馮煥
풍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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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 최종직위 | 유주자사,幽州刺史, |
성 | 풍,馮, |
이름 | 환,煥, |
생몰년도 | ? ~ 1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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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세기 초에 활동한 후한의 관리이다. 상서시랑,尙書侍郞,과 하남경령,河南京令,을 거쳐 예주와 유주의 자사,刺史,를 역임했다.[1]2. 상세
118년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연합 세력을 이끌고 현도군,玄菟郡,을 습격하는 한편, 낙랑군의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했다.[2][3]121년 봄 유주자사 풍환은 현도태수 요광,姚光, 및 요동태수 채풍,蔡諷,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국경을 넘어 태조대왕과 연합한 예맥의 우두머리,渠帥,를 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노획했다. 풍환의 침입에 고구려는 왕의 아우 수성을 지휘관으로 보내 대응토록 했다. 수성은 사신을 통해서 거짓으로 항복하는 뜻을 보내어 풍환 등을 안심시킨 다음, 요충지를 선점하여 방어하면서 별동대로 하여금 현도와 요동 두 군을 역습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약 2,000 명의 피해를 입혔다. 이에 한나라는 광양,廣陽,군, 어양,漁陽,군, 우북평,右北平,군, 탁,涿,군 등에서 구원병을 파견했지만 별동대는 이미 돌아간 뒤였다.[4][5][6]
121년 여름 고구려의 태조대왕은 요동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했다. 해당 전투에서 요동태수 채풍을 비롯한 지휘부가 전사했다.[7][8][9] 같은 시기 풍환에게 원한을 품은 자가 국새,國璽,를 위조하여 풍환과 요광을 견책토록 만든 다음, 형집행기구,歐刀,를 요동도위,遼東都尉, 방분,龐奮,에게 보내어 집행하게 했다. 풍환은 유주자사로서 감찰임무를 통해 간악한 자를 증오하며 다수의 범죄를 적발했고, 현도태수 요광도 그와 결이 비슷했다. 방분에 의해 요광이 처형되자 수감되어 있던 풍환은 자결하려 했는데, 그의 아들 풍곤이 조서의 진위,眞僞,를 의심한 덕분에 마음을 바꾸고 조정에 자신의 무고함을 상서,上書,함으로써 누명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무렵 풍환은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황제는 유가족에게 10만 전을 하사하고 아들을 낭중,郎中,에 임명했다.[10]
3. 기타
- 후한시대의 자사는 종전의 감찰직에서 치소,治所,를 갖추고 군수와 현령을 강하게 통할,統轄,하여, 소속 군현의 연합 군사작전을 지휘했다. 풍환의 고구려 침공은 이러한 구조에서 실행되었다.[11]
- 후한시대의 자사는 종전의 감찰권도 유지했던 까닭에 소속 군현을 강하게 단속했다.[12] 시기적으로 풍환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연이은 패배와 관련하여 소속 군현에 대해 감찰을 벌이다가 성명불상자의 원한을 산 것으로 추정된다.
- 풍환의 아들 풍곤은 효렴으로 천거되어 군무와 감찰에서 공을 세워 벼슬이 정위에 이르렀고, 차남 풍윤,馮允,은 청렴하고 상서와 천문,推步之術,에 밝았으며 벼슬이 항로교위,降虜校尉,에 이르렀다.[13]
- 현대 문헌에 풍환은 반고의 흉노 원정에 종군하여 공적을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14] 해당 원정은 당시 시중이었던 두헌이 자신의 죄를 무마하기 위해 자처한 군사 행동으로서 그의 당인,黨人,들이 참여했는데, 이들 중에 풍환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15][16]
[1]
중국국가도서관 풍환신도궐 「故尚書侍郎河南京令豫州幽州刺史馮使君神道」
[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권 제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66년 6월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莬 攻華麗城」
[3]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元初五年 復與濊貊寇玄菟 攻華麗城; 魏氏春秋曰 華麗縣屬樂浪郡」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권 제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69년 「六十九年春 漢幽州刺史馮煥玄莬大守姚光遼東大守蔡諷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王乃遣弟遂成 領兵二千餘人 逆煥光等遂成 遣使詐降 煥等信之 遂成因據險以遮大軍 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二郡 焚其城郭 殺獲二千餘人」
[5]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建光元年春 幽州刺史馮煥 玄菟太守姚光 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 捕斬濊貊渠帥 獲兵馬財物 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 遣使詐降 光等信之 遂成因據險阸以遮大軍 而潛遣三千人攻玄菟 遼東 焚城郭 殺傷二千餘人 於是發廣陽 漁陽 右北平 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 而貊人已去」
[6]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焚燒候城入遭隧殺吏民」 삼국지에는 별동대가 후성,候城,을 불태우고, 요수현,隧,에 침입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권 제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69년 4월 「夏四月 王與鮮卑八千人 徃攻遼隊縣 遼東大守蔡諷 將兵出於新昌 戰沒 功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 以身扞諷 俱沒於陣 死者百餘人」
[8]
후한서 효안제기 「夏四月 穢貊復與鮮卑寇遼東 遼東太守蔡諷追擊 戰歿」
[9]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夏 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 殺略吏人 蔡諷等追擊於新昌 戰歿」
[10]
후한서 장법등풍도양열전 풍곤 「父煥安帝時為 幽州刺史 疾忌姦惡 數致其罪 時玄菟太守姚光亦失人和 建光元年 怨者乃詐作璽書譴責煥光 賜以歐刀 又下遼東都尉龐奮使速行刑 奮即斬光收煥 煥欲自殺 緄疑詔文有異 止煥曰 大人在州 志欲去惡 實無它故 必是凶人妄詐 規肆姦毒 願以事自上 甘罪無晚 煥從其言 上書自訟 果詐者所為 徵奮抵罪 會煥病死獄中 帝愍之 賜煥 光錢各十萬 以子為郎中」
[11]
高句麗 前期의 對外關係 硏究 김미경, 연세대학교 대학원 학위논문
[12]
후한시대 내군 군병의 존재와 운용- 후한 광무제의 도위관 폐지의 실상 최진열, 동북아역사논총 2022. no.75 동북아역사재단
[13]
후한서 장법등풍도양열전 풍곤 「馮緄字鴻卿... 初舉孝廉... 於是拜緄為車騎將軍 將兵十餘萬討之 詔策緄曰... 復為廷尉 卒於官... 緄弟允 清白有孝行 能理尚書 善推步之術 拜降虜校尉 終於家」
[14]
중국취현인민정부 지방명인 「冯焕随幕府中护军班固北伐北匈奴,出谋划策,屡建勋功,取得燕然山大捷,做出了重要的贡献」
[15]
후한서 두융영전 두헌 「和帝即位 太后臨朝 憲以侍中... 齊殤王子都鄉侯暢... 得幸太后 被詔召詣上東門 憲懼見幸 分宮省之權 遣客刺殺暢於屯衞之中 而歸罪於暢弟利侯剛 乃使侍御史與青州刺史雜考剛等 後事發覺 太后怒 閉憲於內宮 憲懼誅 自求擊匈奴以贖死 會南單于請兵北伐」 두헌은 황태후 두씨의 총애를 받았지만, 황실 종친 유창,劉暢,이 경쟁 상대로 떠오르자 암살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내궁,內宮,에 유폐되자 자구책으로 흉노 정벌을 자청했다.
[16]
후한서 두융영전 두헌 「乃拜憲車騎將軍 金印紫綬 官屬依司空 以執金吾耿秉為副... 度遼將軍鄧鴻 及緣邊義從羌胡八千騎... 憲分遣副校尉閻盤 司馬耿夔耿譚... 憲乃班師而還 遣軍司馬吳汜梁諷... 遂將兵出鎮涼州 以侍中鄧疊行征西將軍事為副... 憲上遣大將軍中護軍班固... 司馬任尚趙博等將兵擊北虜於金微山」 원정 및 이후 군사 작전에 참여한 인물은 집금오 경병,執金吾耿秉,·도요장군 등홍,度遼將軍鄧鴻,·부교위 염반,副校尉閻盤,·사마 경기와 경담,司馬耿夔耿譚,·사마 오사와 양풍,司馬吳汜梁諷,·(후임)시중 등첩,侍中鄧疊,·중호군 반고,中護軍班固,·사마 임상과 조박,司馬任尚趙博, 등이 확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