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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

<colbgcolor=#000><colcolor=#fff> 파울 첼란
Paul Celan
파일:Paul Celan.jpg
본명 파울 안첼
Paul Antschel
출생 1920년 11월 23일
루마니아 왕국 체르너우치
사망 1970년 4월 20일 (향년 49세)
프랑스 파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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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시인, 번역가,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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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저서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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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내 존재와 무관한 시는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파울 첼란
루마니아 출신의 시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횔덜린,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잇는 독문학 역사상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이자 20세기 독어권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2. 생애

파울 첼란은 1920년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온건파 시오니스트로 자식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 반면, 어머니는 독문학 애호가였으며 독일어야말로 가문의 언어임을 피력했다. 10대의 첼란은 유대계 사회주의 조직[1]에 참가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공화파를 지지한다. 1938년, 첼란은 의학을 공부하고자 했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인해 비엔나에서 공부할 수 없게 되었고, 루마니아의 학교들은 유대인 할당제를 실시하며 입학이 힘들어졌다. 첼란은 학업을 위해 프랑스 투르로 향하는데 베를린에서 체류하던 중 수정의 밤 사건을 목도하고 자신의 삼촌을 만나게 된다. 이듬해 첼란은 고향으로 돌아오고 문학과 로망스어를 공부한다.

직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2년에는 나치 친위대와 루마니아 동맹군이 체르나우치를 점령한다. 첼란은 체르나우치의 유대교 회당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게토로 강제 이주당한다. 강제 노역과 핍박 속에서도 첼란은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번역하고 시를 창작하는 등 문학에 몰두한다. 1942년 부코비나 주지사는 유대인들의 체포 및 추방을 시행했고 첼란은 부모님을 설득하여 해외로 피신하려 한다. 그러나 첼란이 집을 비운 사이 부모님은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아버지는 발진티푸스로, 어머니는 총살로 사망한다. 1943년 첼란은 몰도바의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이때 부모님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이후 1944년 소련군의 진격으로 해방될 때까지 노동수용소에 수감된다.

전쟁이 끝난 후 첼란은 팔레스타인으로의 이민도 고려했지만 체르나우치를 떠나 부쿠레슈티로 이주한다. 이 시기 다양한 가명을 사용하고 번역 작업과 시 창작에 몰두하며 활발한 문학 활동을 보인다. 1947년, 루마니아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첼란은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이주하게 된다. 1948년, 첼란은 자신의 첫 시집인 <유골단지에서 나온 모래> Der Sand aus den Urnen를 출간했으며 당시 마르틴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을 마친 잉에보르크 바흐만과 친구가 된다. 직후 첼란은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겼으나 극심한 외로움과 고립감에 시달리게 된다.

1952년, 독일로 떠난 여행에서 문학 집단인 '47그룹'에게 낭독자로 초청받았고 강제수용소 생활을 묘사한 <죽음의 푸가> Todesfuge를 낭독하며 명성을 얻게 된다. 같은 해 12월, 첼란은 화가이자 조각가인 지젤 레스트랑과 결혼한다.[2]

이후 첼란은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독일어 강사로 활동했고 꾸준히 번역 작업과 창작에 매진하였으며 1955년에는 정식으로 프랑스의 시민이 된다. 이 시기 프랑스계 독일인 시인인 이반 골의 아내가 표절 의혹을 제시하며 첼란을 공격했고 그는 핍박을 받는다는 박탈감에 시달린다. 이후 1958년에는 브레멘 문학상, 1960년에는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1967년 아내와의 별거 생활을 하게 된다. 같은 해, 첼란은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시 낭독을 하는데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재직 중이던 마르틴 하이데거가 그를 연구실로 초청하여 만남을 가지게 된다. 첼란은 하이데거가 나치 문제와 관련하여 진심 어린 말을 해주길 원했지만 하이데거는 완강한 침묵으로 일관한다.

1970년 4월 20일, 첼란은 49세의 나이에 파리 센 강에 몸을 던지며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3. 저서

  • 유골단지에서 나온 모래 Der Sand aus den Urnen (1948)[3]
  • 양귀비와 기억 Mohn und Gedächtnis (1952)[4]
  •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 Von Schwelle zu Schwelle (1955)
  • 언어격자 Sprachgitter (1959)
  •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 Die Niemandsrose (1963)
  • 숨전환 Atemwende (1967)
  • 실낱태양들 Fadensonnen (1968)
  • 빛의 압박 Lichtzwang (1970)
  • 눈의 부분 Schneepart (1971)
  • 시간의 농가 Zeitgehöft (1976)

4. 여담



[1] 반파시스트 기조의 조직이었으며 마르크스주의 성격을 띄었으나, 첼란은 마르크스보다는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구스타프 란다우어 같은 아나키즘 사상가들을 선호했다고 한다. [2] 이와 동시에 첼란은 바흐만과의 불륜관계도 이어간다. 첼란 사후 아내와의 서신과 바흐만과의 서신이 차례로 출판된다. [3] 본명인 Paul Antschel로 발표. [4] 이전에 출판한 <유골단지에서 나온 모래>를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