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공치제(共治帝)는 공동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이다. 공치제는 서로 부모자식, 형제자매, 친구, 부부인 관계가 많으며 수는 앞의 예시의 특성상 2명이 대부분이다. 다만 3, 4명이 공치제인 경우가 없었던 것도 아니며 공치제라 하더라도 한쪽 공치제가 통치를 할 수 없는 상황엔 다른 공치제가 실질적인 단독군주로서 기능하는 경우도 있었다.[1] 로마 제국의 사두정치 시기엔 공치제가 4명에 달했다.2. 서양
공치제는 명목상 같은 황제이긴 하나 그 안에 위계질서가 없지는 않았다. 기존 황제가 누군가를 공치제로 임명했을 경우, 기존 황제는 일명 '선임황제'의 개념으로 다른 공치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공치제 간의 위계질서의 예시로 로마 제국이 있는데, 사두정치로 제국을 4분할해 4명의 황제가 건재할 때도 그중에서 먼저 즉위한 황제가 나머지 3명을 통솔하는 방식이었다.다수의 공치제가 있을 경우 그 안의 위계에 따라 명칭은 세분화된다. 사두정치는 제국을 둘로 분할하여 황제 두 명당 한 구( 區)[2]를 통치하는 방식인데 두 명이 같은 계급이 아닌 높은 계급의 황제를 정제(正帝), 그를 보좌하는 황제를 부제(副帝)[3]로 같은 황제여도 위계구분을 철저히 했다. 이것이 행정구역 하나당의 황제들로 2개의 행정구역을 합하면 정제가 두 명인데, 이 정제 간에도 먼저 즉위한 정제가 늦게 즉위한 정제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선임 황제'라는 개념이 존재했다. 즉, 같은 정제여도 즉위 순서에 따라 분명한 위계가 있으며 정리를 해보면 선임 정제 > 정제 > 부제 순으로 위계가 나뉘어지는 것이다.
참고로 로마의 부제는 동양의 제후와 비슷하지만, 정제가 죽거나 퇴위하면 정제위 계승권한이 있었다. 이를 보면 부제는 제후의 속성을 가졌으며 동시에 황태자의 속성도 띄고 있는 것이다.
공치제의 장점은 상술한 대로, 대제국도 통치자가 여럿이니 다스리기 쉽다는 점이다. 동쪽에 있는 단독황제의 경우 서쪽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진압하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다른 공치제가 서부를 다스린다면 서부에서 일어난 반란도 빠르게 제압이 가능하다. 단점으로는 제국 간 이질감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황제가 여럿이니 권력 집중이 안되어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큰데다 각 제국당 따로 계승이 이뤄지기에 이름만 같고 실질적으로는 서로 다른 나라가 되어버릴 가능성도 크다.
결론적으로 이런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이를 증명하듯 제2차 사두정치 시기엔 사두정의 내전이 일어났고 콘스탄티누스 1세가 각 구들을 통일하는 결말에 이르렀다.
한편 선거군주제 국가에서 선거제를 무력화하기 위해서 공치제를 두는 경우가 많은데, 초기 프랑스 왕국의 경우 왕이 전쟁에 나갈 때 내치를 핑계로 후계자를 공치제로 임명해 달라고 유권자에게 요구하였고 이런 경우 선왕이 서거할 경우 공동왕에 임명된 왕세자가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게 되고 선거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도 초기 황제의 칭호 중 하나였던 로마왕을 자신의 후계자에게 넘겨주는 행위를 통해서 선거를 무력화하려고 노력하였다.
비슷하게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황제를 옹립할 수 있다는 공화제적 전통 때문에 세습은 가능했지만, 왕조 교체가 매우 쉬웠기 때문에 황제가 자신의 후계자를 공동황제로 임명하여 세습에 성공할 가능성을 높이려 하였다.
유럽에서는 'Jure uxoris'라고 해서 여왕이 즉위할 경우 여왕의 남편도 함께 즉위해서 공동왕으로 재위하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영국의 메리 2세- 윌리엄 3세와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츠 1세가 있다. 여왕이 이웃나라의 군주와 결혼해서 두 나라를 하나로 통합해 함께 다스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대표적인 예시인데 다만 이 둘은 상대의 모국에 대한 통치에는 간섭할 수 없었다.
스파르타는 2개의 왕가에서 각자 왕을 옹립하여 독재를 막았다.
21세기 현재에도 존속하고 있는 공치제의 사례는 안도라의 공동군주가 유일하다.
3. 동양
대표적으로 베트남의 쯩 자매, 그리고 떠이선 왕조의 초대 황제 타이득이 민제, 꽝쭝, 깐틴과 함께 공치제로서 국가를 통치한 사례가 있다.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도 공치제와 유사한 경우인데 정이대장군이 다스리는 막부가 세워지기는 했으나 의외로 가마쿠라 시대까지만 해도 천황을 선두로 하는 조정의 실권이 어느 정도는 남아있어서 간토를 비롯한 일본 동부 지방은 가마쿠라 막부가 통치했지만, 긴키 지방 등의 일본 서부에는 천황의 영향력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 일본은 서쪽에서는 천황이 군림하고 동쪽에서는 쇼군이 군림하는 공치제에 준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 조큐의 난과 원나라의 일본원정으로 인해 남아있던 천황의 실권까지 막부에 빼앗겨 이후의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 시대에 천황은 완전한 허수아비 바지사장으로 전락한다.그러나 공동군주 개념은 동양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과 몽골 등에서는 공동군주의 사례가 없었고 중국의 경우 진승·오광의 난 당시 정왕 진승이 오광을 부왕에 임명한 사례가 있지만 반란군이 아닌 정식 황제가 공치제인 경우는 없었다. 애초에 동양에서는 아예 한 나라에 한 군주라는 개념이 확고하게 자리잡아 있어서 불가능했다.
다만 공동군주 개념은 없어도 이와 준하는 사례는 있었는데, 상왕과 수렴청정, 대리청정 등이었다. 상왕은 작위가 토지에 딸리지 않는 동양에서 주로 발달했고, 상왕이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자기가 실권을 쥐고 권력을 휘두르려 하는 경우였다. 특히 일본에서는 인세이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제도화가 되었는데 너무 관행이 되다보니 인세이가 사실상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천황들은 후계자가 어느정도 성장했으면 상황이 되는 길을 밟았다. 일본은 아예 1301~1305년에는 상황만 무려 다섯 명이 있던 때도 있었다.[4] 다른 하나는 베트남의 쩐 왕조인데, 쩐 왕조는 독특하게도 역대 군주들 중에 상황이 된 사람이 여섯 명에 달한다.
수렴청정과 대리청정은 사실 서양에서도 섭정이라는 개념으로서 존재하며, 막상 하더라도 공동군주 개념에 가까울 만큼 잘 된 일은 없지만,[5] 그래도 세종- 문종 사례처럼 사실상의 공동군주나 다름없을 정도로 이상적인 체제가 되기도 했다.
4. 단어 사용례
[1]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클레오파트라 7세도
아기인
아들을 공치제로 임명하고 자기가 사실상의 군주로 군림한 사례이다.
[2]
여기서 둘로 분할된 제국 하나당 두 제국이 이루는 대제국의
행정구역이 된다.
[3]
군주의 부하인 군주라는 점에서, 동양권의
제후왕과 비슷하다.
[4]
89대
고후카쿠사 덴노, 90대
가메야마 덴노, 91대
고우다 덴노, 92대
후시미 덴노, 93대
고후시미 덴노. 당시 천황은
고니조 덴노였다.
[5]
애초에 동양에서는
서열이 딱딱 정해져 있어서 실권을 쥐더라도 형식상 군주를 존중해줘야 했고 수렴청정의 경우 일정시기가 지나면 물러나야 했고, 대리청정은 그나마 물러날 일이 거의 없는데 이 경우는 물러날 일이 없을 정도로 왕의 건강이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수렴청정은 그 주체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시대상 제약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