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Percy family / House of Percy중세부터 현대 영국에까지 이어져 오는 영국의 귀족 가문이다. 현재 가문을 대표하는 작위는 노섬벌랜드 공작(Duke of Northumberland)이다.
2. 상세
퍼시 가문은 루뱅 백작 고트프리트 1세의 막내아들인 루뱅의 조슬랭(Jocelin de Louvain, 1121 ~ 1180)에게서 기원한다. 이 인물은 아버지로부터 별다른 유산을 받지 못하고 이복 누이인 아델리자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와 결혼했을 때 누이를 따라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이후 누이의 지원에 힘입어 서식스의 피트워스에 상당한 영지를 구입했다. 또한 요크셔, 링컨셔, 에식스, 햄프셔, 케임브리지셔에 걸쳐 광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던 아그네스 드 퍼시(Agnes de Percy)와 결혼했는데, 아그네스는 윌리엄 1세의 정복 직후 잉글랜드로 넘어와 대귀족이 된 노르만인 윌리엄 드 퍼시(William I de Percy)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이후 두 사람의 후손들은 대대로 퍼시를 성으로 삼았다.초기에 퍼시 가문의 주요 자산은 요크셔에 있었다. 그러다가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정복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제1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가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다수의 토지를 영지로 삼고 노섬벌랜드의 안위크(Alnwick) 성을 구입하면서, 퍼시 가문의 중심지는 노섬벌랜드로 넘어갔다. 안위크 성은 이후 수백 년 동안 퍼시 가문의 본성으로 기능했고 현재까지도 가문의 소유로 남아 있다.
이후 퍼시 가문은 대대로 노섬벌랜드의 영주였는데, 노섬벌랜드는 섬나라 영국에서 중세후반/근세에 유일하게 본토가 적국과 국경을 접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퍼시 가문은 육군이 약한 영국에서 이례적일 정도로 군사력이 강한 영주였고, 중세 영국사에서 굵직굵직한 내란마다 등장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곤 했다. 특히 백년전쟁과 장미 전쟁 시기에 두드러졌는데, 헨리 4세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자주 반란을 일으킨 퍼시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랄프 네빌에게 백작위를 수여하고 영지를 늘려주는 등 네빌 가문을 키워주기 시작했다. 네빌 가문은 퍼시 가문이 반란의 대가로 몰수된 영지를 받았을뿐만 아니라, 이후 결혼을 통해 몬타구 가문의 솔즈베리 백작위, 뷰챔프 가문의 워릭 백작위까지도 차지하며 왕국 최대의 귀족이 되었다. 이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퍼시 가문과 네빌 가문 사이의 갈등과 무력 충돌을 불러일으켰고, 장미 전쟁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장미 전쟁 초기에 퍼시 가문은 충실한 랭커스터 왕조의 지지자였고, 반대로 요크 가문의 수장 요크의 리처드는 처가인 네빌 가문에 크게 의존했다. 요크의 리처드의 아들인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한 뒤 퍼시 가문은 작위와 영지를 빼앗겼고 노섬벌랜드 백작위는 '킹메이커'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동생인 존 네빌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에드워드와 워릭 백작의 사이는 점점 험악해졌고, 에드워드는 퍼시 가문의 후계자 헨리 퍼시(제4대 노섬벌랜드 백작)에게 작위와 영지를 돌려주었다. 이는 존 네빌을 분노케 하여 단기적으로는 에드워드가 왕위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낳았지만, 1년 뒤 에드워드가 다시 잉글랜드에 상륙했을 때 헨리 퍼시가 조용히 관망하는 것을 선택하면서 에드워드의 복위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후 퍼시 가문은 요크 왕조의 통치에 따르는 모습을 보였지만, 리처드 3세의 찬탈 뒤 리처드의 소집에 응했으면서도 보스워스 전투에서 그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리처드의 패배 및 사망과 튜더 왕조 성립에 일조했다.
이후 튜더 왕조의 중앙집권 강화 흐름에서 퍼시 가문 및 북부 귀족들의 힘은 점점 약해졌다. 1569년 제7대 노섬벌랜드 백작 토머스 퍼시는 옛 적인 네빌 가문의 제6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찰스 네빌 등[1] 북부 귀족들과 힘을 합쳐 엘리자베스 1세에 맞서 북부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신교도 엘리자베스 대신 가톨릭을 믿는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반란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토머스 퍼시는 포로가 된 뒤 개종하면 살려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고 참수되었다. 퍼시 가문의 위세는 약해졌지만, 토머스의 동생인 헨리 퍼시는 엘리자베스 충성파였기 때문에 백작위를 이어받고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노섬벌랜드 백작위는 11대 백작 조슬린 퍼시의 외아들 헨리 퍼시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일단 대가 끊겼다. 찰스 2세의 사생아 조지 피츠로이가 노섬벌랜드 백작 및 공작으로 임명되었지만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조슬린 퍼시의 외동딸 엘리자베스는 제6대 서머싯 공작 찰스 시모어와 결혼하여 제7대 서머싯 공작 앨저넌을 낳았다. 앨저넌은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외동딸 엘리자베스를 두었는데,[2] 엘리자베스는 휴 스미스슨 준남작과[3] 결혼했고 휴 스미스슨은 휴 퍼시로 이름을 바꾸었다. 1750년 휴 퍼시가 노섬벌랜드 백작이 되고 1766년 노섬벌랜드 공작이 되면서 휴와 엘리자베스의 후손들이 현대까지 퍼시 가문을 잇게 되었다.
퍼시 가문은 맏아들에게 '헨리'라는 이름을 주는 것이 전통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대에서 11대까지 11명의 노섬벌랜드 백작 중 8명이 헨리 퍼시였을 정도였다. 이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헨리 퍼시는 1대 헨리 퍼시의 아들이자 2대 헨리 퍼시의 아버지인 헨리 퍼시, 일명 '해리 핫스퍼'이며, 6대 헨리 퍼시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헨리 8세의 엽색 행각에 연루되어 유명해졌다.
3. 주요 가문원
- 헨리 퍼시(제2대 퍼시 남작)
- 헨리 퍼시(제3대 퍼시 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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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퍼시(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해리 핫스퍼의 아버지. - 토머스 퍼시: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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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퍼시(해리 핫스퍼, 1364-1403)
헨리 퍼시는 1364년 1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377년 웨일스공 리처드,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함께 기사작위를 받은 그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는데, 1385년 리처드 2세와 함께 떠난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뛰어난 기동력을 보여주며 '핫스퍼'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뜨거운 박차'라는 뜻으로 오늘날 한국으로 치면 '풀 악셀' 정도가 될 것이다. 이밖에도 여러 차례 군사적 업적을 쌓으며 명성을 얻었으며, 24세에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임명되는 등 리처드 2세의 대접도 나쁘지 않았지만,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에서 그는 아버지와 함께 헨리 측에 가담했다. 반란은 성공했고, 왕위에 올라 헨리 4세가 된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그에게 웨일즈, 아키텐에서 중책을 맏기며 보상했다.
그러나 헨리 4세의 아들 왕세자 헨리(미래의 헨리 5세)가 성장하고, 헨리 4세와 퍼시 가문의 이해관계에서 상충이 계속 발생하자, 그는 1403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해 여름 그는 슈루즈버리에서 헨리 4세와 왕세자 헨리가 지휘하는 부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처음에는 헨리 퍼시의 군대가 우세했으나 전투도중 그가 전사하자 그의 부하들이 후퇴하며 패배했다. 그의 머리는 잘려서 소금에 절여진 상태로 영국의 각 도시를 돌아다니며 전시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헨리 퍼시 백작은 이 반란에는 참여하지 않아 처벌받지 않았지만, 결국 이후 반란에 가담했다가 패배해 영지를 몰수당했고, 재차 반란에 가담했다가 전사하여 역시 목이 잘렸다. 한편 그의 아들은 나중에 복권되었으나 장미전쟁 와중에 전사했고, 그의 손자 역시 농민반란에서 전사했다. 즉 4대가 모두 내전에서 전사한 셈이다. - 헨리 퍼시(제6대 노섬벌랜드 백작): 앤 불린의 약혼자로 유명하다.
[1]
이 당시는 장미 전쟁에서 한 세기가 지났을뿐만 아니라, 당시 남아 있던 네빌 가문은 퍼시 가문과 원한이 컸던 솔즈베리-워릭 백작 계열이 아닌 웨스트모어랜드 백작가였기 때문에 원한은 별로 크지 않았다.
[2]
이 때문에 서머싯 공작위는 한참 먼 방계 친척인 제8대 공작 에드워드에게 돌아갔다. 단, 공작가의 재산은 에드워드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고 앨저넌의 조카인 찰스 윈덤과 엘리자베스(및 그 남편 휴)에게 나뉘어 상속되었다.
[3]
휴 스미스슨의 사생아 제임스 스미스슨은 화학자가 되었고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