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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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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도시의 건설2.2. 도시의 번영2.3. 스페인의 점령2.4. 스페인 치하2.5. 오스만 지배 (1708 - 1732)2.6. 스페인 지배 시즌 22.7. 오스만 지배 (1790 - 1831)2.8. 프랑스의 지배2.9. 알제리 제2의 도시
3. 교통4. 대중문화에서


아랍어 وهران (Wahrān)
베르베르어 ⵡⴰⵀⵔⴻⵏ (wahren)
프랑스어/ 영어 Oran

1. 개요

알제리 서북부의 도시로, 인구는 약 90만 명이다. 광역권 인구는 150만으로, 수도 알제에 이은 제2의 도시이며 지중해를 접하고 있는 요충지이다. 도시 명은 베르베르어로 '두 사자' 라는 뜻이다. 이 지역에 서기 900년경까지 바르바리사자가 서식했는데, 마지막 두마리가 사냥되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을 기리는 것이라고 한다. 알제리 서부의 중심지로, 수도 알제 및 동부의 중심인 콩스탕틴과 함께 3대 중심지를 이룬다. 주변 도시로는 서남쪽 100km의 틀렘센, 동남쪽 60km의 마스카라, 동쪽 50km의 모스타가넴 등이 있다. 도시 서남쪽 100km의 시가지 남쪽 외곽 호숫가에 오랑 아메드 벤 벨라 국제공항이 위치한다. 그 전에는 더 남쪽에 있는 타프라위 공항이 활용되었다. 2022년 제19회 지중해 게임을 개최하였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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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크루즈 성채와 시가지

2.1. 도시의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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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인 메디나와 카스바 일대

도시는 903년에 알 안달루스에서 온 이주자들이 건설하였다. 이후 파티마 왕조 의 지배 기간인 944년에 도시가 다시 세워졌다. 오랑은 지리 왕조를 거쳐 1082년부터 무라비트 왕조, 1145년부터 무와히드 왕조 의 통치를 받았다. 도시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1147년부터 박해를 받았다.

2.2. 도시의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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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레이스 지도의 오랑과 모스타가넴. 왼편이 오랑이다.

1238년부터 오랑은 틀렘센 왕국 ( 자얀 왕조), 마린 왕조의 지배 하에서 무역의 거점으로 번영을 누렸다. 현재 시내에 남아있는 사원이나 유적도 이때 (13, 14세기) 의 것이 많다. 역사가 이븐 칼둔은 오랑을 불행한 자의 천국이라고 저술하며, 빈자가 도시 성벽을 통과하면 다시 나올 때에는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2.3. 스페인의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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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엘 케비르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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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년 스페인의 오랑 점령

1501년, 포르투갈이 오랑을 점령하려다 실패하였고, 이에 자극을 받은 에스파냐는 1504년에 오랑의 서쪽 4km 즈음에 위치한 작은 항구인 메레스 엘 케비르를 점령하고 이를 기반으로 오랑 공격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여러 시도 끝에, 1509년 5월 17일에 도시는 스페인 군대에게 함락되었고, 이때에 도서관에 불이 나서 오랑의 번영과 중세 마그레브에 대한 정보를 담은 수많은 저서들이 소실되었다.

2.4. 스페인 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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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크루즈 성채

1554년, 오스만 군대가 알제에 이르자, 오랑의 스페인 총독은 모로코의 사드 왕조와 연합하여 도시를 지켜내었다. 1563년에는 산타크루즈 요새가 도시 뒷산에 지어졌고, 1568년에는 스페인 해군이 알제리 해군을 격파, 알제리 인들의 탈환 시도를 무마시켰다. 그리고 1669년, 도시의 유대인들이 오스만 제국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스페인 인 총독에 의해 추방되었다. 스페인 치하에서도 도시 인구는 꾸준히 늘어, 도시 성벽이 두 번 이상 확장되기도 하였다.

2.5. 오스만 지배 (1708 - 1732)

1707년에는 모로코를 통일한 알라위 왕조의 이스마일 이븐 샤리프가 오랑을 공성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을 치르던 스페인으로서는 인근 이슬람 세력의 지속적인 공격은 부담이었다.

이 틈을 노린 오스만의 알제 총독 무스타파 벤 유수프는 손쉽게 스페인 군대를 철수시키고 오랑을 접수하였다. (1708년) 이로써 오랑은 정확히 199년 만에 무슬림이 다스리게 되었다.

2.6. 스페인 지배 시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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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2년,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후 내부를 정비한 스페인은 다시 원정대를 파견하여 오랑을 재점령 하였다. 그러나 1790년 10월 8일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7분여 만에 3천 명이 넘는 사망자가 속출하자,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국왕 카를로스 4세는 재정 소모를 감당하기 힘들어진 오랑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오스만 령 알제리의 베이 (총독) 과 교섭을 시작한다. 1792년 9월 12일에 양측은 협의에 이르렀으나, 지진이 다시 한번 도시를 덮쳐 성벽이 무너졌다. 이 틈을 탄 오스만 군대는 10월 9일에 오랑에 입성하였다. 본래 마스카라를 중심으로 두던 알제 총독령 하의 서부 베이국은 오랑으로 천도하였다.

2.7. 오스만 지배 (1790 - 1831)

오랑의 베이 무함마드 베이는 시내에 유대인 거주지를 복원시키고 스페인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한 대가로 챙긴 몸값으로 1796년에 파샤 모스크를 지었다. 오스만 지배 하에서 오랑의 인구는 1만여명 정도로 추산된다. (대지진 + 스페인 인들이 떠난 영향)

2.8. 프랑스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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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알제가 함락되자 오랑은 알제 총독령의 임시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14일 프랑스 군대가 오랑을 포위했고, 결국 이듬해 1월 4일에 함락되었다. 1832년에 압델 카데르가 이끄는 알제리 군대가 오랑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오랑은 그 후 130여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알제리 전쟁 후 1962년에 알제리의 도시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현재의 시가지는 프랑스 지배기에 대부분 형성되었다. 1962년 7월 5일부터 7일까지 오랑 학살이 벌어졌다. 프랑스계 거주민들에 대한 보복 학살인데 3일 동안 450~1,500여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제리는 인정하지 않고 있고 프랑스도 알제리에서 프랑스인과 프랑스군이 벌인 학살이 다시 거론될까 염려해 쉬쉬하고 있다.

2.9. 알제리 제2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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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오랑은 인구 120만을 자랑하는, 알제에 이은 알제리 제2의 도시이다.

3. 교통

오랑 아메드 벤 벨라 국제공항이 있다.

4. 대중문화에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가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오랑 시내에 역병이 창궐하면서 도시가 봉쇄되고 패닉에 빠지게 된 이야기를 다뤘다. 이 소설에서는 알제리 아랍인들을 철저하게 비중 없는 엑스트라로만 취급한다. 남아공을 다룬 소설에서 흑인을 엑스트라로만 다룬 소설들이 매장당한 것처럼, 해당 소설도 오랑 시민들 사이에서는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1]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 오랑이라는 도시가 세계에 알려졌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해 페스트가 재조명되자, 카뮈를 잊고 지우려고 애쓰던 알제리에서도 이 책이 좀 읽힌 모양이다. 적지 않은 알제리인들이 프랑스에서 일하기 때문에 교류가 없을 수가 없고, 오랑이라는 도시가 주목받을 일은 이 책밖에 없기 때문에, 카뮈 사후 60년 만에 페스트의 무대였던 이곳에서도 그 책이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알제리출신 DJ, Randall의 'Wahran'은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음악이다. 알제리와 이슬람권 전통 악기와 곡조에 현대적인 비트가 조화를 이룬 일렉트로닉 뮤직이다.


[1] 다만 그 당시 오랑의 인구 과반이 백인이었다는 것과 프랑스인들은 알제리를 프랑스의 한 지방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감안해야 한다.