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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남궁련(南宮鍊) |
본관 | 함열 남궁씨[1] |
출생 | 1916년 2월 15일 |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 누원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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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6년 2월 22일 (향년 90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학력 | 니혼대학 ( 경제학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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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언론인. 극동해운 창업주이자 前 대한조선공사 회장, 前 한국일보 사장.2. 생애
남궁련 회장은 1916년 2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 누원(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서 아버지 남궁복(南宮墣)과 어머니 반남 박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0년 일본 도쿄에 위치한 니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졸업 이후 1949년, 해운 회사인 '극동해운'을 설립하였다. 이후 1954년에서 1959년에는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냈으며, 1959년에는 석유회사 '한국 석유'를 설립해 대표직을 맡았다.
1961년 발생한 5.16 군사정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로부터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어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할 것을 결의해야 하는 등 잠시 시련을 겪었지만, 이내 해제되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 남궁련은 한국 정부의 수출 주도형 산업화·중공업화 정책에 발맞춰 유능한 기업가로 성장하였다.
해운업에 관여했던 남궁련은 조선 공업의 발전 가능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1968년에 민영화된 '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해, 1988년까지 사장과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대한조선공사' 회장을 지내던 시절 대형 선박 수출에 앞장서 1972년~ 1973년 연속으로 은탑 산업 훈장, 금탑 산업 훈장을 수상했고, 1974년 '수출의 날' 포장자로 선정되었다.
1980년대에는 본인 스스로 해외를 순방하며 선박 수주를 따내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으며, 노르웨이와 핀란드 등지에서 무역·경제 협력을 주도해 성사시켰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감탄했는지, '한국 - 노르웨이 경협회장'과 '대(對) 노르웨이 선박 건조에 대한 공로'로 1984년 노르웨이 국왕인 올라프 5세로부터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1급 기사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오일 쇼크와 1980년대 세계적으로 장기화된 해운·조선업의 불황으로 인해 신조선 수주선이 회복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선소들은 저가 수주에 응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경영 수지 악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그는 오랜 시간 자신이 키워온 '대한 조선 공사'를 한진그룹에 매각하였다.
한편 남궁련은 관료와 정치인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1964년에는 경제 과학 심의회의 위촉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66년에는 금융 통화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72년에는 12월 유신 헌법에 의해 공포·조직된 헌법 기관인 통일 주체 국민 회의의 종로구 대의원으로 무투표 당선되었다. 남궁련은 언론계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였는데, 1962년부터 1963년까지 한국일보 사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72. 1978년 제1.2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서울 종로구 2구)과 1981년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서울 종로구 4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 되었다.
제2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左) .
제12대 대통령 선거 선거인단 선거(右) 선거벽보 |
남궁련은 도자기나 그림, 예술품을 감상하는걸 취미로 삼곤 했었는데, 상당수의 유물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2006년 사망 후 유족들이 그의 소장품 256건을 국립 중앙 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살아생전 해운업에 열렬히 종사하여 대한민국을 해운강국으로 만드는데 한 몫한 해운업의 대부 남궁련 회장은 2006년 2월 22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2.1. 참고 자료
[1]
28세 금(金)변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