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간체 | 高志航 |
한국식 독음 | 고지항 |
영문 | Gao Zhihang |
생몰년도 | 1907년 5월 14일 ~ 1937년 11월 22일 |
출생지 |
청나라 펑톈성(奉天省) 퉁화(通化) 現 중국 지린성 퉁화시 퉁화현 산키유수진(三棵榆樹鎭) |
사망지 |
중화민국
허난성 저우자커우(周家口) 現 중국 허난성 저우커우시(周口市) |
묘소 |
중국
장쑤성
난징시 쉬안우구(玄武区) 항공열사공묘(航空烈士公墓) |
복무 |
봉천군벌 동북항공처 비응대 (東北航空處飛鷹隊) 중화민국 공군 공군 제4항공구축기대대 (空軍第四驅逐機大隊) |
최종계급 | 대령→ 소장(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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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일전쟁 당시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공군 소속 조종사로 중일전쟁 당시 중국 공군의 에이스 중 하나로 불리는 조종사. 탑승기체는 BF2C "IV-1번기"좌측부터 웨이친, 가오즈항, 류추이강, 리구이단. 이미지 출처
그와 함께 에이스로 불리었던 중화민국의 조종사들인 류추이강(劉粹剛), 웨이친(樂以琴), 리구이단(李桂丹)과 함께 사대금강(四大金剛), 사대천왕(四大天王)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가오즈항의 본래 이름은 가오밍주(高銘久)로, 1907년 5월 14일 현 지린성 퉁화시 퉁화현 싼커위수진(三棵榆樹鎭)의 빈농인 아버지 가오징원(高景文)과 어머니 리춘잉(李春英) 사이에서 8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빈농이었던 집안의 농사일을 도우며 8세에 싼커위수소학교(三棵榆樹小學)에 입학하고 12세에 소학교를 졸업. 13세에 봉천성지남중학교(奉天城指南中學)에 입학했는데, 봉천성내에 있는 중학교까지 400리 거리를 며칠간 걸으며 통학했다고 한다.프랑스 유학반 단원 18명.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가오즈항[1]
17세에 중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을 침략하는 외세에 맞서고 집안을 지탱하고자하는 뜻으로 봉천군벌 궈쑹링이 세운 동북육군강무당(東北陸軍講武堂)의 동북육군군관 교육반에 입대해 포병술을 배웠으나 이후 28명으로 구성된 프랑스 유학반 중 한 명으로 발탁되어 프랑스의 항공기 제조사인 모랑-솔니에사(Morane-Saulnier)가 보유한 파리 근교에 위치한 민간 항공 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의 입학 신체 조건이 까다로워 가오즈항을 포함한 18명만이 입학하고 나머지 10명은 다른 비행학교에 입학했다. 초급훈련을 수료한 후 1926년에 프랑스 육군 항공학교에서 비행기 조종술을 교육받으며 2년간 프랑스에서 유학했는데, 유학 생활 중 자신의 이름을 가오즈항으로 개명했다.
졸업 후 프랑스 육군중사로 임관해 프랑스 북부 낭시(Nancy)에 위치한 육군항공대 제 23 전투비행대에서 실습을 받은 뒤 1927년 1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귀국해 장쉐량군의 소위로 임관하여 동북항공처 비응대(東北航空處飛鷹隊)에 소속되어 동북항공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며 비응대의 지휘관이 되고 소령으로 진급했으나 국민당의 2차 북벌로 인한 봉천군벌의 국민당 합류와 만주사변 이후 국민혁명군 공군으로 소속을 옮기게 되었다. 사고로 입은 부상으로 인해 1차 상하이 사변에는 참전하지 못했고, 봉천군벌 출신이라는 냉대로 소령에서 대위로 강등되기도 했으나 실력을 인정받아 항저우의 중앙항공학교 교관으로 발탁된다.
이후 1934년 공군 제4항공대대(空軍第四驅逐機大隊)의 대대장으로 임명되어 산하의 제 21, 22, 23 중대를 총괄하게 되었다. 1935년에는 항공기 구매 조사 등을 위해 이탈리아로 1년간 시찰을 다녀왔는데, 가오즈항의 비행 실력을 높게 본 베니토 무솔리니가 그를 고용하고자 했으나 거절했고 이탈리아의 항공기 상인들이 그에게 노후한 항공기를 권유하며 팔려하자 "당신 나라의 항공기 수준은 너무 뒤떨어졌다. 미국으로 가겠다."고 무솔리니에게 항변해 그런 가오즈항의 태도에 감탄한 무솔리니가 가오즈항에게 자신의 권총을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후, 가오즈항은 교도총대 부총대장으로 취임해 난창에서 조종사 훈련생들을 훈련시켰다.
3. 중일전쟁
가오즈항의 커티스 BF2C 고스호크 III IV-1호기.[2]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했고 다음날인 14일에 가오즈항은 태풍이 부는 상황에서 4대대의 모든 기체를 이끌고 출격했다. 당시 4대대에 배치되어 있던 항공기는 미국에서 수입한 커티스 BF2C 고스호크 III(Curtiss BF2C Goshawk) 전폭기로, 가오즈항의 전용기는 IV-1호기였다.
출격한 4대대의 항공기들은 닛타 신이치(新田慎一) 소령의 지휘 하에 타이완에서 출격해 도양폭격을 해 온 96식 육상공격기 9기를 발견하고 교전을 벌였으며 이 교전에서 가오즈항은 1기를 격추, 1기를 반파시켰다.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항공모함 카가에서 발진한 89식 함상공격기 대대와 교전을 벌여 1기를 격추시키고 두번째 기체를 공격하던 중 총탄에 피격당해 오른팔에 부상을 입었으나 조종간을 다리 사이에 두고 부상당한 오른팔을 묶어 지혈한 뒤 왼팔로 항공기를 조작하며 교전을 계속해 적기가 모두 퇴각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착륙하여 전기 급탄을 지시하고 치료를 받았는데, 그의 기체가 원활하게 착륙하고 부하의 보고를 들을때도 표정이 변하지 않아 아무도 그가 부상당한줄 몰랐다고 한다.
1937년 8월 15일, 부상당한 가오즈항.
가오즈항은 부상으로 한달 간 입원치료를 받고 9월 경 다시 복귀했다. 전선에 복귀한 당일 BF2C 고스호크 III의 동체하부에 있는 폭탄걸이를 떼내어 개수한 기체로 출격하여 수상정찰기 1대를 격추시켰고, 9월 22일 난징 상공에서 일본 해군의 전투기와 폭격기 편대 17기를 상대하며 96식 함상 전투기 1기를 격추했다.
4. 최후
1937년 8월 21일 체결되고 8월 29일 발표된 중소불가침 조약으로 10월부터 소련제 항공기가 중국에 공여되자 가오즈항의 4대대는 중국 북서부 란저우로 이동해 소련 항공기인 I-15, I-16를 수령받고 한달간 조작법을 훈련받은 뒤 11월 22일 아침. 가오즈항은 4대대와 소련 공군 지원대로 구성된 13기의 편대를 이끌고 란저우를 출발해 저우자커우의 비행장에 도착했다.그러나 이날 정오 경 스가히사 츠네오(菅久恒雄) 소령이 이끄는 키사라즈 해군항공대(木更津海軍航空隊) 소속의 96식 육상공격기 11기가 비행장을 공격해왔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가오즈항은 I-16에 탑승해 출격하려 했으나 엔진 시동이 걸리지 않아 엔진을 켜고 끄기를 반복하던 중 육상 공격기에서 투하된 폭탄의 폭발에 휘말려 향년 30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전사 후 가오즈항은 소장으로 추서되었으며, 한커우에서 열린 그의 추도식에 장제스과 저우언라이가 참석했다고 한다.
5. 매체에서
- 호이4의 중화민국 공군 장성으로 등장한다.
- 전함소녀에서 에이스 기체로 등장한다. 대공+9로 그리 좋은 성능은 아니다.
6. 참고문헌
[1]
https://baike.baidu.com/item/%E9%AB%98%E5%BF%97%E8%88%AA
[2]
현재 해당 기체는 대만 항일역사박물관에 소장 중에 있다. 현재는 비행하지 못하지만, 간간히 행사에 의장용으로 동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