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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공화국 제15 ・ 18대 대통령 쿠바 공화국 제9대 총리 풀헨시오 바티스타 이 살디바르 Fulgencio Batista y Zaldív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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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1년 1월 16일 |
미국 통치기 쿠바 바네스 | |
사망 | 1973년 8월 6일 (향년 72세) |
스페인국 말라가 주 마르베야 | |
국적 |
[[쿠바|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정치인, 군인 |
종교 | 가톨릭 |
최종 당적 | 진보행동당 |
재임 기간 | 제15대 대통령 |
1940년 10월 10일 ~ 1944년 10월 10일 | |
제18대 대통령 | |
1952년 3월 10일 ~ 1959년 1월 1일 | |
제9대 총리 | |
1952년 3월 10일 ~ 1952년 4월 4일 | |
배우자 |
엘리사 고디네스 고메스 (1926년 결혼, 1946년 이혼) 마르타 페르난데스 미란다 데 바티스타 (1946년 결혼) |
자녀 | 9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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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쿠바의 군인 출신 대통령으로, 그는 1940년~ 1944년과 1952년~ 1959년까지 11년간 대통령을 역임했다. 최초의 비(非) 백인 대통령으로 물라토이기도 하다.무려 중사의 계급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901년 쿠바 바네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빈농으로 쿠바 독립전쟁에 참여했으나, 1902년 독립직후 미국-스페인 전쟁에 승리한 미군의 진주로 다시 쿠바는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나중에 그는 미국계 퀘이커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사이 그는 항만, 철도에서 일을 하며 돈을 모았고 1921년 아바나를 여행했다. 그 뒤 쿠바군[1]에 자원 입대했다. 그는 군대에서 일을 하면서 중사로 승진할 수 있었고, 군인 노동조합의 지도자가 되었다.이때까지야 평범한 촌동네 출신 부사관이었는데...
2.1. 1차 집권기
1938년, 인생역전한 바티스타
1933년 9월 이름하여 중사들의 반란을 일으켜 헤라르도 마차도 이 모랄레스의 독재 정권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이후에 수립된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르페데스의 임시 정부 역시 이 쿠데타로 무너졌다. 알고보면 카다피나 나세르급 인생역전. 게다가 대통령에 오른 후 처음 4년은 교육 확대와 경제 발전을 성공시켰고, 고작 집권 4년만에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서[2] 플로리다에서 여생을 사는가 했는데...
2.2. 2차 집권기
8년 후 선거에 다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공공산업 파탄과 부패로 도탄에 빠진 쿠바를 구하기 위해서란 명분으로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 때부터는 다시 흑화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세웠던 1940년 혁명을 다시 깨부수고 비밀경찰을 운용하며 1천 명에서 2만 명 가까이를 희생시켰다.[3]개발정책으로 쿠바의 1인당 GDP는 한때 이탈리아 수준까지 상승했고, 평균 임금은 남유럽과 비슷한 수준으로 개선되었다. 문해율과 같은 각종 사회지표는 라틴아메리카 최고 수준이었다. 1959년에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컬러TV 본방송을 시작했을 정도였다. 이미 컬러방송을 시작한 미국에서도 컬러TV는 사치품이었고, 다른 국가에서는 흑백TV조차 방송하지 못한 곳이 수두룩한 시절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마무시했다고 할 수 있다.[4] 그러나 10~20%의 실업과 1/3 이상의 국민을 차지하는 빈민층 등 심각한 빈부격차는 개선되지 않았다.
2.3. 쿠바 혁명과 몰락
1957년 3월, 내전 상황을 점검하는 바티스타.
바티스타는 군사독재자인 주제에 정작 군사에는 무능한 인물이었다. 1956년 쿠바군의 쿠데타 시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교단을 대거 숙청한 탓에 쿠바군은 무기만 든 바보들로 전락했다. 그 탓에 쿠바군은 쿠바 남부에 상륙한 한줌의 공산 반군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계속 점령지를 내 주었고, 이들의 무능력은 바티스타가 세세한 작전에도 일일히 어깃장을 놓고 간섭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공산 반군은 주로 남부의 산맥에서 게릴라전을 벌였는데 바티스타 정권은 내응을 차단한다고 도시의 젊은이들을 고문하고 살해했고 이것은 오히려 반정부 운동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바티스타는 1958년까지 미국에게 지원을 받았지만 바티스타 정권의 무능함에 학을 뗀 미국은 결국 지원을 중단했다.
사실 바티스타가 친미/반공산주의 행보를 보인 탓에 미국도 그동안 눈감아준것이나, 갈수록 여론이 나빠지고 쿠바를 안정적으로 이끌면서 미국과의 우호를 유지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든 좋았기에 굳이 민심을 잃고 무능한데다 부패하기까지한 독재자를 지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1958년 12월 30일 바티스타는 미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했지만 미국 측이 거절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자신의 전 재산을 챙기고 같은 독재자인 라파엘 트루히요 치하의 도미니카 공화국에 망명했다. 이것이 쿠바 혁명이다. 이후 바티스타는 다시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제도로 망명했고, 다시 포르투갈 리스본 근처 이슈토릴로 거처를 옮겼다. 1973년에 스페인 마르베야에서 사망했다.
3. 여담
- 원래는 꽤 괜찮은 외모를 소유했다. 상단의 프로필 사진과 쿠데타 당시 장면을 참조. 그러나 구글에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집권 중기~말기엔 원래도 있던 살집이 급격하게 불어나면서 외모가 상당히 추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