대학 농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2. 정계 입문
(1980년대 부총통 시절의 모습. 왼쪽은 장징궈 당시 총통)
국립타이완대학 교수 재직 중 1971년 국민당에 입당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였다. 행정원장 장징궈의 눈에 들어 정무위원에 선출된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여 1978년부터 1981년까지 타이베이시장을 맡았고, 1981년에 타이완성 주석에 올라서 3년간 재직하다가, 1984년 부총통 셰둥민이 장징궈의 와병을 틈타 음모를 꾸몄다가 적발되어 쫓겨나면서 그 후임으로 발탁되어 권력의 정점을 넘보게 된다. 이때 장징궈는 총통의 신분으로 리덩후이가 집무를 보던 주석 관저를 찾아가 직접 축하하는 등 이례적일 정도로 리덩후이를 밀어주었다. 1982년 아들 리셴원(이헌문)을 잃는 비극을 겪었지만 장징궈가 이 때문에 아들이 없는 리덩후이가 권력욕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본성인 출신인 리덩후이가 권력 2인자인 부총통으로 지명되었을 당시[5], 집권 국민당을 위시한 대만 정계는 이를 상당히 의외로 받아들였다. 장징궈는 마땅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고, 이미 이 당시에 장징궈의 건강이 좋지 않아, 당시 부총통 자리는 일반적인 부통령 같은 병풍이 아니라 진짜 차기 권력자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아래와 같은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6]
와병 중이던 장징궈 총통에게 국민당의 측근들이 물었다. "총통 각하. 각하의 후계자는 누가 좋겠습니까?" 장징궈가 고향 저장성 사투리로 대답했다. "니 덩 후이얼"(你等會兒.
기다려라(= 아직 결정할 때가 아니다)). 그러자 이를 잘못 알아들은 측근들의 반응. "니 덩 후이얼? 아, 후계자는 리덩후이라는 말씀이시군요!"
3. 총통 재임기간
3.1. 1기: 계임총통(1988년 - 1990년)
(1988년 1월. 장징궈의 사망 직후, 계임총통으로서 취임 선서를 하는 리덩후이)
장징궈는 일관되게 자신의 후계가 헌법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만 언급했을 뿐 후계자를 키우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1988년에 장징궈가 죽자, 헌법에 따라 리덩후이가 계임총통이 되고 국민당 주석 대행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본성인으로 국민당 내에서 비주류에 속했으며, 하오보춘 등의 국민당 보수파의 견제를 받았다. 예를 들면 장징궈가 장제스 사후 바로 국민당 주석 자리까지 물려받은 반면 리덩후이는 꽤 오랫동안 주석 대행에 머물러 있었다. 보수파들은 그를 옌자간처럼 얼굴마담으로 두고 장징궈의 잔여임기만 수행시키려 했다.
리덩후이는 외성인 위주의 보수파와 타협을 시도했고, 보수파이지만 리덩후이에 유화적이었던 쑹추위 등의 도움을 얻어 장징궈 사후 6개월 만에 주석이 될 수 있었다. 리덩후이는 이 때 국민당 중앙위원회 31명 중 16명을 본성인으로 기용하는 파격을 보여줬지만, 본격적인 개혁을 하지는 못하고 언론자유화, 야당 합법화 등 미미한 개혁만을 시행했다. 정난룽이 분신한 것도 이 무렵의 일.
한편 1980년대 후반에 대만에 민주화 바람과 함께 노동운동이 격화되고 있었는데 리덩후이 정부에서 반공을 이유로 강하게 찍어내렸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대만 내 노동운동가에게 욕을 좀 얻어먹기도 한다.
리덩후이는 자신의 파벌을 키워 보수파의 견제를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1990년 총통 임기가 만료되고 국민대회에서 선출되는 간선제 총통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때에 이르면 국민당 내 리덩후이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보수파들은 리덩후이가 국민당 총통 후보가 되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 부총통 후보만큼은 보수파의 인물을 내세우려 했지만, 리덩후이는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파벌의 인물인 리위안추(李元簇)를 부총통 후보로 세운다. 보수파들은 이에 반발해 린양강(林洋港)을 총통으로, 장웨이궈를 부총통 후보로 세우려 했지만 리덩후이가 인기스타 쑹추위를 앞세워 이를 진압함으로써 실패했다. 그리고 간선제 총통 선거에서 무사히 당선되었다. 이후 대만 야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보수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오보춘을 신임 행정원장에 임명한다.[7]
3.2. 2기: 영정혁명(寧靜革命)(1990년 - 1996년)
(1990년 총통직에 정식 취임하는 리덩후이)
정식으로 총통에 당선 및 취임한 후, 리덩후이는 국민당의 전통적인 노선과 반대되는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고, 이를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야당인 민주진보당이 내세운 정책들을 점차 받아들이면서 민주화를 추진했다.[8] 우선 1948년에 선출된 의원이 아직도 의원 노릇을 하고 있는, 만년국회라 불리던 입법원과 국민대회의 해산 및 재선거가 시급했는데, 장징궈 정권 때에도 검토가 되었던 것이지만 결국 시행하지 못했다. 장징궈가 제한적인 재선거를 용인하며 재야인사들의 정계 참여를 허용하긴 했으나 입법의원 선거가 마치 정부가 이따금씩 베푸는 수혜처럼 이뤄지는 매우 억압적인 형태였고 입법원의 존재 자체가 국민당 독재를 뒷받침했기 때문이다.[9] 리덩후이가 총통에 재선되자 이미 민주화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어 국민대회 및 입법원 의원 재선거 여론이 고조되고 민주진보당 역시 이를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국민대회 및 입법원 의원들은 그 대가로 고액의 퇴직금 및 연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리덩후이는 전격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었던 학생운동 지도자들 및 민주진보당 인사들과 회견하여, 여론 및 야당의 요구를 무기로 1991년에 장제스가 제정한 '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폐지하고 헌법을 수정했다[10]. 또한 사법원에서 무기한으로 늘렸던 국민대회와 입법원의 임기를 1991년 말로 제한함으로써 1991년과 1992년에 국민 대회와 입법원은 해산되고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1990년 3월 중정기념당에서 열린 대만 재야 진영의 국민 대회, 입법원 재선거 요구 시위. 백합을 앞세웠다고 해서 '야생백합화 운동'(野百合學運)이라고 불렸다.[11] 리덩후이는 이러한 민주화 여론을 앞세워 국민당 내 입지를 강화시켰다.)
아울러 1990년대 초반부터 국민당 내 보수 진영과의 타협을 위해 입각시켰던 군부 출신의 거물 하오보춘을 행정원장, 국민당 부주석에서 퇴진시켜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시키고, 군부의 통수권까지 실질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오보춘이 차지했던 행정원장, 국민당 부주석 직에는 자신의 측근인 롄잔을 임명하여 한층 더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4년에는 타이완 성장, 타이베이 시장, 가오슝 시장을 임명직에서 지역 주민의 선거를 통한 선출직으로 바꾸어 완전한 지방 자치를 실현하였다.[12] 그리고 같은 해에 총통 역시 직선제로 선출하도록 헌법을 수정했다. 국민당 보수파들은 이에 대해 선거인단을 통한 미국식 간선제 총통 선거를 제안했으나 리덩후이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총통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총통 임기를 6년에서 4년으로 변경했으며 1회만 연임할 수 있게 되었다.[13]
(1995년의 첫 2.28 사건 공식 추도 행사에 참석한 모습)
아울러 장제스, 장징궈 시절 억눌려 왔던 과거사 문제를 정리하고 해소하기 위한 조치들도 단행했다. 먼저 대만 사회 최대의 금기였던 1947년의 2.28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를 지시하고, 국가 원수로서 처음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책임 인정과 사과를 표시하였다. 이러한 조치 역시 리덩후이 스스로가 대만 출신의 본성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993년에는 시안 사건으로 54년간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던 장쉐량을 석방하였다. 기사 1994년 1월 1일부로 장쉐량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96년 대만 최초의 총통 직접 선거에서의 유세 모습. 오른쪽은 러닝메이트인 롄잔)
아울러 그는 민주화와 함께 조금씩 대만 독립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1991년에 국가 통일 위원회 강령을 선포하면서 양안관계는 두 개의 동등한 정치 실체라는 발언을 했다. 이는 중화민국이라는 국가 정통성을 강조한 측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양안이 똑같이 주장해오던 하나의 중국과는 배치되는 발언이다.
이 과정에서 비주류로 내몰린 보수파들은 반발하여 탈당하였으며, 리덩후이도 자신의 방침에 반발하는 국민당 인사들을 제명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책을 강경하게 추진했다. 이렇게 제명되거나 탈당한 국민당 인사들은 신당이라는 정당을 세웠고 1995년 입법원 총선에서 그럭저럭 선전을 거둠에 따라 리덩후이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듯 싶었다. 또한 1996년 최초의 직선제 총통 선거에서 제명된 린양강(林洋港)과 탈당한 천리안(陳履安)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총통 직선제에 반발한 중화인민공화국이 그의 3선을 저지하려고 대만 해협에서 대규모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14] 그러나 리덩후이는 부총통 후보로 지명한 롄잔과 함께 오히려 총통 선거 - 국민 대회 선거에서 압승하였고, 따라서 국민당이 갈라서지는 않았다.
3.3. 3기: 연임 성공(1996년 - 2000년)
(1996년 5월 총통 취임식에서. 가운데 있는 사람이 리덩후이다, 오른쪽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사람은 부총통 롄잔.)
그 후 1990년대 후반에 대만의 경제 성장이 주춤해지면서 1997년 지방 선거에서 국민당이 민진당에 참패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그 틈을 타서 1998년 입법원 총선과 지방 선거[15]에서 국민당이 입법원 과반을 확보하지 못해 여소야대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지만 예상을 뒤엎고 1998년 총선과 지방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며 그럭저럭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를 시작으로 적극적으로 대만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1999년 5월에 <대만의 주장>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중국을 7개의 국가로 분할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쳐 파문을 일으켰고 1999년 7월 양안관계는 (특수한) 국가 대 국가라고 발언하면서 그 동안 감춰왔던 본심을 드러냈다. 앞서 말한 1991년의 발언과 마찬가지로 이 발언 역시 어찌보면 중화민국의 정체성을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비하여 강조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하나의 중국 원칙을 사실상 깨는 발언이라 당시 중국 정부가 격노하여 대만을 침공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졌을 정도다. 장쩌민 당시 주석은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사실상 대만 침공 의사를 밝혔다.
물론 당시 중국은 아직까지도 군 현대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고 오랜 고도성장과 기술발전으로 인해 그때까지만 해도 체제경쟁에서 우위에 있다고 자신하고 있던 중화민국 군부 측은 중국군이 얼마든지 오든 죄다 용궁으로 보내버릴 수 있다고 장담하는 보고를 올렸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리덩후이는 한동안 군비 증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군비를 감축하는 한편, 중국의 반발에 오히려 "대륙이 대만을 침공해올 경우 홍콩, 상하이, 난징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엄포를 놨다.[16]
2000년 총통 선거에서는 자신의 파벌로 부총통이었던 롄잔(連戰)을 총통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에 강력한 국민당 총통 후보였던 쑹추위가 반발하여 국민당을 탈당하고 독자적으로 총통 선거에 출마했고, 이에 따라 국민당 지지층이 분열되어 어부지리로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 후보가 총통에 당선될 수 있었다. 선거과정은 한치 앞도 내다볼수없는 초접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국민당의 표가 쏭추위에게 더 몰리면서 롄잔은 3위로 접전에 조차 이르지 못하고 낙선했다.
이에 대해서는 리덩후이가 같은 타이완 독립운동주의자인 천수이볜을 지지했다는 의혹이 있다. 선거 유세 때 인터뷰에서 천수이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무슨 총통이냐" 등의 힐난을 퍼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롄잔을 적극적으로 밀어준 것도 아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이 직접적으로 언급을 안해서 알 길이 없지만, 1994년에는 황다저우 시장이 민심을 잃은데다 국민당을 탈당한 자오샤오캉까지 신당 후보로 출마한 상황에서 그냥 황시장을 공천해버렸으니 천수이볜에게 타이베이를 조공한거나 다름없었으며, 2000년에는 타이완의 97%를 차지하는 타이완성장을 민선으로 지낼만큼 경쟁력이 있는 인물인 쑹추위에게 기회조차 안 주고 그냥 롄잔을 국민당 후보로 내세워서 기어이 국민당 표를 분산시켜 또 천수이볜을 당선시켰다. 그렇게 해서 민주진보당 등의 범록연맹이 2004년 총통 선거에서 단독으로도 국민당을 위시한 범람연맹과 겨룰 수 있을 정도가 되었는데 이는 불과 10여 년 전의 민주화 초기 시절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국민당 소속인 리덩후이가 사실상 이 모든 것을 진두지휘한 만큼 범록 연맹의 성장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4. 퇴임 이후
4.1. 타이완 독립운동
(2000년 5월 후임 총통 천수이볜의 취임식에 참석한 모습.)
천수이볜 의 당선 이후에는 총통 선거 패배를 책임지고 국민당 주석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2001년에는 자신의 파벌이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대만단결연맹이라는 새 정당을 만들자 이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한다. 이에 국민당은 2001년 9월에 반당행위를 이유로 그를 제명했다.
2000년대 중반의 모습
당에서 제명까지 당했겠다,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진 리덩후이는 퇴임 후에는 "중화민국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발언까지 해가며 대만 독립을 주창했으며, 공공연하게 천수이볜을 지지하고 2004년 총통 선거에서는 지지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수이볜 정권 말기에는 천수이볜의 부패 등을 이유로 그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17]
2012년 대만 총통 선거 유세 마지막 날인 1월 13일 저녁,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 후보 지원유세를 나가는 등 대만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참고기사
2012년. 민주진보당 차이잉원 지원 유세.
2017년 기준으로 만 9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저술, 강연이나 해외 방문 등의 왕성한 활동을 했다. 총통 선거 등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대만 독립을 주장하였기에 관련 소식이 있을 경우 뉴스에서도 심심치 않으면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리덩후이 기금회'(李登輝基金會)란 이름의 재단까지 설립, 운영했을 정도다.[18]
2016년 5월 20일 차이잉원의 총통 취임식에도 전직 총통 자격으로 참석했다.
2018년 1월 15일 자택에서 96번째 생일을 맞았다. 천수이볜 전 총통도 아들과 함께 참석하여 축하 인사를 전했다.
2월 28일, 천수이볜 전 총통, 분리독립파 단체 등과 함께, 중화민국 국호를 대만으로 바꾸는 국민투표를 주장했다.[19] 4월 7일에는 이들 분리독립파 단체, 인사들의 주도로 독립 국민투표 운동을 전개할 단체 '희락도 연맹'(喜樂島聯盟: Formosa Alliance) 창설에 동참했다.[20]
4.2. 친일
젊은 시절 검도 복장을 한 모습.
대만 정치인 중에서도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대만일치시기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리덩후이는 그런 걸 떠나서 같은 진영 내에서도 비판이 있을 정도로 극단적인 친일 성향을 보여준 인물이다. 특히 이 친일이라는 게 일본 내 우익 인사들과 교류하는 것이 많다 보니 그의 행보 역시 우익적 행보로 보일 때가 많아 문제였다. 물론 대만일치시기에 대한 부정적 발언도 했지만 또 친일은 유지한다는 점에서 묘한 인물이다.
심지어 야스쿠니 신사에도 참배했다! 그것도 방일 시마다 매번 빠지지 않고 참배했다. 본인의 형 리덩친(李登欽, 일본명 이와사토 다케노리(岩里武則), 1921년 ~ 1944년 12월 15일)이 합사되어 있다고 하며, 리덩친은 태평양 전쟁 당시에 일본군 해군 병으로 입대해 필리핀에서 전사했다. 겸해서 야스쿠니 신사 문제를 중국과 한국이 만들어낸 문제라고 해서 제대로 중국과 한국의 어그로를 끌었던 적이 있다. # 아베 신조 구술회고록에 따르면 아베를 만났을때 아베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크게 꾸짖기도(!) 했다.
센카쿠 열도 분쟁에서 일본 편을 들기도 했다. 당시 마잉주 정권의 대만 외교부는 "조어도는 중화민국의 영토라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발언을 철회할 생각은 없는지 2015년 7월말에는 다시 일본을 방문해서 해당 발언을 반복했고, 중국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당시 총통이었던 마잉주는 대만 유력지 <중국시보>에 리덩후이의 말에 반박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21] 당시 화교사회도 발칵 뒤집혔고 리덩후이는 사실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인 순사와 간통해서 태어난 일본인이라는 모욕적인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였다.[22] 이때 산동 사람들로 이뤄져서 대만 내부에서 주장하는 대만독립론에 대해서는 조금도 공감 못하는 화교 사회는 크게 동요하여 독립대만보단 차라리 한국을 더 친숙하게 여겨 한국인으로 많이 귀화하기도 했다.
리덩후이 본인의 모어는 당연히 대만어이고, 제2언어가 일본어, 표준 중국어는 제3언어이다. 일본어가 표준 중국어보다 편하다고 하며, 지금도 표준 중국어는 유창한 편이 아니라고 한다. 표준 중국어를 하는데 대만어 말투가 많이 들어가 있다.
대만 독립에 매우 긍정적이기에 중국에 비판적인 일본 인사들과의 교류가 많다. 그리고 이들과 교류하기 위해 일본을 자주 찾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입국 비자 내지 말라고 일본을 압박하지만 일본이 그걸 들어줄 리는 없다. 일본 인사들과 인터뷰를 할 때에는 일본어를 쓴다고 한다.
관련 발언이나 주장들을 근거로 종합하자면 리덩후이는 미국보다는 일본이 대만의 생존 여부에 대해 지리적, 전략적으로 보다 큰 이해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일본이 중국에 직접 맞설 정치/군사 대국의 행보를 본격화함으로써 대만의 후견 국가 내지는 제1동맹 역할을 하는 것을 기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리덩후이가 일본의 반공 진영, 특히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비롯한 정치/군사 대국화 지지 세력과 밀접히 교류했던 것도 그 연장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만화 캐릭터 코스프레를 한 적이 있다. 대상이 바로 에다지마 헤이하치. 옆의 두 사람은 각각 츠루기 모모타로와 다테 오미토를 코스프레한 것으로 보인다.
2014년 2월에는 일본의 극우 잡지 SAPIO에서 " 난징 대학살은 순전히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불과하며 '가짜 역사'와 같은 범주에 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015년 8월 22일에는 일본 우익 잡지 중 하나인 'Voice'와의 인터뷰에서 "70년 전에는 일본인…조국(일본 제국)을 위해 싸웠다."는 발언을 하여 대만 정치권 내부에서 큰 파문이 일었다. 원래 "70년 전에 일본인이었다."는 발언은 과거 일본 우익 인사들과의 인터뷰에서 꽤 자주 언급했었다. 리덩후이는 이 발언을 좀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반복했고 대만의 총통 선거와 겹쳐 다시 이슈화된 것으로 보인다. 훙슈주는 "국민당이 정권을 잡지 못하면 나라가 일본에 다시 넘어간다!"고 발언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전직 총통 예우를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 반면 차이잉원 주석을 비롯한 민진당 측에서는 "다양한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결국 리덩후이의 발언은 친일, 반일 논란을 넘어서 대만에 대한 중화민국 정부의 지배 정당성, 대만과 중국 본토와의 관계 등 보다 민감한 역사, 정치, 사회적 논란에 관한 대만 내부의 첨예한 논란을 드러낸 일면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다가 2015년 9월 13일에는 본인도 그동안의 발언이 좀 과했다고 느꼈던지 "대만이 줄곧 외부의 통치를 받고, 대만인이 일본의 '노예'로 전락했던 점을 대만인으로서 매우 비통하게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본이 패전 후 대만에 대한 통치권을 포기하여 대만이 중화민국의 성(省)이 되었는바, 설상가상으로 " 개가 가더니 돼지가 온 꼴."[23]이라고 말하여 국민당 정권 디스는 빼놓지 않았다.
4.3. 사망
4.3.1. 만년의 투병 생활
90세를 넘긴 고령의 나이는 어쩔 수 없는지, 간간히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이 계속되었다. 2015년 11월 말 가벼운 뇌경색 증상으로 입원했고, 이로 인해 오른손을 움직이는 데 불편해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적이 있었다.2015년 근황. 확실히 많이 노쇠했다. 물론 당시 나이가 무려 92세였으니 당연하다.
퇴원 직후인 2015년 12월 16일 손녀 리쿤이(李坤儀)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건재함을 보여줬다.[24] 한 뉴스에 따르면, 리쿤이의 아버지 리셴원(즉, 리덩후이의 아들)은 리쿤이가 어렸을 때인 1982년에 암으로 죽어서 리덩후이가 손녀 리쿤이를 애지중지 키웠다고.
2020년 2월에 우유를 빨리 마셔서 폐렴 증상을 보여 병원에 실려가는 소동이 있었다. # 7월에는 병원에서 치료 중이라고 전해졌다. # 차이잉원 총통과 라이칭더 부총통이 리덩후이를 문병하였다.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한때 사망설이 돌아 대만단결연맹 쪽에서 이를 부정하였지만, 결국 2020년 7월 30일에 타이베이 룽민 종합병원(臺北榮民總醫院)에서 패혈증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 때 나이가 97세. 집권 시절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하오보춘 전 행정원장이 죽은 지 4개월만이다.
4.3.2. 장례
차이잉원 총통과 독립 성향의 집권 민진당뿐만 아니라, 그가 한때 주석으로 몸담았던 국민당 주요인사(예: 마잉주 전 총통), 미국, 일본이 애도를 표했다. #, # 하지만 중국은 그의 생전 대만 독립 노선을 비판하면서 대만의 분리 독립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재차 밝혔다. 특히 환구시보 총편집인 후시진은 국민당에 대한 그의 정치적 배신을 비난했다. # 한국에서는 주타이베이 대표부의 강영훈 대표가 조문했다.유해는 8월 화장되었고, 9월 19일 영결식을 거행한 후 안장된다. 생전에 자신의 유골을 대만 최고봉인 위산에 뿌려 대만과 영원히 같이 하길 원했지만, 신베이시 시즈(汐止) 지역의 우즈산(五指山) 군인 공동묘지의 특별 구역에 안장될 것으로 알려졌다.[25] 앞서 타계한 하오보춘 전 행정원장도 이곳에 묻혔는데, 하오보춘 유족들과 친국민당 성향의 퇴역 군인들은 생전 두 사람의 악연 등을 들어서 리덩후이의 우즈산 군인묘지 안장에 못마땅한 반응을 나타냈다.
영결식에는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 키스 크라크 미국 국무부 경제 담당 차관이 참석했다. # 달라이 라마 14세는 추모 영상을 보냈다.
10월 7일 그의 유해가 신베이의 우즈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안장식은 유가족, 차이잉원 총통과 라이칭더 부총통 등의 참석 아래 엄수되었으며, 주요 관공서에 조기를 게양해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이로써 그의 죽음으로부터 2달 넘게 계속된 추모 의례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1]
아버지 리진룽도 지역 유력인사로써 대만 광복 이후에도 나름 잘 나가서
타이베이현 의회 의원을 한 적도 있다. 오래 살아서 아들 리덩후이가 총통이 되는 것도 보았다. 1995년에 95세의 나이로 사망.
[2]
일본은 조선의 조선인들에는
창씨개명을 강제했지만 대만에서는 오히려 대만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갖는 것을 통제했다.
[3]
후에 일본 극우와도 관계를 가진것과는 다르게 이때는 좌파 성향의 학생이었다고 한다.
[4]
중화민국 역대 총통 중 장징궈 총통과 더불어 두명 뿐인 공산당 경력이 있던 인물이다. 사실 그래서 대륙에서도 리덩후이가 총통에 취임했을 때에는 리덩후이가 적화통일에 우호적일 것이라 기대를 해보기도 했다. 리덩후이가
대만 독립론을 우회적으로 내밀기 전까지는...하지만 명백하게 공산당 당적을 가졌던 장징궈와 다르게 리덩후이의 공산당 경력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리덩후이는 2002년 인터뷰에서 공산주의자였던 적은 있었지만 중공에 가입한 적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활동하던 좌파 성향 학생회가 중국 공산당에 흡수된 것이 공산당 경력으로 오해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5]
전임 부총통인 셰둥민도 본성인이지만 대륙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반산(半山)이었다. 순수 대만 본성인으로서는 리덩후이가 최초.
[6]
출처 : 최창근, <대만: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리수 : 2014년), 148쪽.
[7]
3대세습도 고려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사실 장제스-장징궈 2대 세습을 본 중화권 평론가들은 거의 다 3대세습을 기정사실화했다. 혹자는 장징궈-장웨이궈 형제세습도 점치기도 했다. 하지만 장씨 가문 독재로는 도무지 대만 유지가 안된다고 본 장징궈는 장웨이궈는 진작에 당 고문으로 은퇴시켰고, 자신의 아들들을 정계에 입문시키거나 요직에 기용하지도 않아 자신이 사망하던 시점에서 유력 대권후보로 떠오르지 못하게 했다.
[8]
그러나 민주진보당의 일부 인사들은 이를 두고 리덩후이가 자신들의 주장과 노선을 가로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9]
가령 1979년 중화민국-미국 단교로 정세 불안정을 이유로 입법원 선거가 한동안 금지되는 등 그 선심성으로 조금 베푸는 선거조차 정세불안을 이유로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다.
[10]
중화민국 헌법은 한국처럼 조문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같이 수정 조문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특정 조항의 효력을 폐지시킬 수 있다.
[11]
이때를 계기로 백합 꽃은 오늘날까지 범록 진영을 비롯한 대만 내 민주, 독립 계열 관련 집회에서 애용되고 있다. 이후 발생했던 대만의 주요 정치, 사회 운동에서도 꽃을 상징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등장했다. 예컨대 2014년 중국과의
ECFA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입법원 점거 시위는 '해바라기 운동'(太陽花運動)이라고 불렸다.
[12]
현이나 성할시 등의 기초자치단체장은 이미 선거로 선출되고 있었다. 물론 국민당 독재 시절에는 국민당만이 후보를 낼 수 있었지만, 장징궈가 민주진보당 창당을 묵인함에 따라 야당 역시 지방 선거에 후보를 낼 수 있게 되었다.
[13]
사실 원래 연임 금지였다. 그런데 동원감란시기임조관을 통해 헌법을 사실상 무력화하여 연임금지 조항을 무시하고 공비를 진압한단 구실로 계속 꼼수로 연임한 것이다. 개헌 과정에서 이것이 재확인, 부활된 것.
[14]
미사일 발사 훈련으로 촉발된 이 사건을 양안 사태라 말하며 이 양안의 충돌이 미국이 마지막으로 개입한 사태였다. 이 당시 미국은 항모 전단을 파견해 중국의 무력 시위에 맞대응했고 결국 중국이 한 발 물러서며 일단락됐으나 이를 간 중국이 10여년 뒤 내놓은 물건이 바로
랴오닝급이다.
[15]
타이베이 시장과 가오슝 시장 선거
[16]
이런 자신만만함은 이후 중국이 대대적으로 군비를 증강하고 반면 대만은 불황과 중국의 견제로 군비 증강이 사실상 스톱된 상황에서 중국 측에게 일방적으로 상황이 바뀌면서 사라졌다. 중국이 대만을 타격하는게 얼마나 쉬운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만 또한 만만찮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고
중국의 경제 활동이 집중된 동부 대도시에 미사일 세례를 퍼부을 정도의 능력은 있다. 어차피 죽을 거 고추가루가 아니라 아예
캡사이신을 거하게 뿌리고 죽겠다는 얘기. 만약 대만군이 정말로 홍콩이나 상하이에 미사일을 한두 발 정도만 명중시켜버리면 그야말로 중국이 입게 될 타격이 어느 정도일지는 상상조차 힘들기 때문에 리덩후이의 저 발언은 말이 엄포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17]
그래도 대만 독립의 동지라서 그런지, 자신이 만든 정당인 대만단결연맹은 천수이볜 탄핵 소추안 입법원 투표에서 백지표로 무효표를 만들어 부결에 기여했다.
[18]
중국어권에서 '기금회'는 한국 등 다른 나라의 '재단'(財團: foundation)에 해당하는 명칭이다.
[19]
최근 대만은 국민투표 발의, 투표 참여 연령을 낮추어 특정 주제에 관한 국민투표 실시를 쉽게 하고 있다. 다만 주권 관련 문제는 국민투표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으며, 때문에 독립파가 주장하는 국호 변경 문제의 국민투표 실현 여부는 미지수다.
[20]
4월 7일은 대만 독립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대만 언론인
정난룽이 1989년 대만 독립헌법을 반역으로 규정한 당시 정부에 항의해 분신자살로 숨진 기일이다. 당시 총통이 리덩후이였던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21]
마잉주 당시 총통은 대만 야당한테 친중 반일 정치가라는 딱지가 붙어있었던 상태였다. 일단 본인은 자신의 대일 외교 방향이 친일도 반일도 아닌 '우일'(友日)이라고 해명하기는 했다.어째서인지
글자를 살짝 비틀면
反日이 된다.(...)
[22]
한국화교의 생활과 정체성(국사편찬위원회, 2007)
[23]
이 표현은 리덩후이 개인만의 발언은 아니며, 2차 대전 후 대만을 접수한 국민당의 실정(失政)에 실망한 대만인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퍼진 이야기였다.
2.28 사건 문서 참고.
[24]
여담으로 리쿤이의 남편은 키가 193cm에 달하는 장신이다.
[25]
대만의 전직 국방부장, 고위 장성들 다수가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민진당이 추진하는 과거 국민당 독재 잔재를 일소하는 차원에서 장제스, 장징궈 부자 총통의 유해도 기존의 능침에서 이곳으로 이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