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룬발트 전투 | ||
얀 마테이코가 1878년에 그린 기록화[1] | ||
시기 | 1410년 7월 15일 | |
장소 | 폴란드 북부의 그룬발트 마을 근교 | |
교전국 | ||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여러 동맹, 봉신 및 용병들 |
[[틀:깃발| 북방 십자군 참가자들 여러 동맹, 봉신 및 용병들 |
]][[틀:깃발| ]][[독일 기사단국| ]]|
지휘관 |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비타우타스 |
[[틀:깃발|
†[2]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프리드리히 폰 발렌로데 †[3] |
]][[틀:깃발| ]][[틀:깃발| ]] 울리히 폰 융잉엔
전력 | 16,000 ~ 39,000명 | 11,000 ~ 27,000명 |
피해 |
비교적 적은 사상자 (정확한 수 불명) |
비교적 많은 사상자 (정확한 수 불명) 포로 수천 명 기사단 수뇌부 궤멸 |
결과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의 승리 | |
영향 |
북방 십자군 종결 독일 기사단국의 결정적인 약화와 쇠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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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1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폴란드 그룬발트, 스텐발크(타넨베르크) 주변에서 독일 기사단국과 치른 전투로 북방 십자군의 종결을 알리는 상징적인 전투다.국가마다 지칭하는 명칭은 다음과 같다.
2. 배경
2.1. 각국의 상황
당시 리투아니아는 발트 신화 신앙을 믿었던 동유럽 최후의 비기독교 왕국이었다. 따라서 종교적인 열의(와 비기독교 노예사냥 수익에 눈이 돌아간)를 가진 튜튼 기사단에 자주 침공을 당했는데 이를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리투아니아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요가일라)는 1386년 2월 카톨릭으로 개종하고[4] 폴란드 여왕인 앙주 왕조의 야드비가와 결혼하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동군연합이 되었다.여기에서 튜튼 기사단이 얼마나 주변국의 어그로를 끌어모았는지 알 수 있는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도 서로 치고박던 사이였으며, 리투아니아 자체도 튜튼 기사단과 타타르인들의 침공에 맞서 리투아니아와 루스인들이 연합한 국가였다.[5]
이에 튜튼 기사단은 야기에우워가 폴란드의 왕관을 노리고 거짓으로 개종했다고 주장하면서 계속 공격했으며, 야기에우워의 사촌으로 리투아니아 대공을 노리고 봉기한 비타우타스(Vytautas)와 손을 잡기도 했다. 다만 튜튼 기사단 입장에서는 그런 무리수라도 둬야 했다. 리투아니아를 공격하지 못하면 튜튼 기사단은 정복을 할 수 없어 그대로 고사할 수밖에 없기도 했고, 리투아니아가 튜튼 기사단을 개종 가지고 낚은 것이 한두번이 아니기도 했다.
2.2. 전쟁 발발
야기에우워는 비타우타스와의 내전 끝에 협정을 맺어 리투아니아의 통치권을 사실상 그에게 넘기고 결속을 공고히 했다. 이때 리투아니아는 토크타미쉬 칸과 손잡고 킵차크 칸국을 털어먹는 데 큰 관심을 두고 있었으므로 후방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때문에 튜튼 기사단에 사모기티아까지 넘겨주고 우호관계를 쌓기도 했다.[6]그러나 1409년 사모기티아에서 튜튼 기사단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리투아니아는 반란을 후원했고, 새로이 선출된 기사단장 울리히[7]가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리투아니아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야기에우워는 즉시 반격을 하여 튜튼 기사단을 도처에서 요격하는데 성공했다.
2.3. 양측의 준비
일단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그 기간 동안 양군은 최대한 전력을 끌여들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헝가리 국왕 지그몬드에게 황금을 보냈다.[8] 지그몬드는 곧 이 연합군을 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편 연합군은 보헤미아 왕국의 용병단도 끌어들였는데, 이때 용병대장으로 참전한 사람이 바로 얀 지슈카였다.3. 전투 과정
1410년 7월 9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프로이센으로 진군하며 대대적인 역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연합군이 독일 기사단국의 수도인 마리엔부르크로 진출하자 기사단은 황급히 군대를 정비해 최종 방어선인 드레빈츠 강 유역 방어선을 강화했다. 연합군은 드레벤츠 강을 지나기 위해 좀 더 동쪽으로 우회했고, 기사단은 연합군과 평행하게 강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다 강이 급격히 북쪽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기사단은 강을 건너 방어적인 대형을 취했다. 튜튼 기사단은 그룬발트 마을 근처에, 연합군은 탄넨베르크 마을에 진을 쳤다. 기사단은 습지로 둘러싸인 지점을 얻을 수 있었다. 연합군은 5마일을 이동했고, 숲에 병력을 매복시킬 수 있는 지점을 손에 넣었다.이후 리투아니아 기병대의 선제공격으로 양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노궁과 창병으로 리투아니아 기병대를 격퇴시킨 기사단은 이후 폴란드군과의 접전에 돌입했다. 양군의 기병대가 혼전을 거듭하는 와중에 기사단 소속 디폴트 폰 쾨커리츠라는 기사가 홀로 브와디스와프 2세를 향해 돌격하여 거의 그를 죽일뻔 했으나 후일 크라쿠프 추기경이 되는 즈비그니에프 올레시니츠키가 그를 쓰러트려 브와디스와프가 겨우 목숨을 건지는 위기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고, 폴란드 왕기가 탈취되기도 했으나 다시 폴란드군이 탈환하였고 기사단은 배후로 기병대를 진출시키기도 했으나 역시 요격당했다.
그때 패주하던 리투아니아군이 다시 돌아와 기사단에 돌격을 가했으며 측면이 뚫리면서 기사단의 전열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총공세로 기사단은 완패했다. 이때 기사단의 주력군이 상당수 붕괴하고 기사단장 울리히를 포함하여 고위간부들도 대거 전사했다. 기사단 병력 2만 7천명 중 8천명이 전사하고 1만 4천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기사도 400명이나 죽었다. 말 그대로 개박살난 셈. 폴란드-리투아니아 동맹군은 병력 3만 9천명 중 5천명이 전사하고 8천명이 부상당했다.
기세를 탄 연합군은 독일 기사단국의 수도 마리엔부르크도 공격했으나 공성엔 실패하여 퇴각했다. 이후 1차 토룬 조약이 맺어져 기사단이 사모기티아와 도브리진 지방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지만 기사단의 군사력은 큰 손상을 입었고 뒤이어 권위와 재정 형편도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후로도 폴란드가 전쟁을 계속 벌이자 더이상 버티기 어려워졌고 봉신들이 폴란드에 가담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기사단은 마침내 굴복했다. 1466년 기사단은 제2차 토룬 조약을 맺고 포메른과 비스와 강 양안 및 바르미아(에름란트)의 주교 관할구를 폴란드에 넘겨주었다. 프로이센의 나머지 지역은 계속 보유했으나 그 지역에서 기사단장의 지위는 폴란드 왕의 봉신으로 격하되었다. 이 전투는 튜튼 기사단 몰락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4. 평가
전투 중 리투아니아군이 패주했다가 복귀해서 기사단의 측면을 무너뜨린 부분에 대해선 해석이 엇갈린다. 처음부터 리투아니아군이 거짓 후퇴를 계획하고 이것이 성공했다는 해석과, 리투아니아군이 정말로 전열이 무너져서 패퇴했다가 겨우 수습해서 역습에 성공한 형태라는 해석으로 나뉜다.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쪽에서는 말 그대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승리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부가 효과로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서구세계의 선진문물을 다이렉트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됨으로써 문화적으로 뒤쳐져있던 리투아니아가 문명국으로서 인정받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리투아니아는 유럽에서 알아주는 독실한 가톨릭 국가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연합 왕국을 구성하게 되면서 국가의 역량 자체가 훨씬 커졌다. 간단히 지도만 봐도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가 폴란드 왕국의 2배가 넘었다. 만약 서로 다른 나라로 지냈다면 국경을 마주 댄 이상얼마 안가 적으로 돌아섰을 것이며 결국 양국은 중소 국가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채 사이좋게 자멸했을 것이다. 이런 가상적국 1순위를 평생의 동반자로 끌어들임으로써 서로 윈윈전략이 된 것. 그리고 역사적으로 앙숙이었던 독일 기사단을 완전히 복종시키며 차후 200여년간 중부 유럽의 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될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성기의 초석을 다지게 된 전투다.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양국에서는 해마다 이 날을 기념해서 리인액트 같은 각종 행사를 아주 거창하게 하며 미디어 매체에서도 아주 열심히 빨아준다. 2010년에 만들어진 그룬발트 전투 600주년 기념 영상. 국뽕을 치사량으로 들이부은 폭풍간지를 보여준다. 인터넷 상에서 한키배 하기로 유명한 폴란드 키워들에게도 언터쳐블급의 찬양을 받는다. 한국사로 따지면 명량 해전에 비유될만 하다. 19세기 화가 얀 마테이코가 1878년에 민족 기록화로 그리기도 했다.
당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소속이었던 벨라루스에서도 이 전투를 성대하게 기념한다. 중세 갑옷과 무기를 차려입고 리인액트먼트를 하면서 그룬발투 전투 승리를 기리는 문화가 지금도 있다. 걸어서 세계속으로 영상
독일에서는 조상들이 왕창 깨진 전투라 좀 쉬쉬하는 모양이다.[9] 오히려 이쪽에선 1914년에 있었던 2차 타넨베르크 전투가 더 유명하다. 그리고, 독일 이외의 모든 나라에서는 타넨베르크 전투는 1914년의 것을 지칭하지 이 전투를 지칭하지 않는다.
독일 극우쪽에서는 오히려 훨씬 열세의 병력으로 버틴 기사단이 더 대단한거다!, 쪽수로 밀어붙여서 이긴게 뭐 자랑이냐하며 정신승리를 자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이 전투 자체가 튜튼 기사단이 십자군 전쟁에서 빠진 뒤 다른곳에서 세력 좀 확장해 보려고 시작한 ' 북방 십자군'의 최종 종착역이었기 때문에 쉴드 친다는거 자체가 무의미하다.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나중에는 리투아니아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사실상 이교도 토벌이란 명목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루어놓은 영토와 재물이 아까워서라도 전쟁을 계속해댔기에 본래의 목적을 상실해버렸다. 4차 십자군도 그렇고, 칼 있고 돈 없는 조별과제가 십자군인지라 탈선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었다. 이들은 이미 정교회를 신봉해서 종파가 달랐긴 하지만 기독교 국가인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공격했던 적도 있었다.[10]
이로 인해서 기독교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에서는 십자군을 별로 좋게 보지 않는다. 십자군을 신의 대리인으로 봉사하는 선하고 숭고한 전사로 묘사하는 서유럽과 달리 리투아니아에서는 수백년동안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불사르고 약탈한 침략자로 표현한다. 리투아니아의 전래동화나 설화들을 보면 괴물로 변하는 독일 기사단이라던가 십자군의 침공에 고통받고 맞서 싸우는 민중들의 이야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튜튼 기사단은 교황청이 적당히 하지? 라 해도 씹고 노예사냥 하던 이들이다.
5. 기타
미디블2: 토탈 워에서 재현했으며 유저는 폴란드로 플레이한다. 시스템상 튜튼 기사단은 신성 로마 제국으로 나온다. 그 뒤에 나온 킹덤스 Teutonic에서 나왔다면 더 좋았을 전투. 공략을 말하자면 우선 궁기병으로 기사단 기준 좌측 기병의 어그로를 끌어 그들을 끌어내 각개격파한 뒤 그렇게 확보한 공간으로 궁기병을 투입해 대포를 무력화시키면 적 우익에 있던 기병과 근위대가 몰려오는데 이때 아군 중기병으로 쓸자. 이때 보병은 적당히 전면에서 화살과 대포받이하다 대포 무력화시 돌격하는게 포인트. 그리고 아군 장군이 전사시 무조건 패전처리되니 장군 간수 잘하자.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 2번째 DLC인 군주들의 여명에서 캠페인으로 등장한다. 특이하게도 2개의 캠페인에서 등장하는데, 한쪽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국왕인 브와디스와프 2세(인게임명 '요가일라') 휘하 폴란드 문명[11]으로, 다른 하나는 거기에 용병으로 참가한 얀 지슈카의 보헤미아 문명으로 플레이 한다.
대체역사물 마지막 바이킹에서는 주인공의 나비효과로 원역사보다 1년 빨리 벌어진다. 물론 주인공이 폴란드 편을 든 만큼 기사단이 박살나는 역사는 바뀌지 않지만 오히려 기사단의 피해가 더 커지고 말보르크 성도 빠르게 상실하는 모습이 나온다.
중세 전투 치고는 스케일도 컸고 영향력도 막중했다보니 후대인들에 의해 주로 민족주의적인 이유로 역사왜곡도 많이 일어났다. 타넨베르크가 전후 폴란드로 넘어가고 폴란드 중심의 역사관이 서양 역사학계에서 인정 받으면서 그룬발트 전투란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많이 부른다.
다만 타넨베르크라는 지명은 이 전투 이전인 1270년대부터 독일인들이 사용해 온 지명이고 타넨베르크 전투라는 명칭 역시 독일인들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명칭이기에, 엄연히 이 전투의 당사자인 독일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타넨베르크 전투라 부르는 것 역시 타당하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런데 또 반대로 현대 러시아 쪽에서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역사왜곡을 해대는 종자들에게서, 근현대 러시아의 직계 전신이라고 보기 어려운 스몰렌스크 공국에서 지원군 좀 파병했던거 가지고 폴란드, 리투아니아 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같이 싸웠기 때문에, 2차 대전의 독소전쟁보다 500년 앞서 게르만족의 침공에 맞서 슬라브족을 지킨 전투니 뭐니 따위 골치아픈 헛소리도 나온다. 이것이 꽤 뻔뻔한 주장인데,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독일계 침략자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력해 폴란드를 괴롭혔다. 대홍수부터 시작해 폴란드 분할, 나폴레옹 전쟁, 폴란드 침공 등 독소전쟁 이전에 폴란드를 제대로 도와준 적이 한번도 없다.[12] 이렇듯 수백년 동안 폴란드를 침략하고 압제한 러시아가 뜬금없이 “같은 슬라브족” 운운하면서 역사왜곡 하는 것은 폴란드 입장에서 매우 불쾌하고 뻔뻔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차라리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지킨 알렉산드르 넵스키라면 독일인으로부터 러시아를 수호한 영웅이라고 주장한다면 맞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1]
가운데 말을 타고 칼을 치켜든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비타우타스 대공이며, 그 왼쪽에 창에 찔리기 직전의 흰 갑주를 입은 남자가 튜튼 기사단장인 울리히 폰 융잉엔이다. 또한 비타우타스 대공 오른쪽 밑에 적병을 쳐죽이고 있는 갑옷을 입은 남자가 이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용병으로 참전한
얀 지슈카다.
이 부분을 크게 보면 지슈카 특유의 애꾸눈도 구현해 놓았다.
[2]
당시 기사단장(Hochmeister)
[3]
당시 기사단 사령관(Ordensmarschall)
[4]
말로만 개종한게 아니라 당시 발트 신앙의 성지로 여겨졌던 지역을 죄다 밀어버림으로써 개종의 뜻을 확고히 했다. 수백년간 내려오던 전통문화를 군주가 앞장서서 밀어버릴 정도로 그만큼 리투아니아의 사정이 절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5]
나중에 가면 그단스크 같은 독일계 도시들마저 학을 떼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측에 붙어버린다.
[6]
리투아니아의 팽창은 1399년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킵차크 칸국에게 대패하면서 그친다.
[7]
참고로 1407년 그의 형인 콘라트 폰 융잉엔은 죽기 직전 동생에게 기사단장직을 물려주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8]
이 헝가리 왕이 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지기스문트다.
[9]
튜튼 기사단 자체는 당시의 독일계 세력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지만,
독일 기사단국을 흡수한
프로이센 왕국이 바로
독일 통일의 주역이 된다.
[10]
이 때도
알렉산드르 넵스키에 의해
페이푸스 호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면서 루스 쪽으로의 진출을 단념하게 된다.
[11]
리투아니아는 동맹 세력으로 나온다.
[12]
물론, 폴란드가 러시아에 대해 선수를 쳤던
혼란 시대가 있어서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폴란드를 괴롭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같은 슬라브라고 한들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 동족의식 따위는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