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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카네우미 지한(金海時範) |
자 / 호 | 선구(善驅) / 양오(養吾) |
본관 | 김해 김씨[1] |
출생 | 1890년 9월 13일 |
전라도
제주목
신좌면 조천리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2] 2828번지)[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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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8년 11월 25일 (향년 58세) |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
서우봉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서우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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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친부 김진호, 양부 김주호 조카 김장환 부인 신경보 아들 김상환, 김언환, 김추환, 장녀 김옥희 |
묘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대흘리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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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이다.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90년 9월 13일 전라도 제주목 신좌면 조천리(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828번지)의 부농가에서 아버지 김진호(金振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족숙 김주호(金周鎬)에 입양되었고, 최익현의 제자인 해은(海隱) 김희정(金羲正)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했다.이후에는 잡화상을 경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2.1. 독립운동
1919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일어난 3.1 운동 당시,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조카 김장환(金章煥, 1902 ~ ?)[4]이 경성부에서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3월 15일 귀향했다. 이때 김장환이 3.1 운동에 대해 친척들에게 알리자, "우리도 대한민족이다. 독립운동에 결사 진력해 보자"고 말하며 선두에 서서 사방으로 연락을 취해 8촌 삼종형(三從兄) 김시은(金時殷)을 비롯해 고재륜(高載崙)· 김연배(金年培)· 황진식(黃鎭式)· 백응선(白膺善)· 박두규(朴斗圭)· 이문천(李文千)· 김희수(金熙洙)· 김경희(金慶熙)· 김필원(金弼遠)··김영배(金塋培)[5]·김찬용(金燦容) 등 12명의 동지를 포섭했다. 이어 조천리 '미밋동산[6]'에 올라가 생사를 함께 할 것을 맹세하고 신촌리, 신흥리, 함덕리 등 인근 주민들과 연락하기로 했다. 그리고 서당 학생들과도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맏형이자 이름난 선비였던 만취(晩翠) 김시우(金時宇, 1875 ~ 1918)이 별세한 지 1주년 되던 3월 21일에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거사 당일인 3월 21일 오후 3시, 김시은, 고재륜 등의 동지들을 비롯, 인근 주민들, 서당 생도 등 약 500~600명의 시위대가 조천리 미밋동산에 모였고, 김시범은 미리 준비한 큰 태극기를 미밋동산 마루에 세운 뒤 목 메인 음성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조카 김장환이 앞에 나서서 '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태극기를 손에 들고 큰길로 나서자, 황급히 출동한 수십 명의 일본 제국 육군 무장대에 의해 시위대는 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김시범을 비롯한 13명의 동지들은 모두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조천만세운동은 3월 24일까지 3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전개되었고, 김시범은 김시은과 함께 최고형인 징역 1년형을 받았다.
1919년 4월 26일[7]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불복하고 공소를 제기하여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1부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8]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자세한 내용은 조천만세운동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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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1920년 4월 8일에 가출옥한 뒤 동지 14명이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고, 동미회의 첫 사업으로 1920년 3월 28일 25세의 나이로 요절한 항일운동가 백응선의 묘비를 건립하였다. 이때 김시범은 묘비문에 일제의 연호인 다이쇼(大正) 9년을 쓰지 않고, 단군기원인 4,253년을 썼다고 한다. 이후 김연배와 함께 한문 사숙이나 야학을 통해 후학을 양성했고, 조천 소비조합 운동에도 참여해 임원을 맡는 등 항일운동을 이어 나갔다.
2.2. 광복 후
8.15 광복 후 미군정 시기인 1945년 9월부터 1946년 7월까지 조천면장,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천면위원장, 1946년에 결성된 좌익세력의 통일전선체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부의장을 각각 역임하였다. 또한 1947년 2월 26일 조천중학원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투쟁준비위원회에서 조천면 부위원장에 취임했고, 3월 1일 당일에는 조천국민학교 기념식을 주관했다. 이날 제주북국민학교 앞에서 발포사건이 일어나자, 3월 11일과 3월 13일에 각각 조천면사무소 파업투쟁위원회 책임자, 조천면 대책위원회 책임자 등에 취임하면서 3.10 총파업에도 가담해 2천여 명에 달하는 조천면민 집회를 열기도 했다.결국 파업을 주도한 책임으로 인해 검거된 뒤 1947년 4월 18일 제주지방심리원(現 제주지방법원)에서 미군정 포고령 위반 혐의로 3,000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47년 7월에는 좌익세력의 통일전선체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위원회[9] 부의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적들로 인해 제주 4.3 사건 발발 이후 꾸준히 경찰의 지목을 받았고, 결국 토벌대에 의한 검속으로 연행돼 1948년 11월 25일 조천면 함덕리 서우봉(犀牛峰)에서 총살당했다. 장녀 김옥희[10]는 제주 4.3 사건 당시 조천면 여성동맹 부위원장으로 있었는데, 한라산에 입산해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토벌대에 체포돼 공개처형되었고, 아들 김언환과 김추환 또한 총살당했다. 장남 김상환은 행방불명되었고, 부인 신경보(愼敬輔)는 홀로 살아남아 김상환의 부인인 맏며느리와 손자들을 보살피며 집안을 지켰다고 한다.
이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당초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864번지에 안장되었다가, 2010년 조천읍 대흘리 가족묘지에 이장되었다.
2023년 10월 17일, 1947년의 3.1 기념식에 참가, 주도했다는 이유로 3000원의 벌금형을 받은 것으로 제주 4.3 사건 일반재판 재심 대상자로 선정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