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4 14:26:43

리버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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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셀
게리 파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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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도허티 · 칼 바랏 · 존 하셀 · 게리 파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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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bert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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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결성 1997년
영국 런던
데뷔 2002년 6월 3일
싱글
해체 2004년[1]
재결성 2014년
멤버 칼 바랏 (기타, 보컬)
피트 도허티 (기타, 보컬)
존 하셀 (베이스)
게리 파웰 (드럼)
장르 인디 록, 개러지 록 리바이벌
레이블 러프 트레이드 레코드
버진 EMI 레코드
하베스트 레코드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상세3. 역사
3.1. 고난했던 무명 시절(1997~2002)3.2.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쏟아지는 언론의 주목3.3. 마약과 음악, 막장으로 치닫는 관계3.4. 계속되는 갈등과 해체3.5. 재결합
4. 음악적 스타일5. 도허티 - 바랏6. 디스코그래피
6.1. 정규 앨범6.2. 컴필레이션 앨범6.3. 라이브 앨범6.4. 싱글
7.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m9dAGab.jpg
▲ 2003년 Kentish Town Forum 공연[2]

영국의 개러지 록 리바이벌 밴드. 짧은 기간동안 활동했지만 여러 이슈를 몰고 다니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 상세

짧은 기간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광기와 열기가 섞인 노래 및 라이브 공연으로 평론과 대중 모두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특히 데뷔 앨범 Up the Bracket Is This It과 함께 2000년대 초 개러지 록 리바이벌,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씬의 명반으로 일컬어지며, 특유의 고상한 문학적인 면과 고옥탄가 노동층 분위기가 묘하게 뒤섞인 영국산(産) 개러지 락의 대표격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프론트맨 피트 도허티는 전형적인 영국 락스타의 면모를 보여주며 수많은 이목을 끌고 다니기까지 했으니 단기적인 임팩트로는 여러모로 엄청났다.

피트 도허티와 칼 바랏의 관계는 리버틴즈를 유지하고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이고도 상징적인 장치로, 실제로 이 둘은 단순한 보여주기용 쇼맨십을 넘어선 흡사 연인과도 같은 애증관계로 수많은 여성 팬들을 몰고다녔으며 영국 락계의 갤러거 형제 더 스미스 조니 마- 모리세이 그리고 비틀즈 레논-매카트니에 비교되곤 했다.[3] 개러지 락 밴드들이 유난히 인물이 좋은 것을 감안해도 젊었을 적의 리버틴즈의 도허티/바랏 양대 프론트맨의 비주얼은 가히 스트록스, 바인스[4]에 견주었으며 오히려 동시대에 데뷔했던 맥플라이를 위시한 숱한 영국산 아이돌 보이그룹을 능가한 페이스로도 유명했다. 당시 리버틴즈는 그 직전에 스트록스가 그랬고 그 직후에 악틱 몽키스가 그랬듯이 스타일과 비주얼 그리고 음악성을 모두 겸비했던 무서운 신예들이었다.

3. 역사

3.1. 고난했던 무명 시절(1997~2002)

1997년 브루넬 대학에서 연기를 공부하고 있던 칼 바랏은 같은 학교 친구이자 플랫 메이트였던 에이미-조 도허티를 통해 피트 도허티를 처음 만나게 된다. 당시 칼은 학교에 환멸감을 느끼고 있었던 시절이었고, 스미스를 즐겨 듣던 어린 피트는 ' 모리세이- 조니 마'처럼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찾아 음악을 하기를 꿈꿨다. 적절한 시기에 만난 둘은 음악에 대한 열정을 확인하고 밴드를 결성했다.

밴드명은 사드 후작의 소설 < 소돔 120일>에서 따왔다고 한다. 소설의 다른 이름이 '난봉꾼들'의 욕망', Lusts of the Libertines이다. The Libertines라는 밴드명을 가지기 전, The Albion[5], 이라는 이름도 후보에 있었는데, 피트가 말하길 밴드명으로 하기엔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후보에서 탈락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스티븐 베들로(Steven Bedlow)가 보컬을 맡았었고 칼과 피트가 기타를 쳤다. 이외에 첼리스트,드럼,베이스(레이저라이트의 조니 보렐) 등 다양한 멤버들이 거쳐갔다. 밴드 초기에도 피트와 칼은 끓임없이 갈등을 빚으며 해체와 재결합을 반복했고 이 와중에 베들로가 나가고 리버틴즈 역사에 빠놓을 수 없는 그 유명한 매니저 배니 푸치(Banny Poostchi)를 새로 들이면서 첼리스트와 드러머를 정리 (게리 파웰을 영입), 교체하고 밴드의 부진 때문에 탈퇴한 베이시스트 존 하셀도 다시 불러들이며 온전한 라인업을 구성하게된다.

3.2.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쏟아지는 언론의 주목

파일:LPkKxAn.jpg
아직 소속이 없던 시절의 리버틴즈. 이 때 벌써 둘은 4년지기 친구였다.[6]

브릿팝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2001년. 록 음악계에서는 스트록스 Is This It 발매를 기점으로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이 유행을 타기 시작됐다. 그에 발맞춰 호주에서는 바인스, 미국(디트로이트)에는 화이트 스트라입스, 스웨덴에는 하이브스라는 3개의 밴드가 나오며 씬을 흔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 소위 록 좀 한다는 나라인 영국은 새로운 록 무브먼트에 당당히 유니온 잭을 걸고 활동할만한 밴드를 단 하나도 배출시키지 못했고, 이는 당시 영국 음악계에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쪽팔린 사건이었다.

물론 이 시기는 라디오헤드 OK Computer - Kid A - Amnesiac으로 이어지는 명작을 연달아 발매하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고, 이들의 2집 The Bends로부터 촉발된 포스트 브릿팝이 전성기를 구가하며 콜드플레이, 뮤즈를 비롯한 밴드들이 한창 잘 나가던 시기였다. 하지만 소위 영국뽕을 주도하던 언론들, 특히 NME를 위시한 음악 잡지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이 밀어줄 수 있는 밴드, 즉 오아시스 이후로 더 스미스에서부터 내려오는 적통 영국 록 밴드의 후계자가 전무한 대 위기였던 것이다. 브릿팝이 망해버린 후 오아시스는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같은 앨범이나 내면서 부진을 거듭하고 있었고, 콜드플레이를 위시한 포스트 브릿팝 밴드들과 실험적인 음악을 하던 라디오헤드는 NME의 성향과는 상극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NME는 스트록스나 화이트 스트라입스같은 미국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밴드들을 발굴해내며 지속적으로 자기들이 밀어줄 수 있는 영국적인 록 밴드를 찾기 시작했고, '미국 놈들도 이런 영국적인 락을 하는데 왜 우리는 못하는가!' 라면서 떡밥에 계속해서 장작을 넣기 시작했다.역시 브릿팝 전쟁 일으킨 놈들 답다 이처럼 씬의 관심은 '오아시스 이후 미국 락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영국 락의 후계자'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때마침 영국적인 개러지/펑크 록 밴드인 리버틴즈가 나타나자 먹잇감을 발견한 영국 언론들은 엄청난 관심과 설레발을 보내게 된다.

3.3. 마약과 음악, 막장으로 치닫는 관계


밴드가 1집을 녹음하며 동시에 투어를 진행하는 동안, 이전부터 간헐적으로 있었던 피트의 약물 사용이 과다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매스컴의 주목과 함께 본격적으로 방구석 생활에서 나오면서 돈을 벌기 시작하자 전부터 문제가 있었던 약물 중독 증상이 심히 악화된 것이었다.[7] 피트는 이때 느꼈던 감정과 경험을 일기장과 인터넷을 이용하여 밴드 팬포럼에 적기도 하였다. 팬포럼에 들어가서 글을 올릴 때 거의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시도때도 없이 아무때나 글을 남기곤 했는데, 중증의 마약 중독 탓에 어쩔 때는 굉장히 의기소침해하고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쩔때는 얌전하고 행복해 보이는 등의 극단적인 글을 수시로 올렸다고 한다. 이 때쯤 밴드 내부에 분열이 생겼고, 피트와 칼 사이에는 미묘한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투어를 관람한 팬들이 그 미묘한 분위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2003년 5월 쯤 밴드는 다음 앨범 작업의 데모를 작업함과 동시에 밴드를 홍보하고자 미국 뉴욕으로 가는데, 거기서 Babyshambles Sessions라는 밴드 세션을 녹음한다. [8] 하지만, 뉴욕에서 투어를 하면서[9] 칼은 중독 증상이 점차 심각해지며 막장으로 치닫던 피트를 발견하고, 나중에 피트가 대놓고 마약 딜러들을 숙소에까지 합숙시키자 칼은 크게 화를 낸다. 잔뜩 성질 뻗친 칼은 먼저 런던으로 도중에 떠나고, 아직 미처 다 녹음하지 못한 Babyshambles Sessions은 피트가 베이시스트 존과 함께 녹음을 마친 뒤 뉴욕의 한 리버틴즈 팬에 의해[10]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되었다. 이 세션으로 리버틴즈는 대중들에게 새로운 앨범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돌아온 피트는 한 동안 칼 없이 공연을 계속 돌았고, 밴드의 새로운 싱글인 Don't Look Back Into The Sun 버나드 버틀러[11] 아래 프로듀스 되고 있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 당시 피트와 칼의 관계를 보여주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꼼꼼한 성격의 버나드 버틀러와 해픈 스타일의 피트는 죽이 잘 맞진 않았지만 버틀러는 이 노래의 엄청난 대박 조짐을 본 후 참아주며 같이 일했다.[12]

이 때 피트가 칼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다가오는 칼의 생일에 맞춰 스페셜 공연을 준비한다. 근데 칼은 이미 자신의 몇몇 친구들에 의해 주최된 파티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고, 소식을 받은 칼을 보자 파티를 주최한 친구들이 떠나지 말 것을 충고한다. 칼은 피트의 진심을 오해한채 또 마약 딜러들을 끼고 밤새 크랙, 헤로인으로 찌들 것 같은 피트의 사적파티에 가지 않기로 결심한다.

결국 피트는 혼자서 그 공연을 시작하게 되었고, 피트는 이 때 칼에 대해서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팬들과 진행된 그 파티에서 피트는 술과 약에 쩔도록 새벽내내 공연하다가 동이 틀 때 쯤 그루피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갔고, 다음 날 유럽 투어를 하기 위해 예약해놓은 독일행 기차를 타지 않고 잠적하고 만다.

이에 칼은 그동안 쌓여왔던 분노가 폭발하여 진심으로 빡친 나머지 대타로 앤소니 로사몬도[13]를 세우기로 합의를 본 후에 피트 없이 유럽 투어를 돌기로 결정한다. 여기에 더해 칼은 피트가 마약에서 깔끔하게 손 씻지 않는 이상 밴드에 다시 발 들일 일은 없다며 못을 박는다.

며칠 후 피트는 자신 없이도 리버틴즈가 유럽 투어를 끝내고 일본 투어까지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피트는 밴드가 자신을 쫓아내고 뻔뻔하게 공연을 돈다고 생각했고, 결국 솔로 활동을 위해 몇몇 지인들과 밴드 베이비솀블즈를 결성하여 본격적으로 갈라서기를 시작한다.

이처럼 다사다난했던 밴드 내 상황 탓에 공연은 유난히 막장이 많았고, 피트는 내내 약에 더 의존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중독자의 길을 걷는다. 공연이 끝나면 담배와 술, 마약에 찌들어 잠을 청하는 악순환에 빠져 허우적댔고, 고통스러운 금단 증상과 막장으로 치닫는 자기 자신을 잊기 위해 점점 마약을 더 해대며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종국에는 당장 약할 돈이 떨어져서 공연 도중 팬들에게 몇 파운드를 급히 빌려 딜러에게 약을 구할 정도로 막장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던 중 8월 11일, 피트가 또 다시 돈이 떨어져 약을 구할 수 없자 마침 혼자 밴드를 데리고 떠난 칼이 생각나 홧김에 칼의 저택에 무단침입하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200파운드 정도 되는 돈을 챙기던 피트는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 감방으로 가게 된다. 소식을 듣고 급히 일본에서 돌아온 칼이 감방에서 피트가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감옥으로 향한다. 피트는 칼의 면회요청을 거절하며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채 감방에 남는다. 하지만 이번에 화가 난건 피트만이 아니었다. 칼 역시 이 사건으로 적잖이 놀라고 화난 것이다. 칼도 면회요청을 거절 당하자 꽤씸한 마음에 피트를 두고 일단 혼자 돌아간다. 하지만 칼은 이후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피트를 감옥에 두고 온 후 계속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피트가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동료 죄수들에게 집단 폭행 당하여 얻어터지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자[14] 독방에 갇히게 되고 마약 없이 헤로인과 크랙의 금단증상을 버텨야 하는 피트는 그야말로 생지옥을 경험한다. 며칠 동안 온갖 자해를 하는 등 버텨보지만 도저히 안되겠다 싶은 피트는 결국 칼하고의 면회를 요청한다. 피트는 면회나온 칼에게 체면이고 뭐고 감옥에서 제발 빨리 풀어달라며 애원했고, 이에 칼은 보석비를 잔뜩 물어주며 2개월로 감형시켜준다.[15]

2집 발매 전 두 사람은 크리에이션 레코드 사장 앨런 맥기의 호의로 웨일스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곡을 쓰기 위해 같이 지냈는데, 피트 도허티와 크게 말다툼을 한 어느날 칼 바랏이 앨런 맥기의 집 대리석 싱크대에다 머리를 박고 자살시도를 해서 크게 다친다.[16] 이처럼 두 사람의 긴장관계와 자기파괴는 점점 더 심화되었다.

8월 18일, 리버틴즈의 새싱글 Don't Look Back Into The Sun이 발매된다. 싱글은 대히트를 쳤고 영국 언론은 또 다시 이 엄청난 싱글에 주목을 보내며 우리 시대의 비틀즈라는 등 말도 안 되는 설레발을 친다.[17] 팬들은 이 노래의 가사를 통해서 피트와 칼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었고 리버틴즈가 얼마 못 가 해체할 것 같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에 얼마 못 갈 밴드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많은 사람들이 공연에 너도나도 몰리기 시작했고, 언론을 통햐 감옥에 있는 피트와 밴드 투어를 돌고 있는 칼의 관계가 바깥에 알려지면서 밴드는 엄청난 인기를 누린다. 이 때 아직 피트가 감옥에 있었으므로 밴드는 계속 앤소니 로사몬도와 공연을 돌고 있었다.

하지만 알게모르게 칼은 밴드가 인기가 치솟음에도 불구하고 피트의 팬덤과 밴드의 팬덤이 미묘하게 나뉘는걸 느낀다. 칼 역시 이 시기 팬포럼에 많은 글을 남기면서 자신의 심정을 남기면서까지 계속 무리한 스케줄의 투어를 진행한다. 칼 역시 기분이 안 좋은건 매한가지라 술과 담배를 끼고 살면서 밴드 생활을 계속해나간다. 시간이 흘러 10월이 되었고 피트의 출소일이 몇 일 안 남았다는 소식을 칼이 접한다.

3.4. 계속되는 갈등과 해체

3.5. 재결합

이후 피트 도허티는 리버틴스 해체 전부터 준비해오던 프로젝트인 Babyshambles를 이어 밴드를 결성하고 몇 년간 활동을 하고 칼 바랏은 개리 포웰과 함께 Dirty Pretty Things 활동을 한다. 존 하살 또한 Yeti라는 밴드 활동을 했다.

결국 따로따로 길을 가고 말았지만, 2007년쯤 재결합 기미를 보이더니 (피트와 칼은 2007년쯤 만나서 리버틴스 재결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2009년 거의 확정시되어가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2010년 리딩 페스티벌에서 피트 도허티와 함께 4인조로 공연 한 뒤 재결성하였다. 그 이후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2014년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Biritish Summer Time에서 재결합 공연이 확정되었다.

2015년 리버틴스는 Wilfred Owen의 시 제목에서 이름을 따온 세 번째 음반인 Anthem For Doomed Youth를 발매했다. 그 이후로 현재까지 리버틴스는 재결합을 이어오고 있고 각자 솔로 활동을 계속 하면서도 리버틴스 공연도 틈틈이 하고 있다.

2022년 영국과 유럽 투어를 돌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3년 10월 13일 신곡 Run Run Run을 공개하였으며 2024년 3월 8일 네번째 앨범의 발매가 예정되어있다.

4집 All Quiet On The Eastern Esplanade 가 발매되었다.

4. 음악적 스타일

기본적으로 비틀즈로부터 시작한 정통 영국 로큰롤을 계승하였으며, 이후 80년대 펑크 록과 모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영국적인 인디 록밴드의 원형 더 스미스, 런던 펑크 무브먼트를 주도한 밴드 더 클래시로부터 특히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평을 받는다. 이 외 온리 원스나 버즈콕스, 언더톤스처럼 팝 성향이 강했던 영국 펑크 록 밴드들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도허티는 더 스미스의 'Still Ill'이 개인적으로 굉장히 큰 의미를 갖는 노래라고 밝혔고[18], 더 잼, 섹스 피스톨즈, 더 스미스, 버즈콕스, 체스 앤 데이브즈를 들으며 자랐다. 칼 배럿은 인디에 입문하기 전까지 너바나 스매싱 펌킨스를 비롯한 그런지 얼터너티브 록 밴드에 빠졌었고 더 도어즈, 벨벳 언더그라운드 및 기타 거장 장고 라인하르트 등을 좋아한다고 한다. 성향차에서 나타나듯 기타 실력은 칼이 압도적으로 좋으며 실제로 피트 도허티에게 기타를 가르친 것도 그다.

가사적으로 도허티는 윌리엄 블레이크 에밀리 디킨슨 그리고 토마스 채터튼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반면 바랏은 사키와 에드워드 시대 당시 문학 작품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5. 도허티 - 바랏

파일:도허티바릿.jpg
리버틴즈의 주요 멤버 피트 도허티 칼 바랏의 파트너십을 일컫는 말.[19] 도허티-바랏, 곧 리버틴즈란 밴드 속에서 두 뮤지션의 관계는 아무래도 극단으로 치닫는 한쪽 추를 나머지 한쪽이 막아주고, 또 언제 그 관계가 역전될지 모르는 불안한 관계로 정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정확히 협업해서 쓴 곡은 공식,비공식[20] 모두 합해야 50여 곡 쯤 되는데, 사실 데뷔 20여년차가 가까워져서야 3집을 내는 이들의 행보는 표면적으로는 과연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유명 콤비들을 생각하면 실적은 그야말로 참담한 수준.[21] 이런 삐거덕거리는 파트너십에도 서로 최대한의 결과를 끌어올리기 위해 인내하거나 배려하기보다는 걸핏하면 틀어지는 고집도 협업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그래서 과거 한 영국 음악매체는 도허티-바랏의 관계를 그들의 공동작곡의 소산이었던 그 유명한 <Albion>에 빗대 "난파당하고 있는 구조선"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다.[22]

이런 다난다사를 걸쳐 만들어 낸 곡은 자연스레 그 당시 두 사람의 심정이 반영되었는데, 이렇게 뽑아낸 앨범 3개 분량 50여 곡은 말 그대로 고스란히 리버틴즈의 얼마 안 되는 아웃풋이 되었는데 그 각각이 Up the Bracket, The Libertines, Anthems for Doomed Youth이다.

6. 디스코그래피

1집 반사회적, 데모적 분위기에 비해 2집 분위기는 아예 밴드 내부 사정이 중요 모티프가 되어서 그런지 거의 다 피트와 칼에 대한 관계를 노래로 한 곡들이 많다. 애초에 앨범명이 The Libertines(셀프 타이틀드)로, 앨범 커버의 인상적인 피트와 칼이 서로 함께 있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미묘한 분위기의 사진은 록 앨범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앨범 슬리브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되었으며, 아직도 후배 뮤지션들이나 배우, 코미디언들이 종종 패러디하기도 한다.

총 싱글 7개, EP 4개, 정규 앨범 3개(정확히는 베스트 앨범 때문에 4개), 21개의 데모/세션/부틀렉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모든 곡이 도허티/배럿 작사, 작곡이다. 물론 세션까지 포함할 경우 경우 베이시스트 존 해샐이 작곡한 Sister, Sister같은 노래도 있다.

6.1. 정규 앨범

6.2. 컴필레이션 앨범

  • Time for Heroes – The Best of The Libertines

6.3. 라이브 앨범

  • Live at O2 Academy Glasgow, 2015

6.4. 싱글

7. 기타

  • 세션들이나 데모들을 굉장히 많이 웹상에 굉장히 많이 푼 밴드이기도 한데, 그런 곡들을 찾다보면(팬이라면 필수적으로 다 들어보게 되는 Babyshambles Sessions라든지) 아예 완전히 다른 느낌의 같은 곡이나 (후에 다른 앨범에 실릴) 새로운 곡들을 들어 볼 수 있는 등 여러모로 자료량이 많은 편이다.
  • 1, 2집 모두 더 클래시 믹 존스가 프로듀싱해줬다. 사실 더 클래시한테 많은 영향을 받은 밴드이기도 하다.
  • 팬층이 확실해 내일 공연까지 가졌던 일본과는 달리 국내 같은 경우 앨범도 라이센스되지도 않았다.(베이비솀블즈나 더티 프리티 씽은 라이센스되었다.) 다만 이쪽은 베이비솀블즈는 EMI(현재는 워너뮤직 소속)의 팔로폰(Parlophone)에 소속되어있고 더티 프리티 씽은 유니버셜 뮤직 그룹의 버티고(Vertigo)에 소속되어있어 라이센스가 쉬웠을 듯 하다. 이 둘은 모두 한국에도 지사를 두고있는 거대 음반사이기 때문. 하지만 정규 3집 Anthems For Doomed Youth부터는 유니버셜 뮤직 그룹 산하의 Virgin EMI라는 거대 음반사에서 음반을 발매하였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리버틴즈의 라이센스반이 발매되었다.
  • 러프 트레이드[23]라는 이제는 메이저인 인디 레이블에 계약해서 모든 앨범들을 발매했다. 우여곡절 끝에 힘들게 따낸 계약이고,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초기 매니저 배니 스푸치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이 High Society에 갔어도(언더 인디 라벨) 1집은 명음반이 되었을 거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믹 존스, 버나드 버틀러같은 거물들과 만나서 같이 작업을 하게 점들이 바로 메이저 레코드 라벨과 계약하여 얻게 되는 굉장한 어드밴티지이다.
  • 2015년 레딩&리즈 페스티벌에 5년만에 돌아와 헤드라이너로 공연했다.
  • 국내에서는 미묘한 인기 때문인지 애석하게도 내한은 아직까지 없다. 그러나 2019년, 칼 바랏의 단독 자격으로나마 내한 공연이 성사되었다. 트위터 오피셜


[1] 이 즈음해서 도허티는 2집 녹음을 마치고 마약에 미쳐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굴다 연말에 용서받기 위해 복귀하려고 할 적엔 이미 칼 바랏으로부터 쫓겨난 후였다. [2] CSMN 뮤직 비디오의 배경으로서 마지막에 스테이지 인베이전으로 끝난 그 공연이다. 이 두 프론트맨의 마이크 셰어링을 담은 이 사진은 매체에서 리버틴즈를 가장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사진으로 종종 쓰인다. [3] 이 말을 한 사람이 바로 前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 본인이라는 것이 아이러니다. [4] 이 둘은 개러지 락 밴드 중 사실상 잘 생기기로 대놓고 유명한 밴드이기도 하다. 물론 이와 무관하게 두 밴드 모두 음악성도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5] 영국의 고대 그리스어 이름이며 Babyshambles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알비온은 리버틴즈 멤버들에게는 아르카디아라는 유토피아로 향하는 배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The good ship Albion to Arcadia" 이것은 피트가 어릴 때 시를 쓰면서 직접 지어낸 것으로, 멤버들과 립스의 팬들에게 의미가 크다. [6] 피트와 칼의 찌뿌둥한 표정에 대해 칼 바랏은 "아직 레코드 계약을 못 딴 우리를 따라주는 옆의 두 친구에게 미안했다"고 대답했다. [7] 이 기간 동안 피트는 크랙 헤로인을 동시에 쓸 정도로 막장에 막장을 거듭했다. [8] 그 때 즈음 피트와 칼이 다시 한번 초심으로 돌아가고 우정을 계속 유지하자는 다짐아래 서로의 팔등에 Libertine이란 문신을 새긴다. [9] 이때 뉴욕의 유서깊은 클럽 CBGB에 들러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10] 피트가 직접 팬에게 부탁한 것으로, 무료로 인터넷에 배포해주는 조건으로 원본 CD를 소장하라는 부탁을 남기면서 급히 칼을 따라 런던으로 밴드를 데리고 떠났다. [11] 스웨이드의 前기타리스트. 버나드는 이들의 데뷔 싱글 <What a Waster>역시 프로듀스 하였다. [12] 이 후 영국의 기자가 스웨이드를 틸퇴할 시의 자신과 브렛과의 관계를 리버틴스의 피트와 칼의 관계와 비교하면서 질문하자 크게 화를내며 자신이 밴드를 떠났을 때 상황은 리버틴스와 비교하면 세발의 피도 안된다고 답했다. [13] 칼이 뉴욕에서 만난 기타리스트. 후에 더티 프리티 띵스의 기타리스트가 된다. [14] 원래 유명 연예인들이 감방가면 자주 일어난다. [15] 감옥에서 지내면서 피트는 이 때의 심정을 고스란히 일기에 적었다. [16] 아이러니한 것은 칼이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 곳도 부엌 싱크대라는 것이다. 쌍둥이도 있었는데 곧 죽었다. 이 얘기는 피트 도허티가 칼 바랏에게 쓴 노래 'You're My Waterloo'에 잠깐 나온다. [17] 다만 이 싱글이 그렇게 설레발을 받을만큼 훌륭했던 것도 사실이고, 아직까지 리버틴즈 최고의 명곡으로 남는다. 객관적으로 이 곡은 명곡인게 사실. [18] 사실상 많은 영국 인디 뮤지션이 그렇듯 스미스로 본격적으로 인디에 입문했다고 보면 될 듯 하다. [19] 다만 어느 주요 매체에서도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은 아니다. [20] 데모나 싱글 비사이드까지 정말 다 합쳐도 [21] 레논-매카트니 콤비는 함께했던 7년의 세월동안 180곡 이상을 작업했고, 모리세이-마는 함께했던 5년간 50개가 넘는 트랙을 작업했다. [22]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에는 'Albion'은 정신적 이상향인 동시에 그 곳에 가닿기 위한 배의 이름으로도 받아들이고 있기에 옳고 틀리고를 떠나 상당히 적절한 비유이긴 하다 [23] 더 스미스, 스트록스의 음반을 내놓았던 레이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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