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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렘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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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تلمسان‎
베르베르어 ⵜⵍⴻⵎⵙⴰⵏ
영어 Tlemcen
1. 개요2. 역사
2.1. 아가디르2.2. 자얀 왕조: 틀렘센
2.2.1. 중부 마그레브 최대 도시
2.3. 16세기의 혼란2.4. 오스만 제국령 알제리2.5. 근현대

1. 개요

알제리 서북부의 도시. 인구는 약 18만명이고 동명의 주의 치소이다. 동북으로 80km 떨어진 대도시인 오랑이 해안도시라면 틀렘센은 내륙의 거점이다.[1]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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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 (엘 웁바드)의 골목

신석기 시대부터 일대에 사람이 살았고, 서기 17년 타크파리나스가 현지 가이툴리 베르베르 인들을 모아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었으나 진압되었다. 도시 자체는 서기 2세기 무렵 로마 제국의 군사 요새로 세워져 포마리아 (Pomaria)로 불렸다. 도시는 곧 기독교화 되어 4세기 후반에 주교구가 설치되었고, 포마리아 주교 빅토리누스는 411년 카르타고 공의회의 주요 참석자 중 하나였다. 다만 484년 반달 왕국의 정복 후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는 후네리크에 의해 주교 호노라투스가 축출되었다. 6세기 중반 반달 왕국이 멸망한 후에는 동쪽 30km의 산지에 세워진 알타바를 중심으로 한 동로마 제국 산하 베르베르 왕국들에 속했다.

2.1. 아가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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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2년에 세워진 대사원

708년 이슬람 정복 이후 일대는 우마이야 왕조를 거쳐 740년대의 베르베르 대항거부터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그러다 757년경, 현 리비아의 야프란 출신인 바누 이프란 부족이 수프리 카와리즈파에 입각한 토후국을 세우고 아부 쿠라를 칼리파로 추대했다. (이프란 왕조) 아부 쿠라는 파괴되었던 포마리아를 재건하여 아가디르로 명명했다. 이 시기부터 도시는 향후 틀렘센의 정체성이 될 사하라 횡단 교역의 거점으로 발전했다. 주로 서쪽의 시질마사 ( 모로코 동부), 남쪽의 사하라 사막의 물산이 집결하여 오랑을 거쳐온 상인들과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아부 쿠라는 769년경 이바디파 베르베르 부족들과 투브나를 포위, 조공을 받아냈고 780년대에는 마그라와 부족 및 루스탐 왕조와 연대하여 신생 이드리스 왕조에 맞섰다. 하지만 수프리 교리에 따라 세습이 불가했기에 고령이 된 아부 쿠라는 790년경 이드리스 1세를 초대하여 그에게 왕국을 바쳤다. 이드리스 1세는 아가디르에 당도하여 대사원을 건림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814년, 이드리스 왕조는 이드리스 2세와 술라이만 1세 형제 간에 분할되었고 후자는 아가디르를 중심으로 술라이만 왕조를 세웠다. 술라이만 왕조 시기에 도시는 안정을 누리며 발전했고, 919년 혹은 931년 이프리키야의 파티마 왕조가 일대를 점령했다가 972년 중심지를 이집트로 옮기며 지리 왕조에게 마그레브를 맡겼다. 982년, 페스의 마그라와 부족이 아가디르를 점령했다가 1015년에 지리 왕조에서 분리된 함마드 왕조가 점령하여 반세기 이상 유지했다. 그러던 1082년, 무라비트 왕조의 유수프 빈 타슈핀이 아가디르를 점령한 후 그 서쪽에 베르베르어로 '진영'이란 뜻인 신도시 타그라르트를 세웠다. 시간이 지나며 두 도시는 하나의 시가지로 합쳐졌고, 유수프가 타그라르트에 세운 대사원은 1126년 아미르 알리 빈 유수프의 보수를 거쳐 현재 틀렘센 대사원으로 남아있다. 또한 그 옆에 알리가 세운 총독궁 역시 이후 카스르 알 카딤 (옛 궁전)이라 불리며 중시되었다. 1145년, 도시를 점령한 무와히드 왕조 아브드 알 무민은 성벽을 두르고 새 시타델 (성채)을 세웠다.

2.2. 자얀 왕조: 틀렘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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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얀 왕조의 창건자 야그모르센이 세운 엘 메슈아르 궁전

1209년 경에는 무라비트 부흥군이 일대를 공격해 이미 버려져 가던 농경지를 황폐화시켰고, 이듬해 무와히드 군에게 결국 격퇴되었으나 1212년 이후 이프리키야 지역은 점차 자립했다. 한편 무역 도시로써 번영을 이어가던 아가디르-타그라르트는 1236년 제나타 부족장 야그모르센 빈 자얀에 의해 틀렘센이라 명명되며 자얀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그가 작명한 틸림산 (틀렘센)이란 지명은 베르베르어로 샘을 뜻하는 틸마스 혹은 탈라에 쌍수격 어미 -산이 붙은 형태로 추정된다. 따라서 '두 개의 샘'이란 뜻이다.[혹은] 본래 카스르 알 카딤에 거주하던 야그모르센는 13세기 중엽, 새 시타델인 메슈아르를 세워 이주했다. 한편 그 무렵부터 자얀 왕조는 이웃한 마린 왕조와 거의 백년간 대립한다.

마린 조의 술탄 아부 유수프 야쿱은 시질마사를 장악한 후, 1272년 틀렘센을 포위했다. 야그무라센은 모로코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그를 회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281년 야쿱은 재차 틀렘센을 공격한다. 1283년, 야그무라센은 아들 아부 사이드 우스만 1세에게 마린 조에 대해 수비적으로 임할 것을 당부하고 사망했다. 우스만은 마린 술탄 아부 야쿱 유수프 앗 나스르가 자신의 적들을 지원하자 그 역시 1288년 반란을 모의하다가 틀렘센으로 망명한 일당에 대한 유수프의 송환 요구를 거절했다. 안달루스를 포기한 유수프는 1296년부터 조금씩 자얀 조를 침공하더니 마침내 1299년 5월 유수프는 틀렘센을 포위,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포위 진영을 도시 알 만수라로 변모시켰다. 알 만수라는 시장, 공공 욕탕, 궁전, 모스크를 지닌 완연한 도시로 발전하였고, 포위의 본부와 동시에 일대를 지나가는 상인들을 불러모아 틀렘센의 경제를 위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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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년에 세워진 알 만수라의 유적

지속적인 봉쇄에도 우스만은 항복을 거부하였고, 알 만수르에서 파견된 마린 군대는 후방인 알제까지 장악하였다. 1304년 6월 포위된 도시에서 우스만이 사망하자 주민들은 항복하려 하였으나, 계승한 아들 아부 자얀 무함마드 1세의 굳은 의지에 저항은 계속되었다. 포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견된 틀렘센의 사자들은 그나라다의 보호 하에 있던 마린 왕공 우스만 이븐 아빌 울라의 반란을 선동하였다. 하지만 틀렘센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여기던 유수프는 후방의 위협을 묵살하고 포위를 이어갔고, 우스만 이븐 아빌 울라의 반란은 모로코 북부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1307년 5월 유수프는 알 마할라 진영에서 하렘의 환관에게 암살되었다. 그의 후계자는 회군하여 반란 진압에 치중하였고, 틀렘센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한편 틀렘센 복구를 위해 노력하던 무함마드 1세는 이듭해 요절했고, 자얀 왕조는 한동안 다시 안정을 누렸다.

모로코 대신 하프스 왕조로 공세를 가하던 자얀 술탄 압둘 라흐만은 1334년 튀니스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자 하프스 조는 마린 술탄 아불 하산 알리에게 지원을 청했고, 그는 1335년 초엽 진군하여 기존에 세워진 병영도시 알 만수르를 재활용하며 틀렘센을 포위했다. 압둘 라흐만은 튀니지에서 돌아와 수비를 이끌었지만, 2년에 걸친 공방전 끝에 틀렘센은 1337년 함락되었다. 이때 압둘 라흐만은 전사하였고, 그의 형제들 역시 처형되면서 자얀 왕조는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기세를 얻은 알리는 도움을 청한 하프스 왕조까지 정복하며 마그레브를 통일한다. 그러던 1348년 튀니지의 반란과 함께 틀렘센 총독이던 왕자 아부 이난 파리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모로코로 돌아가자, 압둘 라흐만의 아들 아부 사이드 우스만 2세와 아부 싸비트가 틀렘센에서 자립하며 10년 만에 자얀 조를 재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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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년에 세워진 엘메슈아르 모스크

다만 파리스 역시 집권한 직후 1352년 틀렘센을 재차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자얀 조는 4년 만에 재차 멸망한다. 다만 1358년 파리스가 암살되고 마린 조가 내전에 돌입하자 압둘 라흐만의 다른 아들 아부 함무 무사 2세가 틀렘센에서 자립하며 자얀 조는 7년 만에 재건되었다. 하지만 이후 무사 2세는 조카 아부 자얀 무함마드 2세와 30년에 걸친 내전에 돌입하였고, 1370년과 1380년대에 두 차례에 걸쳐 무함마드 2세를 대동한 마린 군이 틀렘센에 입성하 그를 옹립하였다. 다만 마린 왕조 역시 종종 내전에 돌입했기에 자얀 왕조는 타국들에 복속할 지언정 다시 멸망하는 일까지 겪지는 않았고, 현지인들도 외세를 배격했기에 틀렘센은 자얀 조의 수도로 남았다. 한편 1420년, 마린 왕조에 어린 술탄이 즉위하는 등 모로코가 혼란에 빠지자 자얀 술탄 아부 말리크는 자신에게 망명해 있던 마린 왕자 무함마드의 청에 따라 출정했다.

1423년, 아부 말리크는 마린 군대를 격파하고 페스를 점령한 후 무함마드를 옹립했다. 이로써 마린 왕조는 알시적으로 자얀 왕조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쳤다. 다만 자얀 왕조의 성장을 염려한 하프스 왕조의 아부 파리스 압델아지즈 2세는 자신에게 망명한 이전 자얀 군주 아부 타슈핀 2세의 아들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4세에 군대를 주어 틀렘센으로 보냈고, 이에 아부 말리크는 페스에서 회군했다. (1424년 4월) 하프스 술탄 아부 파리스는 1425년 말엽에 직접 출정하여 마린 조를 굴복시켰고, 아부 말리크 역시 폐위된 후 아부 파리스에 복속했다. 1428년, 아부 말리크는 하프스 군대의 도움으로 틀렘센을 회복하고 무함마드 4세를 축출했다. 다흐라로 도주한 후자는 군대를 모아 아부 말리크를 재차 패배시키고 1430년 틀렘센을 재점령했으나, 이듬해 아부 파리스가 이끄는 하프스 군에게 패배하고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이후 아부 파리스는 새 군주를 옹립했고, 자얀 조는 15세기 말까지 하프스 조의 속국으로 남았다.

2.2.1. 중부 마그레브 최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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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9년에 세워진 시디 부 메디엔 모스크

3세기간 지속된 자얀 왕조 시기 틀렘센은 페스, 그라나다 등과 함께 이슬람권 서부에서 가장 번영하는 경제 & 문화적 중심지 중 하나였다. 틀렘센은 마그레브 해안로와 사하라 횡단 교역로를 잇는 거점이자 유럽과 아프리카를 이어주는 국제 교역장으로, 서아프리카산 금이 시질마사 혹은 타가자를 거쳐 유럽 상인에게 팔렸다. 따라서 틀렘센에는 제노바 수표가 유통되는 등 종교의 제약 없이 각국의 상인들이 왕래했다.

가장 번영하던 14세기 초엽 기준 도시 인구는 4만에 달했고, 유명한 마드라사들과 종교 시설들을 갖춰 마그레브 중부의 학문적 중심지로 기능했다. 자얀 술탄들은 알제리의 역사상 처음으로 마드라사 건립을 후원했고, 특히 아부 타슈핀 1세가 세룬 타슈피니야 마드라사가 유명했다. 대사원 주변의 시정에서는 동방의 모직물과 카펫, 서아프리카의 금과 노예, 현지 도기 및 가죽 제품, 사략선이 가져온 각종 지중해 물산 등이 거래되었고 푼둑 (여관)에서는 유럽산 수입품도 있었다. 알 막카리 등 틀렘센의 상인 가문들은 교류가 잦은 말리와 수단 등에 지부를 두기도 하였다.

2.3. 16세기의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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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타델인 엘 메슈아르의 성벽

스페인이 여러 시도 끝에 1509년 오랑, 1510년 알제를 점령하자 1틀렘센은 외항을 잃고 위축되었다. 1512년, 자얀 술탄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5세는 스페인 ( 아라곤 왕국)에 복속했다. 그러던 1516년, 오스만 제국에 복속한 해적 오루츠 레이스가 스페인을 몰아내고 알제를 점령하며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알제 수복에 실패한 스페인은 1517년 자얀 술탄에게 오루츠를 공격하라 지시했으나, 그가 나서기도 전에 오루츠가 선제 공격을 가하여 틀렘센을 정악하고 술탄을 처형했다. 오루츠는 스스로 틀렘센의 왕을 칭했고, 스페인령 오랑으로 피신한 자얀 왕공 셰이크 아부 함무 무사 3세는 스페인에 도움을 청했다. 이후 오루츠가 우지다 등지로 영토를 계속 확장하자,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 ( 카를 5세)는 친히 오랑에 당도하여 무사를 위로하고 그와 디에고 데 코르도바 휘하 1만 스페인 병력을 틀렘센으로 파견했다.

도중 수천의 베두인 병력과 합류한 원정군은 100여 km의 행군 끝에 틀렘센 외곽에 당도했고, 오루츠가 이끄는 1천 5백의 해적 및 5천의 무어인 병력과 맞섰다. 2배가 넘는 열세에다 도중 무어인 병력이 이탈했음에도 오루츠는 용감히 싸웠고, 살아남은 20여 해적들과 돌격하여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강을 앞두고 스페인측 추격대가 다가오자, 오루츠는 부하들과 최후까지 장렬히 싸웠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칼이 부러지자 은우로 된 의수를 휘두르고 적을 물어뜯으며 악귀처럼 발악하다가 창에 찔린 부상이 심해져 죽었다 한다. 스페인 병사들은 더운 날씨에 손상을 우려해 오루츠의 수급을 꿀에 넣어 가져갔고, 무사 3세는 스페인의 제후로써 틀렘센에서 자얀 왕조를 재건할 수 있었다. (1518년)

다만 알제에 남아있던 오루츠의 동생 히즈르 ( 하이레딘 레이스)는 오스만 조정의 지원 하에 형의 과업을 이어갔다. 한편 다시 스페인에 복속해 있던 자얀 왕조는 1524년,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6세가 하이레딘의 도움을 받아 즉위하며 오스만 제국에 복속하였다. 그러던 1534년, 스페인령 오랑 총독 알카우데테 백작은 바누 아미르 부족장 압둘라흐만 빈 리드완과 함께 무함마드 6세를 폐하고 그의 동생 압둘라를 옹림하여 틀렘센을 다시 스페인에 복속시키기로 공모했다. 이후 스페인-아미르 군이 남하하자 여러 부족들이 호응했다. 하지만 스페인 군은 앗 티브다 요새에서 바누 라시드 부족 및 자얀 조의 재상 만수르 빈 가니에개 포위 및 섬멸되었다. 6백의 스페인 병사 중 70명의 포로 외에는 전부 전사한 대패였다.

이렇듯 오스만 제국의 비호를 받은 무함마드 6세였지만, 그 입김이 강해지자 그는 점차 스페인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론이 분노했고, 1542년 하이레딘의 부관이자 임시 알제 총독 하산 아가가 개입하여 아부 자얀 아흐마드 4세를 새 술탄으로 추대했다. 그러자 오랑으로 도주한 무함마드 6세는 알 카우데테 백작에게 복속하며 도움을 청했고, 이에 또다시 스페인 군이 출정하자 교황은 십자군을 선포했다. 1543년, 스페인측 도움으로 무함마드 6세는 복위했지만 이듬해 재차 주민들과 하산 아가에 의해 축출되거 아흐마드 4세가 복귀했다. 이후 아흐마드 4세는 유대인 대신 아브라함의 조언에 따라 종교재판을 피해 안달루스를 떠난 무슬림 및 유대인 난민들을 적극 수용했다. 아브라함은 사재를 털어 그들을 지원했고, 상당수가 틀렘센에 정착했다.

1545년, 하이레딘의 은퇴 후 알제 총독이 된 그의 아들 하산 파샤는 아흐마드 4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막 모로코를 통일한 사드 왕조는 기존의 와타스 왕조를 지원한 오스만 제국에 반감이 있었다. 이에 1550년, 사드 술탄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아들 무함마드 알 하룬을 파견해 그해 6월 틀렘센을 점령하고 아흐마드 4세를 죽이며 자얀 왕조를 실질적으로 멸망시켰다. 다만 곧 시질마사에서 반란이 터지고, 무함마드 알 하룬은 틀렘센에서 병사하자 하산 파샤는 1551년 2월 틀렘센을 점령했다. 이후 자얀 왕가의 물라이 하산이 왕으로 옹립되지만 1554년, 일시적으로 페스를 함락하며 복수에 성공한 알제 총독 살리흐 레이스에게 폐위되며 완전히 자얀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여 오스만령 알제리에 병합된다. 물라이 하산은 오랑에 망명하여 1556년에 병사한다.

2.4. 오스만 제국령 알제리

오스만 제국 하에서 틀렘센은 16세기 중반 ~ 19세기 초까지 기나긴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 다만 (1671년부터는 사실상 독립한) 오스만령 알제리의 중심지는 이미 알제로 고정되었고 서부 알제리의 치소도 마스카라로 대체되었기에 틀렘센은 점차 소외되었다. 한번은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오스만 당국은 반란 거점이던 엘 메슈아르 궁전의 일부를 파괴했다. 그러다 1708-32년에 이어 1790년, 오랑이 수복되며 틀렘센의 경제는 점차 나아졌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를 점령하고 점차 내륙으로 진출하며 틀렘센은 재차 전장이 되었다. 1832년, 프랑스 군이 도시를 점령했으나 1836년 압델카데르가 이끄는 저항군이 탈환하였다. 이후 멀지 않은 마스카라가 중심이 된 마스카라 토후국에 속하던 틀렘센은 1839년, 스페인이 재차 공세에 나서자 모로코 측의 지원을 받는 창구로써 압델 카데르를 도왔다. 압델카데르는 약 4년간 틀렘센의 엘 메슈아르 궁전에 머물렀다. 하지만 1841년 마스카라가 함락된 후 1842년 틀렘센 역시 프랑스 군에게 점령되었고, 결국 압델카데르는 모로코로 망명했다가 프랑스에 항복한다.

2.5. 근현대

프랑스의 식민 지배기에 틀렘센은 선선한 기후 덕에 피서 도시로 개발되었고, 유럽풍 건물들이 세워졌으며 철도가 놓였다. 다만 1876년 타슈피니야 마드라사가 파괴되고 엘 메슈아르 시타델과 궁전은 각각 병영과 군병원으로 개조되는 등의 구도심 훼손도 있었다. 한편 틀렘센 외곽의 유대인 묘지는 연간 1만여명이 찾는 순례지였다. 5천에 달하던 유대인 공동체는 프랑스 군에 입대하는 등 식민지 경영에 적극 참여했다. 다만 세계 유대 연맹의 지원으로 설립된 유대 학교는 1934년 파시즘이 퍼지며 폐교되었다.

1943년 1월, 횃불 작전의 일환으로 연합군이 기습하여 독일군을 몰아내고 틀렘센을 장악했다. 미군은 이탈리아 전선으로 떠나기 전에 틀렘센에 2개의 병원을 세웠다. 틀렘센은 해안 도시들과 달리 독립 운동 기류가 거의 없었다. 1962년 알제리 독립 후 대부분의 유럽계, 유대계 주민들은 프랑스로 떠났다. 2008년부터 알제리 정부는 엘 메슈아르의 군부대를 철수시키고 자얀 왕궁을 복원했다. 또한 2009년, 알제리 정부는 훼손 및 방치된 유대인 묘지의 정비에 나섰다.


[1] 틀렘센은 바다에서 40km 가량 떨어져 있다. [혹은] 교차로란 뜻인 탈람 +-산으로, 두 교차로란 뜻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